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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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이에게
개똥아, 안녕. 오늘부터는 우리가 미리 지어둔 너의 태명을 부르며 편지를 쓸까 한다. 설 연휴 첫날, 상쾌하고 산뜻한 향을 내는 천리향 꽃이 피었고, 분홍색 겨울꽃 시클라멘은 누런 잎이 늘어났구나. 베란다정원의 달라진 점을 살펴보는 건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하는 나의 일과야. 어제 물을 듬뿍 주었는데도 누래지니 시클라멘은 아무래도 햇빛이 부족한가보다. 내가 좋아하여 내 집에 초대한 생명인데 제 빛깔과 모양으로 곱고 싱그럽게 피어나지 못하고 있어. 이해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데 나는 내 식으로 이 식물을 사랑하나보다. 그런 사랑은 폭력일텐데 말이야.
새벽에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봉지커피 두 봉다리를 털어 넣고 만든 입이 쩍쩍 붙는 다방커피를 아직 끊지 못하고 있어. 길티 플레져지. 나처럼 겁많은 사람이 새벽거리에 커피 사러 편의점에 나갈 때도 있어. 자신이 화단에서 남이 버린 꽁초 주워 피는 중독자인 듯 느껴지지. 남들은 위가 상한다 어쩐다 뭐라 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아. 그 모든 잔소리를 감안해도 내게 주는 즐거움이 크거든. 하지만 너를 생각하면 찔린다. 너를 만나려면 커피를 끊어야 할까? 의사가 마시지 말라고 할 때까지는 그냥 마시려고 해. 스물 아홉 살 때부터의 습관이야. 임산부에게도 하루에 커피 딱 1잔은 괜찮다고 하니까, 또 일어나서 아무도 없는 새벽 침묵 속에서 커피 마시며 보내는 이 시간을 내가 하루 중 제일로 친다.
우리가 생각해둔 태명은 3개야. 개똥이, 노을이, 산(山). 오늘은 이 이름의 이야기를 너에게 말해줄께. 노을, 산, 깨똥이 순서로 말해볼께.
노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고, 산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거야. 두 개의 태명 노을과 산은 <원하는 아이를 낳는 영혼 태교 NURTURING YOUR BABY'S SOUL > 엘리자베스 클레어 프라빗(Elizabeth Clare Prophet)의 책에서 연유한 거야. 저자는 다섯 아이의 어머니인데 영성가야. 임신 전에 몸과 마음을 정화하면 미래의 아이에게 전달해 줄 빛을 늘일 수 있고, 아직 임신하기 전에도 미래의 아이와의 영혼의 교류가 가능하다고 말해. 임신 전 석 달, 초기 석 달, 중기 석 달, 후기 석 달의 기도의 방향이 틀려져. 임신 전에는 몸과 마음의 정화를 위해, 두뇌와 신경관이 발달하는 초기에는 영혼과 정신을 위해, 근골격이 발달하는 중기에는 몸의 완성을 위해, 후기에는 출산에 관련된 모든 이들(산모와 아기, 의료진, 가족)을 위해 기도하라고 해. 차크라라든가, 보라색 불꽃 기도 같은 걸 이야기를 할 때면 이 사람이 서양인이 아니라 인도의 요기 같은 느낌도 들어. 그녀는 태아의 발달단계와 보석이나 꽃 같은 아름다운 것들을 수집하며 태교책을 미리 만들길 권고하지. 너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네가 아직 잉태되기 전에 보내게 된 근거가 되는 책이야. '아기를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것을 무한대로 확장시켜보는 것이다' 라는 구절이 나와. 나는 노을을 꼽았어. 이 생각을 해 둔 건 2008년이야. 네 아빠는 2012년 1월에 만났으니 옛날 옛날 한 옛날의 이야기야.
노을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볼 때마다 어김없이 행복해지는 자연이야. 신비로운 시간이야. 노을 속에서 나는 내 웃음의 최상급을 웃을 수 있어. 산을 타고 난 뒤, 오래 걸은 뒤, 절을 삼천 배쯤 한 뒤 웃음과 비등하다. 아, 꽁깍지 시기의 웃음이 더 빛나긴 하지만 그건 비정상적이고 비일상적인 상태라 열외. '원망하고 서글퍼하는 마음이 미소짓는 성품으로 바뀌도록 정진하거라' 하셨던 스승님의 말씀을 생각한다. 안과 밖을 향해 전 존재로 웃기, 어쩌면 내 생의 목적일지도 몰라. 어릴 때 살던 집은 서향집이어서 마루에 앉아 오랫동안 노을을 볼 수 있었어. 철새들이 대열을 지어서 날아가고, 제비 부부가 열심히 벌레를 물어오는 걸, 삐죽이 솟은 감나무, 추자나무가 단풍 드는 걸 노을 배경으로 보곤 했어. 노을을 보면 마음이 아픈데 그 느낌이 싫지가 않아.
어린왕자의 별에서는 하루에 사십 몇 번의 노을을 볼 수가 있고, 그걸 보려고 의자를 옮겨 앉는다는 구절에 절절이 공감하지. 나도 그랬을 거야. 나는 노을 지는 많은 길을 걸어보고 싶어. 유럽여행을 상상할 때면 에펠탑이 멀리 보이는 강가 벤치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프라하의 카를교 위나 붉은 지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하는 장면이 떠올라. 여자를 사랑하여 인간이 되고픈 천사가 나오는 영화 맥 라이언과 니콜라스 케이지 <시티 오브 엔젤>에서는 인간계에 살던 천사들이 노을질 때 일제히 바닷가로 나가는 장면이 나와. 내가 천사라도 그렇게 할 것 같아.
아빠와 연애할 때 우리는 노을이 지기 때문에 키스를 할 때가 많았어. . ‘노을 지니까 뽀뽀해요’ 라고 내가 지르지. 한강변을 걷다가, 산에서 내려오다가 말이야. 나는 산을 종일 타고 난 뒤에 네 아빠가 내 앞에서 걸어가는 산길을 뒤에서 내려올 때 무한행복감을 느끼곤 했어. 산과 물이 보이는 곳에서 노을이 질 때 청혼을 받고 싶다는 건 나의 오랜 로망이야. 산은 나도 좋아하는 것이지. 하지만 나에게 산은 특별히 에너지가 고양되었을 때 접근할 수 있는 곳이야. 네 아빠는 노을 질 때를 기다려 내게 청혼을 해 주었단다. 우린 2012년 1월 26일날 만나서 2013년 1월 26일에 청혼이 있었어. 나는 아주 행복했지.
저녁노을 뿐만 아니라 아침노을도 좋아한다. 융의 자서전에 보니까 말이야. 융은 아프리카 여행을하면서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오두막 앞에 의자를 꺼내놓고 아침노을 속에 잠겨 있었다고 했어. 나는 아침노을과 저녁노을에 자주 노출되는 삶을 살고 싶어. 새벽푸른빛 속에서 일어나 내 중심에 굳게 서서 나를 곱고 싱그럽게 피워내는 시간을 가진 후 아침노을을 보고 싶어. 그 노을은 하늘이 보내는 박수나 합창, 응원과 축복의 춤 같아. 내 안에도 노래와 흥이 가득해.
산은 네 아빠에게는 나에게 노을 같은 대상이야. 나도 산을 좋아하지만 그에게 산만큼은 아닌 듯 해. 산에 대해서는 네 아빠의 10대 풍광을 말해주면 되겠구나. 그의 10대 풍광 중 3개가 산에 대한 것이었어. 그는 주말마다 근교 산에 다니면서 건강을 다지고 싶어해. 또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니고 싶은 만큼 혼자서 여행을 하고 싶은데 산에 가는 거야. 산 옆에 살고 싶어해. 북한산을 그리워했어. 거긴 내 직장인 인천과 너무 멀어서 우린 남산 아래에 집을 얻었지. 서울 야경을 보고 남산의 계절 변화를 즐기지. 그는 산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서 내가 힘들 때 근처 화원에 나가는 것처럼 등산장비를 쇼핑해. 굉장히 재미있나봐. 우리가 결혼했을 때 그는 나랑 산에 같이 다니려고 등산화를 선물해주었어. 가벼운 스틱도 마련해두었지. 직장의 수요산악회에서 산에 다닐 때 무척 행복해했어. 야간근무를 마치고 9시에 퇴근하면서 집에 가서 자는 대신 바로 북한산으로 출발하는 날이 많았지. 지하에서 일하는 그에게는 햇빛을 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자연 속을 걷는 게 커다란 쉼인가봐. 당신한테 가장 좋아하는게 어떤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지체없이 산을 말했어.
나도 산을 좋아한단다. 하지만 나에게 산은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사는 곳이지. 엄마의 고향은 평균 해발 고도가 220미터야.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이 갈라지는 지점이야.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이들이 꼭 거쳐가는 산이 있어. 뺑 둘러 산이 있는 풍경이 나는 익숙하고 편안해.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노량진과 신촌에 살았어. 불안했어. 지하방은 멀미 났어. 그런데 관악산 아래로 오니까 마음이 탁 놓이는 거야. 산 때문이었어.
아빠는 북한산 아래 우이동에 있는 집에서 살아보고 싶어해. 할머니도 일을 그만 두면 그 집에서 살고 싶다고 말씀하셔. 북한산이 바로 보이는 곳이야. 7년 전에 폐암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아주 사랑하셨던 집이야. 너른 베란다가 무너질까 걱정될 정도로 식물을 많이 길렀고, 할머니가 늦으면 할아버지가 버스정류장에 앉아 기다리셨댔어. 암이 재발되기 전이었어. 할머니는 그 집에 살았던 기간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었다고 회상하셔. 지금 69세인 할머니는 최장 2년 정도 더 일을 할 수 있겠다 예상하셔. 일을 그만두어야 그 집에 살 수 있어. 할머니는 시간이 생기면 소망하셨던 공부를 하고 싶어하셔.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과정까지 하실거야. 그게 할머니의 커다란 소망임을 알기 때문에 아빠와 나는 꼭 그 꿈을 이루시도록 도와드리고 싶어. 할아버지도 안 계신데 혼자 사시게 하고 싶지가 않다. 우리가족 아니면 삼촌가족이 같이 살았으면 해.
그런데 내가 휴직을 하지 않는다면 그 집에 살 희망은 없어 보여. 내 직장은 인천이고, 아빠는 직장에서 2~3년에 한번씩 3,4호선의 여러 기지를 옮겨 다니거든. 지축이나 수서가 제일 끝이지. 내가 쓸 수 있는 휴직은 두 가지야. 하나는 간병휴직이고 하나는 육아휴직이야. 가족 중 누군가가 아파서 간병휴직을 쓰는 일은 안 생기는 게 좋아. 가능한 시나리오는 아이가 태어나고 내가 육아휴직을 해서 같이 사는 거야. 만약 아이가 둘이 동시에 오면 5년 정도 살 수 있겠지. 그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마음이 아파 떠났고 3년을 우셨다고 했어. 그 집에 다시 살면서 우리가족이랑 할머니가 또 다른 기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시는 걸 꿈꾼다.
이제 개똥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께. 노을이나 산을 우리가 태명으로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어디까지나 개똥이 다음이야. 우리에게 단 하나의 이름만을 선택해 부를 수 있다면 그건 당연히 개똥이란다. 둘째나 셋째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노을이, 산이가 되겠지. 그건 실행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일 수 있어.
그 날 우리는 남산 안중근기념관 앞에서 만났어. 연리지되어 있는 나무는 아카시든가 느티나무든가. 우리는 1박 2일짜리 짧은 여행을 자주 갔지. 전날 대연각 빌딩에서 수업을 했어. 남대문시장 근처에서 자고, 새벽이라기 보담 아침 시장 구경을 했어. 국수집의 첫 손님이 되어 잔치국수와 콩나물과 양배추가 등뿍 든 쫄면을 먹었지. 우린 남산을 좋아해. 산책 삼아 남산을 걸었어. 날이 더워서 땀이 많이 났어.
나무 아래 앉아 땀을 식히면서 “우리가 100년 전쯤에 태어났다면 어떤 사람으로 살았을 것 같아요?” 내가 질문했어. 그 전에 경복궁에서 만났을 때는 ‘500년 전쯤에 태어났다면’ 질문을 했었지. 그는 가마꾼이나 파발마를 타는 관원이었을 거라고 했어. 나는 아이를 들춰 업고 새참 함지막을 이고 나가는 튼실한 농부 아낙네였을거라고 대답했지. 100년 전이면 아직 일본 식민지로 살았던 시절이지.
나는 수월스님이 운영하는 국밥집 이야기를 했어. 간도와 연해주, 그리고 한반도를 잇는 고개 어디쯤에 국밥집을 내고 밥을 해 먹인 스님이야. 나는 그 삼거리 국밥집에서 밥하는 여자라고 했어. 손이 커서 커다란 솥에다 국밥을 설설 끓이지. 배고픈 사람 누구에게나 듬뿍듬뿍 퍼서 주는 사람 말이야. 그는 독립군을 따라 다니는 사람일거라고 했어. 개장수로 변장한 작은 체격의 다부진 사내 말이야. 중국식으로 평서방이라고 불리는.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 꾸몄지. 어느 날 국밥집에서 둘이서 만난거야. 둘다 중년을 넘긴 나이였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린거야. 국밥집 여자는 그 사람 뚝배기에 고기를 많이 썰어 넣어주고 밥을 봉두로 퍼 주었겠지. 그를 보면 자꾸 웃음이 났겠지.
나는 아마도 그 여자에게 사람 보는 눈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게다가 스님 밑에서 예불모시고 노는 입에 염불이라고 일상적으로 기도하는 공양주 보살인거잖아. 국제정세까지는 아니라도 색깔은 그런 빛이었을거고, 차림이 어떻든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느 사정인지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하는 사람일테고, 그리고 사람의 인연이란 게 어떤 건지도 알고 말이야. 둘이서 눈을 맞추었지. 그는 촉이 발달한 사람이지. 뛰어들어야 할 때를 알지. 그러다 남자는 떠나고 가끔 돌아오지. 여자가 애를 낳아 기르겠지. 여자는 아이를 건강하게 잘 기를 거야. 왜냐면 자비심으로 여러 나라 사람을 대하는 스님이 스승이 되어주실거고, 기도하면서 열심히 일하면서 기를 테니 말이야. 이름은 따로 지어두겠지만 집에서는 그냥 개똥이라고 부를거야. 두 사람은 종종 만날 거야. 그리고 그 남자는 자라고 있는 아이를 몇 년 만에 한 번씩 보게 되지. 그리 사는게 최선이라는 것도 알고 말이야.
열일곱살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 보내겠지. 그리고 나는 때가 되어 아버지를 찾아 떠난 신화속 인물 고주몽이나 테세우스처럼 아이를 아버지에게로 보낼거야. 아이가 남자아이든 여자 아이든 그렇게 했을거야. 그 아이의 인생이 시작되는 거지. 그 날 이야기 꾸미기 놀이에서 우리는 졸지에 개똥이 엄마와 개똥이 아빠가 된 거지. 그땐 우린 같이 잠은 자지만 아직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한 건 아니었어. 개똥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 사람과 결혼을 하고 같이 아이를 낳아서 기르면 어떨까 생각을 해 본 것 같아. 그리고 나는 그가 좀더 진지하게 생각이 되었어.
그날 매미가 요란하게 울었어. 매미는 여름 한 철 짝을 찾기 위해 7년을 어두운 땅속에서 굼벵이로 지내기도 한다는 구나. 나는 우리가 개똥이 이야기를 나눈 그 나무를 우리 나무로 정했어. 그 나무는 우리 이야기를 들었을테고 나이테 어딘가에 기록해 두었을 거야. 결혼을 하고 난 후에 그 나무 아래로 종종 지나갔어. 벚나무에 벚꽃잔치가 열렸을 때는 밤낮으로 갔지. 임진왜란때 가져간 홍매와 청매가 돌아왔다고 해서 그는 그 나무를 보러 가고 싶어했어.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반영하지. 스스로 지어부르는 이름도 말이야. ‘팝콘’이라는 새 이름을 지은, 미래 트렌드 예측을 직업으로 하는 미국사람이 한 이야기야. 온라인 상에서 부르는 아빠의 닉네임은 평세야. 평등세상의 준말이지. 엄마의 닉넴은 콩두지. 여기에는 콩닥콩닥 두근두근, 콩쥐의 두꺼비, 콩두(豆), 하늘길을 날아가는 두 번째 콩새라는 뜻이 있어. 모두 자기의 삶의 지향을 담았지. 개똥이 이야기 속의 평서방과 삼거리 국밥집 여자와 비슷한 것 같지? 우린 독립운동을 할 깜냥은 없지만 밥이라도 퍼주고, 심부름이라도 하면서 머리카락 같은 힘을 보태고 싶어.
너의 태명 개똥이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동화작가 권정생선생님의 ‘강아지똥’ 동화가 들어 있어. 강아지똥도 어떤 민들레에게는 거름이 된다지. 꽃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열심히 나비가 되려는 애벌레와 같은 꿈을 가졌지. 또 네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귀신이 탐할까 싶어 일부러 개똥이란 이름을 지어 감추어두려는 옛 어른들의 지혜를 빌었어. 나이 들어 너를 만나 혹시라도 우리가 내 새끼만 중히 여기는 사람이 될까봐 저어하는 마음도 담았지. 보석보다 귀하지만 보석 이름을 붙이지 않았어.
개똥이, 노을이, 산이 이름 중 어느 만큼이 실현될 지는 하늘만 아시겠지. 우리 부부는 아이를 좋아하는데 출발이 늦었어. 우리 같은 만혼부부들은 아이를 원하면 결혼과 동시에 과학의 힘을 빌게 돼. 만혼 부부가 많아지는 추세라 30~40대 난임은 관련 분야의 새로운 블루오션일거야. 난소기능, 호르몬이 다 떨어지지. 염색체 이상이 있는 임신을 할 확률은 35세를 기점으로 확 높아지고, 임신을 유지할 확률도 떨어지지 (이 부분에서 믿을만한 통계를 인용하고 싶구나) 과배란유도를 통해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시술을 하면 다태아 임신률이 훨씬 높아지지. 그래도 40대 임신 성공률은 5% 정도란다. 전체 연령 여자들을 퉁 치면 자연임신률 10%, 인공수정은 15~20%지. 쌍태아 출산율은 그 중에서 20% 정도인듯 해. 너희 중 두 명이 같이 올 확률은 백 명의 40대 여자 중 1명에 드는 거지. 1%네. 어휴! 과배란유도 주사를 배에 찔러넣으면서 기대에 젖어서 둥이를 검색하던 내 손짓이 무색해지네. 나는 문방구 설탕 과자 뽑기에도 걸려본 적이 없거든. 승부나 경쟁에는 엄청 약해.
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궁리를 한단다. 이것 역시 이솝우화 우유를 지고 장에 가는 여자의 백일몽이야. 들어봐.
‘만약 다태아가 온다면 기쁨과 함께 걱정과 부담이 배 이상 늘겠지. 부족한 나의 몸으로 과연 아이들을 다 품어낼 수 있을 지 모르겠어. 다태아는 조산, 미숙아 위험도 많지. 또 한 배에 한 명의 생명을 잉태해 기르게 한 자연의 뜻은 사람 하나를 위해 그만큼 많은 에너지와 집중이 필요하다는 자연의 설계일거야. 여러 아이를 동시에 낳는다면 그만큼 절대시간과 절대 관심의 양이 부족하게 될 테지. 만약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한 아이당 3년을 휴직해서 최대한 키워줄 거다. 다른 일 할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과만 지내야겠다, 그래서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겠다. 나는 5년이고 6년이고 육아휴직을 할 각오가 되어 있어. 생애 초기 3년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으니 그 시간동안 옆에 있어주겠지만 그래도 부족할테니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40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를 만나 기르는 일이 되겠지. 모든 사람들이 빈둥지 우울증을 겪고 중년기 전환을 시작할 때 우리는 남들보다 15년 늦게 아이 키우는 삶으로 넘어가는 거야.’
쉽게 결혼하고 쉽게 아이를 가진 사람들은 쌍둥이나 셋둥이라면 어찌 키우나 고민하지만 난임카페의 사람들은 워낙 오래 기다리고 이런저런 실패와 좌절 겪었더라. 그이들은 마음 고생으로 단련되고 준비되어서 하늘의 선물을 감사히 받지. 심지어 입원을 몇 달씩 해서 낳으면서도 단지 아이만 건강하길 기도하는 이들도 있어.
내 나이 43세에도 초산이 가능할까? 고운 배우 이영애씨는 남매둥이를 낳아 열심히 기르고 있지. 그녀가 참으로 부럽구나. 개똥아, 혹시 네가 다른 형제를 손잡고 올거라면 사이좋게 놀다가 오너라. 물론 개똥이 혼자 와도 환영이다. 그럼 우린 저 태명을 다 너에게 줄거야. ‘노을지는 산에서 청혼한 그와 그녀 드디어 개똥이를 만나다’ 이런 문장이 되겠지. 설 차례상에서 “조상님, 손녀든 손자든 손주 하나 점지해 주세요” 비시던 할머니는 욕심부리지 말라고 하셨어. 나는 엄마 아빠가 너를 만나길 간절히 원하고 있고, 네가 같이 오더라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마음이 쓸데없이 미래로, 그리고 허황하게 퍼져간다. 하지만 이런 것도 지우지 않고 너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다 남겨둔다. 이건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실제로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난 것들이기 때문이야.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때를 따라 변화할거라고 믿어. 세월이 지나서 내가 할머니가 되면 너를 기다리면서 내가 꾼 꿈들과 잡념에 듬뿍 묻어있는 젊은 날의 붉은 마음과 달뜸을 떠올리며 웃음지을거야. 이런 기록이 없으면 이 시절은 다 휘발되어 버리겠지. 너를 기다리며, 조바심보다는 들뜬 기대와 설렘으로 자꾸만 미래를 꿈꾸었던 기억은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거야. 또 너를 기르며 힘들 때 우리가 얼마나 너를 만나고 싶었는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상기시켜줄거야.
개똥아. 우린 어제 인공수정 1차 시술을 마쳤단다. 이미 배란일에서 3일이 지났으므로 네가 이번에 우릴 찾아왔다면 너는 이미 내 안에서 수정란의 형태로 존재하겠지.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는 시간은 45분, 인공수정은 자궁의 나팔관 입구까지 처리된 정자를 주사기로 넣어주는 거니까 더 짦은 시간이 걸리지. 열심히 헤엄쳐 2만번의 난자표면 헤딩을 거쳐 난막을 뚫고 들어간 정자가 있다면 말이야. 개똥이가 존재하는 지 어떤 지 궁금해서 자꾸만 ‘인공수정 몇 일 째’ 검색어로 검색을 하게 되는 구나.
나는 가장 견디기 힘들다는 2주를 걷고 있어. 이번에는 시술 직후에 설 연휴가 있었고, 바로 개학을 해서 일을 해. 그 편이 혼자 집에서 보내는 것보다 나아. 대신 간당간당 출근시간에 막 떠나려는 시내버스를 뛰어가 잡지 못하고 다음 버스를 타지. 어제 엄마의 학생이 교문을 향해 달렸어. 뛸 수가 없더구나. 열린 교문 앞으로 시내버스가 지나가는 걸 보면서 아이 이름이 아니라 비명을 질렀어. 다행히 주차장에 있던 어머니 한 분이 우리 아이를 잡아주셨어. 아이 손을 잡고 올라오면서 눈물이 쑥 났어. 이 녀석은 나하고 잡기놀이를 할 작정이었는 지 빨개진 볼로 연신 내 얼굴을 보고 웃는다. 이 아이 엄마의 가장 아픈 손가락.
하지만 이번이 과배란 3번째 달이기 때문에 증상놀이는 첫 달에 비해 많이 줄었어. 내가 느끼는 건 대부분 과배란유도의 휴우증상이거나 처방받아서 매일 쓰는 프로게스테론의 영향이라고 생각해. 복수가 찬 정도는 아니지만 배가 빵빵하고, 소변이 시원하게 누어지지 않으면서 잦아졌고, 소화가 잘 안되고, 허리가 아파. 우리가 난임병원이라는 기차에 올라탔으니 기다림에 지쳐 아무 역에서 내려버리지 않는다면, 느리고 꾸준한 황소걸음을 걷는다면 언젠가는 개똥이의 돌잔치를 하게 되겠지.
개똥이, 노을이, 산, 불러보면 어느 이름에나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기쁨이 느껴지고 웃음이나는구나. 세 개의 태명 모두 Follow your bliss 라는 금과옥조에 포함된 bliss 들이야. 우리의 삶이, 그리고 너의 삶이 가슴뛰는 것이길 기도한다.
잘 있어. 너도 우리도 잘 지내다가 웃으며 상봉하자.
2014년 2월 4일 입춘날, 엄마가
Ps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그리고 함께 하여주시고 언제나 사랑을 보내주시는 고운 님들께 기도드립니다. 태명을 3개나 지어놓고 설레발 치는 게 너무 우습지요? 저도 우습고 부끄러워요. 한편 그러는 저 자신이 귀엽습니다.
제가 생각한 걸 남편에게도 수시로 종알거립니다. 그는 오늘 야근 중입니다. 가스렌지 위에는 그가 끓여놓고 나간 김치콩나물국이 있고 베란다에는 빨래가 널려 있어요. 어제 퇴근해서 보니까 재활용 쓰레기도 말끔히 묶어 내놓았더군요. 말이 없는 편인 그는 저런 식으로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 마음이 제게 찰랑찰랑 와 닿습니다. 집집마다 수다보존의 법칙이 있다면 저는 마치 그 사람의 말까지 대신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나의 공상과 불안까지 그에게 속삭여대고 있는 자체가 저는 좋습니다. 마음 편한 친구에게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좋아하는 선배나 상사 앞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고요. 신뢰롭고 안전한 상대 앞에서만 제 안의 까불락거리는 어린아이가 안심하고 나와서 뛰어 놀거든요. 저의 기도를 들으시는 고운님들을 향해서도 저의 재잘거림을 숨김없이 보일 수 있음을 저는 감사합니다. 하늘도 듣고 땅도 들으시는 듯 합니다. 그 모든 이들이 사랑으로 저를 지켜보고 함께 하여 주실 것 같습니다.
개똥이, 노을이, 산이 우리가 지은 3개의 태명의 연유를 적어둡니다. 하나하나 우리 두 사람의 기쁨과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적는 과정도 행복했습니다. 저는 저의 운명에 순명할 것입니다. 저희 가족과 함께 하여주시길, 지켜보고, 보호하여 주시길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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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7 | No 39.10개월 수행과제 총평 및 니체와 러셀이 보낸 러브레터 | 미스테리 | 2014.01.28 | 1960 |
3886 | 2-39.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식을 죽인 여자 | 콩두 | 2014.01.28 | 3715 |
3885 | 러셀이 보내는 편지 (1월과제) | 제이와이 | 2014.01.28 | 2147 |
3884 | #33. (1월 오프수업) 쏜살같은 1년 그리고 우공이산 | 땟쑤나무 | 2014.01.28 | 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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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tory(3) : 호주머니 속 물건들이 나를 말해준다 ![]() | 타오 한정화 | 2014.01.27 | 2613 |
3882 | [No.9-5] 장자로부터 온 편지 및 수행과제 총평(수업발표) - 서은경 | 서은경 | 2014.01.26 | 1942 |
3881 | #34. 나는 누구인가(1월 오프수업) | 쭌영 | 2014.01.25 | 2018 |
3880 | 장자가 내게 준 편지 _ 1월 수업 과제물 | 유형선 | 2014.01.25 | 2231 |
3879 | 2-38. 나도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고 싶다 [6] | 콩두 | 2014.01.21 | 3688 |
3878 | 안전속도를 유지하자 [1] | 라비나비 | 2014.01.21 | 1953 |
3877 | 눈을 기다립니다 [4] | 유형선 | 2014.01.20 | 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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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9-4] 어쩌면 쓰다 - 서은경 ![]() | 서은경 | 2014.01.20 | 1955 |
3875 | 사람을 찾습니다 [1] | 제이와이 | 2014.01.20 | 1944 |
3874 | No 38 덜어내기 [6] | 미스테리 | 2014.01.20 | 2069 |
3873 | 키드니 7 | 레몬 | 2014.01.19 | 23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