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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6일 07시 12분 등록

즐거운 지식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곽복록 옮김

동서문화사

즐거운 지식.jpg 

 

1.    저자에 대하여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독일의 철학자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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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4 10 15

사망: 1900 8 25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1844년 독일 레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니체는 5세의 어린 나이에 목사였던 아버지와 사별하고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의 집에서 자랐다.  14세에 슐포르타 기숙학교에서 엄격한 고전 교육을 받고 1864년 본 대학에 진학하여 신학과 고전 문헌학을 공부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 출신답게 어릴 때부터 신학에 능통했지만, 본 대학 입학 후 문헌학적으로 성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면서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고전문헌학을 전공하기에 이르렀다.

 

1865년 스승이었던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갔으며, 그는 본 대학과 라이프치히 두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그는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함으로써 철학적 사유에 입문했다.

 

37세 때에는 친구 파울 레의 소개로 루 살로메를 알게 되고 지적인 그녀에게 반해 청혼을 하지만 거절당하자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며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교수로 임명될 당시부터 두통과 안질, 위통 등으로 고통받던 니체는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재직중이던 바젤 대학을 퇴직하고, 이후 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요양지에 머물며 저술 활동에만 전념했다. 1888년 말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니체는 이후 병마에 시달리다 1900 8 25일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체의 정신병을 두고 원인이 분분하지만 젊었을 적 얻었던 매독이 발전되어 정신분열로 이어졌다는 설이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28세 때 최초의 저작『비극의 탄생』을 펴냈으며 이 저작에서 니체는 아폴론적인 가치와 디오니소스적인 가치의 구분을 통해 유럽 문명 전반을 꿰뚫는 통찰을 제시한다.

1873년부터 1876년까지는 독일과 독일민족, 유럽 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며,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새로운 인간형으로 제시한 『반시대적 고찰』을 집필했다.

현재까지도 그의 유고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이 유고들은 니체연구 학자들에 의해 현재 독일에서 니체전집으로 출간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이다.

니체가 사망한 해인 1900년은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19세기를 마감했다는 의미가 될 수도, 20세기를 새롭게 연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니체는 '사후, 나는 신화가 될 것이다'는 예언을 했는데, 이 말이 사실이 되었다.

니체는 철학 분야뿐만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현대의 사회·문화 전 분야에 걸쳐 혁명적 영향을 끼친 서양 철학사의 거인이다.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프란츠 카프카 등 니체를 선망하는 일련의 작가들이 니체의 사상을 문학으로 형상화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라고 여겨지는 카프카가 니체를 엄청나게 존경했다는 사실과 카프카의 작품 세계는 결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매듭이다. 또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등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니체를 실존철학의 시원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프랑스의 포스트 구조주의자들, 그러니까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데리다 역시 니체를 위대한 사상가로 평하며 저마다 계승 의식을 발현했다.

한편, 한국에서도 니체에 대한 열광은 대단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라는 박상륭 작가의 소설이 출간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니체 전문가로 꼽히는 사람으로는 고병권이 있다. 마지막으로 파시즘에 의한 니체 사상의 오용이 있다. '권력', '', '미학', '귀족주의' 등 니체가 중시한 가치를 파시즘이 차용함으로써 모순적이게도 니체의 사상은 파시즘과 나치즘에 의해 선전된 바 있다.

저서로는『니체 최후의 고백』『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인간적인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의 피안』『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권력에의 의지』등이 있다.

니체의 작품 세계에서 대표작인『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위치는 각별하다. 이 작품은 그의 집필 활동의 정점에서 씌여진 것으로, 그의 활동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고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잠언 형식의 아포리즘이 니체 저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아포리즘의 절정이다. 반대로 영미철학이 자주 구사하는 식의 논지 전개를 니체도 시도한 적이 있는데, 대표적인 저서가 『도덕의 계보』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한 마디로 요약하기가 불가능하다. 특히 니체 이후, 니체 계승자라고 자처한 학자들이 제 각각의 니체를 창조함으로써 니체 사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적극적 니힐리스트로 규정하였고, 푸코는 권력-지식 담론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니체는 고정된 가치에 회의적이었고, 특히 기독교적 덕목을 혐오하였다.

니체는 사유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필요에 따라서 자유주의자로서의, 심리학자로서의, 모럴리스트로서의, 예언자로서의, 그리고 익살꾼으로서의 역할을 선택했다. 그의 사상은 실존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이 직접 자기 자신의 삶의 구성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또한 모든 인식론적인 전통과 도덕적 전통을 시험대에 올리기 때문에 실험적이다. 허무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대답에 나타나는 그의 사상은 모범적이기도 하다.

 

<출처> 출판사 저자소개의 글 및 네이버 캐스트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나는 내 집에 살며

그 누구도 모방하지 않는다

더욱이 마음껏 웃을 줄 모르는

모든 대가들을 비웃는다

                        우리 집 문 위에 적은 글

 

2판을 위한 머리말

<147> 서문을 하나 붙이는 것만으로는 이 책에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문이 아무리 많아도,결국 비슷한 체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서문만으로 이 책의 경험에 가까워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남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얼음과 눈을 녹이는 봄바람의 언어로 쓰였음이 분명하다. 즉 신념과 긍지, 방황, 모슨 그리고 변덕스러운 봄날씨가 이 책 속에 뒤섞여 있다. 겨울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음을 경고하는가 하면 동시에 겨울을 이겨 내고 다가올, 아니 어쩌면 이미 와 있는 승리를 일깨워 준다.

 

<147>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이 금방 일어난 것처럼 끊임없는 감사가 흘러나온다. 회복을 전혀 예기치 않았던 회복기 환자의 감사함이다.

 

<147> 이 책을 통틀어 말할 것 같으면, 오랜 기간의 궁핍과 무기력 뒤에 벌어지는 축하 잔치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148> 사람이라면 누구든 저마다의 인격에 따라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마다 커다란 차이는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결핍에서 철학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풍요와 활력에서 철학을 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그들은 버팀목으로든, 진정제, , 속죄양, 기분전환, 혹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수단으로든지 간에 아무튼 자신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한편 후자에서 철학은 아름다운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것은 승리감에 도취한 감사의 기쁨이며, 그마저도 결국 개념의 하늘에 우주적 대문자로 새겨져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153> 어쩌면 진리란 자신의 바닥을 보여 주지 않을 만한 이유를 숨기고 있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농담, 음모 그리고 복수

<155> 2 나의 행복

추구하는일에 지치게 된 나는 발견하는일을 배우게 되었다.

 

<155> 3 두려움 없이

네가 서 있는 곳을 깊이 파라! 그 밑에 샘이 있다!

 

1

 

<173>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든 악의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든 나는 인간에게서 어떤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인간은 전체로서나 특히 개인으로서나 종족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한다는 사명을 늘 지니고 있단 사실이다.

 

<174> ‘종족이 전부이며 개인은 언제나 무()나 다름없다라는 명제, 이것이 인간성 그 자체에 결합되어 각자에게 늘 이 최종적인 해방과 무책임을 향한 길이 열릴 때, 분명 그때에는 즐거운 지식(gay science)만이 남게 될 것이다.

 

<175> 삶을 사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와 이웃의 삶을 촉진시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해야만 한다왜냐하면이라는 것이 뭐라고 불리든, 또 앞으로 뭐라 불리게 되는 상관없다. 어쨌든 필연적, 자발적으로 아무런 목적 없이 일어나던 일이 앞으로는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듯, 도리와 궁극의 규정인 듯 보이게 된다. 그것이생존 목적을 가르치는 도덕 교사가 등장하는 까닭이다.

<175> 인간은 점점 다른 모든 동물들과는 달리, 추가로 또 하나의 존재조건을 충족해야만 하는 일종의 공상적인 동물이 되어 버렸다. 인간은 때때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삶에 대한 주기적인 신뢰, 다시 말해 삶에 내재하는 이성에 대한 믿음 없이는 번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수없이 되풀이하여 선언하게 될 것이다. ‘결코 비웃음을 허락하지 않을 어떤 것이 존재한다!’라고. 그리고 가장 신중한 박애주의자는 덧붙일 것이다. ‘웃음과 즐거운 지식뿐만 아니라, 모든 탁월한 비이성을 지닌 비극도 종족을 보존하는 수단이 되며, 필요한 것이다!’라고.

<176> 인간은 때때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삶에 대한 주기적인 신뢰, 다시 말해 삶에 내재하는 이성에 대한 믿음 없이는 번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77> 비속한 인간의 특징은 자신의 이익이 위협당하지 않을까 늘 주시한다는 점, 그리고 목적과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자기 내부의 그 어떤 충동보다도 강하다는 점이다.

 

<182> 우리의 눈에 보이는 도덕적 자질, 특히 눈에 보인다고 믿어지는 자질은 그 자신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완전히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자질그것은 타인에 대한 장식도 무기도 되지 않는다은 또 그 자신의 길을 걷는다. 분명 그것은 전혀 다른 길이며, 신묘하고 불가사의한 현미경을 가진 신을 즐겁게 하는 선과 미세함과 구조를 갖춘 길이리라. 예컨대 우리는 우리의 근면, 우리의 명예심, 우리의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세상이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밖에 우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우리의 근면, 우리의 명예심, 우리의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 파충류 비늘에 대해서는 아직 현미경이 발명되지 않았다!

 

<183> 우리는 모두 비밀 정원이나 밭을 우리 안에 지니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 분출할 때를 기다리며 성장해 가는 활화산과 같다. 다만 이 분출의 시기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차도.

 

<191> 최고의 풍요로운 인간이나 민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자문해보라. 하늘 높이 자라려는 나무가 과연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겪지 않고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불이익과 반대, 증오, 질투, 의심, 냉혹, 탐욕, 횡포 등등은, 덕의 위대한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저 알맞은 환경의 구성 성분이 아닐까. 약한 천성의 인간을 쓰러뜨리는 독은 강자에게는 강장제이며, 강자는 또한 그것을 독이라 부르지 않는다.

 

<212> 우리가 자신에 대해 알고 또 기억하는 것은, 생각보다 우리 인생의 행복에서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다. 어느 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관하여 아는 (또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를 덮쳐 온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그것이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나쁜 평판보다도 양심의 가책을 훨씬 쉽게 처리한다.

 

2

<222> 내가 이제까지 가장 노력했고 지금도 가장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물이 무엇인가 하는 점보다는 사물이 무엇이라 불리는가 하는 점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는 일이다.

 

<224> 남자는 자신의 소음 한가운데, 온갖 구상이나 기획의 격랑 한가운데 있을 때, 조용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자기의 곁을 미끄러져 가는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행복과 은둔을 동경하게 된다. 그 존재가 바로 여성이다. 남자는 그 여성 곁에 자기의 보다 좋은 자아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224> 여성들의 매력과 그 가장 강력한 작용은, 철학자의 말을 빌려 말하면 원격작용인 것이다. 그러나 그 작용에는 우선 필요한 것이 있다. – 거리라는 것이!

 

<232> 사람들 저마다가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체험하고, 무엇을 바라는가를 약간의 기쁨으로 보고 들을 수 있도록 그 눈과 귀를 처음으로 만들어 준 이들은 예술가, 그것도 특히 극장 예술가였다.

 

3

<273> 오늘날 우리 뇌에서 이루어지는 논리적 사유와 추론의 흐름은, 그 자체가 저마다 매우 비논리적이고 불공정한 충동들의 과정과 투쟁에 적응한 것이다.

 

<276>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스스로를 자신의 무게와 정도에 따라 평가하는 것그것이 그 시대에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려는 경향은 광기로 여겨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고독은 모든 불행과 고통에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자유의지가 악한 양심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가 자유롭지 못하면 못할수록, 한 행위에 어떤 개인적 의향보다 군집본능이 더 많이 표현되면 될수록, 인간은 더욱더 자신을 도덕적이라고 느꼈다. 무리를 해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개인이 그것을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개인 속에서, 그리고 이웃이나 심지어 모든 대중 속에서도 양심의 바늘을 자극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사고방식은 참으로 많이 변하였다.

 

<295> 너희는 술에 취해 종종 계단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인생을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취한 덕분에 떨어져도 갈비뼈를 부러뜨리지는 않는다. 너희 근육은 너무 느슨해져 있고 너희 두뇌는 너무 어리석어, 계단의 돌들이 얼마나 딱딱한가를 알지 못한다. 너희에 비해 우리에게 인생은 커다란 위험이다. 우리는 유리로 만들어졌으니까. 단지 서로 쿵 하고 부딪치기만 해도 우리는 고통스럽다! 만일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만다!

 

<298> 자신을 깊이 있게 알고 잇는 사람은 명석함을 얻기 위해 힘쓴다. 대중에게 자신을 깊이 있게 보이려는 사람은 애매함을 얻으려 애쓴다. 대중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이든지 깊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겁이 많아서 물 속으로 들어가기를 꺼린다.

 

<313>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 결점이 상대에게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사실 사랑하는 연인은 시처럼 보이고 싶어 하지만, 이것 역시 허영심 때문은 아니다.

 

4부 성 자누아리우스

<323>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나는 아직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아직 살아야만 하고, 나는 아직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희망과 가장 소중한 생각을 감히 표현한다.

<323> 나는 사물의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그리하여 나는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도리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이것이 앞으로 나의 사랑이 될지어다! 나는 추한 것과 싸우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비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비난하는 자를 비난하는 일조차 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되리라. 요컨대 언젠가 나는 긍정만 표시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323> 삶에는 어떤 정점이 있다. 일단 그곳에 이르기만 하면 우리는 어느 정도 지녔던 자유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부자유라는 커다란 위험 앞에 다시 한 번 놓이게 된다. 또한 비록 우리가 현존재의 아름다운 혼돈에 직면하여 모든 사려 깊은 이성이나 선의 존재를 부인한다 해도, 여전히 가장 고된 시험을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 인격적 섭리라는 사상이 가장 날카로운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336> 반면에 나는 지속적인 습관을 싫어한다. 마치 폭군이 가까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다. 지속적인 습관이 필연적으로 탄생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사태에서, 나는 내 신변의 공기가 나를 짓눌러 오는 것처럼 느낀다. 예컨대 관직이나, 똑 같은 인간들과 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것, 고정된 주거, 변함 없는 건강 등이 그런 것들이다.

 

<341>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모든 도덕을 나는 싫어한다. ‘이것을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면에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복해서 하도록 하고, 밤은 밤대로 그것을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그리고 그 일을 되도록 잘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나를 선동하는 도덕이다.

 

<354> 이익을 좇는 삶이란 사람들에게, 끈임없이 자신을 기만하고 계략을 짜내고 남을 앞지르는 일에 언제나 정신을 기진맥진하도록 소모해 버릴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정한 미덕은 어떤 일을 다른 사람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해치워 버리는 것, 그것이다.

 

<357> 우리는 결국 생소한 것에 대해서 우리의 선의와 인내, 공정함, 부드러움을 베푼 보상을 받는다. 점차 그것은 베일을 벗고 그려낼 수 없는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우리의 환대에 대한 보답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방식으로 사랑을 배울 것이다.

 

<364> 그리스인들은아름다운 모든 것이 두 번 그리고 세 번 주어지기를하고 기도했다. 아아, 그들은 신에게 하소연할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신적이지 않은 현실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전혀 주지 않거나 또는 오직 한 번만의 아름다움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다. 즉 이 세계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물들이 아름다운 순간이나 그것이 드러날 기회는 너무 빈곤하다고. 그러나 분명 이것이 생의 가장 강력한 매력이리라. 삶은 아름다운 가능성의 황금실로 짜니 베일약속하고 거부하고 수줍어하며, 냉소적이고 동정적인, 또 유혹적인로 싸여 있다. 그렇다. 삶은 여성이다!

 

5 우리 두려움 모르는 존재들                            

<392> 나는 묻고 싶다. 인식에 대한 우리의 욕구는 이 친숙한 것을 향한 바람이 아닐까? 모든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 의심스러운 것 속에서, 이제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 않을 어떤 것을 발견하려는 의지가 아닐까? 우리에게 인식이라고 명령하는 것은 사실 두려움의 본능이 아닐까? 아울러 지식을 성취한 자들의 환희는 안전감의 회복에 대한 환희가 아닐까? 세계를이념으로 환원하고는 그것을인식이라고 생각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것은이념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이미 친숙했고, 그가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더 이상 이념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3.             내가 저자라면

[목차와 전체적인 뼈대]

이 책은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문에 해당하는 머리말과 다양한 주제(63)의 테마에 대해 의 형식을 빌어 노래한 독일인 압운의 서곡이라는 <농담, 그리고 복수>라는 제목의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5부에서는 각 장마다 특정 주제 대해 넘버링(숫자를 메기기)을 하여 주제별 저자의 사유를 서술해 나가고 있다.

 

본 도서를 읽어나감에 있어 집중도가 미흡하여서인지 각각의 챕터(1~5)를 나누는 기준에 각 장에 대한 큰 맥락을 이해함에 어려움이 있었다.

 

 [보완점]

책을 중간쯤 읽어가다가 즐거운 지식이 ‘Gay Science’라고 표현된 부분이 있어 이 책의 영문 제목을 검색해보니 영문 제목은 “The Gay Science”였다. Science지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느껴지는데 왜 영문에서는 과학으로 표기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좀 든다. 과연 니체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지식에 대한 탐구 자체 즉,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하고 그것에 대해 사유하는 그 과정 자체가 우리 인간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이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이며, 넓은 의미에서 배움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어떤 고정관념에 그것이 종교이건, 국가관이나 도덕관이건 그런 고정관념을 갖는 것에 대해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으며, 사고의 자유로움의 중요성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니체의 철학과 사유의 깊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적, 문화적 배경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 같다. 그러한 배경 지식의 깊이 없이는 이 책에 대한 이해 또한 표면적일 수 밖에 없는 것 같아 아쉬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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