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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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순천에 위치한 선암사(仙巖寺)에 다녀왔습니다. 선암사는 아름다운 돌다리 ‘승선교(昇仙橋)’와 안에서 밖의 풍경을 볼 수 있는 해우소(解憂所), 그리고 천염기념물로 지정된 고매(古梅) 등 볼거리가 많은 절입니다. 그런 선암사에서 내게 가장 먼저, 깊이 들어온 것은 경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작은 돌탑입니다. 방문객들이 크고 작은 돌맹이로 쌓은 것입니다. 눈길을 돌릴 때마다 모양이 다른 돌맹이를 쌓아올린 돌탑이 보였습니다. 돌탑을 보며 돌맹이를 하나하나 포개 탑을 쌓으며 소원을 빌었을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렸습니다.
나도 낮은 담장의 기와 위에 작은 돌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번 여행 동안 ‘지금 여기’를 살겠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여행에서 돌아와 언제 어디에 있든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켜봐 주세요.”
돌 위에 다른 돌 하나를 올리다가 문득 떠오른 소원입니다. 언젠가부터 원하게 되었지만 가능할 거라 믿지는 않았던 바람입니다. 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관한 걱정에 수시로 젖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득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몰입하고 싶다. 지금 여기서부터 그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런 바람과 확신이 선암사에서 떠오른 이유를 생각하다가 유홍준 선생의 책에서 본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선암사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딱 집어 말하기는 참으로 힘들다. 따지고 보면 미술사적 유적으로 뛰어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관이 빼어난 것도 아니지만, 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나고, 가면 마음이 마냥 편해지는 절집이다.”
이전까지는 여행하면서 뭔가를 얻어 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먼저 버리고 싶었습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집착 혹은 생각을 말입니다. 나는 잘 버렸을까요? 아직 모르겠습니다. 두고 볼 일입니다만 버린 자리가 휑하지는 않습니다. 그 자리에 ‘지금 여기를 살기’라는 씨앗이 발아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코! 또 뭔가를 얻어왔군요. 어쩌면 떠남은 만남이고, 버림은 얻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본형 사부는 <떠남과 만남>의 초판 서문에서 여행은 “버리기 위해 떠나는 것이고 버린 후에 되돌아오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여행을 통해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없다. 오직 버리기 위해 떠난다. 소유한 것이 많으면 자유로울 수 없다. 매일 걸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배낭 하나도 무거운 짐이다. 무엇을 더 담아올 수 있겠는가?”
건축가 승효상 선생은 선암사는 “산사의 고졸한 원형을 보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세월이 갈수록 위엄이 더해 가며 우리에게 경건과 침묵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 있다”고 강조했고, 유홍준 선생은 선암사가 보여주는 ‘우리나라 산사의 미학적 특질’을 ‘깊은 산속의 깊은 절’로 요약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선암사를 거닐며 깊은 마음속의 깊은 바람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 안에 경건과 침묵과 바람의 장소 하나가 생겼습니다.
구본형 저, 윤광준 사진, 떠남과 만남, 을유문화사,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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