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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0일 08시 46분 등록

대학 입학 당시는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기 전이었다. 몇 개월 동안 영등포 전철역에 내려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통학을 해야 했다. 시장 주변에는 동시 상영관이 몇 군데 있었다. 관람료가 개봉관에 비해 저렴했고 무엇보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데 동시 상영관만큼 좋은 곳이 없어 몇 번 간 적이 있다. 역 앞에는 수컷의 본능적 욕구를 배설할 수 있는 홍등가도 있었다. 붉은빛 조명을 받으며 유리창 안에 앉아 있는 반라의 여성들을 보고 잠시 야릇하고 몽롱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는 풋내기 촌놈이었으니 그런 풍경이 너무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시간이 한 참 흘러 다시 영등포에 발을 딛게 되었다. 이제는 경유지가 아니라 터를 잡았다. 영등포에 서울 지사를 개소한 지 2개월이 지났다. 시내 중심의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무실 인근에는 유명 백화점과 거대한 쇼핑몰도 있다. 쇼핑몰은 요즘 같이 추운 겨울 하루 종일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이다. 쇼핑뿐만 아니라 영화관, 대형서점, 유명 커피 전문점등이 입점해 있고 주전부리부터 시작해 뽐내며 연인과 와인 한 잔을 곁들일 수 있는 레스토랑도 있다. 하지만 그 곳에서 걸어서 오 분도 안 되는 곳에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영등포 역에서 문래 사거리 방향으로 잠시 걷다 보면 도로 양 옆에 파이프, 철판 등의 철강제품을 자르고 판매하는 공장과 철제 도소매업체들이 늘어서 있다. 1970년대부터 철강산업 메카라고 불리었다고 하는데 이름만 그럴 듯 할 뿐 소규모 영세 업체가 대부분이다. 출 퇴근시 이 길을 걸으면 시간이 1970년대에서 멈춰진 착각을 받곤 한다. 보도 바로 옆 한 공장에서는 한 겨울에도 60이 넘어 보이는 분이 땀을 흘리며 붉게 달궈진 쇠를 망치로 두들긴다. 어린 시절 길가에서 보았던 익숙한 대장간 풍경이다. 개발의 바람으로 주변의 많은 공장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 백화점, 그리고 사무실 빌딩이 들어섰지만 아직도 주변 곳곳, 골목 군데 군데에 철재 상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공장에서는 매일 쉬지 않고 무쇠, 파이프, 철판등과 같은 철재를 절단하고 두드리는 소리로 조용할 날이 없다. 그 지역 주민한테는 소음이지만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는 삶의 활력을 주는 엔진 소리다. 사창가도 쇠락의 길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나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유지한 채 생존하고 있다. 과거와 현대가 동시에 공존한다.

 

몇 년 전에 철재 공장 주변에 고층 사무실 빌딩이 세워졌다. 빌딩 바로 앞에는 중소기업 메카라는 시금석이 세워져 있다. 시금석이 말해주듯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중소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어떤 층은 무려 30여 회사가 들어와 있다. 10명 안팎의 직원들이 근무하는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다.  예전에는 연봉뿐만 아니라 근무지, 근무환경, 복리후생 등 대기업과 차이가 나는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와 몇 개월을 지내보니 중소기업은 그들 나름대로 생존의 방법이 있으며 적게나마 어떻게든 영업이익을 내기 위해 대기업 못지 않게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 직원이 필요해 온라인을 이용하여 채용 공고를 냈다. 나이 성별 불문하고 공고를 냈는데 조회수만 많을 뿐 이틀이 지났건만 고작 3명 만이 이력서를 보내왔다. 20명 남 짓 되는 중소기업에 근무지나 근무 환경이 지원자의 기대수준에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원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적어 다소 실망을 했다.  

 

얼마 전, 모 일간 신문에서 청년 실업이 사상 최악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신문은 통계청의    2013 12월 연간 고용동향 자료를 인용하면서 20~30대의 취업률은 전년 대비 감소한 반면, 50~60대의 취업률은 증가했다고 했다. 고교 졸업생 중 약 80 % 가 대학을 간다고 하니 졸업 후 취직 문은 좁은 것이 현실이다. 특히, 공기업이나 대기업 쏠림 현상이 두드러진다. 대기업 채용 인력은 제한되어 있어 소위 명문대 생들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대기업 또한 업무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그런 명문대 생을 선호하는 듯 하다. 대기업 입사하기 위해 명문대 가는 경우도 있다. 슬픈 현실이다. 실제로 정유회사를 상대로 영업을 한 적이 있는데 임원부터 팀장, 팀원 대부분이 S대를 비롯 사립 명문대 출신이었다. 젊은 직원의 경우, 별 이유가 없었다. 월급 많이 주고 근무조건과 종업원 복지제도가 좋다는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를 안타깝지만 냉정히 인식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렇게 잘난대기업도 공급체인 구조상 중소기업이 없으면 생존하기 힘들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작은 회사에 일해보니 대기업처럼 직무가 명백히 분화되지 않아 처음에 혼란스러웠지만 그 속에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어 또 다른 재미를 느낀다. 영업뿐만 아니라 재무, 인사 등 관리업무를 배우고 익히는 멀티기능을 할 수 있어 좋다. 목표를 원대하고 잡고 자신감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넘어설 수 없는 사회적 통념이나 의 장애물이 있다면 다른 길을 모색해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추운 겨울 바람을 막아주는 사무실에서 앉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받아 들이는 사람이 있다. 단지 일할 수 있는 기쁨에 다른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절실함과 아쉬움 때문에 아무 데나 들어가 일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자신과 현실을 파악해 보고 거기에 자신을 너무 관대하게 또는 대단하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 보았으면 하다. 어디서 일하던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 재미를 붙이고 성심을 다해 일을 한다면 거기에 더 큰 보람과 의미가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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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2 19:22:31 *.186.179.86
오라버니, 멀티플레이하며 붕새처럼 유유자적 일 속에 몰입하여 날고 계신 모습 보기 좋아요 ~
늘 크게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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