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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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무슬림 친구들이 몇 있다.
어제 한 친구와 메신저로 얘기하던 중, 무심결에
"메리크리스마스"라고 했더니,
남자친구가
"너 크리스찬 아니잖아? 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거야?"
라며 반문해왔다.
"물론 아니지. 그런데 종교랑 상관없이그냥 기념해, 한국에선 크리스마스가 일종의 기념일, 공휴일이거든. 크리스찬이 아니어도 파티하고 즐겁게 놀아."
그러자, "너희도 100% 서구 문물에 물들었구나."라며 살짝 비꼬았다.
기분이 좀 나빠져서, 즐겁기 위해서 하는건데 뭐 어떠냐. 했다.
그러고 말았는데, 그뒤로 내가 왜 크리스마스를 쉬게 됐을까 생각하게 됐다.
크리스마스는 어릴때부터 내게 설날과 같은 급이었다.
예수탄생일이라기 보단, 빨간날로, 공휴일로, 친구들 혹은 가족과 다같이 모여 노는 그런 휴일쯤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엔
'나홀로 집에' 혹은 '러브 액추얼리'와 같은 크리스마스가 배경인
미국 영화, 영국 영화를 보았고, '당연히' 친구들과 만나 놀거나 남자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카드를 주고받고 선물을 주고받고. 뭔가 특별한 일을 하려고 애썼다.
언제나 이브엔 친구들과 가족들과
메리크리스마스, 라는 인사를 주고 받았고,
심지어 아주 신실한 불교 신자인 부모님마저도, 내게 과자를 잔뜩 넣은 양말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시곤 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서운했다.
30년동안 아무, 이상없이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지내왔고,
그간 한번도 누구도 내게 너 크리스마스를 왜 기념해? 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기에
아무생각없이 남들처럼 지나왔는데
이번에 첨으로 그런 제동이 걸렸다.
내가 왜 크리스마스를 기념할까.
그를 지나쳐,
왜 크리스마스에 선물받지 않으면 서운하고, 심지어 화가날까.
왜 크리스마스에 남자친구와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특별하게 보내야할까.
크리스마스에 해오던,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던 것들에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1년 넘게 세계여행을 하면서 이런 경험들이 꽤 많았다.
예를 들어,
아.침.밥.
여행자 숙소에 지내면,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둘러앉아 아침먹는 날이 많다.
서로 나라에선 아침으로 무엇을 먹느냐, 말하곤 하는데,
내가 "우린 밥먹는다."
하면,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뜨며, 깜짝 놀랐다. 어떻게, 어떻게, 아침에 밥을 먹을 수 있지? 라는 표정으로. 커피, 빵 등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는 유럽등지에선 더 심한 반응을 보였다.
페루를 여행할 때, 아침으로 빵에 아보카도를 발라먹는게,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이웃나라 에콰도르에 갔더니, 아침으로 빵에 아보카도를 먹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아침에 아보카도를 먹을 수 있지?" 라며.
아침에 밥을 먹는게 당연한 곳이 있고, 당연하지 않은 곳이 있었으며
아침에 아보카도를 먹는게 당연한 곳이 있고, 당연하지 않은 곳이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해온 것들이
다른 곳에선 생각조차 못하던 일일 수가 있었다.
심지어, 노는 날도 그렇다.
크리스찬 문화권에선 휴일은 일요일이고 주말은 토요일이지만,
무슬림 문화권에선 휴일이 금요일이고 주말은 목요일이다.
크리스찬 문화권의 휴일에 익숙해진 나는 ,
두바이에 갔을 때, 모든 관공서가 금요일에 쉬고, 일요일에 일하는게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무슬림 친구들을 만나기 전, 나는 무슬림하면 '테러'부터 생각났다. 각종 뉴스에서 때려대는 폭탄테러. 수염, 터번, 폭탄이란 이미지가 점철된 사람들이 무슬림이었다. 과격하다, 무섭다, ... 그런데 그들을 만나 무슬림얘기를 듣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다, 그 이상의 것들이 많음을 알게됐다.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 나름의 이유로 관습을 지니고 살았다. 100% 동감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오해한 부분들도 많았다. 나는 그동안 무슬림들을 내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사실 그들을 몰랐다. 뉴스, 영화, 드라마. 100% 미국을 주도로 한, 서방세계가 준 렌즈를 통해 나는 '무슬림'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그렇다.
한국인들은 나를 평균이상으로 골격크고, 남자처럼 키가 크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도 스스로가 골격이 크고 키가 큰, 거인처럼 여겼다.
하지만 네델란드인들은 내가 그들과 '같은' 골격을 가진, 아주 평균적인 신장의 사람으로 보았다. (참고로 네델란드는 남자 평균키 180cm, 여자 평균키가 175cm정도라 한다.) 거기선 나는 아주 평범한 체격의 사람이었다.
나를 보는 시선이 사람마다,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그동안 나조차도 나를 남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한 친구가 던진 크리스마스를 왜 기념하냐는 질문으로,
나는 내가 무심코 해온 '관습' 이나 '습관'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것들을 얼마나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알게됐다.
이 말고도 내가 '무심결'에 쓰고 살아온 렌즈, 관습은 얼마나 더 많을까?
올해는
크리스마스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남자친구와 특별한 이벤트 없이 지내도,
아무렇지가 않을 듯 하다.
정말 Merry Christma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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