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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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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19일 09시 00분 등록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세계문학사에 ‘보르헤시안(Borgesian) 문학’이란 하나의 세계를 만든 소설가입니다. 그는 높은 산과 같은 인물입니다. 보르헤스 전문가 김홍근 선생은 <보르헤스 문학 전기>에서 보르헤스의 문학세계는 “세계문학사라는 큰 산맥 중에서 깊은 골과 가파른 능선과 전인미답의 오지(奧地)와 고독한 정상을 가진 늠름한 산봉우리”라고 말합니다. 봉우리가 높으면 골짜기가 깊은 법입니다. 문학세계가 그렇고 삶이 또한 그렇습니다. 보르헤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의 환상적인 단편소설만큼 그의 삶도 드라마틱합니다. 사실 나는 그의 환상적인 작품보다 그의 삶에 마음이 더 갑니다. 그 중에서도 불우한 시절에 눈길이 머뭅니다.

 

나는 보르헤스의 굴곡진 삶 한 가운데 움푹 파인 시립도서관의 말단 사서로 일한 시기에 주목합니다. 1937년부터 1946년까지 9년간입니다. 서른여덟 살의 보르헤스는 시립도서관 임시직 사서로 들어가서 책을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맡습니다. 도서관은 규모에 비해 직원이 상당히 많아서 할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에 “모두 50여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15명이면 적당한 일거리였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그는 열심히 일 하지만 동료들로부터 그렇게 일하면 왕따를 당하게 될 거라는 경고를 듣습니다. 한 사람이 많은 일을 하면 다른 사람의 자리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게 따돌림의 이유였습니다. 또 그는 도서관에 다양한 서적을 구비하자고 제안하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아 다시 한 번 실망합니다. 적당히 일하고 크게 잘못되지 않으면 고치지 않는 것이 도서관의 문화였습니다. 월급은 적고, 몇 권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낸 보르헤스의 지적 호기심과 문학적 열망을 나눌 수 있는 동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르헤스에 관한 책을 쓴 이들은 도서관 사서로 보낸 9년을 불행한 시기로 봅니다만 나의 관점은 조금 다릅니다. 보르헤스는 막막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냅니다. 도서관 동료들과 어울리기를 포기하여 외톨이가 되고, 남아도는 업무 시간 동안 책을 보기로 한 것입니다. 이 시기의 그의 하루하루는 비슷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할 때 타는 전차 안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오전에 그 날의 작업량을 채우고, 오후에는 지하서고로 내려가 홀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활동은 현실의 압박에 질식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기는 보르헤스다운 작품의 탄생을 위한 부화기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많은 책을 읽고 관심 있는 작가들의 글을 번역하고 단편소설을 습작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복권>, <원형의 폐허> 등의 소설을 구상하고,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와 <바벨의 도서관>, 그리고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같은 대표작들을 쓴 것도 이때입니다. 특히 지하서고의 체험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바벨의 도서관>을 쓰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을 묶어 1944년 첫 단편소설집 <픽션들>을 출간했습니다.

 

‘보르헤스의 지하서고 시절’에 마음이 간 이유는, 내가 보낸 지난 4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보르헤스의 이야기와 나의 체험 사이에 오버랩 되는 부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쩌면 공감 보다는 투사(投射)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투사는 에너지가 큽니다. 자각할 수만 있다면 그 에너지의 방향을 바꿔 나의 연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의 이야기가 내게 위로로만 다가오지 않고 강한 자극이기도 한 이유입니다. 나의 하루를 돌아봅니다. 그 정도로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합니다.

 

나는 보르헤스에게 배웠습니다. 삶을 옥죄는 현실의 딱딱한 껍질을 깨기 위해서는 일상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야 함을. 니체가 말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너 위대함에 이르는 너의 길을 가고 있구나. 산정(山頂)과 심연(深淵)은 이제 하나가 되었구나.” 보르헤스는 니체의 주장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자기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산정과 심연이 하나임을 믿어야 함을, 심연에서 산정을 보고 산정에서 심연의 깨달음을 되새겨야 함을 보르헤스에게 배웠습니다. 심연이 산정으로 가는 길이고, 산정에서 심연으로 내려오는 길, 서로 너무나 다르게 보이는 두 길이 사실은 같은 길임을, 그 길을 여러 번 걸어야 함을 또한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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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근 저, 보르헤스 문학 전기, 솔, 2005년

 

* 안내1 : 인문학 아카데미 12월 강좌 ‘책, 글쓰기, 그리고 인생’ by 김학원

변화경영연구소의 오프라인 까페 ‘크리에이티브 살롱 9에서 ‘인문학 아카데미’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12월 강좌는 ‘책, 글쓰기, 그리고 인생’을 주제로 휴머니스트출판사 대표 김학원 선생이 진행합니다. 커리큘럼과 장소 등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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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2 : 유재경 연구원 첫 책 <그만둬도 괜찮아> 출간

변화경영연구소의 유재경 연구원의 첫 책 <그만둬도 괜찮아>가 출간 되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만둘까 버텨볼까 고민하는 여자에게’입니다. 저자를 알고 그녀가 걸어온 길을 봤기에 믿고 추천할 수 있는 책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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