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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31일 09시 06분 등록

인공수정을 준비하며

 

 

우리는 12월에 만나질 못했구나. 생리를 맞이하며 나는 네가 이번 달에는 찾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 의사 샘이 지난 달에 이야기를 했었지. 생리가 시작되면 3일째에 병원에 오라고 말이야

 

난임 병원에 다니든 어떻든 의식적으로 아이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가장 힘이 드는 시기가 배란일부터 생리일까지의 2주간과 아이의 심장이 뛰는 걸 확인하기 까지라고 해. 나도 그랬어. 적극적인 노력을 한 첫번째 달이었던 2주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어그건 대학입학시험, 교사임용시험을 친 후 발표 나기 전까지, 골수검사를 해 놓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느낌과 같았어나는 혹시라도 네 발 소린가 하여 내 몸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민감했어. 버스를 탈 때마다 멀미가 나고, 냄새에 민감해지고, 차고 단 것이 먹고 싶어서 아이스크림과 평소에는 안 먹던 회냉면과 칼국수를 먹어댔거든.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지. 아빠도 내가 굴전과 회냉면을 찾을 때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하셨는데라며 기대를 숨기지 못했지. 그도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12월 들어서는 내가 체력이 떨어져 골골대니까 그가 도맡아 놓고 아침밥상을 차렸지. 나는 그에게 선물이 될 소식을 전하기를 바랬어. 게다가 태몽일지도 모르는 꿈을 적으면서는 어찌나 설레던지 말이야. 설레발이 되고 말았구나

 

하지만 말이야 나는 그런 믿음이 있어. 여러 동이의 김치국과 설레발들이 거름처럼 쌓이고 썩어서 네가 자랄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믿는단다. 잡초들이 잘 썪으면 얼마나 좋은 유기질 퇴비가 되겠니? 생활체육이 활성화되는 것처럼 이런저런 논의와 실험들이 초원처럼 무성한 게 좋아. 너를 만나는 시간이 아직 안 되었나봐.  

 

너를 만나러 가는 동안 일주일에 한 통씩 편지를 써서 남기기로 나는 결심했어. 우리가 만나는데 얼만큼 시간이 걸릴 지 모르겠지만 태교편지이므로 네가 태어나는 순간까지 이어지는 항해일지가 되겠지. 네가 내게로 잉태되기 전부터 너를 안기 전부터 시작한 거지. 나는 말이 없는 사람이고, 소통에도 서툰 사람이지만 글로 편지를 쓰는 건 말로 하는 것 보다는 어렵지 않은 것 같아.

 

병원에 갔어. 우연히 아빠의 후배 부부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지. 우리와 같은 선생님께 진료를 보고 있었어. 동지애나 전우애 같은 게 느껴졌어. 생리 3일째에 왔다는데도 진료실 앞 간호사는 진료 보기 전에 일단 소변검사를 하고 오라고 했어. 왜 임신테스트기를 하냐니까 혹시나 해서 그렇대. 한 줄이 나왔지. 이번에는 후배 부인분의 조언으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알았지. 어디서든 동무가 있으면 좋은 것 같아. 나는 화학적 유산이란 게 있다는 걸 읽었지. 수정은 되었지만 착상하지 못하는 거래. 그런 걸 검사하나 혼자 생각했어.

 

진료실에 아빠와 같이 들어갔어. 그는 내 오른편에 앉았어. 그가 오른쪽에 앉아 있으니 편안했어. 우리는 길을 갈 때도 내가 그의 왼쪽에 서서 오른팔로 팔장을 끼거나 손을 잡곤 해. 선생님이 약을 처방해 주었어. 클로미펜은 생리 3일째부터 5일간 먹는 알약이야. 그리고 엑토스는 14일 내내 먹는 거야. 그걸 매일 일정한 시간에 먹으라고 했어. 이번 달은 주사약이 처방되었어. 이것도 배란을 증장하는 용도야. 주사실에 가서 주사를 맞고 집에서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고 영 못하겠으면 주사 맞으러 병원으로 오라고 했어. 

 

주사실에 들어가니까 연분홍색 옷을 입고 미소가 밝은 분이 있어. 두 개씩 묶인 여섯 개의 상자를 꺼냈어. 주사는 세 번 맞는 거야. 사람들이배주사라고 부르던 건가봐. 하얀 가루를 식염수에 녹여서 주사기에 넣어서 배꼽 아래 삼각형 꼭지점 지점에 직각으로 찔러 넣으라고 했어. 양쪽을 번갈아 가면서 말이야. 혈관주사가 아니라 근육주사니까 직접 맞으라고 하는 거겠지? 나는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크리스마스날에 한 번 그리고 이틀 뒤에 한 번 주사를 하라고 했어. 주사기에 소독솜, 약품 상자까지 주사약 보따리가 제법 컸어. ‘크리스마스 선물이네요농담을 하며 웃었어. 집에서 스스로 주사 놓는다니까 나는 마약중독자가 퍼뜩 떠올랐어. 마약중독으로 죽은 미국 여자가수 휘트니 휴스턴과 남자 가수 마이클 잭슨을 떠올렸지. 40살도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 아빠 자랄 때는 두 사람 모두 대단한 스타들이었지. 휘트니 휴스턴의 보디가드 영화가 있어. 나는 아빠에게 우리 그 스타들의 코스프레를 하면서 과배란 유도 배 주사를 놓자고 제안했어. 나름 조크였는데 재미있었기를^^   

 

의사선생님은 배란이 일어나는 2주의 중간쯤에 한 번 병원에 와서 배란 상태를 보자고 했어. 그리고 약을 더 쓸지를 판단할 거래. 그 날 와서 인공수정 시술일을 잡을 거랬어. 인공수정은 배란유도제 주사약과 알약을 통해서 양쪽 난소에서 배란이 여러 개가 되도록 유도를 해서(이걸 과배란유도라고 해) 여자를 준비해. 당일날 남편이 병원을 방문해서 정자를 채취한 뒤 약품처리를 해서 운동성이 떨어지거나 기형인 것은 걸러내고 건강한 정자만 선발한다는구나. 수정이 쉽도록 나팔관 입구까지 넣어주는 시술이야. 싸인해 오라는 동의서에는 여러가지 부작용이 서술되어  있었어. 과배란 유도의 휴유중은 난소가 과민해 질 수 있는 것이며, 자연임신율(10%)보다 조금 임신성공률이 높아지고(10%~30%), 자궁외임신과 자궁내임신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고, 기형아율은 일반 임신과 같고, 다태아률은 높아진다는 구나. 생각보다는 시간이 적게 걸리고 간단한 거라는구나. 인터넷 검색으로 인공수정 시술 후에는 프로게스테론이 주 내용인 질정을 처방받고 뛰면 안된다는 걸 읽은 기억이 났어.

 

뛰면 안된다니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어. 왜냐면 인공수정은 1, 2 2회 예정인데 다음달 시술 예정일에 방학이 끝나서 출근을 해야 하니 말이야. 요즘 우리 반에는 교실을 이탈해서 주차장과 정문으로 뛰는 학생이 있어. 사춘기 호르몬의 영향이려니 해. 그 학생이 내달리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달려가 잡지 말아야 하는 상황인거지.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할 수도 있고 말이야. 어쩌면 1월 말에 개학을 해도 나는 병가를 쓰고 2월 내내 못 나갈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12월 남은 동안 뒷정리를 싹 해야겠구나. 이런 현실적인 계획표들이 머리 속을 복잡하게 했구나. 그래도 중요한 업무와 정리는 다 끝이 났으니까, 실무원 선생님도 계시니까 내가 이런 사정으로 병가를 열흘간 내서 기간제 교사가 오더라도 제일 괜찮은 시기가 바로 이 시기지. 아이들도 불안하지 않을거야. 2월은 정말로 흐지부지 지나가거든. 엄마는 내일 출근해서 남은 이틀 동안 뒷정리를 싹 다 할 작정을 했어. 더 가지 않아도 되도록 뒷정리를 마치 사람이 죽는 것처럼 깨끗이 해야겠구나 싶었지. 네가 언제 우리를 찾아 와도 편안하도록 잘 써포트를 할께.  걱정말거라. 얘야. 네가 오고자 한다면 언제든 와도 좋단다.

 

아빠는 야근 출근을 하고, 나는 한의원에 갔어. 엄마가 다니는 한의원은 인연이 오래된 집이야. 내가 스물한 살 때부터 한의사선생님을 알고 지냈어. 한방 주치의 선생님인거지. 지난 여름에 여기서 우리는 약을 한 재씩 먹었지. 아빠는 오늘 엄마와 병원에서 만나기 전에 벌써 진맥 받고 약을 지었어. 우리는 나이가 많아서 말이야. 아무래도 더 정성을 들여야 할 것 같아. 마흔이 넘으면 그냥 지내기에도 진기가 떨어지는데 자식을 기대한다면 분갈이도 하고, 퇴비도 넣고 그래야 할 것 같아.

 

근데 한의원에서 걱정을 많이 들었어. 4월에 결혼 직후에 왔을 때는 몸이 좋았는데 지금은 맥이 너무 약해져 있고, 호흡이 짧고 심장도 약해져 있다고 했어. 어디 어디 어디 라고 말했는데 안 좋아진 데가 너무 많고, 한의학 용어라 알아듣지를 못하겠더구나. 몸이 너무 약해서 수정이 되더라도 착상이 어려울 정도라는 말만이 꼿꼿이 선명히 들렸어. 아이가 착상하기 어려운 몸의 상태란 말을 듣고 충격을 많이 받았어. 이번 달에 인공수정 시도를 하는데 그럼 어떻하나 가슴이 벌렁거렸지. 한의사 선생님은 무엇에 그렇게 신경을 쓰느냐고 물었어. 혹시 부부 사이의 일로 그렇다면 몸이 이렇게 지쳐있으면 화내기도 쉬우니, 화 날 때 내게 되더라도 금방 먼저 다가가 화해하라고 하셨어.  

 

나는 내 몸이 이렇게나 나빠진 원인에 대해 돌이켜 살펴보았어. 부부 사이에서는 큰 소리 날 일이 없어. 네 아빠가 나한테 맞춰주시거든. 주된 스트레스를 직장에서 받고 있는 것 같아. 일단 3시간의 왕복 출퇴근을 해야 하는 게 힘이 들어, 그리고 아침 8:30에 아이를 받아야 하는데 차가 밀리면 시내버스 안에서 동동거리느라 지각하면서 마음 고생이 많지. 아주 간을 빠작빠작 볶고 튀기는 것 같아이탈행동과 공격행동이 많은 아이들을 볼 때 몸과 마음이 힘들어. 그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하느라고 뛰고 나는 그 아이가 정문으로 나가서 다칠까봐 찾아 헤매고 말이야. 어쩐 일인지 다른 아이들을 모두 괴롭히고 꼬집는 아이를 볼 때 무력감을 느껴. 그 아이한테 나도 맞고 꼬집히니까 말이야. 그 아이를 제제한다고 몸싸움을 해야하는 것도 나를 기진하게 해. 이럴려고 특수교사가 된 게 아닌데 싶어서 말이야. 올해 맡은 업무는 나와 맞지를 않다. 특히 일을 다 끝내지를 못하는 것 자체가 좌절스러워. 게다가 새벽에 일어나 글 쓰고 책 읽는 일까지 하려니 정해진 시간과 체력에서 버거웠겠지.  

 

이 이야기를 너에게 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기도드리는 님들께만 이야기를 할까 잠시 망설였단다. 아이는 어른들 사이의 일을 다 알 필요도 없고, 어른이 아이를 잡고 그 모든 걸 의논한다는 것도 우습고 말이야. 나는 네가 너무 일찍 세상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되길 바라고 있단다. 네 아빠와 엄마가 서로 부모됨의 역할을 잘 하고, 또 우리가 사이좋은 부부가 되어서 너는 우리 울타리 안에서 세상 근심없이 안온히 쉬면서 자라게 했으면 좋겠어. 나는 네가 자라는 동안 어린 너를 잡고 아이가 듣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거란다. 나는 아빠와 주된 이야기를 할 거란다. 엄마 주변에는 부부 사이가 좋지 못한 경우 엄마의 딸, 아버지의 딸로, 또는 엄마의 아들로 부모의 상담자 역할을 해야 했던 지인들이 있단다. 한결같이 그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 엄마는 절대로 너를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란다. 나는 아빠와 화목하게 사는 게 결혼의 제1 소원이란다.

 

이 편지를 네가 읽는 건 어른이 되어서 일이지. 나는 지금 너의 영혼을 향해 편지를 쓰는 거고 말이야. 아직 잉태되지 않은 아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영혼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했지. 그러니까 너는 이런 나의 마음을 성인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에 이 글을 읽고 있을 거고, 그리고 나 역시 그럴 나이에 너에게 편지를 보여주겠구나.

 

한의원에서 나와서 추어탕을 한 그릇 먹었어. 밖은 벌써 어두컴컴하고 추웠어. 하긴 어제가 동지였어. 일 년 중에 밤이 제일 길다는 날. 그래 지금 어쩌면 나는 너를 만나는 길의 어둡고 추운 부분을 걷고 있는 것 같구나. 내 몸이 이런 상태인 줄 몰랐어. 봄까지만 해도 굳이 보약이 필요하지 않다고 할 만큼 좋았어. 그럼 어쩐다?

 

며칠 동안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기도를 하던 것도 좀 시들해져서 늦잠을 잤지. 너를 못만날 지도 모르는데 새벽에 계속 일어나야 하나 욕심 부리는 거 아닌가 몸을 사렸어눈에 띄게 나한테 잘해주려고 노력했던 남편에게도 미안했어. 우리는 동지와 크리스마스를 잇는 여러 행사들을 둘이서 지나면서 조금씩 갈피를 잡아갔어동지의 의미를 묵상했고, 겨울의 한 가운데에 오신 예수님처럼 내 삶에서 기쁨을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묵상했어.  

 

엄마는 절에 오래 다녔어. 절에서는 동지를 초파일처럼 명절 취급을 했어. 커다란 솥에다 쑨 팥죽도 맛나지만 특히 스님 말씀을 들으면서 동지의 의미를 새기는 일이 좋았어. 동지법문을 듣고 절을 나오면 희망이 막 생겨났어. 절에 안 간지 3년 되었어. 그러나 내 마음창고에 쟁여둔 것들이 만기가 된 예금처럼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네.  

 

일 년 중에 밤이 제일 긴 날이지만 바로 다음 날 부터는 낮이 아주 조금씩 길어지고 있는 분기점이 바로 동지니까 말이야. 일년 중에 기온이 제일 아래로 내려가는 가장 추운 날도 아직 동지 뒤에 있지만 희망은 벌써 시작된 거라고 하셨지. 가장 추운 순간에 갖는 밝음에 대한 희망이야. 중요한 것은 지구가 공전 궤도에서 밤이 짧아지는 쪽으로 틀림없이 조금씩 매일매일 움직여간 것처럼 날마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가고 있다는 실증적인 증거와 실천이 필요해. 그게 무언지를 찾아서 우선해서 매일매일 확보하는게 필요한 듯 해. 그럼 어떤 징후들이 있더라도 희망은 희망으로 실현될테지. ‘착상이 되기 어려울 만큼 몸이 약해져 있다는 소리를 듣고 온 나에게도 이런 동지의 지혜가 필요해.   

 

엄마는 말이야. 새벽에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나는 새벽에 하는 일들이 너무너무 좋단다. 일어나서 모닝페이지를 하고 절을 하고 글을 쓰는 일정 말이야. 그건 나에게는 에너지를 쓰는 일이 아니라 에너지 탱크에 접속하는 일이야. 그러니 몸이 안 좋아서 휴식과 요양이 필요하다면 새벽일정은 지키고 낮에 쉬고 운동하는 걸로 했으면 좋겠어. 너를 만나려면 새벽일정을 포기해야 하나 한동안 심각하게 생각을 했단다. 밝음은 강점,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기반해서 만들어 가는 거니까 말이야. 엄마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 계속 헌신하고 싶어하는 이 일을 계속 하고 싶단다. 그럼 나는 너무 행복해지지. 게다가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제 이틀 뒤면 겨울방학이야. 이틀만 더 무리를 하고 방학이 되면, 낮의 일이 없어지니 좀 편안히 쉬자 싶어. 그러니 내가 방학 때 낮에 좀더 여유를 가지고 쉬더라도 새벽에는 기쁨을 주는 일정을 지켜 가는 게 내가 찾아낸 지혜란다. 나는 스스로를 기쁘게, 행복하게 만들면서 너를 기다릴 작정이란다.      

 

추운 날을 보내는 지혜에 대한 또 다른 힌트는 크리스마스를 지내면서 수신한 것 같아. 아이를 양육하는 건 결혼의 목적이나 본질이 아니란 걸, 결혼은 출산과 양육 같은 공통 과제보다 훨씬 큰 개념이고, 삶은 그보다 더 큰 개념인 걸 깨달았지. 결혼하고서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를 우리는 행복하게 잘 보냈어. 함께 보낸 행복한 시간, 기쁨과 미소로 추억할 수 있는 이런 에피소드들은 파워풀 해서 약효가 좀 오래가는 에너지원이 되는 것 같아. 이런 것들을 많이 마음창고에 쟁이며 살고 싶어졌어.  

 

이브날은 나는 출근하고 그는 야간 근무를 하고 새벽에 퇴근한 날이었어. 저녁에 퇴근해 보니 그가 만든 크리스마스 만찬이 있었어. 만찬 준비를 시킬 생각은 아니었어. 그제 출근했는데 내 직장 동료분을 만났어. 나더러 네가 찾아오면 휴직하라고 한 분이야. 늦은 나이에 임신해서 무리해서 직장 다니려다가 조산하거나 유산하지 말고 태교에 집중하고, 3년 육아휴직기간 다 쓰면서 아이 키우면 어린이집 보낼 나이가 된다고 했지. 그분이 "결혼하고서 첫 크리스마스인데 뭐 하세요? 저는 스테이크 구웠어요." 하길래 원래 그러는 건가 싶어서그럼 우리도 스테이크 구울까요? 나 그거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말했지.

 

그는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해서 퇴근길에 서울역 롯데마트에서 장을 봤대. 호주산 청정육이 세일하길래 손바닥만한 걸 사고 빕스 소스에 양송이와 양파 마늘 등의 야채를 넣어 맛을 내고, 파프리카를 통째로 후라이팬에 익혔더라빨간 산타인형이 막 둥근 초컬릿 돔을 기어오르려는 케이크도 있었어. 털달린 후드 티를 커플로 사다가 포장해 놓았어. 아빠는 이런 커플룩을 좋아하셔. 완전 섬세하지 않냐? 와인도 한 병 있었어. 고기에서 육즙이라고 하는게 나왔어미디움과 웰던의 중간이라고 말을 했지만 나는 피 같아서 좀 그랬어. 내가 버리려고 잘라낸 힘줄을 그는 후라이팬에 다시 구워서 맛나게 다 먹었어. 고소하다고 하면서 말이야.

 

늘 이런 걸 꿈꾸었던 것 같아. 스테이크가 없어도 돼. 양말 한 짝이라도 머리맡에 놓여있길, '사랑한다. 화이팅' 이런 간단한 문구가 적힌 카드를 받길, 그리고 매일 먹던 상에 특별한 음식 단 1개만 놓였어도 식구들이 앉아서 먹는 가족 만찬 말이야. 이런 첫 단추가 꿰어져 많이 고마웠어나는 낮에 학교 아이들에게 너무 싼 선물을 준 것 같아, 그리고 세 아이 것은 선물을 고르고 세 아이 것은 못 골라서 길쭉한 과자로 통일한 게 마음에 걸렸어아빠는 철도파업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들을 이야기했어. 먹고 살기 바빠 크리스마스 챙길 틈이 없었던 부모님들 생각에 미안했어. 죄책감은 내려 놓고 우리가 먼저 행복하자는 모토를 생각했어. 부모님보다 더 행복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내려놓으려 해. 서로에게 보낸 카드를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다 세워놓았어. 후광이 나오는 것 같아.  

 

크리스마스 날에는 대청소를 했어. 그는 빌라 계단 거미줄을 걷고 환기를 시키고 마포질을 하고 빗자루를 부셔놓았어. 그 다음 집 차례. 그가 일부를 세탁망에 넣어 세탁기를 돌려놓고화분을 치워가면서 청소기로 민 곳을 내가 꿇어 엎드려 싹싹 닦았어. 내가 오양물이 나오는 걸레를 빠는 사이에 그가 밥을 차렸어저녁에는 같이 명동성당에 갔어. 크리스마스인데 교회에 놀러오라는 용산선생님의 이야기에는 '우리는 교회도 안다니는데 뭘' 하던 사람이 명동성당에 한 번 가볼까냐는 말에는 선뜻 작전 계획을 짜더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집회가 있을 때 거기서 보낸 밤들이 있어 친숙한 거였어. 너무 추워서 성물을 파는 건물 지하의 화장실에 가서 몸을 녹이려 했단다

 

명동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줄을 서서 움직였어. 꼬쟁이채로 회오리로 꼬아서 튀긴 다음 시즈닝을 묻쳐 주는 감자튀김 2천원 한 개 사먹으면서 올라갔어. 성당 본당으로 들어가는 긴 줄이 문 마다 달려 있었어. 우리는 둥근 등이 열매처럼 달린 나무를 지나 성모동산에 가서 노란 초를 하나 밝혔어. 어제의 크리스마스 만찬에는 청홍초를 사온 그가 이번에는 노랑 초를 사왔어. 우리는 너를 만나길 손을 잡고 기도했어.

 

지금 그는 자고 있고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왔다갔다 했어. 찐빵 2개와 사과쥬스 고봉 1잔을 먹으면서 너한테 편지를 쓰고 있지. 남향인 이 방에 아침해가 들기 시작했어. 우리집 베란다 정원에는 오늘 분홍색 제라늄과 노랑 꽃기린 꽃이 피었어. 나는 송이가 작은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아. 모두 작은 꽃 화분들이야. 동쪽부터 서쪽까지 햇볕이 비스듬히 비추어 간단다. 나는 얼른 화분들을 소파 위에다 올려 놓았어. 해바라기 하라고 말이야.  

 

나는 지난번에 네가 했다고 내 마음에 느껴진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단다. 내가 어떤 일로도 너 때문에 골몰해서 건강을 상하거나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병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말이야. 그리고 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면 네가 깃들기가 좋다고 했지. 나는 마음도 불편하고 몸도 건강하지 못하게 하면서 잘 산다고 했던 거로구나 반성이 되었지. 그리고 내가 서원했던 엄마가 어떤 것이었던가 나는 찾아보았어. 나의 10대 풍광에서 말이야. 나는 화목한 부부 사이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싶어하고, 또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도해서 잉태를 하고 싶었어. 아이가 엄마를 필요로 하는 3년간 일을 무조건 쉬고 육아휴직을 해서 네 옆에 있어주겠다고 결심했지.  기도하는 엄마가 되고, 그리고 아이들마다 결연을 맺어서 후원하는 엄마가 되길 원하고 있더구나. 그래서 그 일을 당장 시작하기로 하였어. 특히 제3세계 아이들을 후원하는 일은 너를 위한 게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의 모습이었어. 그걸 네가 태어난 후로 미룰 필요가 없는 거지.  

 

우리는 인공수정을 미루기로 결정했어. 검진일에 가서 결정을 했지. 원래는 그 날 가서 인공수정 시술일을 잡을 작정이었어. 선생님은 초음파를 본 후 주사를 한 대 더 처방하려다가 우리의 결정 이야기를 듣고는 취소하셨어. 나는 뭐가 겁났는 줄 아니? 내 몸이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혹시라도 유산을 경험하게 될까봐 그게 겁이 났어. 모든 초기 유산은 자연선택의 결과란 걸 나는 알고 있지. 마음 붙이던 생명을 중간에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그냥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았어. 나는 한약을 먹으면서 쉬기로 했지.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니 한참 시간이 지났네. 잘 있어.  

 

 

Ps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천룡팔부신중님, 그리고 기도를 들으시는 모든 고운 님들께 기도드립니다.

 

지난 달에 임신증상일지도 모른다면 설레어하던 것들은 모두 과로와 쇠약의 징후였습니다. 몸이 이렇게나 약해진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알게 되어 다행일 겁니다. 저는 이렇게나 몸이 상하도록 과로를 하게 한 원인이 뭘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제가 제 직업에서 제대로 일하고 있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이 일이 저한테 맞지 않는 일이어서일까요? 또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마음으로 일하는게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많이 무겁습니다.

 

저는 최근에 제가 지고 있던 짐을 많이 내려놓았습니다. 특히 가족 안에서 많은 것들이 편안해졌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누가 주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짊어졌던 짐을 내려놓고 훨훨 가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아이를 만나는 두 번째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마침 겨울방학이라 한결 여유롭습니다. 이번 달부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려고 했지요. 주사약이 첨가되었어요. 두 달 노력해보고, 한 달 쉰 후 시험과아기 시술을 하는 일정을 이야기를 하시네요. 하지만 욕심을 내려놓고 이번 달에는 인공수정을 시도하지 않고, 한약을 먹으면서 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휴직은 당면과제인 듯 합니다. . 필요하다면 그런 일정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일하는 직장에서 마무리를 잘 해야 합니다. 제가 맡은 일과 인간관계에서 고맙고 미안한 일을 잘 분간하고 갈무리 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직장에서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삶의 영역에서 제가 마음에 지고 있는 것들을  분쇄하고 버리고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들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저의 생명 에너지는 낭비될 겁니다. 마음의 빚이 되고 짐이 될 일들을 용기를 내어서 해 낼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더 이상 미루고 도망다니지 않기를요.

 

몸은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생리가 시작되는 건 지난 달의 끝인 동시에 새로운 난자의 출범을 의미합니다. 피로 자궁을 청소하는 일과 새로운 난자를 성숙시키는 작업을 우리 몸은 동시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오묘합니다. 이러한 신비에 감탄합니다. 동지가 가장 어두운 날이지만 동지를 기점으로 밤이 짧아집니다. 그래도 더 추운 겨울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헌 것을 버림과 동시에 새 것을 준비하는 생리의 원리처럼, 그리고 동지의 원리처럼 제가 체력이 가장 떨어지는 지금 시점에서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진인사대천명 이 아름다운 말을 삶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할 수 있는 만큼의 저의 최선을 오늘 다 하고, 하루하루 하늘이 제게 베풀어주신 것들을 감사하며 가볍게 지낼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어디로든 순리대로 흘러갈 거라 믿습니다. 어떤 방향의 운명이든 제가 순명하며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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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2 12:20:18 *.209.202.178

콩두의 글맛이 참 좋아요.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서, 나처럼 데면데면한 사람에게 경각심을 주지요.^^

 

이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옆지기가 있음을 축하하고 싶네요.

나아가 그대에게 "아가"라는 운명이 찾아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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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6 07:20:41 *.153.23.18

한명석선생님^^

선생님의 댓글을 옆지기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축하받았다고요. 그가 기뻐하는 모습이 기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글은 데면데면하지 않고 '담백'합니다.

어떤 운명이든 달게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페 글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읽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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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3 10:16:16 *.252.144.139

인공수정이 이렇게 힘든거구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잠깐 쉼을 선택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지요.

청마같은 기백이 출중한 말같은 아들 얻길 기도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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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6 07:24:17 *.153.23.18

재경선배^^

우리는 나이가 많을 때까지 묵기로 선택했으니

이런 어려움들이 우리가 마땅히 감수해야 할 과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도와서 잘 감당하자고 다짐하고 있어요.

청마같은 기백을 가진 딸도 좋습니다.^^ 그저 몸과 마음이 건강하길, 안전하게 만나길 기도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이를 갖는다면 씩씩한 딸이거나 보드라운 아들일거라고 생각해요.

양쪽 집안의 남자들은 보드랍고  다정하고, 여자들은 한결같이 씩씩해서 말이지요. 하하하

10기 연구원 교육팀의 교감님으로 굳건히 활약하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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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3 10:49:19 *.51.145.193

누님 글 읽고 어머니 생각에 잠시 동공이 풀렸습니다.

조카야~ 어서 나와 같이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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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6 07:27:33 *.153.23.18

재용^^ 어머님을 특별히 좋아하시지요.

재용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산, 특히 고개를 좋아하여 아이들 이름에 고개 연, 고개 령 자를 넣어준 아버지인 재용,

바다를 좋아해서 자녀분 이름에 바다 해 자를 넣어주신 사부님을 이야기 했어요.

우리도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이름에 넣어줍시다 저가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좋아하는 것은 책, 자연, 평화입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산과 소나무입니다.

한편 저는 특수교사라서 남보다 걱정이 더 많긴 합니다.

없는 아이를 향한 김칫국이 아주 바다를 이룰 지경입니다. 하하 ^^;;;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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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6 15:09:57 *.133.122.91

콩두님- 이 글을 늦게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콩두님은 이미 아름다운 한 아이의 엄마라는 생각이 드네요.

참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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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2 17:05:35 *.153.23.18

재엽선배님^^ 읽고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망이라는 집착에 젖어 있는 셈입니다.

9시 장례식에서 아이들을 향해 이야기하실 때 저는 재엽선배님의 아빠 마음을 조금 엿본 듯도 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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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0 01:12:39 *.64.231.52

콩두 이 글을 지금 읽었습니다.

아이를 맞이하기 위해 자신부터 준비하는 멋진 엄마인 것이 자랑스럽네요.

인연이라면 아이 역시 엄마에게 오기 위해 이미  '그곳'을 떠났을 것입니다.

내려놓기, 제 경험으로 말하면 제대로 내려놓는 순간이 기적의 시작입니다.

인연이라면 맺어질 터이니 맘을 편하게 갖기 바랍니다.

암튼 준비할 겨를도 없이 아이를 덜컥 덜컥 갖게 된 나로서는 

아이에게 쓰는 편지 프로젝트가 더없이 멋지게 느껴지고, 

엄마와 아이, 모두에게  멋진 선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방학 동안 몸 잘 추스르길 바랍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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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2 17:08:02 *.153.23.18

제대로 내려놓기! 네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태교편지를 쓰면서 마음잡아가길 기대합니다.

아이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제 운명일 겁니다.

로이스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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