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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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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0일 11시 31분 등록
그 후 열자는, 배움의 첫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가, 3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 먹이를 사람먹듯이 하면서, 세상사의 좋고 싫은 집착도 사라지게 되고, 자신을 쫏고 새기면서 (갈고 닦으면서) 소박함으로 돌아가, 무심히 홀로 서서,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흔들림이 전혀 없었으니, 그는 이렇게 일생을 마쳤다.
- 장자 '응제왕'편 중에서


인생이란 늘 우연히 찾아온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필요한가 봅니다. 어제 일요일, 저는 성당에서 봉사단체 총무를 덜컥 맡았습니다. 봉사단체라고 하여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성당 진입로 비탈진 오르막길과 주차장에 쌓이는 눈을 치우는, 이른바 몸으로 뛰는 "노가다" 봉사단입니다. 30대 이상의 남성분들 명단이 적힌 종이를 받았습니다. 제가 맡은 총무의 역할은 눈이 오면 미리미리 제설작업 할 분을 찾는다고 단체문자를 보내는 일입니다.

지난 연말 성탄 즈음에 고해성사를 보려고 성당에서 줄을 서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보다 4~5년 선배로 보이시는 분께서 종이와 펜을 들고 돌아다니시더군요. 저에게도 다가오시더니 "눈이 오면 성당 오르막과 주차장 제설작업을 함께 할 남자형제님을 찾고 있습니다"라며 종이와 펜을 건네셨습니다. 흔쾌히 웃으며 연락처를 적어드렸습니다. 그랬던 인연이 발단이 되어 어제 덜컥 총무가 되었습니다.

당장 월요일 오늘, 새벽부터 눈을 치웠습니다. 일흔이 훌쩍 넘어보이시는 어르신 두 분, 50대 어르신 한 분, 저와 연배 비슷한 한 분과 저와 성당 신부님까지 총 여섯명이 모여 새벽 5시부터 눈과 한판 붙었습니다. 저만 출근 준비로 7시에 빠져 나와서 제설작업 마무리를 보지는 못했지만, 거의 다 치워진 도로와 주차장을 보며 집을 향했습니다.

일년이 넘게 한 주에 두 세 번씩 헬스장에서 운동을 해 왔지만, 제설작업은 만만치 않은 노동이자 운동이었습니다. 머리에 쓴 야구모자부터 양말까지 눈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두시간의 노동으로 달아오른 체열로 온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허리와 다리도 뻗뻗해지는 것이 '오늘 일 좀 했구나' 싶습니다.

제작년 12월, 9기 변경연 연구원을 지원하겠다 마음먹을 때, 저는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뿐이었습니다. 144일간의 파업과 복귀 등,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터의 모든 것들에 적응해 가기에 너무도 지치고 있었습니다. 허망함 뿐이었습니다. 지난 일년을 되돌아 봅니다. 연 초에 연구원 지원서 쓰기부터 시작하여 피말리는 2차 레이스, 구본형 사부님의 장례식, 한 주도 빼놓지 않고 진행해 온 글감옥. 아!  그런 중에 쌍코피도 몇번 흘려보았고, 난생처음 안과도 가보았고, 허리통증으로 한의원도 곧잘 찾았습니다. 매 주 책을 읽지만 기라성 같은 작가 선배들의 지혜가 늘 잡힐듯 말듯 제자리 맴도는 것 같고, 또 매 주 써내려간 제 글을 보고 있자니 대체 번뜩이는 필력이 언제쯤 생길런지 묘연하기만 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새벽의 제설작업은 마치 누군가 오랫동안 저를 보고 있다가 '너를 위해 준비했어'라며 내민 선물 같았습니다. 장자에서 집으로 되돌아가 "일상"으로 수련을 시작한 '열자'처럼, 이제 저도 일상속에서 수련하는 시간에 접어들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머니 뱃속부터 다녔던 성당이지만, 오늘, 소복히 쌓이는 눈 속에서 삽질과 빗자루질의 터전으로서의 성당 풍경이 퍽 다르게 다가옵니다.

연구원 첫 해 수련과정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14년 첫 책 준비만으로도 가슴벅찬 일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땀과 체열과 웃음과 인사로 이루어진 저의 "일상"을  수련장으로 삼아보겠습니다. 분명 쳇바퀴 같은 일상이 영원히 지속되는 연옥 미궁으로 느껴지질 날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연구원 수련을 통해, 또 장자를 통해 배웁니다. 고민과 근심이 제 일상을 뒤덮을 때면 "쓸어내는 작업"이 필요할 때입니다. 마치 눈이 오면 쓸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눈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저의 삽과 대빗자루는 준비 되어 있습니다. 장자의 제자 열자가 그러했듯, 일상속에서 근심과 걱정이 밀려올 때면 '눈이 오는구나!' 하며 삽질과 빗자루질을 해보렵니다. 저 또한 변경연 제자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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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2 18:47:57 *.209.223.59

매일 보는 아이가 어느새 성큼 자라 눈을 비비게 되는 것처럼

번뜩이진 않더라도,

만만치않은 공력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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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4 13:28:49 *.65.153.71
감사합니다. _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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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2 19:00:09 *.186.179.86

올해는 형선이가 열자 하는거야?

아내가 엄청 바빠질 수 있으니....

두 사람은 정말 보기 좋은 친구이자 동지이자... 연인^^

잔잔한 일상의 깨우침이 묻어나는 글 좋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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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4 13:29:59 *.65.153.71
결과는 모르죠 뭐.. ^^
누님 이번 칼럼 감각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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