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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3일 01시 04분 등록

구스피릿 29번째 북리뷰

강의(신영복, 돌배게)”

 

1. 저자소개

신영복(申榮福) - (): 위경(葦經), 소당(紹堂), 우이(牛耳), 쇠귀

1941년 경남 밀양 출생

1963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숙명여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1988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1989년 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

2006 8월 정년퇴임

 현재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석좌교수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2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8년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수감 중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을 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것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출소 후,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를 역임하였고 2006년말에 정년 퇴임하였다. 퇴임 당시 소주 포장에 들어가는 붓글씨를 그려주고 받은 1억원을 모두 성공회대학교에 기부하였다.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나눔과 소통을 하고 있다

육군 교관으로 장교였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된 후 충격을 받고 ',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마침내, 그 고뇌와 사색은 20년내내 이어져 완전히 '인간성이 개조'되는 내적 자기혁명을 이루어 낸다. 신영복은 교장의 아들로 성장하여 민중의 삶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남다른 애착은 없었다. 그런데 감옥에서는 밑바닥을 살아온 기층민중과 24시간을 맨살을 부대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을 통해 자신이 지식청년으로서 가지고 있던 창백한 엘리트주의적 관념성과 '먹물성'을 통절히 비판하고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된다. 감옥에서의 삶은 서로가 알몸으로 부대끼며 가식없이 숨김없이 사는 탓에, 한방에서 오래 살다보니 서로의 과거와 생각을 공유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번은 목수출신이 집을 그릴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책이나 이론으로 배운 세계가 현실과 완전히 다를 수있다는 생각에 그간의 인식틀을 깨부순 것이다. 무엇보다 10여년간 교도소에서 노동을 하면서 목공, 영선, 제화공, 재단사등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며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인간 개조론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특히, 감옥에서의 비전향 장기수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관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지 않을 수없었다. 막연하게 책에서나 보아온 분단과 전쟁의 피투성이 현대사의 이야기를 직접 이를 경험한 빨치산과 투사들을 통해 생생히 들음으로써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화석'처럼, 살아있는 역사체험을 한다. 또한, 한학자 출신의 사상장기수로부터 동양고전과 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서구사상에 매몰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자존을 깨닫고 고전학습에 몰입한 나머지 이후 성공회대에서 동양철학도 강의할 수 있게 된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다. 이도 감옥에서 여러 장기수 선생으로부터 지도받은 결과라 한다. 한문 서체로 익힌 필법은 한글에도 응용해 민중 정서에 맞게 민체, 연대체, 어깨동무체라는 글씨체를 창안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감옥 20년의 삶이 완전히 인생을 바꾼 진정한'나의 대학시절'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의 동무들은 그가 출소하자 ', 너 하나도 안 변했네'라고 감탄했다 한다. 그의 삶의 철학과 신념은 변함없이 "더불어 숲"을 이루는 것이었기에.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엽서(1993년)

•나무야 나무야 (1996년)

•더불어 숲 1 (1998 6월)

•더불어 숲 2 (1998 7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 8월)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 4월)

•신영복의 엽서 (2003 12월)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 12월)

•처음처럼: 신영복 서화 에세이 (2007 1월)

•청구회 추억: Memories of Chung-Gu Hoe (2008 7월)

For the First Time: 처음처럼(영문판) (2008 8)

•신영복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2010 12)

•변방을 찾아서 (2012 5)

 

「역서」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년)

•사람아 아!사람아(1991년)

•루쉰전(1992년)

•중국역대시가선집(1994년)

 

[ 출처 ] 

1)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EC%8B%A0%EC%98%81%EB%B3%B5

2) 더불어 숲(신영복선생님 홈페이지)         http://www.shinyoungbok.pe.kr/

3) 한겨레 21 칼럼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6/05/021075000200605110609056.html

4) 한길사 '사회와 사상 제 15' : 대담/인터뷰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 만에 가석방된 신영복씨 - 월간 '사회와 사상' 1989 11월 통권 제15

http://www.shinyoungbok.pe.kr/index.php?mid=writings&document_srl=147&sort_index=title&order_type=desc

 

*** 신영복선생님의 홈페이지 더불어 숲에는 그의 저서 전권이 오픈되어 있다. 온라인을 통해서 그의 책과 그와 관련된 대부분의 인터뷰를 만나볼 수 있다 ***

 

< 저자 인터뷰에서의 인상적인 글귀 >

- "모든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버리지는 않아요. 바깥에 나가면 뭘하고 어떻게 될 거라는 환상까지 포함한 희망을 여전히 갖고 살지요. 나의 경우 오랜 세월 여기 살아야 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나간다는 희망 그것보다 여기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배운다는 사실이 훨씬 더 자신을 지탱하는 데 큰 희망이 되어주었습니다. 공장에서 전혀 새로운 사람들과 같이 작업을 한다든가 뜨거운 인간관계를 만든다든가, 스스로의 관념적인 껍질을 하나하나 벗어나는 체험을 하면서 그날그날 살아간다는 것은 아득한 희망에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생동감 있게 스스로를 견뎌내게 했습니다."

- 나는 관념적이든 창백했든간에 지식인의 사고를 갖고 있다가 전혀 인연이 없던 재소자들의 사회, 우리 사회 밑바닥의 소외된 동네에서 20년이란 세월을 살았던 것인데, 이 기간 동안 제가 의도적으로 시도했던 것은 자기개조 자기변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이들과 더불어 어울리면서 나의 관념성을 척결하고 뜨거운 현실성과 구체성을 획득해보겠다는 노력을 의식적로 했는데, 20년을 그 속에서 있다가 나와서 만나본 옛날 친구들은 그 외형은 많이 변했지만 그 사고의 유형이라 할까 의식구조는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았어요. 사람이 참 달라지기 어렵다, 자기 자신을 변혁시키고 개조해나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걸 느꼈습니다. 나의 경우를 투사해보아도 마찬가집니다. 징역들어가기 전과 징역살다 나온 이후 나는 과연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결국 개인을 단위로 하거나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인간의 변혁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를 어느 동네, 누구의 이웃에, 어떤 문제 속에 자기를 세우는가에 따라 그 변혁은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고 완성된다는 겁니다. 한 개인의 변혁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2. 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

1. 서론

유년 시절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층의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16)

우리의 대학 시절은 60년대는 참으로 절망적이었습니다. 내가 59학번이거든요. 휴전 협정이 53년에 체결되었지요. ……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만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마저 허락하지 않는 불행한 문화였습니다.(16)

요즈음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생을 받습니다.(17)

내가 이런 듯.

나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감옥에서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 때문이기도 했습니다.(18)

나의 동양고전 공부에 빼놓을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감옥에서 함께 고생하셨던 노촌 이구영 선생님입니다. 노촌 선생님은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분입니다.(18)

5천 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전승되어 내려오는 문명이 세계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 고대 문헌은 마치 현대 문헌처럼 친숙하게 읽히고 있습니다. 전승과 해독에 있어서 세계 유일의 문헌입니다. 그 규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지요.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20)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21)

이 시기는 흔히 축의 시대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의 백화제방 시대입니다.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대한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임은 물론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22)

⇒ 춘추전국시대나 현재사회나 크게 다르지 않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목표가 되고 있는 무한 경쟁 체제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

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4)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24)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지요.(25)

진정한 공존의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29)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29)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합니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합니다. 서양 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구조이며 이처럼 조화된 구조가 바로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30)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30)

이를 테면 패권주의적 질주는 자기 목표를 부단히  허물어버리는 모순 운동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32)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32)

그러나 최근의 동양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 신대륙에 대한 콜럼버스의 관심입니다.(33)

모든 관점은 일정하게 당파성을 띱니다.(33)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베버의 체계에는 동양 사상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관계론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란느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36)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37)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37)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38)

장이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자력장, 중력장, 전자장과 같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체계이며 질서입니다. 장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서로 조화 통일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화 통일됨으로써 장이 되고 그래서 최고의 어떤 질서가 됩니다. ‘관계들의 총화입니다. (38)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의 순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39)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9)

봄여름에는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지 않고 촘촘한 그물로 하천에서 고기를 잡지 않는”[맹자] 것이지요.(40)

동양적 가치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초월적 존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하는 그런 구조 입니다.(41)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42)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중용이 그것입니다.(43)

노장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 입니다. (44)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45)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47)

 

2. 오래된 시와 언

동양이란 개념 자체가 서양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51)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에 주목합니다. [시경]의 국풍 부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52_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57)

사무사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58)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62)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62)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65)

자기의 개인적 세계를 열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자기의 좁은 체험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지요.(65)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70)

군자는 무일 無逸 (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70)

한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 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인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72)

주공은 공자가 며칠 간 꿈에 보지 못해서 아쉬워하던 바로 그 사람이지요. 은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의 동생이 바로 주공입니다. 주공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중국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됩니다.(72)

어느 왕조이건 개국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혁명사에 해당하는 것이지요.(72)

주공은 일반삼토, 일목삼착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것이지요.(74)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방법은 겸손, 배려, 이해.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74)

중국 고대의 제왕 계보는 황제-전욱-제곡---()-(,)---주공으로 이어집니다.(74)

레닌은[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75)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75)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75)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76)

일상 속의 스트레스가 지속되고, 가중되고, 불편함이 없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훌쩍 떠나고 싶다거나, 로또가 되어서 편안하게 살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약간의 불편함과 긴장감은 우리의 삶을 쫀득쫀득하게 만들어주는 필요조건이다. 불편함과 긴장김이 없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늘어질대로 늘어지고 삶의 의욕을 잃기 쉽지 않을까? 목표의식이 사람이 나아가게 해주듯 불편함을 우리의 몸과 마음을 긴장하게 하고 이로 인해 삶의 활력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정신사는 어느 시대에나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모색해가게 마련입니다. (77)

농본사회에 있어서 노인의 존재는 그 마을에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77)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77)

[초사]는 한나라 유향이 굴원, 송옥 등의 작품을 모아 펴낸 책을 말합니다.(78)

[시경]이 사실적이고 노동과 삶과 보행의 정서로 이루어진 시 세계임에 비하여 [초사]의 세계는 자유분방, 정열, 상상력, 신비, 환상 등 낭만적이고 서정적입니다.(78)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떤 다음 갓을 쓰는 법이며,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던 다음 옷을 입는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을지언정 깨끗한 몸을 더럽힐까 보냐고 자신의 고고함을 선언합니다. 비타협적 기개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81)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82)

이상과 현실, 이론과 실천의 그 미묘한 간극. 간극을 어느 정도까지 좁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 아닐까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3. [주역]의 관계론

[주역]은 대단히 방대하고 난해합니다.(87)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라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87)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87)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 그러나, ‘하면 된다는 부류의 의기 방자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88)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89)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 , 점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 수상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버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판단에 관한 것입니다.(89)

중국의 역사를 사상사저긴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구분합니다. 공자 이전 2500년과 공자 이후 2500년이지요. (90)

텍스트로서의 경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지혜라고 하였지요. 유구한 삶의 역사적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미신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91)

미래의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92)

괘는 걸다라는 뜻입니다. 걸어놓고 본다는 뜻이지요. 괘에다가 어떤 의미를 담아놓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93)

[주역]의 독법에서 가장 먼저 설명해야 하는 것이 위 입니다. 자리입니다. 어떤 효의 길흉화복을 판단할 때 그 효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효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보고 판단합니다.(100)

어쨌든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 () 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101)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가 건물에 눌립니다.(101)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립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 듯한 집이 좋다고 하지요.(101)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101)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102)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103)

위가 효와 그 효가 처한 자리의 관계를 보는 것임에 비하여 응은 효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104)

(주역에서) 개별적 존재와 역할은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망 속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되고 사후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106)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 사상가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107)

혁명은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태화의 근본임에 틀림없습니다. 혁명은 한 사회의 억압구조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억압당한 역량을 해방하고 재갈 물린 목소리를 열어줍니다.그것은 한 사회의 잠재적인 역량을 해방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혁명은 흔히 혼란과 파괴의 대명사로 통합니다.(110)

띠풀을 뽑듯이 함께 가야 길하다.(111)

띠풀은 잔디나 고구마처럼 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풀입니다. 한 포기를 뽑으려 하면 연결되어 있는 줄기가 함께 뽑힙니다. 모든 시작은 여럿이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국가의 창건이든, 회사 설립이든, 또는 전위 조직의 건설이든 많은 사람들의 중의를 결집해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가 부모형제와 함께 인생을 시작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111)

멀리 있는 사람도 포용하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는 사람도 포용하고, 멀리하거나 버리지 않으며 붕당이 없으면 중도를 행함에 짝을 얻으리라.(112)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113)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이것은 천지의 법칙이다(113)

천지의 법칙, 즉 천지의 운행 법칙이라는 의미로 풀이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춘하추동이 반복됩니다. 인간의 화복도 대체로 반복됩니다. (114)

천지비괘는 좋지 않는 괘의 예로 듭니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형상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모양입니다. 하지만 비색, 즉 소통되지 않고 막혀 있는 상태로 풀이합니다. 천지폐색의 괘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올라가고 땅의 기운은 내려가기 때문에 천지가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117)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119)

그러나 태괘와 비괘의 내용을 검토하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즉 태괘의 전반부는 매우 순조롭고 상승적인 반면에 후반부는 쇠락의 국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비괘는 전반부가 간난의 국면임에 비하여 후반부가 오히려 순조롭고 상승 국면을 보여줍니다.(120)

[주역]은 이처럼 어떤 괘를 그 괘만으로 규정하는 법이 없고 또 어떤 괘를 불변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관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120)

(박괘는) 64괘 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괘입니다. ….. 세상이 온통 악으로 넘치고 단 한 개의 양효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한 개의 양효마저 언제 음효로 전락할지 알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붕괴 직전의 상황입니다.(121)

이 박괘는 흔히 혼돈 세상에서 사상적 순결성과 지조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어려운 때일수록 현명한 판단과 의지가  요구된다는 윤리적  차원에서 읽힙니다.(123)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24)

⇒ 사람없이, 사랑없이, 희망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크고작음과 상관없이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며 살고 있다. 작게는 의식주와 같은 본능적인 욕구에 대해 희망한다. 조금 더 편한 생활을 희망하고 조금 더 즐거운 주말을 희망하고, 조금 더 편안한 상태를 희망하고 조금 더 나은 사회를 희망하고 조금 더 나은 삶을 희망한다.

가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의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25)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128)

태백산 줄기를 흘러내린 물이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 만나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서해로 흘러드는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엇을  완성하려 바람 서리 견디며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128)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128)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129)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129)

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129)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129)

역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132)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논어]는 여러분이 잘 안고 있는 공자어록입니다. (137)

[노자]에는 노자라는 인간이 보이지 않지만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도처에 드러나 있습니다. (137)

이 시기(춘추전국시대)는 사회에 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활발하게 개진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회 경제사적 성격을 이해하고 [논어]를 읽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138)

첫째, 춘추 전국시대는  철기의 발명으로 특징지어지는 기원선 5세기 제2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 농업 생산력의 증대는 수공업, 상업의 발달로 이어집니다. 여불위 같은 대상인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적 가치가 붕괴되고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시기입니다.(138)

둘째,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구 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입니다. 천자-제후-대부--서인이라고 하는 사회의 위계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입니다…… 천자의 토지 소유권이 제후와 대부에게 넘어가는 , 토지 소유권의 하이현상이 광범하게 일어납니다. 이러한 변화는 주 왕실의 물적 토대의 약화로 이어집니다….. 제후와 대부가 그 세력이 강성해지고 중앙정부로부터 독립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렇게 등장한 수십 개의 도시 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다시 전국시대에는 다시 7국으로, 드디어 진나라로 통일되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139)

셋째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의 백화제방의 시기 입니다. ….. 패권 경쟁을 위한 정치기구의 확충과 전문적 지식에 대한 요구가 커짐에 따라 정신 노동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140)

사회 경제적 배경은 사상사의 이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상도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140)

그러나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141)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을. 먼 곳에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142)

노예제 사회에서는 학습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수기는 물론이며 치인도 학습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학습이 갖는 의미는 거의 없습니다. 학습에 대한 언급이 [논어] 첫 구절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 변동기임을 짐작케 하는 것입니다. (142)

우리가 논어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이처럼 사회 변동기에 광범하게 제기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담론입니다.(145)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145)

흔히 시간이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가는, 그야말로 물과 같다는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시간을 객관적 실재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둘째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148)

물질의 존재 형식인 시간이 실체로 등장하고 그 실체는 현재와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며, 그것도 미래로부터 다가온다는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허구이다.(148)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된 형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149)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150)

여기서 그릇 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뜻입니다.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 된다는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150)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 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지요…….. 크게는 산업 자본과 금융자본으로 작게는 다각적 경영, 문어발 확장이 그런 것이지요……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152)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는 전문성 담론이 바로 2천 년 전의 노예계급의 그것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반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논어]의 이 구절을 신자유주의적 자본 논리의 비인간적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로 읽는 것이 바로 오늘의 독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152)

子曰 : 자왈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 무치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도지이덕 제지이예 유치차격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정령(政令)으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기지런히 하면, 백성들이 면하기만할 뿐이요 부끄러움이 없다.

행정명령으로 백성을 이끌어가려고 하거나 형벌로써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한다면 백성들은 그러한 규제를 간섭과 외압으로 인식하고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처벌받지 않으려고 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닐 부정을 저지르거나 처벌을 받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153)

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4)

부끄러움에 관한 것.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으로 다스리면 형별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155)

타인의 부정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단계가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것이지요. (156)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158)

는 글자 그대로 자와 자의 會意 입니다. 양이 큰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양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생활의 물질적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고기는 먹고, 그 털과 가죽은 입고 신고, 그 기름은 연료로 사용하고, 그 뼈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 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159)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160)

일반적 의미에서 개념은 차이를 규정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됩니다. 소위 독특 獨特 의 의미는 그 독특한 의미를 읽는 것과 동시에 그와 다른 것을 함께 읽기 때문에 그것이  독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161)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 역시 결과적으로 타자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161)

논어의 이 화동론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의미입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162)

군자화이부동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할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163)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163)

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165)

우리는 통일론을 동의 논리가 아닌 화의 논리로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입니다.(165)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166)

마음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168)

정치란 경제, 군사,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이다.” 이 구절은 정치란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며 백성들의 신뢰가 경제나 국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천명한 구절이다.(170)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 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171)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입니다.(172)

이란 애인 愛人 이다.” “ 란 지인 知人 이다.”(172)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대상물과는 달리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175)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176)

우리가 선진 자본주의를 국가적 목표로 하여 매진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의 그 어두운 역사는 드러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모든 침략과 수탈까지도 합리화되고 미화되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지요.(178)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181)

대동은 멀고 소이는 가깝지요.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쉽지요. 따라서 사회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학과 사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합니다. (182)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184)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다. 그 지혜로움은 (많은 사람들이) 따를 수 있지만 그 어리석음은 (감히) 따를 수 없다.(185)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87)

제갈공명의 명석한 판단은 무사 無私 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하를 도모하려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음은 물론, ‘윗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심마저도 없었지요. 이처럼 무사하기 때문에 공평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 수 있는 법입니다.(188)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하는 이유입니다.(189)

만인으로부터 호감을 받는 경우와 만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 둘 다 좋지 않다는 것이지요. 양극단은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위선 또는 위악인 경우에만 상정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192)

상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리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상품미학은 광고카피처럼 문, 즉 형식이 승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197)

우리가 맺고 있는 인관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198)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199)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이고 인자는 정적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201)

인자는 한마디로 세상의 무궁한 관계망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지자는 개별적인 사물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202)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207)

 

5. 맹자의 의

맹자의 생몰 연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자 사후 약 100년경인 기원전 372년에 태어났다고 하며, 향년 74세에서 84, 94, 97세 등 여러 설이 많으나 사전에 확실한 기록이 없습니다. 공자가 춘추시대 사람이라면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입니다.(211)

전국시대는 수많은 나라가 결국 전국칠웅으로 압축되고 드디어 진나라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는 과정을 밟습니다. 음모와 하극상이 다반사였으며 배신과 야합이 그치지 않은 난세의 전형이었습니다. 군주는 사방에서 정치 이론에 통달한 학자를 초빙하여 국가 경영에 관한 고견을 듣는 것이 상례화되어 조정은 일종의 사교장이었습니다.(212)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 이 맹자에 의해서 의 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212)

[논어]가 선어와 같은 함축적인 글임에 비하여 [맹자]는 주장과 논리가 정연한 논설문입니다.(213)

어진자로서 자기의 부모를 저버린 자가 없고, 의로운 자로서 그 임금을 무시한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하실 일이 어찌 이 를 말씀하십니까(214)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 테면 민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입니다.(217)

현자라야 즐길 수 있다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219)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이것은 내 탓이 아니라 흉년 탓이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 이는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이 칼이 죽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222)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 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 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 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 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 四肢 가 있는 것과 같다.(225)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맹자의 성선설은 다분히 윤리적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지요.(227)

사실 나는 사회 원리로서는 측은지심보다는 수오지심이 더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측은지심은 인간 이해와 관련된 정서라 할 수 있고 수오지심 즉 부끄러움은 인간관계 즉 사회 문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228)

⇒ 수오지심 : 자기 마음이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마음이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화살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여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불인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만 화살 만드는 사람은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할까 봐 걱정한다…….. 그러므로 기술의 선택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230)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232)

반구제기는 우리는,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233)

(소를 양으로 바꾸어라 의 에피소드에서)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안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의미합니다.(237)

⇒ 불쌍한 것에 대해 드는 마음이 측은지심인데 눈에 보이는 것에만 측은지심을 갖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런 마음을 가지면 천하와 모든 백성을 대하는 바른 왕의 마음이라할 수 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리 없는 것이지요.(237)

⇒ 불인인지심 : 남의 불행을 차마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는 마음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237)

나는 엇비슷이 두 사람 걸치기를 하는 법이 없습니다.(239)

태무심으로 있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지요.(239)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239)

(고대 노예제 사회에 비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의 인간관계는 외견상으로 볼 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매우 광범하게 열려 있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데 있지요. (240)

일회적 화폐 관계가 전면화되고 있는 인간관계는 사실상 인간관계가 황폐화된 상태이며, 인간관계가 소멸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타자화되어 있는 상태이며 불인인지심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지요.(241)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242)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242)

일월이 모든 틈새를 다 비춘다는 것은 한 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245)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 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245)

맹자 당시에 진에서는 법가인 상앙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책을 실시하였고, 초와 위에서는 오기를 등용하여 전쟁으로 적국의 땅을 빼앗았으며, 제의 위왕과 선왕ㅇ은 병가인 손자와 전기를 등용하는 등, 당시는 합종연횡의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면서 오로지 전생을 능사로 여기는 그야말로 전국시대였습니다. (246)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을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249)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250)

 

6. 노자와 도와 자연

진정한 연대란 다름 아닌 노자의 물입니다. 하방 연대입니다. 낮은 곳으로 지향하는 연대 입니다. 노동,교육,농민,환경,의료,시민 등 각 부문 운동이 각자의 존재성을 키우려는 존재론적 의지 대신에 보다 약하고 뒤처진 부문과 연대해 나가는 하방 연대 방식이 역량의 진정한 결집 방법이라고 생각하지요. 중소 기업, 하청 기업, 비정규직, 여성, 해고자, 농민, 빈민 등 노자의 물처럼 늦은 곳을 지향하는 연대여야 하는 것이지요. 하방 연대에는 보다 진보적인 역량이 덜 진보적인 역량과 연대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덜 진보적인 역량은 더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연대 담론에 있어서 노자의 생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믿습니다.(250)

이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라도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269)

미와 선은 지역이나 시대에 갇혀 있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미와 선의 그러한 특성을 한마디로 인위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274)

어려움과 수월함, 긺과 짦음, 노래와 소리, 앞과 뒤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 간의 차이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못됩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인위적인 개입이며 불필요한차이의 생산이라는 것이지요. (275)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수많은 화()를 생산하고 그 화에 대한 욕구를 극대화합니다. CF 광고나 쇼윈도 앞에서 무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순간순간 구매 욕구를 억제해야 하는, 흡사 전쟁을 치르는 심정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부단한 갈증에 목마른 상태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 상품 생산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라고 해야 합니다. (280)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무위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82)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284)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이며, 또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87)

나는 이 장이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로서 읽히기를 바랍니다. 한 개의 상품의 있음()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293)

 

7. 장자의 소요

고기는 이를 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307)

생산성, 경쟁력, 효율성이라는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장자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양적 가치는인성(人性)의 고양입니다.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가 아닙니다. 도의 깨달음과 도의 체득 그리고 합일입니다. 물론 현대의 동양에서는 이미 이러한 가치와 정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양의 근대화란 곧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현대의 특징입니다. 기계에 대한 장자의 주장은 근대성에 대한 반성적 의미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30)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혀와 색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과 성일 뿐이다. (338)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이라거나, 사회적 의미가 박약하다거나, 실천적 의미가 제거되어 있다는 비판은장자를 잘못 읽거나 좁게 읽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343)

9만 리 장공을 날고 있는 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장주와 나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345)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346)

"지혜란 무엇인가?"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은 궤를 훔칠 때 통째로 둘러메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352)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묵가는 중국 사상사에서 이론가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패권적 질서와 지배 계층의 사상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 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층 민중의 이상을 처음으로 제시하였습니다. 투철한 신념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대중 속에서 설교하고 검소한 모범을 보였으며, 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묵자가 죽은 후에도 200여 년 동안 여전히 세력을 떨쳤지만 그 후 2천 년이라는 긴 망각의 시대를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묵가는 좌파 사상과 좌파 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 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보여준 역설적인 선두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356)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382)

'묵자' '비공'편은 전쟁 일반에 대한 잘못된 의식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들의 허위허식을 반성케 한다는 점에서 대단한 현재성을 갖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383)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 (386)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388)

자본주의 체제하의 생산과 소비 수준은 한마디로 사람들의 삶을 기준으로 하야 그 규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나는 사실 거리마다 즐비한 그 많은 음식점이 불황을 겪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식을 해야 할지 걱정됩니다. 마찬가지로 10개의 월드컵 경기장을 계속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경기를 벌여야 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장해야 할지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사람들의 소용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생산 규모를 유지하려고 하는 정도라면 차라리 큰 문제는 아니지요.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부단히 그 규모를 확대해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하 것이기보다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 운동의 일환일 뿐입니다. (390)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구조를 어떻게 짜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요.(391)

우리의 사유는 사실판단의 기초 위에서 가치판단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실판단의 기초가 되는 지각과 경험이 없으면 그 주장이 망상에 빠지게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가치판단이 없는 지각과 경험만으로는 사실을 일컬을 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392)

묵자 사상의 근본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393)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인간 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정통적 천인 도덕천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는 종교적인 천, 인격적인 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순자의 탁론 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유가의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정통 유가와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순자의 천론이고, 순자가 이단인 이유가 바로 천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과 인은 서로 감응하지 않는 별개의 존재입니다. 천은 자연이며 음양일 뿐입니다. 천은 천명, 천성, 천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순자의 주장입니다.(401)

순자의 예는 법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를 법가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지요. 법가 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재상 이사가 순자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이지요. (405)

순자는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천명합니다. 천이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408)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413)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순자는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 철학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417)

()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함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툼이 일어나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혼란하게 되면 사회가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옛 선왕이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의를 세워서 분별을 두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예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418)

순자 사상은 실제로 유가의 예치 사상으로부터 법가의 법치 사상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420)

순자의 예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를 곧 법과 제도의 의미로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론의 핵심이기도 합니다.(421)

 

10. 법가와 천하 통일

우리가 법가 사상에서 적극적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은 개혁성과 법치주의입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구사회의 종법 구조가 이완되고 보수적 지향성이 약화됨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공간을 충분히 향유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공간은 일차적으로 과거의 관념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이 새로운 공간은 일차적으로 과거의 관념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미래사관과 변화사관이 그것입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이 과거의 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구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개념입니다. 법치주의는 이러한 개혁성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의 법치주의는 먼저 성문법의 제정과 신상필벌 원칙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발전입니다. 군주의 자의적 폭력에 대한 제도적 규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사회적 예측 가능성이기도 합니다.(429)

 

11장 강의를 마치며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 없고 작은 미물이라고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474)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 즉 각이란 이 연기의 망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갇혀 있는 좀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있는 분별지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닫혀 있는 집합표상, 즉 업을 깨닫는 일입니다. (475)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475)

깨달음의 의미를 지극히 명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고전 읽기의 시작이며 그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77)

연기한 바로 그것입니다. 공간적이고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동태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상생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연하여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여기를 보는 것이 바로 법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477)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나간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실천은 무인지경(無人之境)에서 새집을 짓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505)

체계적인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였을 경우에야 비로소 우리 삶의 도처에 자리 잡고 있는 감염 부위를 수시로 발견한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연성은 우리의 시각을여기의 현재에 유폐시키지 않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친 전체적 조망과 역사 인식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동양고정의 독법에 있어서는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성찰적 관점을 얻었다면 마치 강을 건넌 사람이 배를 버리듯이 고정의 모든 언술을 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로소 고전 장구의 국소적 의미에 갇히지 않고 그러한 관점을 유연하게 구사하여 새로운 인식을 길러내는 장신의 장이 시작되는 지점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오늘의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며, 동시에 내일의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507)

창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창신은 재조명과는 다른 창의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따라서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508)

 

 

3. 내가 저자라면

동양 고전 9가지(시경,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500페이지에 담기란 쉽지 않은 작업일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 했든 5천 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전승되어 내려온 문명이 없는 가운데, 전승과 해독에 있어 세계 유일의 문헌이라 불리는 중국 고대 문헌이다. 고전 읽기를 호미를 들고 태산준령을 마주하는 고되고도 불가능한 작업이라 비유하지 않았는가. 그가 다루는 고전들은 평생을 읽어도 모자를 만큼 방대하고 깊다. 그런 고전들을 그가 한 권에 담아냈다. 주제는 명확하였다. 고전을 통해 이 시대를 읽고 문제의식을 갖자는 것이다.

그의 의도와 이를 담은 그의 글은 꽤나 설득력 있고 효과적이었다. 과거를 재조명하고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자는 그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한 것이었다. 고전의 교훈을 현 시대의 시대정신 또는 문제의식과 적절히 접목시켜 이해하는데 수월했다.

신영복선생님의 글을 꽤나 더디다. 읽기가 더디다. 500페이지 정도의 다소 얇은(?!, 연구원과정에 접한 다른 고전 서적에 비하면…..) 책이었지만 도저히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1000페이지의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다 읽지도 못했다. 대충 대충 읽을 수 있는 책 또한 아니었고 쉬이 넘어갈 성격의 문장들도 아니었다. 누군가 신영복선생님의 책은 무릎을 꿇고 읽어야 한다고 했다는데 감옥에서 20년을 복역하며 공부하고, 수인들과 소통하며 얻은 지식(지혜)들이니 쉽게 읽어 넘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살아가며 여러번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변경연 연구소 연구원 과정에서 가장 많이 선정된 필독서 중 하나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고로 책에 대한 평가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라도 생략한다.

훗날 내 책을 쓰는 사이사이 고전이 인용될지는 모르겠지만, 고전에 대해 책을 쓸 생각은 없다. 다만 만약(?!)’ 내가 저자가 된다면, 신영복 선생이 말하는 시대의식과 사회의식, 고전의 교훈을 통해 현재를 반추해보는 작업을 조금 더 길게 늘려보고 싶다. 깊이 있게 접근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일상과 현상에 대해 조금 더 길게 논의해보고 싶다. 옳고 그름에 대해서 논하기 보다는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사회적인 해결방안이 아닌 개인적인 해결방안은 없을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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