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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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취직을 했다. 전공이 마음에 안 든다고 일 년 동안 다른 공부를 하더니, 번듯한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첫 번째로 지원서를 낸 회사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뿌듯함에 사회인이 된다는 설렘이 더해져 요즘 아들이 부쩍 달라졌다. 성격 급하고 직설적인 나에 비해 원래 차분하고 진중한 편이지만,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인지 지난 일년간은 조심하는 태도가 두드러졌다면, 완연하게 명랑하고 주도적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 아들을 보며, 크게 속 썩이지 않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에 감사하는 한편, 우리 가족에게도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겠구나 싶다. 경제자립으로 명실상부한 성인이 된 아들과 같이 생활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어찌된 일인지 우리집에서 내가 제일 철이 안 들었다. 딸도 아들
못지않게 생각이 깊은 편이라, 즉흥적이고 경제관념 없기로는 내가 최고다. 맨날 외식하자고, 어디 놀러가자고 들쑤시는 것은 나요, 충동구매를 하는 것도 나인지라, 아들에게서 “뭘 그렇게 많이 샀냐?”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아직까지는 아들이 내 그늘에 있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성인대 성인의
관계를 정립해 가며 소소한 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겠구나 짐작이 간다.
걱정이 앞서는 것은 아니다. 아들이 만약
나에게 맞선다면, 맞서기 위해 맞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질에 복무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뜻대로 살고 싶어하듯이 아들또한 그럴 것이 자명하다. 이렇게
기본입장을 정해 놓으면 어떤 낯선 장면에 부딪혀도 소화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직장인의 엄마”라는 변화에 익숙해질 때쯤이면 결혼도 하게 될 것이고 나는 또 다시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이게 되리라.
최근 잦은 슬럼프의 기저에는 “나이든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자리하고 있다. 안약만 세 가지인데다 자꾸 상식과 염려가 늘어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시작인데 그 먼 길을 어찌 갈까 싶어 내가 나에게 낯선 위화감 속에 몇 달을 허비한 끝에 이 구절을 만났다.
“우리가 왜 변화해야 하느냐고?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작은 세포가 아이가 되고 젊은이가 되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그리고 죽는 것이 삶이다. 순수한 아이의 생각이 야망으로 가득한 젊은이의 생각이 되고, 이내 세상의 한계에 지쳐버린 장년이 되고, 노회한 노인이 되고, 이윽고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변화 자체가 우리의 일상이고 삶이다. 생명이 주어진 순간 삶은 시작되고, 삶이 주어진 순간 죽음의 시계도 카운트되기 시작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160쪽
삶 자체가 변화라는 말씀이 가슴에 스며든다. 문득 아들이 갓난 아기일 때 기던 모습이 떠오른다. 생후 10개월, 필사적으로 몸을 버둥대며 한참을 애써도 겨우 30센티미터 밖에 이동하지 못했던 아기가 직장인이 되었는데 내가 나이드는 것을 거부한다면 어찌될까. 그것이 순리요 삶의 정체인데? 슬며시 마음이 넓어지며 발이 슬럼프의 바닥에 닿는 것이 느껴진다.
“금요 편지를 보내지 못했다.
아마 당분간 보내지 못할 것 같다.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이내 다시 가벼워 졌다.
하늘에 흐르는 저 흰구름 가닥처럼
봄이 온다.
배낭을 매고 떠나고 싶다.”
2월 16일자의 마음편지,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홈페이지에 남기신 자취이다. 병환이 꽤 깊었을 시기인데 어떻게 “이내 다시 가벼워졌다”고 쓰셨을까, 가끔 궁금했다. 나아가 마지막 순간까지 운명 앞에 의연할 수 있었던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이제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준엄한 목소리를 들으며, 삶이 변화라는 것을 뼛속 깊이 체득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감히 추측해 본다. 새해에는 자취생처럼 단출하던 식단을 개선하는 일부터 변화해야겠다. 그럼으로써 성인이 된 아들을 존중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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