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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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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3일 10시 59분 등록

신영복 강의

 

1. 저자에 대하여

 

20년 20일. 1968년 7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된 후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기까지 신영복이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다. 신영복의 생애는 20년 수감생활을 분수령으로 젊은 시절의 신영복, 수인으로서의 신영복, 출감 후 문필가이자 사상가로서의 신영복으로 나뉜다.

 

신영복의 고향은 경남 밀양이다. 선친 신학상씨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교사였다. 평생 교직에 몸담았고 한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천생 학자였다. 신영복의 고등학교 동창인 김문식씨는 “그의 집에 놀러갈 때마다 (아버님께서는) 항상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 집필하고 계셨다”고 술회한다. 1995년 여든여덟 나이로 타계한 신영복의 선친은 여든둘에 <사명당의 생애와 사상>을, 여든다섯에는 <김종직의 도학사상>이라는 책을 냈다.

 

신영복은 부산상고를 거쳐 서울대 상대에 진학했다. 사상가로서 신영복의 풍모에 압도된 나머지 그가 고리타분한 책상물림일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학창 시절 동료들이 기억하는 그의 면모 가운데 도드라지는 것은 그의 명석함이 아니라 오히려 다재다능함이다. 대학동창 홍재영씨는 “그는 주변의 친구들을 항상 재미있게, 지루하지 않게, 즐겁게 해준 엔터테이너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우선 떠오르는 기억은 그의 유머 감각, 명랑하고 쾌활했던 성품, 장난기 등이다.… 그 당시 상대에는 홍릉제란 연례 축제가 있었는데 무대를 주름잡은 주인공은 언제나 신영복과 유장희였다. 신영복은 행사 사회부터 즉석 재담, 시나 가사의 낭송, 가장행렬에 이르기까지 끼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로 팔방미인이었다.”(<신영복 함께 읽기>)

 

대학 1, 2학년 때 신영복은 가정교사 일로 바빴다. 그가 학생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3학년이 되던 1961년이다. 그는 상대 학생들로 조직된 경우회, 종교단체 CCC 산하 경제복지회, 동학연구회, 고려대 연세대 학생서클 세미나를 드나들면서 마오쩌둥, 마르크스, 케인스, 슘페터 같은 이들의 책을 읽었다. 이후 그는 경제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1965년 무렵에는 숙명여대 강사로 경제학을 가르쳤다.

1968년은 그의 인생 항로가 결정적으로 바뀐 해다. 당시 그는 육군 중위로 임관해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통혁당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감옥에서 20년을 보내는 대신 경제학과 교수로 이름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혁당 사건은 그의 인생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1968년 여름 수사당국이 발표한 통혁당 사건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을 중심으로 1964년 3월 만들어진 통일혁명당이 무장봉기, 주요 시설 파괴, 정부요인 암살 등의 방법으로 정부 전복과 공산정권 수립을 꾀했다”는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이 사건으로 학생, 지식인 등 33명이 기소됐다. 신영복은 수괴로 지목된 김종태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고 이문규는 이름만 알았다. 김질락과는 도합 열 번도 만나지 않았고, 통혁당의 존재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뒤에야 알았다. 그러나 현역 군인 신분이던 신영복은 통혁당의 핵심 인물로 지목돼 그해 7월 구속된 후,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사형선고 후 신영복은 곧바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이송된다. 이곳에서 이후 ‘신영복 옥중 문학’의 서장을 알리는 글 한 편이 탄생했다. 바로 ‘청구회 추억’이다. 이 글은 1966년 봄 서오릉으로 가는 소풍길에서 만나 약 2년 동안 우정을 나눈 여섯 어린이들과의 추억을 교도소 두루마리 휴지에 볼펜으로 기록한 것이다. 김명환 서울대 영문과 교수는 “신영복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맨 먼저 읽을 글을 고르라고 하면 나는 서슴없이 ‘청구회 추억’을 추천하겠다”고 말한다. ‘청구회 추억’은 화장기 없는 필치로 경험을 가감없이 기록하면서도 묵직한 감동을 남기는 신영복 에세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1970년 5월 신영복은 사형수에서 무기수가 됐다. 그는 같은 해 9월 안양교도소로 이감됐다가 1971년 2월에는 다시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거기서 15년을 보내고 수감생활의 마지막 2년은 전주교도소에서 보냈다. 그에게 교도소는 육체의 감옥이었지만 정신의 학교였다. 청춘을 잃었으나 지성의 깊이와 높이를 얻었다. 신영복의 육체가 스물일곱 청년에서 마흔일곱 중년사내로 쇠퇴하는 동안 신영복의 정신은 관념의 모험을 추구하는 반항아로부터 삶의 구체성에 뿌리박은 사상가로 성숙했다.


교도소에서 그는 일반사범으로부터 사상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무수한 책을 읽었다. 겨울이면 추위에 떨고 여름이면 바로 옆에 누운 사람을 증오하게 만드는 교도소 생활은 관념적으로 이해하던 ‘민중’을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4년 동안 같은 감방을 쓴 한학의 대가 노촌 이구영 선생과의 만남은 동양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 이전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던 서양 근대사상의 한계를 자각하고 ‘관계의 철학’을 사유하게 하는 주춧돌이 됐다. 그가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엽서를 모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과 성공회대 재직 중 고전강독 강의를 책으로 묶어낸 <강의>(2004)는 이 같은 그의 감옥 체험이 깊은 성찰의 힘과 만나 탄생한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주간경향 - 신영복 누구인가 (2011-02-15)에서 발췌

 

 

2.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첨부 참조)

 

3. 내가 저자라면


일단 저에게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 는 인생에 반드시 읽어보고픈 책이었습니다. 인문학 책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책은 뭐랄까.... 한번 읽고 감탄하고 후일 또 읽으며 그때 또 새롭게 감탄하는 그런 명품 중의 명품 입니다. 지금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데로 아는 부분은 아는 데로 ... 동서양 인식의 근본적 차이를 마에스터의 직강으로 듣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책이 마치 클래식 관현악단의 연주를 듣는 것 같습니다. 모든 부분이 '내 귀의 사탕'처럼 달짝하게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푸근한 안정감을 품은 풍부한 저음이 든든하게 받쳐주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악기의 다채로운 소리를 하나의 선율로 엮어냅니다. 일관된 주제를 표현하면서도 각 장마다 저마다의 고유한 빛깔을 잃지 않는 거장의 교향곡 같습니다. 신영복이라는 이시대 동양고전 마에스터의 지휘 솜씨에 푹 젖고 있습니다.

칼잠을 자는 감옥에서도 신영복 선생님은 스스로를 동양고전으로 가꾸어 낸다. 직장이라는 미로속에서 한탄하며 주저 앉은 내 모습이 부끄럽니다.


당대 최고의 사상가가 묶은 동양고전해법을 너무 빨리 읽었습니다. 지식이라면 습득하면 되지만 지혜는 시간을 두고 젖어야 합니다. 다시 읽고 또 읽을 뿐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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