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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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K로군요. ]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편집장의 목소리에서 즐거움과 설렘, 예를 다한 정중함이 느껴졌다. 무엇인가 슬펐다. 저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어떤 천재는 저런 대접을 받아왔겠지. 하이젠베르크가 보어가 슈뢰딩거가 채드윅이 아인슈타인이…! 나로서는 평생 느껴보지 못했을 것일진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후 몇 번의 전화가 더 왔다. 한 번은 국제물리학회장이, 다른 한 번은 H 대학 학장의 전화였고 모두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이었다. 믿을 수 없었고 경악스러웠다. 식은땀이 흘렀다.
악몽을 꾸었다. 개였고 검은 도베르만이었다. 배경은 배트맨의 고담 시처럼 검은 안개로 어두웠고 지난 밤의 비가 지나간 거리처럼 젖어 있었다. 개꿈이다. 개꿈. 개의 껍질은 두려운 윤기가 흘렀고 눈은 짐승의 것으로 멍청한 채였다. 눈은 점점 깊어지고 찢어지더니 지적인 것이 되었다. 저것은 사람의 눈이다! 선의와 악의를 읽을 수는 없는. 꿰뚫는 눈은 개의 침묵을 다른 언어로 만들었다. 개는 짖지 않았다. 먹이를 노리는 개는 사냥감 앞에서 짖지 않습니다. 뜬금없는 유명 동물 다큐 나레이터의 목소리가 공중에서 들렸다. 정말 안짖어? 짖어, 짖어 보라고! 보이지 않는 철도다리 위로 육중한 철덩어리가 지나갔다. 덜컹 덜컹 덜컹 소리는 점점 커졌고 기다리던 도플러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덜컹 덜컹 덜컹…!!! 컹컹! 컹컹! 컹컹! 바로 그 때, 젖은 길바닥에 비친 개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에 눈이 달려 있었다. 악마는 개의 발바닥에 거꾸로 매달린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헬로우 - ]
전화벨 소리였다. 짖지 않는 개소리의 정체가 나를 깨웠다. 몇 번의 외국 전화를 통해 게다가 새벽시간의 전화라 나는 발신자 확인도 없이 헬로우라고 대답했다. 전화 건너편의 상대는 그 사실이 상당히 아니꼬운 모양이었다.
[K냐? ]
[어.]
A였다.
[어디야?]
[아… 뭐야. 너 지금 몇 신데 지금 전화해?]
나는 그를 윽박질렀지만 내심 기뻤다. 소식을 들은 모양이군. 이제 내가 천재의 반열에 올랐다는 걸 네 녀석도 알게 되었구나. 나는 리처드 파인만을 생각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결정 소식을 전하는 새벽녘의 전화. ‘나중에 전화해도 되었잖소.’ 나는 파인만의 초연함을 극도로 부러워하였다. 그래. 그렇지만 뭐, 네 녀석의 축하 인사라면 그리 화내지 않고 받아주지.
[자냐? ]
A가 물었다. 당연히 이 시간에는 자는 게 맞지 미친 놈아.
[지금 잠이 오냐? ]
A가 다시 물었고 뉘앙스가 묘했다. 나는 판단을 못해 침묵하였다. A는 나의 대답을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이 전화는 통보를 위한 것이었다.
[지금 대학으로 와. ]
[지금? ]
나는 바보같이 되물었다.
[문제가 생겼으니까, 얼른 대학으로 오라고. ]
[…문제라니? ]
이상했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문제라는 말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A는 혹시 아직 그 역사적 논문의 저자가 나인 것을 모르는 것일까? 하지만 논문 사건이 아니라면 나를 굳이 새벽 시간에 대학으로 불러낼 이변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수화기 건너편의 A는 불길한 한숨을 연신 내쉬었다. 나를 감정적으로 압박하려는 듯.
[잘 알텐데. 무슨 문젠지. ]
[… … ]
[지금 과학관 B동으로 와. 모두들 와 있으니까. ]
A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 종료 화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듯한 저 태도. 나는 요리사를 떠올렸다. 어서 그와 상의를 해야 한다. 전화기에서 그의 이름을 찾는 동안 살얼음들이 배바닥에 침전했다.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요리사의 번호를 받은 적이 없다. 심지어 나는 그 남자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요리사가 나에게 보낸 메일을 떠올리고 스마트폰으로 답장을 보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과학관 몇몇 실험실에는 아직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건물 둘을 잇는 공중 통로를 바라보았다. 학생 강의실동과 교수동을 잇는 통로였다. 저 길을 통과하기가 성경의 좁은 문보다 어려웠다. 건물 사이로 저기압이 형성되어 귀신 소리 같은 샛바람이 불었다. 나는 옷깃을 좁혀 입었다. 과학관 B동의 소회의실 사이로 백색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모두들 모여있다고 했던가? 그 모두란 도대체 누구들이지? 별안간 현기증이 일었다. 설마 깜짝 파티 따위를 준비해둔 건 아니겠지? 연구실 사람들과 그런 유치한 장난질을 할 기분은 전혀 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람들은 강연자석 가까운 테이블에 모여서 무엇인가를 함께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인기척을 확인하고 한 명씩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들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에서 그 문제는 진짜 문제이고 너는 이제 해명을 해야 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학생들 사이로 지도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결국 모임의 주체는 교수였다. 역시… 이런 장악력은 교수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 그들은 침묵했다. 악질적 고요였다. A가 나에게 다가왔다.
A는 참으로 멋진 청년이었다. 태어나 단 한번도 물들이지 않았을 법한 정갈한 머리, 다려 입은 치노 바지, 그리고 결코 푸르게 변하지 않는 매끈한 턱선. 그는 로얄젤리를 먹는 종족이었다. 태어나기를 학자로 태어나 학자로 죽을 운명의 원형! A는 팔이 닿는 위치 바로 전까지 다가온 후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알고 있는 비누 냄새가 났고 나는 공황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가 말했다.
“왔네?”
“네가 오라매. 자초지종도 없이 갑자…”
“너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너 이번에 물리학회지에 논문 냈어?”
“그래.”
역시 이 문제였다. 그런데 도대체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너 표절했니?”
“뭐?”
A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솔직히 바른 말을 하자면, 네가 이런 논문을 낼 수준은 아니잖아? 어디서 갑자기 이런 아이디어가 나와?”
나는 눈알을 굴렸다. 지나치게 직설적이었고, 지나치게 사실이었다.
“기가 막히는군.”
“지도 교수님이 준비하고 있던 논문을 네가 도용한 거라고 결론 났어. 곧 윤리위원회에 회부될거야.”
A는 윤리위원회라는 말을 참 쉽게 했다. 마치 A+B=C를 말하듯이. 혀가 굳어갔다. 무엇이라도 말해야 했다.
“…그럴리가 없잖아. 교수님은 이런 주제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고 오히려 반대의 주장을 해왔잖아.”
“몰래 준비 중이셨다잖아! 중요한 아이디어는 대학원생에게도 말하지 않는 법이야.”
이제 A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저런 극적인 감정 표현을 할 줄 아는 놈인 줄 미쳐 몰랐군. A를 시기하면서도 그를 존경해왔던 마음에 균열이 생겼다. 나는 A의 등 너머로 노 지도 교수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나이가 40 중반에 불과하면서 머리가 반백이었다. 교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지그시 눈을 감고 45도 위의 천장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치 말세를 체감하는 수도자처럼. 이게 정말일까? 그렇다면 그 천재인 척 하던 요리사는 결국 내 지도 교수의 논문을 베껴온 사람에 불과한가? 어쩌면, 그 편이 더욱 현실적이긴 하겠지. A는 어두워지는 내 얼굴의 표정 변화를 끈덕지게 관찰하였다. 괴로웠다.
“오전에 긴급 학장 회의가 있어. 방송사들 기자회견도 있고. 그 전에 상황 정리를 명확하게 하자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깔끔하게 인정하자구.”
“입 조심해.”
“뭐?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나는 흥분한 A의 멱살을 잡을까 생각했으나 그럴 용기까진 나지 않았다. 나는 눈을 뿌리까지 깊게 감았다가 떴다.
“이제 위아래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게 될 테니 말이야. 논문이라는 것이 무어냐? 설티피케이션(certification) 때문에 쓰는 거 아냐? 정말로 먼저 생각했다면 논문으로 증명을 했어야지. 훔쳤다고 의심된다면 그걸 증명하는 것도 교수님 몫이야. 이렇게 새벽녘에 불러내서 비겁하게 협박이나 할 것이 아니라…”
“너 완전 단단히 미친 놈이었구나? 아주 스라소니 자식을 키워왔어.”
“A! 도대체 왜 네가 난리야? 할 말 있으면 교수님이 직접 하시라고 해.”
“그만하게 K군!”
교수가 멀리서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할 말은 다한 상태였으므로 딱히 무엇을 그만해야 할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내 생각은 그러하였다. 일단 뻔뻔하고 보자. 내게 논문의 아이디어를 알려준 요리사가 천재가 아니라 사기꾼일 가능성이 커진 것이 실망스럽긴 했지만, 저 지도 교수도 믿을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에라이 씨, 될대로 되라지.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해봤자 윤리위원회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학문계에서 매장이 된다?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그럼 동네에서 세탁소나 하든지 며칠 전에 유예한 죽음을 집행하면 그만이다. 내 목덜미의 낙인은 말 그대로 피도 안말랐다. 그런데, 이게 죽을 만큼 잘못된 일인가?
교수는 두꺼운 무테 안경을 역시 두꺼운 엄지로 스윽 한 번 올리곤 책상 위에 널부러진 A4 뭉치들을 정리하는 척 했다. 곱사등이처럼 굽은 등이 의기소침해 보였다. 교수의 부속기 마냥 매달린 학생들은 그를 돕는 둥 마는 둥하며 곁에 서있었다. 그들은 위기를 맞이한 스승과 새롭게 탄생한 탕아에게 어떤 대접을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했다. 교수는 퇴장했다. 회의실의 앞 문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천천히 교수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남자의 그림자처럼 큰 키가 익숙한 이질감을 만들어냈다. 요리사였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조커 같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요리사와 함께 과학관을 나오자 새벽별이 떠 있었다. 하늘은 소라색이 되었다. 새벽 공기를 폐로 들이키자 파릿한 돌가루 맛이 났다.
“왜 왔어?”
“도와달랬잖아. 메일로.”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너한테 GPS를 장착해뒀어.”
“이 사기꾼 자식아, 너 그 논문은 우리 교수의 것을 베낀 거였니?”
“이 봐.”
요리사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전에 없이 부드러웠다.
“사실 나도 다 듣고 있었는데 말야… 오늘 그 떠벌이 학생은 큰 실수를 했어. 그 자가 네가 말한 A라는 놈이겠지?”
“무슨 소리야.”
“그 지도교수는 단지 네 논문에 자기 이름이 빠진 게 섭섭했던 거야. 네가 자기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A가 그런 식으로 떠벌려놨으니 교수는 막다른 골목에 빠졌어.”
“그래서?”
“그래서 아침밥이나 먹자고. 내가 요리를 해줄게.”
“요리?”
“그럼. 나는 세계 최고의 요리사지.”
요리사는 차키를 딸깍 눌렀다. 본관 앞에 주차된 차량이 눈을 떴다.
“저게 네 차라고?”
검은 페라리였다.
“저것도 훔친 거니?”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
요리사는 이제 좀 화가 난 듯 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
“무슨 소리야.”
“글쎄? 무슨 소릴까? 미스터 키드니씨?”
남자는 웃었다. 어쩐지 쓸쓸한 미소였다.
“명심해 둬. 너 도망가면, 난 끝까지 좇아간다.”
남자의 말에 나는 페라리를 쳐다보았다(과연 잘도 그럴테지…). 따지고 보면 이 요리사란 놈이야 말로 내 인생 최대의 위험인자다. 누군가에 의해 죽는다면 최소한 살인자가 누군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너 이름이 뭐지?”
내 질문에 요리사가 말했다.
“나는 L이야.”
L의 집은 강북의 부촌에 있었다.
담벼락이 족히 10m는 넘어 집의 외향은 가려졌다. 차고지 문이 열리고 안으로 진입하자 두 대의 차량이 더 있었다.
“차를 좋아하나보네?”
나는 연두색 람보르기니를 알아보고 L에게 말했다.
“아니 뭐 그다지. 다 필요해서 산거야.”
L은 내가 받은 감명과 충격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 람보르기니가 필요하지 않은 남자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정말로 사야 했다면, 그건 도주용이겠지. 그러나 이런 고가의 차량은 전국에서 몇 대 밖에 팔리지 않았을 거고, 그러면 추적도 쉬울 테고, 하지만 이런 걸 살 사람들이라면 엄청난 부호들일테니 굳이 추적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고...
‘생각보다 빠르지 않더라고… 튜닝도 해봤지만. 게다가 한국에선 달릴 수 있는 도로가 없어.’ L이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이 따위의 언급을 하기에 나는 ‘나 사실, 페라리 처음 타봐 우아!’ 따위의 리액션을 취하기가 애매했다. 나선형 돌계단을 오르자 유리문이 나타났다. L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지문 인식을 하자 문이 열렸다. 들어서자 바닥은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한쪽 벽면에서는 물소리가 났다. 인공 폭포였다. 집 앞은 전면 유리였다. 앞뜰의 정원은 거대하고 웅장했다. 집이 좋네.
“실내에 폭포라니 대단하네!”
“도청이 있을 시 잡음을 만들기에 유리하지.”
“... ...”
“전 주인이 설치해 둔 거야. 나쁘지 않아. 가습도 되고.”
L은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가 벗어 놓은 얇고 긴 검은 무스탕이 거실 쇼파에 아무렇게나 걸쳐 있었다. 갈회색벽이 가로로 조금 열렸고 그 틈으로 불길이 타올랐다. 안도 다다오의 느낌의 벽난로였다. 벽난로 위 선반에는 여러 개의 두상이 일렬로 전시되어 있고 정 가운데 위로 거대한 숫사슴의 머리가 매달렸다. 굉장한 뿔이었다.
“좀 쉬도록 해. 금방 만들어줄 테니.”
L이 구석에서 소리쳤다. 복도를 울리는 소리로 봐서 상당히 큰 공간이었다. 나는 외쳤다.
“집이 멋지네! 여기 거실의 장식물들 말야, 진짜 진짜같다.”
진짜 진짜라니… 진짜 진짜는 긍정의 긍정이니 긍정?
“박제 말이야?”
L이 부엌에서 외쳤다. ‘아니 사슴머리 말고 저기 두상들 말이야.’ 라고 이야기 하려던 순간, 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짜 진짜 같은 것이 진짜가 아닌 것이 아니라 진짜일 수도 있는가? 나는 아홉 개의 두상들을 다시 쳐다보았다. 조금씩 다가가면서 나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나는 시선을 끌었던 세 번째 두상으로 다가갔다. 아름다운 20대 여성이었다. 조각의 피부는 오일은 바른 듯 빛에 반사되어 광채가 났다. 어쩌면 정교하게 석고를 떴거나 매우 비싼 밀랍 인형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너무 지나치다. 모공이 보였다.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립글로즈가 툭툭 떨어질 듯 탐스러운 입술 위로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가져갔다. 육감적인 탄력이 손끝으로 전해지자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녀의 진주빛 앞니가 슬쩍 보였다.
“뭐해?”
어느 새 L은 뒤에 와 있었다. 한 손에 에비앙 생수를 들고 흥미로운 눈초리로 나를 관찰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방금까지 두상을 향했던 시선을 감추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차마 L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이코패스가 말했다.
“어떤 맛인지 궁금하지 않아?”
이 여자가 어떤 맛인지 궁금하지 않냐고?
“전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약간의 비음이 섞여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젠장. L은 실망한 눈치였다.
“그래? 내가 일부러 널 위한 요리를 하는 중인데 기대 좀 해주지 그래?”
“아아…”
“설마 저 여자의 맛을 물어보는 줄 알았어?”
“… …”
L은 웃었다.
“맛있었어. 겉과 속, 모든 게 다 맛있었지.”
“아아, 그만하자 제발.”
“하긴, 넌 그 ‘아름다운’ S라는 여자만을 원하지.”
나는 마지막 호기로 L을 노려보았다. 저 자식이 혹시라도 아름다운 S를 원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어쩐지 L이 그녀의 신장을 먹는 상상보다 L과 아름다운 S가 한 침대에 있는 것이 더욱 견디기 힘들 것 같다. 괜한 상상을 해버렸다.
“에피타이저로 샐러드를 해줄게. 따라 와.”
L의 부엌은 과연 요리사의 것 답게 크고 아름다웠다. 넓은 식당 가운데 유선형 배 모양의 큰 원목 식탁이 있고 함선의 끝에는 음식을 다듬을 수 있는 싱크가 붙어 있었다. 나는 식탁 가운데에 앉아 L이 채소를 다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질문했다.
“아버지는 뭐하시는 분이니?”
“죽었어.”
L은 칼집에서 칼 하나를 챙 소리나게 빼들었다. 양파를 써는 솜씨가 남다르다. 정말 요리사인가?
“어머니는?”
“아직 살아있어.”
L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눈으로 나를 흘끗 보곤 빌트 인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냈다. 마침 육질 좋은 놈이 들어왔지. 이건 그냥 먹어도 맛있어. 그냥? L은 웃었다. 샐러드 용으로 약간. 물론 조금 간을 할거야. L은 소스를 버무린 후 샐러드볼에서 상추를 덜어 내 앞에 놓았다. 방금 썬 양파들은 후라이팬에서 미리 썰어둔 토마토와 함께 튀겼다. 중화요리처럼 팬을 몇 번 공중에서 흔든 후 불을 끄자 바로 오븐에서 알람 소리가 울렸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오븐을 열자 알싸한 허브향과 고기 소스 냄새가 풍겼다. 입에 침이 고였다.
“그게 뭐냐, 라따 뚜이?”
“쥐 요리는 아니니 걱정 말고 먹어 봐.”
“차라리 쥐였으면 좋겠다.”
“윤리라는 것에 강박적일 필요 없어. 친구. 사람이나 소나 돼지나 죽기 싫은 건 매 한가지야. 음식이 나무에 달린 통조림은 아니잖아? 우린 이미 죄인이야. 날 때부터 죄인이지.”
나는 L의 종교가 참으로 맘 편한 종교라 생각하며 포크를 들었다. 육즙을 음미하면서 소인지 돼지인지 제3의 고기인지를 분간하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기엔, 오- 대단한 맛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이 파르르 감겼다. 오 갓 - ! 이런 음식을 만들기 위해 내 신장을 갖고 싶단 말이지? 굉장한 압박감을 느꼈다.
“어때?”
L은 기대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싱겁네.”
L은 내 말에 팔꿈치를 괴고 있던 식탁에서 몸을 뒤로 뺐다. “싱겁다고?”
“응.... 좀 비리고... 그리고,”
“그리고?”
“음... 영혼이 없어... 작품에 대한 혼이 깃들어 있질 않네. 역시 기본기가 부족해. 기본을 잘 연마하고 난 다음에야 자신의 정신을 음식에 담을 수도 있는 거지 지금 이건 그냥 뭐랄까? 그래, 그냥 아마추어리즘이지. 열정만 넘치는! 하지만 기술이 예술이 되려면 말이야. 그러러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거야, 하수들이나 재료탓을 하는 거라니깐?”
“.... ...”
“넌 좀 더 연습해야겠다. 많이! ...아무튼... 이 참에 육류 요리는 소질이 없는 것 같으니 채식주의 식단에 도전해 보는 건 어때?”
L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하얀 소금통을 들어 내 앞에 쾅! 그야말로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이봐 친구. 난 오늘 네 신장을 빼거나 하지 않을 거야. 오늘은 그저 너한테 밥 한끼를 먹이려던 의도밖에 없었다고.”
“... ...”
“솔직히, 맛있지 않아?”
“그래... 이 고기가 사람 고기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말이야.”
L은 별안간 매우 기뻐했다.
“걱정하지 마, 그건 소혀야.”
“... ...”
...사람 고기보다 약간 낫긴 했다.
“그거 알아? 줄곧 생각해 왔거든. 정말 맛있는 신장 요리에 대해서. 난 사실 농장이 있어. 소하고 돼지를 키우고 있고... 작은 밭도 있지. 그곳에서 재료들을 직송해 오는 거야. 그리고... 너도 있지.”
“...날 그리 생각해주니 참 고맙네.”
“당연하잖아? 녹차 먹인 소라든가... 모차르트를 들은 돼지라든가... 재료의 품질 개선을 위한 노력은 위대한 요리사에겐 필수적이야. 그래서 난 네가 잘 먹는 모습만 봐도 정말 기뻐.”
“... ...”
어쩐지 소, 돼지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앞으로 네 요리는 내가 봐주도록 하지. 어때,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아?”
“저기 거실에 장식된 머리들은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서둘러 대화 주제를 바꿨다. L은 들떠서 일설하던 찰나에 뜻밖의 주제를 만나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아, 그건... 음... 이를테면 자린고비 같은 거야.”
“뭐라고?”
“천정에 매달아 놓은 굴비 같은 거라고... 매일 사람 고기를 먹을 수는 없으니까.”
“... ...!”
“궁금하지 않아? 어떤 맛일지? 너도 원한다면 네 신장을 조금 맛보게 해줄게.”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기자 회견장인가 보군.”
아까 새벽녘의 상황도 있고 해서 화풀이겸 통화 거부를 누르자 계속 다양한 번호의 전화와 문자가 쏟아졌다.
“받아보지 그래?”
“다 쓸데없는 전화들이야.”
“너, 그 ‘아름다운’ S의 전화를 기다리는 거지?”
“... ...”
L의 말에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는데...’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막상 내 무의식이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오자 그런 것도 같아서 잠자코 있었다. 어쩌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기자 회견 장에 아름다운 S가 나와 준다면 정말 멋질 거라는 생각도 드는데...
“데려다줄게.”
L이 말했다.
과학관 앞에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어색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본관 앞에는 상당한 숫자의 차들이 각종 방송사의 이름을 걸고 주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검은 페라리가 건물 앞으로 들어서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검은 바바리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자가 페라리로 다가왔다. 그녀는 태닝한 차 안을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았다. ‘K 박사님이세요?’ 이를 지켜 보던 다른 사람들이 인디언 파일링을 이루며 본관 계단에서 우르르 내려와 차량을 둘러쌌다. 플래쉬가 터지기 시작했다.
페라리에 흠이라도 가는 것 아닐까? 사람들이 유리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L은 차 시트에 몸을 붙인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왠지 아련해 보였는데 확실히 유쾌한 쪽에 가까웠다.
“난 이래서 한국이 좋아. 리액션이 끝내 준다니까.”
“학문 숭배주의 때문이지. 아무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고맙다.”
L이 나를 바라보았다.
“뭐가?”
“내 말은... 페라리 말이야.”
물론 논문이 주된 고마움이지만, 그건 내가 반대쪽 신장으로 치를 값이었고, 페라리를 타고 기자 회견장에 등장하는 건 열외의 서비스니까. 나는 벌써부터 신문 1면 장식을 기대했다. 페라리의 남자! L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아아아 – 그래, 언제든지.’ 라고 말해주었다.
드디어 입장할 시간이었다.
차문에서 내리자 멀리서 뛰어오는 학장님과 지도 교수의 모습이 마침 보였다. 지도 교수는 나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이제야 오는가? 기다렸다네! 자넨 나의 자랑스러운 제자야!”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띈 채 껄껄 웃었다. 정말로 엄청난 소셜 스마일이다! 나의 심란한 얼굴 표정을 읽었는지 지도 교수는 나와 악수한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다른 손을 보태면서... 그것은 기도하는 손이었다. 나 좀 살려달라는. 학장님과 지도 교수는 나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여 기자들 틈을 헤쳐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새벽 나절 내내 나를 협박하던 A는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S도 없었다. 왕좌에 나는 홀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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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9 | [No.8-4] 이제 우리는 현재를 기획하자 - 서은경 [2] | 서은경 | 2013.12.30 | 2054 |
3848 | 12월 오프수업 - 현실경영 [1] | 제이와이 | 2013.12.30 | 1962 |
3847 |
12월 오프수업-현실경영(2013.12.28) ![]() | 미스테리 | 2013.12.30 | 2027 |
3846 | 12월 수업 _ 유형선 [2] | 유형선 | 2013.12.29 | 1912 |
3845 | #31. 1인 기업의 전략 (12월 오프수업) [1] | 쭌영 | 2013.12.29 | 1910 |
3844 | MeStory(2) : 여행을 하나 기획해 보라 | 타오 한정화 | 2013.12.27 | 2098 |
3843 | MeStory (1) : 신부님, 저는 오늘 열여섯살이 되었습니다 | 타오 한정화 | 2013.12.27 | 2068 |
3842 | 키드니 6 | 레몬 | 2013.12.26 | 2291 |
3841 | 2-34. 아구병 걸린 에릭직톤의 딸 [1] | 콩두 | 2013.12.24 | 2762 |
3840 | #19_새알은 안 사? | 서연 | 2013.12.24 | 2573 |
3839 | [No.9-1]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 서은경 [1] | 서은경 | 2013.12.23 | 2154 |
3838 |
No34. 반가사유상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 | 미스테리 | 2013.12.23 | 6034 |
3837 | 텅 빈 충만 [2] | 유형선 | 2013.12.23 | 2077 |
3836 | 편안함을 경계하며 [1] | 제이와이 | 2013.12.23 | 2167 |
3835 | #29. 어차피 인간관계 아닌가 [1] | 땟쑤나무 | 2013.12.23 | 2348 |
3834 |
#30. 감독님, 저 지금 잘하고 있는건가요? ![]() | 쭌영 | 2013.12.22 | 2122 |
» | 키드니 5 | 레몬 | 2013.12.22 | 2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