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에움길~
  • 조회 수 1560
  • 댓글 수 6
  • 추천 수 0
2014년 2월 10일 08시 43분 등록

 

 

여행이란 무엇인가?


 나름 길다면 긴 연휴다. 제법의 인구들이 공항을 빠져나갔다 한다. 올 설에는 한파도 없었고 입춘을 앞두고 따스한 햇살이 벙싯거렸다. 이 햇살과 함께 길 떠난 이들에 대한 부러움이 가득했다. 명절이라면 내게 주어진 일이란 늘 그렇듯 식당영업이다. 식대는 전혀 오가지 않으나 식당은 분주하니, 무수한 그릇들이 아침・점심・저녁이란 질서를 무시하고 수십 번의 물세례를 당한다. 지침의 무게만큼, 부러움의 강도는 커지고, 부엌에서 벗어나고픈 욕구는 강해진다. 그리하여 저 비행기에 타고 있을 사람을 나로 대체하고자 하는 생각에 이르면 도대체 이 욕구의 종착점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여행에 대한 기대는 무엇으로부터 오는 걸까. 어딘가로 떠난다는 그 행위 자체에서도 나올 수 있고, 새로운 곳을 본다는 데 대한 설렘도 한 몫 할 것이고, 익숙한 공간을 떠나는 데 대한 가벼움도 충분히 끼어들 만하다. 기대라는 것 자체가 사건이 진행되기 이전의 감정이니 이 모든 것은 여행을 떠나기 전의 마음이다. 목적을 떠나, 기대한 바가 늘 충족된다고 볼 수 없는 노릇이니 여행이란 무조건적인 긍정의 기운을 주진 않는다. 실제의 여행은 기대한 바를 모아 둔 장면 모음집이 아니라, 이어지고 반복되기까지 하는 일상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것은 곧, 여행 역시도 현재라는 분명한 생활인식이 필요함을 얘기한다. 그런 점에서 여행을 휴식이라 보는 이들에겐 더욱 더 피로가 되고 독이 되고, 일상의 평온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 될 수 있다. 생각이란, 감정이란 영역은 낯선 공간에 머물러 인식의 어려움을 겪고 혼란을 겪을 것이다. 이 때의 내 모든 사고가 깨달음으로 이어진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여행은 반성(反省)의 시간마저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여행은 강박(强迫)을 재촉하기까지 한다. 우선 새로운 곳에 대한 느낌을 가지기를 강요받는다. 현재의 삶과 일상에 대한 도피처로서 선택되는 경우라면 더욱 더 강하게 ‘지금’과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 당면한 문제를 잊거나 전복시킬 만한 무언가를 안고서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패키지 상품으로 이루어진 여행이라면 그 일정에 또박또박 맞추어야 한다. 되도록 정해진 시간 안에 풍경을 감상하고 그림을 감상하고 건물을 감상하고, 용변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블로그나 안내 책자에서 소개한 장소를 찾아 내어, 다시 한번 블로그와 책자에서 소개한 ‘그곳’이 맞는지를 확인해야 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척하면서도 재빠르게 다른 이들의 발이 닿기 전에 구도의 미학을 위한 장소를 선점하여 V자를 날려야 한다. 어김없이 돌림노래처럼 들려오는 찰칵, 찰칵, 찰칵. …찰칵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의 마음속 머릿속에 일렁이는 생각은 무엇일까. 어떤 형태일지 모르겠지만 여행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을 품을 순 있겠다. 어쨌든.

 여행이란 각자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이유와 기대가 다르므로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각자의 이유와 기대로 한마디로 정의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여행을 휴식이라 하고 어떤 이는 여행을 일이라 한다. 누군가는 여행을 삶이라 하고 어떤 이는 일상이라 한다. 누군가는 여행을 떠남이라 하고 어떤 이는 만남이라 한다. 누군가는 여행을 새로운 것을 찾으러 가는 것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익숙한 것을 버리는 것이라 한다. 누군가는 내가 누구인지 찾는 과정이라 하며 어떤 이는 내가 누구인지를 잊는 과정이라 한다. 누군가는, 또 어떤 이는 … 끊임없이… 여행에 대한 의미 확대와 재생산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여행은 익숙한 생활터전이 아닌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행이란 지금 이곳에서 벗어나 있는 것,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다. 그 장소가 주는 낯섦, 그  낯섦에서 오는 새로움, 새로움에서 오는 맑음, 맑음에서 오는 정화(淨化). 그러니 이제 여기를 벗어나 나 또한 가야 한다. 떠나야 한다.

 

 찰칵.

 사진이 찍히는 그 순간처럼 하나의 장면이 잡힌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허연 머리의 할머니가 배냇머리 움켜쥔 채 자신의 주름 가득한 얼굴을 응시하는 조카를 쳐다보고 있는 장면, 서로의 시선이 얽히는 그 순간이다. 할머니는 92세, 조카는 4개월이지만 설을 맞이하였으니 2세라고 해주자. 그리하여 그들의 세월에 대한 인식 차는 90년이다. 그녀, 할머니가 살아 왔을 90년과 그녀, 나의 조카가 살아갈 90년이 펼쳐진다. 과거와 미래 180여 년의 시간이 현재 90년을 시점으로 마주한다. 삶이 여행이라면, 그들의 삶이 기록된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의 그들의 여행일지에는 어떤 내용이 채워질까. 아이패드에 찍힌 사진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할머니나 할머니의 주름을 무심히 보고 있는 조카나, 그들의 기록이 어쩌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인간의 감정이란 같은 것, 그들의 감정이 발현되는 공간은 분명 달라 보이지만 그들의 시간을 같은 선상에서 펼쳐 내면 그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성장의 이야기처럼 담아 있을 것이다.

 

 여행, 이제껏 그것을 장소에 대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러므로 조급하였다. 이제 여기에 시간을 보탠다. 여행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것, 그 시간의 역행이 주는 낯섦과 새로움. 새로움에서 오는 맑음, 맑음에서 오는 정화(淨化). 그러니까 여행은 곧 나의 정화(淨化)의 여정이다. 그리하여 정화의 의식을 행함에 있어 지금, 내가 부엌에 있고 설거지를 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언제라도 어느 순간에라도 낯선 시간 속, 공간 속으로 찾아 들어가 나의 정화의 의식을 치를 것이니, 그곳은 오로라가 비치는 유럽일 수도 있고, 이제 막 아홉 번의 강을 건널 참인 18세기 열하로 가는 여정일 수 있고, 목성을 탐사하러 떠나는 대기권 밖의 우주선일 수도 있다. 내 몸이 실제로 그 곳에 있거나, 없거나.


IP *.177.81.168

프로필 이미지
2014.02.10 13:16:13 *.94.41.89

"이제 여기에 시간을 보탠다. 여행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것, 그 시간의 역행이 주는 낯섦과 새로움. 새로움에서 오는 맑음, 맑음에서 오는 정화(淨化). 그러니까 여행은 곧 나의 정화(淨化)의 여정이다."

 

Time machine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해보고 싶어집니다.

좋은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4.02.12 15:05:07 *.177.81.168

넵~~희동이님도 좋은,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프로필 이미지
2014.02.10 22:45:29 *.7.195.97

" 여행은 곧 나의 정화(淨化)의 여정이다" 여행은 스스로를 비워서 깨끗게 하는 자기 수행의 길이 되기도 하지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국가에서 스물이면 군대로 부르듯이 마흔이면 한 일년 의무적으로 광야로 여행을 떠나 보내면 어떨까요? 누가 알겠어요? 군대에서도 인간이 되지 못한 이가 이 여행에서 인간이 될런지.

롱런 하소서!

프로필 이미지
2014.02.12 15:01:46 *.177.81.168

앗, 좋은 아이디어!

인간이 아니되어 돌아오더라도 어느 정도 인간이 되려는 의지는 가지고 돌아오지 않을까요...

선거기간을 앞두고..저런 정책 내었다간,,욕 먹을라나..?!

프로필 이미지
2014.02.10 23:01:50 *.124.98.251

할머니와 손녀..  한 공간에 그려보고 싶네요,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순간에도 여행을 떠날 수 있으나 고무장갑 벗어던지고 현관을 나서면 더 좋은 여행이 되지 않을까요?

프로필 이미지
2014.02.12 14:57:18 *.177.81.168

할머니와 손녀,,그리신다면,,한번 보고 싶네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778 10기 레이스_죽음이란 무엇인가?_구해언 [10] 해언 2014.02.17 2102
3777 지적 Race 2주차_죽음이란 무엇인가 file [4] 류동일 2014.02.17 1608
3776 <10기 레이스 2주차 칼럼> 죽음이란 무엇인가? - 이동희 file [11] 희동이 2014.02.17 1616
3775 [10기 연구원 2주차 지적 레이스] 죽음이란 무엇인가 file [6] 녕이~ 2014.02.17 1588
3774 10기 레이스 2주차 - 죽음은 신의 소중한 선물 file [5] jieumjf 2014.02.17 1836
3773 10기 레이스 - 죽음을 시뮬레이션하다 - 김정은 [12] 앨리스 2014.02.16 1728
3772 10기 레이스_2주차_죽음이란무엇인가_정수일 file [10] 피울 2014.02.16 1610
3771 10기 연구원 2주차 - 죽음이란? 김종호 칼럼 file [8] 구름에달가듯이 2014.02.15 1581
3770 상처 그리고 새로운 시도. file 어둠을품은밝음 2014.02.15 1592
3769 10기 연구원 1주차 레이스 관전 소감 [9] 오병곤 2014.02.10 1437
3768 10기 레이스 -여행이란 무엇인가-이은심 [8] 왕참치 2014.02.10 1603
3767 10기 레이스 여행이란 무엇인가_김정은 [10] 앨리스 2014.02.10 1579
3766 10기 레이스 - 마흔의 그대에게 여행을 허하라! 강종희 file [9] 종종걸음 2014.02.10 1565
» <10기 레이스 칼럼 1주차-조현연> 여행이란 무엇인가 [6] 에움길~ 2014.02.10 1560
3764 10기 연구원 지적레이스 1주차_박윤영 file [8] 녕이~ 2014.02.10 1592
3763 [10기] 여행이란 무엇인가? file [6] 찰나 2014.02.10 11531
3762 <10기 레이스 1주차>여행이란?_한창훈 file [4] jieumjf 2014.02.10 1615
3761 전환기를 맞이하여 김영훈 2014.02.10 1466
3760 <10기 레이스 1주차 칼럼> 여행이란 무엇인가? - 이동희 file [7] 희동이 2014.02.10 2183
3759 지적Race_여행이란 무엇인가_류동일 file [3] 류동일 2014.02.10 1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