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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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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3일 00시 36분 등록

내 인생의 글쓰기

용택, 김원우, 도종환, 서정오, 성석제, 신달자, 안도현, 안정효, 우애령

나남 출판사

 

 

1. 지은이에 대하여

공저: 김용택, 김원우, 도종환, 서정오, 성석제, 신달자, 안도현, 안정효, 우애령

 

“내 인생의 글쓰기”는 지난 수년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펼친 어머니, 청소년 독서 강연회 연사들의 글을 묶은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작가이기도 한 그들은 독자들에게 자신이 겪은 문학과 삶 이야기를 생생한 육성으로 들려주었습니다. 강연장의 감동은 현장의 청중들과만 나누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사로 참석하신 분들의 글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한 편의 작품을 쓰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하는지, 글을 쓰며 느끼는 희열이나 내면의 고통은 어떠한지, 또한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 왔는지, 글 쓰는 이만이 알고 있는 그 고락을 듣고 싶었습니다.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민병우 ( 6페이지 에서)

김용택

시인. 1948년 임실에서 태어나 순창농림고등학교를 나왔다. 스물한 살에 자기가 졸업한 덕치 초등학교 선생이 되고 줄곧 고향에서 선생을 하고 있다. 1982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낸 21인의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 <섬진강> 8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소월시문학상과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도종환

부드러운면서도 곧은 시인. 앞에는 아름다운 서정을 두고 뒤에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를 두고 끝내 그것을 일치시키는 시인.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교과서 <어떤 마을>, 고등학교 교과서에 <흔들리며 피는 꽃> 등의 여러 편의 시와 산문이 실려 있어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서정오

안동교육대학을 나와 오랫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이야기를 써 오다가, 지금은 퇴직하여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특히 옛이야기 다시쓰기와 되살리기에 힘쓴다. 쓴 책으로 <옛이야기 들려주기><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옛이야기 1,2>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신화><옛이야기 보따리(시리즈)><언청이 순이> 등이 있다.

 

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학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084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등을 냈다.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2. 가슴을 무찔러 오는 글귀

 

김용택

p5

누구에게나 글쓰기는 두렵습니다.

첫 문장을 뽑아내기 위한 고통은 아이를 낳을 때의 그것과 진배없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그러기에 글 한 편, 그 마침표 찍을 때의 득의감이 천하를 다 얻은 성취감과도 비견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P12

헌책을 사서 읽기를 몇 년, 내 생각은 푸른 나무처럼 자라났고, 산처럼 솟았다.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은 복잡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각이 많아지고 머리속이 복잡하니, 자연히 그 복잡한 것들을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나의 글쓰기 시작이었다.

 

pp 17-19

그렇세 심심하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렇다, 정말이지어느 날이었다. 그 어느 날은 나에게 너무나도 특별한 날이 되어주었다. 그날, 그 먼곳까지 책을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 전집을 팔러 다니는 월부 책장수들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때 그 월부 책장수가 내게 처음 가지고 온 책은 유명한 <도스트예프스키 전집>이었다. 여섯 권 짜리였다. 판형이 넓고 글씨도 컸다. 들고 다니면 폼이 나는 책이었다. 두툼하고 멋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 책을 읽고 싶어서 산 게 아니라 책이 정말 근사하여 난생 처음 월부로 책을 사게 되었다. 책이 어찌나 두툼한지 배개를 삼아도 될 만 했다. 실제로 나는 그 책을 읽다가 베고 잠이 들기도 했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소설 중에서 나는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학대받은 사람들>에 심취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너무 낯설고 길고 비슷비슷해서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메모해 들고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해가며 책을 읽었다.

그때가 겨울방학 때였다. 낮에는 산에 나무하러 가고, 밤이되면 나는 그 책속으로 푹 바져 지냈다. 방학동안 밤을 새워가며 그 책들을 다 읽었다. 눈이 많이 온 날은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밖에 나가면 눈이 쌓이 산천은 참으로 눈이 부셨다. 방으로 들어와 밥 얼른 먹고 책을 보다가 화장실에 갈 일만 빼고는 책 속에 코를 박고 살았다. 책 여섯 권이 다 끝나가자 방학도 끝나갔다. 나는 놀랐다. 그 작은 책 속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숨을 쉬고 펄펄 살아있던 것이다. 그 작은 책 속에 그토록 가슴 아프고 기쁜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놀랍고도 놀라웠다. 책 속에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을 나는 숨이 막히게 따라다녔던 것이다.

 

pp 19-20

방학이 끝나고 집을 나서서 학교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내게 놀라웠다. 이상한 일도 다 있었다. 늘 보아왔던 강물이며, 빈 들판이며, 앞산이며, 느티나무며, 강물 속의 바위들이며, 마을의 가난한 집들이며, 그런 것들이 이상하게 새로 보였던 것이다. 고개를 들거나 휘둘러보면 늘 내 눈에 들어선 어제의 것들이 오늘 다 새로 보였던 것이다. 눈이 부실 정도였다. 나는 발걸음이 힘찼으며, 온 몸에 힘이 느껴졌다. 산과 강이, 모든 것들이 다 내 속으로 들어와 나는 자꾸 심호흡해야 했다. ! 저기 서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오늘 새로 보이면 그게 사랑이 아니던가. 나는 나도 몰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얻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세상은 살아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삶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그리고 손이 잡히지 않는 기쁨이 고개를 쳐들었던 것이다.

 

P 22

책은 꿀 같았다. 어떤 책이든 한 장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읽었다. 책을 읽다가 새벽이 되어 마루에 내려서면 코에 뜨거운 것이 떨어졌다. 코피였다. 꼼짝 않고 책을 읽으면 언제 밤이 되고 아침이 되는지 몰랐다. 어머님이 “밥 먹어”라고 부르면 얼은 일어나 밥 먹고 와서 또 책을 들었다. 변소에 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그렇게 헌책을 사서 읽기를 몇 년, 내 생각은 푸른 나무처럼 자라났고, 산처럼 솟았다.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은 복잡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각이 많아지고 머리속이 복잡하니, 자연히 그 복잡한 것들을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나의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p 23

어느 해였던가 모르겠다. 그렇게 책을 읽으며 인생이 신나게 되었을 무렵 아침 일찍 교실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나에게 씩씩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하며 아침인사를 했다. 일제히 나를 돌아보며 인사하는 아이들의 붉은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 아이들이 하나하나로 보였던 것이다. 그 전에는 아이들 30명이 모두 하나로 보였는데, 그날 아침 아이들이 한 명 한 명 따로따로 보였던 것이다. 그날 아침 나는 비로소 선생의 입구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나는 상기되었다. 즐거웠으며 행복했다. 나는 사람이 무엇을 하며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무렵 나는 비로소 내가 선생으로 일생을 보내기로 작심했던 것 같다. 나는 모든 희망을 버렸다. 무엇이 되는 것에 대한 것들을 모두 놓아버렸다. 이 아이들과 일생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날 것 같았다. 세상이 환히 개이고 마침내 내가 날개를 달았던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열중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신나고 재미있게 살았고, 집에 가면 책 속에 묻혀 지냈다. 농사일도 도왔고, 그 좋아하던 낚싯대도 버렸다. 내 생각은 커 갔다.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 가난도 가난이 아니었고, 나는 정말 이 세상을 다 안고 사는 큰 부자가 되었다.

 

p 24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도 써 보고, 시도 써보고, 동시도 써보고, 아무튼 글이란 글을 다 끼적거려 보았다. 글이, 글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게 그리 대수가 아니었다. 내 주위에는 글을 쓰는 사람도, 책을 읽는 사람도 없었다. 오직 나는 나 혼자였다. 그렇게 세월이 갔다.

 

p 25

책은 넘쳐났다. 나는 책값을 다 대지 못했다. 보고 싶은 책들을 다 사보지 못한 나는 일요일이면 몇 권의 책을 사고 나머지는 책방에서 읽었다. 잡지속의 시들을 나는 책방에 앉아 공짜로 읽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시대의 흐름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책을 통해 나와 우리 부모님들과 농민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의 분노와 울분과 기쁨과 슬픔을 써갔다.

 

pp 25-26

1981년 어느 날 밤, 나는 드디어 학교에서 숙직을 하며 <섬진강>을 썼다. 글을 써놓고 누구에게 보여줄 사람이 없는 나는 내 스스로에게 늘 묻고 또 대답해야 했다. 참으로 길고 긴 세월의 외로움이었으나, 그 외로움이 나를 단련시키고 나를 키웠다. 나는 나에게 감동할 수 밖에 없었으나, 그 감동이 사회적 객관화가 되기까지 나 혼자여야 했다. 몇 편의 시를 써 놓고 나는 나에게 감동했다. 이것이 시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동안 써 놓은 시들을 모아 원고지에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 원고지에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공책에 일기와 함께 시를 썼던 것이다.

 

시를 모아 창작과 비평사로 보냈다. 1982년이었다. 그해 가을 나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내 시가 실린 책 한 권을 받아보았다. 그 책 이름은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였다. 21인의 너무도 유명한 시인들 속에 내가 신작시인의 이름을 달았던 것이다.

 

pp 28-29

나는 시인이 되려고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시인이 되려고 시를 쓴 것도 아니다. 나는 책을 읽음으로써 내게 다가오고 일어나고 쓰러지는 온갖 생각들을 책을 통해 또 밀어내고 쓰러뜨리고 일으켰다. 절망과 좌절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으며, 나는 때로 절망으로부터 도망갔고, 정면으로 대들었다. 외로웠을 것이다. 나는 저문 강변을 따라 멀리 갔다가 어두워져서야 돌아와 내 방의 불을 켰다. 어둠은 길고 깊었으며, 아침은 빨리 왔다. 누군가를 기다렸다. 겨울 무구덩이 속의 무처럼 누군가를 기다렸다. 캄캄한 땅 속에서 나를 건져 갈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렸다. 빛이 없어도 때로 무순은 노랗게 자랐다. 달빛 아래 강물을 나는 수도 없이 건너다녔다. 물소리는 외로운 내 발목을 잡고, 내 발소리는 산이 잡아갔다. 그렇게 나를 꺼내갈 흰 손을 기다리던 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다. 산이 환하게 열리고, 강물이 산굽이를 희게 돌아왔다. 발등이 환했다.

 

p 29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지금도 산다. 그러기를 원했다. 어느 날 나를 찾아온 책들이 지금처럼 내가 살기를 원했다. 시퍼렇게 날 선 청춘의 각을 꺾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하기를 원했다. 그런 삶도, 그런 인생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책이 그렇게 나를 가르쳤다.

 

pp 29-30

사는 게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찍 알았다. 삶은 허망한 것이고 바람 같은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일찍 알았다. 별것이 아닌 삶을 살기 위해 사람들은 사람이기를 버린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그 어느 것에게도 머리 숙이기를 거부했다. 내가 머리를 숙이는 곳은 어린아이들이 노는 땅이었다. 저 무구한 어린이들의 모습이 내 앞에서 꽃이었다. 나는 그 꽃밭에 오래오래 산 것이니, 그렇게 되기를 원했더니, 마침내 내 삶은 그렇게 된 것이다.

 

p 30

책을 읽다가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많은 책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 저 책을 쓴 것이 사람들이지. 그렇다면 나도 …’ 그리고 나는 글을 써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종환

p 56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글을 쓰게 되면 우리의 눈은 대상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간파해 내는 눈을 갖게 된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되는 대상 하나 하나의 긴밀한 만남을 가지기 시작한다.

 

p 59

그 꽃을 보며 마음속에서 스며 나온 알 수 없는 희열의 정체는 무엇일까?

생명력. 생명력일 것이다. 그 생명력이 곧 창의력의 씨앗인 것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푸른 계곡물, 지평선 가득히 출렁이는 황금물결, 댐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물줄기, 이런 것들은 가슴속에 그렇게 출렁이는 것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댐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마음 깊은 곳에 쏟아 놓고 싶던 것들이 넘실대며 고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pp 59-60

어느 날 문득 일상 속에 묻혀 사는 나를 다시 보게 만드는 사물, 자연현상, 일을 만나고 그것들이 그 일상과 적당한 거리를 만들게 하고, 그 거리에 서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만드는 것 그것이 글인 것이다.

 

p 62

시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소리를 귀담아 들었다가 그걸 베껴 적은 일이라고 말하는 시인이 있다. 자연이 주는 소리를 귀담아 듣는 일, 자연에게 나를 보여주면 자연이 알아듣는 일, 그런 자연과의 교감, 정경교융(情景交融)하는 행위가 곧 글을 쓰는 일인 것이다.

 

p 64

글을 쓰려는 이들 중에는 의외로 삶에서 받은 상처를 오래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해와 사랑의 부족, 그 결핍으로 인해 받았던 상처, 내면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소외의 기억, 소통의 부재 그런 것이 글을 쓰게 하는 원인인 경우가 있다. 이런 상처와 소외와 고통이 도리어 재산이 되는 분야는 많지 않다. 그러나 문학의 토양은 상처다. 상처가 곧 스승이다. 결핍이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고 내면 깊숙한 아픔이 시의 밭이다. 그 아픈 기억들을 아름다운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 장르가 문학인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상처를 치유하고 남의 아픔을 위로하는 의료행위인 것이다.

 

p 65

글을 쓰는 이들 중에는 개인적 시간, 개인적 공간 속에 오래 갇혀 지내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언가를 쓰고 또 쓰는 행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끝없이 자기를 알리고 싶어하는 행위이기도 한다. 자기표현이야말로 자기존재의 확인인 것이다. 부재의 시간 속에서 소통을 향한 신호를 끝없이 날리는 일이다.

 

시는 정신적 허기를 채우기 위한 행위이며 결핍된 언어에 대한 보상이다. 대화다운 대화에 대한 욕구,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p 67

감정의 덩어리 자체는 아직 글이 아니다. 그러나 감정이 여과과정을 거치면서 문학적 정서로 변화하고 포에지는 포엠으로 변한다.

(포에지poesy: 시가 구체적인 작품으로서 만들어질 때까지의 시 정신 / 포엠pome: 불어. 시인이 직접 만들어낸 구체적인 시작품)

격렬하거나 뜨겁거나 휘몰아치던 감정이 차분해지고 그 감정의 덩어리들을 거리에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 뒤에 행동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간다.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을 통해 감정에 이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면 나를 울게 하던 감정이 다른 사람을 울리는 힘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울림이다.

 

p 68

이른바 남을 울리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글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은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우리가 글 쓰는 사람을 존중하는 이유도 그들이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슴 한편에 자리한 소근거리는 꽃봉오리 같은 마음”, “미풍에 흔들리는 나뭇잎만 봐도 눈물이 핑 도는 벅찬 감정들이런 감저은 참 소중한 것이다. 이런 정서가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 시인들 중에도 이런 소곤거림과 울림이 사라져버려 메마르고 건조한 글만 생산해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감정의 파동이 없으면 이미 가슴속의 시인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이 소중한 감정이 센티멘털의 차원으로 떨어지지 않고 정서다운 정서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가꾸고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는 사이에 혼자서 끙끙 앓았던 내면의 세계가 하나씩 맑은 영혼으로바뀌게 될 것이다.

 

글은 삶의 고통 속에서 늘 곁에서 애인이 되어주는 존재이다. 내 속에 들어 있는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이다. 내 하소연을 들어주고 내 투정과 불만을 받아주며 나를 위로해 주는 애인인 것이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시를 쓰게 되면 시는 내가 심고 가꾸고 보살펴야 할 밭이고 다시 내게 들려 주는 향기이고 꽃이 되어 줄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고 시를 짓고 문학을 하는 것이다.

 

pp 70-71

지금까지 우리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아왔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해 왔다.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지만 관찰의 수준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물론 전에도 나무를 보고 새도 보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본 것이지 하나하나 개체로서의 긴밀한 만남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게 되면 우리의 눈은 대상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간파해 내는 눈을 갖게 된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되는 대상 하나하나와 긴밀한 만남을 가지기 시작한다. 대상과 나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장미꽃이 나와 새로운 관계를 갖기 시작하는 장미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 사신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이다.

 

서정오

 

p 92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작가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오늘 일터에서 느낀 즐거움이나 억울함을 내 나름대로 글로 써 본다면, 이미 당신은 훌륭한 작가다. 비오는 일요일 아침 문득 생각난 옛 동무의 이름 석 자 가만히 불러보고 마음에 묻어 둔 말 네댓 줄 끼적여 본다면, 이미 당신은 훌륭한 시인이다. 어릴 적 할머니한테서 들은 옛이야기 한 자리 떠올려 여섯 살 배기 아이에게 나긋나긋 들려준다면, 이미 당신은 훌륭한 이야기꾼이다. 달리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이제는 정말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한다. 농사꾼과 행상과 어부와 노동자가 글을 써야 한다. 공연히 어려운 말로 젠체하는 글이 아니라, 삶 속에서 절로 터져나오는 내 생각과 느낌과 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글을 써야 한다. 그리하여 글이 온 세상에 강물처럼 흘러넘쳐야 한다.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글을 읽어야 한다. 초등학생이 쓴 글을 국회의원이 읽고, 농사꾼이 쓴 글을 대학교수가 읽고, 염전노동자가 쓴 글을 장관과 법관이 읽어야 한다. 그리고 감동하며 배워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바꾸어 말해도 물론 마찬가지다.

 

p 94

작가는 잠수함 속의 토끼가 돼야 한다. 잠수함 속의 토끼를 두면, 위험이 닥쳤을 때 그것을 미리 느끼고 경고해 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토끼가 사람보다 위험 신호에 더 예민하기 때문이다.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작가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병들어 가는지, 어디서부터 허물어져 가는지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펴서 그것을 대중에게 두루 알려줘야 한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경계하고 경고하고 위험에 맞서 싸우는 일, 이것이 바로 작가가 할 일이다. 눈앞의 위험을 못보고, 아니면 보고도 모른 체하고 먼 산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말놀음이나 즐기는 것은 작가가 할 일이 아니다. 대중들이 이해 못하는 어려운 한자말이나 서양말 몇 마디로 행세하는 것도 작가가 할 일이 아니다. 예로부터 작가와 같은 지식인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제대로 가지리 못했을 때, 그 사회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말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몸소 글을 쓰는 작가가 돼 달라고, 다시 한 번 정중히 부탁한다.

 

 

안도현

 

pp 144-145

소총 끝에 꽂힌 예리한 대검이 어둠 속에서도 번쩍거렸다. 교문 앞으로 끌려가 꿇어앉혀진 우리의 가슴팍과 무릎, 정강이로 사정없이 군홧발이 날아왔다. 변명의 몸짓이나 항의의 말 한마디 못하고 우리는 얻어맞기만 했다. 태어나서 남으로부터 그렇게 많이 맞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 그날 밤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질척거렸다. 퉁퉁 부어오른 정강이뼈에 요오딩크를 바르며 나는 분노보다는 서글픔을 생각했다. 이제껏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치욕이 내 이십 대 초반을 적시며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세상에는 나 혼자 걸을 수 없는 길이 많다는 것을, 내가 꿈꾸는 문학도 골방에 앉아 혼자 끙끙댄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 알았다.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피해 가지 않고 지금, 이곳에서의 시를 쓰겠노라고 일찌감치 나는 나에게 약속했다.

 

스무살의 철없이 팔팔한 문학청년에게 역사는 치열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을 그날 저녁에 가르쳐 주었다. 우리들의 등을 짓누르던 역사의 무게는 그 이후 내가 살아가야 할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되었고, 나는 그때 역사로부터 한 수 배운 덕분에 오늘 이만큼이라도 걸어왔다.

 

pp 147-148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 들어 있는 시들은 주로 이십대 초반에 썼다. 그 무렵에는 시를 쓰려고 볼펜을 잡으면 꽃 피는 봄 대신에 눈 내리는 겨울이 먼저 떠올랐고, 꼼짝 않고 누워 있는 들판 대신에 들판을 태우며 가는 들불이 선하게 떠오르곤 하였다. 하지만 뭔가 해보려고 일찍 일어나 새벽밥을 먹고 나서기는 했지만, 뭔가가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뜨거운 결의에 차 있으되 결의의 대상이 불확실한 내 젊은 날의 일기장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집 전체의 정서보다 시집의 제목이 한 발 앞서간 것은 아닌가, 그래서 하나의 잘 읽은 과일이라기 보다는 풋과일처럼 떫은 맛이 군데군데 많이 나는 시집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p 155

몇 해 전에 전주 근교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완주군 구이면이라는 지명을 따서 친구들이 붙여 준 이름이 구이구산(九耳九山)이다.

 

문학은 여전히 외로운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외로움의 거름을 먹지 않고 큰 문학이 있다면 그 뿌리를 의심해 봐야 한다. 글을 쓰는 일은 외롭기 때문에 아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3. 내가 저자라면

 

시인이 이야기하는 글쓰기 책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낸 책이다. 평소 좋아하는 과자들이 제법 많이 들어 있는 종합선물세트 처럼 책을 읽었다. 물론 평소 좋아하는 작가들의 글만 눈에 들어왔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을 사랑하고 전봉준을 노래한 안도현을 존경한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은 내 생애 처음 구경한 시집이었고 또한 시인의 서정적인 시어에 푹 젖었던 추억이 있다. 서정오 선생은 옛날 이야기를 소개하는 선생님으로 평소 알고 있었다.

 

이 책은 내 마음속 시인들과 작가들의 고백록이다. 이제 비밀을 알았다. 글을 만든 것은 결국 글이었다. 몇 년이고 글 속에서 헤엄치다 보니 어느 사이 글을 쏟아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글. 결국 나는 글과 글 사이의 숙주일 뿐이다. 글은 나를 찾아와 나를 통해 새 글을 낳는다.

 

안도현은 외로움이 글을 쓰는데 필수불가결하다고 하였다. 외로움을 기다려 글은 나에게 다가온다. 글은 질투 많은 연인이다.

 

새해 나의 영순위 목표는 글쓰기 이다. 그러나 이제 목표를 달리 한다. 영순위는 외로워지기 이다. 그 때 글이 나를 찾아와 새 글을 잉태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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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2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file 제이와이 2014.01.28 2443
1031 [2-24]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녹색서적, 월든 타오 한정화 2014.01.28 2026
1030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_나탈리 골드버그 file 라비나비 2014.01.28 1965
1029 (No.35)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한문화 - 서은경 file 서은경 2014.01.28 2534
1028 No 39. 베껴쓰기로 연습하는 글쓰기책 (명로진) file 미스테리 2014.01.28 2729
1027 #35. 기막힌 이야기, 기막힌 글쓰기 / 최수묵 쭌영 2014.02.02 7146
» 내 인생의 글쓰기 - 김용택, 도종환, 서정오, 안도현 유형선 2014.02.03 2220
1025 (No.36) 탁정언 전미옥 [일하면서 책쓰기] 살림 - 서은경 file [2] 서은경 2014.02.04 2739
1024 # 34. 삶은 홀수다(김별아, 한겨례출판) 땟쑤나무 2014.02.04 2914
1023 <한승원의 글쓰기 비법 108가지> file 제이와이 2014.02.04 2229
1022 No 40 .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file [2] 미스테리 2014.02.04 2957
1021 #36. 과학,일시정지 / 가치를 꿈꾸는 과학교사모임 쭌영 2014.02.10 5118
1020 (No.37) 헤르만 헤세 [데미안] 더클래식 - 서은경 file 서은경 2014.02.10 2986
1019 #35.몽테뉴 수상록(1) 땟쑤나무 2014.02.10 4527
1018 내 인생의 첫 책쓰기_오병곤 홍승완 유형선 2014.02.10 2408
1017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file 제이와이 2014.02.10 2786
1016 [2월 2주] 구본형의 The Boss: 쿨한 동행 file 라비나비 2014.02.10 1898
1015 No 41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1) file 미스테리 2014.02.10 2553
1014 #37. 도와주세요. 팀장이 됐어요 / 신승환 쭌영 2014.02.16 2500
1013 No 42.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2) file 미스테리 2014.02.17 13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