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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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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7일 10시 49분 등록

지금 하고 있는 일, 살고 있는 삶에 지금 네 피가 통하고 있는가. 너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의 품삯이 아닌, 일 자체, 그 일의 골수와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있는가.” –이윤기 동인문학상 수상소감, <낯선 곳에서의 아침> p319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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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30편이 넘는 영화를 봤다. 영화관에서 본 영화도 몇 편 있지만 대부분은 다운 받아 봤다. 방학을 보내는 네 녀석들을 좇아 한 달을 거의 올빼미 인간으로 지냈다. 그러고 보니 영화를 보는 내 스타일이 책을 읽는 스타일과 다르지 않다. 한 책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책을 이어서 읽는 방식 말이다. 끌리는대로 골라 본 영화들이니 여러 편이 마음에 남지만 그래도 한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김기덕의 <아리랑>이다. 이 영화 내겐 꽤나 충격이었다. 시나리오, 각본, 연출, 촬영, 배우, 감독, 편집을 모두 혼자 해냈다. 형식은 조악하고, 영화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가는 영화지만 보고 나면 감탄이 절로 난다..  

 

영화는 그의 실제 상황이다. 그는 강원도 외딴 오두막에서 혼자 지낸다. 영화의 독백을 들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여러 편의 국제적인 상을 받고 명성을 얻은 감독의 면모는 그 영화 어디에도 없다. 끔직하게 외롭고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채 자존이 땅에 떨어진 한 인간만이 존재한다. 세상 더러운 꼴 보지 않으니 참 편하다' 하면서도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영화를 만들지 못해 그는 불행하다. 3 년의 유폐 후에 내린 결론은 혼자서라도 영화를 찍자,이다. 그래서 나온 게 <아리랑>이다. 다행히 그는 이 영화로 스스로를 구제하고 세상에 다시 나왔다.

 

영화에서 그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연기하는 배우이면서 동시에 카메라를 옮겨가며 촬영도  해야하는 감독이다.(상상하면 그 진지함이 무너진다) 특정인을 거론하며 성토하는 그의 미숙함은 이 영화의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해낸 돌아이(?) 기질이나,  그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다는 데에는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아리랑>은 한 편의 모닝페이지다. 오장육부를 흔들어대는 통렬한 배설이 거기에는 있다. 그의 솔직함은 단순히 영화 속의 고백에만 머물지 않는다. 살고 있는 오두막의 풍경과 그곳에서 밥 먹고 오줌 누고 똥 싸는 김기덕의 오리지널리티를 그대로 비추는 카메라 앞에서는 누구나 나처럼 짜릿한 쾌감을 느낄 것이다.  

 

자신과 솔직하게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 모닝페이지 7년차인 나의 변함없는 주장이지만 내 주장은 그에 비하면 허울로 느껴질 정도다. 교육 받지 않고, 남의 눈치 안보며 날 것 그대로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 솔직함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스런 무엇이리라. 이 한 편의 영화로 나는 김기덕이란 인간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에 대해 공부도 좀 했다. 결론은 <아리랑>이란 영화는 김기덕이 아니면 절대 만들 수 없다, 이다.

 

김기덕은 여러모로 남들과 다르다. 태어나 자란 배경이 그렇고 스스로 구축해온 삶이 그렇다. 그에게는 행동에 대한 제약이 없다. 생각하면 바로 실행한다. 영화 역시 그렇다. 자신 안에 무엇이 떠오르면 바로 시나리오를 쓰고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바로 영화를 찍는다. 영화를 찍는 것도 단숨이다. 대체로 두 주 이상을 끌지 않는다. 그는 기계를 잘 다루고 그림도 잘 그린다. 손으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잘 한다.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그 정도의 내공과 철학을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신기하다. 아니 신선하다. 교육이 우리의 어떤 것을 막는지, 그를 통해 확연히 볼 수 있다. 그의 특별함은 많은 부분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데서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어를 유난히 좋아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한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원리는 명백하다. 잘못 배우면 고치는데 더 힘이 든다는 것이다. 이미 깔려진 프로그램을 지우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제도권 안에서 우리 안에 집단적으로 깔린 프로그램이 그에게는 깔리지 않았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이러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전제도 그에게는 없다. 관심이 가면 이미 그것을 하고 있고,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새 잘 하게 되는 식이다. 그림 그리는 일도 그랬고, 시나리오를 쓰는 일도 그랬다. 최재천 교수의 책 한 권 읽지 않고도 그는 이미 <통섭>의 사고를 가지고 삶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리로 가기로 작정한 때가 그의 나이 30, 그때까지 그는 한 번도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파리에서 생전 처음 보게 된 영화 세 편이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흥미롭다. 계획을 세우고, 삶의 통제력을 높여서 정해진대로 살려는 사람은 이런 극적인 우연을 경험할 기회가 적을 것이다. 김기덕의 삶이 흥미 이상의 한 전례가 될 수 있는 것도 그런 점에서다.


이 글의 결론은 없다. 그러나 교육과 방임, 통제와 자율 사이의 균형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김기덕과 그의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나저나 영화 때문에 일에 방해를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이 계절이 아니면 이런 충동의 즐거움을 언제 다시 맛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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