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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3일 04시 35분 등록

<북리뷰 9-1주차>

 

 

2013.12.22.

: 서 은 경

 

 

(No. 31)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강 의] 돌베개 (2007)

 

 

 

 

 

 

 

                                                                         강의책표지.jpg

 

                                                                                 @ 2004131쇄 발행

 

 

 

 

망어득망

忘漁得網

 

 

고기는 잊어버리고

망을 얻어라.

 

남는 것은

그물, 관계망이다.

 

***

 

 

 

 

 

 

1. 작가 소개

 

 

 

 

신영복.jpg

                                           @ 신영복(申榮福)-1941823일생

 

 

 

 

*

나는 신영복 선생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었다.

감옥으로의 사색이라는 책을 썼고 2004년 동양고전 독법인 강의가 나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감옥으로의 사색이 나왔을 때, 갓 대학생이 된 나는 그의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는 무기 장기수였다. 일단 감옥이라는 단어는 나의 감수성을 자극했고 그를 보지도 그의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내가 힘들어 옴을 느꼈다. 80년대 암울했던 시절, 어두움이 담겨 있을 것 같은 두려움(?)에 나는 눈을 질건 감았다.

 

감옥으로의 사색이 그렇게 지나가고 그의 책, ‘강의(2004)’가 나왔다. 2004, 나는 결혼 9년차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며 북치고 장고치고 하던 시점이다. 나는 그 당시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 둬야 할 것을 고민하던 미칠 것 같은 좌절과 모순을 경험했던 시기였다.

 

이 때 남편이 내게 내민 책이 신영복의 강의.

자기야, 이것 한번 읽어봐... 정말 고전이 갑이야. 꼭 고전을 읽어야 해...’

 

나보다 5살 많은 남편은 학창시절 신영복 선생의 책을 감동적으로 읽었다고 한다. 내가 집안일에 아이 치다꺼리에 여념이 없을 때 그가 항상 끼고 있던 책 강의’.... 이중 삼중 역할 수행에 힘들어 쩔쩔 매는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그는 성인군자처럼(?) 책만 붙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의를 시작으로 완전히 고전이 꽂혀서 공자 맹자 장자 사기 등등 고전 속으로 죽죽 빠져들기 시작했다. 동양 고전의 맛과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화가 났다. ‘이 남자가 정말....’ 일상의 무게에 아무런 도움도 지지도 받지 못하고 돌아버릴 것 같은 나에게 신영복의 강의는 그렇게 찾아왔다. ()하지 못하게....

 

나는 남편과 더불어 신영복 아저씨까지 덤태기로 묶어서 내 관심 밖으로 내던지고 마음의 문을 닫았다. 나는 진갈색의 강의책 표지만 봐도 트라우마가 올라왔다. 일하는 여성으로서, 아이를 함께 나는 부부라는 관계 속에서 내가 이해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아프지만 했던 시절에 이 책을 만났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공자의 ()은 분명 이 책 속에 있겠지만 내 삶 속에, 관계 속에 녹아 내리지 못했기에....

 

 

각설하고....

나는 이런 연유로 2013년 오늘이 돼서야 신영복의 강의를 처음 읽는다. 우리 집 금서였던 강의가 해방을 맞은 것이다.

 

 

 

 

**

신영복.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한다. 숙명여대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복역한 지 2020일 만인 19888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한다. 2006년 정년퇴임 후 현재,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

엽서1993

나무야 나무야 (1996

더불어 숲 1(19986

더불어 숲 2(19987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8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4

신영복의 엽서 (200312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12

처음처럼: 신영복 서화 에세이 (20071

청구회 추억: Memories of Chung-Gu Hoe (20087

For the First Time: 처음처럼(영문판) (20088)

신영복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201012)

변방을 찾아서 (20125)

 

 

역서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

사람아 아!사람아1991

루쉰전1992

중국역대시가선집1994)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1996)

더불어 숲, (2003)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

처음처럼(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청구회 추억(돌베개, 2008)

느티아래강의실(한울, 2009)

신영복-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을 내면서

[5]

고전 강의라기보다는 오늘날의 여러 가지 당면 과제를 고전을 통하여 재구성해보는 강의였습니다.

그래서 책 이름도 <강의>로 하였습니다. 강의 내용을 풀어쓴 것이기도 하고 또 당면 과제의 뜻을 강론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전을 읽는 방법이 일반적인 고전 연구서와 다르기 때문에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란 부제를 달았습니다.

 

[6]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이유가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 독법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서론

 

@ 나와 동양고전과의 인연

[16]

붓글씨나 한문 공부란 것은 할아버님의 소일거리.

유년 시절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층의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 어린시절 할머니의 새벽 독경, 아버지의 효도, 경북 영주 정서. 체면, 양반/상놈

 

[17]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방에 앉아서 생각한 것이 동양고전을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지요.

 

@ 국어 사전 290

[18]

노촌 이구영 선생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의 가르침 받은 한학의 대가. 동학 가입.

 

4년 이상 같은 감방에 지내게 됩니다.

 

[19]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노촌 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놓는 책갈피이다.

‘290’이 바로 이구영’....

---> 이구영의 일대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언제 한번 읽어봐야 겠다.

 

@ 화두(話頭)오래된 미래

[21]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원전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회 변혁기의 사랑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사회 변혁기사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담론이 주류를 이룹니다.

---> 이 시기의 담론 중 여성, 여자에 관한 것은 어떤 게 있을까? 과연 기록이 제대로 있을까? 거시사에 없다면 미시사 방식의 고문서에는? 궁금하다. 부국강병이라는 목표 아래 국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던 무한 경쟁 시대. 구본형 스승님의 책에도 이 말이 나온다. 이 시절은 현대와 닮았다고.

 

주왕실은 지도력을 잃고 대신 중원을 호령하는 패국이 등장하게 됩니다.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전국시대에는 다시 7국으로 그리고 드디어 진나라로 통일되는 역사의 격동기입니다.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대한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시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

 

한 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

 

이러한 상황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습니다.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과 이러한 열망을 사회화하기 위한 거대 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상황이라는 인식이 고전강독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 글이 너무 꼬여있다. 번역체 문장... 좀 편안하게 쓸 수도 있을 텐데....

 

[23]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입니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계.

 

근대사회의 사회론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입니다. 작은 거인이나 점보 새우와 같은 모순된 어법.

모순된 표현 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 여자 닮은 남자, 남자 닮은 여자....... 내가 한번쯤 써먹을 제목이다.

남자를 알려면 남자 속의 여자(여성성)을 알아야 하고 여자를 알려면 여자 속의 남자(남성성)을 알아야 한다는 내 맘대로모순 어법. 또 뭐가 있을까? 아이 어른. 어른 아이.

 

 

@ 천지현황과 I am a dog

[27]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자주 바라보게 되듯이 좋은 문장을 발견하기만 하면 어학은 자연히 습득되리라고 봅니다.

 

 

@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 ~~~주목구절)

[27]

과거의 사상과 현대의 사상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래는 오래된 과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사상의 시간적인 존재 형식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은 .....공간적인 존재 형식도 갖습니다. 동양이라는 어휘 그 자체가 공간적 의미입니다. 서양에 대한 동양이란 뜻입니다.

 

사상사 연구에 있어서 시간적 존재 형식은 물론이고, 그것의 공간적 존재 형식을 밝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동양 사상의 경우 그것의 공간적 존재 형식에 주목하는 경우 우리는 대단히 완고한 선입관에 갇히게 될 위험이 큽니다

 

[28]

동양 사상을 특수한 것, 전근대적인 것, 그리고 때로는 저급한 것으로 규정하는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에 갇히게 되는 것이지요.

---> 시간적 공간적 나눔을 하지 마라! 어차피 과거와 현대의 사상은 다르지 않다. 나눔을 하면 선입관에 갇히게 된다.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그 뿐만 아니라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의 접근 방법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각 즉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 논증을 할 때 비교 대조를 많이 한다. 그런데 동양적, 관계론적 관점에서는 비교 대조가 무의미할 수도... 왜냐면 본질적인 것 놓치고 지엽적인 차이를 확대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정말 맞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동양적인 사고다. 아이들과 논술 수업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법을 가르치면서 비교/대조를 많이 한다. 한번쯤 생각해 볼 대목이다. 우리적인, 일명(내 맘대로 이름지어~) ‘관계론적인 수사법에 관해 정리된 것이 있을까? 아니, 내가 정리해봐야 할 것이다. ...할 것이 왜 이리도 많은가? (수사법에 대한 동양적인 접근법, 나의 생각들...)

 

본질적인 차이가 지적된다 하더라도 이른바 차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의 본질 부분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요.

 

지금 열분 가운데 두 사람을 일어서게 하고 두 사람의 차이에 주목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본질적인 것이 드러날 것 같습니까?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법에서 논증할 때 비교 대조를 쓰지 않느냐? 본질이 드러나게 설명할 수 없는데도.... 그리고 아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험 성적, 성격 등등으로 비교 하지 말하야 한다. 그 아이의 본질은 아이가 가진 독자성과 정체성을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 보려고 할 때 드러나는 것이다. 각각의 고유의 것들을 보아주는 것.

 

동양고전도 그 자체로 보아주어야 하고 여자도 그 자체로 보아주어야 하고 남자도 그 자체로 보아주어야 한다. 고유의 본질..... 여자와 남자를 비교 대조하여서 남자와 여자의 본질이 드러날까? 어느 정도 드러난다. 하지만? 아니다? 모르겠다? 그럼 한번 비교 대조도 해보고 또 그 본질 자체도 들여다보고 하자!

 

우리 할머니는 비교 대조 하지 않고 본질을 들여다 봐 주셨다. 아들을 선호하는 사상을 가지셨지만 개별 한 손녀 손자를 차별하지는 않으셨다. 하나 하나 존재로서 이뻐하셨다. 단지 아들은 좀 다른 존재의 본질을 지녔을 뿐...... 그래.... 사랑이다. 하나 하나 그저 이뻐해주는 것. 우리 할머니가 내 엄마다. 내 엄마는 내 어머니고. 엄마와 어머니의 불일치. 그건 좀 당황스러운 혼란이다. 하지만 어떤 존재라도 엄마 역할을 해 주는 존재가 내게 있었음을 감사한다.(성장환타지 집이야기)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기껏해야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된 것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로 귀착되는 것이지요.

---> 차이에 주목하면 결국 본질을 볼 수 없고 차별에 귀착된다. 더불어 차이를 인정하고 그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지만 그건 진정한 공존이 아니다.

 

지정한 공존이란 차이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 그냥 안고 가는 것이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 따위를 말하지 말고 그냥 그 존재 자체로 안고 가는 거다. 예전에는 차이를 따지고 그러면서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고 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싸움이 난다. 서로의 차이를 하나하나 따져서 비교해 볼 수는 있지만 그것은 남자의 본질, 여자의 본질이 아니다. 어찌 그 비교로 본질이 다 들어나겠느냐. 그 자체로 안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차이를 따지고 차별하게 되면 본질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계망으로 시공을 열어두고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 왈, ‘남자 닮은 여자, 여자 닮은 남자.......’라는 모순어법으루다가 무언가를 이야기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지금 내 머리를 열나 치고 지나갔고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 야밤에 열나 자판을 두두탕탕 두드리며 엉덩이 꼬리뼈 아프도록 앉아있다는 사실. 내 머리에 입력이 안 되면 자판으로 쳐서라도 남겨야 한다.

반대의 논리도 없지 않습니다.

 

[29]

일단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우리가 고전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

--->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비교/대조를 써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런데 비교/대조는 가장 핵심적인 진정한 본질을 놓칠 수도 있다.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관계망 속에서 그것을 보아야 한다. 여자 남자의 이분법이 아니라 세상이 있고 여자가 있고 남자가 있고 그 옆에 또 여자가 있고 또 그 옆에 아기 여자가 있고...... 그들의 관계망.

 

그림 그리는 것처럼, 사물의 본질을 잘 들어내려면 그리려는 사물과 그 주변의 관계들, 햇볕, 거리 탁자, 등등을 잘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조화이다. 불교적인 사고이기도 하고.

 

@ 고전 독법의 참여점(Entery point)

[29]

동양 문화라는 개념은 서양 문화를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조어입니다. 세계를 주도하는 문화는 서양 문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양 문화는 그 자체로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문화 일반의 준거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양 문화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주변적 위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30]

근대사는 서구 문명이 전 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 각국은 지난 몇 세기 이래 줄곧 서양 문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 문화를 이해하다는 것은 현대 세계의 기본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선을 추구합니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합니다.

 

서양 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구조이며

이처럼 조화된 구조가 바로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서양 문명은

두 개의 축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cf) 계몽주의 이전----기독교 교리 벗어난 과학자들을 이단으로 박해 (ex. 갈릴레이)

오늘날-------------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오히려 문제 야기 (ex. 신무기, , 생명경시)

과학이 자신의 대립면을 상실하고 무한 질주.

 

서양 문명의 구조 자체의 모순과 불완전성에 대한 반성 나타나고 있습니다.

 

[32]

현대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패권 국가의 일방주의적 세계 전략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첨예화하고 있습니다. 초국적 금융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이 말하자면 대립면을 상실한 질주입니다.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존재론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패권주의적 세계 전략은 자기 증식 운동의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그러한 전략은 결국 위기를 심화할 뿐이라는 것이 모순이지요.

 

오늘날 많은 담론들이 동양과 서양의 사회 구성 원리에 주목하는 까닭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바로 근대사회, 나아가서는 서구문명의 구성 원리로부터 연유한다는 반성이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또한)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다시 그리스 철학에 관심을 갖고 동양의 고전에 관심을 가지면서 인문학으로 돌아가는 트렌드.

 

이 대목에서 신중해야 합니다.

 

최근 동양학에 대한 서구의 관심은 이와 같은 성찰적 동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가 인문주의인 것은 사실이며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는 구조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동양에 대한 관심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신대륙에 대한 콜럼버스의 관심입니다.

과도하게 축적된 초국적 자본이 자본주의 시장권에서 분리되어 있던 동구권과 러시아 대륙에 이어서 다시 광범한 중국 시장에 쏟는 관심, 이것이 주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3]

오늘날의 주류 담론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세계화 논리는 한마디로 거대 축적 자본의 사활적 공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전개 과정이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본 축적 과정의 전형적 형태입니다.

본질적으로는 대립면을 상실한 일방적 질주!

 

서구 문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이 일면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일면성을 띠지 않는 시각이나 관점은 없습니다.

모든 관점은 일정하게 당파성을 띱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실천적 관점입니다. 동양학에 대한 관점을 바로 이 지점에 세우는 작업이야말로 실천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을 참여점으로 하는 고전 독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명문장이다. 명쾌하고 분명하고 대단히 실천적이다. 속이 다 시원하다. 나의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는 기분이다. 제도 교육 속에서 왜 그리도 영어 영어 하며 질질질 끌려다녀야 하는지 정말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 고문과 우리 문학을 더 깊이 알고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가 더 도드라져 드러남을 느꼈다. 더 자연스러움을 느꼈다. 식민지 되어 본 자의 낮은 자존감.

그것을 회복하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의 본질을 찾고 사랑하는 것이다.

 

@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34]

동양적 사고현실주의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cf)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을 원천적으로 결정한 사람 ------ 막스 베버

 

막스베버는 동양 사회의 정체, 바로 현실주의주의는 합리적 제어 장치가 없다고 주장.

서양의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사회제도는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자본주의 정신)를 기초로 적제 소비하고 많이 저축하여 자본 축적을 이루어냈으며 신의 소명인 금욕주의가 합리적 제어 장치라고 주장.

 

But, 근검절약 면에서 아이러니 발생!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낭비 체제를 프로테스탄티즘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동양 사상은 비록 윤리적 차원의 현실주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실주의가 곧 현세에 대한 탐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베버, 동양 사상에 대한 저급한 이해의 층위를 드러내었을 뿐. 그는 기독교 윤리를 개진한 것이기보다는 자본 논리를 합리화하는 맥락에 충실했다. 그가 예찬한 자본 축적 과정이 근대사 전개 과정에서 과연 어떠한 비극으로 점철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베버는 최소한의 전망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 신영복씨의 글은 곱씹으면서 생각해야 정리가 된다. 이 책은 강의한 것을 정리해서 인지 글의 문체가 참으로 꼬여있구나. 그의 말을 워드로 치면 내가 정리 되지 않는다. 그의 말을 내 말로 정리해 바꾸어가며 워딩하는 것이 이해가 빠르다.

동양 사상이 비종교적이며 현실주의라는 점은 베버의 지적이 옳다.

하지만, 현실주의를 현세적 향락과 체면의 문화로 규정하는 논리는 무리다.

 

[35]

동양 사상은 물론 사후의 시공에서 실현되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세를 신의 소명과 직선적으로 연결시키는 단선적인 신학적 사유 체계가 아닙니다. 비종교적이고 현실주의적입니다.

 

[36]

베버는 동양 사상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관계론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서양 철학

-지혜를 사랑하는 것, ()에 대한 애()

 

동양 철학

-()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 통로입니다. 도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과 수()의 회의문자입니다. 착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37]

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양)

로뎅의 생각(생각하는 사람들) - 묵상하는 자세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밤하늘의 아득한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진리는 존재.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 차원의 신학적 문제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38]

질서라는 의미는 이를테면 시스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이라는 개념이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이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자력장, 중력장, 전자장과 같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체계이며 질서입니다.

 

관계들의 총화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을 구성하는 개개의 부분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총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이 집합과 장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은 부분적 총체들의 복합체이며 개개의 부분이 곧 총체인 구조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장의 개념이 3차원의 공간적 개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생멸(生滅) 유전(流轉)이 이루어지는 4차원의 질서라는 사실.

 

그런 점에서 동양학에서 자연이란 자원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무궁한 시공으로 열려 있는 질서입니다.

 

우주(宇宙)

- 공간 개념, 상하사방(上下四方)이 있는 유한 공간

- 시간 개념, 고금왕래(古今往來) 무궁한 시간

 

[39]

따라서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자연은 생기(生氣)의 장’. 생성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 생주이멸(生紬移滅)의 순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

 

진흙()이 그릇()이 되고 그릇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릇이 그릇이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즉 자기(主我)를 고집한다면 생성 체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과정이 무너집니다.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근대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

 

새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40]

생기의 장으로서의 자연 개념

- 현실적인 삶에서 욕망의 절제, 절용휼물(節用恤物),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삶의 철학으로 나타납니다.

 

cf) 맹자

봄여름에는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지 않고 촘촘한 그무로 하천에서 고기를 잡지 않는다.”

 

 

@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동양 사상의 특징으로서 인간주의는 그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인문적 가치라는 사실을 의미.

인성의 고양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는 사회라는 의미. ‘성인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

---> 그런데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나? 인문적 가치, 인성의 고양이 최고의 가치인 동양 사회인데 학교 교육에서도 인성 고양이 뒷전에 밀려나 있으니.....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구성됩니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 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이지요.

 

cf) 논어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은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 그래서 내가 아는 치과 이름이 린 치과구나.... 사회적 나눔을 실천하는 실천 의사. 여기서 따왔는 것 같어... 서울 이웃 린 치과.

 

동양적 가치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초월적 존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하는 구조 인(), ()과 인()의 관계

[42]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成人之美)을 인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손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 그래서 구본형 스승님이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습니다.;를 모토로 내세우셨구나.

 

화해(和諧)사상 - 동양의 중요 특징 사상 중 하나

화는 쌀을 함께 먹는 공동체의 의미, 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민주주의의 의미.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

 

이처럼 동양 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43]

인간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다.

 

 

@ 모순의 조화와 균형

 

서양 문명은 과학과 종교를 두 개의 축으로 하는 구조.

서양 문명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은 모순 구조 내장. 모든 사상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

 

동양적 구성 원리에는 과학과 종교 간에 나타나는 모순은 없지만, 동양 사상의 내부에 모순 구조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

중용(中庸)이 그것입니다.

 

동양 사상의 조화의 균형유가와 도가의 견제입니다.

 

유가 - 기본적으로 인본주의

감천역물(勘天役物)사상으로 나가는 오만한 지점에 인간의 좌절과 인성의 붕괴

 

도가 - 기본적으로 자연주의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무위무욕(無爲無慾)할 것

 

오만과 좌결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셈.

 

인본주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것의 독선과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바로 도가.

(주목구절)

사상이란 다른 사상과의 모순 관계에 있을 때 비로소 사상으로서의 체계가 완성된다.

---> 존재와 인식 일반의 존재 형식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고 그 존재 형식에 내재하는 관계론적 구조의 확인, 남녀 관계도 서로 모순 속에서 비로소 관계가 완성. 성숙한 사랑이란 남녀의 모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45]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

 

나는 21세기 담론은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기본 구조를 새로운 구성 원리로 바꾸어내고자 하는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6]

그런 의미에서 지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지양을 의하여 과연 새로운 구성 원리를 모색하고 있다는 중국 모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통일 과정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적 주제로서의 화()와 동()에 관한 논의이기도 합니다.

- 공존과 평화의 논리

- 지배와 억압의 논리, 흡수와 합병의 논리, 근대사회의 논리, 존재론의 논리, 강철의 논리

 

바쁠수록 돌아가라....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2

오래된 시와 언

 

<시경>詩經, <서경>書經, <초사>

 

[52]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56]

<시경>에는 모두 305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 절반이 넘는 양이 국풍입니다. 국풍은 각국의 채시관이 거리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백성들의 노래를 수집한 것입니다.

---> 거리를 돌아다니며 목탁을 탁탁탁....노래를 수집한다? 재미있는 풍경이다. 노래 수집하는 채시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도 잼있겠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예가 없을까? 일연 이야기?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58]

공자는 <시경> 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 思無邪'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61]

cf) 진시황 때 맹강녀의 전설

 

성채가 무너지고 시골이 나오다니 전설은 전설입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4]

<시경>에는 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저항시와 노동시가 대단히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풍영월이 시의 본령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편향된 여과 장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전통과 선입관 때문에 우리는 매우 귀중한 정신세계가 왜곡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세계와 시적 정서, 나아가 시적 관점은 최고의 정신적 경지라고 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보게 합니다.

 

[65]

한 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개인적 경험의 세계를 뛰어 넘으려면 공감력이 필수다. 감수성이 필수다. 개인적 경험을 뛰어넘기. 뛰어 넘고 싶다.

 

[67]

중국에는 고대부터 사관에 좌우 2시가 있었는데 좌사는 왕의 언을 기록하고 우사는 왕의 행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각각 <상서><춘추>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자의 언행을 기록하는 이러한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 문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후의 지옥을 설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속력이 강한 규제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68]

마오 어록은 중국의 전통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 재미있어진다. 중국이

[70]

군자는 무일 無逸 (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시경 주공편)

 

[75]

레닌'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나는 이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한 번 되씹어 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일편은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 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83]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도피 또는 복고적이라는 실천의 허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강직한 억압 구조 속에서는 그 숨겨진 물리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이 문화적으로 길들여짐으로써 맹목이 되어버린 보이지 않는 포섭 기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주목할 수 있는 초기 방식의 하나로서 낭만주의적 관점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현대 중국의 혁명과 건설이, 특히 인류사 최대의 드라마라고 하는 대장정이 이러한 낭만주의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심증을 지울 수 없기도 합니다.

 

 

 

3

<주역>의 관계론

 

[89]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 , 으로 나눕니다. 관상, 수상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사주팔자와 같이 자가기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는 것임에 반하여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92]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100]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역지사지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는 표현을 하지요. 눈이 얼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입장이라 합니다. 계급도 말하자면 처지입니다. 당파성과 계급적 이해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재미있는 표현이다. 처지가 발에 달려있다.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 듯 한 집이 좋다고 하지요.

 

[101] (주목구절)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 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날 수밖에 없습니다.

----> 30%의 여유 갖기. 능력도 100% 다 발휘하면 그 다음은 나와야 한다.

 

[102]

70%의 자리가 득위의 비결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 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와 실위 개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서구의 존재론과는 다른 동양의 존재론입니다.

 

[103]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선두가 전체 국면을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두는 겨우 자기 한 몸 간수에 여력이 있을 수 없는 고단한 처지입니다. 그와 반대로 맨 꼴찌는 마음 편한 자리인 것만 것 틀림없습니다. 아마 가장 철학적인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기를 쓰고 달려가야 할 곳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 그래 그가 선두에 서기를 원해서 내가 맨 꼴찌로 달려야 했어. 꼴찌는 편한 자리 같지만 너무 후미진 곳이라 더불어 무엇을 도모하기가 힘든....적막하고 혼자 섬처럼 부유하는 것 같은 자리. 그래서 중간을 달려야 하나 부다..

 

[105]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3]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면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

 

어느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시점에는 그에 따른 어려움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럴수록 마음을 곧게 가지고 최초의 뜻, 즉 믿음을 회의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23]

박괘는 흔히 혼돈 세상에서 사상적 순결성과 지조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어려운 때일수록 현명한 판단과 의지가 요구된다는 윤리적 차원에서 읽힙니다. 가빈사양처, 세란식충신, 질풍지경초 등이 그러한 풀이입니다. 가정이 어려울 때 좋은 아내가 생각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충신을 분별할 수 있으며, 세찬 바람이 불면 어떤 풀이 곧은 풀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박괘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 만들기입니다. 희망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128]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이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130]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 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사전에서 요약하고 있는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131]

앞에서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바로 이 변화의 조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이 로마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132]

절제와 겸손은 바로 이러한 제한성으로부터 도출되는 당연한 결론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역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4

논어論語, 인간관계론의 보고

 

 

[144]

학이시습지의 습은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의 의미도 '때때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성숙한 '적적한 시기'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는 often이 아니라 timely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논어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이처럼 사회 변동기에 광범하게 제기되는 인관관계에 대한 담론입니다.

 

[145]

사회 변화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151]

오늘날도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 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논리입니다.

 

[152]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153]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 , , , 서 수를 모두 익혀야 했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 읊고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창칼도 다루었습니다. 문사철 文史哲 시서화 詩書畵 를 두루 익혀야 했습니다.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되는 것이지요.

 

[158]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

 

[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습지다만 소위 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 아름다움, 모름다움, 미인은 존재론, 미인 아닌 사람은 관계론..... 아름다움의 뜻이 바뀌었네

 

[163]

'군자화이부동'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165]

화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166]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또는 이웃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글이고 별로 어렵지 않는 글입니다.

 

[172] 은 정이며 정은 정근整根입니다.

뿌리를 바르게 하여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원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 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잠재력과 인간성이 바로 인간관계의 소산인 것은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지요.

 

[182]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지요.

 

[187]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88]

제갈공명의 명석한 판단은 무사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하를 도모하려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음은 물론, '윗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심마저도 없었지요. 이처럼 무사하기 때문에 공평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 수 있는 법입니다.

---> 욕심 없음. 이해관계 없음에서 이치가 밝아지는 법, 지혜가 오는 것이다.

 

[199]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

 

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201]

지자는 눈빛도 총명하고 사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며 특히 사물의 변화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2]

인자는 한마디로 세상의 무궁한 관계망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지자는 개별적인 사물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5]

사농공상이라고 할 때 사가 가장 사위의 계급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농공상사민에 속하는 피지배계급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공경대부 즉 제후와 대부를 지배계급으로 하고 사농공상을 피지배계급으로 하는 사회체제였습니다.

 

이러한 구도에서 사계급에 속하는 유가는 군자사든 소인사든 사 계급임에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가의 위상을 사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유가의 사상적 특징을 제3의 계급 사상 또는 중도 사상 또는 중화주의로 규정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5

맹자의 의

 

 

[215]

맹자에는 농가, 병가, 종횡가 등 당시의 다른 많은 사상이 소개되고, 또 비판되고 있기 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을 가장 폭넓게 접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한 권의 고전을 택하려고 하는 경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단연 맹자가 천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7]

제후가 무도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그를 몰아내고 현군을 세운다. 그리고 좋은 제물로 정해진 시기에 제사를 올렸는데도 한발이나 홍수의 재해가 발생한다면 사직단과 담을 헐어버리고 다시 세운다. --- <맹자> 진심하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 테면 민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사상의 핵심입니다. 임금과 사직을 두는 목적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223]

맹자의 성선설이 나타나 있는 글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선량하다는 것이 이른바 맹자의 성선설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성선설을 입증하는 근거가 매우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225]

이로써 미루어보건데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의 싹이다. 사람에게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

 

[226]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장에서 맹자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인의예지의 사단과 이 사단의 확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맹자의 성선설은 다분히 윤리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230]

맹자의 성선설이 인간의 본질을 구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앞에서 이야기했는데 이 구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맹자는 그 사람의 사상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본성도 사회적 입장에 따라서 재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45]

불영과불행 不盈科不行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것이지요.

 

 

 

6

노자老子의 도와 자연

 

[254]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자연입니다. 노자의 귀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은 노자를 한 편으로 하고 여타의 모든 학파를 다른 한 편으로 하는 두 개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자백가의 사상은 물론 여러 층위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대체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정책적 대응을 본령으로 하고 있습니다.

 

[257]

노자의 언어와 담론이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 구조를 조명해내고 자본주의 문화의 허구와 총체적 낭비 체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노자가 생환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 내가 노자를 좋아하는 이유.

 

[258]

<노자>815200자에 이릅니다. 상편은 도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259]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노자>는 노자 개인의 저작이 아님은 물론이며, 어느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입니다........대체로 기원전 350~기원전 200년 경의 집단 창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그랬구나... 나는 노자가 쓴 지 알았는데.... 고등학교 때 서점에서 처음으로 도덕경을 샀다. 괜히 손이 갔다.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읽고 싶었다. 그리고 읽었다. 무언가 끌림이 있었다. 그건 동양적인 관계론과 관련된 나의 어린시절 삶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노자> 주석은 3천여 가가 주를 달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주석 중 최고의 것 하상공의 주와 왕필의 주입니다.

 

[261]

왕필은 <노자>를 주했다기보다는 편집했다고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로 전승되어오던 <노자> 텍스트를 자신의 입장과 관점에서 정리하고 편집하여 금본 <노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산문이라기보다는 운문입니다. 5천여자에 불과한 매우 함축적인 글이며 서술 내용 역시 담현입니다. 더욱이 노자 사상은 상식과 기존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고도의 철학적 주제입니다. 그 위에 간결한 수사법은 여타 철학적 논술에 비하여 월등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독법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262]

<노자>는 무위와 관조라는 동양적 사유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일 뿐만 아니라 과학, 예술, 문화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263]

핵심적인 개념은 유와 무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같은 것의 두 측면이라는 선언입니다. 1장의 핵심개념은 무와 유이고 그것은 같은 것이라는 선언이지요. 그러므로 무는 천지지시를 이름 함이며 유는 만물지모를 이름 함이다가 올바른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264]

노자철학에서 는 제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 가장 자유로운 상태...... 이름 붙여진다는 것은 역할이 생기고 가면을 써야 한다는 것. 공자와 노자를 왔다갔다 하며 살고 싶다.

 

[270]

모든 사유는 개념적 사유라는 것이 서양의 논리지요. 개념이 없으면 사유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하이데거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는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271]

형이상학적 체는 무이지만 형이하학적 용은 유라는 것이지요. 도무수유가 그것입니다.......노자 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 중에서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물이기 때문에 물의 비유로써 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280]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노자의 정치철학입니다. 한 사회의 물적 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근간임은 물론입니다.

 

[284]

상선약수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 물과 같음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씻어 내리고 스며들고 자아의 형태를 무한히 바꿀 수 있고....

물과 같은 여자.... 수가 많은 여자.... 노자 철학은 여성성에 가깝다.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285] (주목구절)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 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하기도 하고 할수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 이렇게 물과 같으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여 어루만질 수 있다면..... 어머니 같은 존재다.

 

[289]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로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 ~ 그래서 바다이구나. 모든 걸 다 받아들이는 바다......

 

진정한 연대란 다름 아닌 노자의 물입니다. 하방연대입니다.

 

[300]

대성약결, 대영약충, 돈이 많은 사람은 겉으로는 별로 없는 듯이 차리고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헙수룩하게 차려입어도 개의치 않지요. 많이 아는 사람도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이지요.

 

[304]

간디는 '진보란 단순화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7

장자莊子의 소요

 

[309]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 외편 추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의 출전입니다.

----> 우물안 개구리...... 장자구절이었군...

 

 

[313]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미도중의 일화는 장자의 면모를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장자가 낚시를 하고 있을 때 초의 위왕이 대부 두 사람을 보내어 재상을 삼으려는 뜻을 전했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돌아보지도 않고 웃으며 사신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듣기로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3천년이나 되었다 합니다. 임금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 묘당에 보관한다 합니다. 당신이 그 거북의 입장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기어 존귀하게 되고 싶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겠소?하여 돌려보냈다는 일화입니다.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살겠다는 것이 바로 장자입니다.

부정적이기는 커녕 대단히 낙천적인 세계관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 사는 것처럼 살겠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생긴대로......

 

[317]

<장자>는 그 전편에 흐르는 유유자적하고 광활한 관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장자에 대한 올바른 독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논어><맹자>의 세계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계입니다.

---> 장자는 불교적이다. 나는 논어보다 노자, 장자가 조으다... 남편은 공자에 꽂혀있다. 우리는 서로 싸운다. ㅎㅎㅎ

 

 

 

[328]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338]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343]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 ~ 명문이다.... 일체유심조다. 불교의 향내가 나는 장자, 조으다... 읽고 시프다. 억울할 것도 슬플 것도 없는 것이야. 입장 따라 다르니.... 꼭 그러한 것도 그렇지 아니한 것도 없는 것이야....

 

[354]

나는 <노자><장자>의 차이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는 태도를 갖기 바랍니다.

 

[356]

나는 반대로 고기는 잊어버리고 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망어득망. 고기를 이를 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망을 볼 줄 아는 관계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357] (주목구절)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은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집에서 본다. 남편을 본다. 남편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관계망이지요. 남편이 아니라 비즈니스 세상을.... 사람사는 관계를.... 남는 것은? 남은 것은? 그물.... 내가 그 남자를 받아들이고 세상을 받아들이고 물처럼..... 하지만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꼭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8

묵자墨子의 겸애와 반전 평화

 

@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됩니다

[362]

지금부터 함께 읽으려고 하는 묵자, 순자 한비자 등은 비주류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가는 유가와 함께 당시에는 현학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비주류로 물러났습니다만 당시에는 가장 강력한 주류 학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 역시 유가라는 점에서 주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비자>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법가를 대표하는 사상가입니다. 천하통일을 주도한 사상이란 점에서 법가를 비주류라고 하기에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 <순자>, <한비자>가 중국 사상의 전체 흐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비주류에 속한다고 해야 합니다.

 

[363]

주류 사상이든 비주류 사상이든 결국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합의해 두려고 합니다.

 

[364]

첫째로 하층민의 이미지입니다. 묵이란 우리말로 먹입니다만 묵자의 묵은 죄인의 이마에 먹으로 자자하는 묵형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검은색은 노역과 노동주의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검은 노동복을 입고 전쟁을 반대하고 허례허식을 배격하며 근로와 절용을 주장하는 하층민이나 공인들의 집단이 묵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름으로 삼는다는 것은 심상한 것이 아니지요. 나도 오랫동안 수형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정서를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만 묵적처럼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름으로 삼아 공공연히 밝힌다는 것은 그 형벌이 부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또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반체제적 성격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65]

혁명적 상황에서 묵가는 통치 권력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좌파 조직의 좌파 사상이었으며 묵적이란 이름은 그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묵가는 지금도 존재하는 구나... 그 시절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여러 사상들이 곳곳에서 다른 향내를 뿜으며 자기 이야기를 한다.

[366]

유가가 주공을 모델로 했다면 묵가의 모델은 하나라의 우임금입니다.

 

우임금실천궁행을 모델로 삼은 것은 유가가 모델로 삼고 있는 주나라의 계급 사회가 아닌 하나라의 공동체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367]

기층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면서 검소한 삶을 영위하고 신명을 다하여 실천궁행하는 모습이 묵가의 이미지입니다.

 

[368]

<묵자>가 난해할 수밖에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문장이 간결하고 쓸데없는 설명 즉 일체의 논변이 없기 때문입니다.

<묵자>의 이러한 면을 풍자한 예화가 <한비자>에 나옵니다. 진나라 임금이 딸을 진나라 공자에게 출가시켰습니다. 그 딸을 시집보낼 때 70명의 첩을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혀 딸려 보냈습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공자는 그 첩들을 사랑하고 그 딸은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논변이 많으면 그 핵심을 놓친다는 것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지요.

 

 

[370]

묵자는 그의 사상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천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한 모범을 보입니다. 실천 방법이 개인주의적이거나 개량주의적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언제나 집단적이고 조직적이며 철저한 규율로써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묵가는 강고한 조직과 엄격한 규율을 가진 집단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묵가는 불 속에도 뛰어들고 칼날 위에도 올라설 뿐 아니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발길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촛불.... 묵가 묵가들이 있다.

 

[371]

, 한 이래 사회적 격동기가 지나고 토지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 관료 중심의 신분 사회가 정착되면서 묵가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상하의 계층적 차별을 무시하는 평등주의 사상이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맹자는 이러한 겸애사상을 비현실적이며 비인간적인 엄숙주의로 매도합니다.

 

무엇보다도 묵가는 그 사상의 사회적 기반이 와해되면서 함께 소멸했다고 해야 합니다. 기층 민중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들을 조직하여 세습 귀족 중심의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최초의 좌파 사상과 좌파운동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지배 집단의 등장과 때를 같이 하여 소멸하게 됩니다.

---> 지주 관료 중심 : 기층 민중..... 지금은 자신들의 계층적 이해 관계만 중요시 여기는 수구골통들의 때문에 묵가들이 종북으로 몰리면서 소멸되어가고 있다?

 

 

[372]

공자가 춘추시대 말기의 사상가라면 묵자는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373]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혼란의 원인을 알아야 다스릴 수 있으며 그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 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회의 혼란을 다스리는 것 역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묵자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겸애 첫구절입니다.

 

[374]

사회 사상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376]

만약 천하로 하여금 서로 겸애하게 하여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한다면' 어찌 불효가 있을 수 있겠는가?

 

애인약애기신은 성경구절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음이 놀랍습니다.

 

묵자가 중국에서 자취를 감춘 때가 기원전 100년경이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 찾아온 동방박사가 망명 묵가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다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 예수가 이렇게 혁명적이었는데... 요즘 교회들은 ㅋㅋ 묵자의 사상을 잘 몰랐는데 새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나이 들어 읽으니 재미나구나....

 

[377] 묵자의 반전 평화를 읽으면 반전 평화의 문제가 참으로 오래된 숙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전 평화는 한반도의 가장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 오래된 과제이기 때문에 잊고 있을 뿐이지요.

 

[379]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러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의로움이라고 한다. 이러고서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388]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는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묵자가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던 문제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드는 것... 자본주의 물.... 잔혹성의 물.... 그러나 좋은 물도 든다... 나쁜 물이 더 잘 드는가? 그러나 좋은 물도 든다. 자신의 선택과 신념대로 행동할 뿐....

 

[388]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물든다는 것은 곧 묵자의 사회문화론이 됩니다.

 

[389]

절용은 물건을 아껴 쓰는 검소함입니다. 절용은 밖에서 땅을 빼앗아 나라의 부를 늘리는 대신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서 두 배로 늘리는 것입니다. 재물의 사용에 낭비가 없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자의 사과론입니다. 과소비를 없애는 것이지요. 반전론의 대안이라 할 만합니다.

 

[390]

묵자가 무용한 것으로 예시하는 것 중에는 창칼을 비롯하여 궁궐, , 음식, 수레, , 장례, 음악 등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묵자의 절용은 비공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비악, 절장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순자는 묵자를 비판하여 실용에 눈이 가려 문화를 모른다’, 즉 문화라는 소비가 생산을 증대시킨다는 반론을 폈던 것이지요.

----> 재미있구만. 중국의 사상가들 속에 자본주의도 인본주의도 평화주의도 다 들어 있다. 서양과는 관점이 다른. 고등학교 때 배울 때는 정말 재미 없었는데.... 동양 사상을 좀 더 풀어서 현실에 대비해서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가르칠 수는 없을까, 교과서야?

 

[391]

묵가를 설명하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묵자 사상의 철학적 방법론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묵가의 조직과 실천에 관한 것입다.

 

삼표론은 이를 테면 인식과 판단의 준거에 관한 논의입니다. 묵가가 제자백가 중에서 현학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92]

무엇을 삼표라 하는가? , , 용이 그것이다. 어디에다 본 할 것인가? 아래로 백성들의 이목을 (현실) 살펴야 한다. 어디에다 용할 것인가? 나라의 법과 행정이 시행되어 그것이 국가, 백성, 인민의 이익에 합치하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소위 판단의 세 가지 표준이라고 한다.

 

묵자의 삼표는 첫째는 역사적 경험이며, 둘째는 현실성이며, 셋째는 민주성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표준인 용, 즉 국가, 백성, 인민의 이익에 대하여 묵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만 묵자의 경우 물질적 풍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상은 인구를 늘리는 것입니다. 안은 삶의 안정성입니다. 그리고 치는 평화입니다.

 

[393]

묵자 사상은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을 철학적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철학적 입장에 있어서 어느 학파의 사상보다도 관계론에 철저합니다.

 

[396]

묵가의 조직과 실천의 엄정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여씨춘추>의 기록입니다.

 

기원전 381년 양성군의 부탁을 받고 초나라의 공격에 대항했으나 패하였다. 거자 맹승 이하 183명이 성 위에 누워 자살했다.”

 

묵가는 집단 자살이라는 매우 비장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조직의 책임자인 거자가 생사여탈권을 가질 정도로 묵가는 조직 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묵자가 초대 거자였음은 물론입니다.

---> 무섭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구나.... 묵가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

 

 

 

9

순자荀子, 유가와 법가 사이

 

[404]

그의 학문적 권위나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여 남아 있는 자료는 매우 소략합니다. 그가 유가의 이단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일반적으로 유학은 객관파와 주관파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순자는 예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405]

대체로 안정기에는 예가 개인의 수양과 도덕규범으로 해석되고 사회 변혁기에는 사회질서와 제도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국 말기가 급격한 변혁기였음을 물론입니다. 순자의 예는 법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를 법가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지요. 전국 말기의 상황에서는 순자의 주장이 패자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끌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법가 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재상 이사가 순자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이지요.

 

순자의 사상 영역도 물론 광범위합니다만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그의 법제 사상입니다. 그리고 성악설 등 그것과 관련된 것에 한정하기로 하겠습니다.

 

순자가 유가학파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천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유가의 정통적 천인 도덕천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는 종교적인 천, 인격적인 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유가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정통 유가와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순자의 천론이고 순자가 이단인 이유가 바로 천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08]

순자는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천명합니다. 천이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천론은 당시 생산력의 발전, 천문학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개인의 사상이란 크게 보아 사회적 성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거지요.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바로 이 인문 세계의 창조와 관련하여 순자는 결국 유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자는 입장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거지요.

 

[411]

유학의 도통은 이를 테면 학문적 전승 계보입니다. 족보 같은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 그리고 맹자 후로는 1천 년을 건너뛰어 주렴계-정명도 정이천 주희로 이어집니다.

 

한미디로 이학의 성립 과정을 기준으로 일원화하고 있습니다. 주희의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이학입니다. 주희는 사서의 주석도 이학의 입장에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복잡한 철학적 주제지만 쉽게 이야기한다면 바로 천입니다.

 

[412]

순자가 천론에 이어서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적 수순입니다. 명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교를 배치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함께 읽으려고 하는 성악설의 위치가 바로 이곳입니다. 천명을 전제하고 성선을 전제하는 맹자의 체계에서는 그 선한 본성으로 돌아가고, 그 선한 가능성을 확충함으로써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성과 선단을 하늘로부터 이끌어낼 수 없는 순자로서는 당연히 능참이라는 적극적 참여가 요구되며, 교육이라는 외적 기능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논리 속에 순자의 소위 성악설이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은 선악 이전의 개념입니다. 선과 악은 사회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성과 선악을 조합하는 개념 구성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천과 천명을 부정한 순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본성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교육론과 예론, 제도론을 전개하기 위한 근거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제거를 실천적 과제로 삼았던 순자가 그의 주장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천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성선설의 관념성을 비판하는 것이 바로 성악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13]

순자 성악편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음란하게 되고 예의와 규범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따르고 감정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싸우고 다투게 되어 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서 드디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 순자는 요즘으로 치면 사회학자다.

 

[414]

인간의 본성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선악 판단 이전의 것입니다.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관하여> 에 의하면 본성은 선악 판단의 대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 인간 본성은 선악의 대상이 아니다. 본성이란 있었던가? 그려지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참 나.....이다....

 

[416]

<묵자> 편에서 소개했습니다만 묵자는 인간 본성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것입니다. 묵자는 소염론에서 인간의 본성은 물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이론이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귀납적으로 구성한 개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417]

순자의 성악설도 그런 점에서 같은 구조입니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하는 논리의 일환입니다. 순자의 이론 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악한 성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순자는 모든 사람은 인의와 법도를 알 수 있는 지의 바탕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선단을 갖추고 있다는 맹자의 주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순자는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 철학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419]

순자의 가장 큰 공헌이 바로 이 예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새롭게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예는 공자의 주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순자의 예는 전국시대의 예이며, 이 전국시대의 예가 바로 법으로서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420]

맹자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고 천명론이라는 종교적 편향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이에 반하여 순자사회적 통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천명을 비판하고 관념적 잔재를 떨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순자 사상은 실제로 유가의 예치사상으로부터 법가의 법치사상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순자의 제자 중에서 한비와 이사 등과 같은 유명한 법가가 배출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재미있다. 맹자와 순자의 차이. 한쪽으로 몰아서 이것은 좋고 이것은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관계 속에서 그 맥락을 봐야 한다.

 

[421]

순자의 예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곧 법과 제도의 의미로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 나무는 먹줄을 받아 바르게 됩니다

[422]

나는 말한다. 학문이란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먹줄을 받다 곧은 나무도 그것을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컴퍼스로 그린 듯 둥글다. 비록 땡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단단히 구부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면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 알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 가보지 않으면 땅이 두꺼운 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선비는 선왕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으면 학문의 위대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순자 권학편 첫 구절입니다.

 

유명한 청출어람의 출전이기도 하지요. 학습과 교화를 강조한 교육철학의 선언입니다.

 

곧은 나무를 휘어서 바퀴가 되게 하는 것을 유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그리고 바퀴가 예전처럼 다시 펴지지 않게 하는 것도 이 유의 효과입니다. 나무를 곧게 만드는 것도 교육이며 쇠를 날카롭게 벼리는 것도 교육의 역할입니다.

 

[423]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인간사회의 문화적 소산은 사회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회조직이 바로 예입니다. 그리고 그 예가 곧 제도와 법입니다. 이러한 제도와 법을 준수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욕구 충족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성악적 측면이 순자의 교육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인간관이 되고 있습니다.

 

[424]

쑥이 삼 속에서 자라면 부축하지 않아도 곧게 되고 흰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함께 검어진다.

---> 교육학적으로 순자의 글은 꼭 읽어봐야 하겠다. 동양의 교육론의 출발점.

 

[428]

순자가 열거하는 난세의 징조 <악론>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쫓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10

법가의 천하통일

 

[431]

<한비자>는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439]

나는 법가의 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개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법치란 무엇보다 권력의 자의성을 제한하고 성문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앙이 강조한 행제야천입니다. 법제를 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46]

임금이 신하를 제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의 수단이 있을 뿐이다. 두 가지 수단이란 형과 덕이다. 형과 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형이라 하고, 상을 주는 것을 덕이라 한다. 신하된 자는 형벌을 두려워하고 상 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임금이 직접 형과 덕을 행사하게 되면 뭇 신하들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고 그 이로움에 귀의한다.

 

[449]

나라가 망하는 일곱 가지 징후 <망징>

 

나라는 작은데 대부의 영지는 크고, 임금의 권세는 가벼운데 신하의 세도가 심하면 나라는 망한다. 법령을 완비하지 않고 지모와 꾀로써 일을 처리하거나, 나라를 황폐한 채로 버려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 신하들이 공리공담을 좇고, 대부의 자제들이 변론을 일삼으며, 상인들이 그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아놓고, 백성들이 곤궁하면 나라는 망한다. 궁전과 누각과 정원을 꾸미고, 수레, 의복, 가구들을 호사스럽게 하며,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고 재화를 낭비하면 나라는 망한다. 날짜를 받아 귀신을 섬기고, 점괘를 믿으며 제사를 좋아하면 나라는 망한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만 따르고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한 사람만을 요직에 앉히면 나라는 망한다.

 

[466]

이사와 한비자의 인생을 일별하면서 갖게 되는 감회는 역사란 참으로 장대한 드라마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입니다. 한비자는 스스로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어 비운의 생을 끝마칩니다. 마찬가지로 이사 역시 기원전 2087월 함앵의 거리에서 자신이 제정한 법령에 의해 허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 죽게 됩니다.

 

[467]

(이사)가 표방한 법가의 공명함과 공평함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비극이고 아이러니.

---> 결정적 과오는 영합하기에 급급, 공명정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말 아이러니다. 그리스 신화 보는 느낌이다.

 

 

11

강의를 마치며

 

[471]

불교는 관계론의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론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

 

[472]

불교 철학의 최고봉은 화엄사상입니다.

 

[475]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 이란 이 연기의 망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 업을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에 있어서 최고의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 천상천하 유아독존....... 결국 불교다. 장자다........아멘......

 

[476]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77]

깨달음의 의미를 지극히 명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고전읽기의 시작이며 그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깨달았으나 업식의 고리를 깨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깨닫고 습관의 고리를 당장 끊어야 해탈이 오는 거다.

 

불교철학의 관계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는 인드라의 그물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계의 구조를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연기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공간적이고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동태적인 개념입니다.

 

[480]

송대에 있어 신유학이 등장하게 되는 까닭은 훈고학 일변도의 한나라 유학이 침체를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한대의 유학은 경의 자구 해석에 매몰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도 형식적인 예론의 논의에 치중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482]

송대 신유학과 관련된 논의 중에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송대 신유학에 이르러 비로소 유학의 철학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신유학의 불교에 대한 대응은 전혀 독자적인 경로를 밟게 된다는 것입니다.

 

[488]

<대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평화로운 세계의 건설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이 8조목입니다. 8조목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격물 格物 치지 致知 성의 誠意 정심 正心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이 순서가 반드시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이 선언하고 있는 것은 개인, , 국가, 천하는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의 수양과 해탈도 전체 체계를 구성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492]

<대학>의 최고 강령은 명덕입니다. 여러분은 논어에서 읽은 '덕불고 필유린'을 기억할 것입니다. 덕은 관계입니다. 개인과 사회, 사회와 국가, 국가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성의 자각과 실현이 궁극적으로는 세계 평화의 기초인 동시에 한 개인의 수양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통일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496]

하늘이 명한 것을 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을 라 한다.

 

<대학>의 논리구조와 마찬가지로 <중용>에서도 일관된 통합적 사상 체계를 뼈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과 도와 교 의 통일입니다.

 

[497]

중용이 가장 중요하게 선언하는 것이 바로 이 입니다. 성즉리입니다. 이는 법칙성입니다. 이 이가 성이며 성이 천명입니다. 이 성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도임은 물론입니다. 도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 즉 솔해야 하는 것이며, 솔은 노라 하였습니다. 이 도를 따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바로 교입니다. 성과 도는 비록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기품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지나치고 모자라는 차이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사람과 물건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기준으로 삼아 품절하여 천하의 질서로 만들어 난가는 것, 그것이 교라 하는 것이지요.

----> 성을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성을 보는 것에 따라서 도와 교가 나오는 것이니까.

 

[499]

중용에서 강조하려고 한 것이 천지라는 자연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천하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천하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 이 점이 서양의 자연과 동양의 자연의 차이다. 동양은 자연 과학적인 개념 더하기 사회적 개념의 천하...자연..

 

[500]

견고한 구조는 변화에 대한 무지와 지체로 이어지고 당연히 19세기 말 근대 질서의 도전을 맞아 힘겨운 대응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경우도 조선 후기 성리학의 완고한 구조로 말미암아 사회 역량의 내부 소모와 전체 과정의 지체를 겪지 않을 수 없었음은 물론입니다.

----> 이 점이 정말 속상하고 안타까운 대목..

 

[506]

고전 독법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 인 으로 나아가고, 인은 덕으로 나아가고 덕은 치국으로 나아가고 치국은 평천하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천하는 도와 합일되어 소요하는 체계입니다.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508]

고전 강독을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창신과 관련된 것입니다. 창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창신은 재조명과는 다른 창의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창의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갇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따라서 창신의 장에서는 개념과 논리가 아닌 '가슴'의 이야기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기는 시와 산문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 감수성, 창조성, 자유로움, 가슴 열기.... 말랑말랑 하이컨셉 하이터치..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 감성과 정서의 고양... 문사철의 장로부터 시서화의 장으로 옮겨와야 한다

 

[513]

<종수곽타타전>

 

나무 심는 곽탁타이야기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심히 반성되는 부분이다. 본성을 방해하고 사랑이 지나치고 근심이 지나쳤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그리고 내가 관계하는 사람들에게도.... 가슴으로 보고 가슴으로 이야기하고 가슴으로 나누자.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조정하지 말고..... 반성 반성 또 반성..... 다 받아들이는 바다를 조금이라도 닮아야지...... 반성 반성 & 감사 감사 신영복 선생님.

 

 

 

 

 

 

3. 책 소개와 평가 

 

(1) 목차와 전체적인 뼈대

 

 

책을 내면서

 

1.   서론

2.   오래된 시와 언- 시경, 서경, 초서

3.   주역의 관계론

4.   논어, 인간관계의 보고

5.   맹서의 의

6.   노자의 도와 자연

7.   장자의 소요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10.   법가의 천하통일

11. 강의를 마치며

 

 

이 책은 성공회 대학교의 고전 강독이란 교양강좌 강의를 바탕으로 정리한 책이다.

21세기에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인간, 만물이 하나인 관계론중심의 동양철학이라는 역설한다. 관계망을 파악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가슴이며 가슴은 감수성’, ‘상상력과 통한다. 교감 공감하는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나를 이해하고 세상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우선적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책의 구성도 감수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2<오래된 시와 언>을 먼저 넣은 듯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동양철학의 관계론이 잘 나타난 3<주역>을 살펴본다. 4~7장은 중국사상의 두 산맥이자 서로 존재하기에 균형을 잡아주는 유가와 도가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8~10장에서는 중국사상의 비주류로 분류되는 묵자, 순자, 법가를 소개한다.

 

그는 관계망이라는 키워드를 놓지 않고 동양 사상의 맥을 짚는다. 현대의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관계망에 있다. 그는 고전 독법 역시,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라고 시공간적 관계 속에서 고전을 보고 있다.

 

 

 

 

(2) 감동적인 절 또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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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의미와 동서양의 사상 비교, 그리고 현재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등등을 설득력있게 찬찬히 풀어가는 1<서론> 부분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30여 쪽 정도 되는 분량이지만 단 한 줄도 놓칠 수 없을 만큼 밑줄 그으며 되새기고 되새겨서 읽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특히 서양의 존재론과 동양의 관계론을 설명하는 대목은 압권이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p27)”이라는 말이 내 마음에 무찔러들었다.

 

그는 말한다.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의 접근 방법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각 즉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p28)”

 

비교 대조를 하는 것으로 존재의 본질을 다 드러낼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인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본질의 왜곡을 막으려면 관계망 속에서그것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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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노자와 장자에 대해서 더 깊이 빠져들었다. 노자 글귀 중에서 다 받아들이는 것이 바다라는 말과 더불어 살아도 사는 것처럼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살겠다는 장자의 <예미도중>의 일화(313p) 머리보다 가슴으로 사는 삶을 가르쳐주는 듯 하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343p)’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 마음은 비울 수도 채울 수도 있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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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사회철학자 닮은 순자를 재발견하였다. 그가 말하는 예론은 교육론과 통한다. 순자의 권학편(422p)’'청출어람'의 출전이기도 하듯이 순자의 습과 교화를 강조한 교육 철학이 좀 더 궁금해졌다.

 

 

 

 

 

 

(3) 내가 저자라면

 

나의 금서(?)였던 강의를 읽고 이제까지 내가 알았던 잡다구리한 지식과 사유들이 점점 명확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예로부터 금서는 좋은 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한번 읽고 끝내기에는 너무도 새겨야 할 구절과 거듭 곱씹어야 할 화두가 많은 책이다. 3~4번 더 반복해서 읽어야 할 듯하다. 동양고전에 문외한이어서 내가 저자로서 이 책의 구성을 어찌할 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공부하고 생각해 봐야 할 듯하다. 다만 내가 저자라면 아이들이 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고전강독 책을 쓰면 어떨까 생각이 든다. 과거 중심으로 고전 속 구절을 이야기 하지 말고, 과거와 비슷한 현재의 상황을 중심으로 화두를 던지고 과거의 사상가를 한명 한 명 불러와 그 문제를 풀게 하는 것이다.

 

고전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깊다.

특히 신영복 선생님의 세상과 삶, 그리고 동서양 사상에 대한 내공은 정말 머리 숙여 존경하고픈 마음이다.

 

2004년에 외면했지만, 2013년에 이 책을 다시 만난 것은 나와 고전의 인연이 진정 깊어야 함을 역설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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