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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9일 23시 07분 등록

그녀는 피그말리온의 조각이다.

 

모든 남자에게는 특별한 여자가 있다. 그 가치의 결정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겠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객관적인 희소성의 여자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역장 안에서 각자의 이유로 고통스러웠다. 여자들은 질투하였고 남자들은 혼란스러웠다. 여자들의 경우 해결책은 간단했다. 외면하는 것. 자존심 있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녀를 외면하거나 인정하는 척 하면서 화두를 종결하는 방식으로 어쨌든 영향권에서 밀어내었다. 남자들은 남자들은 알았다. 그 녀는 어찌 해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그녀에 대해 생각하면서 아무도 그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녀.

 

그녀는 이 세상을 저 혼자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화학을 가르치던 한 남자 선생은 교단에 서서 그 녀의 창백한 피부를 핸디캡인 양 놀려 대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면 그녀의 흰 얼굴이 복숭아 밑둥보다 붉어지곤 했다. 선생도 남자인지라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환심을 끌어 보고 싶었겠지. 우리는 그런 행위에 웃었지만 매우 언짢아졌다. 감히 우리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을 권력을 앞세워 희롱하다니. “그만하시죠.” 언젠가 A가 수업 시간에 주의를 주었고 그 이후에 그 남자 선생이 그 녀의 피부를 언급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키가 큰 편이었는데 가는 팔끝에서 가는 손가락이 그리고 좁고 가는 손톱이 이어졌다. 깡마른 체형이란 그리 드물지 않았지만 그녀처럼 미학적으로 완벽한 골조는 없었다. 지독한 거식증의 결과가 아닌 원체 가는 구조. 그것은 정신력의 승리가 아닌 유전자의 승리였고 노력으로 이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술이 오고 가는 몽롱한 자리에서 유쾌한 그녀가 카드패를 섞는 것을 보았다. 그 가녀리고 섬세한 손가락. 오르내리는 인대와 사람임을 증명하는 푸르스름한 정맥 따위를 바라보면서 저런 손이 기도한다면 무엇이든 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저 손이 나를 만진다면... 저 손이 나를 욕망한다면! 그 날 이후 더 이상 무심을 가장하기 힘들었다.

 

 

 

 

 

그 녀의 가슴이 보였다.

 

크림색 원피스는 생크림 케이터링처럼 사선으로 얇은 천이 반복적으로 덧대인 구조였다. 가슴과 원피스 끝이 만나는 접점에서 봉긋한 곡선이 눌려 위로 올라붙었다. 계곡이 꽤 깊숙한 곳까지 보인다. 암적색의 농밀한 와인 한 방울이 또로롱 가슴 사이로 파고들었다. 내가 끌리듯이 냅킨을 앞섬에 대자 그녀가 대신 냅킨을 받아 들었다. 흠칫 놀라며 아래를 보는데 아마도 내 행위보다는 얼룩 진 드레스가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미안해. 하지만 만난 건 진짜 반갑다. 너 나 기억하지?”

 

나는 악수를 위한 손을 내밀었다. 사실 우리가 악수를 할 사이는 아닌데 실수인 건 아닐까? 그녀는 계속 닦는 것에 취중하곤 나에겐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안녕, 못 알아볼 뻔했어.”

 

그 녀는 피해 상황을 죄다 확인한 후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떨구었다. 이게 뭐람. 그 녀는 웃었다.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여자다. 나는 술도 없이 목이 메였다.

 

어떻게 지내니?”

 

그냥, 별 거 없어. 의사 면허 따곤 그냥 일반의로 지내. 너는?”

 

? 난 어떻게 지내냐고?”

 

 

TV도 안보냐?

 

 

그 녀의 일행이었던 남자가 대화 중에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는 분이예요?”

 

, S의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남자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매너가 좋은 사람이었다. 나보다 그리 큰 것 같지 않다. 조금 호리한 체격에 젊은 나이임을 알려 주는 미끈한 피부, 곤충의 더듬이처럼 가늘게 파인 쌍커풀, 얇고 가는 입술이 너무 쉬운 인생을 나타냈다. 남자는 그리 지적 생명체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에르메스의 H 로고가 촘촘히 박힌 푸른 실크 넥타이와 조끼까지 받쳐입은 수트의 보들보들한 재질로 보아 꽤 사는 놈이었다.

 

S의 사촌 오빱니다.”

 

남자가 말했다. 사촌 오빠라고? 그녀와 번식을 시도할 수 없는 혈연 관계라는 소식에 순식간에 데프콘이 해제되었다.

 

그러시군요. 전 요새 이론 물리를 하는 중입니다. 최근에 각종 방송사 인터뷰니 뭐니 일정이 너무 많아서 좀 쉬려고 나왔어요.”

 

나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런즉슨, 내 얼굴을 어디 공중파 3사에서 보지 않았느냐는, 물음이었으나 그 사촌 오빠라는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 그 천재 물리학자라는 그 분이군요? 이름이 K?”

 

오히려 옆에 서 있던 서버가 나를 알아보았다. 짧은 검은 머리를 겨우 가르마를 타서 무스를 잔뜩 바른 청년이었다. 저도 대학에서 물리를 전공하고 있거든요. 학비를 벌기 위해 이렇게 서버일을 조금 하곤 있긴 하지만... 하하 그런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행패를 부리고 다녀서야 되겠습니까? 그는 잘 걸렸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곤란해졌다.

 

그 사이 L은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파듯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나와 사건의 광장에서 떼어놓았다.

 

미안합니다. 어찌됐건 이번 일은 제가 잘못했으니 만회할 기회를 주시죠 아가씨?”

 

그러게 어쩌냐? 그 옷 엄청 비싸게 주고 산 거 아니니?”

 

옆에서 그녀의 어머니이거나 아니면 이모나 고모쯤으로 추측되는 여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LS의 손등에 시늉에 가까운 가벼운 키스로 환심을 사는 사이에도 그 여자는 곧장 따라붙어 냅킨으로 S의 몸과 머리카락에 묻은 와인을 털어 댔다. 뾰족한 손톱에 빈틈없이 칠해진 붉은 에나멜 매니큐어가 숨막히게 맨들거렸다. S L의 손등 키스에 눈망울을 외곽으로 한 바퀴 돌렸으나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녀는 끌리듯이 L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느꼈던 경이로움의 눈으로 L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동자 사이에 영원한 공간이 생기고 잠시 둘은 그 곳에 머물렀다. L은 전혀 저항이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나는 여자의 사촌 오빠라던 남자의 새로 시작한 사업 이야기를 경청하는 체 하다가 두 남녀의 퇴로를 부리나케 뒤따랐다.

 

 

 

 

 

아벤타도르네.”

 

S L의 람보르기니가 호텔 앞에 서자 중얼대듯 말했다. L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 키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차키를 내민 L의 손을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어쩌라고?”

 

알다시피 좌석이 두 개야.”

 

데려 가서 뭐?”

 

그 다음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

 

L은 수트 앞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카드를 고르더니 하나를 뽑아 들었다.

 

아직 로데오의 명품관은 문을 열었을 거야. 실컷 빼주고 오라고.”

 

그런 걸로 통할 여자가 아니야.”

 

아까 못들었어? 아벤타도르라잖아, 아벤타도르. 너는 그 차의 모델명이나 알았어? 규모의 실험을 너무 어설프게 했군 친구.”

 

L은 소년처럼 웃으며 내 엉덩이를 톡톡 쳤다.

 

잘해보라고.”

 

젠장,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안잡힌다고!”

 

쉬워. 기어 넣고 브레이크 풀고 엑셀을 밟으라고. 몇 번 봤으니 할 수 있을 거야. 방지턱에서 너무 과속하지 말고. 몸체가 낮으니까.”

 

아아니, 여자 말이야. 여자! 여자에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냔 말이야!”

 

L은 웃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한 팔로 감싸 안고 나의 몸체를 한 바퀴 빙 돌렸다. 멀리 S의 시야에서 우리 둘의 작당모의를 숨기기 위한 행동 같았다.

 

쉬워. 정말 간단하다고. 저 여자가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해.”

 

그건 불가능해.”

 

그럼 그냥... 여자를 짐짝이라고 생각해.”

 

그것도 불가능해. 저 앤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

 

그러면, 이렇게 하자. 여자가 질문을 해오면 홀수 번 째 질문은 무시해.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대답하지 않는 거야. 그리고 짝수 번 째 질문은 매우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거지. 이건 할 수 있겠지?”

 

그게 소용이 있어?”

 

L은 내 어깨를 노크하듯 툭툭 두드렸다.

 

나만 믿어.”

 

나는 차와 여자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가는 종아리를 종종거리고 있었다. 펄이 함유된 바디 버터를 발랐는지 정강뼈를 따라 진주빛이 반짝반짝했다. 연두색 람보르기니의 뒷태와 그녀의 각선미는 운명적 조합이었다. 그녀에겐 저런 게 어울리는 거였군. 차키의 버튼을 누르자 주황색 불이 켜졌다. 나는 조수석의 차 문을 위로 열어 차문과 차체 틈 새로 고개를 숙여 그녀를 향해 검지와 중지를 까닥거렸다. S는 약간 고개를 돌려 L이 서 있는 위치를 한 번 쳐다보곤 마지못해 차에 올랐다.

 

실수는 저 사람이 했는데 왜?”

 

, 잘 부탁하고 갔어.”

 

“... ...”

 

사실은 내가 부리는 요리사야. 고용자가 책임을 져야지.”

 

나는 호기롭게 말했다. 시동을 걸기 위해 차의 심장부에 있는 빨간 버튼 케이스를 열어 버튼을 눌렀다. 마치 핵미사일 버튼 같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내가 꽤 긴장했음을 깨달았다. 겁나는 엔진 소리가 울리면서 계기판에 적황청 불과 숫자들이 매트릭스판처럼 일어났다.

 

긴장되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태우고 나니까.”

 

어디로 갈 건데?”

 

첫 번째 질문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글쎄, 저런 질문에는 대답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는 거냐니깐?”

 

S는 약간의 긴장과 짜증을 담아 재질문했다. 두 번째 질문이다. 나는 안심하였다.

 

글쎄, 로데오로 갈까?”

 

신호 대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옆에 선 버스에서 내리꽂히는 탑승객들의 시선을 즐겼다. 이런 땐 차가 오픈 카가 아닌 게 좀 아쉽군. 좁은 백미러로 뒤따라 오는 차량을 관찰했다. 멀찌감치 안전 거리를 유지하는 아우디. 하하. 그래 쨔사, 너도 나에게 바짝 대긴 좀 겁이 나겠지.

 

이 차 사고 싶다.”

 

S가 말했다.

 

이런 차를 가진 남자랑 결혼하면 되지.”

 

나는 적절한 카드를 던졌다. 뭐 질문이 아니니까 이런 평서문은 얼마든지 해도 되겠지. 패가 좋았다. 그러는 그 녀는 겸연쩍은 듯 웃다가 마치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너 지금 만나는 사람은 있어?” 라고 물을 것이고 그럼 나는 최근까지 있었지만 얼마 전에 헤어졌어.” 라고 대답하겠지. 그리곤 자연스레 우리 학창 시절의 추억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그 땐 참 좋았지.” 라고 공감하면서... “지금도 늦은 건 아니잖아?” 상황의 자연스러운 전개.

 

너희 어머니는 잘 계시니?”

 

그 녀가 물었다. 전혀 뜻밖의 질문이었고 나는 당황했다. 그 녀가 우리 엄마를 기억하고 있다니. 추측이 된다. 올림피아드 대회 이후, 엄마는 한 턱을 내시겠다고 반에 치킨을 돌리셨다. 엄마는 IMF를 맞아 다니던 식품 회사에서 강제 퇴직을 당한 후 얼마 안 되는 퇴직금으로 치킨집을 차렸다. 텃세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엄마가 동네 아파트 단지마다 전단지를 돌리면서 제법 풀칠은 할 정도가 되었다. 엄마가 튀김 솜씨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부터다. “K네 어머니께서 쏘시는 거다. K 어머니가 열심히 일하신 보람이 있네. K 너는 어머니 고생하시는 거 생각해서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알겠지?” 담임이 말했다. 아이들은 덕분에 모두가 엄마의 신상에 대해 알게 되었고 우리 집의 경제적 수준을 가늠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이 질문이 홀수 번째인 것에 감사했다. S가 바라는 정보란 게 무엇인지 뻔했다. 너는 치킨집 자식이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런 람보르기니가 생겼어? 나는 변명해야 했는데 그렇게 되면 거짓말이 거짓말을 나을 테고 머리가 좋은 그녀는 분명히 헛점을 알아내겠지. 일단은 두고 보자. 두고 보고 L의 계시를 따르도록 하자.

 

아까도 말했지만 요샌 논문 발표 이후 일정이 빡세서 가족을 챙길 시간이 없어.”

 

나는 화제를 돌렸다.

 

열심히 공부하는구나.”

 

아니, 하하. 공부라기 보다는 연구지. 나 이번에 국제 물리학회에서 수상한 거 몰랐어?”

 

몰랐어.”

 

몰랐다고?”

 

몰랐어.”

 

그녀는 정면을 응시했다. 저 년이 일부러 저러는 거지. 어떻게 자기 동창이 3대 방송사에서 죽도록 떠들어 대는 인물이 되었는데도 어떻게 나를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우리 집과 나의 경제적 수준에 대해 적절한 해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도 나를 엿먹이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긴 요샌 물리학 같은 기초 학문은 지나치게 발달한 감이 있다. 당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준이나 될까? 그렇지만 S... S는 아닐 줄 알았는데...

 

넌 더 이상 기초 과학에는 관심이 없구나.”

 

나야 의사니까. 사는 데 바쁘지.”

 

일이 힘드니?”

 

그냥 사는 게 다 똑같지.”

 

그녀는 목 아래로 구불친 머리 한 줌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았다. 권태의 화신인 양 대답에는 설렘도 열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아까의 L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상금이 5억이야.”

 

!”

 

그런 식으로 상을 몇 개 탔지. 연구비도...”

 

이 차는 그럼 연구비로 산 거니?”

 

짝수 번째 질문이었다.

 

하하, 아니.”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 차 말고 페라리도 있어. 집도 있고.”

 

정말?”

 

S가 이제서야 나를 바라보았다.

 

너 어디 사는데?”

 

나는 목이 메였다. 너는 도대체 왜 내가 어디 사는지가 궁금한거니? 홀수 번 째 질문이었고 나는 운전에 집중하는 척 했다.

 

너희 집 원래 그렇게 잘 살았어?”

 

짝수 번째 질문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신경질적으로 올렸다.

 

어떤 게 잘 사는 건데?”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거야. 왜 화를 내니.”

 

아니 묻잖아. 어떤 게 잘사는 거냐고.”

 

됐어.”

 

S는 팔짱을 끼었다.

 

, 지긋지긋하다. 너 같은 애들. 꼭 가진 걸로 자랑하려 들면서 그걸 궁금해 하는 다른 사람들을 속물 취급하지.”

 

“... ...”

 

그럼 네가 속물이 아니란 말이냐?

 

나는 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L이 나에게 주문한 것은 그저 말을 줄이라는 뜻이었겠지. 뭐든 사심이 앞서면 일이 어그러지게 마련이니까. 나는 후회하였다. 그녀가 지금은 오히려 나에게 금전적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나란 사람은 그 기분을 잘 알고 있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은 전혀 없었건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S가 고개를 돌려 나의 옆얼굴을 잠시 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성대를 지나오진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내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갤러리아에 도착했다. 백화점 전체를 덮은 뱀비늘같은 조각판들이 치릉거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싶은 그런 건물에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루미나리에가 단조풍의 푸른 불빛을 내뿜었다. L은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백화점의 샤넬 매장 앞에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그냥 갈 수가 있어야지.’ L은 굳은 내 얼굴과 자신 앞에서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S의 반응을 눈치 있게 관찰했다. 남녀 둘 사이의 불협화음이 L은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듯 어깨조차 으쓱거리지 않았다. L이 팔을 니은 자로 만들어 그녀에게 제공하자 S는 다정하게 자신의 팔을 꼈다. 이렇게 흑마술사는 공주를 현혹하여 샤넬 매장으로 들어갔다.

 

이 옷 사고 싶다.”

 

S는 목이 달아난 마네킹이 입고 있는 크림색 원피스를 가리켰다. 도저히 빨아 입을 수는 없게 생겨먹은 치렁치렁한 비즈 장식이 푹 파인 가슴골과 민어깨를 덮는 둥 마는 둥했다. 짚신짝처럼 얼기설기 짜여진 니트 원피스는 손으로 뜯으면 한번에 부욱 소리를 낼 포장재처럼 얇고 부실해보였다. 저걸 어떻게 입는단 말인가? 그리고 입고 갈 데라도 있단 말인가? 이런 옷을 보고 S는 마치 예술품을 향한 자만스런 충격을 표현하듯 떨잠처럼 파르르 떨었다.

 

이건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과 거의 비슷한데.”

 

S는 나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리곤 L을 바라보았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이 옷을 입은 걸 봤어요. 정말 예쁘더라고.”

 

그래요, 당신이 입으면 훨씬 더 예쁠 것 같네.”

 

L S 건너편의 나에게 눈빛을 보냈다.

 

.

 

?

 

.

 

?

 

두 남자들 사이에 무언의 실랑이가 오가는 것을 S가 모를 리 없었지만 그녀는 모른체 잠자코 옷을 감상하는 체 했다. 나는 겨우 바지춤에서 L이 출발 전에 건넸던 카드를 꺼내들었다.

 

사줄게.”

 

정말?”

 

S는 짐짓 놀란 체 했다.

 

옷자락에서 가격 태그를 좀스럽게 꺼내는 게 어울리지 않을 법하여 따라붙은 올백 머리의 여자 점원에게 가격을 물었다. 사백육십구만팔천원입니다. 점원은 코인 머신의 녹음된 안내 음성처럼 가격을 발설했다. 그녀는 말하고 싶었던 거다. 이 물건은 something이다. 네까짓 것들이 접근할 것이 아니라는 딱하게도, 안됐지만...’ 의 그 느낌! 그들은 신전의 제물을 도둑들로부터 지켜 내는 사제들이었다. 여자들(S와 점원)은 내가 주머니에서 꺼내든 카드의 거취가 매우 궁금했을 것이다. 나는 점원이 옷의 가격을 천원 단위까지 외운다는 사실과(점원이 대신 태그를 확인해주길 기대한 것 뿐인데) 가격의 규모에 그만 벙쪄 버렸다. 컴퓨터가 새하얗게 나갔다가 다시 화면을 회복하듯 나는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호기롭게 내어든 카드와 온 매장이 울리게 크게 호명된 가격 이 정도가 되면 사지 않으면 안 되는 거겠지. 나는 L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그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면서 싱긋 웃었다. ‘사라니까.’

 

그녀는 흰 장갑을 낀 점원으로부터 큰 쇼핑백을 건네 받았다. 그토록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던 S도 그 순간만큼은 사기그릇처럼 흰 얼굴에 선홍빛 생기가 돌았다. 진정한 고객이시다. 쇼핑백을 건넨 점원은 정수리가 보이도록 몸체를 숙였다.

 

S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1초 정도 쳐다보며 – 1초는 매우 긴 시간이었다 수줍고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것. 그게 다였다. – 하지만 그녀는 황홀할 정도로 예뻤고 아름다움이란 모든 감각과 기준을 마취시켜 버린다 아아 나는 비극적인 탐미주의자로구나 기꺼이 - 그녀는 쇼핑백을 들고 매우 느릿느릿하게 매장을 나가는 척 하다가 이번에는 가방 코너로 발길을 총총총! 우회했다. 그런 귀여움이라면 뭐든지 허용될 줄 아는 듯한 그 총총총은 분명히 자신의 우회가 뻔뻔함이 아니라 백치에 가까운 순진한 이끌림일 뿐이라고 우기는 것이었다.

 

저 가방 사고 싶다.”

 

S는 물건을 구경하다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던 모델이 어디 있는지 추적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가방을 원하였겠지. 마치 목표를 향해 변죽을 울리는 하이에나처럼 그녀는 그저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가리켰다. 그 가방은 내가 신장을 팔아 사준 샤넬백이었다. 캐비어. 그 육신의 갑옷처럼 징그러운 오디 자식.

 

저건 이미 가지고 있지 않아?”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마도 점원들은 그녀에게 명품을 사주는 데 이골이 난 남자 친구 정도로 생각하겠지. S는 좀 체면이 서지 않았겠지만 꿋꿋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아니? 그 때꺼랑 다른 디자인이야. 게다가 내가 원하던 사이즈도 아니었구.”

 

분명히 똑똑한 그녀라면 명확한 모델명을 외우고 있으리라. 그러나 따박따박 모델명을 언급하는 바보짓을 하진 않겠지. 더 큰 실수는, 그래 그거였다. 그녀가 과거의 내 선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점점 문제의 핵심부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의 왼쪽 신장을 파내어 너에게 헌납했었지. 나는 아직도 복부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르는 피의 분수를 느꼈다. 그리고 이 선지가 식기도 전에 더 큰 피를 흘려야 한다. 너의 그 욕심,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향한 욕심 때문에. 저 가방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너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는 여자인가? 어째서 이런 식으로 구는 것이지? 나는 이해할 것도 같았다. 이런 여자의 수법이란 것은 뻔했다. 뻔하지 뻔하구 말구. 그녀에겐 이 세상이 제로섬 게임인 거다. 게임이란 것은 무조건 이겨야 하는 거고 자고로 이겨야 맛인 것이고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 할지라도 상대가 어찌되었든 들어 줄 의향이 있다면 이런 확률 따위야 양자역학적 확률로 따지자면 사실 확률이란 건 별 의미가 없지 일단 계속 시도해보는 거다. 그것이 언제까지 먹히는지 갈 때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녀에겐 죄가 없다. 사달라고 하진 않았다. 사달라고 한 적은 없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다. 잘못이야. 내가 그녀에게 흑심이 있는 것이 잘못이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그토록 바라던 그녀를 이런 식으로 얻을 수 없다고 내가 분명 L에게 말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L은 규모의 문제라며 나에게 계속 이런 짓을 하도록 종용.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하하 미쳤구나 아주. 도대체 왜 아주 약간 다른 디자인의 가방이 또 필요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L 99도의 물처럼 울컥 질컥거리는 나를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사 줘.”

 

?”

 

넌 그럴 여유가 되잖아. 그저 가방 한 개일 뿐이야. 괜히 호들갑 떨지 말라고.”

 

“... ...!”

 

S가 고개를 약간 틀었다. 지금 그녀는 분명 내 쪽을 보고 싶은 충동을 이성의 힘으로 눌렀다. 그녀는 L너는 그럴 여유가 되잖이라는 언급 부분에서 동요했다. ‘이 자식 진짜인가?’ 라는 거겠지. 그렇군. 그런 거로군. S는 지금 나를 평가하는 중이다. 너 어디까지 갈 수 있냐는? 그것은 재력의 평가이자 자신에 대한 헌신도를 가늠하기 위함이겠지. 이 함수를 어떻게 분석해야 하나? L이 생각하는 함수는 무엇일까? 임계치를 넘어서야 변화가 가능한데, 나의 왼쪽 신장 정도로는 그녀의 역치에 턱없이 부족하단 뜻이겠지. 헤까뒤집힌 그녀의 물욕과 나의 정욕 중 무엇이 더 센가? L은 그것을 시험해 보는 중이었다. 나는 S L의 실험쥐에 불과하다. 다시 카드를 내밀었고 내민 손 위로 검은 그림자가 검은 날개의 작은 악마가 스윽 날아올랐고 - 지나갔고 점원들은 당황하는 듯 했으나 즉시 카드를 낚아채듯 받아 들곤 가방값을 계산했다. 앞자리가 8이 찍혔다. 팔백만원? 팔백만원? ?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케이드를 걷는 동안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L은 신사답게 그녀에게서 샤넬 쇼핑백을 받아들고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걸었다. 나는 두 손을 코트 호주머니에 끼운 채 두 사람 뒤를 멀찌감치 따라갔다.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이로군. 미친년과 살인자. 샤넬 매장의 그 맞은 편에는 이제 막 바리케이트를 내리려는 까르띠에 매장이 보였다. 그녀는 L의 손에서 팔짱을 풀고 내달리듯 까르띠에의 쇼윈도로 다가갔다.

 

이 반지 사고 싶다.”

 

그녀는 주문처럼 사고 싶다는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족히 몇 캐럿은 되어 보이는 다이아 반지가 차가운 광채를 내뿜었다. ‘목걸이랑 귀걸이도 예쁘네.’ S는 손가락으로 유리문을 닭부리같은 손톱으로 콕콕 찧었다. 막 까르띠에의 철문을 내리던 점원들은 S의 눈빛과 그녀의 뒤로 따라붙는 L, 그리고 그의 팔에 매달려 있는 큼직한 샤넬 쇼핑백 두 개를 바라보곤 어정쩡하게 멈춰섰다. 나는 무력한 분노를 느꼈다.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 것인가?

 

, 죄송한데 물건 좀 사도 될까요?”

 

L의 말에 점원들은 혼란스러워 했다. 물건 좀 봐도 될까요 도 아닌, 사도 될까요 라고 묻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L의 차림새는 확실히 예사롭지 않았고 그들은 내리던 문을 다시 위로 감아올렸다. S L을 긴 여운이 느껴지도록 한참 응시하곤 곧장 까르띠에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나는 머리를 굴렸다. L이 지금 과연 나를 돕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런 걸 사줄 여력이 안 되는 사람이다. 만약 S를 이런 방식으로 얻어야 하는 거라면, 나는 그녀를 가질 수가 없다. 이미 나는 많은 사기를 쳤지. L은 어쨌든 나로 하여금 그녀를 가지게 한 후 버리게 만들 셈인 건가? 아니, 차라리 이런 속물적인 여자라면 그저 욕구만을 채우고 환멸감을 느끼며 떨어져 나가라는 뜻인 것 같기도 했다.

 

S는 까르띠에 안으로 뛰어들었다. ‘저 쇼윈도의 반지는 몇 캐럿짜리죠?’ ‘3캐럿입니다.’ 역시 반지는 클수록 확실히 예쁘구나. 1캐럿이 이렇게 작은 줄은 정말 몰랐어. 반지는 확실히 커야 돼.’ S는 두 명의 남자들이 말이 없자 진열된 반지들을 손에 잡힐 듯 어루만지며 탄식했다. ‘쇼윈도의 것보다 더 큰 것도 있네. 이건 몇 캐럿인가요?’ ‘5캐럿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역시 클수록 예뻐!’

 

이게 제일 큰 건가요?”

 

L가 점원에게 물었다. S의 양쪽 귓볼이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 지금 5캐럿이 제일 크고, 다른 디자인을 원하시면 본사에 주문을 하셔야 해요.”

 

점원은 직업적 본분을 잊지 않고 매우 친절했다. L은 멀찌감치 서 있던 나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나는 사인을 알아듣고 진열대로 다가섰다. 5캐럿의 다이아몬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빛이었다. 저건 내 온 몸을 팔아도 살 수 없는 물건일 테지. 저 돌덩이의 값어치 만큼도 안 되는, . 그 순간 모든 것에 가격택이 붙은 세상의 문이 열렸다. 인간이 절대 우위의 가치라던 연극 세트가 정면의 벽부터 툭, 그리고 좌측의 벽이 투둑 무너졌다. 그 너머로 보이는 세상. 이게 진짜야. 이게 진짜 세상이야. S는 나를 진실된 세상으로 인도한 베아트리체로구나. 인간이 가장 우선한다는 생각, 그 생각이 숭고한 것이라던 착각이 사실은 우매한 유인원의 자만심에 불과하다는 것. 저 돌을 숭배하라. 태양빛을 머금은 돌을!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을! 정신의 가치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위안일 뿐. 합리화의 도구일 뿐. 비겁한 변명일 뿐. 그 뿐, That's all! 그래야만 이 엄연한 현실을 뿌연 정신으로 바라보며 겨우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은 원래 나약한 존재니까. 강하기에 다이아몬드! 오! 다이아몬드는 절대적으로 아름다웠다. 어째서 내 눈에도 저리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그제서야 나는 지금 태어나 처음으로 다이아몬드의 실물을 보는 것임을 깨달았다.

 

얼만데요?”

 

나는 사제의 마음으로 질문했다. 까르띠에 직원은 머뭇거렸다.

 

“548백만원입니다.”

 

“... ...”

 

가격을 음미할 충분한 침묵이 흐르기도 전에 S는 재빨리 말했다. “한 번 껴볼게요.”

 

직원은 남자 둘과 여자 하나의 희한한 조합을 이해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혹시나 사기잡범들이 아닐런지. 남자 점원은 점원장의 지시를 받았는지 얼른 매장 정문으로 가서 바리케이트를 반 이상 내렸다. 진열대의 여자 직원은 바리케이트를 확인한 후 조심스레 열쇠로 진열대 뒷문을 열었다.

 

딱 맞네.”

 

S가 한숨을 내쉬었다. 모델의 손처럼 하얗고 잘 빠진 손가락. 그 위에서 넘치도록 큰 볼륨감을 자랑하는 다이아몬드.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딱 맞아.”

 

좀 큰 것 같은데?”

 

아냐 딱 맞아.”

 

S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원래 저리도 고집이 센 여자였나? 이 번에도 과연 L은 나에게 다이아몬드를 사라고 허락해줄까? 나는 지독한 흥미를 느끼며 L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는 다이아몬드가 아닌 S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매우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설마 S를 좋아하게 된 건가?

 

그래. 마음에 들면 다음에 네 남편 될 사람에게 사달라고 해.”

 

나는 쾌활하게 말했다. 여자 점원은 한 방 먹은 듯이 흠칫 몸을 움직였다. 이 남자들이 여자와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서 반지를 돌려받아야 했다. 짜증스럽게도, 한 정신 나간 여자 때문에 연장 근무를 하게 되었다. S는 나의 말에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손을 L의 눈 앞으로 가져갔다. “어때요? 정말 잘 어울리죠?” L은 그녀의 내민 손을 살짝 당겨 잡아 손등에 키스했다. “그 어떤 것도 당신보단 아름답지 않아요.” SL의 건넨 최고의 찬사가 마치, “너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그만 놓고 나가자.”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는지 울상이 되었다.

 

살면서 이런 다이아도 가지지 못하는 여자는 정말 불행할 거야!”

 

아아, 어쩌나? 내가 K라면 당장 사줄 텐데. 나에겐 그만한 돈이 없네.”

 

L는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정말 진심이야? 정말로 이 다이아몬드를 사주기를 바라는 거야? 나는 흉곽 내벽을 따라 창상 비슷한 통증을 느꼈다. 이러다 죽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남의 돈이라지만 5! 5억이란 말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 물론 사줄 수야 있겠지만 다이아몬드 반지는 결혼할 사람에게 받아야지. 내가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사준단 말이야?”

 

나는 유러피안 스타일대로 두 팔과 어깨를 번쩍 들어 난감함을 표현했다. 나 외국물 좀 먹은 듯이 보이나? L S의 손을 잡고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예쁘잖아. 그걸로 된 거 아냐?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해.”

 

“... ...”

 

이 자식이 단단히 미쳤구나.

 

너 미쳤어?”

 

나는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 이쯤 되면 점원들도 상황 파악은 되었을 테다. 이 두 명의 남자가 한 여자에게 대단한 약점이 잡힌 상태이다. 그걸 무마하는 조건으로 여자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상태고... 아마도 정치적이거나 법리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겠지. 가만 보니 한 남자는 지나치게 잘생겼고 한 남자는 TV에서 익히 보던 얼굴이다. 옳다거니! 그나마 나의 너 미쳤어?”라는 발언에 의해 그나마 이 셋 중 내가 가장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일 테지. 이제 정말 나는 아아, 그래 이 미친 여성으로부터 완전히 정나미가 나갈 지경이다. 정말 대단한 물욕이다. 에베레스트를 지팡이 하나로 오르려던 나의 무지! 내 신장! 아아 내 신장!!!

 

네가 말했잖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 여자라면서. 이 분 말이야.”

 

“... ...!”

 

너의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은 여자라고 했었잖아.”

 

분신. 나는 순식간에 기화되었다. 휘발유는 슬픔이고 불길은 분노였다. 턱밑까지 열기가 차오르고 얼굴에서 수증기가 끓었다. 나는 얼이 나갔다가 고개를 좌우로 휘돌리며 웃었다. 이 자식이, 이 개자식이 나를 골로 보내네? 나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 어린 날의 환상. 차라리 그 차디찼던 방구석을 닮은 환상 안에서/ 빙결되어/ 죽어/ 버렸으면/ 좋을 뻔했지. 슬픈 동화였겠지만 읽을 만은 했을 거야.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었어. 아아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였던 여자는. 그 여자는... 그 순간 S의 얼굴을 볼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감동? 감동할까? 저 여자가? 저 무시무시한 여자가? 감동을 한 건 오히려 관객이 된 점원들이었다. 결국 사랑이었구나 망할. 천하의 복 받은 여자로군. 저 여자가. 남자가 여자 보는 눈이 없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보자. 그 끝에 뭐가 있나 이쯤 되니 나도 끝까지 가보고 싶어 졌다. 정말 이 카드 한 장으로 5생각해보니 공이 8! – 를 찍을 수가 있을까. 한도 초과 따위가 떠서 나를 개망신 시킬 요량이 아니라면 L 너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할거다. 정말 너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사실 반지만 사는 건 좀 그렇고 셋트로 사는 게 훨씬 의미 있을 것 같아. 목걸이랑 반지랑.”

 

S가 말했다. 카드를 건내 려던 손이 멈칫 했다. 독한 년. 저건 인간도 아니다. 여기서 그냥 돌아서서 나가 버려? 이 쯤에서 S의 빰을 때리고 침을 뱉어 줘도 그리 이상한 전개는 아닐 것 같은데.

 

세트가 있나요?”

 

L은 한우세트를 물어보듯 물었다.

 

네 그럼... 9 8천입니다.”

 

.”

 

나는 L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L은 진열대에 몸을 기대어 검지로 인중을 가린 채 점원이 내민 계산기의 수치를 물끄럼히 바라보았다.

 

수표로 사야겠네.”

 

수표가 어딨어.”

 

네 지갑 속에 있지.”

 

L는 빙글빙글 여유가 넘쳤다. 나는 콧방귀를 끼면서 나의 헌 장지갑을 코트에서 우악스럽게 꺼냈다. 내 지갑 속에 있다고?

 

“거스름돈이 될까요?”

 

L이 점원에게 물었다. 나는 헛것을 본 사람처럼 멍하니 내 지갑 속에서 10억원이 쓰인 수표를 바라보았다.

 

한 장만 꺼내. 뭘 그리 많이 꺼내려 들어.”

 

내가 목석처럼 서있자 L은 한심하다는 듯 수표 한 장을 티슈처럼 뽑았다. ‘거슬러 드릴 수표가 없는데요.’ ‘그럼 그냥 10억에 맞춰서 이것저것 넣어 주세요. 이 숙녀분이 좋아할 만한 걸로.’ 나는 벌어진 입으로 반사적으로 지갑을 다시 코트 속으로 넣었다. 10년도 더 된 낡은 지갑인데 들키지는 않았겠지? 나는 벽에 머리를 짓이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S는 이제 순한 양처럼 착한 표정이 되었다. L과 점원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진열대를 오가던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거나 했다.

 

감사합니다.”

 

엄정한 수표 확인이 끝난 후, S는 점원으로부터 쇼핑백을 건네 받았다. 샤넬 매장에서 이리저리 헤매던 것과 달리 이제 그녀는 한 눈 팔지 않았다. 어떻게 매장을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S는 불안감에 휩싸였는지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반지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해야 겠어.”

 

L은 말없이 그녀에게 까르띠에의 쇼핑백을 내밀었다. S는 진홍빛 백화점 쇼파에 앉아 가죽 반지 케이스를 따각 소리가 나게 열었다.

 

끼고 갈래요?”

 

L이 말했다. S는 그를 쳐다보았다. 열병에서 겨우 회복된 소녀처럼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L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냈다. 어쨌거나 값을 지불한 사람은 나니까. 그녀가 이마저도 나를 거부하고 L이 대신 끼워주길 바란다면... 어쩌면 나는 그녀를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숨을 골랐다. ‘기왕이면 무릎도 꿇어주지 그래.’ L의 말에 나는 어릿광대처럼 무릎도 꿇었다. 여자는 오른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왼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왼손에 끼워봐야겠지.’ 나는 반지의 무게를 느끼며 서서히 그녀의 손가락으로 미끌리며 들어갔다. 성적인 메타포로군. 이 반지라는게. 나는 그녀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썩 - 껄끄러웠다.

 

엘리베이터가 땡 소리를 내며 도착하였다. 문이 열리고 여자는 눈물을 흘렸다.

 

“... ...”

 

“... ...”

 

“... ...”

 

투두둑.

 

물줄기가 타고 흘러 가슴을 적셨다. 나는 여자 앞에 우두커니 섰다.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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