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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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녀를 사냥하러 가자.”
L이 말했다. 그는 아름다운 S를 사냥하러 가자고 했다. 그에겐 사냥이라는 용어가 은유가 아니었다. 식인을 즐기는 그가 사냥이라는 용어를 쓴 것이 나는 불쾌했다.
“직접 나서서는 안돼. 우선 S의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
“연락이 올거라고 생각해?”
L은 비아냥거렸다. ‘왜 연락이 올거라고 생각하지?’ L은 나와 S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를 잇는 것은 묵언의 믿음이었다. 평소 연인이 아닌 친구라고 애써 부인해 온 것이 이런 순간에는 유용했다. 친구라면 당연히 연락 정도는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내가 단언컨대 S는 나에게 마음이 있다. 단지 그 동안 나의 입지가 불확실하여 온전히 마음 전체를 내맡기지 못했을 뿐. 그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S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내가 그녀를 기다려 온 시간은 그녀가 나를 기다려 온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일주일 간 나의 소식이 전국을 흔들었다. 그 동안 고사에 가까웠던 한국 과학계에 국민 영웅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번 건은 진짜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론 물리를 두고 논문 조작을 운운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고, 게다가 표절일지도 모른다던 국내 일부 학계의 반응은 그 표절 비슷한 것도 주장하지 못함에 따라 조기에 일축되었다. 학자들은 서구의 과학 권력이 동양에 의해 전복된 역사적 터닝 포인트로 평가했다.
하루에 소화할 수 없는 국내외 인터뷰와 강연 요청, 그리고 그 동안 이름도 몰랐던 크고 작은 국내외 과학상의 수상 소식이 쏟아져 들어왔다. 후원금 요청이 쇄도하여 하나 하나 처리하는 데만도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그 사이 L은 내 논문에 대한 국제 학계의 질문과 반론 메일을 나 대신 처리하였다. 그는 이 일을 매우 즐거워했다. 마치 세계 물리학자들과 WoW라도 하는 듯 밤새 채팅을 하곤 했다. ‘걔 중에 꽤 똑똑한 놈들도 몇 있긴 하군. 예를 들면 맥 보이 같은 놈.” L이 랩탑 앞에서 기글거렸다. ‘맥 보이는 현대 물리학계의 총아잖아 병신아.’ L은 별안간 파안대소를 했다. ‘믿지 못할거야, K. 넌 정말 큰일 났어. 이제 모두들 너를 폰 노이만을 능가하는 최고 천재로 인정하기 시작했어. 어떡하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L은 흘끗 나의 눈치를 보곤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걱정하지 마. 언제든지 빠져 나갈 구멍은 있어. 네 스스로 잘나지 않아도 된다고. 세상을 봐. 자기 부모를 잘 만나 재벌 2세로 태어난 놈들은 마치 자기들이 잘나서 잘난 줄 알잖아. 세상 사람들도 모두 그들이 잘났다고 평가하고. 넌 지금 그들과 똑같은 거야.”
일 주일이 지나도록 S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SNS에 떠 있는 S의 프로필 사진을 겨우 바라보았다. 그녀가 카리브해를 바라본 채 서 있었다. 그녀의 가늘고 긴 다리, 챙이 넓은 흰 모자에 가려진 소녀의 둥근 얼굴선. 전체 배경 사진은 미국 학회에 갔을 때 찍은 보스턴의 가을 정경이었다. 자신의 유전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사진들. 이 프로필은 지난 2년 간 변하지 않았다. 저장된 사진들만으로는 애인이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그녀의 전신을 찍어 준 사람은 누구일까? 그녀는 왜, 아아, 왜 연락을 하지 않는 거지?
수줍어서?
그 녀는 수줍음이 많은 타입은 아니다. 그 녀와 함께 했던 밤을 생각해 봐도... 그녀는 적극적이었고 호기심이 많았지. 그 녀는 어쩌면 L의 말대로 내가 먼저 연락하는 절차를 기다리는 지도 모르겠어. 이젠 내가 너무 큰 인물이 되어 버렸으니. 아마 너무 잘나게 된 나를 마주하기가 힘들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설마... 내가 자신의 연락을 알량한 짓거리라 폄훼할까봐 두려워 하는 것일까?
자만이 자라나 어쩌면 그녀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세계가 주목하는 인물이었고 한낱 동창 뜨내기에게 집착하는 건 구질구질한 짓이다. 그러나 날이 바뀌어 아침이 되면 지난 밤의 악몽이 나를 괴롭혔다. 그 후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아프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녀는 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고를 맞은 것 같았다. 연락할 수 없는. 가령, 매우 바쁜 일정으로 해외에 나가 있다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 사경을 헤맨다거나, 아니면 아예 죽었다거나... 기우들이 엄습했다. 어쩌면 내가 그녀를 구해 줘야 하는 상황은 아닌지?
꿈을 꾸었다. 나는 동화 속 수묵화처럼 부연 회색 동산을 올랐다. 언덕 위에는 디즈니 랜드의 원형이 되었던 프랑스풍의 작은 성이 있었다. 나는 눅눅한 녹색 이끼가 낀 나선 계단을 따라 올랐다. 성 안은 둥글었고 천정은 끝없이 높아 어둠으로 마감되었다. 벽을 따라 수 천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모두 오래되고 은밀한 것들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책들을 뒤졌으나 읽을 수가 없었다. 곧 무엇인가가 들이닥칠 예정이었고 조급했다. 감시자의 인기척에 놀라 나는 결국 성을 나와버렸다. 내가 하강하며 내려가는 길을 따라, 다른 남자들은 하나 둘 밝은 얼굴로 성채를 향해 올랐다. 그들은 모두 화살통을 등 뒤에 메고 있었다.
눈을 뜨고 앉은 자리에서 잠의 가루가 떨어져 나가길 기다리며 나는 깨달았다. 내 마음을 짓누르는 이 슬픔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성은 그녀였고 책들은 그녀의 마음이었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여자의 속내였고 정복하고 싶은 것은 그 성이었다. 내가 그녀를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항복하는 수밖에.
나는 타협안을 생각해 냈다. S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기 힘들다면 간접적인 소식이라도 전해 들어야 했다. 곧 연말 동창회가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S를 그 곳에서 만나는 것이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소식이나 듣자는 심산이었다.
나는 일부러 겸손함을 가장하여 평범하게 입었다. 지인들은 처지가 급변한 왕년의 무명남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들과 똑같이 입은 황태자를 그들은 치하하고 된 사람으로 평가했다. 갑작스레 수트를 빼입고 간다면 그들은 아인슈타인이라 한들 순식간에 광대로 만들어 버릴 테지. 나는 공인으로서 조심해야 했다.
동창회는 소소했다. 의외로 나에게는 참석을 바라는 동기의 연락조차 오지 않았는데 그것은 내가 늘 동창회란 곳을 겸연쩍어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일정이 바빴으므로 내가 과연 동기들의 모임에 나올 수 있는가? – 를 두고 그들끼리는 회의했을 것이고, 내가 S에게 그러하듯이 그들도 내게 거절당할 가능성을 굳이 확인하기 싫었던 탓이려니 생각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불길함이 엄습했다. S는 오지 않았을 거라는. 나는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하는 중이라는 신탁이 손에 닿은 문고리로부터 전해졌다. 동창들은 나의 등장에 증권거래소처럼 떠들던 대화를 멈추었다. 마치 시간에 브레이크를 건 듯 그들은 정지했다. 바에는 싸구려 빤짝이 크리스마스 장식이 어정쩡한 포물선을 그리며 죽죽 붙어 있었고 작은 스테이지에 과분한 사이즈의 미러볼이 돌았다. 방정맞은 미국산 클럽 음악이 모든 잡음을 뚫고 가사 하나 하나 또렷하게 들렸다. 봉- 봉- 쉑쉑쉑쉑 쉑쉑 -- 동기들의 얼굴에 유치한 색깔의 땡땡이 레이저가 오락가락 거렸다.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려 인사를 대신했다. 아이들은 최전방 북한군의 미소를 본 듯 당황했다. 아마도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눈치다.
바텐더에게 지폐를 지불하고 맥주를 받았다. 주둥이에 꽂힌 레몬 조각을 갈색병 안으로 쑤셔 넣고 눈을 드니 룸메이트였던 놈의 얼굴이 정면에 보였다. 여드름이 많던 얼굴이 매끈해졌지만 단 한치도 자라지 않은 짤똥한 키에 일본 원숭이처럼 길었던 인중은 그대로였다. 할아버지가 양조장을 한 덕에 3대가 잘 먹고 사는 그런 자식이었다. 그는 나에게 반갑다고 했다. 성의 없는 악수였다.
“축하한다.”
“뭘?”
“인생 대박 난 거, 축하한다고.”
“... ...”
“왜 왔어?”
“동창회니까 왔지 이유가 필요한가?”
“바쁘잖아. 게다가 넌 잘 나오던 놈도 아니고.”
“애들은 다 왔나?”
“왔어. A도 왔고.”
“...그리고?”
“S는 안 왔어.”
룸메이트는 이죽거렸다. 그는 눈치만큼은 빨랐다. 신탁이 실현되고 명치가 뻐근했다. 차가운 알콜을 너무 급히 들이킨 탓이겠지.
“요즘 S는 잘 지내나?”
“그 쌍년 말야?”
“... ...?”
나는 어이가 없어 헛 – 소리를 냈다. 일본 원숭이는 내 손에서 코로나를 뺏어 들었다. 그리곤 큭 웃음과 함께 큰 한 모금을 꿀꺽 – 정말 어이를 말아먹은 놈이로군. 그러나 맥주병을 다시 내 손에 쥐어 주던 그의 눈빛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엄청 잘 지낸다던데... 대학에서 남성 편력이 극에 달했다고 들었어. 그 애를 모르는 남자가 없더라. 사실 고등학생 때도 끼가 좀 보였지.”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건 여전하구나.”
“그 애가 넌 뭐가 좋냐? 쫌 어깨도 넓은 편이고, 살도 잘 찌게 생겼어. 나중에 아이 낳으면 퍼질 몸이라고.”
“하하, 누가 그래? 넌 정말 너만의 세계에서 사는구나. S는 너 같은 놈은 범접할 수도 없는 여자야.”
“뭐? 범접? 기가 차서. 야 이 자식아, 너라고 S같은 여자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정신 차려. S는 결코 너 같은 놈에게 가지 않을 거야.”
“나 같은 놈?”
“하하... 이 놈 보게? 아주 운때 좀 잘 맞았다고 꽤나 거만해졌네. 우린 A야말로 우리 동기들 중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잭팟은 네가 터뜨리네. 와... 인생 진짜 모르는 거라더니.”
“... ...”
“저기 함 가 봐라. 술이 떡이 되어 있더라. A가 저러는 건 처음 본다.”
나는 원숭이가 손짓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조명이 소외된 구석에서 누군가가 테이블에 맞절을 하듯 손을 모은 채 엎드려 있었다. 그 앞에는 술병들이 볼링장의 핀들처럼 어지러이 섰다. 누군가의 연민이었는지 어깨에는 두툼한 노스페이스 점퍼가 덮혀 있다. 나는 A에게 다가갔다. 고등학교 시절 A와 S는 공공연한 한 쌍이었으니 그에게서 S의 자취를 구할 가능성이 컸다.
“취했어?”
나의 말에 A는 미동하지 않았다. 어깨를 흔들자 노스페이스 점퍼가 바닥으로 미끌리듯 떨어졌다. 어깨를 경련하듯 몇 번 들썩인 후 A는 입가를 스윽 닦았다. 아 씨 – 토할 모양인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쓰레기통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A는 나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화장실로 향했다.
덩어리도 없는 콜로이드가 변기 위로 쏟아졌다. 세면대와 변기를 몇 번 오락가락 거리던 A는 세번 째로 입가를 물로 헹궈냈다.
“나 교수 안됐어.”
A는 세면대를 부여잡은 채, 한 쪽 모서리가 갈색 선으로 금이 간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서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고 처음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자식, 이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군. A의 얼굴이 형광등 불빛 아래서 유령처럼 하얬다.
“박사후 연구원으로라도 가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안됐어. 네 연구 때문에 내 길이 아주 꽉 막혀버렸다.”
“H 대학 말이야?”
“그래... 좀 도와주라. 나 계속 공부하고 싶다. 나 그 대학 가야 돼. 내 평생의 꿈이었어. 씨발.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됐을까? 한 거라곤 공부밖에 없고 나 그건 정말 꽤 잘했던 것 같던데... 남들이 다 돈 찾아서 떠날 때 나는 정말 학문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학문을 위해 남았단 말이다. 나는 의리를 지킨 탓에 숙청 당하는 사육신 같은 기분이야 지금.”
“... ...”
“네가 진짜 그런 천재야? 네가? 정말 이 한 세기를 상징할 천재놈이야? 하긴... 아인슈타인도 사실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지? 그저 운이 좋은 새끼였어. 운때를 잘만나서 머리를 희한하게 쓰는 바람에 잘 풀렸지. 아아... 이 엿같은 세상.”
“네가 욕하니까 신기하다.”
“그래도, 내가 잘 안되면 너무 억울하잖아? 이 한국 사회가 불의한 거잖아?”
“넌 잘 살잖아.”
나는 A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입학처에 원서를 내러 가던 날, 기사를 대동한 은색 벤츠에서 한 여인이 내렸다. 머리를 틀어올리고 발목까지 닿는 밍크코트를 걸치고... 훗날 그녀가 바로 A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마에서부터 출발하는 높은 코가 닮았었다.
“잘 사는 건 우리 부모지. 난 아냐. 난 정말... 강사짓 하면서 돈 몇푼이나 벌 거 같아? 그나마도 대학원 등록금으로 다 뜯기고... 박사후를 겨우 빌어서 간다해도 무급으로 가는 거고... 도대체 내 팔자는 왜 이 따위야! 나는 정말 공부한 죄밖에 없다. 공부한 죄!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 공부만 한 건 아니야. 나는 정말 물리를 사랑하고... 내 평생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이론 하나 쓰고 죽는 게 소원일 뿐이라고. 정말 그 뿐이라고. 그런데, 내가 왜 너 같은 놈한테 이렇게 당해야 되냐? 난 너무 억울한데? 나는? 나는... 내가 타고난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며 살고 성실함을 믿었던 사람인데 왜 너 같은 종자가 불쑥 나타나 내 인생을 완전 9중 추돌사고의 현장으로 만들어 버리냐고. 난 이제 공부만 하다가 늙어버려서 다른 건 할 수도 없단 말이지. 난 이제 잉여가 되어버렸어.”
A는 울었다. 그의 이지러진 얼굴이 피카소의 그림처럼 혼란스러웠다. 그는 나의 어깨 위에 무너져 꺽꺽 소리를 냈다. 나는 어설프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슴이 웬일로 뜨거워졌다.
“원래 세상이 그런 거야. 몇 명을 제외하곤 나머지는 그저 따르는 거야. 흐름이라는 것이 그렇지. 흐름을 만들지 못한다면 빨리 따르는 수밖에. 2인자가 그래서 맘은 편할 거야. 너도 지금은 좀 쪽팔리겠지만 지나고 나면 네 특유의 성실함으로 중간 이상은 하겠지.”
A는 울면서 내 점퍼를 움켜쥐었다. 그는 쇠창에 맞아 피흘리는 짐승처럼 파르르 떨었다. 나는 나 자신도 의도를 모른 채 떠들어댔다.
“바닥은 생각보다 높아. 미친 놈아. 넌 망해도 부모님이 주실 돈이 있잖아. 넌 이미 99를 가졌는데 하나가 부족하다고 이리 칭얼대어서야 되겠냐, 바보놈아?”
A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잘생긴 얼굴의 미간에는 슬픈 주름이 드리워지고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네 말이 맞지만. 나는 그저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잖아?”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A를 변기에 처박아 앉힌 후 화장실을 나오며 전화를 받았다. L이었다.
[상황 보고? ]
L이 느닷없이 물었다. 분명 S를 만났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아니, 오늘 그녀는 오지 않았어. ]
[그러기에 먼저 연락하라고 했잖아. 지금이라도 S에게 전화를 걸어 봐. 그녀는 지금 강남 근처에 있어.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그 여자에게 내 신장이 걸렸는데 그걸 내가 왜 모르겠어? ]
[어떻게 알았냔 말이야? ]
[페이스북, 이디어트! 요즘 정보는 거기에 다 있는데 넌 도대체 뭘 한거냐? ]
[... ... ]
[물론 약간 해킹을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거긴 아니니까 얼른 나와. ]
[어디로? ]
[지금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
바의 문을 열자 1층 도보 앞에 주차된 람보르기니가 보였다. 그 앞에는 이제 막 귀에서 스마트폰을 내리며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드는 L이 서 있었다.
“아 크리스마스엔 캐롤을 들어야지.”
L은 라디오 주파수를 이리저리 옮겨 캐롤을 찾았다. 마침 “Let it snow”가 잡히자 그는 으음? 하고 만족스럽게 목을 울렸다.
“3년 전 크리스마스가 떠오르는군. 그 해에 눈이 많이 왔어. 아아 스릴 있는 밤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누구나 크리스마스 때 하듯이 즐겼을 뿐이야. 춤추고 마시고 여자와 놀고. 눈길에 난 타이어 바퀴 자국 때문에 하마터면 잡힐 뻔했지.”
“그 여자를 죽였구나.”
“원래는 죽였었는데 이젠 죽이지 않아. 하나님이 우릴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날이잖아.”
“... ...”
나는 L의 거실에 전시되어 있던 세 번째 두상의 여자를 떠올렸다. 아마 그녀는 L의 외모와 차에 끌려 그에게 매달렸겠지. 그리곤 기대 이상의 저택에서 극도의 황홀한 정사 후 개죽음을 맞이. 만약 L이 충분히 자비로웠다면 화끈한 체력 소모에 지쳐 자는 사이에 종말을 고하게 했을지는 모르겠군.
“주 예수는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
L은 정면을 응시한 채 혼잣말처럼 나직히 읊조렸다. 분명 자신의 아련한 범죄의 추억을 회상하였으리라.
“그렇게 죽인 후, 네 거실에 머리를 전시해 두는 거야?”
“아... 삼 년 전의 그 여잔 그럴 만한 가치는 없었어. 죽음에 대한 예우는 갖춰 줬지만. 머리를 박제 처리하는 건 상당히 고된 작업이라고.”
말인즉슨, 그 동안 죽여 온 사람이 9명 이상이라는 뜻?
“단 한번도 구속된 적이 없었나? 그렇게 많이 죽였는데도?”
“하루에 전국에서 실종되는 인간이 몇인 줄 알아? 그리고 그 중 몇 건이나 해결될 것 같아?”
캐롤이 끝나자 L은 라디오를 껐다.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왜 그렇게 사람을 죽이는 거지?”
“살면서 그 정도 죽이고 싶은 사람은 생기지 않나? 너도 걸리지만 않는다면 죽이고픈 사람 정도는 있지 않았겠어?”
“그건 문제를 해결하는 옳은 방법이 아니야.”
“잘도 그렇겠군 천재 씨, 네가 문제를 잘 해결한 탓에 아직까지 S란 여자의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있는 거 아냐 지금?”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하도 답답해서 내가 직접 S 앞으로 너를 배송해 주려는 거다. 가서 직접 말하라고. 그냥 장미꽃 백송이랑 다이아를 들고 가서 널 사랑하고 너랑 영원히 자유롭게 퍼킹하고 싶다고 해. 그럼 안되나?”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아.”
“무슨 소리야?”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야. 그 여자는 매우 복잡해.”
“얼마나 복잡하기에? 현대 물리보다 더한 여자라 이건가?”
“가서 대화를 많이 해야 해. 쓸데없는 대화들을 이리저리 지껄이고 그 무드가 역치에 도달하게 별 수를 다 써야 한다고... 정녕 피말리는 작업이지. 아무튼 그 여자는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어. 젠장. 나의 최대 약점이지.”
“뭘 그리 두려워 해? 난 여자가 너무 쉽던데? 눈빛만 조절을 잘해도 대개는 여자를 얻을 수 있다고.”
“그건 너에게만 해당되는 거야. 나도 너 같은 외모에 키에 이런 차 끌고 다니면 웬만한 여자는 다 후릴 수 있다고.”
나는 짜증을 냈다. 그래, 너란 자식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 시정마 같은 인생을 사는 남자들의 고충을. L은 날이 선 내 말에 어깨를 으쓱 했다.
“네가 바라는 최고의 시나리오는 뭐야? 그녀가 너에게 와서 과거의 잘못을 빌면서 제발 거두어 달라고 비는 것?”
“비슷하군. 하지만 결과만 만족스러우면 과정이야 상관없어. 생각할수록 그녀가 나의 짝이라는 생각이 명백해지고 있어. 아니, 아니지. 사실 자신이 없어. 그녀는 가짜인 나를 깨닫게 되고 결국 나를 떠나게 되겠지? 아니면 아아... 모르겠어.”
“정신분열이 올 것 같으면 미리 말해. 이 길로 정신병원으로 보내 주지.”
L은 말과 달리 M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발렛 파킹을 위해 열쇠를 건네 받은 요원은 람보르기니를 몰게 되자 황공한 마음을 감추려 무던히 애를 썼다. 호텔 로비에는 2층 높이의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붉은 크리스탈들로 사치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로비 안쪽의 투명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스카이라운지에 도착하자 거대한 돔 유리창을 지붕으로 얹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나왔다. L은 주변을 좀 둘러보더니 사각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늦게 안내 요원이 따라붙었다.
“손님, 여기는 예약석인데요.”
L가 여자 요원을 노려보자 그녀는 주춤 -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매니저를 찾아 우리 자리를 손가락질하며 몇 마디의 대화를 하였다.
“찾았어?”
“뭘?”
“저기 벽 쪽에 앉아 있잖아.”
L은 메뉴 테이블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레 L의 등을 방패 삼아 몸을 가린 채 벽면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한 여인이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한 뼘이나 머리가 더 길어 지나온 세월을 실감케 했다. 푸르스름한 회색 여우털이 달린 크림색 원피스가 핑크빛이 살짝 도는 속살과 잘 어울렸다. 여전히 고운 동그란 이마 선, 그 끝에 달린 투명한 크리스탈 귀걸이가 아롱거렸다. 그녀는 4인석 테이블의 벽면에 앉아 있었고 그 녀 옆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앉았다. 수트를 입은 한 남자가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막 늦은 저녁을 끝냈는지 크림이 이리 저리 묻은 큰 파스타 접시가 두 세 개 놓여 있었다.
남자가 함께였다. 역시,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에게 남자가 없기는 어려운 일이겠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내가 그녀를 관찰하는 사이 L은 음식을 주문했다. “여긴 미슐랭 가이드 몇 점에 해당하는가?” “예?” 남자 서버의 쇳소리 나는 예?란 말에 L은 별로 기대할 가치를 못느끼곤 손등을 휘휘 내저었다. 그리곤 매니저를 향해 팔을 들어 손가락을 휙 튕겼다.
“로마네 꽁띠가 마시고 싶은데.”
“죄송합니다만 고객님, 우리 레스토랑에는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 뭐가 있지? 샤토 페트뤼스? 샤토 라투르?”
“여기 와인 메뉴에 나와 있는 것이 준비된 전부입니다, 고객님.”
“하아... 샤토 무통이 있군. 이걸로 한 병.”
S가 약간의 소란을 느끼고 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황급히 얼굴을 숨겼다. L은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 아직도 마음이 동하나?”
“훨씬 아름다워졌군. 그런데 남자가 있네.”
L은 잠시 뒤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튤립 모양으로 접힌 하얀 넵킨 끝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말했다.
“흠, 이봐 친구. 그건 문제가 안돼. 넌 진짜 문제를 모르고 있어. 이제부터 정말 재미있어 질테니 잘 지켜보라구.”
서버가 와인을 가져왔다. 아래가 넓은 크리스탈 와인잔이 세팅되고 서버는 와인의 라벨을 L에게 확인시켰다. “테스팅 하시겠습니까?”
L은 한 모금을 입안에서 굴리더니 퉷 – 소리나게 다시 와인잔에 뱉었다.
“맛이 없어.”
“... ...”
서버는 당황했다.
“테스팅 하라면서? 맛이 없어. 맛이 없다구. 이 와인은 아니니까 다른 와인으로 줘.”
“아 그러면 어떤 와인으로...”
“혹시 와인 이거 가짜 아냐? 정말 샤토 무통이 맞냔 말이야?”
L은 언성을 높였다. 돌발적인 상황에 서버 만큼이나 나도 당황하였다. 사람들이 우리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다. S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아아 S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나를 알아보아서였을까? 아니면 그저 반사적인 회피였을까?
“나를 알아본 것 같아.”
나는 조용히 L에게 말했다. 멀리서 S는 서둘러 일행들과 옷을 챙겨 입었다. 곧 떠날 셈인 듯했다. 매니저가 달려왔다. “고객님,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L은 손가락으로 턱선을 쓸었다.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L은 테이블을 손으로 탕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큰 키가 관객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선사했다. 그는 와인잔을 들어 매니저의 코끝으로 내밀었다.
“이런 와인을 접대할 땐 말이지, 바닥에 찌꺼기가 모두 내려 앉기를 기다린 후에 윗쪽만 따라야 하는 거야. 도대체 서버를 어떻게 교육 시켰기에 와인을 진흙탕물로 만드는 거야. 여기 이 침전물이 보여? 보이나? 이게 바로 첫 테스팅 잔인데도 이 모양이다. 게다가 냉장 보관은 제대로 한건지 도대체 이게 와인인지 김치인지 분간도 못할거면 팔지를 말아야지. 이런 건 와인도 아니니 갖다 버려!”
L은 와인잔을 휙 내뿌렿다. 마침 우리 테이블을 지나쳐 빠져나가려던 S의 원피스와 그녀의 얼굴에 자주색물이 촤악 뿌려졌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어우 저런! 마드모아젤? 괜찮으신가요?”
L은 와인잔을 든 채로 어깨를 으쓱 했다. 나는 냅킨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닦았다.
“너 혹시 S 아니니?”
나는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하얀 냅킨을 거두자 아름다운 그녀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의 S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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