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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0일 03시 59분 등록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장자>를 읽기 전에

 

 

@ <장자>의 사상적 위치

[17]

윤리와 실용을 강조하는 유교의 가르침()이라 한다면, 좀 더 신비한 내면을 강조하는 도교의 가르침 ()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보완하는 관계로 조화와 균형을 이상으로 삼는 동양인의 정신적 필요에 부응해 온 셈이다.

 

도교(道敎, Taoism)라 하는 것은, 엄격하게 따져, ‘도가사상도교신앙으로 양분할 수 있다.

 

도가사상-인간의 내면적 초월과 자유를 추구

도교신앙-육체의 장생불사를 우선으로 생각

 

도가사상의 근간은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다.

그래서 후대에 와서 그것을 흔히 노장 사상이라고도 한다.

 

 

@ 사상가 장자

[18]

장자의 생애에 대한 기록

--장자 죽고 200년 뒤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

 

장자는 ()이라는 곳의 사람으로, 이름은 장주(莊周)이다. 몽은 현재 하남성 상구현 동북 어디쯤일 것이라 하는데, 장자가 살던 전국시대에는 ()이라는 조그마한 나라에 속하였다. 젊어서 칠원(漆園)이라는 옻나무 밭에서 일했다는데, 그 일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생존 연대를 대략 기원전 369~286년이라고 한다.

맹자(371~289)와 거의 같은 때 사람인 셈이다.“

 

제자백가의 시대, 장자도 이런 시대적 환경에서 태어나 자신의 사상을 피력한 사상가 중의 하나.

 

장자, 당대(當代)에 와서 ()불교를 꽃피우는 직접 계기가 되었다.

선승(禪僧), 특히 9세기 임제(臨濟)는 장자의 진정한 계승자라 여겨짐. .

 

----> 바야흐로 때는 0세기....즈음, 장자보다 300년 전의 노자와 장자보다 200년 후의 사마천이 광활한 중국 중원의 들판을 걸어가다가 잠시 쉬어가는 어느 마을의 주막에서 함께 만났으면 어땠을까? 나도 함께....^^ 도에 대한 서로 같은 시각, 다른 시대, 다른 처지로 풀어놓는 이야기들.... 나는 아마 사마천을 따라 다니며 함께 인터뷰를 할 것이다.

 

@ 고전<장자>

[19]

“10여 만 자로 된 <장자>라는 책이 있었다.“ -- 사마천 <사기>

“52편으로 구성한 <장자>라는 책이 있었다.” -- 전한 말, 유향의 <한서예문지>

 

그러다가

기원후 4세기 노장사상이 전성기를 맞은 당시 북송의 곽상(郭象, 기원후 312년 사망)이 여러 가지 사본들을 정리하여 65,000여자, 33편으로 줄여서 편집, 자기 나름의 주를 달아서 지금 우리가 보는 <장자> 책 완성..

 

곽상은 <장자> 33으로 하고 이를 내편 7, 외편 15, 잡편 11으로 나누었다.

 

이중 내편 7편은 장자의 글로 추정. 그 외의 편은 장자의 후학들이나 그 사상에 공명한 사람들이 나름으로 계속 글을 쓴 일정의 장자 시리즈가 아닌가 추정.

 

 

@<장자>와 노자<도덕경>

[20]

사마천 <사기>, “(장자의 사상) 그 근본은 노자의 설에 귀일한다고 하였다.

 

장자의 사상노자의 사상과 근본적으로 궤를 같이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명나라 고승 감산, 기타 제임스 레그 같은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장자>가 단순히 노자를 주석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

 

처음에는 노자 철학과 장자 철학이 따로 발전해 오다가 기원전 2세기경에 합쳐서 한 학파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당시에 나온 <회남자>에 처음으로 노장이라고 합쳐서 한 철학 체계로 다루었다.

 

(그런데)........최근 그래함(A.C.Graham)을 포함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과정에서 장자 사상에 노장 사상을 첨가했다고 보고,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장자를 노장 철학의 주축을 봐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사실 <장자> 내편에는 노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노자를 직접 인용하거나 그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전혀 없다.

 

[21]

그렇다고 노자와 장자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장자는 노자가 제기한 문제를 자신의 처지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한 생각이다.

---> 노자와 장자의 처지는 어떻게 달랐을까? 시대적, 사회적, 역사적, 개인적, 신분적, 가정사적, 개인 성향과 성격/기질, 재능, 식성, 가족관계, 생김새 등등.....

 

도를 포함하는 몇 가지 중심 사상에서 둘은 보는 눈이 서로 같았겠지만, 3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다음 새로운 역사적 배경에서 등장한 장자는 마땅히 자기 나름의 형식으로 접근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둘 사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기본적 차이점들은 무엇인가?

 

노자 VS 장자의 기본적 차이점

1.첫째, <도덕경>은 간략한 어록이나 시, 아름다운 산문 형식

<장자>는 주로 이야기 형식.

 

노자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하는 엄숙한 선언으로 도덕경첫머리를 시작한 데 반해, 장자는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 하였습니다.” 하는 이야기로 운을 떼었다.

 

<장자>가 시적 형식으로 꾸며지지는 않았지만, 전체가 시적 상상력을 표현

 

노자--자상하면서 근엄한 철인의 풍모

장자--투철한 눈매로, 때로는 크게 껄껄 웃고 가끔은 험구도 불사하는 재기발랄한 야인의 모습

 

[22]

2.둘째, <도덕경>정치 지도자를 위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 참여를 염두에 둚.

<장자>도 정치 이야기는 하지만, 일차적 관심은 개인의 내적 성장에 힘쓸 것 강조.

 

노자도가적 정치실현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장자도가적 삶의 완성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3.셋째, <노자> 도를 주로 생성 변화의 근원으로 파악, 본받고 따라야 할 궁극적 귀착점 강조

<장자>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근원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그냥

그 변화에 몸을 맡겨 함께 흐르거나 그대로 변하기를 더욱 강조

 

.<도덕경>은 주로 도의 ()’하는 측면을 말하였는데, <장자>는 도의 ()’하는 기능을 부각한다.

 

4.넷째, <노자> 알려진 경구나 속담 가끔 인용하지만, 대체로 자기 생각을 홀로 개진

<장자> 당시 유행하던 사상들, 특히 이론학파들과 부단히 대화하고 대결, 생각 전개

 

@ <장자>가 우리에게 보내는 초청장

(장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우리가 떠받드는 상식적인 고정관념, 이분법적 사고방식, 거기에 기초를 둔 맹목적인 가치관, 윤리관, 종교관 등을 우리에게 스스로 깊이 살펴보게 해서 이런 것들의 내재적 모순과 불합리함을 발견해 없애도록 도와줄 뿐이다.

 

[23]

우리 얼굴을 씻어 주고 단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거울을 들어주는 셈이다.

---> 너 자신의 얼굴을 니가 좀 봐라....

 

<장자>는 인식내용(cognitive contents)을 제공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일깨움을 목적으로 한 책이다.

 

分別智, 小知, 差別知 모든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넘어선 상태, 야심과 욕망과 우월감 등 일체의 자의식을 극복한 상태, 이런 빈 마음의 상태에서 도와 하나가 되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신나는, 힘 있는 삶, 풍요한 삶, 활력이 넘치는 삶, 절대적인 자유의 삶으로 이끄는 장자의 초청을 발견한다.

 

@ 이 책으로 할 일

<장자>는 죽은 책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실존적 질문에 무관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책이 전하려는 구속론적 관심을 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자유롭게 노닐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절대 자유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변화초월’, 이것이 장자전체의 주제이며 가르침의 궁극 목표라 할 수 있다.

---> 변화와 초월..... 변화에 몸을 맡기며 이분법적 사고와 자의식를 멸하여 초월하는 자유의 경지.

 

[26]

@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고

1.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 하였습니다.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이라 하였습니다. 그 등 길이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 못(天地)'이라 하였습니다.

 

*****

[27]

이 엄청난 변화는 모두 자연 안에서, 그것에 순응하고 힘입어 가능.

초자연적인 힘, 기적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래적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발현해 생긴 일.

 

붕새는 이런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을, 그리고 그 거침없는 비상은 이런 '변화''변혁'을 이룬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초월'을 상징한다. <장자> 첫머리는 이처럼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닌 실존적 한계를 초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인간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다.

 

본질을 보면 본래 따로 독립한 사물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것이었다는 점.

거대하기 그지없는 물고기나 붕새도 본래는 알()이었다. 그렇게 큰 것들도 조그만 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씨알을 품고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이런 무한한 가능성을 자각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 가능성을 품은 것들. 사람도 씨앗도 모두 나다운 것을 피워낼 역량, 잠재성을 가지고 있고 결국 잠재성이 발휘하는 일련의 모습이 삶의 과정이고 변화의 모습이 아닐까. 이미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많이 발현 시키냐는 나의 과제이자 교사로서 아이의 엄마로서 내가 관심 갖는 주제다.

 

헤르만 헤세의 알, 진정 내 안에 솟아 나오려는 것,

니체의 말, 내 발 밑을 파라, 그곳에 샘이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라이프니쉬잠재성, 목적론적 철학.

이것들은 모두 비슷한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러셀은 목적론적 입장에 동의를 못 하더라도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내 안의 씨앗역량에 한표를 던진다. 나의 첫 책, 흔들흔들 6층 병원집에도 이러한 잠재성 이야기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거다. 내 안의 역량의 자연스런 발현,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과정........ 주목하자, 동서양 철학자들의 주제와 고민들을..

 

<헤르만 헤세 데미안’> 책 표지 글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데미안>의 서문

난 진정,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사아 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 ‘아리스토텔레스잠재성에 관한 목적론적 견해

& 러셀의 반박 (러셀, 즐거운 지식 )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형상 이론에 있어서는 결국 형상이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판명된다. 왜냐하면 창조력을 발휘하는 건 형상이며, 물질은 물론 필요하긴 하지만 그저 원료로서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시초부터 끊임없이 탐구되어 온 변화를 설명하는 문제는 보편자 문제와 병행하기 마련이다. 잠재성이란 개념이 변화를 설명하는 일에 유익하게 쓰일 수 있다. 변화가 진행될 때 잇달아 현실화되는 일련의 성질을 보급해 주는 잠재적인 것을 실체로 삼고 변화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변화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잠재성이란 개념이 크게 쓸모있는 생물학에 관한 그의 과학적 관점에 있다.

생물학적 관심의 맥락에서 보면 잠재성 개념과 목적성 개념이 병행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생물학자는 어떻게 종자로부터 성숙한 동물이나 식물이 생기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생물학자는 도토리가 도토리나무를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도토리를 도토리 나무로 변화시키는 것은 도토리 자신을 실현시키려는 경향성이라고 말할 법하다.

정신분석학 역시 그 장점이나 단점이 무엇이건 사람의 행동을 앞으로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에 의해서 설명하고 있다.

목적론적 견해는 궁극적으로 우리 주위의 자연환경이 어떤 종류의 질서에 따라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로부터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목적론은 궁극적으로 의인적 설명이나 신학적 설명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결함이 있다.

후세가 입은 진짜 손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의 틀린 생각을 거부하여 평판을 떨어뜨리는 대신에 전적으로 그의 생각을 승인해 버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오직 신만이 완전 과학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신은 우주의 모든 것을 필연성의 맥락에서 이해한다고 보았다.

라이프니츠예정 조화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테레키 이론 즉 잠재성이 현실성으로 나타나려고 분투한다는 이론에 의해서 고무 받은 것처럼 보인다. 라이프니츠는 이 이론에서 모든 잠재성이 동시에 실현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언젠가 한 번은 최대한 많은 양의 현실성을 갖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8]

4.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구만리 창공에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거침이 없이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 큰 바람을 타야 한다는 것은 무얼까? 자연의 힘?

 

*****

[29]

붕새의 초월적 비상을 위해 특히 바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 왜 바람이 필요하다고 했을까?

 

여러 종교를 살펴보면 거의 모두, 바람은 신바람이라고 할 때처럼, 우리 속에서 움직이는 生氣같은 것을 의미한다. (바람, , 생기....)

 

특히, 히브리 지혜서에 나오는 창조 설화를 보면, ‘신령한 바람이 혼돈 위에 앉아서 마치 알을 품고 있는 새와 같이 만물에게 각각 생명의 기운을 나누어 주었다.

 

[30]

거의 모든 종교는 우주의 바람, 이 바람이 사람에게 작용해서, 그것이 사람을 신바람이 넘치는 사람, 생기에 찬 사람, 진정으로 살아 있는 자유인이 되게 한다는 기본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람을 타라. 생기를 찾아라. 그리하여 활기찬 삶을 살아라!”

이것이 건조하고 무의미한 인간의 현존을 뛰어넘는 진정한 초월!!

---> 그래서 코에 바람 넣으러 가끔씩 야외 들녘에 나가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생생한 생기를 찾으려면. 돌아 댕겨야 해......

 

 

[31]

@ 매미와 새끼 비둘기

5.

조금 아는 것으로 많이 아는 것을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삶으로 긴 삶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침에 잠깐 났다가 시드는 버섯은 저녁과 새벽을 알 수 없습니다.

 

*****

[33]

<갈매기의 꿈>의 조나단이라는 갈매기.

보통의 갈매기가 일상의 일을 숙명처럼 생각하고 거기에 골몰하고 있을 때, 조나단은 보통 갈매기의 한계를 넘어서, 더 높이, 더 빨리, 더 아름답게 나는 것, 궁극적으로 비상의 신비스러운 경지를 찾는 데 시간과 정력을 바친다.

 

우리는 모두 여름 한철을 사는 메뚜기, 봄 가을을 모른다.

영원이니 초월이니 변화니 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자부한다. 우리야말로 건실한 현실주의자들이라고.

 

노자<도덕경> 세 종류의 사람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어중간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못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몹시 비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41)”

 

[34]

극도로 '엄청난 진리' 본래 '역설적'이어서 형식 논리에 사로잡혀 명석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웃음거리일 수밖에 없다.

---> 붕새처럼 훨훨 날며 살자...... 붕새.... 바람 타고.... 생기 넣으며... 생기 넘치게. 우짤껴?

 

[35]

@ 다른 이야기 하나

6.

메추라기가 붕새를 보고 비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 새는 저렇게 날아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나는 한껏 뛰어올라도 몇 길을 못 올랐다가 내려앉아서 기껏해야 이 숲에서 저 덤불로 날아가는데, 도대체 저 붕새는 저렇게 날아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

[36]

이런 이야기의 일차적 목적.....우리의 변화(transformation)를 일깨우려는 것임.

사실 <장자>가 이렇게 신화같은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것은 몇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현실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무엇에 관한 이야기하는 뜻.

신화우리의 상식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무엇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힘있게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37]

신화가 허황한 이야기나 거짓말은 아니다. 사실이나 진실과 맞서는 것도 아니다. 신화란 이성을 초월한 세계의 엄청난 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특수 전달 수단이다.

---> 상상력을 동원한 허구적 역사 소설이 실재 역사보다도 더 분명하게 그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점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듯이, 신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야기에는 힘이 있는 것이다. 신화, 소설이든 허구를 통해 더욱 진실에 가깝게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서는 특수 전달 수단. 다큐멘터리나 허구적 신화&소설이냐....... 그것이 문제도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포장한 허구적 소설??

둘째, 이 말은 결국 <장자>라는 책이 문자로이해할 자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 그러면 뭐냐? 책은 이야기다. 상징이 담긴... 그래서 깨달음을 주는. 일연이 삼국유사를 이야기기 형식과 각종 상징을 담아 쓴 이유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장자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문자적 진리를 안겨다 주려는 책이 아니라 상징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 깨닫게하려는 것이다. 상징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 손가락의 생물학적 성격이나 물리적 구조에만 관심을 쏟으면 달을 볼 수 없다.

 

상징을 문자로 읽으면 그 환기적 기능, 영어의 ‘evocative’ 기능이 완전히 죽어 버리고 싸늘하게 죽은 문자만 남는다. 바울의 말과 같이, “문자적인 것은 죽이는 것이고 은 살리는 것이다.

(고린도후서3:6)

 

셋째, 이렇게 을 넘어서 상징이 가리키는 바를 바라볼 때 우리는 변해서새로운 실재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붕새의 변화와 초월과 자유에서 우리가 가진 실존의 한계를 초극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고, 우리 스스로 변혁의 날개를 펴는 것.

 

[38]

@ 자유의 네 단계

7.

송영자는 그런 사람(메추라기만한 사람들)을 비웃었으며, 그는 온 세상이 자신을 칭찬해도 우쭐하지 않고, 비난해도 기죽지 않았습니다. 내실과 외식을 분명히 구별하고, 영광과 치욕의 경계를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도 아직 이르지 못한 경지가 있었습니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올라가 마음대로 노닐다가 열 닷새가 지나서 돌아왔습니다. 세상의 행복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히 노닐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을 만큼 초연하지는 못했습니다.

 

至人은 자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神人은 공적에 무관하고, 聖人은 명예를 탐내지 않습니다.

 

*****

[39]

인간 잠재력 발휘하여 변혁하는 4가지 단계에 따른 네 부류의 사람

첫째, 상식인(常識人)-- 하나의 자리에 오르는데 일로매진하는 사람들. 일명, 메추라기만한 사람.

둘째, 송영자(宋榮子)--송나라 사상가. 전쟁반대 평화주의자. 칭찬과 비난에 초월하라. 아직 분별계

셋째, 열자(列子)-------아무데나 마음대로 떠다니며 자유를 누렸으나 아직 바람을 기다리는 상태

넷째, 지인,신인,성인---진정한 자유인, 기대지 않는 완전한 자유 만끽 구가하는 무애(無礙)의 삶.

 

[40]

송영자 왈, 전쟁의 근본 원인칭찬받기를 좋아하고 비난을 싫어하는 속물근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파, 그것을 초월하라고 가르쳤다. 칭찬이나 비난에 육중한 바위처럼움직이지 않고 영광과 치욕을 분별해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초연한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런 송영자의 경지도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스스로 칭찬이나 비난에 초연하지만, 아직도 칭찬과 비난을 칭찬과 비난으로 의식하고 칭찬받으려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별의 마음이 있기 때문일까?

---> 칭찬과 비난에 민감함.... 그래서 더 초월하기에 의식을 하는 분별계..... 이 부분에서 딱 걸려드네... 내 수준은 여기인가...ㅋㅋ

 

자유자재로 노닐다가 15일이면 돌아왔는데 그것은 15일마다 불어오는 새바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또 이렇게 훨훨 떠다니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바람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지했다. 말하자면 열자 아직 기대는 상태에 머문 것이다.

---> ‘운이 좋아야지라고 믿는 것이 이 단계가 아닐까?

 

<장자>의 궁극적 이상은 우주의 원리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돼 무한한 경지에 노니는 절대 자유의 단계이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는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구가하는 무애의 삶이다.

진정한 자유인은 바로 無己, 無功, 無名한 사람들이다. 자기가 없고, 공로가 없고,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아나 공로나 명예의 굴레에서 완전히 풀려난 사람들이다.

 

[42]

@요 임금이 나라를 許由에게

8. “부엌의 요리사가 부엌 일을 잘못해도 제사 시동이나 신주가 술단지와 적대를 들고 와서 그 노릇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

[43]

장자는 유가에서 이상으로 생각하는 성군 요임금과 당대의 은자 허유를 등장시켜, 제 몸을 다스리는 일이 나라 다스리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허유는 거절했다. 이름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 사는데, 뱁새나 두더지 같은 동물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에 만족하고 살아가듯, 자기도 그렇게 살겠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서 무슨 소원이든 말하라고 했을 때 지금 자기에게 비치는 햇빛을 가리지 말 것밖에는 달리 부탁할 것이 없다고 한 고대 그리스의 철인 디오게네스를 연상시키는 이야기이다.

 

[44]

요임금은 忘功한 듯 하지만, 자신이 한 일을 알리고 싶어했다는 점에서 忘名하지 못했고, 한편 허유는 임금의 자리라는 명예를 탐하지 않아서 忘名에 이르렀지만, 그 자리를 거절하고 한 몸의 안위에 집착해 忘己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 1편부터 점점점 변혁의 인물로 확대되어가는 구조로 이야기를 풀고 있는 장자. 메추리같은 인간부터 시작하여....

 

@ 막고야산의 神人

 

.[46]

10.

신인은 그의 덕으로 온갖 것과 어울려 하나가 된 것이오. 세상이 모두 평화를 바라는데, 무엇 때문에 구태여 노심초사하며 애쓸 필요가 있겠소?

 

*****

접여(接與)-미친 사람, 미친 사람의 이름으로 나온다. ‘미쳤다는 것, 자유롭게 노니는 사람.

 

[47]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여기 나오는 신인은 앞에 나온 열자처럼 구름에 의지해서 다니다가 보름 만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름을 타고 용을 몰아 자유자재로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有待에서 無待로 넘어간 완전 자유인.

 

물고기에게 땅에서 걷는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없고, 음치에게 모차르트 음악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 줄 수 없다.

 

[48]

여기서 신인은 세상사에 몰두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기적으로 몸을 도사리는 것이 아니다. 신인은 온갖 것과 하나가 된상태로 만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물처럼 흐르듯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완전한 무위의 상태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세상을 이롭게 한다. 도덕경의 말처럼 함이 없는 함을 실천한다.

 

@ 송나라 모자 장수와 요 임금

11.

요임금은 세상을 잘 다스려 나라가 태평해지자, 멀리 고야산에 사는 네 스승을 뵈러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분강 북쪽 기슭에 다다랐을 때, 茫然自失해서 자기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까맢게 잊어버렸습니다.

 

*****

[50]

아무튼 요 임금이 신인들을 만나고 나서 자기 나라를 잊어버리는 변화와 초월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결국 요 임금이 이런 경지에 이른 것은 이 신인들의 함이 없는 함때문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 신인들이야말

쓸모없음의 더욱 큰 쓸모라는 진리를 실증해 준다.

@ 큰 박과 손 트는 데 쓰는 약 (주목 주목 주목~ 말쌈)

[52]

13.

장자 왈 to 혜자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한 가지인데, 한 쪽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고, 다른 쪽은 무명 빠는 일밖에 못했으니, 똑같은 것을 가지고 쓰기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 게 아닌가?

 

자네는 아직도 작은 일만 생각하는 쑥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네 그려.”

 

cf) 쑥같은 마음-꼬불꼬불하고 좀생이 같은 마음

 

 

@ 쓸모 없는 나무?

14.

[54] (주목구절) 쓸모.

그것(쓸모없는 큰 나무)아무 것도 없는 고을' 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그 주위를 하는 일 없이배회하기도 하고, 그 밑에서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게. 도끼에 찍힐 일도, 달리 해치는 자도 없을 걸세. 쓸모 없다고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것이 없지 않는가?“

 

cf) 아무 것도 없는 고을(無何有之鄕)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절대무의 세계, 고정관념이나 천박한 실용주의를 벗어난 경지.

 

*****

혜자는 여기서 모든 사물은 그 자체의 쓸모를 본래적으로 타고났다는 이른바 본질론적 견해를 말했다. “박은 본질적으로 반드시 물을 담는 데 쓰는 것이란 고정관념으로 박을 본 것이다.

 

[55]

장자의 가르침이 쓸모없는 것이라는 장자 무용론을 편 혜자에게 장자는 자기의 가르침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더 큰 가치와 뜻이 있다고 했다.

----> 장자는 위로보고 아래로 보고 뒤집어 보고 올라가서 보고 등등 다양한 차원에서 사물을 접근하고 있다. 보는 관점이 고정되어있지 않는...

 

우리 머리 속에 이미 형성된 쓸모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서 쓸모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굽은 나무가 대궐을 짓는 데 재목으로는 쓸모가 없지만 꼬부랑 할머니의 꼬부랑 지팡이로는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감을 따는 연장으로도 쓰고 물을 건널 때 그 깊이를 알아보는 잣대로도 쓸  있다. .....어느 나무든 쓰임새는 무한하다.

 

이런 비본질론적 견해를 다른 말로 해서 시각주의적 접근(perspectival approach)이라 할 수.

 

[56]

cf) 함석헌 선생의 <바보새> 이야기. <바보새> p57~58

동네 안에 늙은 나무는 왜 서 있습니까?.......현실적으로 살림도 하지만 상상의 세계도 갈구합니다.......나무 가지의 그늘입니다....젊은이들이 도시의 맘몸(항금신)의 졸병으로 끌려가는 이 때에 마을의 느티나무는.....찍히고 거기 깃들였던 혼은 산으로 도망갈 때, 마을에 남은 것은 주고받기와 시비와 깔고 앉음과 깔리움 밖에 있을 것이 없습니다.”

----> 도시화로 전국 곳곳에 살던 삼신 할미가 갈 곳을 잊고 몰려든 곳, 로터리 뱅뱅뱅~ 그때부터 아이들이 잘 태어나지 않고..... 오직 로터리 병원 뱅뱅뱅 만이 아기가 쑥쑥 나온다. 나무 한그루. 느티나무? 베어내어야 할까?

 

[57]

궁극 변화, 초월, 절대자유, 해방을 말하는 장자의 가르침이 논 갈고, 길쌈하고, 장사하고 돈 벌고 출세하는 일에는 분명 쓸모가 없겠지만 그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현상계의 실상을 궁구하고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꿰뚫어 보게 해줄 뿐만 아니라 주고받기와 시비와 깔고 앉음과 깔리움 밖에 있을 수 없는 인간의 정황, 이 숙명적 실존의 한계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풍요하고 자유롭고 싱그럽게 사는 일에 쓸모가 있다면, 이 어찌 저 자질구레한 일들의 쓰임새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쓰임이 있지만 더욱 값진 쓸모가 있는데도 값싸게 쓰이는 것이 딱하다..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생명을 하루하루 먹고사는데 써 버리고 말 것이냐 더 원대한 일을 이루는 데 사용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암시.

 

장자 왈

매미나 새끼 비둘기, 메추라기처럼, 하늘 높이 날아가는 붕을 비웃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시야를 넓혀 큰 시계를 보고, 사물의 더 크고 참된 쓸모를 찾으라는 것이다.

 

 

 

2

사물을 고르게 하다(齊物論)

 

[59]

이 편의 주제는 우리가 우리의 실존적 한계성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립의 세계에서 대립을 초월한 하나의 세계,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방법은? 사물의 한쪽만 보는 우리의 상식적, 분석적,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에서 사물의 진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예지와 직관과 통찰을 체득해야 한다.

 

[60]

이것이냐 저것이냐 에서 한쪽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양쪽을 모두 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동일한 것이 보기에 따라 크기도 하고 동시에 작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是非를 넘어서는 세계, 齊一, 齊同, 如一의 세계, 서양의 중세 사상가 쿠자누스가 말한 양극의 조화가 이루어진 세계 즉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 눈에 씌웠던 눈가리개를 벗긴 셈이다. 우리는 숙명으로 뒤집어쓰고 있던 제약의 굴레를 벗고, 붕새처럼 구만 리 창공을 날아가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 내 눈에 내가 씌웠던 눈가리개...그리고 이분법적 분별계 사고... 그것에 내가 혹해서 나를 들었다 놨다 감정놀음하며 에너지 소비했던 시절.... 붕새되어 구만리 높이 올라 자유를 누리는 지혜의 눈이 있었다면.... 쓰임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바로 지금, 지금 당장 그렇게 하자.

 

 

[61]

@ 나는 나를 잃어 버렸다

1.

남곽에 사는 자기(子綦)라는 사람이 책상에 기대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멍하니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자기 몸과 마음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제자 안성자유가 물었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몸도 이렇게 마른 나무 같아질 수 있고, 마음도 죽은 재 같아질 수 있습니까? 지금 책상에 기대앉아 계신 분은 이전에 이 책상에 기대 앉아 계시던 그 분이 이니십니다.”

---> 딱 내 느낌이다. 몸도 마음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 내가 내가 아닌 느낌.... 자의식 해체.

.

자기 왈, “언아, 참 잘 보았구나.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너는 사람들이 부는 퉁소 소리를 들어 보았겠지만,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겠지......

또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

 

*****

[62]

1편에서는 북명의 물고기가 붕새가 되는 외형적 변모로 상징

2편에서는 남곽의 자기가 내가 나를 잃었다고 하는 내면적 변혁표현.

vs, 물고기vs사람 but, 두 편 다 변화를 이야기.

----> 1편과 2편을 쓰되 소재를 대조 이루게 쓴 장자. 작가의 이런 계산이 좋다.

 

吾喪我<장자>의 핵심 개념.

내가 나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려, 내가 진정한 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는 어떤, ‘는 어떤 인지에 대해 글자의 어원을 다지는 등, 주석가들 사이에 설이 분분하지만, 쉽게 말하면, 우리의 비 본래적인 자아, 작은 자아에서 풀려난 본래의 자아, 큰 자아가 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63]

이런 변화를 의식상태로 설명하면, 일산의 이분법적 의식 세계에서 벗어나 초이분법적인 의식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꽉 막힌 자의식에서 탁트인 우주의식으로 변한 것이다. 근본적인 의식변혁으로 히랍어의 메타노이아이다. ‘마음 굶김이나 앉아서 잊어버림과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이다.

 

옛 자아가 죽고 진정한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옛 나를 장사 지내고 새로운 내가 무덤에서 나오는, 깊은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다. 불란서 철학자 데카르트가 라틴말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지만, 여기서는 나는 잊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일상의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버릴 때 진정한 나, 온전하게 된 내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몸이 마른 나무같이마음이 죽은 재같이 되었다는 고목사회(枯木死灰)’이야기는 똑같지는 않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지관이라는 명상법을 상기시킨다.

 

비파샤나(止觀) 명상

몸과 마음이 완전히 정지한 상태를 유지하라고 가르치는데.....그러면 사물에 대한 직관과 통찰이 생긴다. 마음과 몸이 완전히 조용하게 가라앉는 것이 정이고 그렇게 되어 눈이 밝아진 것이 혜. 이를 정혜라고 한다. 이른바 삼매(三昧samadhi)와 반야(般若prajna)이다. 여기서도 이것과 비슷한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 다람살라의 비파샤나 명상, 우리 언니 정혜, 그리고 또 다르지만 같은 이름 반야..... 그리고 사라..... 그래서 언니가 자신의 아이디를 panya로 하는구나... 관하여 보지만, 보았지만 본 이후에는.... 습을 바꾸어야 한다. 아는 것은 행하는 것의 시작점이지만, 안다고 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문제로다.... .

 

[64]

자기 초월의 경지에 들어가야 비로소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수 인식 능력의 활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물론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곧 일체의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차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을 얻는 것이다.

----> 1차원 사람, 2차원 사람, 3차원 사람, 4차원 사람..... 차원이 높으면 보아도 더 꿰뚫어보고 사람을 어루만져도 순간에 공감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다.. 그래서 비행기 타고 버스타고 몇 일 밤을 가서 다람살라 달라이 라마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하나로 연결돼 있기에 비슷한 장에 함께 있는 사람들이 함께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 경험.... 꽃을 든 관세음보살을 보고, 함께 눈물 흘려준 그녀 덕분에 쓰러졌던 그 자리의 고목은 생명을 얻고..... 그래서 영험한 기운이 있는 장소로 자주 사색을 떠나야 한다. 내가 없어지는 곳으로.... 그래야 내가 존재한다.

 

 

제자, ‘안성자유는 공자의 두 제자의 이름인 顔回와 자유(子游)의 이름을 합한 듯한데, 공자의 제자들처럼 공자가 가르치는 대로 세상을 보면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론에 따라 지적으로 추구하는 한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스스로를 잃어버린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 맞는 말이다. 지성을 쌓기 보다 마음을 닦는 것이.... 마음공부.... 할머니가 늘 마음공부해야 한다고 하셨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할머니가 말했던 마음공부가 학교공부보다 더 관심이 갔지만, 우리 엄마는 늘 학교공부를 잘 하고 못함을 가지고 내 존재를 재단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마음공부를 얘기하며 늘 나를 좋은 곳에 데리고 다니셨다. 할머니의 삶..... 덕을 나누는 삶. 할머니가 보고 싶다.

 

[65]

@ 하늘의 퉁소 소리

2. (주목 구절-자연 속에 고요히 있을 때만이 느낄 수 있는 바람의 소리들...이런 시간을 가져...)

"땅덩어리가 뿜어내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것이 불지 않으면 별일 없이 고요하지만, 한번 불면 수많은 구멍에서 온갖 소리가 나지. 너도 그 윙윙하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산의 숲이 심하게 움직이면, 큰 아름드리나무의 구멍들, 더러는 코처럼, 더러는 입처럼, 더러는 귀처럼, 더러는 목이 긴 병처럼, 더러는 술잔처럼, 더러는 절구처럼, 더러는 깊은 웅덩이처럼, 더러는 좁은 웅덩이처럼 제각기 생긴 대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 화살이 씽씽 나는 소리, 나직이 꾸짖는 소리, 숨을 가늘게 들이키는 소리, 크게 부르짖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깊은 데서 나오는 듯 한 소리, 새가 재잘거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내지. 앞에서 가볍게 우우 - 하는 소리를 내면, 뒤따라서 무겁게 우우 - 하는 소리를 내고. 산들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하지. 그러다가 바람이 멎으면 그 모든 구멍은 다시 고요해진다. 너도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 구부러지거나 살랑살랑 흔들리기도 하는 것을 보았겠지."

 

[66]

3.

자유 왈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란 무엇입니까?"

"온갖 것에 바람을 모두 다르게 불어넣으니 제 특유한 소리를 내는 것이지. 모두 제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소리가 나게 하는 건 누구겠느냐?

 

*****

여기서도 바람이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

1편의 바람이 우리가 타고 신바람 나게날아가게 하는 바람이라면, 여기 나오는 바람퉁소 속으로 통과하면서 소리를 내듯 속으로 불어 우리를 움직이는 내면적 바람인 셈이다.

---> 정말 멋진 표현이다. 퉁소 속을 통과하는 바람... 퉁소를 통과하는 바람의 소리. 내면을 흔드는 소리...

 

[67] (주목구절)

바람 자체는 소리가 없지만 그것이 다른 사물과 마주칠 때 사물마다 독특한 소리를 낸다......이처럼 우주의 온갖 사물은 각각의 모양과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 사람과 땅이 부는 퉁소 소리

 

인간은 이 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내보내느냐에 따라 나름대로 다양한 소리, 생각, 의견, 심리 작용, 감정, 정서 상태와 다양한 정도의 생동성과 생명력 등을 얻는다.

---> 어쩜 이런 비유를 쓸 수 있을까 장자는....정말로 아름다운 비유이다... 사람을 빨려들게 하는...장자의 입김에 나는 빨려들었다가 다시 내려앉았다가...장자의 최면에 몽롱해지며 웅웅 소리가 들린다.......

 

하늘 소리는 그 자체로 독립된 소리가 아니라 인간과 대지가 이처럼 다양한 소리를 내도록 해 주는 바로 그것, 그 자체로는 들리지 않지만 모든 소리들이 근원이 되는 바로 그것. 바람 혹은 그 자체, 바람이나 기의 근본인 도와 도가 발휘하는 힘을 의미한다.

 

[68]

여기서 하늘의 소리란 모든 소리를 나게 하지만 그 자체로는 소리가 아닌 소리이다.

 

하늘의 소리는 다른 소리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소리들 속에 있는 소리, 들리지 않는 소리. 초월하며 내재하는 무엇이요, 모든 것과 하나이면서 다른 것이요, 다르면서도 하나인 무엇.

 

하늘의 소리는 우리 몸의 귀로 들을 수 없다. 그것은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새롭게 열리는 영적인 귀로만 들을 수 있으므로 하늘의 퉁소소리를 들어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우리 자신을 잃어보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69]

@ 지적 활동과 감정의 작용

4.

큰 꾀는 느긋하고,

작은 꾀는 좀스럽고.

 

큰 말은 담박하고,

작은 말은 시끄럽고.

 

잠잘 때 꿈은 뒤숭숭하고,

깨어 있을 때는 감각 기관이 일을 시작하고.

 

접촉하는 일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마음은 날마다 싸움질에나 쓰고.

 

더러는 우물쭈물

더러는 음흉

더러는 좀생이

 

작은 두려움에는 기죽어하고,

큰 두려움에는 기절하고.

---> 어떻게 이렇게 잘 알까... 감정의 횡포를....ㅋㅋㅋ 장자 살던 그 시절이나 내가 사는 이 시절이나.... 사람 마음은 다 똑같아.

시비를 가릴 때는, 물매나 화살이 날아가듯 날쌔다. 끝내 이기겠다는 것을 보면, 하늘에 두고 한 맹세 지키듯 끈덕지다.

---> 열 받아 싸울 때의 내 모습 ㅋㅋ.. 비유도 이런 비유를 쓰다니.... 장자는 매력있어.

 

날로 쇠하는 것 보면, 가을 겨울에 풀과 나무가 말라 가는 것과 같고 하는 일에 빠져들면 헤어날 길이 없다.

 

늙어서 욕심이 지나친 것 보면, 근심에 눌려 꼭 막힌 것 같다. 죽음에 가까워진 그 마음은 다시 소생 시킬 수가 없다.

 

5.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염려와 후회, 변덕과 고집, 아첨과 방자, 터놓음과 꾸밈. 이것들이 모두 빈 데서 나오는 노래요, 습한 데서 나오는 버섯이다......이렇게 아침 저녁으로 (여러가지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기에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이런 것들이 나타날 턱이 없지., 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이나 이런 변화가 나타나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구나.

--> 이런 감정 변화.... 욕망 때문에....

 

*****

[71]

남곽자기는 여기서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지적 활동과 감정이라 했다. 아직 자기를 잃어버리지 못한 우리 보통의 인간들, 아직 하늘의 퉁소소리를 들어 보지 못한 우리 속인들이 불어 대는 퉁소 소리는 부자연스러워, 아름답지가 못하다고 했다.

 

 

@ 참주인

[75]

유가들, 특히 맹자는 마음이 우리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자는 묻는다. 마음이 몸보다 나은가? ‘몸도 쇠하고 마음도 함께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기에 마음이라고 나을 리가 없다. 마음도 우리의 참주인일 수가 없다.

 

참주인을 알아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근원.

 

@ 굳은 마음(成心)

[77]

<도덕경>의 상심(常心)과 같은 뜻.

성심은 좋지 못한 마음, 고쳐야 할 마음, 우리를 분별과 대립의 세계에 묶어 놓는 딱딱한 마음.

시비를 따지는.....이런 정신적 병폐 때문에 나의 참주인’, ‘나의 참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

 

@ 말을 한다는 것은

[78]

9.

말을 한다는 것은 그저 숨을 내쉬는 것만이 아니다. 말에는 뜻이 있지. 말을 했지만 말하려는 바가 뚜렷하지 않다면, 말을 했다고 해야 할까, 아직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말은 새끼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다르다고 하는데 정말 다른 것일까, 다르지 않은 것일까?

 

*****

[78]

유가와 묵가가 시비를 다투어.......이들이 그르다 하는 것을 옳다 하고, 이들이 옳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들의 옳고 그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밝음이 있어야 한다.

 

[79]

이 같은 일은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볼 수 있다. 모두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처럼 자기가 만져 본 일방적이고 부분적인 단견을 내세워 서로 분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코끼리가 구렁이처럼 생겼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눈을 뜨고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눈을 떠야 구렁이 같은 면과 기둥 같은 면을 다 본다. 이를 일러 밝음을 얻음이라 한다.

 

[81]

@‘이것저것

10.

이것저것이 서로를 생겨나게 한다는 方生이라는 것이지.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됨이 있기에 안 됨이 있고, 안 됨이 있기에 됨이 있다.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일방적 방법에 의지 하지 않고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함(因是)이다.

*****

[83]

아버지만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없이는 아버지도 있을 수 없으므로 들도 아버지를 낳는 셈이다. 아버지도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고, 아들도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방생'이라고 했다.

 

선악, 미추, 고저, 장단 같은 것들이, 결국 독립한 절대 개념이 아니라 빙글빙글 돌며 어울려 서로 의존하는 상관 개념.

 

 

@ 손가락과 말()

[87]

장자 왈, 손가락을 놓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논증법 대신 손가락이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고,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이 낫다고 역설했다.

특수한 개체인 말과 보편적 추상 개념인 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는 식으로 말을 가지고말이 아니라고 하는 대신 장자는 말이 아닌 것즉 소나 개를 가지고 말이 말 아닌 까닭을 밝히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88]

만물에는 고정한 실체나 본질이라는 것이 없다는 주장.

각각의 사물은 독립한 개체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일상적인 의식으로 각 개체 사이에 있다고 생각한 경계나 구분이 완전히 없어진다.

一卽多 多卽一 一中多 多中一, 양극의 조화

 

[91]

@ 조삼모사(朝三暮四)

13.

하늘의 고름에 머문다. 이를 일러 두 길을 걸음이라고 한다.

 

*****

[92] (주목구절)

의인의 밭에도 악인의 밭에도 고르게 비를 내리는 하늘의 공정함.(天鈞)

시비 등 이분의 세계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경지.(兩行)

 

[94]

@ 세 가지 지극한 경지

14.

옮고 그름을 따지면 도가 허물어진다. 도가 허물어지면 욕망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루고 허물어지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 이룸과 허물어짐이라는 것이 따로 없는 것 아닐까?

 

15.

이룸과 허물어짐이 있다는 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타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룸과 허물어짐이 없다는 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타지 않음에 해당하는 것이다.....(소문)은 특출해서, 좋아하는 일로 남을 깨우치려 했다. 그러나 남을 깨우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남을 깨우치려 했기 때문에 .....끝장나고 말았다.

 

@ ‘있음없음

 

@ 털끝과 태산

[104]

본래 하나이던 세계가 우리들의 의식작용으로 분화해 무수한 분화, 분별, 다양의 세계로 변해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하고 따지고 변론하고 시비를 가리면서 부산하게 좇아다니지 말고”, ‘순수이성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넘어서는 직관으로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하라 타이른다.

 

 

@ 도에는 경계도 이름도 없다

[106]

20.

무릇 위대한 도는 이름이 없다. 위대한 변론은 말이 없다. 위대한 인은 편애하지 않으며 위대한 겸손은 (밖으로 드러내는) 겸양이 아니다. 위대한 용기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도가 훤히 들여다보이면 도가 아니고 말도 변론만을 위한 것이라면 부족하다. 인이 융통성 없이 굳으면 두루 퍼질 수가 없다. 겸손도 드러나게 하면 믿기지 못하며 용기가 사람을 해치는 것이라면 될 성부른 것이 못 된다.

 

[108]

철학자 파스칼도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지 철학자와 학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고 했다. 도는 마음에 간직하거나 체험으로 알아야지 사변이나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따지면 영원히 절대타자일 수밖에 없다.

 

도를 말하려면 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도에 대해서 뭔가 말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자체가 도를 전혀 모른다는 증거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도덕경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알지 못함을 알고 멈출 줄 아는 사람, ‘말로 하지 않는 변론도라고 할 수 없는 도를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은근한 빛을 감추고 있는 하늘의 보고이다.

 

 

@ 요 임금과 세 나라

 

[110]

참성인은 은근한 빛으로 모두 감싼다고 했는데, 해와 같다는 요 임금이 그렇게 하지 못하니 아직 완전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요 임금도 해이지만, 사실 요 임금 같은 해가 옛날에 열이 나와 밝혔어도 진정한 덕에서 나오는 은근한 빛보다는 못했다는 것을 말한 셈이다.

 

해는 우리의 이성을 상징하고, '은근한 빛'은 이성을 초월한 경지를 의미한다.

---> 은근한 빛, 은은한 빛.... 강렬한 태양빛이 아니라 은은한 빛.... 진정한 덕은 경계가 없는, 이성을 넘어선 경지에서 나온다. 그 편안하고 고요한 경지.

 

@ 앎과 모름

[112]

도대체 是非라는 것이 무엇인가?

도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이 완전히 무의미함을 깨닫는 경지이다.

 

설결 to 스승 왕예

이른바 보편타당한 진리가 있을 수 있는가요?”

보편타당한 진리를 기준으로 하여 사물을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판가름할 수 있는냐는 질물이다. 시비를 가리고 싶어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사고 방식에서 나온 질문. 어떤 잣대로 사물을 이것과 저것으로 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판단은 모두 각자의 처지에 따른 것. 그러므로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할 수 없다는 것.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르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는 것일 수 있다는 시각주의(perspectivalism)을 말한 것.

 

 

@ 사람과 미꾸라지(주목구절-모두 다 상대적인 거다)

23.

[114]

내가 보기에, 仁義의 시작이나 是非의 길 따위의 것은 (결국 이처럼 주관적 판단 기준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번잡하고 혼란한데 내 어찌 이런 것이나 따지고 앉아 있겠는가?

 

*****

다원성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과 일맥상통.

여기서 주목점. 장자는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지 않고 동물에게도 인간과 똑같은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116]

@ 이해 득실에 무관

24.

설결 to 스승 왕예

至人은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까?“

 

*****

지인은 신령하여 범인과 차원이 다르다.

절대의 세계와 하나가 되어 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 사람이다.

서양 중세 신비가들 왈

나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을 신격화라고 했다.

속세의 이해득실을 따질 턱이 있겠느냐....

 

@ 성인의 경지

구작자(瞿鵲子) to 장오자(長梧子)

----까치가 오동나무 가지에 앉아서 오동나무와 이야기-우화로서의 장자

 

[122]

@ 여희의 후회(주목 이야기-여인의 변화 이야기)

26.

여희....울던 일을 후회하였다네. 죽은 사람들도 전에 자기들이 삶에 집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 죽도록 힘들었지만 어느 단계를 넘어서서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면 그전에 견디기 힘들어하면서 괴로워했던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된다. 어느 길을 가든 그냥 가는 대로 물 흐르듯 가라... 정답은 없다. 변화의 과정일 뿐. 일단 먹어봐~ 행동하고 경험함이....

 

*****

[122]

우리도 이 삶이라는 집을 떠날 때 그처럼 억울하게 생각하게 마련이지만 누가 알겠는가, 우리가 기대하지 못하던 훌륭한 존재 양식으로 옮겨가 이 삶에 집착했던 것을 어리석었다고 여기게 될지.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마시기 직전,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길을 간다. 나는 죽음의 길, 너희들은 삶의 길. 어느 길이 더 좋은 것인가 신만이 알 것이라고 한 말을 연상시켜 주는 이야기이다.(플라톤 apology 42)

 

[123]

옛날의 에서 새로운 , 변화되지 않은 에서 변화된 로 넘어가는.

우리는 모두 지금의 익숙한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 자기 중심적인 내가 자기에게 해방된 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이런 일상의 에서 놓여나기 위해 신앙의 도약을 감행할 수 있다.

.

cf) 신화, 프시케&에로스 이야기(주목신화)

--- 어린 소녀 프시케가 아프로디테가 요구하는 모든 시련을 이기고

결국 에로스의 아내, 신의 영역에 동참하는 진정으로 성숙한 여인이 되는 과정의 이야기

----> 나의 신화 집이 된 여자도 그런 변화와 모험을 동반하여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125]

여희나 프시케처럼 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에 안주하지 말고,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거기서 벗어나 새로운 로 탈바꿈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26]

@ 꿈에 술을 마시며

27.

꿈에 술을 마시며 즐거워했던 사람이 아침에는 섭섭해서 운다. 꿈에 울며 슬퍼한 사람은 아침이 되면 즐거운 마음으로 사냥하러 나간다.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지. 심지어 꿈 속에서 해몽도 하니까. 깨어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지. 드디어 크게 깨어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한 바탕의 큰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항상 깨어 있는 줄 알고, 주제넘게도 그러함을 분명히 아는 체하지..... 내가 공자나 자네가 꿈꾸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꿈일세. 이런 말이 괴상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들릴 테지만 만세 후에라도 이 뜻을 아는 큰 성인을 만난다면, 그 긴 시간도 아침저녁 하루 해에 불과한 것처럼 짧게 여겨질 것일세.

 

[127]

*****

삶은 크게 보아 한바탕 꿈.

이 세상에서 어떤 이는 즐거워하고 어떤 이는 슬퍼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다 꿈이라는 것.

삶이 순전히 허상일 뿐이라는 뜻은 아니다.

장자는 삶이 꿈이지만 그 속에 그 나름의 실재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물론 궁극의 실재는 아니지만 그 실재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꿈이 꿈인 줄 알려면 꿈에서 깨어나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리 삶이 꿈인 줄 알려면 이 삶에서 크게 깨어나야(大覺)’한다는 것.

그러나 우리 범속한 인간들에게는 이런 큰 깨어남, 큰 깨달음, 큰 깨침이 없기 때문에 이 인생의 꿈속에서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르고 서로 아웅다옹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129]

@ 논쟁이 되지 않음은

28.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그른 것인가? 두 쪽이 다 옳거나 두 쪽이 다 그른 경우는 없을까?

 

29.

자네같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판단해 보라고 하면, 이미 자네 생각과 같으니, 그가 어찌 이를 옳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30.

이처럼 변하기 쉬운 (시비 대립의)소리에 기대하는 것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네. 이런 것을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시키고 무한의 변화에 내맡기는 것이 천수를 다하는 길이지.

 

*****

[131]

모든 의견은 결국 각자의 견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른바 보편타당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러 번 지적한 대로 시각주의입장 없는 입장을 말한다.

 

 

@ 엷은 그림자와 본 그림자

 

[132]

31.

망량(엷은 그림자) to (본 그림자)

왜 그렇게 줏대가 없소?”

그림자()가 대답했다. ‘내가 딴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소? 내가 의존하는 그것 또한 딴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오? 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에 의존하는 것 아니겠소? 왜 그런지를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왜 안 그런지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133]

*****사물의 상호 의존성과 상호 연관성을 말한 셈.

어느 누구도, 어떤 사물도 엄격한 의미의 독립성이나 주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거슬러 울라가면 모든 존재의 바탕이자 움직임의 근원은 도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도의 그림자, 엄격히 따지자면 그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인 셈.

---> 아이가 엄마에게 의존한다지만 엄마 역시 아이에게 의존한다. 영처럼 자신이 의존하고 있음을 아는 엄마가 됨이....

 

[134]

@ 나비의 꿈

32.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物化)라 한다.

 

cf) 장자, 몽접주인-나비꿈 선생

 

*****

[135]

나비의 꿈이라는 것은 나비로 된 꿈’, ‘나비가 꾸는 꿈 동시에 들어 있는.

 

지금 그 꿈에서 깨어난 상태를 다시 꿈꾸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이른바 그 깸에서 다시 한 번 깨어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깸에서 깨어나는 것이 큰 깨어남, 대각이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장자는 대각한 사람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가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136] (주목구절-이야기 아이디어)

세계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 서로 어울려 있는 관계, 꿈에서 보는 세계와 같이 서로가 서로가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나오기도 하는 꿈 같은 세계이다.

---> 정말 밤에 꿈을 꾸면 이렇게 된다. 할머니가 또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가 또 동물이 되었다가.... 서로가 서로가 되고 또 서로에게서 나오고.... 서로가 어울리는 관계.... 개물의 정체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가 되는 경험....그리고 그것에 관한 이야기.......... 어떻게 재미나게 만들까?

상호 침투~~~~!!!!! 힘 넣었다 빼기~~~~!!!!! 변신~~~~~!!!! 합체.....

 

이런 세계는 개물이 제각기 독특한 정체성과 함께 하나라는 전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가 될 수 있는 不二性이 병존하는 세계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종이는 종이 아닌 요소만으로 된 셈이다.

그러니까 종이는 종이다.”하는 대신에 종이는 구름이다.”, “종이는 나무다.”, “종이는 다이아몬드다.”, “종이는 종이 아닌 것이다.”하는 편이 더 적절한 말이다.

---> 나무가 종이가 되었습니다. 종이가 책이 되었습니다. 책이 눈물이 되었습니다. 눈물이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흔들린 마음은 저 들녘에 우두커니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생각에 잠겼습니다. 느티나무는 마음을 들여다보며 빙그레 웃습니다.

 

 

3

생명을 북돋는 데 중요한 일들(養生主)

 

[139]

3편은 (오상아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어떻게 일상생활을 신나고, 활기차고, 풍성하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편이다. 그런 삶은 어떤 모습인가?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

 

지식욕, 자존심, 자기중심주의 같은 일체의 인위적,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서 자연의 운행과 그 리듬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할 때, 리 속에 있는 생명력이 활성화하고 극대화해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이른바 기대지 않는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북돋는 일’,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 삶에는 끝이

[142]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습니다. 아는 것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할 뿐입니다.

유한한 삶으로 무한한 앎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 위험하다는 것.

 

독일작가 괴테가 쓴 파우스트에 나오는 주인공 파우스트처럼 철학, 법학, 의학, 신학 등 인간이 알아야 할 모든 학문을 다 섭렵하고도 모자라 악마에게 자기 혼을 팔아서라도 우주의 신비를 알아보겠다는 끝없는 지식욕 같은 것은 위험하다는 것일까?

 

아무튼 순전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일방적 지식 추구는 위험한 일이므로, 오직 중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몸도 보전하고 삶도 온전하게 되고, 모두 화목하게 지내게 되고, 천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네 가지가 곧 保身’, 全生’, ‘養親’, ‘盡年이다.

 

노자도 마음은 비우고 배를 든든하게 하며, 뜻은 약하게 하고 뼈는 튼튼하게하고, “지식도 없애고 욕망도 없애고, .. 함부로 하겠다는 짓도 못 하게하라고 했다. 소위 무지’, ‘무욕’, ‘무위를 가르치고, 이렇게 하면 세상에서 안 되는 것이 없으리라고 했다.

 

[143]

여기서 앎이니 지식이니 하는 것은 .....끝없이 따지는 분별지를 말한다.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도덕경 제48

 

도와 하나가 되려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이나 단견 같은 이분법적이고 일방적인 의식으로 얻은 지식을 하나하나 버려야 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런 것을 더 얻지 못해 안달하며 쏘다니면 이야말로 위험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앎을 버림’, 혹은 배운 것을 버림에 이를 때,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여기서도 결국 지식이 아닌 직관으로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음을 말한 셈이다.

 

[144]

그렇다면 사회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가 감옥에 갇히는 일 같은 것은 좋지 않다는 뜻인가?.....“훌륭한 일일 수 있다. 정의를 위해 힘껏 싸워 보아라. 결국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스스로 더욱 근본적인 일이 있음을 발견하라..”

 

근본적인 것은 착한 일을 한다, 나쁜 일을 피한다, 하는 등 의식적 가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표피적 행동이 아니라 의연하고 묵직하게 '중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이 편에서 강조한 양생의 요체인 셈이다.

 

[145]

()을 따른다(). --->중도를 따른다

희랍 사람들이 다이몬이라 하고, 로마 사람들이 지니우스라 한 것, 영어의 것트’, 우리말로 표현하면 좋은 뜻으로 육감혹은 뱃심을 따르라는 것쯤으로 볼 수 잇을 것이다.

 

 

[146]

@ 포정의 소 각뜨기(주목이야기-기술을 넘어선.....아이키우기도 마찬가지.....)

3.

포정(庖丁)이 소잡다 for 문혜군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 발을 디디고, 무릎을 굽히고 그 소리는 설컹설컹, 칼 쓰는 대로 설뚝설뚝 완벽한 음율, 무곡 <뽕나무 숲>에 맞춰 춤추는 것 같고 악장 <다스리는 우두머리>에 맞춰 율동 하는 것 같았습니다.

 

4.

문혜군 왈, 어찌 이런 경지?

포정,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통째인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다 칼을 댑니다. 이렇게 정말 본래의 모습에 따를 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 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아이를 키우는 것도 본래의 모습을 따를 뿐, 그 아이가 가진 생김과 역량에 따라 자극하고 어루만지고 칭찬하면 본래의 모습으로 쑥쑥 자라는 것. 포정의 3단계 경지.

 

[148]

5.

시선이 하는 일에만 멈추고,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칼을 극히 미묘하게 놀리면 뼈와 살이 툭하고 갈라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문혜군이 말했습니다.

훌륭하도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생명을 북돋움(養生)’이 무엇인가 터득했노라.”

----> 상황 묘사 쥑인다~ 장자는 존 스타인 벡처럼 헤밍웨이처럼 묘사의 대가다... 멋져~

소를 죽이면서 양생을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은 역설 같지만, 이건 일종의 가치 전도에 대한 이야기다. 몽골에서 양을 잡는 것을 보았다. 피 한 방울 안 흘리게... 그리고 양이 태어나 처음으로 벌러덩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본다. 그래서 양은 양잡이에게 고마워한다고 말하는 몽골의 양잡이 아저씨. 이 역시 양생이야기다.

 

*****

[150]

옛날 사람들은 인간이 신과 정과 기로 되었다고 믿었다. 인간의 정신 작용을 뜻한다.

정력이라고 할 때처럼 성인의 활동력을 지탱해 주는 기본적인 요인이고, 기운이나 원기라고 할 때처럼 사람을 건강하게 힘차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 한다면, 신난다고 할 때처럼 사람에게 활기와 흥을 돋워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희랍어의 프시케 혹은 다이몬=프랑스 베르그송 왈 엘랑 비탈

옛날 선사들은 깨침에 이르는 단계를 두고, 산과 물을 보는 경우, 첫째,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하는 단계, 둘째,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고 하는 단계, 셋째,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하는 단계를 말하였는데, 포정이 거친 삼 단계라는 것이 이와 비슷한 것일까?

주객을 완전히 초월한 비이분법적 상태.

함이 없는 함, 그래서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경지에서 하는 함 -노자 왈

 

[151]

여기서 이라 한 것은 ()’의 본래 뜻이다. ‘하늘의 이(天理)’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이다.

라는 개념은 11세기 송대에 번창한 신유학의 중심 개념으로 등장한다. 이른바 성리학이라고 할 때의 가 바로 이것.

 

꽉 찬 것 같은 소의 몸도 이런 경지에서 대하면 큰 틈이 훤히 드러나 보이고......

-----> 돈이 다니는 길이 있다. 아이 키우는 길이 있다. 다 보이는 경지. 집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 내가 집에 붙어서 움직이는....

 

[152]

골프 선수 중에는 어느 경지에 이르렀을 때 구멍()이 물통 만하게 보여 그 큰 구멍으로 공을 쳐 넣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운동선수들은 이런 경지에 이른 것을 ‘zone’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마이클 머피(그의 책 <몸의 미래>에서)는 이런 것을 두고 인간에게 있는 초보통적 능력이라 한다.

 

153 자식이라도 열심히 가르쳐 어떻게 하든 사회에서 버젓이 성공하도록 뒷받침해 주는 것이 상식이다. 이런 상식을 뒤집고 오히려 백정이 임금에게 참되게 사는 방식을 가르쳐, 임금이 감탄했다.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유명한 소설 희랍인 조르바가 생각난다. 거기서도 소위 성공한 지성인 사업가로 등장하는 상전이 불학무식한 하인 조르바의 신나는 삶, 거침이 없는 삶에 감복하여 결국 춤추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으로 끝이 난다.

 

 

@ 외발 우사(右師)

 

[156]

어느 화가가 남녀의 사랑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릴 때, 두 남녀가 침실에 같이 있는 장면을 소상하게 그릴 수도 있고, 단순히 댓돌 위에 고무신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양을 그릴 수도 있다. 전자를 서술적묘사라 한다면, 후자는 암시적’, ‘환기적기법이라 할 수 있다.

 

<장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적 이야기도 원칙적으로는 이 범주에 속한다.

선에서 하는 화두나 공안처럼 각자가 얻은 것을 붙들고 스스로 씨름하여 점점 더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이다.

---> 조셉 캠벨이 그랬던가 러셀? 아니...누가 그랬던가!? 성경의 상징성...그것 때문에 더욱 그 말씀에 대한 이해에 왜곡이 온다고....? 그러나 상징성은 스스로 씨름하란 말쌈.

[157]

하늘이 준 운명으로 받아들여 개의치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을 북돋우는 양생의 길.... 발 잘린 장군, 우사는 양생을 잘한 사람이라는... or 억지로 무리를 하다가 외발 신세가 되어 양생을 제대로 못한 인물이라는 해석...... 어느 쪽이든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한다는 기본적 가르침은 두 쪽이 같다.

 

@ 못가의 꿩

[158]

그토록 싫어함은, 왕 같은 대접에도 신이 나지 않기 때문.

신나는 삶, 삶을 즐길 줄 아는 것이 양생의 필수 요건.

 

@ 노자의 죽음

[160]

9.

진실 왈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어쩌다가 세상을 떠난 것도 순리이기 때문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여들 틈이 없지. 옛날 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늘님의 매닮에서 풀려나는 것(懸解)’이라 했네.“

 

*****

[162]

인간적 제약의 끈에 매달려 살아가는 것, 이런 숙명적인 부자유나 제약에 항거해서 이를 극복하려고 안달하는 것은 순리가 아니라는 것, 안달하면 할수록 우리의 비극적 얽힘은 더욱 심해질 뿐.....따라서 순응......이렇게 숙명을 받아들이므로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매임에서 풀리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 여자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숙명적, 실존적, 인간적 제약의 끈을 극복, 항거하지 않고 순리대로 받아들이는 기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마음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어느 시기가 지나면 매임에서 풀리게 된다.... 받아들임.

 

 

@ 장작과 불

[163]

10. "손가락으로 불을, 지피면, 손가락은 그것으로 할 일을 끝낸 것. 불이 계속 타든지 꺼

지든지 우리는 알 필요가 없다", "기름은 땔감으로 타 없어지지만 불 자체는 계속 이어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164]

결국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사후의 문제에 신경 쓰는 일에서 해방되는 것이 양생의 중요한 길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 편에서 주목할 것은 해우현해에서 보듯이 가 중요한 글자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는 해체한다. 푼다. 벗어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요즘 많이 논의하는 해체주의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이데거가 장자를 좋아한 것도 이런 뜻에서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일체의 고정 관념이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라는 것.

 

 

4

사람 사는 세상(人間世)

 

[167]

이 편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특히 복잡하고 비정한 사회 정치적 정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개인적으로 훌륭하게, 자유스럽게 사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진정 기여하면서 보람 있게 사는 길인지를 보여 준다. (, 처세법 이야기)

 

 

@ 독재에 항거하기

[168]

안회 왈 to 공자

저는 어지러운 나라 위나라로 가서 위나라의 병을 고칠 길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

[169]

장자는 계속 공자를 비롯한 유가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말하게 하지만, 그것은 유가 사상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자 자신의 사상을 대변하게 하려는 특수 창작 기법.

 

 

[170] (주목 이야기)

@ 섣불리 덤빌 수 없다

2.

옛 지인(至人, 참사람)들은 먼저 스스로 도를 굳힌 뒤에 남을 도왔다. 자기 하나 확실히 갖추지 못하고서 어떻게 포악한 자의 행위에 간여할 수 있겠느냐?

---> 이 말은 나 스스로 마음 굶김... 비운 마음으로 남을 도우라는 말. 의도를 가지고 돕는 것은 돕는 게 아니라는 말이 아닐까? 나는 의도를 가지고 도왔다가 스스로 나가 떨어지는 뼈아픈 경험을 했었다. 도울 때는 그냥 돕는 거다. 큰 돈을 보증 쓸 때는 그냥 주는 거다. 그냥이 안 되면 아예 하지 마라!!!

 

3.

더구나, 너는 덕이 어떻게 녹아 없어지고, 못된 앎이 어디서 생기는지 아느냐? 덕은 이름을 내려는 데서 녹아 없어지고, 못된 앎은 서로 겨룸에서 생긴다. 이름을 내려는 것은 서로 삐걱거리는 것이고, 못된 앎은 겨루기 위한 무기이다. 둘 다 흉한 무기라 완전한 삶을 위해서는 써서 안 될 것들이다.

4.

그리고 덕이 두텁고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는 사람도 아직 다른 사람의 기질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고 이름을 위해 겨루지 않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억지로 인의니 법도니 하는 것을 포악한 사람 앞에서 늘어놓는 것은 남의 못됨을 이용하여 자기 잘남을 드러내려 하는 것. 이를 일러 남을 해치는 것이라 한다. 남을 해치면 자신도 반드시 해침을 받는 법. 남들이 너를 해칠까 걱정이구나.

----> 정말 뛰어난 분석이다. 남의 기질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고 마음 알아보지 못할 수 있으니..... 포악한 사람 앞에서 인의, 법도를 말하는 것....그를 해치는 것. 보복 당한다. 말 함부로 했다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대중 앞에 나서면 꼭 이런 일 한번 쯤 겪는다.... 그런데....포악한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음이 궁금해 지네....

 

5.

또 그가 정말 훌륭한 사람을 좋아하고 못난 사람을 싫어한다면, 어찌 굳이 너를 써서 달리 일을 꾸미게 하겠느냐? 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왕은 자기의 권세를 등에 업고 그럴듯한 말로 너를 압도하려 할 것이다.

 

눈은 어리둥절

네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네 입은 핑계로 어물어물

네 태도는 쭈빗쭈빗

네 마음은 지당지당.

 

[172]

이것은 불로 불을 끄고, 물로 물을 막으려는 것. 이를 일러 군더더기라 하지. 일단 그에게 복종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것. 네가 너를 믿어 주지도 않는 사람에게 솔직한 말만 하다가는 반드시 그 포악한 사람의 손에 죽을 것이다.

 

6.

훌륭한 인격이 오히려 임금에게 그들을 제거하도록 하는 빌미를 준 셈이 되고 말았다. 이 둘은 모두 이름 내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이었다.

 

[173]

명예와 실리의 추구는 성인도 물리칠 수 없는데 네가 어찌 물리치겠느냐. 그러나 너에게도 (가겠다는) 까닭이 있을 터이니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 백성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동정하며 임금의 눈에 거슬린 신하들 이야기.... 그들은 성인이지만, 명예와 실리를 추구하였기에....

 

*****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겨우 인의를 배우고 그것으로 정치판에 뛰어들겠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유가에서는 수기치인’--“자기 수양을 하였으면 사람을 다스리라고 했지만 섣부른 수기만으로는 치인을 할 수 없다는 뜻.

 

이럴 경우 오히려 치인이 아니라 재인곧 남에게 재앙을 안겨주는 일이 되고, 이는 결국 자기를 해칠 위험까지 있다고 했다.

 

정치 현실 모르는 햇병아리가 세상사에 닳고닳은 정치 지도자들, 사람을 자기들 마음대로 주물러 온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다가는 오히려 그들에게 설득당하고 이용만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174]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네가 위나라로 가려는 것이 진정으로 그 나라 백성들을 위한 것인지 네 명예와 실리를 위한 것인지를 냉철히 살펴본 후에 가고 말고를 결정하라는 것!!!

 

사도 바울 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남만을 생각하는 아가페 같은)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3)

 

 

@ 정치적 준비 태세

 

[179]

@ 참된 준비 - 마음 굶김(心齋)

12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는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마음의 재니라.

 

[183]

@ 심재할 때

13.

"받아 주거든 소리 내고, 받아 주지 않거든 잠잠하라." 문도 없고 나갈 구멍도 없거든 하나를 집을 삶고, 부득이한 일에만 거하라. 그러면 그런 대로 성공할 것이다.

 

14.

걷지 않고 자취를 안 남기기는 쉽지만, 걸으면서 자취를 안 남기기는 어려운 일. 사람을 위해 일할 때는 속이기 쉬우나, 하늘을 위해 일할 때는 속이기 어려운 일. 날개로 난다는 말은 들었겠지만, 날개 없이 난다는 말은 못 들었을 것이다.

[184]

저 빈 것을 보라.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

행복은 고요함에 머무르는 것.

머무르지 못하면

이를 일러 앉아서 달림이라 하느니.

----> 집에 앉아서 안달복달 부글부글 달림하다가..... 이제는 집에서 고요히 그저 바라볼 뿐.‘이 되고 싶어 하는 나. 아직도 가야 할 길.

 

*****

[185]

사회에 참여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살기란 몹시 어렵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심재를 하여 마음이 완전히 텅 빈 방과 같은 상태가 되면 그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빛’, 곧 순백의 예지가 생기는 것을 체험하리라는 것이다.

----> 한번만이라도 이래 봣으면... 몸에 힘을 빼소서... 눈알에 힘을 빼소서.. 마음에 힘을 빼소서...

 

이렇게 몸은 앉아 있으니 마음이 쏘다니는 상태좌치(座馳)라고 하는데, 가만히 앉아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좌망과 맞서는 개념이다. 좌망마음의 구심운동이라면 좌치는 마음의 원심 운동인 셈이다.

---> 미친년 널 뛰듯이 마음에 광자를 달고 앉아서 천지를 쏘다니며 내 기에 내가 눌려 식겁했던 기억들...

 

[186]

중세 사상가 쿠자누스 왈 박학한 무지

 

[187]

정치에 참여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에 참여하는 마음, 자세가 문제이다. 장자는 '마음을 굶겨', 내면에서 솟는 초월적인 힘을 체험한 뒤에 삶의 현장으로 나가 사람들을 도우라고 한 것이다.

 

유대교 히브리 성서 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매 권능을 받아 사람들에게 나아가 외쳤다....”

.

 

[189]

@ 자고(自高)의 고민

16.

섭공 자고 왈 to 공자

성공하지 못하면 반드시 사람에게 괴로움을 당할 것이고, 성공하면 음양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을 사람은 덕을 가진 사람뿐이라하셨지요.

----> 울 남편 이야기다. 프로젝트, 실적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실적 낮아서 책임지고 그만두어야 하고 실적 좋고 잘 나가면 몸도 마음도 완전히 소진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나고 상하고.... ㅋㅋㅋ 성공이든 실패든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마움굻김을 해야..... 마음굻김의 공간으로 자주 함께 가자. 그래야 나도 안 괴로울 수.....

 

[192]

@ 공자의 조언

18.

공자 왈

"자기 마음을 섬길 때 슬픔과 기쁨이 눈앞에 엇갈리어 나타나게 하지 말고, 불가능한 일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운명으로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덕의 극치입니다. 신하나 자식된 사람이 부득이한 일을 당하면 사물의 실정에 맞게 행하면서, 자신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할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가셔야 합니다."

---> 마음 갈등 하지 말며 숙명으로 받아들임... 나를 아주 작게...소멸하는....매트릭스가 되어... 그저 실정에 맞게 행하기. 남편이 어떤 방향으로 가든 그저 그것을 바라보며 내가 챙겨 줄 수 있는 것을 챙겨주자.

 

[194]

격언에 이르기를 군주의 명령을 고치지도 말고, 이루려고 너무 애쓰지도 말라고 한 것입니다. 도를 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명령을 고치거나 꼭 이루려 너무 애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 하십시오. 부득이한 일은 그대로 맡겨 두고, 중심을 기르는 데 전념하십시오. 이것이 최고입니다.

 

*****

[196]

<장자>의 여러 곳에서 이처럼 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억지로 거역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수용하라는 말이 거듭된다. 이른바 安命論, 順命論이다. (그러나) 든 면에서 조금도 움직일 틈이 없이 꽉 짜여 있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그것을 꼼짝없이 그대로 믿는 운명론 이나 숙명론과는 다르다.

 

안명론은 니체가 말한 운명을 사랑함과 비슷하다고 할까.

 

바꿀 수 있는 것에는 바꿀 능력을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예지를 주시옵소서.” 라고 한 어느 성자의 기도가 생각난다.

 

(하지 말라!!!!)

1. 아름답게 꾸민 말

2. 변론을 위한 말

3. 박식을 드러내려는 말

오직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 無爲.... -<도덕경> 81

 

@ 거백옥의 충고

 

안합(顔闔) to 거백옥(蘧伯玉-노나라의 현인, 공자의 친구)

 

[200]

우선 자신의 몸을 바르게 하는 것, 곧 중심을 지키라는 것이다.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신의 기본적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

 

물은 동그란 그릇에 들어가면 동그랗게 되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지고, 뜨거우면 김이 되어 날아가고, 차가워지면 얼음으로 굳고. 이렇게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물이 물임물됨을 잃는 일이 없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적응하는 것 그 자체가 물의 정체성이다.

 

[201]

노자 왈, “성인은 고정한 마음이 없습니다.”

 

바울 왈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19~22)

 

선하지 않는 사람과 어울려 다 같이 선하지 않은 사람이 되거나 약한 사람과 어울려 다 같이 약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어울려 선을 이루고, 더욱 힘 있게 되기 위한 것이다.

----> 이게 참 어렵다.

 

[202]

@ 세 가지 비유

26.

호랑이가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를 잘 알아서 그 사나운 노기를 잘 구슬리는 것입니다. 호랑이가 사람과 다르지만 저를 기른 사람에게 고분고분한 것은 기르는 사람이 호랑이의 성질을 잘 맞추기 때문입니다.

---> 그 성질을 가끔 거스리는 적이 있다. 노기와 살기가 올라오도록 그 성질에 기름을 갖다부어 열 받게 만든다. 그리고는 메롱하며 조르르 도망친다. ㅋㅋㅋ 그리고 나서.... 다시 바짝 엎드린다.... 엎들여야 하는 순간을 아니까.. ㅋㅋㅋ

 

@ 장석(匠石)과 사당(祠堂)나무

@ 거목과 神人

@ 나무들의 재난과 점박이 소의 행복

@ 곱추의 특권

[215]

支離疎는 이름그대로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아무렇게나 뒤죽박죽 생긴 엉성한()‘ 사람.

 

지리소는 육신이 이렇게 막돼먹어이른바 군대에 들어가 장군이나 국방장관 같은 것도 생각할 수 없고, 부역에 충실해서 건설부 장관이나 노동부 장관 같은 자리도 꿈꾸지 못한 채, 그저 처한 환경에서 성실하고 근면함으로 그렇게 활기차고 건실하게 산다.

 

[216]

세상 사람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

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 총명한데

나 홀로 아리송하고,

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합니다.

바다처럼 잠잠하고, 쉬지 않는 바람 같습니다.”

 

이렇게 덕이 곱추인 사람노자야말로 얼마나 자유스러운 사람이었던가!

 

 

@ 미친사람 접여의 노래

---- 접여 sing to 공자

 

[218]

그만두오, 그만두오.

덕으로 남 대하는 일.

위태롭다. 위태롭다.

땅에 금을 긋고

그 안에서 종종걸음.

 

사람들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는 알고 있어도

쓸모 없음의 쓸모(無用之用)’는 모르고 있구나.“

 

*****

[219]

쓸모없음의 쓸모 같은 것은 물론 <논어>나 유가와 별로 상관없는 생각이다. 공자와 그 제자들은 모두 세상에서 쓸모 있는 그릇으로 쓰이기 위해서 천하를 돌아다니며 군주들에게 자기들의 쓸모를 알렸다.

 

[220]

장자든 누구든 정신적인 영웅은 조셉 캠벨의 말처럼 일단 '인습'을 등진 사람이다. 인습대로 사는 사람에게 정신적 영웅은 어쩔 수 없이 바보처럼, 미친사람처럼, 우스운 사람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221]

<장자>에서 말하는 쓸모 없음의 쓸모유용성의 극대화를 말한 셈이다.

궁극적으로 至人의 경지에 이르기 이전의 모든 유용성은 진정한 유용성이 아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크게 유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정으로 내면적 준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 떠받드는 자질구레한 유용성이나 실용성에 정신을 팔지 말고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굶기는심재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 심재를 실천하며 자신이 놓인 운명을 즐기며 물 흐르듯 영웅의 여정을 가라는...그런데 노장사상 철학은 현실도피철학인양 이제까지 왜 이리도 와전되었는지......

 

 

5

덕이 가득함의 표시(德充符)

[223]

노자의 <도덕경>이 도를 어머니로 표현하는 등 여성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뜻에서 현재 여성 운동가들의 성서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장자>는 불구자가 도를 실현하고 덕을 발휘하는 데 아무 장애가 없다는 것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실증했다는 점에서 장애인들의 성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 왕태와 공자

[226]

3.

"다름의 입장에서 보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지만, 같음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

 

*****

[229] 남의 눈치나 칭찬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실현만을 위해’, 차분하고 조용히 정진했을 분인데도 사람이 모여드는 것은 이런 거울같이 맑은 마음에 자기들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자기를 따르는 신도의 머릿수나 지지하는 사람의 투표수에 따라 일희일비하면서 오로지 자기나 자기 집단의 종교적, 정치적 세 확장에만 혈안이 된 요즘 세태와 얼마나 대조적인가.

 

@ 신도가와 정자산

[232]

8.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편안하게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덕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지.

*****

[233] 내가 선생님을 19년 동안이나 따르며 배웠지만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내가 '외발'임을

아신다고 내비치신 적이 없으시다네.

 

[234]

신도가 자신도 남이 자신을 업신여기면 화가 나는 것을 보면 자신도 아직 라고 하는 의식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모양이라며 그럴 때마다 백혼무인 선생님에게 가서 그런 마음을 씻어 평정을 되찾고 자의식을 줄여 가고 있다는 것이다.

 

 

@ 무지와 공자와 노자

[239]

이렇게 율법주의의 껍데기에 갇히면 어느 누구도 설득할 수가 없다고 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는 의식에 도취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240]

왕필공자는 무()와 하나가 되었기에 그것이 가르침이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 어쩔 수 없이 유()만을 말했지만, 노자와 장자는 유의 경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에게 모자라는 바를 계속 이야기 했기때문이라는 것이다.

 

@ 추남 애태타

 

[244]

한마디로 화이불창이다. 이것은 라는 자의식에서 완전히 풀려난 상태를 의미한다. 물 같은 상태라는 뜻이기도 하다. 둥근 그릇에 들어가면 둥글어지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지고, 추우면 얼고, 더우면 증발하고 이것은 완전히 빈 배가 된 상태 ,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가는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247]

15.

"죽음과 삶, 생존과 파멸, 성공과 실패, 가난과 부유함, 현명함과 어리석음, 비방과 칭찬,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이것이 모두 사물의 변화요 의 운행으로서 우리 앞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우리의 앎으로는 그 시원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248]

16.

그러면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평평한 것은 물이 완전히 고요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은 안에 고요를 간직하고 밖으로는 출렁거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을 이룬 사람은 조화를 이룬 사람으로,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나지 못합니다.”

 

[249]

캐나다 록키 산에 있는 루이스 호수가 제 아름다움을 선전하고 내세우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듯이

----> 아름다운 것들은 절대 뽐내지 않는다. 자신을 알아 달라고 다른 이에게 애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은 초연하다.

 

@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252]

18.

덕이 뛰어나면 외형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안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습니다. 이런 것을 '정말로 잊어버림'이라 합니다.

 

*****

[254]

외모에 마음 쓸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외모 때문에 성형외과의 문전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마음을 쓰고, 신경을 써야 할 내면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이니 어찌 된 일이냐는 것이다. 이처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으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한심한 진짜 잊어버림이라는 이야기 이다.

 

[255]

성인은 자신을 하늘에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 하늘이 알아서 먹여주고 길러 주는데, 일부러 설치면서 허우적거릴 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다.

 

@ 무정과 유정

[256]

20.

성인은 사람의 모양을 지녔지만 사람의 정이 없습니다. "내가 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다는 것. 언제나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삶에다 억지로 군더더기를 덧붙이려 하지 않는 것을 이름일세."

 

[257]

23.

도가 얼굴 모양을 주고, 하늘이 형체를 주었으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는데 지금 자네는 자네의 신을 겉으로 드러내 놓고 정력을 쓸데없이 소모하면서, 나무에 기대어 신음하고, 책상에 기대어 졸고 있네.

 

*****

[258]

장자는 그것을 감정을 넘어선 경지,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경지로 보아 이런 경지에 도달해야 정말로 싱싱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259]

일상적인 분별심,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의식'에 매달려 안달복달, 시비곡직, 좋고나쁨을 캐고 앉아 있으면 결국 혜자처럼 나무에 기대어 신음하고 책상에 엎드려 졸기나 하는 창백한 지성, 활기 잃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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