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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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무엇인가
나는 내 인생이라는 미로에서 여러 번 막다른 길을 만나곤 했다. 앞이 막혀 있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고, 그렇다고 미로의 출발점을 찾아 되돌아 나오기엔 너무 많이 와버렸다고 느껴질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듯, 선물처럼 여행이 나를 찾아오곤 했다.
어린 시절 가족 여행을 다녔던 기억은 없다. 어린 시절의 여행은 다름아닌 잦은 이사였다. 어린 내가 짐 싸고 푸는 것이 익숙하리만치, 엄마가 전입신고를 할 때 민망해 하셨을 정도로 이사를 자주 다녔다. 덕분에 전학도 많이 했고, 오랜 친구도 많이 잃었지만, 어느 고장의 어느 풍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탁월한 적응력을 얻었다. 이는 역마살이 가져다 준 귀한 선물! 올해로 결혼 10년 차 역마살은 여전히 유효한지 결혼 후 이사를 일곱 번이나 했다. 주소지 포함 주민등록등본을 뗄라치면 두 장이 된다. 나는 전업 작가가 꿈인 남편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작가가 되면, 우리 유목민처럼 살자. 인도의 집시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따로 시간을 내어 여행을 할 만큼 나는 정신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 못되었다. 성인이 되어서의 여행은 바로 잦은 출장이었다. 대학교 4학년이자 사회초년생으로 시작했던 첫 직장의 마감은 출장 명목의 미국 행이었다. 한 번 다녀왔던 사람을 계속 보내는 것이 출장의 법칙! 그렇게 첫 미국 행을 시작으로 나는 미국과 중국의 장기 출장 전문 프로그래머로 십 년간 일했다. 두 아이를 낳은 엄마로서 모유수유를 해 가며, 노트북을 등에 매고, 이민 가방 두 개를 끌고 억척스럽게 다녔다. 그 결과, 나는 목 디스크와 심한 근육통으로 직장이란 곳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진짜 내 인생은 직장을 그만둔 후 시작되었다.
여행의 산물로써, 우리 가족의 빚을 청산한 두 가지 실험적인 투자 에피소드가 있다. 2000년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 부동산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 미국인과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 덕에 일찍이 미국 부동산 시장에 대한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 말에 따르면, 그 당시 미국 부동산 시장은 호황기에서 하락세로 접어들었고, 향후 5년 간 집값은 지속적으로 내려갈 것이며, 5년 후에는 부동산 경매 물건이 판을 칠 것이라는 것이다. 2003년 한국에 돌아온 나는 한국의 부동산 시장의 시세 추이는 미국보다 7년에서 10년 가량 뒤쳐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한국 부동산 투자의 마지막 기회였다. 2005년 주택담보 대출을 받아 서울의 작은 아파트를 샀고, 3년 후에 팔았다.
2009년 두 번째로 미국에 출장 갔을 때, 2000년과는 달리, 미국인의 자동차와 전자 제품 선호도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미국 내 불황의 시작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고가인 일본 제품보다 제품의 질은 우수하지만 일본 제품보다 가격적인 메리트가 있는 한국 제품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거리에서 현대와 기아의 자동차를 자주 볼 수 있었고, TV나 세탁기도 ‘삼성’이나 ‘엘지’제품으로 사용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2010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삼성’과 ‘현대, 기아차’ 중심의 우량주 투자를 시작했고, 2011년 현금화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부동산과 주식의 시세 차익으로 시어머니께 자동차를 사드렸고, 친정의 시골집을 리모델링 해 드렸고, 우리 가족의 빚도 청산했다.
3년 전, 근육들을 치료하느라 석 달간 침대에 누워 지낸 적이 있다. 침대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면 눈물이 하염없이 주르륵 흐르기도 했다. 지난날에 대한 반성의 눈물이리라. 나는 왜 그토록 ‘이(利)’를 좇으며 살아왔던가. 연암이 열하를 방문한 것과 같은 천제일우가 나에게 여러 번 찾아왔음에도 나는 왜 ‘이(利)’가 아닌 다른 것을 보지 못했나 후회했다.
이번에 <열하일기>를 읽은 것은 나에게 또 한번의 여행과 같은 선물이었다. 불철주야 말을 타고 달리고, 불어난 강을 견마잡이 없이 건너면서 극한의 두려움을 강물과 혼연일체가 되어 하룻밤 아홉 번의 강을 건넜던 연암 박지원! ‘똥 거름과 쪼개진 기왓장’을 보고 ‘이것이 바로 청의 장관이로다!’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던 연암 박지원을 보며, 나는 또 한번 부끄러워했다.
이사나 출장이 아닌 진짜 여행을 해 보리라. 내가 진짜 여행을 하는 날, 나의 행장은 연암처럼 공책 네 권에 필기도구가 전부이리라. 번뜩이는 관찰력으로, 뜨거운 인간애로, 낯선 이들과의 우정으로 빈 공책을 채우리라.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하)>를 엮고 옮긴 고미숙씨가 말 하듯, ‘여행은 곧 길이고, 길은 곧 삶이며, 삶은 곧 글’이다. 비로소 나는 내 삶의 주체이자, 내 운명의 주인으로서 ‘진짜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