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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0일 00시 16분 등록

구스피릿 32번째 북리뷰

장자(장주, 현암사)”

 

1. 저자소개

장자(莊子, 병음 Zhuāngzǐ, 기원전 369?-기원전 286). 본명은 주(). 중국 전국 시대 송()나라 몽(; 현재의 안휘성 몽성 또는 하남성 상구 추정) 출신. 저명한 중국 철학자로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노자(老子)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후세에 노자와 함께 부를 때 노장(老莊)이라 부른다. 도교에서는 남화진인(南華眞人), 또는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 부르기도 하며,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 부른다. 《삼국지연의》에서 황건적의 지도자 장각에게 도를 전수하는 선인이 바로 남화노선(장자)이다.

장자는 만물 일원론을 주창하였다. 어느 날 장자는 자기가 나비가 되어 훨훨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잠을 깨니 내가 꿈을 꾸고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을 꾸고 지금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장자는 이처럼 상식적인 사고 방식에 의문을 품고 유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가르침 따위는 하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노자의 생각을 이어받아 자연으로 돌아갈 것과 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영어: Hundred Schools of Thought) 또는 현상적 표현인 백가쟁명(百家爭鳴, 영어: Contention of a Hundred Schools of Thought)은 중국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의 여러 사상가들과 그 학파들을 말한다.

주나라()가 동으로 천도한 후의 동주(東周: 기원전 771~256) 시대에서는 종주권이 쇠약해짐에 따라 제후들이 세력을 추구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어져서 약육강식이 잇달아 일어나자 중국 천하는 소란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는 선진시대(先秦時代)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기원전 221년의 진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 이전의 시기를 뜻한다. 이 시대는 중국사상의 개화결실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 경제 · 정치상의 일대 변혁기였다. 이는 씨족제적인 사회의 해체기이며, 주나라의 봉건 제도와 그에 따르는 질서가 붕괴되는 시기이며, 또한, 경제적 · 군사적 실력주의의 대두기였다. 구체적으로는 주 왕조의 권위의 실추에 따르는 제후의 독립과 대립 항쟁의 시대였다. 이와 같은 배경속에서 중국의 사상계는 최초로 활발해졌다.

 

노자(老子)는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성은 이(), 이름은 이(), 자는 담()이다.허난 성 루이 현 사람으로 주왕을 섬겼으나, 뒤에 관직을 버렸다.

그는 중국에서 우주의 만물에 대하여 생각한 최초의 사람으로, 그가 발견한 우주의 진리를 ''()라고 이름지었다. 그 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도교'라고 하며, 그는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치가 곧 ''라고 설명하였다.

도는 성질이나 모양을 가지지 않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항상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주 만물은 다만 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우주 만물의 형태는 그 근본을 따지면 결국은 17가지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저서 <노자 도덕경> 속에 있는 '무위 자연'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다. 사람이 우주의 근본이며, 진리인 도의 길에 도달하려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무위 자연' 사상이다. , 법률·도덕·풍속·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후세에 '도교의 시조'로 불리고, 그 사상은 '노장 사상' 또는 '도가 사상'으로 발전하여 유교와 함께 중국 정신 사상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노자의 말이라고 하여 오늘날 《노자》(老子道德經이라고도 한다) · 2 81장이 남겨져 있다. 거기서 기술되고 있는 사상은 확실히 도()의 본질, 현상계의 생활하는 우수한[모호한 표현] 철학인 것이다. 예컨대 도를 논하여 이렇게 말한다. '()'는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만물을 자신의 소유로는 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형성시키지만 그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는 만물의 장()이지만 만물을 주재하지 않는다'(10). 이런 사고는 만물의 형성·변화는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예정된 목적조차 없다는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노자의 말에 나타난 사상은 유심론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펑유란은 도에 대해서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유물론으로서 무신론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해는 뛰어난 것이다. '()는 자연(自然)을 법()한다'(55)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자연계를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 이론은 유가(儒家)의 천인감응(天人感應)적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자가 보인 인생관은 "유약한 자는 생()의 도()이다" (76). "유약은 강강(剛强)에 승한다."(36)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때문에 도에 가깝다"(8), "천하의 유약하기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78) 등의 구절에서 보듯이 어디까지나 나를 내세우지 않고 세상의 흐름을 따라 세상과 함께 사는 일을 권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을 겸하부쟁((謙下不爭) 이라고 하는 말로써 환언(換言)하고 있다.

노자는 또 "()는 일()을 생하고 일은 이()를 생하고 이는 삼()을 생하고 삼은 만물을 생한다."(42)고 하는 식의 일원론적인 우주생성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도가(道家) 또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은 중국사상(中國思想)의 여명기인 춘추전국시대 이래 유가(儒家)와 함께 중국 철학의 두 주류를 이루었던 학파이다.

도가는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하나로, 대표적인 사상가는 노자와 장자이며, 전국시대 중기에 유가와 함께 유력하였다.

도가는 참된 길, 즉 도()는 인위(人爲)를 초월한 곳에 있으며 그것은 직관에 의해 체득되는 것으로 사람은 그 참된 길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쳤다. 또 인위(人爲)를 배제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될 것을 권했는데, 배제해야 할 인위(人爲) 중에서 주된 것은 유가의()()이나 예()라고 말했다.

중국사상의 양대흐름인 유가와 도가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현실적이며 긍정적인 유가가 군주의 통치권을 합리화하여 역대 왕조의 통치이념으로써 사회의 기본사상으로 자리잡은 것에 비해, 도가사상은 현실부정적이고 도피적인 성향이 강해 하층민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려 후에 도교로 발전하였고, 주로 민간신앙과 철학적 사고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유가가 지배자의 사상을 대변한다면 도가는 지배층에 대항하는 피지배자의 사상으로 대변되었다.

도가는 한나라() 이후 구체적인 모습을 가진 철학 학파로서의 독립성은 잃어버렸지만, 그 사상은 후세 중국 불교에 수용되었고, 도교(道敎)의 교리의 형성을 도왔으며, 문예(文藝)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말기에 공자(孔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르는 말이다.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名分)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명교(名敎)라고도 한다.

유교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유교는 수기치인의 학이라 할 수 있다. , 유교는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며 또한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교는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에는 제자백가의 하나인 유가(儒家)로 등장했지만, 전한의 무제(재위 기원전 141~87) 때 국가 정통의 학문이 된 후로는 중국의 학문과 사상계를 대표하게 되어 현대의 중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정치와 국민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유교의 주류는 전국시대에는 맹자로 대표되는 내성파의 학문과 순자로 대표되는 숭례파의 학문,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훈고학과 경학, 송나라 시대의 주자학, 명나라 시대의 양명학, 청나라 시대의 고증학 등으로 발전 또는 변천되었다.

유교(儒敎) · 유가(儒家) 또는 유학(儒學)은 본래 춘추시대 말부터 전국시대에 걸쳐서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의 한 학파에 불과했으나 한나라() 왕조의 권력 안정과 함께 그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서 중시되어 중국의 정치사상 중에서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에 왕조 정치 체제가 존속한 2천년 동안 유학은 국가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교학(敎學, 儒敎)으로서 정통사상의 지위를 계속 차지하였다. 그 오랜 기간 동안에 유학은 각 시대의 정치 상황이나 다른 사상과의 관계에 대응하여 그 내용을 변화시켜 전개하였다.

"()"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유약(柔弱)을 의미한다든가 "(=, 턱수염)"와 통하여 노인(老人)을 의미한다든가의 말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묵가(墨家)나 법가(法家)와 같은 타학파의 사람들이 아래에 서술된 바의 특징 또는 성격을 가진 학파를 가리켜서 붙인 명칭인 것으로 보인다.

 

2.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독자들에게

캐나다에 와 살면서 얼큰한 김치찌개를 먹을 때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보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치는 이곳 서양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장자]를 읽을 때마다, 이렇게 신나는 책을 읽어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은 김치찌개의 맛을 모르고 한평생을 마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불쌍한 사람이 아는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7)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세도 [장자]를 읽고, “내가 아는 모든 중국 사상 서적 중에서 가장 명료하고 매력 있는 책이라고 했습니다.(8)

글쎄, 매력 있는 책인건 분명한데, 명료한 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이 기발한 상상력, 박력 있는 표현, 자유분방한 해학과 풍자와 상징을 통해 우리에게 우주와 인생의 깊은 뜻을 일깨워 주는 책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8)

 

『장자』를 읽기 전에

유교와 도교는 동양 사상사에서 서로 대칭을 이루는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윤리와 실용을 강조하는 유교의 가르침을 양이라 한다면, 좀더 신비한 내면을 강조하는 도교의 가르침을 음이라 할수 있다. 이 둘은 서로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보완하는 관계로 조화와 균형을 이상으로 삼는 동양인의 정신적 필요에 부응해 온 셈이다. (17)

장자의 도가 사상이 중국 철학사에서 문학, 예술 등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당대에 와서 그것은 선 불교를 꽃피우는 직접 계기가 되었다. (18)

장자는 노자를 주석한 것” (...)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고 한 것처럼 장자가 노자의 주석이라는 말도 가능하겠지만, 장자가 노자를 그대로 받아 주석이나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20)

[장자] 내편에는 노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노자를  직접 인용하거나 그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전혀 없다. (21)

아무튼 노자가 자상하면서 근엄한 철인의 풍모를 지녔다면, 장자는 투철한 눈매로, 때로는 크게 껄껄 웃고, 가끔은 험구도 불사하는 재기발랄한 야인의 모습을 지녔다고 하겠다.(21)

[장자]는 한가지 체계적인 인식내용(cognitive contents)’을 제공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일깨움(evocativeness)’을 목적으로 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23)

 

1편 자유롭게 노닐다(逍遙遊)

1.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 하였습니다.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이라 하였습니다. 그 등 길이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만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 못이라 하였습니다.(26)

이 첫 부분과 [장자] 전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화이위조의 화 이다.(…) [장자]의 주제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변화의 가능성과 그 실현이다. ‘작은 물고기그 알을 뜻하는데 (…) (26)

여기서 붕새는 이런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 그리고 그 거침없는 비상은 이런 변화변혁을 이룬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초월을 상징한다. (26)

[장자] 첫머리는 이처럼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난 실존적 한계를 초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27)

첫째, 이런 엄청난 변화가 자연과 동떨어진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나 기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모두 자연 안에서, 그것에 순응하고  힘입어, 가능했다는 것이다.(27)

둘째, 여기 나오는 알, 물고기, 붕새가 겉으로는 엄청나게 달라보이는 것들이지만 본질을 보면 본래 따로 독립한 사물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것들이었다는 점이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물고기나 붕새도 본래는 알이었다. 그렇게 큰 것들도 조그만 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씨알을 품고 있는 우리 속에 있는 이런 무한한 가능성을 자각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일이 중요하다.(27)

4. 괸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구만리 창공에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거침없이 남쪽으로 날아갑니다.(29)

바람을 타라. 생기를 찾아라. 그리하여 활기찬 삶을 살아라!” 이것이 건조하고 무의미한 인간의 현존을 뛰어넘는 진정한 초월이라는 것이다. (30)

가까운 숲으로 놀러 가는 사람은 세 끼 먹을  것만 가지고 가도 돌아올 때까지 배고픈 줄 모르지만, 백리 길을 가는 사람은 하룻 밤 지낼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매미나 새끼 비둘기 같은 미물이 어찌 이를 알 수 있겠습니까? 조금 아는 것으로 많이 아는 것을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삶으로 긴 삶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31)

우리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변해서 새로워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냉소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부한다. 우리야말로 건실한 현실주의자들이라고.(33)

선구자의 길을 외롭고 고되고 험난하다. 이 길을 통해 선구자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반기지 않는다.

그런 체험을 다른 갈매기들과 나누려고 하지만, 다른 갈매기들은 이렇게 허황한 짓은 갈매기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파괴하는 못된 짓이라 하여 이 갈매기(조나단)를 추방하고 만다. 매일매일 먹고살기도 바쁜데 그런 구름 잡는 소리같이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해서 자신들을 현혹하지 말라는 것이었다.(33)

장자를 읽으면서 한편 마음에 와닿았지만, 다른 한 편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사실 이런 사상이 몇 명 현대인들에게 다다를 수 있을까

지금 부자유한 삶의 모습을 직시하고, 붕새처럼 이를 초월해서 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이 참으로 신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꿰뚫어 봐야 하겠다.(34)

신화란 우리의 상식적인 말을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무엇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힘있게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란 이성을 초월한 세계의 엄청난 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특수한 전달 수단이다.(37)

붕새의 변화와 초월과 자유에서 우리가 가진 실존의 한계를 초극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고, 우리 스스로 변혁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37)

사람이 열자처럼 살기도 어렵지만 『장자』의 궁극적 이상은 우주의 원리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돼 무한한 경지에 노니는절대 자유의 단계이다. 아무것에도기대지 않는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구가하는 무애의 삶이다.(40)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서 무슨 소원이든 말하라고 했을 때 지금 자기에게 비치는 햇빛을 가리지 말 것밖에는 달리 부탁할 것이 없다고 한 고대 그리스의 철인 디오게네스를 연상시키는 이야기이다.(43)

결국 요 임금이 이런 경지에 이른 것은 이 신인들의함이 없는 함때문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쓸모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 신인들이야말로쓸모 없음의 더욱 큰 쓸모라는 진리를 실증해 준다.(50)

 

2편 사물을 고르게 하다(齊物論)

세상에 버려야 할 것, 쓸데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비본질론적 견해를 다른 말로 해서시각주의적 접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시각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55)

동일한 것이 보기에 따라 크기도 하고, 동시에 작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비를 넘어서는 세계, 제일, 제동, 여일의 세계, 서양의 중세 사상가 쿠자누스가 말한양극의 조화가 이루어진 세계,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 눈에 씌웠던 눈가리개를 벗긴 셈이다. 이럴 때 우리는 숙명으로 뒤집어쓰고 있던 제약의 굴레를 벗고, 붕새처럼 구만 리 창공을 날아가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60)

오상아장자』의 핵심 개념에 속한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려, 내가 진정한 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어떤, ‘는 어떤인지에 대해 글자의 어원을 다지는 등, 주석가들 사이에 설이 분분하지만, 쉽게 말하면, 우리의 비본래적인 자아, 작은 자아에서 풀려난 본래의 자아, 큰 자아가 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61)

불란서 철학자 데카르트가 라틴말로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지만, 여기서는나는 잊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일상의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버릴 때 진정한 나, 온전하게 된 내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63)

우리는 이런 사람의 소리와 땅의 다양한 소리를 들을 때 그 속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는 우리 몸의 귀로 들을 수 없다. 그것은 남곽자기처럼 바로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새롭게 열리는 영적인 귀로만 들을 수 있으므로, 하늘의 퉁소리를 들어 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우리 자신을 잃어 보라고 권한는 것이 아닐까?(68)

큰 꾀는 느긋하고, / 작은 꾀는 좀스럽고, // 큰 말은 담박하고, / 작은 말은 시끄럽고. // 잠잘 때는 꿈으로 뒤숭숭하고, / 깨어 있을 때는 감각 기관이 일을 시작하고. // 접촉하는 일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 마음은 날마다 싸움질에나 쓰고. // 더러는 우물쭈물 / 더러는 음흉 / 더러는 좀생이 // 작은 두려움에 기죽어하고, / 큰 두려움에 기절하고.(70)

[장자]에는 마음을 묘사하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1) 이분법적 상식의 세계에 머물러서 변하지 못한 마음, 곧 분별심으로서의 마음, 2) 이를 초월한 마음,  곧 이쪽저쪽을 함께 보는 성인의 마음이다.(72)

모두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처럼 자기가 만져 본 일방적이고 부분적인 단견을 내세워 서로 분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코끼리가 구렁이처럼 생겼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눈을 뜨고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눈을 떠야 구렁이 같은 면과 기둥 같은 면을 다 본다. 이를 일러밝음을 얻음이라 한다.(79)

11. 손가락을 가지고 그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아님을 밝히는 것보다 못하다. 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은 말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보다 못하다. 하늘과 땅도 하나의 손가락. 만물도 하나의 말.(85)

말이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방법이 그 사람들(이론학파)과 다르다. 공손룡이 갖다 댄 특수한 개체인 말과 보편적인 추상 개념인 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는 식으로 말을 가지고말을 말이 아니라고 하는 대신 장자는 말 아닌 것즉 소나 개를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닌 까닭을 밝히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87)

소는 말이 아니다. 소와 말은 다르다. 그러나 소와 말은 둘 다 짐승이라는 점에서 같다. 한편 사과와 오렌지는 다르다. 그러나 과일이라는 점에서 같다. 소와 말은 짐승이고 사과와 오렌지라는 과일과는 다르다. 그러나 짐승과 과일은 생물이라는 점에서 같다. 이런 생물과 철이나 금 같은 광물은 다르다. 그러나 생물과 광물도 물질이라는 점에서 같다. 이런 식으로 범주를  넓혀서 궁극에 이르면 모든 것이 같다.(87)

이제 이렇게 하여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견지에서 본 말 과 처음에 개별적으로 독립한 개체로 본 말을 비교하면 둘은 같은 말이 아니다. 따라서 말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말에다 말이 아닌 소를 갖다 대고 풀어갈 때 쉽게 얻을 수 있고 그 뜻하는 바가 중대하다는 것이다.(88)

쓰면서 정리해보려 했지만,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님을 밝히는 것보다 못하다.’를 이해하기란 어간 어려운게 아니다.

그 뜻하는 바가 왜 중대하다는 것인가? 이렇게 도의 견지에서 보면 모든 것이 하나일 수 밖에 없다. (88)

나누어짐이 있으면 이루어짐도 있고, 이루어짐이 있으면 허물어짐도 있다. 모든 사물에는 본래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 따로 없이 모두 통하는 하나이다.(89)

보편적인 것이란 쓸모 있음을 말한다. 쓸모있음이란 통함이고 통함이란 즐김이다. 즐김은 도에 가까움이다. 있는 그대로 그렇다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도 라 한다.(89)

하늘과 땅이 나와 함게 살아가고, 모든 것이 나와 하나가 되었다”(103)

[도덕경] 1장 첫 줄에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절대적인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 말이 없어져 버린 상태이다. 전통적인 용어를 쓰면 언어도단이요 언설을 떠난 상태인 것이다.(107)

알지 못함을 알고 멈출 줄 아는 사람, ‘말로 하지 않는 변론도라고 할 수 없는 도를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은근한 빛을 감추고 있는 하늘의 보고이다.(108)

문제는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꿈이 꿈인 줄 알려면 꿈에서 깨어나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범속한 인간들에게는 이런 큰 깨어남, 큰 깨달음, 큰 깨침이 없기 때문에 이 인생의 꿈속에서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르고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산다는 것이다.(127)

모든 의견은 결국 각자의 견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른바 보편타당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러 번 지적한 대로시각주의입장 없는 입장을 말한다.(131)

32.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 物化 라 한다. (134)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꿈이 꿈인 것을 알려면 그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장자가 나비였던 것을 꿈이라고 깨달았다는 것은 그 꿈에서 깨어났다는 뜻이다. 지금 그 꿈에서 깨어난 상태를 다시 꿈꾸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이른바 그 깸에서 다시 한번 깨어났다는 뜻이다. (135)

이렇게 깸에서 깨어나는 것이 큰 깨어남, 대각 大覺 이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장자는 대각한 사람이다.(135)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이 종이에서 구름을 볼 수 있다. 구름이 없다면 비가 있을 수 없고 비가 없으면 나무가 없고, 나무가 없으면 종이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종이에서 구름뿐 아니라 햇빛과 비와 나무와 새소리와 공기와 하늘을 다 볼 수 있다.(136)

그 뿐인가 종이가 타면 재가 되므로 종이에서 재도 볼 수 있고, 탄소도 볼 수 있고 다이아몬드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종이에는 이런 것들, 우주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이 들어있는 셈이다.(136)

종이와 구름, 구름과 종이. 장자와 나비, 나비와 장자. 서로 넘나들어, 그야말로 자유자재이다. 이것이 이른바 물화 物化 이다.(137)

 

3편 생명을 북돋는 데 중요한 일들(養生主)

1편이 변화와 초월의 가능성을 2편이 이런 변화와 초월이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와 의식에서 벗어나 오상아의 경지에 이를 때 가능하다는 것을 3편은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이 어떻게 일상 생활을 신나고, 활기차고, 풍성하게 살아가는가는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139)

이렇게 신나고, 활기차고, 풍성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식욕, 자존심, 자기중심주의 같은 일체의 인위적,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서 자연의 운행과 그 리듬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생명력이 활성화하고 극대화해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이른바기대지 않는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생명을 북돋는 일’,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라는 것이다.(139)

도와 하나가 되려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이나 단견 같은 이분법적이고 일방적인 의식으로 얻은 지식을 하나하나 버려야 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런 것을 더 얻지 못해 안달하며 쏘다니면 이야말로 위험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렇게앎을 버림’, 혹은배운 것을 버림에 이를 때, 비로소하나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여기서도 결국 지식이 아닌 직관으로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음을 말한 셈이다.(143)

(포정의 소 각뜨기)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은 도 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통째인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 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정말 본래의 모습에 따를 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 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147)

그러니까 이 이야기(포정의 소 각뜨기)는 그 사회에서 가장 천한 백정이 그 사회에서 지존한 임급 앞에서 소 잡는 법을 보여주며 양생의 도를 가르쳤다는 이야기이다. 도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도 앞에서는 지금껏 당연하게 여기던 기존의 질서가 뒤집힌다는 것을 암시했다.(148)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포정이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세 단계를 거쳤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눈에 소밖에 안 보이던 단계이다. 다음에는, 소가 소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 단계이고, 나중에는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으로 보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149)

신난다고 할 때처럼 사람에게 활기와 흥을 돋워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50)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elan vital)

미식축구 선수들 중에 가끔 이상스럽게도 자기를 공격하러 오는 상대방 선수들이 마치 고속 촬영을 한 영화 화면에서 처럼 천천히 달려오는 것으로 보이고, 또 자기가 공을 던져야 할 곳이 훤하게 트여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럴 때 자기도 모르는 어떤 힘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을 던지면, 그것이 성공하는 경험을 한다고 한다.(…) 머피는 이런 것을 두고 인간에게 있는 초보통적 능력(metanormal capacity)’이라 한다. (152~153)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유명한 소설 [희랍인 조르바] 가 생각난다. 거기서도 소위 성공한 지성인 사업가로 등장하는 상전이 불학무식한 하인 조르바의 신나는 삶, 거침이 없는 삶에 감복하여 결국춤추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으로 끝이 난다. 인생의 참된 성공은 어떤 것일까? 전통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대목이다.(154)

어느 화가가 남녀의 사랑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릴 때, 두 남녀가 침실에 같이 있는 장면을 소상하게 그릴 수도 있고, 단순히 댓돌 위에 고무신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양을 그릴 수도 있다. 전자를서술적묘사라 한다면, 후자는암시적’, ‘환기적기법이라 할 수 있다.(156)

장자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삶에서 우리의 내적 생명력이 활성화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이 그 본연의 풍성함을 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164)

생명을 북돋는 일의 요체가 무엇인가? 피상적 지식이나 허망한 명예를 추구하는 일을 그만 두고 내심에서 나오는 원초적 힘에 따라 중도를 지키는 것, 요리사처럼 자연의 율동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 우사처럼 형식에 매이지 말고 자유스럽게 살아가고, 그런 삶이 초래하는 결과를 하늘이 준 필연으로 여기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못가의 꿩처럼 물질이나 사회적 편암함의 유혹을 거부하고 정신적으로 속박이 없는 삶을 누리는 것,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력을 불태우라는 것 등이라 할 수 있다. (164)

이렇게 상식 세계를 벗어나 사물을 한 차원 높은 데서 전체적으로 보라고 강조한 점에서 제2제물론의 주제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요즘 많이 논의하는해체주의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도 있다.(165)

 

4편 사람 사는 세상(人間世)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는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마음의 재니라.”(179)

기는 텅 비어 모든 것을 수용하니 이렇게 텅 빈 기로 사물을 대하면 그 빈 곳에 도가 들어온다. 이렇게 도가 들어오도록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 마음을 굶기는 것, ‘심재라는 것이다.(181)

바로 그렇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네가 위나라에 들어가 그 새장에서 노닐 때, 이름 같은 데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받아 주거든 소리내고, 받아주지 않거든 잠잠하라.(183)

앎을 버림 곧 무지를 통해서만 참된 앎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서무지란 물론 이분 세계에서 우리가 얻은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암을 비우는 것이고, 이렇게 비운 상태에 이르렀을 때 참된 앎이 생긴다는 이야기이다.(186)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 하십시오. 부득이한 일은 그대로 맡겨 두고, 중심을 기르는데 전념하십시오. 이것이 최고입니다. 무엇을 더 꾸며서 보고할 것 있겠습니까? 그저 그대로 명을 받드는 것뿐.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일입니다.”(195)

안명론은 니체가 말한운명을 살아함과 비슷하다고 할까. “바꿀 수 잇는 것에는 바꿀 능력을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잇는 의연함을 주시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잇는 예지를 주시옵소서.” 라고 한 어느 성자의 기도가 생각난다.(196)

물은 동그란 그릇에 들어가면 동그랗게 되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지고, 뜨거우면 김이 되어 날아가고, 차가워지면 얼음으로 굳고. 이렇게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물이물임물됨을 잃는 일이 없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적응하는 것 그 자체가 물의 정체성이다.(200)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라”(201)

호랑이 사육사는 시간을맞춰먹이를 주고, 말을 사랑한 사람은 시간을못 맞춰말을 때렸다. 모든 일에 적기가 있음 알고 잘 맞추라는 것이다.(204)

마르틴 부버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물을나와 너로 보는 것도 시원치 않은데, 당신은 사물을나와 그것;으로 보고 그것을 당신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본단 말인가 하는 식이다. 더구나 장석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본다면 장석이야말로 죽을 날이 가까워 오는쓸모 없는 인간이 아닌가. 그러니 사물을 대할 때 함부로 쓸데 있다 없다를 속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208)

송나라 형씨라는 곳은 개오동나무, 잣나무, 뽕나무가 잘 자라는 곳이었습니다. 굵기가 한 움큼이 넘는 것은 원숭이 매어 두는 말뚝 만드는 사람들이 베어 가고, 서너 아름 되는 것은 집 짓는 이가 마룻대 감으로 베어 가고, 일여덟 아름 되는 것은 귀족이나 부상들이 널 감으로 베어 가 주어진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도끼에 찍혀 죽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재목감이 됨으로 당한 재난입니다.(212)

지금 당장 누구의 주관적 쓸모의 기준에 따라 쓰이지 않더라도, 심지어 요즘 많이 논의되듯 명예퇴직을 당하더라도, 그렇게 슬퍼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213)

천박하게 이해한 실용주의나 실리주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은 어느 의미에서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길 일이라는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이런 일을 통해서 이제까지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루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213)

긴 안목으로 볼 때, 이런 일을 통해서 이제까지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루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213)

갑작스런 진급누락 소식이 한동안 헛헛한 마음 참아내느라 고생했지만, 언젠가는 자기실현을 이루어내 더 쓸모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거라 희망적으로 생각해본다.

장자든 누구든 정신적인 영웅은 조셉 캠벨의 말처럼 일단인습을 등진 사람이다. 그래서 인습대로 사는 사람에게 정신적 영웅은 어쩔 수 없이 바보처럼, 미친 사람처럼, 우스운 사람처럼 보이게 마련이다.(220)

세상에서 떠받드는 자질구레한 유용성이나 실용성에 정신을 팔지 말고 무엇보다도 먼저마음을 굶기는심재를 실천하라는 것이다.(221)

노자의 『도덕경』이 도를 어머니로 표현하는 등 여성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뜻에서 현재여성 운동가들의 성서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장자』는 불구자가 도를 실현하고 덕을 발휘하는 데 아무 장애가 없다는 것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실증했다는 점에서장애인들의 성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223)

 

5편 덕이 가득함의 효시(德充符)

새는 날다가 활에 맞기 쉽고, 고기는 헤엄치다 그물에 걸리기 쉽고, 짐승은 뛰다가 덫에 걸리기 쉽지만, 용은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오른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다. 얼마나 위대한 용인가!”(240)

사기열전

사실 역사적으로 기원후 3세기경에 나타난 현학파 사람들은 노자와 장자를 좋아하여 노장철학으로 유가 사상을 철저히 재해석하면서도 결국 공자를 노장보다 더욱 위대한 사람으로 모셨다. (…) 공자는 무와 하나가 되었기에 그것이 가르침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 어쩔 수 없이 유 만 말했지만, 노자나 장자는 유 의 경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에게 모자라는 바를 계속 이야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40)

(절대 추남 애태타를 사람들이 따르는 이유는) 첫째, 애태타는 나서서 주창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동조할 뿐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화이불창이다. 이것은 라는 자의식에서 완전히 풀려난 상태로 물 같은 상태를 뜻이기도 하다.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가는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애태타의 태도가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박력도 결단성도 없어 사나이답지 않음이 분명하다.(…) ‘양행하는 사람, 양쪽을 한꺼번에 보는 사람이다. (…) ‘이것도 저것도감싸 안는 사람. 따라서. 자연히 우물쭈물, “글쎄요를 되풀이하는 모호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244)

주관없고 줏대없다는 면에서는 과연 맞는가 싶지만, 큰 바다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여 이루어졌듯이, 모든 재각각의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면에서는 일견 이해가 간다.

아무것이나 함부로 분명하게 맺고 끊는 일이 없는 사람, 그러기에 정말로 여유 있고 융통성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애태타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245)

요약하면, 첫째, 애태타는 하늘이 준 본바탕을 보전했고, 둘째, 그것을 밖으로 과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247)

그의 재질을 온전히 한다는 무슨 뜻입니까? (…)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죽음과 삶, 생존과 파멸, 성공과 실패, 가난과 부유함, 현명함과 어리석음, 비방과 칭찬,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이것이 모두 사물의 변화요 명의 운행으로서 우리 앞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우리의 앎으로서 그 시원 始原 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248)

캐나다 록키 산에 있는 루이스 호수가 제 아름다움을 선전하고 내세우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듯이(249)

그러므로, 성인은 자유롭습니다. 성인에게는 앎이 화근으로, 규약도 아교풀로, 얻음도 사람 사귐으로, 솜씨 부림도 장사하는 것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성인은 꾀하는 일이 없으니 앎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쪼개지 않으니 아교풀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잃음이 없으니 얻음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물건을 돈 될것으로 보지 않으니 장사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 네가지 함이 없어도 하늘이 죽 줍니다. 하늘이 주는 죽이란 하늘의 음식, 하늘에서 음식을 받으니 인위적인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253)

이처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으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한심한진짜 잊어버림이라는 이야기 이다.(254)

무정이란 감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보통 감정을 넘어선 감정이란 뜻이다. 그야말로정일랑 두지 말라. 미련일랑 두지 말 자.” 하듯이 애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활달하고 트인 마음, 빈 마음에서 작용하는 티 없는 감정의 흐름일 뿐이다.(258)

 

6편 큰 스승(大宗師)

1. 하늘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 하늘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하늘과 함께 살아가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그의앎이 안는것으로 그의앎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완합니다. 이리하여 하늘이 내린 수명을 다하여 중도에 죽는 일이 없는 것. 이것이 앎의 완성입니다(262)

3. 그러므로, 진인 眞人 이 있어야만 참된 앎이 있습니다. 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옛날의 진인은 모자란다고 억지부리지 않고, 이루어도 우쭐거리지 않고, 무엇을 하려고 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실수를 해도 후회하지 않고, 일이 잘되어도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앎이 높이 올라 도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264)

6. 이런 사람은 마음이 비고, 모습이 잔잔하고, 이마가 넓었습니다. 그 시원하기가 가을같고, 훈훈하기가 봄 같았습니다. 기쁨과 노여움이 계절의 흐름같이 자연스럽고, 모든 사물과 어울리므로 그 끝을 알 수 없었습니다. (266)

도와 하나 되면 살아도 거기, 죽어도 거기. 밤중에 죽음이 찾아와 우리의 생명을 도둑질해 간다 해도 결국 숨을 데가 없으니 거기가 거기. 죽음이니 삶이니 하는 구분이 있을 수도 없고, 잃으니 찾느니 하는 대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277)

16. 무릇 도가 실재라고 하는 믿을만한 증거는 있지만, 그것은 함도 없고 형체도 없습니다. 전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가 없습니다. 터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근본으로 하고 스스로를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있기 이전부터 본래 있었습니다. 귀신과 하늘님을 신령하게 하고, 하늘과 땅을 내었습니다. 태극보다 높으나 높다 하지 않고, 육극보다 낮으나 깊다 하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으나 오래되었다 하지 않고, 옛날보다 더 오래되었지만 늙었다 하지 않습니다.(280)

도는 체험의 영역이지 말의 대상일 수 없음을 말한다.(281)

글을 읽되 거기에 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핀 다음,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290)

천만에. 싫어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내 왼팔이 점점 변하여 닭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새벽을 깨우겠네. 내 오른팔이 차츰 변해 활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새를 잡아 구워 먹겠네. 내 뒤가 점점 변하여 수레바퀴가 되고 내 정신이 변하여 말 되면, 나는 그것을 탈 터이니 다시 무슨 탈것이 필요하겠나. 무릇 우리가 삶을 얻은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우리가 삶을 잃는 것도 순리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에 따르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여들 틈이 없지. 이것이 옛날부터 말하는매달림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는 말 걸세.(295)

그런데도 이렇게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오랜을 이기지 못하는 법. 내 어찌 이를 싫어하겠는가? (295)

[장자]에서는 인간이 행한 행위에 따라 내세가 결정된다는 인과응보라든가 업보를 같은 사상이 없다. 모두 자연이 그 순리에 따라 적절한 길로 만물을 변화시킬 따름이라는 것이다.(299)

3우리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에 안달하지 않으려면, 여기에 나오는 도나조물자’, 혹은조화자가 결국은 만사를 선한 길로 이끌 것이라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형이상학적믿음이 있을 때 삶이 그만큼 듬직해지지 않을까?(300)

장자가 말한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저 운명이나 숙명으로 알고 손을 놓고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이다.(318)

사실 엄격히 따지면 도를 터득한 사람은 궁극적으로 운명론이든 안명론이든 그런 것에마저도 구애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큰 스승이요, 그런 사람이 사회를 지도해야 그 사회가 진정한 의미로 번영할 수 있다고 보았다.(319)

 

7편 황제와 임금의 자격(應帝王)

참된 지도자는 그런 인위를 넘어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얻은 그 감화력으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알듯 모를 듯 이끌어 가는, 노자식 무위의 정치, 가만 놓아둠의 정치, 무심의 정치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 최소한으로 다스리는 것이 최선의 다스림이라는 원칙에서 궁극적으로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사람이다.(321)

이런 다스림은 실재의 세계를 그대로 체득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다는 뜻에서 플라톤이 그의 [공화국에서 말한 철인왕을 연상하게 한다.(321)

결국말만 소만혹은이것만 저것만하는만만주의의 세계가 아니라, ‘말도소도혹은이것도저것도하는도도주의의 세계, 비이분의 세계, 불이의 세계, 시비 초월의 세계, 2편에 말한양행의 세계에 속한 사람임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두 쪽을 다 같이 볼 수 있는 사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보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제왕이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삶이라는 뜻이다.(325)

참된 지도자는 이슬처럼 공기처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백성들 뒤에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다스린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이름을 들먹이지 않고’, 만사 이렇게 잘 되는 것이 마치 자기들 스스로 잘해서 그런 줄 알고 기뻐하도록 한다는 것이다.(331)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를 사람처럼 대접하고, 좋고 싫은 일이 따로 없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열자가 이제 남녀를 구분하고,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고,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을 가르는 일체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초월했다는 뜻이다.(342)

거울은 앞에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비출 뿐, 밉다고 쫓아 보내고 예쁘다고 받아들이는 짓을 하지 않는다. 앞에 나타나 것이 슬프다고 함께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을 비췄다고 제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출렁거리는 것을 보여 준다고 같이 출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잔잔히 떠오르는 대로 비추는 거울, 이것이 자유인의 고요하고 잔잔한 마음이라는 것이다.(345)

사람에겐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이런 구멍이 없으니 구멍을 뚫어 줍시다.” 했습니다. 하루 한 구멍씩 뚫어 주었는데, 이레가 되자 혼돈은 죽고 말았습니다”(347)

 

외편 잡편 중에서 중요한 구절들

그러므로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길게 늘여 주어도 괴로움이 따르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 주어도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자를 것이 아니며, 본래 짧은 것은 늘일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인의가 사람들의 본래적 특성일 수 있겠습니까? 저 인을 갖춘 사람들, 괴로움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354)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사에서도 상대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데 쓸데없이 경쟁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를 해치거나 불리하게 하는 행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속에 잠재한 열등감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수가 많다.(367)

⇒ 열등 덩어리였던( 또는 여전히 그런) 나에게도 이와 비슷한 기질이 있었다. 창피하고 창피하고 또 창피하도다……

대개 술취한 사람은 빨리 달리는 수레에서 떨어져도 죽지는 않는다. 그 뼈마디나 관절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데 다침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그 의식이 온전했기 때문이지. 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떨어지는 줄도 모르니 죽고 사는 데 대한 두려움이 마음 속에 들어갈 리 없지. 따라서 사물을 대하는 데 두려움이 없네. 그 사람이 술에서 온전함을 얻어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하늘에서 온전함을 받을 경우야 어떠하겠는가?”(375)

의식이 온전하다는 것은 의식이 둘로 나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의식이 주와 객으로 완전히 나누지 않은 갓난 아기는 침대에서 떨어져도 웬만해서는 다치지 않는다. 술취한 사람이나 갓난 아기의 의식 상태는주객 미분으로 온전한 것이고, ‘하늘로부터 얻은 온전함주객 초월로 운전한 것이다.(375)

인간의 사랑이란 이렇게 본래 붙었다가 잘려 나간 다른 쪽에 대한 동경이라고 한다. 아무튼 떨어져 나간 제 짝을 찾아 찰칵하고 들어맞으면천생연분이라 삐걱거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의식한다는 것은 삐걱거린다는 것인가? 물론 상대방을 잊을 정도로 서로 완전히 편하게 지내는 것과 등한히 여기거나 업신여기면서 잊어버리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크게 다를 것이다.(384)

빈 배 :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그 배에 부딪쳤습니다. 그 사람 성질이 급한 사람이지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떠내려오던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결국 세 번째 소리치는데, 그 땐 반드시 욕설이 따르게 마련.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습니까?”(산목 20:3) (388~389)

예술이란 물리적 사실보다 내면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림은 붓을 자연스럽고 순간적으로 움직여 그려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 이야기라고 했다. 참된 예술가는 내면적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이기에 궁극적으로 인습이나 통상적 형식에 전혀 구애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393)

진나라 왕이 병이 나서 의원을 부르면, 종기를 따서 고름을 빼내 주는 의원에게 수레 한 대를 주고, 치질을 핥아서 고쳐주는 의원에게는 수레 다섯 대를 준다는데, 치료할 곳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수레를 더 많이 준다고 하더군. 자네는 치질을 얼마나 고쳐 주었기에 그렇게 많은 수레를 얻었는가. 자네, 물러가게.”(414)

[장자[에서 가장 장자답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최고의 풍가자(satirist)다운 장자의 면모를 보여준 문단.

내게는 하늘과 땅이 안팎 널이요, 해와 달이 한 쌍 옥이요, 별과 별자리가 둥근 구슬 이지러진 구슬이요. 온갖 것들이 다 장례 선물이다. 내 장례를 위해 이처럼 모든 것이 갖추어져 모자라는 것이 없거늘 이에 무엇을 더 한다는 말인가?”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시신을 먹을까봐 두렵습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되고,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되거늘 어찌 한쪽  것을 빼앗아 딴 쪽에다 주어 한쪽 편만 들려 하는가?” (415)

죽음과 육신의 사라짐 앞에 초연한 죽음 전 장자와 제자들의 대화

 

후기

물고기를 잡는 틀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 물고기를 잡았으면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
덫은 토끼를 잡기 위한 것. 토끼를 잡았으면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
.
말은 뜻을 전하기 위한 것. 뜻을 전했으면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
.
나도 자기 말을 잊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417)

 

3. 내가 저자라면

마음의 위안을 얻는 글들이다. 어린 시절 좋은 생각아니 십대들의 쪽지와 같은 책을 즐겨 읽은 적이 있는데, 아마도 책들 속에 담겨져 있는 글을 쓴 사람들은 노자나 장자를 읽은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난 노자 또는 장자의 책을 단 한번도 읽은 적이 없는데, 전반적인 나의 사상(주관)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세상은 연관되지 않은게 없고 모두 연결되어 있다. 성공하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외적인 성공이 내적인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고, 외적인 안위가 내적인 안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닌 것 처럼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편안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현실과는 너무 거리가 먼 얘기인 듯 하여, 거리감을 느낀다거나 현실감각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삶과 죽음은 하나 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그리 슬퍼할 것도 노여워할 것도 없다라거나, ‘쓸모있는 나무는 빨리 잘리고, 쓸모없는 나무는 오래 살아 남는다등과 같은 주요 사상은 고개는 끄덕여지지만 선뜻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현시부정적이고 도피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의견에 일부분 동의한다.

그럼에도, 고단한 우리의 삶에 위로를 받고 힘을 얻기 위해 현실 초월적인 신을 찾고 종교에 빠지듯이,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사상은 꼭 한번 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공을 향해 끊임없이 달리고 사회적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수많은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때에 따라서 그들이 지치고 힘들 때 한번쯤은 접하면서 자신들이 달려가고 있는 길이, 자신들이 행하는 수많은 실행들이 반드시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장자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는 것과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은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행할 수 없다고 하여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한참 달려야 하는 30대 중반의 나에게 노장사상은 다소 늙은 도인이 풀어놓는 힘없는 이야기로 보이긴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받아들임받아들이지 않음’, ‘행함행하지 않음’, ‘끄덕끄덕절레절레사이에 장자가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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