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이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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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눈이 왔다. 창 밖 저수지와 공원 잔디는 눈으로 덮였다. 꼬마 녀석들은 뚝방길 아래 완만한 경사지를 플라스틱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며 마냥 즐거워한다. 아빠가 끄는 썰매를 타고 평탄한 공원길을 도는 한 녀석은 속도가 느리다 투덜거리며 더 빨리 달리라고 재촉을
한다. 산책을 나온 강아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정신 없이 눈 위를 휘 젖고 달린다. 일상의 겨울 풍경이다. 1 년 전의 겨울 모습과 달라진 것은 없건
만 그것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혹독히 추웠던 지난 겨울이 생각이 난다.
X –Mas를 며칠 앞둔 작년
12월 어느 날, 인사 담당 임원으로부터 갑작스런 권고 사직을 받았다. 최고 경영진의 결정이라며 누구나 다 아는 ‘은밀한 거래’를 제시하며 그만 나가 달라고 했다. 구차하게 항변하고 사정하고 싶지
않아 그날 바로 20년 넘게 다닌 회사를 나왔다. 회사에
더 이상 사용가치가 없고 그 조직에 부담스런 존재가 된다면 나가는 것이 도리라고 늘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료나
후배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쫓기듯이 나왔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후회 없이 직장생활을 했으니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20대, 30대 젊음과 열정을 바친 회사였다. 후배들의 박수를 받으며 명예롭게 나가고 싶었는데 내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 이후에 퇴사하는 임직원도 마찬가지였다고 들었다. 최소한 몇 주전, 아니 며칠 전 통보는 고사하고, 새로운 직업을 구할 수 있도록 일정
부분 도움을 주는 배려도 없어 서운함이 들었다. 고용계약 해지에 따른 수당이나 위로금도 기대 이하였다. 한때는 따뜻한 인정이 넘치는 기업 문화였는데 언제부턴가 삭막하고 살벌하게 변했다. 물론 회사는 고용계약에 따라 사용자의 의무와 책임만 지면 되었다. 하지만
한창 교육비가 많이 들어가는 고등학생, 대학생 자녀를 둔 가장 입장에서 회사를 나가라는 냉혹한 처사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게 쫓기듯 나가는 직장 선배들을 바라보는 후배들에게 선배들은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까?
한때 30대 중반에 새로운 도전을 위해 10년 동안 다니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싱가포르의 한 선박 중개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직원이 70여명이나 되는 제법 큰 해운 중개업체였다. 회사는 철저한 성과주의로 정량적 평가를 중시했다. 능력의 한계로
회사에 더 이상 수익을 가져다 줄 수 없어 3년의 계약기간을 육 개월 남기고 스스로 퇴사 의사를 밝혔다. 사장은 이직할 회사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보장된 계약기간 동안 실적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근무해 달라고 했다. 회사에 공헌할 부분이 없어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다. 결국, 사장은 내 의사를 받아들이면서 근무와 상관없이 잔여 계약기간의 월급을 지급해 주었다. 그리고 그 동안 노고에 감사하다며 값비싼 시계를 선물로 주었다. 동료와
직원들한테 작별의 인사를 했고 그들로부터 정성이 남긴 작은 선물을 받았다. 지금도 그 사장과 직원들의 따뜻한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한국에 들어와 운 좋게 첫 직장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몸
담았던 싱가포르 회사와의 거래가 많아졌음은 물론이다. 만약에 그만둘 때 냉혹하게 비인간적으로 대했더라면
그 회사와의 관계는 소원해 졌을 것이다. 만남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헤어지는 가도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최고 경영자나 임원이 되기에 깜냥이 안 되는 사람을 더러 본다. 실적이
저조하거나 손실이 나면 책임지고 타개책을 마련하기 보다는 팀장이나 실무 담당을 몰아 붙인다. 업무 추진
중에 분규가 생기면 주도적으로 해결할 의지보다는 부하직원이나 남에게 떠 넘기기 바쁘다. 일을 하다 실수하면
용납하지 못하고 심한 질책과 함께 인사상 불이익을 준다. 업무 능력보다는 사내 정치력을 발휘해 승진을
한다. 혹자는 그것도 실력이라고 한다. 최고 실세에 붙어
감언으로 사다리를 타는 사람은 부하 직원도 그런 유형을 좋아한다. 알아서 척척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기를
원한다. 귀빈처럼 대우를 받는 의전의 ‘맛’을 알아 온갖 거드름을 피운다. 회사가 존립을 위협하는 유동성 위기에
직면해도 리더로서 특단의 처방은 내리지 않고 은행의 처분만 기다린다. 해외 현장에 답이 있다며 날아가지만
일은 뒷전이고 여흥에 마음이 가있다. 외국어 몇 마디 나불거리지만 정작 원어민과 상담을 하면 곧 한계를
드러낸다. 인품과 덕을 갖추지 못한 리더는 회사나 직원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지난 겨울의 혹독함을 견뎌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회사
재직 중에 나의 처신에는 문제가 없었는지? 부하 직원을 편애하지는 않았는지? 인사 고과는 공정하게 했는지? 사소한 실수에 과민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는지? 너무 원리 원칙을 내세워 유연적 사고가 결여되지는 않았는지?
‘갑’의 입장을 이용해 ‘을’을 무시하고 당혹스럽게 하지는 않았는지? 등등. 생각해 보면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 춥고 길었던 지난 겨울을 지나 이제는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찾아가고 있다. 다시 새로운 출발선상에 서있다. 앞으로 어떤 곡선을 그리며 삶과
인생이 변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하는 것이 때로는 의미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늘 명심하는 것이 있다. 순간의 삶의 소중함을 느끼며 일을
할 수 있음에, 그리고 하찮고 사소한 것들에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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