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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2일 22시 26분 등록

< 서양의 지혜 > (WISDOM OF THE WEST)

B.A.W 러셀/ 정광섭 옮김, 동서 문화사

 

1.     저자에 대하여

( 2013 9월에 <러셀자서전> 북리뷰 당시 한 바 있어 생략. 참고로 당시 내용을 다시 올린다)

1950년 말 러셀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미국인들은 분노했다. 영광스런 상을 그에게 안겨준 것은 1929년에 출간된 < 결혼과 도덕>이란 책이었다. 러셀은 이 책에서 성과 결혼관련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얘기한다. 혼전 성관계는 잘못된 것이 아니며, 성인 남녀간의 성관계는 자유의사에 결정되는 사적인 것으로 여론이나 법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또한, 불가피한 상황에서 성매매의 필요성과 성매매 여성들의 불공정한 대우, 성을 죄악시 하는 대신 먹는 것에 탐닉하는 청교도들의 그릇된 성에 대한 인식을 지적했다. 당시 청교도적 사고방식이 미국인들의 삶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러셀의 생각이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러셀은 성과 결혼에 대한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그의 삶에 그대로 실천했다. 네 번의 결혼도 그렇고, 두 번째 부인인 도라 와는 서로 각자의 연애 파트너와 한집에서 함께 사는 막장 부부까지 갔을 정도였다.(결국 러셀도 실제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도라와 결별하게 되지만) 각자의 애인과 한 집에서 함께 지낸 것은 정상적이라고 볼 순 없지만 러셀의 성에 대한 생각은 점잔 빼는 다수의 일반 대중을 대변하는 측면도 있었다. 일부 사람은 그의 결혼과 여성편력 때문에 그를 호색가이고 외설가라고 폄하하지만 그것은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낡은 인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성과 결혼을 주장했고 이에는 엄격한 자기 통제와 사회적 책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버트런드 아서 윌리암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불가하다. 거의 1 세기를 살다간 사람으로 앞서 언급한 개인사외에, 러셀 백작 3세로서 영국 상원의원 역임, 징집 반대운동과 반핵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투옥, 영국과 미국에서 교수직에서 해임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20세기 최대의 사상가로 불리며 철학자, 수학자, 논리학자, 과학자, 그리고 사회사상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런던 타임지>“ 500년 만에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저자는 명성 못지않게 악명도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기 언급한 사회적, 정치적 분쟁에 참여한 까닭이다. 거의 60년 동안 삶에 대한 사색과 성찰을 에세이로 쓰며 대중에게 친숙한 인물이 되었으며 때로는 성문란이유로 추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러셀은 철학, 수학, 사회학, 교육, 여성, 정치, 예술, 종교를 망라한 분야에 100권이 넘는 저서와 수 백 편이 넘는 논문과 에세이를 남겼다.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 좌파, 무신론자라 불렀으며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1)    생애

 

유년시절

 

저자는 1872 5 18일 영국 몬마우스셔에서 엠벌리 러셀 백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존 러셀(John Russell) 1846~ 1852, 1865~ 1866년 두 번의 수상을 역임했고,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백작으로 봉해졌다. 외조부는 엘덜리 스텐리(Stanley of Alderley)경으로 조부의 정치적 동지였다. 러셀의 부모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자유 진보적 지식인인 존 스튜어트 밀과 가까이 지냈는데 그의 영향으로 피임, 여성 참정권 등 여성의 권리를   주장 하기도 했다. 버티(Bertie)라는 애칭으로 불린 러셀의 유년시절은 너무 외로웠다. 2세 때, 어머니와 누이가 디프테리아로 사망하며, 부친 마저 4세 때, 기관지염으로 세상을 떠난다.

 

청교도적 신앙심과 도덕을 겸비한 조모 밑에서 양육되었는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늘 외로움을 타는 아이였다. 그가 평생 동안 사랑을 갈망했고 그의 수많은 여성 편력은 그의 유년기. 청소년기의 외로움에서 기인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러셀은 공교육 대신 11세부터 16세까지 가정교사로부터 사교육을 받았으며 11살때는 형으로부터 유클리드 기하학을 받을 정도로 수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대학시절, 결혼

 

1890년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한 후, 다양한 친구들과 사귀기 시작하며 비밀 결사조직인 사도들에 가입한다. 이 시기에 수학 외에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893년 학부를 졸업하고 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한다. 철학과에서 최우등상을 받으며 6년간 펠로우쉽을 받는다. 이 시기에 아버지로 물려받은 2만 파운드의 재산으로 할머니로부터 재정적인 독립을 하게 된다.

 

성인이 된 러셀은 여성에 관심을 갖게 된다. 다섯 살 연상의 미국인 퀘이커교도인 엘리스(Alys Pearshall Smith)를 만나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94년 결혼을 한다. 결혼 후 베를린에 머물면서 독일 사회 민주주의를 연구하고 사회주의자임을 표방한다. 영국 귀족사회에서는 수용하기 힘든 사고였다.  1896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자신의 첫 저작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브린모어 대학과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강연을 한다

 

1902년 러셀은 엘리스에 대한 사랑이 갑자기 식으면서 8년간 형식상의 결혼을 유지한다. 이 시기에 러셀은 화이트 헤드와 공동으로 <프린키피아>를 저술하는데 매진한다. 1906년 여성 참정권협회에 가입한 후 1907년 윔블던에서 여성 참정권 협회의 입장을 알리고자 하원 보궐 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한다. 1909 <프린키피아>저술이 완성 되고, 1910년 가을부터 5년간 케임브리지 강사직을 제의 받아 트리니티 칼리지에 숙소가 제공되면서 엘리스 곁을 떠난다. 엘리스는 죽는 날까지 러셀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살았다고 한다. (자서전 그녀의 편지에 러셀을 향한 그녀의 애틋한 사랑이 담겨져 있다)

 

러셀의 연인들

 

<프린키피아> 원고가 완성 될 무렵, 러셀은 귀족 출신의 오토라인 모렐( Ottoline Morrell)을 알게되고 1년 뒤인 1910 년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러셀은 모렐에게 결혼을 제의했으나 그녀는 정치인인 남편과 이혼을 원치 않는다. 모렐은 러셀과 연인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정부들과 만나는데  러셀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모렐에게 러셀은 많은 정부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912년이 되면서 모렐과의 관계가 소원해 지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모렐을 향한 러셀의 집착은 커져만 갔다. 이 시기에 러셀의 출중한 제자인 비트겐 슈타인이 러셀 이론에 대한 혹독한 비판으로 마음의 상처까지 겹치면서 그는 더욱 혼란스러운 상태가 된다.

 

1914 3월 러셀은 하버드 대학 방문교수로 미국으로 가게 된다. 미국체류 중에 28세의 작가 지망생 헬렌 더들리를 만나 가까워 진다. 러셀과의 연인관계를 끊을려고 했던 모렐은 헬렌과의 관계를 알자 다시금 러셀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러셀은 모렐의 시도에 어이없이 무너져 그들의 관계는 다시 회복된다. 러셀과 영국에서 새로운 삶을 꿈꿨던 헬렌은 러셀의 변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헬렌은 이 충격 때문인지 미국으로 돌아간 후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라이벌이 사라진 모렐은 다시 러셀과의 관계가 식어진다.

 

외로움을 느낀 러셀은 미국방문 때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과 대학원생으로 자신의 수업을 들은 TS 엘리엇의 부인 비비엔과 깊은 연애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동시에 외로움을 달래줄 연인으로 여배우 콘스탄스 몰레슨과 사랑에 빠진다.

 

징집 반대 운동

 

1916년 제정된 영국 병역법에 따르면 18~41세의 모든 영국 남성은 군복무 의무가 있었다. 당시 43세의 러셀은 병역 거부자 들의 징집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로 인해, 하버드 대학의 방문 교수 기회를 박탈당하고 동시에 영국 정부는 국가 방위법 위반자인 러셀의 여권 발급을 거절한다.  또한 트리니티 대학으로부터 강사직을 박탈당한다.

 

1919년 러셀은 25세의 케임브리지 펠로우였던 도라 불랙이라는 새 애인을 만난다.  그 다음해 러셀은 중국의 북경 대학으로부터 1년간 방문교수직을 제의 받고 도라와 함께 중국에 간다. 중국을 문명사회라고 극찬하며 철학과 논리학을 강의한다. 그 학생 중에 20 대 중반의 마오쩌둥도 있었다. 중국 체류 중에 도라는 임신을 하게 되고 1921년 영국으로 돌아와 러셀은 엘리스와의 합법적으로 이혼를 하고 도라와 결혼한다. 그해 11월에 아들을, 2년 후에 캐서린이 태어난다.

 

계속되는 이혼과 재혼

 

50이 다 되어 아버지가 된 러셀은 보다 나은 교육환경을 자식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교수직을 그만두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프리랜서 작가로 전환한다. 이미 대학에서는 비트겐 슈타인이 논리학과 수리철학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어 그 분야에서 그를 능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이 시기, 1920년대 이후 러셀은 집필과 강연, 반전 평화 운동으로 저명인사가 되었지만 학계에서는 수준 높은 철학자로서 글을 쓰지 못하게 된다. 상업적으로 성공하여 부는 성취 했지만   철학자로의 학문적 깊이는 없게 된 것이다.

 

영국의 기존 교육방식에 만족을 못해 그는 1927년 자녀 교육을 위해 비컨 힐 스쿨이란 학교를 설립한다. 자연을 느끼면 배우는 학교로 실험적인 대안학교를 시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을 하지 못했다. 

러셀과 도라 부부는 러셀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자유 분방한 진보주의자였다. 성의 자유를 주장하고 부부는 서로간의 외도를 묵인하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실제의 외도 상황은 부부 사이의 위기를 가져왔다. 아내의 외도가 공개되자 러셀도 아들의 불어교사와 관계를 갖는다. 심지어 각각 외도 파트너를 불러들여 같이 살게 된다. ‘ 콩가루 집안이다. 상식을 초월한 이들 결혼 관계는 막장으로 치닫는다. 러셀은 이런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라와의 결혼관계를 유지한다. 왜냐하면, 러셀은 두 자녀를 위해 도라와의 결별을 원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늘 강연해서 주장했던 간통이 이혼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대중에게 행동으로 입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아이들은 대안 교육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해 자신이 겪었던 것처럼 소외와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된다.

도라는 미국여행 중에 한 좌파 저널리스트와 사랑에 빠지면서 급기야 그의 아이를 임신하며 러셀은 아기 낳는 것을 동의한다.  러셀 또한 가정교사였던 옥스포드 학생이던 20세의 파트리시아(피터) 스펜스와 관계를 맺으며, 결국에는 두 사람 모두 정부와 아이들과 같이 함께 사는 비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게 된다.

 

파트리시아가 임신하자 러셀은 1932년 도라와 이혼소송을 제기하며 긴 시간이 걸려 1935년에  두 사람 다 자식에 대한 양육권을 가질 수 없는 판결이 나면서 파국으로 끝이 난다.  1936년 러셀은 파트리시아와 세 번째 결혼을 한다. 그들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며 훗날 작위를 계승해 러셀 백작 5세가 된다.

 

미국, 다시 영국으로

 

시카고 대학에서 1년 계약 제의 받은 것을 계기로 그는 시카고 대, UCLA에서 교수를 지낸다. 그리고 뉴욕 시립대학의 교수직을 받아 수락 했는데 러셀이 무신론자이고 그의 문란한 성 도덕에 반대하는 기독교계, 학부모의 반대로 무산된다. 그 후 철학자 듀이 도움을 받아 1940년부터 반스 재단에서 강의를 하는 기회를 갖는다. 이 기간에 <서양 철학사>를 저술하여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며 경제적 부담에서 자유롭게 된다. 1944 6년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펠오우십을 제의 받아 영국으로 돌아간다.

 

1949년 러셀과의 결혼에 만족을 하지 못한 파트리시아는 11세된 아들을 데리고 나가면서 별거에 들어간다. 1949년 메리트 훈장을 받고 아들 존의 가족과 함께 산다. 존은 무명 작가로 경제력이 없자 결국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 그를 떠나자 존은 정신병에 걸린다. 후에 존은 러셀 백작 4세가 되고 그가 아들이 없이 죽자 파트리시아가 낳은 콘래드가 작위를 계승하게 된다.

 

러셀은 1950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명성과 함께 막대한 상금을 받게 되어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게 되었고 강연도 하게 된다. 미국에서 강연을 하면서 29세 연하인 에디스 핀치와 사랑에 빠져 1952 80세의 나이에 네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반핵 운동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러셀은 핵 전쟁 가능성을 우려해 반핵운동에 매진한다. 강대국들의 핵무장을 저지하기위해 시민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로 인해 1961년 투옥되기도 한다.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다 1970 22, 마지막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98세의 삶을 마감한다.

 

주요 저서

 

<서양 철학사>,<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의미와 진리의 탐구>, <러셀 인생론>,<권위와 개인>, <게으름에 대한 찬양>, <결혼과 도덕>,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행복의 정복> 등 다수.

 

2)    러셀이 남긴 것

 

20세기 철학을 혁신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인류의 현자이며 교사라고 불리는데 이는 대중에게 삶의 철학을 제시했다.

 

러셀의 문체는 간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자신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다. 언어구사력과 논리적인 사고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의 글의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독을 해야 한다. 대충 읽고 건너뛰면 그의 사상의 핵심을 놓치고 마는 우를 범한다. 러셀의 관심사는 인간이었다. 정치, 사회, 경제, 종교, 교육 등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이 부당하게 대우를 받지 않고 압제를 받지 않는 그런 세상을 원했다. 그는 인류의 행복이 물질 문명의 발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성, 정신의 진보를 중요하게 생각을 했다.

 

러셀은 그의 책 어느 서문에서 나는 근엄하게 굴어야만 진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자신이 보기에 사람들 대부분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근엄함 속에 감춰진 사기와 위장을 자주 발견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근엄함에 맞서기 위해서는 재치라고 했다.

그는 죽기 1년 전인 97세에  지금 이 세계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온정과 너그러움이고,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은 대다수의 인류를 부도덕하다고 규탄하는 가혹하고 독단적인 도덕이다라고 했다.  그가 죽은 지 4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우리에겐 자신과 타인을 위한 따뜻한 마음과 누구든지 품어질 수 있는 그 관대함, 온정과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2.     마음에 닿는 문구: 유첨

3.     저자라면

 

서양 문명은 인간을 존중하며 모험을 즐겼던 2500/2600년 전 그리스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그리스 문명은 그리스 철학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당시의 철학자 탈레스를 서양 철학의 시발점으로 이후 20세기 비트겐슈타인까지 서양 철학의 흐름과 역사를 논한다.  

당대의 주요 철학자 사상과 생애, 그리고 그들의 철학이 탄생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여 자칫 지루한 철학 이론의 나열에 불과할 뻔한 책에 재미와 흥미를 부여한다. 이에 추가하여 적절한 인물, 장소 등의 사진을 곁들이고 당대 철학()에 대한 비판을 가하며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서문에 얘기한 것처럼 저자는 지난 2500여년 동안 유럽, 특히 그리스, 독일에서 살다간 철학자들이 어떻게 철학을 했는지 보여준다. 그것을 통해 독자들은 무엇을 얻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 인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    

 

그리스 비극에서는 강력한 정감과 열정에 뒤흔들리는 사람들에게 늘 동정이 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을 하나의 카타르시스, 즉 정서의 세척이라고 한 말은 옳다. 결국 그리스인의 성격에는 두 가지 면, 즉 질서 바르고 합리적인 면과 제어할 수 없는 본능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세계를 변화시킬 수가 있었다. 니체는 이 두 요소를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본문 23 )

 

인간의 성격 중에 이성과 욕망의 두 요소의 성격이 함께 공존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한 나라의 변화의 원동력은 민족성. 국민성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인이 주도적이고 열정적인 피가 흐른다면 동양인은 수동적이고 정적인 경향이 있다. 그런 이유로 20세기 전까지 세계 변화는 서양에 의해 주도가 되지 않았나 한다.

 

사심을 떠난 탐구 자체는 윤리적으로 선한 것이라 여기고, 종교적 신비보다도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선한 삶에 이른다는 것이다. 탐구의 전통과 함께 거기에는 감상적이 아닌 일종의 밝은 인생관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서양문명의 지적인 틀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모두 그리스 사상가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본문 중 220 )

 

그리스 철학의 본질은 계몽과 해방이다. 무지와 사심의 속박에서 자신을 해방 시키는 것이다. 사색과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한다. 일상의 삶을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사리사욕이 없이 끝없는 호기심과 탐구, 그리고 하루 하루의 삶을 조용히 관조할 때만이 그 삶이 아름다울 것이다.   

 

2500여년의 철학사와 당대의 철학자, 그들의 사상,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꿰뚫고 거침없이 서술하는 저자의 깊고 방대한 지식이 놀랍기만 하다. 특히, 저자의 논리학과 수학에 관한 전문적 지식을 이용에 도식과 공식을 그리며 지적 유희를 즐긴다.

 

저자는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철학을 했는지 보여주고 그들의 철학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삶을 살아갈 방법을 제시해 준다고 했다. 하지만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상으로 난해한 철학자들 한 테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역사적으로 보면 마키아벨리나 니체의 철학은 독재자들의 정권유지의 도구로 또는 국민을 착취하는 압제자의 도구로 이용 또는 오용을 한 경우도 있는데 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철학뿐만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 국가나 인간의 흥망성쇠, 인간의 탐욕 등의 인간 군상을 보고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해답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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