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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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아우슈비츠 이전에 그의 인생
빅터 프랭클은 1905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형이 하나, 여동생이 하나 있었고(회고록을 토대로 유추. 확인 필요), 부모님과의 사이가 좋았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프라하에 정착한 명문 가문의 딸로 부드럽고 자애로운 성격이었다. 아버지는 남부 지방 출신으로 가난한 제본 기술자의 아들로, 의학을 공부하다 재정문제로 학업을 포기하고 관직에 몸을 담아 사회복지국의 국장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정반대로 스파르타적인 인생관과 의무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엄격하고 다혈질이었지만 금욕적이었다. 언젠가 불같이 화가 난 아버지가 산책용 지팡이 하나가 부러질 정도로 그를 두들겨팬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가 그럴 때마다 항상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다는 안정감을 느꼈다.
프랭클은 세 살 때 이미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그것이 그의 아버지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가 어렸을 때, 여동생 슈텔라가 10헬러 동전을 받으면 “네 편도선이 부풀었으니 수술로 없애주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 손에 작은 빨간 구슬을 숨기고 다른 한 손에는 가위를 들고 동생의 목구멍에 갖다 댔다. 이윽고 그럴싸한 소리를 내면 빨간 구슬을 동생의 편도라고 보여준 뒤 수술 비용으로 10헬러를 받았다. 저런 어린 아이는 본 적이 없다.
그는 부모님과 강한 애착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병원에 숙식을 하며 근무하던 시절을 엄청난 향수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생일만은 꼭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프랭클은 부모님의 서로 다른 성향을 고루 물려받았다. 로르샤흐 테스트를 했을 때에는 극단적 합리주의에서 예민한 감정주의에 이르는 폭넓은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결과가 나왔다.
프랭클의 부모님이 그보다 먼저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 잡혀 들어갔다. 다행히 면회를 갈 수 있었다. 당시 81세였던 그의 아버지는 말기 폐부종이 진행 중이었고, 굶주림으로 인해 이미 반 쯤 죽은 상태였다. 프랭클은 몰래 반입한 모르핀을 투약 하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혼자 남은 어머니와는 항상 건강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기 위해 헤어질 때 늘 입맞춤을 했다. 그러던 중에 그도 첫 아내와 함께 아우슈비츠로 떠나게 되었다. 그가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축복을 부탁한 날은 그의 어머니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 곧장 가스실로 옮겨지기 일주일 전쯤 이었다.
그는 이성과 감성이 모두 고루 발달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성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원칙 세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성공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 했다
“내게는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은 바로 아주 작은 일도 큰 일을 할 때처럼 철저하게 하고, 가장 큰 일은 아주 작은 일을 할 때처럼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무슨 일을 하든 늦게 마무리 하지 않고 바로바로 처리한다. 할 일이 많을 때일수록 미결로 남아 있는 것이 압박감으로 다가오는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마지막 원칙은 가능한 한 일을 빨리빨리 해치운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감성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는 사라진 노트를 찾아 다니는 주인공이 나오는 단편소설을
썼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현장감 넘치는 생생한 장면
묘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정신질환자들을 안락사 시켜버렸는데, 그는 꿈속에서 가스실 앞에 일렬로 서있는 환자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껴 자발적으로 대열에 합류하는 꿈을 꿨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낙천적인 편이어서 마음이 상하거나 괴로운 일을 대부분
잘 이겨내는 편이었다. 수용소에서의 삶을 극복하는 것도 그런 그의 성향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운이 좋았던 날들에 대해 감사하고 그날을 기억하여 기념일로 정하고 축하하곤 했다.
그 이외에도 그는 매우 진하고 강한 원두커피를 좋아했고, 여든 살이 될 때까지 암벽등반을 다녔다.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 표지를 달고 다녀 일 년 동안 등반을 할 수 없을 적에는 잠을 자면서도 산속을 누비는 꿈을 꾸었다. 누구나 공짜로 장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에게 가장 행복한 일은 도심에서 집필을 마치고 원고를 넘기자마자 멋진 암벽을 타고 산에 올라가서 다음 날 안방처럼 편안한 산장 한 켠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을 꼽았다.
그 이외에도 그는 넥타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며, 안경테 디자인에 아마추어 수준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작곡을 하고 연극을 했다. 그는 자신을 즐겁게 하는 활동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그에게 활력을 주었고 그것이 그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아우슈비츠에서
그의 수용소 에피소드들을 좀더 세부적으로 들여다 보자. 우선 그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해서 회고했던 첫 분류심사에 뒷이야기가 숨어있다. 당시에 아우슈비츠에는 나치 친위대 장교이자 내과 의사였던 맹겔레(Josef Mengele)가 있었다. 그가 수감자들 중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노역에 동원할지 결정했고, 생체실험도 주관했다. 그의 별명은 ‘죽음의 천사’였다. 이 죽음의 천사가 원래는 프랭클을 가스실로 가는 왼쪽 무리에 세워두었었다. 하지만 프랭클은 왼쪽으로 분류된 사람들 중에 지인이 없고 젊은 동료들이 오른쪽으로 분류된 것을 보고 멩겔레 박사 몰래 오른쪽 제일 끝으로 갔다. (그는 이 이야기를 독일어로 출간된 책에 한 번도 쓰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또한 아우슈비츠에서 배급받은 누더기 가운 안에 히브리어 기도서 셰마 이스라엘 한 장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이런 기막힌 우연의 일치야 말로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계시’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훗날 그는 튀르크하임에서 발진티푸스를 앓은 이후 거의 사경을 헤맸는데 그 와중에도 머릿속은 온통 책이 출간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고심 끝에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오고 안 나오는 것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그의 회고록에 썼다.
“나는 고심끝에 내 정신의 산물을 제물로 바칠 ㅡ 분명히 나는 그 책을, 즉 <의료 성직자>를 출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ㅡ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밤에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아흔 살이 되는 날까지도 강제수용소에 있는 꿈을 끊임없이 꾸었다.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탈출을 했더라면 제때에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을 것이고, 미국에서라면 로고 테라피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 거야. 그곳에서 필생의 과업을 실현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래서 아우슈비츠로 온 거야. 그것은 결정적 실험이었어’. 그가 경험으로 체득했던 지식은, 그에게 자기 이외의 ‘의미’를 지향하는 인간존재를 확인하게 해주었다. 다른 조건들이 같다면 미래를 지향하는, 즉 미래에 충족될 의미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살아남기 마련이다. 그의 경우에는 그것이 잃어버린 초고였다. 마흔 살 생일에 동료가 몽당연필과 두어 장의 아주 작은 친위대 서식 용지를 어디선가 구해서 선물했다. 그는 용지 뒷면에 몹시 들뜬 마음으로 마치 속기를 하듯 떠오르는 생각들을 끄적거렸다고 회고했다.
1945년
이후의 학자, 개인으로서의 삶
빅터 프랭클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수용소 안에서 그가 매시간마다 대화를 나누고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소중한 의미를 갖던 그의 아내는 빅터 프랭클만큼 운이 좋지 못했다. 그의 부모님도, 친구들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고향집에 돌아왔을 때는 모든 가족, 친지, 친구들이 수용소에서 살해당한 뒤였다. 빈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그는 부모님과 형과 아내 틸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의 옛 스승과 다른 친구들은 그가 자살이라도 할까봐 염려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 눈물을 왈칵 쏟으며 자신의 심경을 고백했는데, ‘갑자기 닥친 매우 고통스런 시련에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있어서, 마치 그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마치 뭔가가 결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는 그가 새로운 의미를 향해 돌진할 거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다.
그 후 그는 <의료 성직자>의 최종본을 집필하는 데에 미친 듯이 몰두했다. 그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그에게 뭔가 의미를 두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는 여성 속기사 세 명을 고용해 꼬박 아흐레 동안 강제수용소에 관한 글을 구술했다. 그는 완전히 몰입했고, 그의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냈다. 다른 자료들은 필요 없었다. 그 책은 그 해에 미국에서 백만 부가 팔렸다.
그의 1984년 영문 개정판 서문에 따르면 73쇄를 찍었고, 번역판이 19개 언어로 출판되었으며, 영어판 하나가 250만 부나 팔려갔다고 한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도 여러 대학의 필독도서이며 많은 사람에게 고전으로 읽히고 있으니 그를 죽음의 수용소에서 버티게 해준 ‘삶의 의미’가 그의 긴 삶 또한 지탱해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프랭클은 '연설은 쉬웠지만 글 쓰는 것은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등산을 매우 좋아하는 그의 성격상 날씨 좋은 일요일에도 책상머리에 앉아 원고를 끊임없이 다듬어야 하는 일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완벽주의자적인 면모 또한 그를 괴롭혔다. 책 한 페이지를 열 번을 고친 적도 있고, 문장을 다듬는 데 세 시간을 씨름하기도 했다. 그는 책을 구술할 때면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자료에 파묻혔던 모양이다.
그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는데 심리학계에서는 이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3학파라 부른다. 아우슈비츠가 없었다면 그는 그저 많은 신경과 의사 중 한 명이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가정을 상기시켜보면 그는 자신의 책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그는 그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타이틀만 보아도 어마어마하다. 빈 의과대학의 신경정신과 교수, 미국 인터내셔널 대학 로고테라피 교수였으며, 미국에서만 52개의 정규 과목을 가르쳤다. 로욜라 대학교 등에서 명예 박사학위도 받았으며 오스트리아 심리 의학협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오스트리아 과학학술원의 명예회원이다.
그는 두 번째 아내 엘리와 함께 유럽,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학에서 200회 이상 강연을 했다. 그 이외에도 교황 바오로 6세와 알현했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미망인의 초대를 받아 워싱턴 D.C에 가기도 했다.
그는
아주 훌륭한 프레젠터이기도 했다. 몇 가지 아주 멋있는 답변을 여기 적어본다.
텍사스 주의 중심 도시 오스틴의 시장이 그를 명예시민으로 추대했을 때 그는 이렇게 화답했다.
“저는 명예시민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명예 로고테라피 심리학자로 추대하는 게 맞을 겁니다. 텍사스 출신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이 나와 또 다른 많은 이들을 튀르크하임 수용소에서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텍사스 군대의 역할이 중요했다!) 아마 1945년 이후 빅토르 프랑클의 존재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로고 테라피도 없었을 것입니다. “ 시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프랭클이 빈으로 돌아왔을 때 받았던 많은 질문 중에 하나는 굳이 빈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서, 어머니는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형 또한 아우슈비츠에서 세상을 떠났다. 첫 아내는 스물 다섯살에 베르겐ㅡ벨젠에서 죽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나에게 누가 뭘 해준단 말입니까? 빈에는 생명의 위협을 받던 내 사촌 누이를 수년 동안 자기 집에 숨겨주었던 가톨릭 교인인 남작 부인이 있었습니다. 또한 얼굴 정도만 아는 변호사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은 채 언제든 틈만 나면 남몰래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죠. 내가 빈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어떤 이유가 있었어야 했을까요?”
1946년 그는 의료진들과 함께 빈 대학의 신경과 병동에서 회진을 돌고 있었다. 그는 한 병실을 나와 또 다른 병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 때 젊은 간호사가 다가와서 상관의 부탁으로 프랭클의 부서로 이송된, 임시 침상에 있는 환자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갓 수술을 마친 환자였다. 그가 알았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감사의 미소를 지으며 물러섰다. 그는 조교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저렇게 눈이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1947년에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그녀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엘레노어 카타리나 슈인츠다.
두 사람 사이에 가브리엘라(아동 심리학자)라는 딸이 있었고, 사위는 프란츠 베젤리(빈 대학 물리학과 교수)이다. 빅터 프랭클은 1997년에 9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그가 1905년생이니 아흔 두 살에 죽은 셈이다. 오래 산 덕분에 손자녀인 카타리나와 알렉산더뿐 아니라 증손녀인 애나 빅토리아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자세하게 묘사된 강제수용소의 고통스러운 에피소드들을 읽으며 저자가 안쓰러웠는데 연구업적, 명예, 부 뿐아니라 수명에서까지 당시에 고생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좋아 보였다. 또 그 가족들 입장에서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가 천수를 누리다 가신 셈이라 많이 부러웠다.
2. 마음을 무찔러 들어오는 구절
9. 내가 원했던 것은 독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10. 강제 수용소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것이 입증된다면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11.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읻.ㅏ
10.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ㅡ얘기하건대 언젠가는! ㅡ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15.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엮어 하나의 확고한 형태를 갖춘 의미와 책임을 만들어내는 것., 로고테라피의 목표이자 과제이다.
17. 프로이트는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서로 모순되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안에서 찾았다.
17. (프랭클은) …원인이 환자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구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바념ㄴ에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8. 그는 인간이 ‘우스꽝스럽게 헐벗은 자신의 생명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았다.
19.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
19. 니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제품에도 해당되는 말)
25. 이 책은 강제수용소에서의 일상이 평범한 수감자들의 마음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쓴 것이다.
28. 감시병이 어떤 수감자를 벌주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저 그 번호를 힐끗(그 눈초리를 얼마나 무서워했던가!) 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절대로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29.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29. 책에서는 비록 실제 일어난 일이더라도 그것이 한 개인의 체험과 관련된 경우에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런 체험의 명확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32. 실제로 담배를 필 수 있는 특권은 카포들에게만 주어졌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일정한 양의 담배를 지급받았다. 때로는 창고나 작업장의 감독으로 일한 사람들이 위험한 일을 한 대가로 담배 몇 개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수 없었는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었거나 아니면 자기에게 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저 ‘즐기려는’’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였다. 따라서 어느날 동료가 자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지탱해나갈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그 믿음을 잃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는 힘들었다.
34. 잠시 후 기차가 덜컹거리며 옆 선로로 들어갔다. 종착역이 가까워진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 불안에 떨고 있던 사람들 틈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우슈비츠야. 저기 팻말이 있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멈췄다. 아우슈비츠! 가스실, 화장터, 대학살. 그 모든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이름, 아우슈비츠!
35. (홍보수감자) 그 중에는 우스개 소리를 던지는 사람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그것이 아주 기괴하게 느껴졌다.
36. 집행유예 망상,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37. ‘즐거운 저녁 한때’를 위해 필요한 슈냅스를 사는 데 몇 천 마르크의 돈이 필요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장기수들에게 슈냅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술로 자기 자신을 마취시키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누가 그런 비난을 하겠는가?
37. 그런데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 중에는 나치대원으로부터 거의 무제한으로 술을 공급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스실이나 화장터에 배치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언젠가는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로 대치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37. 우리는 곧 눈앞에 펼쳐질 장면 뒤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를 몰랐다.
39.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최초의 선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첫번째 판결이었던 것이다. 우리와 함께 들어온 사람의 90퍼센트 죽음 행을 선고 받았다. 판결은 채 몇 시간도 못 되어 집행되었다.
40. 수용소로 이송된 사람 중에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던 우리 생존자들은 저녁이 되어서야 진ㄴ상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사람에게 내 동료와 친구 P가 어디로 갔는지를 물었다. .
“그 친구가 왼쪽으로 갔습니까?”
“네”
내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마 저기로 갔을 거요.”
이런 대답이 들렸다.
“어디요?”
그러자 그가 손가락을 들어 몇 백 야드 떨어진 곳에 있는 굴뚝을 가리켰다. 굴뚝은 폴란드의 회색빛 하늘 위로 불기둥을 내뿜고 있었다. 불기둥은 곧 불길한 연기구름으로 변했다.
“당신 친구가 간 곳이 바로 저기요. 아마 지금쯤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을 겁나다.”
41. …결혼반지나 메달 혹은 호신품 같은 것을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되느냐고 묻는 순진한 사람도 있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일을 도와주기 위해 와 있던 고참 수감자가 웃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압수당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42. 그래. 그는 이해하는 듯 했다. 희미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서 번져나갔다. 표정이 처음에는 동정어린 빛을 띠더니 점점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이 웃음이 경멸과 비웃음으로 바뀌는 듯하더니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수용소 생활을 체엄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도 통용되고 있는 말이다.
“빌어먹을놈!”
그 순간 나는 진실의 실체를 보았다. 그리고 심리적 반응의 제 1단ㄴ계를 특징짓는 감정, 즉 충격을 경험했다.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 전부를 박탈당했던 것이다.
43. 샤워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은 우리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는 이제 벌거벗은 몸뚱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43.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그 동안의 삶과 현재를 연결시켜 주는 물건 중 과연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46. 나 같은 의학도가 수용소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우리가 공부했던 "교과서가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이었다. 교과서에는 사람이 일정한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안흥면 죽는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47.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을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48.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49.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은 첫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도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51.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 정상적인 것이다.
52. 그 다음 단계는 상대적인 무감각의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54. 그는 그것도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소년의 발가락은 이미 동상에 걸려 있었는데 의사가 집게로 시커멓게 썩은 살을 하나씩 끄집어 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정말로 혐오감과 공포, 동정심 같은 감정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죽어가거나 또 이미 죽은 것은 너무나 일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56. 바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창문 옆에서 얼어 붙은 손으로 뜨거운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는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창밖을 보게 되었다. 방금 전에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57. 인간이 더 이상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서와 감정의 둔화를 의미하는 무감각은 수용자들이 보이는 정서적 반응의 두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징후이다.
57.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58. 그런데 그때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은 무례한 행동이나 주먹질이 아니었다. 넝마 같은 옷에 초라한 몰골을 하고 서 있는 나를 인간의 형체를 한 물건쯤으로 여겼는지 말은 물론 욕지거리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58. 구타를 당할 때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이 주는 모멸감이었다.
60. 그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61.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동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나서 내 분노가 어린아이처럼 누그러졌다는 사실이다.
"저렇게 짐승 같고 야비하게 생긴 작자가 우리 병원에 오면 아마 간호사들이 대기실에도 들여보내지 않고 쫓아낼 걸."
64.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지게 된다.
65. "자, 이제 또 하루가 지났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65. 그와 같은 긴장상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필요성과 결합되어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65. 이것은 정신세계가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그들의 소원과 욕망은 꿈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65.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와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이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꿈 속에서나마 소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73. 그래서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보다 더 분통터지는 사람들은 도저히 못 말리는 낙관주의자들이었다.
74. 몇 시간 동안 나는 마음 속으로 글을 썼다. 아우슈비츠 소독실에서 잃어버린 원고를 다시 되살리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작은 종이 조각에 요점이 되는 단어들을 속기로 적었다.
75. 패자에게 슬픔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기억이 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는 아마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런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말이 우리가 석방되기 전, 전쟁이 끝나기 불과 몇 달 전인 바로 그 시점에 그의 '영혼'에 작용을 한 것임에 들림이 없다.
75. 밖에 있을 때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그런 사람들은 흔히 에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75. 그들은 정시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78.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8.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추족감을 느낄 수 있다.
79.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되다. 사랑하는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79. 나는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랐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수용도에는 오는 편지도 가는 편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내 사랑의 굳건함, 내 생각, 사랑하는 사람의 영상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80. 나는 상상속에서 버스를 탔고, 열쇠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문을 열었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전등을 껐다. 우리 생각은 대개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런 기억들이 때로 우리 마음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82. 곧닥쳐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꼇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으며,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86. 너무 많이 연주되어서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곡이 아니었다.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흐느꼈다. 바로 그 날은 어떤 사람이 24번째 생일을 맞는 날이었다. 그 사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다른편 막사에 누워 있다. 어쩌면 겨우 몇 백 야드 혹은 몇 천 야드에 불과한 거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 갈 수 없는 그곳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바로 내 아내였다.
86.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88.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92.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 ㅡ 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 ㅡ 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99. 나는 간절하게 꿈을 꾸었다. 그러면 내 마음은 북쪽에서 북서쪽, 나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구름뿐이었다.
101. 그 '번호'의 생명은 철저하게 무시된다.그 번호의 이면에 있는 것, 즉 그의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된다. 그의 운명과 그가 살아온 내력 그리고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102. 나는 대체로 모든 종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딱 꼬집어서 질문을 받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104. "나는 내 친구들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연민의 빛을 띠었다. 마치 내 운명을 알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그는 말없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것은 삶을 위한 악수가 아니라, 삶과 작별하는 악수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에는 친한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정말로 그 사람들과 함께 가기를 원하나?"
그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네. 나는 갈 거야."
그러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런 다음 할 일이 있었다. 유언을 하는 것이었다.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네가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 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번째로 내가 그녀와 함께 했던 그 짧은 결혼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 주게."
오토.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살아있나?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네 아내를 다시 만났나? 그리고 기억하나? 자네가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자네에게 내 유언을 한마디 한마디 외우게 했던 것을.
105. 나를 불쌍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우리가 새로 들어간 수용소보다 훨씬 혹독한 기근에 시달렸던 그 수용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바버둥쳤지만, 결국 자신의 정해진 운명을 확인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06. 이것이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한 돈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승낙을 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안으로 들어가싿.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 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게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지요."
110. 나는 막사 밖으로 뛰어나가 친구에게 그와 함께 탈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연한 태도로 환자 곁에 그대로 남기로 했다고 친구에게 말하자마자 그 불편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막사로 돌아가 고향 친구의 발끝에 앉아서 그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114. 그로부터 여러 주가 지난 후, 우리는 이 마지막 순간에도 운명의 신이 우리를 우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는 인간의 결정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그것이 특히 생사와 관련된 문제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수용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수용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그날 밤 자유를 향해 간다고 믿었던 우리 친구들은 트럭에 실려 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막사 안에 갇힌 채로 불에 타 죽었다. 사진으로도 군데군데 불에 탄 동료들의 시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또 다시 테헬란에서의 죽음을 생각했다.
118. 다른 사람이 무감각한 것을 보면, 특히 그 때문에 위험한 상황(예를 들어 검열이 임박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보면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다.
120.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120.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120.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120.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121.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저긍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122.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122.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반면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 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122.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122.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122.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려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살마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ㅡ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124. 그 젊은이는 언젠가 자기가 본 영화 이야기를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아주 용감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기다리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영화였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죽음을 그렇게 의연하게 맞는 것이 인간으로서 참 위대한 성취였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제 운명이 자기에게 그와 똑같은 기회를 주었다고.
125. 이 젊은 여자는 자기가 며칠 안에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녀는 아주 명랑했다.
나는 운명이 나에게 이렇게 엄청난 타격을 가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그 전에 나는 제멋대로였고, 정신적인 성취 같은 것이 데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거든요."
그녀는 창밖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는 이 나무가 내 외로움을 달래 주는 유일한 친구랍니다."
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밤나무 가지 한 개와 그 위에 피어 있는 꽃 두 송이였다.
"저는 저 나무와 자주 이야기를 나눈답니다."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한순간 어리둥절 했다.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헛소리를 하는 것일까? 환각에 빠졌나?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나무가 대답을 하는지 물었다.
"물론이지요."
나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녀는 말했다.
"나무가 이렇게 대답해요. 내가 여기 있단다. 내가 여기 있단다. 나는 생명이야. 영원한 생명이야."
126.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
127.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새으이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128. 기이한 '시간 감각'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130.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130.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130.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131.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ㅗ히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132. 그러다가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강제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고, 그 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스피노가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137.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상황도 견딜 수 있다."
138.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138.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139. 각각의 상황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139.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140.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시하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낸 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40.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 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140.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42.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145. ...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ㅡ 이것은 마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145. 니체.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146. 과거에 있었던 그 모든 즐거운 일들과, 그 빛이 현재의 어둠 속에서도 얼마나 밝게 빛나고 있는지를.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146. 우리가 그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147.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147. 직면.
147. 나는 누군가가 ...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죽어야 하는지를 알기를 바란다고.
151. 인간의 자애심은 모든 집단, 심지어는 우리가 정말 벌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집단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과 집단 사이의 경계선이 서로 겹쳐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천사, 저 사람들은 악마라고 부르면서 문제를 단순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153. 지난 몇 년간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얼마나 자주 이단어를 입에 올렸는지 이제는 그것이 의미를 잃고 말았다.
154. 우리가처음으로 불꽃 튀는 것 같은 기쁨을 느낀 것은 꼬리에 여러 가지 색깔의 깃털을 단 수탉을 보았을 때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154.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154.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없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얼마나 많이 꿈에게 사기를 당해 왔던가!
155. 육체는 처음부터 새롭게 얻은 이 자유를 잘 활용했다. 드디어 우리 육체가 게걸스럽게 먹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몇 시간 동안, 며칠 동안, 그리고 심지어는 한밤중에도 우리는 먹었다.
155. 그의 혀를 풀리게 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몇 년 동안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마침내사라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알았을 것이다. 그에게 말이 필요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는 것을.
156. 자유를 츶은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수용소 근처에 있는 시자응로 가기 위해 꽃들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 시골길을 걸었다. 종달새가 하늘로 날아올랐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주변 몇 마일 안에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대지와하늘, 종달새의 ㅘㄴ호 그리고 자유로운 공간만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ㅡ 그런 다음 무릎을 꿇었다. 그 수간 나는 내 자신은 물론 이 세상에 ㄷ해서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단 한가지만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그때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말을 되풀이했는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바로 그 순간부터 새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는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157. 이런 심리적 단게에서 원색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야만성의 영향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 자유를 마치 특허를 받은 거서럼 잔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58.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권리는 어느 누구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160. 슬프다! 수용소에서는 그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용기를 주었던 그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여! 슬프다! 마침내 자유가 실현되었을 때, 모든 것이 자기가 꿈꾸어오던 것과 너무나 다른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여!
161. 당시 우리가 바라던 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행복을 바라면서 스스로 용기를 얻고, 우리가 겪는 시련고 희생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행을 견딜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61. 그러나 이것 때문에 낙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167. 로고테라피는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169. 물론 마음 소게 숨겨져 있는 내적 갈등을 감추기위해 가치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위장하는경우도 있을 수 있다.
170.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의지도 좌절을 당할 수 있다. 이것을 로고테라피에서는 '실존적 좌절'이라고 한다. '실존적'은 1)존재 그 자체, 즉 인간 특유의 존재방식 2)존재의 의미 그리고 3)각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 즉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171. 실존적인 문제.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한다.
175. 이 이야기에서도 알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어느정도 긴장 상태에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175. 주석. 이 원고를 새로 쓰고 싶다는 나의 강렬한 열망이 가혹한 환경 속에서 나를 살아남도록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바바리아 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고 있을 때, 나중에 원고를 다시 쓸 때 도움이 되도록 나는 작은 종이조각에다 수없이 많이 메모를 했다. 바바리아 강제수용소의 어두운 막사 안에서 잃어버린 원고를 다시 쓰는 이 작업이 내가 죽음의 위험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76.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176.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177.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그런 동물적 본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본능에 대한 새로운 평가라고 판단
178. 실제로 요즘은 고민보다는 권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확실하다.
179. 게다가 이런 실존적 공허는 가면을 쓰거나 위장을 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권력욕으로 그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욕인 돈에 대한 욕구도 포함되어 있다. (권력=돈)
179. 이런 실존적 공허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면, 더 이상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1.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각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되어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181.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181.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182.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해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가가라."
이 말처럼 인간의 책임감을 자극하기에 좋은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첫째 현재가 지나간 과거라는 생각을 하게도리 것이고, 둘째, 그 지나간 과거가 아직도 변경되고 수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교훈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유한성'은 물론 그가 자신과 자신의 삶으로부터 성취해낸 성과의 '궁극성'과도 대면하게 만든다.
183.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취해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수도 잇다.
183. 사람이 자기 잣니을 잊으면 잊을수록 ㅡ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ㅡ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185. 사랑으로 인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게 된다.
185.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이런 잠재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85. 사랑은 섹스와 마찬가지로지극히 근원적인 하나의 현상이다. 섹스는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섹스는그 안에 사랑이 담기는 순간, 아니 사랑이 담겨 있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성화될 수도 있다. ... 섹스를 사랑이라 불리는 궁극적인 합일의 경험을 표현하느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86. 그것(아무리 절망스런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있다)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186. 명쾌한 사례를 하나 들어보겟다. 한번은 나이 나긋한 개업의 한 사람이 우울증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다. 내가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을 제외하고는 말을 될 수 있는대로 자제했다.
"선생님. 만약 선생께서 먼저 죽고 아내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 세상에! 아내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그것 보세요. 선생님. 부인께서는 그런 고통을 면하신 겁니다. 부인에게 그런 고통을 면하게 해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그 대가로 지금 선생께서 살아남아 부인을 애도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188. "오늘날 정신건강 철학은 인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가치체계가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의 짐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만들어 온 것이다." 조지아 대학 심리학 교수 이디쓰 와이스코프 조웰슨
188. "불행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불행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피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시련에 수치심보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고 있는 미국 문화의 잘못된 풍토를 바로 잡는 데에 로고테라피가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 이라는 희망을 피력한 바 있다.
189. 그때까지도 나는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해 오던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내가 이미 갖고 있었으며, 그 후 곧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내게 주어지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그 대신 아우슈비츠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곧 가스실로 보내진 수감자의 누더기 옷을 물려받았을 때였다.
189. 그 동안 써놓았던 책의 원고를 빼앗긴 대신 나는 물려받은 그 외투에서 희브리 기도책에서 찢어낸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유대교의 기도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셰마 이스라엘이었다. 나는 이렇게 기막힌 '우연의 일치'를 단지 종이에 적지만 말고 그대로 '살라고'하는 신의 계시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 임종의 순간을 맞아 과거를 돌아본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갑자기 자기 삶이 갖고 있는 의미, 녀의 고통까지 포함된 자기 삶의 의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196. 나는 아이를 낳는 것이 삶의 유일한 의미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삶 그 자체는 의미 없는 것이 되고, 그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은 그것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사실만으로 의미를 갖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197. 나는 인생에서 정말로 무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재 가능성이라는 말을 입이 닳도록 해왔다. 가능성은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바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과거로 옮겨간다. 이렇게 과거 속으로 들억ㅁ으로써 일회성을 탈피해 영원한 실체로 보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속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속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된 상태로 보존된다.
198.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낸 달력의 뒷장에다 중요한 일과를 적어 놓은 다음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 놓는 사람과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 있는 그 풍부한 내용들, 그 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반추해 볼 수 있다.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200. 예기 불안. 이증상의 특징은 환자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 바로 그 증상이 정말로 나타난다는 데에 있다. ... '소원은 생각의 아버지'라는 말을 '공포는 사건의 어머니'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200. 쾌락은 어떤 행위의 부산물로, 파생물로서 얻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얻어져야만 한다. 그것 자체가목적이 되는 정도가 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망가진다.
201. 어느 날 한 젊은 여성이 나를 찾아와 불감증을 호소했다. 병력을 살펴보니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성적인 학대를 받은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불감증을 느끼는 것은 충격적인 경험 그 자체 때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환자가 그 동안 정신분석에 관한 책을 읽고 자신의 충격적인 경험이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살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런 예기 불안은 자신의 여성다움을 확인하고 싶다는 과도한 의욕과 함꼐 상대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과도하게 주의를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203. 고든 W 알포트, 개인과 종교 the individual and religion
신경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205.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고 역설의도가 간단한 증상에만 적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빈 외래병동에서 일하는 내 동료들은 이 로고테라피 치료기법을 가지고 정도가 심하고 오래 된 강박성 신경질환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도 성공했다.
209.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가르침, 즉 인간은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의 결과물이거나 유전과 환경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이론은 태생적으로 위험을 안고 있다. 인간을 이런식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홙로 하여금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 즉 자기가 외적인 영향과 내적인 환경의 담보물이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믿게 만든다. 이런 신경증적 숙명론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심리치료법에 의해 조성되고 강화된다.
210.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인간의 자유 또한 제한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조건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211. 인간은 조건 지워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211.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211.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211.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은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213. 기계나 자동장치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정신의 메커니즘이나 역동성에 대해 예측하려고 놀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정신을 넘어선 존재이다.
213. 책임이라는 적극적인 측면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극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책임이 전제되지 않는 자유는 방종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214.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 비록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지만이런ㅅ람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있는 법이다.
215. 인간은 여러 개의 사물 속에 섞여 있는 또 다른 사물이 아니다.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게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있다.
215.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220. 중요한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 하는것이다. '최선'이란 라틴어로 '옵티넘optinum'이라고 하는데, 내가 비극속에서 낙관 optimism'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20. 사람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모든 가능성에 대해, 모든 희망에 대해 가리지 않고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다. ... 믿음과사랑도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221. 유럽 사람의 눈에는 미국의 문화가 인간에게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221.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221.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221.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을 웃게 하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면 된다.
222.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 그렇다면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아주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222. 나는 스스로를 '미래가 없는'세대라고 부르는 젊은이들을 생각해본다....가장 최근에 빈에서 실시한 통계조사를 보면 전체 인그의 29퍼센트가 자신들의 삶에서 의미가 실종되었다고 호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24.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을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과 동일시하고, 쓸모없게 되었다는 것을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과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224. 엄청나게 남아도는 자유 시간을 비록 돈을 받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일에 쓸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그렇게 하자마자 경제 상황에 변화가 없고 전과같이 굶주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우울증이 사라지고 말았다. (손녀를 돌보아주는 할머니)
229. 의미에 대한 지각은 현ㄴ실에 깔려 있는 가능성을 깨닫도록 만든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일이 행해져야 하는 가를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229.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은 사람들의 삶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며 공부하는것 뿐이다.
229. 가치들은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그 무엇으로 인류의 진화과정을 통해 구체화되어 왔다. 그 가치들은 인간이 하나의 생물로서 살아온 지난날의 역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심오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233.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은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는일이다....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237. 삶의 순간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시간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으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237. 적절하게 행동할 기회와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실제로 우리 삶이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237. 사람들은 그루터기만 남은 일회성이라는 밭만 보고, 자기 인생의 수확물을 쌓아 놓은 과거라는 충만한 곡물창고를 간과하고 잃어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 수확물 속에는 그가 해놓은 일,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용기와 품위를 가지고 견뎌냈던 시련들이 포함되어 있다.
238. (노인들의 보물) 미래에 대한 가능성 대신 과거 속에 실체, 즉 그들이 실현시켰던 잠재적 가능성들, 그들이 성취했던 의미들, 그들이 실현시켰던 잠재적 가능성들, 그들이 성취했던 의미들, 그들이 깨달았던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과거가 지니고 있는 이 자산들을 가져갈 수 없다.
238.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 삶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은 절대 안다.
239. 인간의 존엄성을 단순한 유용성과 혼동하는 것은 개념상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241. 주인의 목소리를 그저 흉내내기만 하는 앵무새를 키우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횃불을 독립적이고, 독창적이고,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영혼에게 전달하는 데에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험담을 담은 여러 사례집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모든 저자들이 빅터 프랭클 같은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성공 요소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 번째, 생생한 사건 전달을 통해 독자가 저자에게 완전히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다. 독자가 프랭클이라는 개인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다. 1장을 다 읽을 때쯤 독자들은 삶을 박탈당했던 한 심리학자가 수용소에서 나온 뒤에 어떤 삶을 걸어갔는지 궁금해진다. 나는 저자를 따라 기차를 타고 아우슈비츠에 가 그와 함께 행군하고 그의 옆에서 잠들었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저자의 행보에 이입할 수 있었고, 심리학자였던 저자가 자유를 얻은 뒤 창시한 심리학 이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빅터 프랭클이라는 개인의 성취에 대해 궁금해졌고, 그가 수용소에서 목격하고 깨달았던 것들이 그의 삶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 보고 싶어졌다. 독자에게 결말을 보고싶게 만드는 욕망을 심어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사례와 묘사와 구성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실제로 저자의 개인적 경험이 심리 치료학인 로고테라피라는 제3학파의 창설에 크게 기여했다. 첫 책부터 로고테라피 이론만으로 낸 전문 서적으로 책이 이루어져있었다면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따분한 책이 되었을 것이다. 잡힐 듯이 생생한 사건 묘사가 그가 집어넣은 많은 사례들을 글 속에서 끄집어 내서 독자들에게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접착제처럼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든 요소였다.
세 번째, 독자에게도 자신의 셰마 이스라엘 기도서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도록 화두를 던졌다. 저자의 삶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이론을 확인해가면서, 독자들은 그가 시련을 통해 바라본 의미를 찾는 과정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본다.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던 의미와 일상이 새롭게 연결되고, 현재는 새로운 의미를 함축한 시간으로 재탄생 된다. 이 마지막 기능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심리학을 전혀 공부해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저자가 특정 경험을 특정 심리이론과 붙여놓고 이름 붙여 놓은 것이 좀 생소했다. 원래 학문적 용어가 실생활과 괴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책은 애초부터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흐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갑자기 동떨어진 용어들이 나오는 것이 굉장히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오히려 내가 저자였다면, 그리고 내가 심리학 혹은 신경과를 전문의 수준으로 공부했다면 각 증상과 진단을 많은 환자들을 대하면서 보아왔을 것이고, 경험에서 우러난 나만의 용어로 정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용어와 함께 곁들였으면 그 부자연스러운 두드러짐을 완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빅터 프랭클이 밝혔듯이 ‘로고테라피가 무엇이다’라는 것은 방대한 연구결과를 정리한 것으로 몇 십장의 지면으로 완결 짓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그것을 좀더 덜 전문가스럽게 설명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그의 책을 읽었지만, 당장 몇 주만 지마녀 아주 인상적인 그의 수용소 경험 몇 가지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했 살았던 열정의 울림’만이 남을 뿐, 로고테라피 이론에 대한 그의 설명들은 거의 잊어버릴 것이다. 즉, 좀더 일반적인 독자들을 위한 풀이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나는 이 책이 좀 더 많은 인상적인 장면들을 포함하기를 바랐다. 특히 친구 오토에게 아내에게 전하는 유언을 남기는 장면, 처음 물려받은 수의 주머니에서 셰마 이스라엘이 적힌 종이가 나오는 순간 같은 장면들은 책을 다 읽고 덮어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이 좀더 많은 순간들을 붙잡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뇌리에 새겨진 특별한 장면들로부터 모든 깊이 있는 울림들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은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에 관한 1부와, 2부의 로고테라피 소개, 그리고 이 책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3부의 비극 속에서의 낙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지고 있는 컨텐츠를 최적으로 분배했다. 프랭클은 수용소 생활 중간중간에 생긴 종이에 개요를 구성했다고 하는데 그 때 써둔 소제목들이 책을 집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책에 잘게 잘게 붙여진 소제목들은 수용소에서 그가 썼던 꼭지의 이름들일텐데, 이 흩어져있는 꼭지들을 묶어주는 상위 목차가 있었더라면 좀더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처럼 마음이 동한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읽고 싶은 부분이 생각나면 바로 찾을 수 있도록 독자를 좀더 배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를 지배했던 가장 강력한 감정은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책에 실린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했는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승낙을 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 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게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지요." p.106
이 이야기를 읽고 나서는 책에 나오는 모든 운명적인 순간들이 하나의 실에 목걸이처럼 꿰어졌다. 마치 영화의 절정처럼, 나는 인간으로서 한치 앞의 자기 운명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한계를 절감했고, 그것이 나를 두렵게 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일수도 있으며, 내가 이 중대한 찰나를 신중하고 온 마음으로 즐겁게 지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 책은 현재의 정수이며, 죽음이란 지금을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명암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필멸의 고단함이 결국 삶을 긍정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