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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3일 02시 13분 등록

구스피릿 31번째 북리뷰

서양의 지혜(버틀런드 러셀, 동서문화사) “

 

1. 저자소개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er William Ruussell,1872.5.18~1970.2.2).

20세기의 지성, 수학은 전공한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이다. 하지만 그를 단순히 철학자나 논리학자로 한정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보수적인 영국 귀족집안 출신의 자제인 그는 수학자로 순수학문에 열정을 보여주었지만, 철학, 과학, 사회학, 교육, 정치, 예술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저작활동을 하였고, 1950년에는 권위와 개인이라는 책으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였다. 노벨문학상이라 하면 보통은 소설가와 같은 전문작가들이 수상하는 것 아닌가. 그는 또한 여성해방운동과 평화주의자로서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기도 했다 결국 그로 인해 1918년에는 6개월간 옥중생활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수리철학 입문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1919)를 썼으며 <정신분석>을 쓰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진실이 사회적 권위와 제도에 억압을 받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미를 지녔다. 한 예로 그는 가장 강력하게 여성해방 운동의 선두에 선 일화가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여성의 참정권을 단호하게 반대하는 상황이었고, 러셀은 왕실로부터 하사 받은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러셀은 당대의 지성답게 수많은 거물들과 교류하였다.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황무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계관시인 T.S. 엘리엇과 같은 제자들을 비롯하여 스승이자 친구였던 화이트헤드와는 <수학의 원리>를 함께 집필하였다.

보수적인 귀족 사회에서도 사랑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컸으며, 첫사랑 엘리스를 비롯하여 1919년에 만난 도라 블랙 등과 총 세번의 결혼을 하였고 많은 여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러셀은 영국의 백작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 좌파, 회의적 무신로자로 자처하면서 학문뿐 아니라 정치적 활동과 대중 계몽, 교육 등에 힘을 쏟았다. 반전운동, 핵무장 반대운동부터 쿠바 위기와 중국-인도 국경분쟁에도 적극 개입하였다. 1927년에는 아내 도라와 함께 피터즈필드  근처 텔리그래프 하우스에 실험학교를 세웠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 까지 아내 도라에 의해 운영되기도 했다.

서양철학사로 유명한 러셀을 단순히 논리학자또는 철학자로 한정 짖는 것은 그의 생의 일부분만을 보는 것이다. 수학과 철학에 대한 책을 썼고, 행복과 게으름에 대한 책도 썼다. 또한 이론과 책 속에 파묻혀 살아온 학자가 아니라,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와 그에 맞게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서 행동하였다. 여성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도록 앞장섰고, 전쟁과 핵무장운동을 반대하였다. 그 뿐 아니라, 강단에서든 집필을 통해서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지식과 지혜를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서양철학사의 경우, 펜실베니아에 있는 반즈 재단과 계약을 맺고 5년간 강의를 한 내용으로 집필된 명저이다. 열정적이고 진실되며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인간적이었던 그, 그 열정을 통해 이론과 실제를 넘나들며 많은 영향을 준 그, 그가 20세기의 지성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그의 생이다.

<주요 저서>

라이프니츠 철학에 대한 비판적 해설(1900)

자유인의 기도(1902)

수학의 원리(1903)

수리철학 입문(1919)

볼셰비즘의 이론과 실천(1920)

정신분석(1921)

원자의 ABC(1923)

상대성의 ABC(1925)

물질분석(1927)

결혼과 도덕(1929)

과학적 조망(1931)

교육과 사회질서(1932)

의미와 진리의 탐구(1940)

서양철학사(1945)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1948)

나의 철학적 성장(1959) .

 

*출처 : 네이버 캐스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알렉산드리아 시기의 시인 칼리마코스는 큰 책은 큰 재앙이다라고 말했다.(11)

이 책의 목적은 탈레스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는 서양 철학의 개설과 아울러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역사적 상황을 상기시켜 주는 몇 가지 일들을 말하고자 하는 데 있다.(11)

이미 철학사를 세상에 내놓았으면서 또 철학사를 저술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히 주장할 만한 두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간결함과 동시에 광범한 기술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 둘째, 전문화가 심화되어 가는 현대의 경향을 볼 때, 사람들이 자칫 지적인 면에서 조상의 은혜를 잊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의 목적은 그런 건망증을 거스르는 데 있다. (12)

서양 철학은 모두가 그리스 철학이다. (12)

철학사를 서술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는 이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저 사람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철학상의 논의가 어떻게 나아갔는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12)

칸트는 논박되는 것보다 오해 받는 것이 더 무섭다고 말했다.(12)

 

프롤로그

철학은 정의 내릴 수 없다. 어떤 정의라도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이미 철학적인 사고방식으로 나타난다. 철학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철학을 하는 것이다.(15)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과학은 어떤 해답을 주지 못한다. 스스로 생각하려는 사람들은 점쟁이가 이미 준비한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탐구하고 때때로 해결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과업이다.(15)

 

1장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은 누군가가 하나의 총괄적 의문을 갖는 데서 시작된다.(18)

우리가 역사적인 존재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 오늘날의 철학과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린그리스로 가야 한다.(18)

둑이 터진 것 같은 이 지적 활동을 낳은 어머니, 곧 그리스 문명의 발흥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눈부신 사건 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불과 200년이라는 짧은기간에 그리스인들은 예술, 문학, 과학 및 철학 분야에서 서양 문명의 총체적 기준을 정하는 갖가지 걸작들을 놀라울 정도로 연이어 탄생시켜 나갔다. (18)

철학과 과학은 기원전 6세기에 밀레토스의 탈레스에서 시작되었다. (18)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을 하나의 카타르시스, 즉 정서의 세척이라고 한 말은 옳다. 결국 그리스인의 성격에 두 가지 면, 질서 바르고 합리적인 면과 제어할 수 없는 본능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세계를 변혁시킬 수가 있었다. 니체는 이 두 요소를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어느 것이나 그 중 한 가지만으로는, 그리스 문화가 비상하게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23)

그리스어로사색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무엇인가보고 돌아다닌다는 뜻을 가지고 (24)

살아남는다고 하는 문제는, 첫째로 인간이 자연의 힘을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5)

밀레토스의 탈레스는 만물은 물로 이루어졌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철학과 과학이 시작되었다(27)

어느 때 탈레스는 실제로 할 수만 있다면 해보라고 해서, 올리브유 시장을 매점하여 자기의 실천적인 재능을 보여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기상학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수확이 잘 되고 못됨을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손이 미칠 수 있었던 모든 착유기를 전세해 두었다가, 시기가 오자 자기 마음대로 갑을 붙여서 이를 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많은 돈을 벌어서, 그를 놀린 사람들에게 철학자들도 원하기만 한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29)

탈레스의 견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가 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29)

아낙시만드로스는 질료를 무한한 것. 곧 사방팔방으로 퍼지는 무한의 물질이라고 부르고 있다. 거기에서 세계가 생기고 결국은 그 속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30)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해답이 아니라 제기된 문제이다.(32)

철학자들이 자신의 길을 걸어갈 때, 그들이 살고 있던 도시의 국가 종교와 충돌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와 같은 운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립적인 정신을 갖는 사람에게 닥치기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33)

음악상의 발견이모든 것은 수라는 관념과 서로 통했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이 우리주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에서 수를 찾아내야 한다.일단 수적구조만 파악하면, 우리는 이세상을 지배하게 된다.(36)

우리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말은, 우리의 존재의 단일성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후에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존재는 하나의 끊임없는 생성이라는 것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42)

지혜를 쟁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사물의 기본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다.(44)

이 보편적인 공식, 즉 로고스는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에 눈이 어둡고 마치 각자가 자신들이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헤라클레이토스 : ‘사람의 성격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이 날카로운 통찰은 2000년 후에 프로이트에 의해 증명되었다(50).

만물을 구성하는 네 가지 원소 : 세계는, , 공기 불로 이루어졌다는 엠페도클레스의 설은, 그로부터 2000년 후에 그려진 중세이 회화에 표현되었다.(52)

그리스인들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기 때문에 같은 시대의 아시아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아시아에서 신으로 여겨지는 법률이 지배자의 권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데에 반하여, 그리스인들은 법이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어떤 법률이 시대에 부합되지 않으면, 대중의 합의로 이를 개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법률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한, 사람들은 법률에 복종해야 했다. 이 준법 정신의 고전적인 예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의 사형 선고를 받고 도망갈 것을 제의받았을 때, 이를 거절한 데서 여실히 나타나 있다.(58)

동양 보다는 꽤 일찍 합리적(?!)인 사고를 했었던 그리스인들

제논의 논증 중에서 운동에 대한 네 가지 역설이 가장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이야기이다. 여기에서도 파르메니데스 이론을 간접적으로 옹호한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자기 이론으로는 운동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을 제시할 책임이 있었다. 이 논증은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불리한 조건이 주어진 경주를 할 경우, 아킬레우스는 결코 경쟁자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거북이 경주로의 조금 앞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그 후 아킬레우스가 거북의 출발점까지 달려가도 거북은 그보다 약간 앞으로 가 있다. 아킬레우스가 이 새로운 지점까지 다시 뛰어갔을 때 거북도 또 약간 우세한 지점에 있을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 있었던 위치에 도달할 때마다 느림보 거북은 앞으로 가 버린다. 물론 아킬레우스는 점점 거북에게 접근하기는 하지만, 거북을 결코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74)

우리 주위의 변화하는 세계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 근거 자체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 설명의 본질이다.(78)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 사색에 잠긴 고독한 인물의 모습이 나체인 것은, 인간이 내성적이며 자의식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86)

 

2장 아테네

우리는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곧잘 멍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91)

<카르미데스>에서는 중용이란 무엇인가, <리시스>에서는 우정이란 무엇인가, ,라케스>에서는 용기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들 의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주어지지 않았으나, 이들 의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92)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는 항상 말하고 있지만, 지식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을 바로 지식을 구하려는 일이다.(92)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알고만 있으면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을 저지르는 원인은 단 한가지 무지에 있다. 그러므로 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은 지식이다.과 지식의 연관성은 줄곧 그리스 사상의 특징이었다. 기독교 윤리는 이와 정반대이다. 기독교 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인데, 이것은 무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다.(93)

 

신만이 현명하며, 사람의 지혜는 쓸모없는 것이며, 자기처럼 자신의 지혜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95)

소크라테스의 이 태도는 우리에게 분열된 충성의 문자가 그리스 비극의 커다란 주제 중의 하나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96)

아카데미의 과목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적 과목과 비슷했다. 수학, 2차원 및 3차원 쌍방의 기하학, 천문학, 음향 또는 화성학이 기본 교과 과정이었다. 피타고라스학파와 깊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수학이 크게 강조되었다. 학교 입구에는 이 과목이 싫은 사람은 누구나 입학을 삼가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들 과정의 교육에는 10년이 걸렸다.(99)

이데아론이 피타고라스에서 나왔다고 하는 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이 이론이 수학에서 대상을 증명하기 위해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수학자는 삼각형에 대해 정리를 확립할 때, 실제로 어떤 도형을 종이 위에 그릴지는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도형은 어느 것이나 수학적 고찰을 벗어나는 불완전한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열심히 정확한 직선을 그리려 해도, 그것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다. 이런 점에서 완전한 직선은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형상이 느낄 수 있는 대상의 질서와는 다른 존재의 질서에 속한다고 이해하게 된다.(110)

플라톤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은 교육이 의외로 만능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 줄 뿐이다.(115)

교사의 역할은 학생이 자기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일이다.(118)

따라서 교육이란 교사의 인도를 받으면서 혼자 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119)

소크라테스에게 교육이란 넓은 뜻에서 영혼의 치료였다.(121)

이 대화편의 제목이 된 테아이테토스는 산술과 기하학 두 분야에 뛰어난 사람이다. 그는 2차 방정식을 산출하는 일반적 방법을 발명하여 정육면체의 이론을 완성했다.(130)

플라톤은 현대 과학 최대의 전통적 선구자로 나타난다. 모든 물체를 기하학에 환원할 수 있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밝힌 인물은 데카르트이고, 그 방법은 다르지만 아인슈타인도 그랬다. 플라톤이 사물을 네 가지 기본 원소에 국한시켰다는 것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규제이다. 이와 같은 선택을 한 이유는 당시에 이런 사상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하려고 한 것은 현상을 만족스럽게 설명하기 위해 이 관점에 대한로고스’, 즉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었는데, 그가 사용한 가설은 수학적이다. 우리도 살펴본 것처럼 세계는 궁극적으로 수에 의해 사고할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이 받아들인 피타고라스학설의 일부였다.이와같이 우리는 물리적 설명을 위한 수학적 모형을 갖게 된다.방법상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수학적 물리학의 목표이다.(140)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검토하기가 힘들다. 이유는 그것이 그의 저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며, 분명한 증거가 조금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른바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지 않았다는 것에 처음부터 유의할 필요가 있다. ‘형이상학이란 문자 그대로는물리학의 뒤라는 뜻일 뿐이다.(146)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의 분명한 한 가지 특징은 증명의 관념이다.(150)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과학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진술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는 그것을 공리라고 불렀다. 공리는 설명되자마자 명확하게 이해되기만 하면, 반드시 경험을 거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과학적 탐구의 과정보다도 오히려 일련의 과학적 사실의 진술과 관련이 있다. (153)

아리스토텔레스가 공리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마음에 두었으리라고 여겨지는 것은 기하학이다. 이것은 그가 살았던 당시에 체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따. 아리스토텔레스와 유클리드 사이에 놓인 세월은 불과 수십년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에 기하학만큼 내세울 수 있는 단계에 이르던 과학은 전혀 없었다. 여러 가지 과학을 그 어떤 계층 질서로 배열할 수 있다는 사상은 당연히 이런 사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수학은 최고의 위치에 있다. 천문학은 수학 다음이다. 천문학이 관찰하는 운동을 밝히기 위해서는 수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154)

탈레스 시대부터 누구나 자기는 세계의 참다운 움직임을 마침내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며, 이와 같은 기분으로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158)

현시점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에 거는 희망이 우리 행동의 동기가 된다. 이것은 동물에도 해당되고, 식물까지도 해당되는 경우가 몇 가지 있다. 이때 분명히 합목적성은 생물학적, 사회적인 문제를 생각하면 시시한 것은 아니다.(160)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다른 대상이 서로 다른 시간에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서 공간과 시간에 위치와 같은 것이 있다고 추론한다.(163)

윤리적 문제는 우리가 인간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물을 때 생긴다. (167)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예술은 모방이다. 그의 분류는 우선 음악과 무용과 현대적 의미에서의 시를 한 묶음으로 놓고, 그 밖의 것에 그림과 조각을 분리한다. 모방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방식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의 시가 서로 구별된다. 모방이란 무엇인가는 한 번도 설명되어 있지 않다. 이 관념은 물로 이데아론 이래 귀에 익은 것으로, 거기에서는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을 모방한다고 한다.(175)

비극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감을 세탁해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카타르시스를 뜻하는데, 자기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대리 경험하면 영혼은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비극에는 치료적인 의도가 있다. 이 용어는 의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피부병 자체의 치료, 즉 일종의 정신병리학적 예방 접종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비극의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포와 연민이 항상 우리를 따라다녀야 한다는 것이 기정 사실처럼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옳은 말일 것이다. (177)

결론적으로, 수학이 문제의 단순성과 구조의 분명성 외에도 미를 창조하기 위한 그 어떤 여지를 준다는 것은 아마도 강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 것이다. (186)

 

3장 헬레니즘

알렉산더 대왕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 세계는 공세로 전환했다. 기원전 334년부터 324년까지 불과 10년 동안, 페르시아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젊은 정복자 손에 넘어갔다.(189)

끝을 모르는 불안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의 결여와 지적, 도덕적 쇠퇴를 가져왔다. 고대 그리스인은 그 시대의 정치 문제에 대결할 수 없었고, 헬레니즘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혼돈에서 질서를 잡고 그리스인의 문명을 후세에 전하는 일은 로마의 조직화된 능력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192)

마케도니아 청년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했다. “햇볕이 가리지 않게 거기서 물러나 주시오가 그의 대답이었다. 알렉산더는 뼈저리게 깨달아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193)

키니코스학파의 가르침의 요지는 세속으 재물을 돌아보지 말고 덕에 집중하라는 것이고, 미덕만이 가치 있는 재물이라 했다. 이것은 분명히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세상의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따지자면 약간 소극적인 태도다. (193)

 

그것은 일종의 기회주의적인 생활 태도로, 취할 일이 있으면 양손을 벌리고 취하지만 기회가 사라졌다고 해도 불평하지 않고, 즐길때는 즐기지만, 운명의 장난은 냉소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가르침이 이와 같이 발전해서, ‘시니컬(cynical)‘이라는 말이 저 불명예스러운 의미를 띠게 된 것이다..(194)

에피쿠로스에게 최선의 선은 쾌락이었다. 이것이 없으면, 선한 삶은 불가능하다. 문제의 쾌락에는 정신적 쾌락은 물론 육체적 쾌락도 들어간다. 정신적 쾌락은 육체적 쾌락을 관조하는 것이며, 그 어떤 것도 그 이상 중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적 삶은 이것을 어느 방향으로 향한다 해도 자유다. 우리는 어느 정도 우리의 관조의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데 반해서, 육체적 삶은 대개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이다. 여기에 정신적 쾌락이 유일한 이점이 있다. 이와 같은 견지에 서서 덕이 있는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는 데 신중하다.(197)

에피쿠로스는 종교를 크게 반대했지만 신의 존재는 인정했다.(199)

전반적인 스토아학파의 관점에 서면, 사람의 덕이나 악덕은 남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적인 문제라는 것은 우리가 살펴본 대로이다. 그러나 사회적 인간관에 서면, 각자의 윤리적 성질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매우 분명하게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206)

그리스는 세계의 지적 작업장이었으나, 자유 독립 국가로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한편, 그리스의 문화 전통은 멀리, 그리고 널리 전해져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서양 문명에 남겼다.(207)

그리스 전통 중 불경하고 기이한 성격은 헬레니즘 시대의 타락과 결부되어 고대 로마의 미덕을 저하시키는 데 다소의 역할을 했다. 특히, 해외 발전의 도래와 함께 많은 재물이 로마에 흘러들어오자 그것은 더욱 심해졌다. 순수한 그리스 영향은 힘을 잃어 특히 로마 시의 귀족 계급에 속하는 소수의 개인에게 집중되었다.(211)

플로티노스의 삼위일체 : 절대자(E), 철학적 정신 또는마음’, 그리고 끝으로 영혼. 그리스도교의 이론은 이 삼위일체 이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215)

사람들은고대세계의 철학적 노력의 흔적을 돌아보고, 그리스 정신이 총괄적 문제를 식별하는 데 대단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란다. 철학의 시작은 어려운 문제에 머리를 갸웃거리는 일이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놀라움을 느끼는 이 능력이야말로 초기 그리스인이 이상할 정도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탐구와 조사라는 일반 개념도 서양 철학을 형성한 그리스인의 위대한 발명 가운데 하나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비교한다는 것은 물론 항상 힘든 일이지만, 서양 문명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적인 정신적 윤리에 입각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의 중요한 특색 중 또 하나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목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 진리는 대단한 것은 아니라 해도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신성한 분위기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언어와 의미 전달이 매우 강조되었다. 하기야 거기에는 신비적 요소도 몇 가지가 있고, 그것도 훨씬 초기에 있던 일이다.(218)

 

4장 초기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가 콘스탄티누스 치하의 국교가 된 뒤, 교회는 신과 종교에 관한 모든 문제를 담당했지만, 세속적인 문제의 감독은 황제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교회의 권위는 차차 쇠퇴해 가고 있었지만, 원칙적으로는 이에 대항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비로소 종교 개혁이 인간과 신과 교섭하는 인간의 개인적 본성을 강조하여 교회의 지배력을 뒤엎었다. 그 뒤 교회는 신흥 민족국가의 앞잡이로 전락했다.(222)

읽고 쓰는 일은 거의 독점적으로 교회 사람이나 성직자의 특권이 되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발전하여 그 흔적이 서기(clerk)’라는 현대어 그대로 남아 있다.(223)

서방을 지배하게 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와 동방의 종교가 섞인 혼합종교를 어느 정도 포함한 유대에서 나온 것이다.(224)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교도 신은 백성을 선택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종교에서 선택된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 두 종교는 모두 신의 천지 창조에서 시작하여 무엇인가 성스러운 종국으로 나아간다는 같은 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메시아는 누구고, 메시아는 무엇을 이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몇 가지 있었다. 유대인들은 구세주가 앞으로 그들에게 지상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나사렛의 예수를 구세주로 받들고 있었다. 다만, 그의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유대인의 정의의 개념을 이어받아 이것을 이웃을 돕는 지도 원리로 삼는 동시에, 교리에 대한 주장까지 이어받았다. 후기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는 모두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적인 내세의 관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내세에 대한 그리스의 이론은 철학적이고 누구나가 간단히 이해할 수 없는 데 반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내세에 대한 관념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었다. 이 관념은 의로운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악인은 지옥의 불로 떨어진다며 그 속에 인과응보의 요소를 확실히 밝혔기 때문이다. (235)

죄의식은 구약성서 초기에는 국민적 결함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차차 개인의 오점으로 보게 되었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이러한 역점의 변화는 중대했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 일이 있는 사람은 개개의 그리스도 교도였다. 개인적인 면을 강조한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선구자다. 카톨릭교에서는 교회의 기능이 유일하고 중대한 생명선으로 여겨지기에 이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양쪽이 다같이 중대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저주를 받은 죄 많은 존재로, 교회의 조정이 있어야만 구제된다. 그러나 종교 의식을 지켜도, 덕이 있는 삶을 보내도, 구원은 얻을 수 없다. 신은 선하고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구원을 준다는 것은 호의지만, 주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비난할 수는 없다. 나중에 이 예정설의 가르침을 유연성 없는 신교파 신학이 채택했다. 한편, 마니 교도가 주장한 것처럼 악을 실질적 원리가 아니라, 나쁜 의지의 결과라고 보는 관점은 개혁된 종교가 이어받은 귀중한 가르침이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책임 개념의 바탕이 된다.(238)

그리스인의 관점은 당연히 범신론으로 끝난다. 이 범신론에 입각하면, 신은 세계다. 이와 같은 사상의 경향은 어느 시대에서나 신비주의적 편향이 강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이 견해를 가진 가장 유명한 대표적 철학자는 스피노자이다.(241)

사회적 전통과 철학적 전통에는 그 어떤 상호 작용이 있다. 미신적 전통은 미신을 가지지 않는 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할 것이다. 진취적 기상보다 금욕을 높이 평가하는 전통에서는 시대의 도전에 대응하는 건설적인 정치적 조치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철학 문제는 그 배후에 있는 역사적 학식의 모든 재료가 없어도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사를 보는 관점은 대부분의 의문이 이전에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과거에 현명한 해답이 제시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있다.(246)

우리는 중세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새로운 사실 두 가지를 언급해야겠다. 첫째는 서쪽에 수도원 제도가 생겼다는 것이고 둘째는 로마 교황권의 권력과 권위가 중대했다는 것이다.(250)

 

5장 스콜라철학

로마의 중앙 정권이 쇠퇴함에 따라, 서로마 제국의 여러나라들도 미개 시대로 빠져 유럽은 전반적인  문화의 쇠퇴기로 들어갔다. 이른바 암흑 시대는 대체적으로 600년에서 1000년까지로 계산된다.(256)

7세기에 들어가자마자 유럽이 갑자기 암흑 속으로 던져졌다가, 4세기 후에 거기에서 빠져 나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고전적 전통의 영향은 비록 약간 불안정하고 한정된 것이었다 해도 어느 정도 살아 있었다.(256)

이와 같이, 속세의 권력과 종교의 권력은 숙명적인 상호의존의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260)

당시의 교회를 둘러싼 큰 문제가 두 가지 있었는데, 성직 매매의 풍습과 독신의 문제였다. (266)

마호메트의 사위 아리가 661년에 죽은 이후에 신자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었다. 시아파는 아리에 충성을 바치는 소수파로 우마이야 가문 사람은 한 사람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인은 이 소수파에 속하며 그들의 영향력에 의해 왕조도 아바스 왕조에 밀려 대체되고 이 왕조가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다(272)

스콜라 철학은 하나의 운동으로 결론이 사전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 철학과는 다르다. 그것은 정통 신앙의 궤도 내에서 작용해야 한다.(277)

13세기에 스콜라 철학 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마찬가지로, 교황과 황제의 항쟁도 한층 격렬한 국면으로 들어갔다. 많은 점에서 이 시기는 유럽 중세기의 절정을 이룬다. 그 후의 세기로 들어가면 신흥 세력이 모습을 나타내는데, 이때가 바로 15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17세기의 과학과 철학의 부흥에 이르기까지다.(278)

한편, 토마스주의 방식은 일원론적 존재관을 가지면서, 인식 작용의 영역에서는 이원론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인식의 근원이 가정된다. 첫째는 여전히 우리에게 이성이 있고, 이것은 오관의 경험에서 사고의 양식을 얻어온다. 스콜라 철학의 유명한 공식에, 지능은 감각의 경험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있다. 게다가 거기에는 지식의 독립된 근원으로서의 계시도 있다. 이성이 합리적인 지식을 낳는데 반해서, 계시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준다. 사물 중에는, 전적으로 이성 밖에 놓인 것도 있어서, 이들을 파악할 때는 계시의 힘을 빌려 파악해야 한다.(285)

아퀴나스에게는 계시의 진리는 자의적이며, 이성과 계시 사이에 모순이나 충돌이 없고, 따라서 철학과 신학 사이에도 대립은 없지만, 사실상 한쪽이 다른 쪽에게 남몰래 상처를 입히고 있다. 이성이 사실을 처리할 수 있는 곳에서는 계시가 덤이며, 계시가 사실을 처리할 수 있는 곳에서는 이성이 덤이다.(285)

토마스주의자들은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을 별도로 하고라도, 이와 같은 증명을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약화시키고 있다. 종교적 신념 쪽에서 보면, 이것은 이성의 규준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며, 어떤 점에서 영혼은 자기가 좋아하는것에 자유롭게 충성을 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91)

아마도 가장 위대한 중세의 종합적인 사고는 단테의 저서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신곡>을 썼을 당시, 중세는 실제로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298)

종교의 힘이 사람들의 행동을 억압하는 걱정의 근원이 되었지만 교의 같은 것은 없어도 된다고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하자, 그 영향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300)

각 나라 국어가 번성함에 따라, 교회는 철학과 과학의 지적 활동에 대한 지배력을 어느 정도 상실했다. (301)

그리스 사상과 중세 사상의 주요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면, 그리스 사상에는 죄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스인에게 인간은 물려받은 개인의 무거운 죄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307)

인간이 신앙을 가진 뒤, 신앙 규율을 준수하는 것은 신의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첫걸음을 내딛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된다.(308)

 

6장 근대 철학의 융성

중세의 쇠퇴기에서 17세기의 거대한 파도에 이르는 과도기에는 중대한 움직임 네 가지가 한층 눈에 띄게 된다. / 첫째, 15, 16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이다. / 둘째, 휴머니즘이라는 문화운동이다. / 셋째,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 넷째, 오컴의 비판으로 시작되는 경험적 연구의 부활에서 직접 나왔다. (312~313)

공업 기술의 응용면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둔 과학은 다른 종류의 위험을 만들어 냈다. 인간이 적당히 노력해서 적용하기만 하면, 인간에게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대 공업의 커다란 진보는 많은 머리와 손의 협력에 달려 있으며, 새로운 계획을 시작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자기 힘이 무한하게 보인다. 이 모든 계획이 인간의 노력을 수반하고 인간의 목적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자칫 잊기가 쉽다. 이 영역에서 현대 세계는 한도를 넘을 염려가 다분히 있다.(315)

철학 분야에서 인간에 대한 강조는 사변으로 향하는 내적인 경향을 불러일으키며, 그 결과 힘의 철학을 고취시키는 관점과 정반대 되는 관점이 나오게 된다.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의 비판자가 되어 약간의 직접 경험을 빼놓고는 다루지 못할 문제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초래한다. 이 회의주의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개인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이에 대한 어떤 중간적인 해결책을 분명히 찾아야 한다.(315)

인쇄술의 발견이 논의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그 축복이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는 것도 억지는 아닐 것이다. 허위도 진실처럼 간단히 인쇄되어 널리 퍼지기 때문이다. 자기 앞에 놓인 재료를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거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언론과 비판의 자유가 있어서, 인쇄 문자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마음껏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유가 없으면, 우리는 차라리 문맹으로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대는 이제 인쇄술만이 매스컴의 강력한 수단이 아니므로, 이 문제는 한층 심각해졌다. 무선 전신과 TV가 발명된 이후, 보통 그런 자유가 쇠퇴할 염려가 없다면 끊임없이 경계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316)

언론과 비판의 자유가 있어서….. 글쎄 어찌 세월을 거스르는 듯한 우리네 현실.

지식이 더 널리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지구에 대해 지난날보다 더 올바르게 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세계 발견의 항해가 서양의 기력과 모험심에 새로운 돌파구를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316)

상반되는 두 가지 경향은 새로운 견해를 낳는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능력과 창의성에 자신감이 넘쳐, 인간은 이제 무대의 중앙에 선다. 그러나 동시에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는 그다지 당당한 것이 못 되었다. 무한한 공간이 철학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독일인 추기경 니콜라스 쿠자누스의 저술에 잠깐 나타났고, 다음 세기가 되자,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이와 마찬 가지로, 세계는 수학적인 틀에서 수립된다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오랜 견해가 되살아난다. 이들 모든 사변에 의해서 사물의 현존 질서는 뒤집혀지고, 교회와 세속의 낡은 권위는 다같이 세력을 잃었다. 교회는 이단의 전파를 억제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잘 되어가지 않았다. 1600, 조르다노 브루노가 종교 재판에서 화형 선고를 받은 일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전에도 가끔 있었던 것처럼, 현존 질서를 수호하는 사람들은 전복될까 두려워하여 감히 이견을 품는 사람에게 잔인한 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이 판결은 오히려 현존 질서를 유지할 지위가 얼마나 불안전했던가를 나타내고 있었다. 정치 분야에서는 새로운 개념의 권위가 차차 나타나 세습하는 지배 권력은 더욱더 한정되어 갔다.(317)

르네상스 운동의 선두주자는 피렌체이다. 아테네 이외의 그 어느 곳도 이 정도로 균형을 이룬 예술가나 사상가를 낳은 곳이 없었다. 단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는 그중 몇몇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은 모두 피렌체 사람이었으며, 나중에 출현한 갈릴레이도 마찬가지였다.(320)

에라스무스의 영향이 가장 오랫동안 인상 깊게 남은 분야는 교육이다. 인본주의 학문은 최근까지 서유럽식 사고 방식이 성행하고 있는 곳은 어디서나 중등 교육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점에서 그의 문학 및 교육 활동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그는 출판자로서 자신의 저서에는 반드시 원전에 대해 비판적인 검토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아카데믹한 전문가보다는 오히려 광범위한 독자 대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국어로 글을 쓰지 않았다. 라틴어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그는 여념이 없었다.(329)

이와 같이 사물의 수적 구조를 파악했기 때문에 인간은 환경에 대한 새로운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 어느 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인간을 신에게 가까이 가게 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신을 최고의 수학자로 보고 있었다.(339)

케플러는 천문학을 더욱 크게 발전시켰는데, 그는 젊은 시절에 티코 브라헤 아래서 배운 적이 있었다. 케플러는 관측 기록을 면밀히 조사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원궤도가 반드시 만족하게 현상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궤도가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중략) 마지막으로 태양에서 떨어진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대한 회전 주기의 제곱비는 모든 행성이 동일하다는 것도 알았다. 이것이케플러의 세 법칙으로, 이들은 코페르니쿠스 연구의 지침이 되어 있떤 피타고라스 학설과는 근본적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342)

인간이 빠지기 쉬운 여러 가지 오류에 대해 베이컨의 설명은 그의 철학 가운데 가장 빛난다. 우리는 네 가지 타입의 정신적 약점에 빠지기 쉽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이것을 우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첫째는종족의 우상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다. 희망적 생각이 그 한 예일 것이다. 특히, 실제로 존재하는 이상으로 큰 질서를 자연 현상에 기대하는 것이 그렇다. 다음에는 동굴의 우상이다. 이것은 각 개인적인 왜곡을 말하는 것으로 그 수는 무수하다. 시장의 우상은 정신이 언어에 현혹되기 쉬워지는 경향 때문에 야기되는 오류로, 특히 철학에 유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체계나 사상의 유파에서 일어나는 오류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에 대한 예로 든다.(351)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이 두 가지 영향을 받고 이를 융합시켜 고대인과 같은 장중한 새로운 철학 체계를 이루어냈다. 따라서, 그는 마땅히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다.(356)

우리가 빠뜨린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항상 철저하게 대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대수학을 기하학 문제에 적용했을 때 사용한 방법으로, 이와 같이 해서 오늘날의 해석기하학이 생겼다. 해석기하학을 철학에 응용하는 것은 나이를 더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데카르트는 느꼈다. 윤리학에서 우리는 딜레마 상태에 있다. 그것은 과학의 서열상 마지막에 오는 것이지만, 우리는 삶에서 바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실용적 기준에서 가장 좋은 생활 조건을 줄 만한 잠정적인 행동법을 채택한다. 그 결과 그는 자기 나라의 법률이나 관습을 지키고, 자신의 종교를 믿기로 결심한다. 일단 어떤 행동을 하려고 결정하면, 결단과 인내를 가지고 행동하기로 결심한다. 마지막으로 운명에 도전하는 것보다 오히려 자기를 억제하고, 자기 희망에 사물의 질서를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자신이 사물의 질서에 맞추기로 결심한다. 이때부터 데카르트는 철학에 전념하기로 마음먹는다.(359)

데카르트의 방법은 형이상학으로 나가자, 저절로 그가 일관되게 품은 회의로 이끌려간다. 오감의 증언은 불확실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수학은 의문의 여지는 없으나, 역시 수학까지도 의심해야 한다. 신이 우리를 일관되게 헤매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의심하는 자가 인정하는 것도 자기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기본 공식,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바탕이 된다. 여기에 바로 형이상학의 분명한 출발점이 있다고 데카르트는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자기가 하나의 생각하는 존재며, 자연적 실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따라서 마찬가지로 육체와도 관계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359)

스피노자의 저술은 많지는 않지만, 전에 거의 볼 수 없었을 정도의 집중력과 논리적 엄밀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신과 종교에 관한 그의 견해는 시대를 훨씬 앞질러 있었기 때문에, 그 윤리상의 이론을 구성하는 데는 엄격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시대나 그 후 100년 동안에도 죄악의 괴물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그의 최대 저서인 <윤리학>은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 같아서 죽은 후까지 출판 할 수 없었다.(365)

진리는 사실과 같다는 이론은 매우 중요한 결과를 미친다. 무엇보다 그것은 수학적 진리가 확실히 인식되는 이유를 제공한다. 인간 스스로가 추상적이며 자의적인 방법으로 규칙을 세워서 수학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학을 문자 그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380)

자연 자체는 신이 만든 것이고, 따라서 신만이 자연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해서 무엇인가 배우고 싶다면, 인간은 수학적 절차보다도 오히려 실험과 관찰에 의한 경험적 방식을 채용해야 한다. 비코는 데카르트보다 베이컨에게 훨씬 공감을 가지고 있었다.(380)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언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언어를 분명하게 규정된 계산의 규칙으로 보는 극단적인 합리주의자의 관점으로, 이는 널리 퍼져 있는 분명하고 명확한 관념이 언어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라이프니츠의 방식이다. 이와 반대되는 방식은 완성된 그대로의 자연의 언어를 전달의 적절한 수단으로 보는 한편, 형식화하는 시도를 왜곡으로 보고 거부하는 비코의 방식이다.(385)

비코의 중요성은 오히려 19세기와 그 철학적 발전을 신비스러울 정도로 예시한 데 있었다.

진리는 행위이다. 라틴어라 말하지만 진리는 사실이다.(386)

 

7장 영국 경험론

사회적, 지적 분야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 사상은 자유주의라고 불렀다. 약간 막연한 이 말은 상당히 확실한 특징을 몇 가지 보여준다. 첫째,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신교적이었지만, 칼빈주의식으로 좁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훨씬 신교적이며, 각 인간이 독자적으로 신과 서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한층 발전된 것이었다. 게다가 완고한 신앙은 장사에는 좋지 않았다. 자유주의는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키고 있던 신흥 중산층의 소산물이기 때문에, 귀족정치와 군주정치의 특권층이 지배하는 전통에 반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본적인 경향은 관용이었다. 17세기에 유럽의 대부분 국가가 종교 전쟁 때문에 갈라져 비타협적 광신주의로 몸부림을 치고 있을 무렵, 네덜란드 공화국은 여러 가지 비국교도나 자유 사상가의 피난처였다. 신교 교회는 카톨릭교가 중세 때 얻고 있던 정치 권력을 획득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국가 권력은 훨씬 중요시되고 있었다.(390)

듣기에 이상한 일이지만, 로크가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뉴턴의 광범위한 정복과 결부되어 있다. 뉴턴 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폐기시키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로크의 정치 이론도 기발한 점은 없지만, 왕권신수설을 부인하고 스콜라 철학의 자연법을 근대의 조건에 맞도록 변경하여, 새로운 국가관을 수립하려고 했다. (400)

로크의 영향은 프랑스에서 더욱 강했다. 앙시엥 레짐( 체제)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적 압제는 영국의 자유주의 원리와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과학 분야에서도 뉴턴적 관념이 낡은 데카르트적 세계관을 밀어냈다. (401)

버클리는 시각은 외적인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이라고 그는 말했다. 촉각은 감각의 관념으로서 정신 안에 있지만 물적인 대상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405)

로크가 말한 관념 이론은, 심각한 많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정신이 감각 인상밖에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때 버클리의 비판은 제1성질과 제2성질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설정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411)

흄은 이 인과성 논의를 맺으면서, ‘원인과 결과에 대한 규칙을 몇 가지 정하고 있다. 첫재, 원인과 결과는 공간과 시간에 인접해야 한다. 둘째, 원인은 결과보다 먼저여야 한다. 셋째,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일정한 관련이 있어야 한다. 이어서 나오는 몇 가직 규칙에는 밀의 규칙을 예시한다. 넷째, 우리는 동일한 원인이 항상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고 배웠는데, 이 원리는 우리의 경험에서 나온다. 이 결과에서 이어지는 다섯째, 몇 가지 원인이 동일한 낳은 경우, 이들 원인은 무엇인가 틀림없이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섯째 규칙을 추론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결과의 차이가 원인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나머지 두 규칙은 여기서 우리가 고찰할 필요는 없다. (420)

우리는 흄이 인간의 과학에 가장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새삼 떠올린다. 회의적 입장은 윤리학과 종교 분야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422)

 

8장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낭만주의 운동과 계몽 운동의 관계는 어느 면에서 아폴로적인 태도와 대조되는 디오니소스적 태도를 상기시켜 준다. (427)

낭만주의는 특히 시인 사이에 지지를 받았다. 가장 유명한 낭만주의자는 아마도 바이런일 것이다. 바이런은 완전한 낭만주의자가 될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기존 인습에 대한 반역이 있고, 공공연한 무시와 멸시가 있고, 앞을 가리지 않는 대담함이 있고, 고귀한 행동이 있다.(429)

(루소)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는 사람들에게 부자연스러운 욕망을 가르치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 욕구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아테네를 반대하여 스파르타를 좋아했다. 그는 과학은 속되고 나쁜 동기에서 나왔다고 해서 이를 비난했다. 문명인은 부패하고 있다. 진실로 덕을 가진 사람은 고귀한 야만인이다. (434)

사람들은 자기 권리를 전체적으로 사회에 위임할 때 개인으로서의 모든 자유를 잃는다.(436)

칸트는 위대한 철학 저서를 통해 재물이 아닌 명성을 얻었다. 만년에는 정신력이 쇠퇴했지만,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은 그를 자랑으로 여기고, 그가 세상을 떴을 때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철학자로서 이 정도의 영예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438)

칸트의 윤리학의 바탕에 있는 정언적 명령이 형식 원리라는 점에서 우리는 특히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이론적인 이성권에 속할 수 없다. 그것은 현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446)

독일의 관념철학은 헤겔의 손에서 최종적인 체계적 모양을 갖추었다.(452)

헤겔의 저술은 모든 철학 문헌 가운데에서도 가장 난해한 것 중에 하나이다. 이유는 논제의 성질 때문만이 아니라, 저자의 문체가 서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끔은 선명한 은유가 나와 개운한 기분이 들지만, 이것도 전체의 모호함을 줄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헤겔의 목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사이에 칸트적인 구별을 상기하는 것이 좋다. (453)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 헤겔은 절대자가 가까이에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견해로 볼 때 항상 사건 후에 생기는 철학 세계를 수립하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이것은 <법철학> 서문에 인상적으로 표명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어둠이 닥쳐오지 않으면 날지 않는다.”(463)

최고의 윤리적 존재는 자기이며, 의지 결정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선택을 통해 인생을 창조한다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결혼은 가장 중요한 개인적 결단 중 하나이다. (468)

머리로는 그럴 수 있으나, 마음으로는 그렇지 못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결혼과 출산에 대한 중요도는 돈과 개인적 안위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 의해 그 우선순위가 점점 뒤로 가고 있다.

한편 이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과대평가하는 것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헤겔은 이성을 너무 존중해서 이성이 우주를 낳을 수 있다는 오류에 빠졌다. 키에르케고르는 정반대 의견을 내어, 이성은 우주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과학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낭만주의 최고의 원리와도 일치한다. 키에르케고르는 낭만적인 삶의 방식을 외부 영향의 변화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라고 엄격하게 비판하지만, 그는 철저한 낭만주의자이다. 실존적 사고 양식을 가정하는 원리 자체가 이미 혼란에 빠진 낭만주의 개념이기 때문이다.(470)

쇼펜하우어는 이 의지를 철저하게 악으로 보고, 삶에 고통이 반드시 따르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에게 지식이란 헤겔처럼 자유의 원천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근원이다. 이와 같이 쇼펜하우어는 합리론 체계의 낙관론 대신에, 행복이 깃들 수 없는 아주 어두운 견해를 가지고 있다. 성 또한 그에게는 악한 것이었다. 생식은 단순히 고통의 희생자를 새로 낳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여자 혐오증은 이 견해와 관련된다. 그는 이런 점에서 여자의 역할이 남자의 역할보다도 지나치게 과정되고 있다고 생각했다.(473)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결국 세계와 세계의 분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이라면, 니체(1844~1900)은 이와 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의 생각을 요약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일반적인 뜻에서의 철학자가 아니며, 자신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을 남기고 있지도 않다. 어쩌면 그는 문자 그대로의 귀족적 휴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특히 하려고 했던 일은, 가장 뛰어난 인간, 즉 성격이 가장 건전하고 가장 힘찬 인간을 최상위로 밀어 올리려는 것이다. (474)

쇼펜하우어가 비관주의적 결론에 도달한 데 반해, 니체는 낙천주의적 입장을 취한다.(476)

니체가 무엇보다도 싫어한 것은 새로운 기술과 함께 성장한 새로운 형태의 대중의 출현이었다. 그에게 사회의 올바른 기능은, 귀족적 이상을 달성하는 위대한 소수인의 못자리 역할을 다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작은 물고기에 고통이 일어나도, 그에게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국가에는, 플라톤의 <공화국>의 이상국가와 다분히 공통된 점이 있다. 그는 전통적 종교를 노예 도덕의 지주라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자유인은 신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인간형이다. 노예 도덕의 진부한 실례를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들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내세에서의 보다 좋은 삶을 향한 희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관주의적이고, 온유함이나 동정과 같은 노예의 냄새가 나는 덕목을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그너가 나중에 그리스도교에 치우쳤기 때문에, 니체는 이전에 존경할 만한 친구로 여겼던 이 작곡가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의 영웅 숭배론을 보자면 맹렬하게 여성을 멸시하는 태도를 볼 수 있고, 여자를 재산처럼 다루는 동양의 풍습을 변호한다. 이 점은 니체 자신이 여성을 잘 다루지 못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478)

 

9장 공리주의 이후

증기를 만드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보일러에 석탄을 때는 것이었다. 따라서 탄광업은 크게 발전했지만, 그것은 실로 가혹한 조건이 많이 따랐다. 실제로 인간 쪽에서 보면, 산업주의 초기는 무시무시한 시기였다.(480)

언제나 그렇듯, 기존의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체계가 세워지게 되면, 이를 경험하는 인간들은 깊은 충격에 빠지게 된다. 성격은 다를 수 있겠으나, 생명공학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의 정점에 있는 지금의 현대인들 또한 또 다른 문화충격을 겪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제를 올바르게 다룰 수 없고,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485)

사회 비판에서 벤담은 18세기 유물론과 같은 선상에 있고, 훗날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을 대부분 예시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희생 도덕은 지배 계급이 자기 손으로 가진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부과하고 있는 정교한 속임수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희생을 기대하면서도 자기는 아무런 희생을 지불하지 않는다. 이에 반대해서 벤담은 공리주의를 주장한다. (489)

쾌락이란 바라는 것이라고 정의한 경우와 같이 평범한 의미를 제거한다면, 비록 욕망이 충족되어 실제로 내가 쾌락을 얻는다 해도 내가 바라는 것이 쾌락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옳지 않다. (492)

다윈의 저서 중 독창적인 점에서 훨씬 떨어지는 것은 진화론이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낙시만드로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윈이 한 일은 자신이 자연을 꼼꼼하게 관찰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자상한 사실을 대량으로 공급한 일이었다. 진화를 인정하는 그의 논증에는 고르지 못한 점이 있지만, 위대한 밀레투스학파의 논증보다는 확실히 바탕이 튼튼하다. 그러나 다윈주의 이론에 의해서 진화의 가설은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의 토의라는 넓은 무대에 올랐다. (494)

마르크스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발전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는데, 둘 다 이것을 형이상학 이론에서 얻고 있다. 헤겔에게 향한 비판은 그대로 마르크스에게도 해당된다.(500)

마르크스가 정치 이론가일뿐만 아니라, 선동가이기도 하고, 혁명적 시사 평론가기도 하다는 사실이다.(503)

마르크주의 철학은 19세기가 낳은 위대한 마지막 체계이다. 그 호소력의 크기와 영향 범위는 주로 그 행동 게획의 혁명적 요소뿐만 아니라, 그 유토피아적 예언의 종교적 성격에 의존하고 있다. (504)

탐구는 어떤 종류의 불만이나 불안에서 생기는 것으로, 그 목적은 불안을 주는 영향이 제거되는 휴지 상태를 획득하는 데 있다.(510)

제임스에 의하면, 우리는 자의식을 물질 세계의 대상과 마주보고 있는 하나의 실재물이라고 하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513)

근본적으로 무한소는 원래가 수학이라는 벽장의 모든 비밀 중에서도 가장 곰팡내 나는 것 중 하나이다. 그것은 이와 비슷한 피타고라스학파의 단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논이 피타고라스의 이론을 어떻게 폭로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근대로 들어와서는 무한소 이론에 고나한 비판적 논평도 철학자로부터 나왔다.(517)

 

10장 현대 철학

인생이 점점 복잡해지면, 그 지배 수단도 점점 복잡해진다.(526)

교육은 보통 특권적이거나 독점적이었지만, 그 후 대부분 이런 특권은 무시되고 말았다. 오늘날 통용할 수 있는 기준은 단 한가지 유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뿐이다. 이것 또한 다른 종류의 하나의 특권이기는 하지만 말이다.(528)

라틴어는 키케로 시대부터 르네상스까지 학자, 사상가, 과학자의 언어였다. 가우스는 19세기 초기에 라틴어로 곡면에 관한 유명한 저서를 썼지만, 이것도 이미 약간은 진기한 일이었다. 오늘날 어느 분야의 탐구자라도, 자기 전문 분야에서 진행되는 일을 책에 남기고자 한다면, 모국어 이외의 언어를 두서너 가지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이제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근대어가 결국 라틴어가 가졌던 이전의 기능을 다해야 할 것이다(529)

과학적 노력의 범위가 거대해지면, 윤리적 성격을 띤 새로운 사회 문제가 생긴다. 과학자의 발견과 발명은 원래 윤리적으로는 아무 색깔이 없다. 이 문제는 발견이나 발명은 우리에게 좋게도 나쁘게도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준다.(531)

프로이트는 망각 작용을 이것과 매우 비슷한 억압의 기구와 결부시킨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는 것이 무서워 잊어 버린다. 우리는 쉽게 잊는 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회상을 주저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547)

수세대에 걸쳐 사람들을 움직였던 지도적 관념은 진보의 관념이었다..(552)

보통 인간적인 삶을 살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추세로 기품이 있고 책임도 중요시하는 개개의 시민이 자선을 베풀고 자발적인 원조를 주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사회 복지의 규정에 대한 첫발을 내디딘 것은 묘하게도 비스마르크로, 그는 일종의 노동자 건강 보험을 도입했다. 이것은 반대당인 사회주의자를 앞지르기 위한 것이었다.(554)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자. 실존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하이데거는 아직도 사상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는 예수회 사제가 되는 교육을 받았으나, 러셀 밑에서 연구를 하고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러셀의 후임이 된다.(562)

사르트르 : 프랑스의 철학자작가. 실존주의의 대표적 지도자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자기의 자유를 의식하면 사람은 불안을 갖게 되고, 그 불안에서불성실로 피난한다고 생각했다.(563)

영국의 분석 철학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572)

비트겐슈타인은 설명 중 언어 유희라는 직유를 도입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어느 언어의 현실적 용법은 하나의 유희, 예를 들면 장기놀이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이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고, 허용되는 수에도 제한이 있다. (573)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의 논리학적인 저서인 <논리철학론>을 완전히 부인한다. 그 당시 그는 모든 진술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순한 궁극적인 구성 요소로 분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와 같은 언어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아무리 해도 혼란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573)

맺는말

책을 한 권 숙독하는 것 만으로도 그 범위가 제아무리 넓어도, 독자가 전문가가 되는 일은 없다.(575)

지식의 습득 외에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인 자기 것이 된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진지한 숙고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575)

 

이 책과 같은 역사서에서는 동양의 지혜를 수용할 여지를 우리에게 주지 않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대답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 두 세계는 따로따로 나왔기 때문에 서양사상만으로도 설명하는 데 지장 없다. 게다가 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과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제에 범위를 한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렇게 해도 지장이 없는 그럴 만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중대한 몇 가지 점에서 서양의 철학적 전통은 동양 정신의 사고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 문명을 제외하면, 하나의 문명에서 철학의 움직임이 과학적 전통과 손을 잡고 나아가는 것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인의 진취적인 기상에 독자적인 활약 무대를 주는 것이다. 이 이원적 전통이야말로 서양 문명을 형성해 왔다.(576)

철학이 줄 수 있는 것은 경험적 연구의 결과를 바라보는 길이며, 이것은 과학이 발견한 것을 모아서 정리하는 말하자면, 하나의 틀이다. 관념론이 이 정도로만 제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한계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576)

탐구의 대상인 세계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의 잘못과 착각을 만들어 내고, 때로는 자기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도 발견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어떤 신념이 옳다고 해도 이 신념은 우리에게 쾌락이나 위안을 주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무한한 재원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그를 만족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세상에는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은행이나 법정은 전체적으로 그들처럼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탐구의 발견물이 때로는 오류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발견이 주관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오류는 적어도 범죄자를 필요로 한다고 말해도 옳을 것이다. 자연 자체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 자연은 아무런 진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명제를 공식화하면서 오류에 빠진다. (577)

플라톤의 이론에서는 윤리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이 결국 섞여 있다. 선이 지식과 동일하게 다루어 진다.(578)

이성은 의지와 감정에 대한 억제력이나 지침으로 작용할 수 있고, 실제로 작용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목적을 선택하는 것은 의지이다.(578)

결과적으로 이런 사실은 우리가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이나, 자신이 채용하는 윤리적 원리에 과학적 이유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어떤 윤리적 전제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 한, 논의를 시작할 수 없다.(578)

남은 문제는 진리의 추구가 좋은 일이라는 이 윤리적 원리를, 우리가 어떻게 취해야 하는가이다. 분명히 우리 모두가 반드시 과학적 탐구에 종사할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경우에 판단을 중지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자기가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 다른 사람에게 판단을 보류시키는 자유를 주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연히 공정한 탐구가 또 하나의 선으로 여겨지는 자유와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관용은 탐구가 왕성하게 되는 사회에서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다. 언론과 사상의 자유는 탐구자를 진리가 이끄는 대로 가게 하는, 자유로운 사회의 위대한 추진자이다. 이 정도까지라면 누구나 여기서 문제가 되어 있는 선에 공헌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모든 일에 관해서 같은 의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억지로 조성된 비평이 가로막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증 받을 수 있다. 인간에게 성찰하지 않는 삶은 정말로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580)

 

3. 내가 저자라면

김대성씨, 김대성씨는 삶의 특별한 철학이 있나?”

저요? 아뇨. 별다른 철학은 없고, 그저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웃으며 살자. 뭐 이 정도이지 않을까 싶은데 이걸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렇지. 조금 애매하지? 그런데, 난 그렇게 생각해. 우리는 우리의 삶에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 이렇게 말이지. 회사생활도 마찬가지야. 직장생활 하면서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이 없으면 도중에 자주 흔들이거든. 오래 가려면 자기 만의 철학을 가져야 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그런 부분도 생각하면서 회사생활하라. 이 말이에요.” 

 

지금은 중견관리자가 된 한 부장님과 이런 대화를 한 지 어느덧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의 직장생활은 10년차에 접어들었지만, 철학 같지도 않은 철학, 나의 안위를 위한 개똥철학 정도나 가지고 있을까 진정으로 직장생활의 철학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 내가 철학책을 접하고 있다. 중고교 시절 교과서에서 접한 이후로 처음이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로 철학은 나와 거리가 먼 학문이었다. 그리고 이 책 서양의 지혜를 읽으면서, 역시나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학문이 철학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머니스트이자 수학자였으며 사회운동가이자 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은 <서양철학사>라는 방대한 책과 더불이 이 책 서양의 지혜를 저술했다.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현대철학까지 아우르는 이 방대한 스케일의 철학책은 당대 주요 철학을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와 역사적 배경을 전하면서 그러한 철학들이 형성된 이유는 되집어 본다. 어떤 철학 이론에 대해 깊숙이 들어가기엔 철학의 영역이 너무 깊으며 책의 분량이 받혀주질 못한다.

러셀 자서전을 읽을 때도 느낀 부분이지만 그의 글을 꽤나 잘 읽히는 편이다. 문체가 간결하고 논리적이다. 다만,  그럼에도 난 이 600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이 책의 내용들을 반에 반도 이해하지 못한듯한 느낌이 들었다. 철학에 대한 공포(?!)가 있어 미리 겁먹고 어렵게 받아들인듯했고, 실제로도 많이 어려웠다. 잘 가다가 단단한 벽에 부딪힌 느낌이랄까. 한정된 시간과 부족한 노력으로 평생을 고민한 철학가들의 사상을 낼름 받아먹기란 여간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음을 놓고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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