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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7일 03시 30분 등록

No 41-42

2014.02.10 - 02.17

Oh! 미경

 

지승호가 묻고 강신주가 답하다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강신주, 지승호 지음/ 시대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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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판 2013년 5월 13일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뜨고, 5주 50시간 4,500매의 기록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에 바치는 헌사이다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지구상에 유일한

나’라는 고유명사를 가져야 한다

책을 읽어도 , 음악을 들어도. 시를 봐도

그림을 보더라고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인문학은 나의 발견이다

스스로 자유로워야 자기를 긍정할 수 있고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으로부터 사랑받는다

 

자기가 반영되고

자기의 삶이 투영되는

책읽기를 해야 한다

삶에 직면하고

살아감에 직면하는 글을 써야 한다

실천하도록 하는 글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글

모든 글은 고통이든 기쁨이든

감정을 느낀 다음에 써야 한다

 

정직해라.

네가 쓰레기면 쓰레기라는 것을 밝혀야

네가 쓰레기라는 것에서 벗어난다.

자신의 남루함을 자각해야

자신이 부끄러워서 벗어난다

 

언어의 궁극적인 목적은 항상 침묵이고

침묵은 실천이거든요

이제 입으로 말하지 말고

행동으로 말하라.

 

1. 저자에 대하여: 강신주, 지승호

 

1. 저자에 대하여

강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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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함양 출신 소년 서울에서 콧물 때문에 뺨맞다

 

강신주 가족은 함양에서 올라왔다. 문중 싸움 때문에 재산도 하나 없이 누나와 강신주만 데리고 함양에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몸부칠 곳 하나 없는 가족은 청량리 역에서 사흘을 잤다. 당시 면목동 쪽에서 과수원이 많았는데 강신주 가족들이 불쌍해서 데려왔다. 머슴이 살던 배밭. 생활하는게 힘들어서 부모님은 두 아이들을 돌볼수가 없었다. 외가쪽에서 받은 비여 때문에 강신주는 콧물이 계속 나왔다. 콧물을 계속 소매로 닦다 보니 소매가 빤질빤질해져서 더럽다고 여자 아이들이 그를 싫어했다. 작꿍이 됐던 여자아이도 소년이 더러우니까 곤혹스러웠다.

 

어쨌든 소녀 어머니가 일주일 뛰쯤 학교에 왔다. 담임을 만나러 가는 길에 교실에서 소년을 쓰다듬어주고 갔다. 예쁘장한 아주머니가 쓰다듬음을 받은 소년은 정말 좋았다. “아유, 똘망똘망하게 생겼네. 깨끗하게 씻으면 더 예쁘겠다”하고 갔다. 그런데 담임이 올라오더니 “더러운 새끼”하면서 다짜고짜 뺨을 때렸다. 그때 이후로 소년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씩 짝을 바꿨다. 고통 분담을 하자는 거였다.

 

1-2. 소년 작가 탄생

 

특별활동을 해도 집이 가난하니까 리코더 살 형편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는 교사들이 학교 앞 문방구에서 리베이트를 받고선 비싼 걸 쓰게 했다. 강신주는 집이 가난한 걸 아니까 부모님한테 돈 달라고 못 해서 매번 맞거나 미술 시간에 손들고 있었다. 특별활동 시간도 돈 들어가니까 소년에게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글쓰기반에 들어갔다. 돈이 안드니까. 4학년 때인가 5학년 때인가. 선생님이 글을 하나 쓰라고 해서 썼다. 그런데 소년의 글이 서울시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 그 학교에서 서울시에서 상 받은 아이는 강신주가 처음이었다. 조회 시간에 단상에 올라가서 글을 읽었다. 그 다음부터는 여자애들이 달라졌다. 소년 작가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1-3. 애정 결핍이 글쓰기의 동력

 

강신주는 그때 배운 게 ‘글 쓰면 사랑받는다’ 라는 큰 경험을 한다. 군대 갔다 와서 외국어를 잘했고 소설을 좋아한 그는 영어 산문 강독 수업 들었다. 수업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다뤘는데 평론을 쓰라고 했다. 물방울 안에 우주가 있는 것 같은 몽환적인 단편에 대한 평론을 썼는데 글이 너무 좋아서 영문과 애들이 그를 보면서 부끄럽다고 했다. 그때 그는 사랑받는다는 경험을 또 한다.

대학원 철학과 수업은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글을 써서 발표한다. 외부 학생들도 들어올 수도 있고 다른 과 대학원생도 들어온다. 사람들이 수업 후 “오늘 글 정말 좋았어요” 한마디에 강신주는 힘을 받는다. ‘더 예쁘게 써야. 더 멋있게 써야지. ’이런 동력들. 그는 말한다.

 

‘애정 결핍이라니까요. 충만했으면 글을 안 썼을 거에요. 그때 발견한 거죠. 꼬맹이 때의 강렬한 추억, 최소한 글을 쓰면 사랑받는구나

어떻게 보면 애정 결핍도 마약 중독처럼 점점 더 센 걸 요구할 수도 있을 텐데. 강신주는 글을 쓰면서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가. 그리고 내 글이 나인가. 예쁘게만 써서 사랑받으면 내가 사랑받는게 아니다. 지금은 어떤 글을 쓰든 내가 정직한가. 이게 옳다는 것을 내가 믿고 갈 수 있는를 생각한다. 지금은 사랑해주면 고맙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면서 강해진 자신을 본다.

 

1-4. 진로는 어쩌다가?

 

고등학교 3학년때 사회학과로 원서를 썼으나, 부모님의 작당(?)으로 이과인 화공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연세대 화공학과 졸업하고 유공 회사를 다녔다. 정전기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껴 6개월만에 그만뒀다. 서울대에서 동양철학으로 석사학위를, 연세대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86학번(1967년생)으로 80년대 대학 사람들은 읽은 책의 60~70퍼센트가 인문사회책이다.

 

강신주는 80년대 중후반에 김현 책을 많이 읽었다. 인문, 사회과학, 마르크시즘 책도 읽었지만 김현 책도 안 놓쳤다. 김현 서평을 읽으면 책을 사게 되었다. 평론가의 매력은 그것이었다. 그 영화를, 그 소설을 보게 만드는 것. 그에게 저자의 진정성을 울렸다.

장자사상을 전공한 동양철학자이면서 서양철학의 흐름에도 해박한 그는 쉽게 읽히는 인문학을 지향하며 거리의 철학자로서 그를 부르는 어느 곳에서 가서 강의한다. 하루에 2.5회 강연하고 책을 쓴다. 특히 벙커1 강의할때는 최장 9시간씩 까지도 했다. 그의 강연을 들으면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힐링은 마취제를 주는 위로가 아니라 자신을 똑바로 보게한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말은 자주 사용하는 말은 “-비겁하다, 비루하다, 남루하다. ”이다. 자신을 똑바로 볼 줄 알고 바닥을 보고 자각을 해야만 그것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1-5. 맨얼굴로 글을 쓰고 있는가

 

강신주 철학자는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는가 들어본다.

‘제 글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돼요. 지금은 그 점에서 강해졌어요. 한 해에 4 권 쓸 때도 있고 한권만 쓸 때도 있어요. 네 권 쓸때는 극심한 애정 결핍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요. 살다 보면 대충 걸어갔는데도 천왕봉이 나올 때가 있고, 어떨 때는 아무리 걸어가도 천왕봉이 안 나올 때가 있잖아요. 가족 관계나 여러 문제가 잘 안 풀리고 그럴 때 글을 쓰게 된다고요. 제가 그렇게 글을 쓰기 때문에 정직하게 자기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의 애정 결핍을 본능적으로 알아요. 정직하게 써서 정직한 나의 모습으로 사랑받겠다는 그들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취미로 글쓰는 친구들에게 매번 말한다.

“그러면 리얼리티도 없고, 다른 사람도 울리지 못한다. 너를 울리는 일이 있고, 울음을 삼키면서 글에다 울음을 넣고, 네가 울음을 그칠때 글이 나오는 건데 너는 울음도 없구나. 글쓰지 마라”

 

1-6. 철학자의 꿈은 뭘까?

머리 쓰는 사람은 권력자가 되고, 머리 못 쓰는 아이들이 육체노동을 하는 도식-머리고 먹고 살아라. 몸으로 먹고 살지 말라-인데 그게 잘못이죠. 그걸 넘어서야 인문학이 되는 건데, 시몬 베유 애기가 맞아요. 좋은 사회는 노동자가 시인일 수 있는 사회다. 노동자가 시를 못 읽는 사회는 억압이 있는 사회다. 노동자가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 김수영이 얘기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철학자가 되어서 철학자가 무의미해지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모든 음악가의 꿈도 마찬가지일거다. 모든 사람이 음악을 즐기고 작곡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음악가가 불필요해지는 사회인것처럼.

 

제가 해야 할 역할은 스스로 어떻게 주인이 되는냐 하는 것을 글을 통해서, 강의를 통해서 교육하는 거예요. 그게 근본적인 혁명이라고 봐요. 사랑해서 스스로 자유를 찾고 주인이 되려는 경향이 정치적인 영격으로까지 확장되는 거니까요. 어쩌면 가장 급진적일 수 있어요.

 

1-7. 사람들은 강신주를 뭐라 부르는가?

 

무려 철학박사

 

철학박사 중에서 어디 가서 굽실거리지 않고 이상한 보고서 안 쓰고 살아가는 사람은 본인이 한국에서 처음이라고 주장하는 굽실거리지 않고 당당한 없는 강신주.

그게 하루아침에 된 것은 아니고요. 제가 단행본만 17권을 썼잖아요. 지지지 않고 쓸게 있었고, 그러다 네댓 권 중 하나 얻어 걸려서 갑자기 뜨는 거죠. 감자기 글이 잘 써지는 건 아니에요. 지금은 어느 정도 고정 독자층이 형성됐는데, 제 책을 읽고 고정 독자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 지난 6,7년간 만났던 사람들도 많아요.(238)

 

1-8. 저서로는 약 30여권

장자의 철학

공자 & 맹자

장자 & 노자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중국 철학 이야기

과학이 나를 부른다

스승 이통과의 만남의 대화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대한민국 청소년에게

생각하고 토론하는 중국 철학 이야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회남자 & 황제내경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장자 읽기의 즐거움 망각과 자유

철학 삶을 만나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상처받지 않을 권리

철학 VS 철학

철학이 필요한 시간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관중과 공자

철학의 시대

김수영을 위하여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철학자, 철학을 말하다

강신주의 다상담1

강신주의 다상담2

강신주의 다상담3

강신주의 감정수업

 

2. 가슴에 와 닿는 글

 

지난번에 이어서 게속 합니다.

 

[152]

지: 강준만 선생이 <멘토의 시대>라는 책을 냈는데요. 강신주 선생께서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설 수 있고 각자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강: 멘토의 시대는 파시즘의 시대라고 정의하면 돼요. 과거에 독일에서도 사람들이 꿈을 못 꿨을 때 히틀러가 등장했거든요. 히틀러의 거대한 꿈에 의지하고, 기대버리는 거예요. 생각을 안하는 거죠. 스스로 돌려고 안 하는 거예요. 멘토의 시대는 위험한 시대예요. 멘토를 찾는다고? 왜 멘토를 찾아요?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만큼 우리가 보수화 됐다는 증거예요. 자기 스스로 꿈을 못 꾸고 누군가가 구원해주길 바라고 있는 거죠. 종교적인 거예요. 모세를 찾는 것과 같아요. 벤야민은 각자가 메시아가 돼야 혁명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어요. 자꾸 메시아를 찾는 데서 근원적 억압을 본 거에요. 메시아, 구원자와 피구원자의 위계가 남잖아요. 멘토는 진짜 위험한 거죠.

 

지: 해방 후 지식인 입장에서는 친일파가 지배하고 있는 남쪽을 택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김수영은 남쪽을 택하지 않았습니까?

 

강: 억압이 존재하는 곳인데 자유에 고통이 없다면 그 자유는 허용된 자유인 거예요. 억압이 존재한다면 자유는 고통스럽기 마련이에요. 김수영에게 고통과 자유는 같은 거예요.

예를 들어 억압이 있는 권위적인 가정에서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저항하면 한 대 맞잖아요. 그런데 말을 했는데도 안 맞았다면, 내가 아버지의 권위를 수용해서 안 맞을 만한 말을 했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이걸 알아야 해요. 억압이 상존하는 곳에서 자유에 고통이 없으면 허용된 자유고 길들여진 자유예요. 그런데 다 자유롭대료. 자본의 억압부터 오만 억압이 다 있는데, 알아서 다 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김수영이 자유를 얘길했을 때 사람들이 그 자유를 잘 모르는 거죠. 자유의 이미지는 아까 말한 역동적으로 돌고 있는 팽이, 그 이미지로 봐야 해요. 그렇게 스스로 도는 것이 곧 저항이고요. 생각해보세요. 애는 이렇게 돌라고 하는데 내가 반대로 돌면 얘가 가만히 있겠어요? 때리죠. 그러니까 지금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는 다 허용된 자유, 기만일 뿐이에요.

 

[155]

너희에겐 언어의 고통 이전의 고통이 없다‘ 김수영이 동시대 문인들을 비판할 때 했던 말인데, 언어 이전의 고통이 뭔지 아세요? 자신이 자유롭고 당당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부딪칠 때, 그때 느껴지는 고통이에요. 바로 그 고통 때문에 자유를 노래할 수 있는 언어의 고통이 생기는 거예요. 그 두가지 고통이 있어야 해요. 자유롭고 당당하지 않은 인간이 글을 쓰면 쓰레기가 돼요. 김춘수만 봐도 언어의 고통만 있는 거예요. 김수영의 자신감은 이거예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언어 이전의 고통이 있었다는 것. 그건 김수영이 자유로웠다는 거예요.

 

김수영은 피로에서 긍지를 느껴요.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오늘은(중략)/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긍지의 날). 매번 자기의 당당한 자유를 실현하느라 깨져요. 그러면 피곤하잖아요. 예를 들어 직장 상사한테 한마디 했다가 당한 거예요. 피로하죠. 그러면서 이러는 거예요. ‘오늘은 내가 조금은 더 자란 것 같다.’

===>

긍지의 날/ 김수영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加)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156]

세계의 위대한 고전들은 동시대적 지평에서 리얼리티와 자유를 실현한 거예요. 그걸 실현하지 못하고 고전으로 남은 건 없어요. 우리가 다 달라도 진짜 사랑하고 진짜 고통받은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리얼리티가 있어요. 그게 인간이고 인문학적 보편성인데 그걸 잘 확보하지 못하죠.

억압이 있는 사회에서 고통이 없다면 동물원 울타리 안에 풀어져 있는 동물과 비슷한 거죠. ‘억압이 있는 사회’에 방점을 직어야 하는 거예요. 억압이 있는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이 노래하는 자유라는 것도 황당무계한 거예요.

 

[157]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민주주의가 어떻게 절차예요? 각자가 주인인데 왜 절차를 미리 정해요. 사람들이 절차를 정해야죠. 제사할 때 절차를 중시하면 늘 홍동백서만 지키면서 제사상을 차리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간짜장을 좋아하셨다면 간짜장을 올려야죠. 그걸 내가 주인이 되어 결정하면 되는 거죠. 절차적 민주주의에 초점을 두면 절차와 민주주의를 같이 놓음으로써 민주주의를 희석시켜요. 형식만 따르면 민주주의가 되리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에요. 저한테는 자기가 가진 법조항들로 기득권을 챙기겠다는 얘기로밖에 안 들려요.

 

<분노하라>라는 책이 나왔는데,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왜 분노하지 않냐’고 하는 거잖아요. 출판사에서 원고량이 부족하니까 뒤에 조국 교수의 글을 실었는데 ‘지금 분노를 잊지 말고 나중에 투표하자’고 해요. 이상하잖아요.

절차라는 규정을 정확하게 아는 전문가들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포획해버려요. 절차를 따지면 변호사나 법학 교수들만 정치를 하게 돼요.

다수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절차를 강조하는 법이에요.

 

불온시 논쟁

[159]

지: 김수영과 이어령의 불온시 논쟁이 있었잖아요. 한 사람은 교통사고로 일찍 죽고, 한 사람은 문화 권력이 됐는데요.

강: 김수영에게 시란 자유를 읊고 자유를 노래하는 건데, 억압적인 사회에서 자유를 읊는 것은 불온한 거예요. 그런데 이어령은 불온을 제거하자는 거거든요. 순수한 세계가 있다는 거죠. 언어의 고통만 얘기라하는 거예요. 김수영은 언어의 고통 이전의 고통, 삶의 고통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삶을 탈각시켜야 순수가 나오거든요. 삶의 영역, 그러니까 더러운 배신, 정치적 굴종 관계 등등은 그냥 퉁치자는 거죠.

 

이어령의 편을 든다는 건 우리가 보수화됐다는 거예요. 이어령의 보수성은 기독교로 넘어간 데서도 알 수 있어요. 인문학자가 어떻게 종교를 가져요? 인문학자는 고통의 폭이 더 넓어야 다른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는데, 그만큼 고통스럽기 전에 교회에 가는 거예요. 그럼 안 돼요.

인문학자는 신을 믿는 순간 글을 쓰면 안 돼요. 왜냐하면 신에게 구원받고 위로받기 이전에 겪어야 될 고통들이 있거든요. 바닥까지 더 가야 해요.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 작품이 나와야죠. 어느 정도 갔다가 교회 가는 사람들은 편한 길을 가려는 거예요.

지: 김수영 시인은 “국가주의, 자본주의, 종교주의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민중주의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그걸 극복하지 못한 것 같아요.

강: 우리한테 영원한 것, 영원히 요구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나간 이념을 지키는 거예요. 남루하죠.

김수영이 진짜 인정했던 시인이 2 사람 밖에 없는데, 신동엽과 조태일이예요.

 

김수영과 아버지, 박인환과 김춘수

[163]

김수영 이후 우리 시인들은 유학을 안 가도 돼요. 김수영만 읽어내면 돼요. 대표적인 예가 황지우와 이성복이예요. 김수영이 읽히면 일단 시적 감수성은 획득한 거예요.

죄다 홍대 카페에 처박혀 있어요. 그 깨알 같은 서정들. 우리 시가 너무 피폐해요.

관념의 자유, 언어유희만 있고 삶에서 아무것도 안 봐요. 김수영은 총알이 날아오는데 안 피해요. 오히려 총알이 날아오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가서 총알 하나 맞고 비명이 나오면 그게 시 한 편이에요. 서정주라든가 나머지 시인들은 총알이 날아오면 앉아서 피해요. 그랬더니 꽃이 보이는 거죠. 꽃은 해석할 수 있잖아요. 그게 시를 보면 보여요. 요새는 꽃이 아니라 카페예요. 거기서 비겁함이 보이고, 그들의 비겁한 제스처에서 뭘 피했는지가 읽혀요

 

[165]

박인환은 절망을 덮는 거고, 김수영은 나무를 심는 거예요. 박인환 시는 다 슬퍼요. 내용을 파악하면 안 돼요. 그냥 덮은 거예요. 분석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니예요. 외국 잡지에 나오는 벤치가 있는 풍경이 그려지죠. 그런 것을 너무 많이 본 거예요.

강원도 인제에 박인환 문학관이 있어요. 지금 봐도 깡촌인데, 거기서 올라온 거예요. 그래서 서울 사람들에 대한 허영이 너무 많아요. 콤플렉스가 있었거든요. 박인환이 종로에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열었는데 거기에 프랑스 잡지나 일본 책들이 있었어요. 김수영이 처음으로 박인환을 만난 곳이 거기에요. 김수영은 일어랑 영어를 잘했거든요. 박인환이 깜짝 놀란 거예요. 장식품으로 갔다 놨는데 읽는 놈이 있는 거예요.

모더니즘의 정신은 세련되게 글 쓰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쓰는 거예요. 새로움의 근거는 나라는 사람은 천년 전에도 없었고, 천년 후에도 없다는 고유성에 있는 거고요. 자기 자신이라서 쓸 수 있는 글이니까 새로운 거예요. 이게 모더니즘의 정신이에요.

 

[171]

시인 중에서 제일 당당했던 사람이 김수영이에요. 자기는 더럽게 힘드니까. 언어를 가지고 고민하기도 힘들 정도로 삶이 고통스러우니까. 그 정직성과 고민, 발버둥질이 자신을 시인으로 만든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그러니까 박인환이며 김춘수, 서정주 다 욕할 수 있는 거예요. 너희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냐고, 얼마나 당당했냐고.

한편 어떤 지점에서 비겁하게 돌아섰던 사람과 그것을 뚫고 가려고 했던 사람은 그 지점에서 서로 이해되는 것들이 있어요. 어떤 체험의 공유라고 볼 수 있는데, 김수영도 김춘수도 서정주도 분단과 전쟁을 온몸으로 겪었잖아요. 전쟁을 몸소 겪었던 사람들은 전쟁의 비극을 알아요. 서로 잘 알아요. 서로 욕은 해요. 그것이 고통에 대처하는 제대로 된 방식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르지만, 다른 문인이나 후배들을 위해서 서로를 공격할 수는 있지만 사적으로 만나면 서로 상처를 건드리지 않았을 것 같아요. 김수영도 몇 번 비겁했거든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그러잖아요. 식당 주인한테 욕을 하고 야경꾼들은 증오하지만 월남 파병에는 반대하지 못했다고. 이것도 비겁함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절정 위에 서 있지 않다고. 그리고 그것이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고 하잖아요. 이렇게 김수영도 비겁하게 물러나는 것이 어떤 건지 아니까 ‘당신 왜 그랬어요?’라고 욕은 하지만 이해는 되는 거예요. 자기도 비겁함이 있으니까.

김수영은 삶은 고통이라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죠.

 

절정에 서서 버티기

 

[173-176]

지: “모두가 허용된 자유에 취해 있을 때, 김수영은 그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모두가 잠든 방 안에 조용히 스며드는 독가스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섬세한 코를 가진 사람처럼 말이다. 김수영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 자유를 살아내려고 했으며 이웃들의 부자유에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피곤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가?”라고 쓰셨는데요.

강: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느낀 감각이에요.

사르트르와 푸코가 프랑코 정권에 맞서 같이 싸웠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못 봐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고통을 느낀단 말이에요. 구조에 부딪히니까. 그런데 자기 자유를 포기하고 당당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굴종적인 조직이라고 해도 살아 나갈 수 있어요.

 

언어의 고통 이전에 삶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삶의 고통은 자유로운 사람만 느껴요. 굴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은 못 느낀단 말이에요. 그 부분이 중요하죠. 언어 이전의 고통이 부족하다는 얘기는 너희한테 자유가 부족하다, 당당함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지배를 이기는 싸움은 우리 내면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우리가 노예로 길러지면 혁명을 일으켜도 새로운 주인을 세워요. 농민들이 기껏 봉기를 일으켜서는 그 다음에 왕조를 세우는 거예요. 난 항상 노예니까. 좋은 왕과 나쁜 왕을 구별할 게 아니라 우리 의식 속에서 왕의 자리를 없애야 해요. 사극 좋아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 사극 보면서 좋은 왕을 기대하잖아요. 그러니까 전선은 내 안에 그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으로, 개인으로 들어가야 해요. 비겁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요.

가장 비겁한 사람이 남의 탓을 해요. 집에서 부모가 때리면 집을 나와야 하잖아요? 못 나오는 얘들이 뭐라고 하냐면 자기가 집 나가면 아버지가 마음 아파한대요. 이게 비겁함이예요. 약자들은 자기의 비겁함을 다른 데 전가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랑과 폭력

[178]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죄와 벌, 김수영>

 

긍지의 날

[181]

지: “긍지의 날”의 마지막 부분처럼 고통이 자긍심으로 반전될 때까지 나는 그의 시집을 계속 뒤적거렸다. 이것은 자그만치 20연 년이나 지속된 나의 습관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습관과 결별하고자 한다“라고 하셨는데요. 진짜 결별하신 건가요? 20년 동안 계속 읽으셨는데.

강: 책을 쓰면 그 사람과 결별하는 거예요. 이야기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는 이성복 시인의 애기처럼 이야기된 김수영은 김수영이 아니예요. 고통이 이야기됐다는 것은 이제 내가 고통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이고, 내가 김수영을 썼다는 것은 김수영에서 벗어났다는 거예요.

 

글쓰기 과정이란 게 이유를 대는 거예요. 왜 이 사람이 이 시를 썼는지, 글을 씀으로써 그 사람에게서 벗어났으니까.

저는 20세기 문학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카프카, 프루스트, 조이스라고 보거든요. 그런데 이 세사람에 대해서도 이미 강의를 다 해버렸다고요. 이제는 진짜로 인문학이 뭔지를 알아버린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그럼 이제부터는 혼자 해야 하나’ 이런 느낌인 거예요. 지금 칼럼을 쓰는 것도 ‘내가 어떻게 되나 보자’ 이런 과정인 거죠. 이게 달라진 점이에요.

글을 쓸 때 음악적인 시도를 좀 해보고 싶은데요. 예를 들면 악보에 나오는 아다지오, 알레그로 같은 걸 글 옆에서 써주는 거예요. 이 부분은 안단테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사람들이랑 같이 공감하고 사람들이 읽었을 때 감동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쓰는 게 제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거예요.

 

시와 철학

[184-187]

지: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라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보는 사람입니다”라고 표현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강: 시인은 물속으로 풍덩 들어가서 온몸으로 겪는 거예요. 물속에 들어갔더니 열대어도 있고 뭐도 있고 한데 그걸 육지에 올라와서 애기하는 거예요. ‘열대어가 있어요’라고 소리치는 거예요. 그럼 사람들이 지랄한다 하죠. 사람들은 한 번도 물에 안 들어가 봤으니까. 못 느껴봤으니가. 하지만 전에 들어가 봤던 사람들은 공감을 해요. 진짜로 사랑을 해보 사람은 사랑에 대한 시를 읽으면 이해해요. 그런데 안 해보면 모르죠. 시는 굉장히 주관적으로 보이지만 나름대로 보편적이에요.

 

철학자도 밤에 몰래 물에 들어가 본 거예요. 물고기 크기가 이만한 것을 알아요. 그래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 그물을 만들고, 그물을 던져서 잡아 올려요. 그러면 사람들이 ‘와, 물속에 저만한 물고기가 있었네요’하는 거예요.

흔히들 시는 주관적이고 철학은 객관적이라고 생각해요. 시가 주관적인 것은 맞지만 보편적이기도 하거든요. 철학이 오히려 주관적일 수도 있어요. 시는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인 데가 있고, 결국에는 같다는 거죠. 그걸 강조하려 했던 거예요. 제가 시와 철학을 홰 같이 엮었는지 보여주려는 거고요.

 

<가슴에 와 닿고 책을 쓸 때 꼭 실천해야 함>

핵심은 경험을 우회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책을 보는 것도 간접 경험이예요. 간접 경험이라도 해야 해요. 경험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잣대는 마음이 움직였느냐예요. 경험을 하기 이전의 마음 상태와 한 후의 마음 상태가 달라야 해요. 책을 읽어도 간접 경험이 안 되는 건 책을 읽으면서 밑줄 치고 중요한 것 외우고 해서 그래요. 그건 책 읽는 게 아니예요. 읽었을 때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이 간접 경험이거든요. 제가 만난 소설가들은 다 자기 유년 시절을 가지고 초기작을 써요. 그 다음서부터는 취재예요. 자기를 투철하게 봤던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금방 공감해요. 그 리얼리티를 확보하지 못하면 작품을 못써요. 위대한 소설가가 되려면 자기를 투명하게 정리하고 자기 삶에 대해 얘기하다가 다른 사람의 삶을 공감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가야 하거든요.

제일 중요한 것은 직접 경험이에요. 직접 경험은 진짜 중요한 거예요. 감정이 일어나는 것, 이게 인문학의 핵심 정신이죠. 분노의 감정이 안 일어나는데 분노에 대한 글을 쓰면 안 돼요. 인문학책은 사람들에게 그 감정을 일으켜야 해요.

사람은 감정이 움직여야 움직이거든요. 철학은 머리로 들어와서 마음까지 흔들어야 좋은 철학이에요. 시는 마음으로 들어와서 머리를 흔들어야 하고요.

 

좋은 철학책은 지적인 이해와 분석을 요구하는데, 책이 딱 끝나고 나면 마음속에 확 들어와요. 후배들이랑 원전 강독할 때 ‘책이 네 마음을 울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한다. 그걸 써나가는 과정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과정이고 그 사람에게서 독립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논문을 써야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나중에 독립된 저자로서 살 수 있다’라고 조언해줘요. 강의할 때도 항상 제자들에게 ‘감정을 못 지키면 끝장이다. 오늘 너희들 감정이 들었니?’하고 얘기해요.

감정이 없을 때 인간은 기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본질은 감정이에요. 감정대로만 하면 세상이 안 돌아가니까 이 감정을 어떤 통로로 뚫어놓을 것인가 고민하기 위해 이성이 필요한 거죠. 딱 그 정도로만 이성은 의미가 있어요. 이성은 절대 감정에 저항하면 안 돼요. 감정을 흐르게 하는 소통 창구를 찾는 역할을 해야 돼요. 그런데 이게 반대로 돼 있는 인간은 이성이 너무 강하죠. 감정을 억압해요. 그러면 인문학이 이상하게 읽힐 수도 있어요.

 

인문학 최고의 적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종교라니까요. 웬만하면 기도로 퉁쳐버리겠다는 사이비 인문학 담론이 있는데, 그걸 파괴하지 않으면 안 돼요.

종교에서 신을 파괴하는 것은 자본을 파괴할 수 있는 역능이자 멘토를 파괴할 수 있는 역능이에요. 구조적으로 같아요. 어느 하나를 남겨놓으면 다시 다 그쪽으로 올인해버리기 때문에 한꺼번에 모두 파괴해야 해요. 자본, 권력, 신, 멘토들까지 일괄 패키지인 거예요.

니체가 말했듯이 우리가 신의 자리에 가지 않으면 그 신은 계속 우리에게 출몰하는 거예요.

 

[188-190]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 나는 그 사람이 아니어야 해요. 예를 들어 제가 김수영이라는 사람을 똑같이 흉내 내면 사랑이 아니라 제가 미친 거예요. 스토커랑 흉내 내는 것은 달라요. 사랑하려면 상대방이랑 달라야 해요. 그런데 멘토라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성을 내가 담보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건 사랑이 아니에요. 자기 메아리예요.

여러분들이 나를 선생 말고 강신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김수영의 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이 시는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 않냐’라고 답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시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 아니야’고 얘기해요. 그러면 제가 또 야단을 쳐요. ‘맞다. 그러나 동등한 해석은 없다. 그래서 영화 평론을 보더라도 영화에 근접한 해석이 있고 모자라는 해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뻔히 아는 것 아니야’고요.

 

그 작가가 만들려는 것을 향해 누가 육박해 가느냐가 문제인데, 그것은 곧 그 작가의 작품을 누가 더 사랑하느냐 하는 거예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어요, ‘김수영에 대한 나의 해석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건 김수영에 대한 나의 사랑이 당신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해석이 강한거다’라고요. 모든 해석의 강도는 사랑의 강도에서 측정되어야 해요.

사랑을 해야죠. 집중하고 관찰하고 그래야 디테일이 보여요.

어떤 사상가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이 지금 살았더라면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라는 데에까지 육박해 들어갈 수 있어야 해요.

 

순서로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김수영을 위하여> 이렇게 썼어요. 앞의 두 권은 김수영으로 가는 길인 셈인데, 철학자로서 시에 대해 육박해 들어가는 것을 보여준 거죠. 그리고 제가 시에서 읽어냈던 것들을 강의하고, 사람들에게서 피드백받고 유효성을 인정 받으면서 충분히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붙었어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은 제목 때문에 많이 안 나갔지만 앞의 책보다 완성도가 더 좋아요.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자긍심이 있어요.

 

시인들

[191-

제가 김수영을 엄청 많이 읽어서 김수영 시만큼은 누구보다도 그 정서를 잘 전달하는 편이예요. 많이 읽다 보니까 김수영 영혼의 리듬이나 격정을 복원할 수 있게 된 거죠.

황지우 시인도 전라도 해남 사람이라 시가 좋죠.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란 시를 보면 똑같단 말이에요.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그건 온몸의 시학이라는 김수영의 시론을 그대로 시로 쓴 거예요. 아주 당당하게. 김수영이 황지우 시인의 멘토예요.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십삼도

영하 이십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는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도 영상 십삼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194]

이성복 시인이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래서 희망이 생길 여지가 있다는 거죠. 왜냐하면 내가 불행 속에 있으면 글 쓰는 게 좋거든요. 글을 쓴다는 건 거리를 두는 거예요. 묘사를 하려면 거리가 필요해요. 불행을 막 쓰다 보면 행복해져요. 어떤 사람을 정리하고 싶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글을 쓰면 돼요. 그 사람의 콧구멍에서 콧물이 나온다는 것부터 막 쓰면 돼요. 반대로 사랑을 하려면 그 사람 가슴팍에 묻혀서 얼굴도 데지 말고 심장 소리만 듣고 있으면 돼요. 떨어져서 보는 순간 콧물도 보이고 대머리도 보이고 이러면 안 돼요.

 

그러니까 자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글을 쓰는 거예요. 사람들은 고통이 다가오면 글을 써요. 함만복, 이성복, 황지우, 김수영, 카프카도 모두 불행해요. 위대한 문학가의 깊이는 곧 불행의 깊이에요. 모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불행을 성찰하고 그 불행을 우회하지 않는것, 그것이 문학의 가치예요.

 

[195-197]

세계는 오감으로 구성되거든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가장 깊이 있는 시는 촉감이 느껴지는 시예요.

체제가 노리는 것은 인간의 관계를 깨알같이 만들어서 분리시키는 거예요. 미래에 대한 공포의 이미지가 그런 작용을 하는 거죠.

어쨌든 유하 시인 이후로 우리 시단이 시각에 국한된 것 같아요. 우리는 시각적인 존재만이 아니거든요. 시각이 우리가 가진 감각 중에 가장 천박한 감각이고 표면적인 감각인데.

 

문학과 에로티시즘(내가 쓸 책에 대한 에로티시즘 참고하기)

[200-201]

사람들이 성적인 관계에 지쳐봐야 해요. 지쳐봐야 나머지 관계가 나오는 거예요. 전에도 우리 사회가 음란한 사회라고 했잖아요. 성적인 것을 금기시하다 보니까 성적인 것이 가장 큰 욕망이 된 거예요. 우리는 성관계를 맺으면 사랑이 완성된다고 착각해요. 성관계란 남녀가 맺을 수 있는 수많은 관계 중 하나일 뿐인데 그게 유일한 목적인 거예요. 문학 얘기고 뭐고 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 거예요. 자고 나서는 문학 얘기를 안 해요. 할 필요가 없는 거죠. 이게 심각한 문제에요. 전에도 애기했지만, 내 부인이 어떤 남자를 만나 카프카를 읽으면서 감정을 공유하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느낌을 공유한다면 이건 완전히 사랑이거든요. 그런데 이건 용서가 되는데 통닭집 아저씨 손을 잡으면 난리가 나는 거예요. 그리고 부인들이 남편한테 이상한 음식 막 먹이잖아요. 기력이 약해졌다고. 이게 음란성이에요.

 

[202]

마광수 교수만 해도 에로티시즘을 다룰 때 권력 문제와 자본 문제를 다루거든요. 그런 건강함으로 깨알 같은 것을 다루면 다룰수록 그 안에 전체 우주를 담아내야 하는데, 깨알만 다루다 마는 거에요. 전체는 안보여주고 그러다 보니까 삶이 피폐하고 정면에서 대응하지 못하고 비겁해질 때 그런 시들이 우리를 위로해주는 이상한 현상이 존재하는 거죠.

지: 한국에서는 여전히 에로티시즘이 금기시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은데요.

강: 아직 유교 사회니까요. 재밌는 게 우리는 대학교까지는 서구 교육을 받다가 결혼하거나 직장 들어가면 조선 시대로 가요. 우리는 결혼 하자마자 시댁, 시월드, 이런 데로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마광수 교수는 유교 사회적 가치와 싸웠다고 봐야 해요. 마광수 교수를 공격했던 사람들도 유교 사회적 가치를 들어 공격한 거고. 우리는 유교 사회고, 철저하게 금욕적 사회라는 걸 마광수 교수가 드러내준 거예요.

 

바타유가 우리는 금지된 것만 욕망한다고 했잖아요. 나체촌에서는 성범죄가 안 일이나요. 옷을 입고 있어야 성범죄가 일어나요. 포르노가 왜 유행하겠어요? 포르노가 유행하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금욕적이라는 거예요. 건강하지 않다는 거죠. 포르노가 있는 사회, 사창가가 있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은 사회예요.

결혼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가 뭔지 아세요? 합법적 모텔화예요. 눈치 안보고 사랑을 하겠다는 거죠. 그것도 성적인 판타지 속에서 잘못 생각해요. 계속 사랑할 수 있는 결혼생활이 시작되잖아요? 그럼 며칠 안 가요. 결혼의 바닥에는 성적인 것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게 없는 척하고, 심지어 ‘아이를 낳으려고, 안정을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가 음란성을 극복하려면 성적인 것은 상대와 나눌 수 있는 것 중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야 해요. 남자가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면 우리는 사랑을 못 한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백 가지 관계중 하나가 붕괴됐을 뿐이에요. 하반신 마비돼도 음악 애기하고 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달랑 성적인 것 하나 가지고 결혼을 한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힘들죠.

 

성이라는 게 별게 아닌데, 별것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 건강해지거든요. 금기를 한번 넘어가는 의도적인 제스처가 많이 필요해요. 우리 사회는 아직도 결혼하거나 남자 친구를 만날 때 신제품처럼 보이려고 하는 의식, 처녀성에 대한 집착이 있잖아요. 우리 사회는 음란성에서 좀 벗어나야 해요. 윤리적 사회가 음란 사회인 거에요. 마광수 교수는 그 음란성을 끌어올리자, 긍정해버리자는 거죠. 음란성을 긍정해버리면 윤리 사회가 붕괴해돼버리거든요. 마광수 교수의 의미는 거기에 있어요.

 

에로티시즘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렬한 경험 중 하나가 무아의 경험이거든요. 오르가즘이라고 하는 것이 무아 상태라는 말이에요. 불교의 목적은 무아거든요. 자의식을 없애는 거예요. 나라는 자의식 때문에 소유서부터 온갖 폐단이 벌어지고 고통이 생겨나는 것이거든요. 나를 놓아버려야 한다는 건데, 탄트라 불교는 모로 가든 무아만 된다면 성(性)으로 가보자는 거예요. 이거 화끈한 주장이거든요. 나를 파괴하는 거예요. 내가 저 여자를 갖겠다. 소유하겠다는 개념이 아니라 에로티시즘은 자기를 파괴하는 경험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전도왜 있어요. 사랑을 식욕처럼 착각하죠.

죽음이라는게 뭐예요? 자아가 붕괴되고 초자아가 붕괴되는 경험이에요. 초자아는 사회적 통제가 내면화된 거라서 거기서 억압이 생기는 거잖아요.

 

죽음의 본능은 있다고요. 나를 비워내 버리는, 내가 가진 것을 다 내줘서 내가 비어버리는.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다 줬을 때 생기는 이상한 인연, 나도 배고픈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음식을 다 먹여줬을 때의 희열, 더럽게 추운데 내 옷을 벗어주고 부들부들 떨면서 돌아올 때의 그 느낌이에요. 무소유예요. 극단적인 무소유의 형태에서 쾌감이 느껴진다는 게 일종의 에로티시즘이죠. 래디컬해요.

 

사랑을 하려면 나 자신이 죽고, 나 자신이 비워져야 해요.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것이 불쾌한 죽음이 아니고 기꺼운 죽음, 더 죽으면 죽을수록 행복한 그런 거예요.

에로티시즘 담론은 이런 영역까지 포괄하는 것인데, 마광수 교수에게는 이런 강렬함이 없어요. 도덕주의와 에로티시즘 사이의 대결 구도만 있어요. 그래서 사랑의 경험이 없다고 그러는 거예요.

 

시의 힘

[207]

지: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인문학이 시와 철학의 힘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쉽게 간과되어왔던 시의 힘이라고 봅니다. 새로운 철학적 사유가 행동으로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정서의 형성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는데요.

강: 시는 감정을 깨우는 거예요. 인문학의 위기 중 하나가 시가 안 읽힌다는 거예요. 자꾸 철학책 가지고 추상적인 얘기만 떠들어요. 감정이 없는 거예요. 철학책을 읽고 지적인 허영만 채워요. 철학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머리로 들어와서, 개념으로 들어와서 마음을 울려야 해요.

 

감정이 중요한 게, ‘자기답다’라는 것은 곧 감정의 고유성을 말하는 것이거든요. 중요한 건 사람마다 감정이 다르다는 거예요. 느끼는 게 달라요. 어떤 사람은 노을을 복도 별 감정이 안 일어날 수 있어요. 똑같이 노을을 보더라도 어떤 요소 때문에 강한 감정을 느끼는지는 각자가 세세하게 다르거든요. 나니까 그 감정이 드는 거예요.

 

[208-209]

사랑받으려면 자기의 감정을 표현해야 해요. 자기 감정을 표현했을 때 상대가 자기를 미워할 수 있어요. 그러면 빨리 그 인간을 정리해야 하는 거예요. 저는 누가 제 감정을 인정 못 해주면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무조건 시험을 한번 해봐야 해요.

자기의 감정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한 기초 조건이에요. 그게 김수영이 얘기하는 당당함이기도 하고요. 인문학은 책을 읽든 뭘 하든 감정이 살아나야 해요.

 

인문학은 나의 발견이거든요. 책을 읽어도 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음악을 들어도 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시를 봐도 나를 발견하는 것이예요. 나의 발견으로 가야 해요. 합의한 요약, 정답으로 가면 안 돼요. 모든 글은 고통이든 기쁨이든 감정을 느낀 다음에 써야 하는 거예요.

제가 글을 써본 사랑인데, 어떤 감정을 가지고 글을 쓰면 어떻게 나오는지 알죠

===> 연극이나 드라마,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실제로 그 삶을 살고 있다. 착각이 아니라 그 역에 몰입을 해야 그렇게 보인다.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도 그 음을 따라 영혼이 그음과 함께 춤을 춘다. 춤을 추든 노래를 하든. 글도 마찬가지. 감정을 가지고 글속에서 펜을 따라 몸과 영혼이 춤을 춰야 글도 제맛이 나온다. 배운다. 순간을 잡는 방법을 , 순간속에서 살 수 있음을. 순간을 영원처럼 살 수 있음을.

 

[210-211]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게 스스로 자기 감정을 못 지키면 아무도 안 지켜준다는 거예요. 저는 제가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 감정을 내색 안 할 때 너무 힘들어요. 읽어야 하잖아요. 이중 삼중의 갑옷을 뚫고, 저를 좀 안 힘들게 해주려면 그냥 보여주면 되는데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많아요. 사랑받으려면 항상 자기 감정을 드러내야 하고, 싫은 건 싫다고 해야 해요. 그러지 않고서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거죠.

 

지: 시가 먼저 아파하고 느끼고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나면 철학이 나중에 분석하는 거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시를 워낙 안 읽는 사회가 돼서 그런 정서의 형성이 이루어질 토대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강: 시를 읽으면 생존을 못 하니까요. 감정을 느끼면 생활을 못 하는 시대가 됐으니까요. 압도적인 도시화의 조건들이랑 자본주의의 경쟁 체제 때문에 우리는 정서적 반응을 못 하도록 길여지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감정을 드러낸 적이 별로 없는 거예요. 도시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느끼는 이유가 시골 사람들은 감정을 막 드러내거든요.

우리를 고슴도치로 만드는 사회에 대한, 고슴도치 불쌍하지 않나요? 자신의 생계와 생존은 보호하는데 사랑하고 사랑받지 못해요. 바닥에는 상처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거죠. 고슴도치들은 더럽게 외롭기 때문에 사랑을 하면 병적으로 한다는 병폐가 있어요. 한번 상처받으면 다시는 가죽을 안 벗으려 해요. 한번 가죽을 벗었을 때 상처를 너무 많이 받으면 다시는 자신을 못 열 수도 있고 꼬맹이 때부터 가시에 많이 찔러봐야 되는데 찔려본 경험이 없는 거죠.

 

보편적 공감의 구조

지: “ 이제 우리는 안다. 시가 난해한 이유는 그것이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시를 회피하려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거나 자신만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이라는 사실”이라고 하셨는데요. 이런 감정을 이해하게 되면 삶이 더 힘드니까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게 된다는 건가요? 카뮈가 말한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잠식당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와 같은 의미인 듯한데요.

 

강: 좋은 사회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감정을 많이 느끼는 사회예요. 우리는 느끼지 않고 생각을 하잖아요. 이게 문제에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해요. 예를 들면 작가보다 평론가가 더 많아요. 미친 사회죠.

모든 글은 나다운 게 있어야 하잖아요. 나의 감정과 관련되니까 나다운 게 있어야 해요. 인문학은 고유명사라고 하는 게 그런 거예요.

 

모든 인문학은 구체적인 거에요. 그 구체성을 어떻게 확보하고 느낄 것인가가 문제고요. 그것만 잘 잡으면 인문학도 시도 어렵지 않아요. 시를 읽는 다는 것은 그 시인의 내면을 읽는 거예요. 자기 자신의 이해에 이른 그 사람을 이해하는 거예요. 만약에 그 사람을 이해했다면 나 자신을 이해한 거고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이해해야 그 사람을 이해하거든요. 내가 사랑을 해봐야 사랑과 관련된 작품을 이해하듯이, 민감한 사람은 알아요.

 

어떤 텍스트, 어떤 사람을 읽는 다는 것은 보편적 공감의 구조와 디테일까지 이해하는 거예요.

달라서 알 길이 없다고 절망스러워 하는데, 문제는 내가 그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공감하는 것이거든요. 내가 베르테르가 됐다면 나도 그렇게 사랑했을 거라는 그 정도만 알면 되는 거예요.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나 자신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누군가를 이해하는 과정은 곧 나 자신을 파고 들어가는 과정인 거요.

사람들이 인문학에 교감하고 공감하면 사회가 커져요. 굉장히 강력해지요. 어느 시인은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글이라는 것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해본 사람’이라고 했어요.

시를 읽고 고전을 읽으면서 동시대와 교감하고 윗세대와 공감하며 교감의 폭을 넓혀야 해요. 자기가 반영돼 있는, 자기의 삶이 투영되는 책 읽기를 해야 하는 거죠.

 

인문학은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고유명사에 육박해 들어가는 거라는 것. 그걸 배우고 책을 읽었기에 나름 성공한 거예요. 드디어 이제 사람들과 애기할 수 있게 된 거죠. 이제부터는 제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고요.

강신주를 위하여

[216-219]

지: 여러 시인들 중에서 특별히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으로서 김수영을 주목하게 된 게기가 있으신가요?

 

강: 제가 감정에 주목하잖아요. 자기의 감정을 배신하는 건 비겁한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 연장선상에서요. 저는 감정도 안 일어나면서 ‘이래서는 안 되는 것 같아요’라고 하는 건 다 헛소리라고 보거든요.

한 사람의 고통의 폭이 곧 그 사람의 자유의 폭이거든요.

제가 알튀세르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알튀세르가 마르크스를 읽는 방법이랑 들뢰즈가 니체나 스피노자를 읽는 방법이 제가 김수영을 읽는 방법과 똑같아요. 원문을 기계적으로 짜깁기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 감응을 했느냐, 이 관점에서 쓰는 거죠.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거죠. 별을 사랑해야 별에대해 많이 알게 디고, 여자를 사랑해야 여자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거죠. 여자에 대해 많이 안다고 사랑을 제대로 하나요? 그건 아니죠.

 

강신주다운 글쓰기

[221]

개념 가지고 글을 쓰노라면 ‘이래 가지고는 아무도 못 알아듣겠다’하는 느낌이 들어요. 이 개념을 어떻게 구체적 상황에 넣고 이 캐릭터를 어떻게 사건에 형상화할 것인가. 오늘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사건 구조나 스토리 구조는 될까 고민해요.

 

[222-223]

(글쓰는 사람은 자기라는 고유명사를 가져야. ‘오미경’이라는 고유명사를 가지려면)

니체도 처음 나왔을 때. ‘야, 이게 논문이야 잠언이야’했는데 이제는 받아들이잖아요. 글쓰는 사람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스타일의 완성에 있어요. 스타일은 곧 관점이에요. 그저 문체 양식이 아니라 관점이라고요. 글이라는 형식에 그 사람 자체가 녹아 있어서 일부분만 봐도 이 글은 니체가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스타일은 다양한 종류의 묘사법이 아니에요. 한 사람은 하나의 스타일을 갖는 거예요. 스타일의 완성이 곧 한 사람의 사상가나 인문학자의 자기완성인 거예요.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려면 남을 따라가지 말고 홀로 가야해요. 비유를 하자면, 위대한 사람들이 걸어갔던 발자국이 눈길에 남아 있는데 그게 그들의 스타일인 거예요. 그런데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면 내 것이 안 남잖아요. 그쪽 길이 아니라 눈 덮인 길로 걸어가야 자기 발자국, 즉 자기 스타일이 생기는 거죠. 누구를 흉내 내면 안 돼요. 내 감정으로 밀어붙여야 해요. 김수영처럼 온몸으로 밀어붙여서 시를 써야 스타일이 만들어져요. 그런데 그게 힘들죠.

 

[224]

보수적인 사람들까지 자기를 반성하게 만드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제 모토예요. 보수적인 사람도 제 글을 읽고 ‘내가 너무 지나쳤네’라는 반성까지 가도록 하는 거죠. 글은 사랑이니까 누군가를 막 욕하지 못하는 거예요.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되고요. 글은 연애편지 같아서 사랑이 아니면 쓸 필요가 없거든요. 희망을 항상 봐야 하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인간을 제외한 초월적 가치, 자본, 체제 등등에다가 판단의 기준을 두고 있는 보수적인 사람들도 제 글을 읽고 인간 스스로에 대한 기준으로 돌아서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늘 늘 고민해요.

 

시인과 철학자

[225 - 226]

지: 시인은 자기가 느낀 것을 표현했다가 그 느낌이 변했을 때 부수고 새로 만드는 것이 쉽지만 철학자는 자기 체계를 다시 부수고 만드는 것이 훨씬 어렵단 얘기죠?

강: 10층짜리 건물을 부쉈다가 새로 짓는 것과 텐트를 접었다가 새로 치는 것과의 차이죠. 시인은 텐트를 쳤다가 빨리 접는 거고, 철학자는 대개 건물을 다 짓고 거기서 죽어요. 그래서 철학자 중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처럼 전기 철학, 후기 철학이 따로 있는 철학자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10층짜리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은 거예요.

시인과 철학자의 차이는 기민함의 차이죠. 시인은 훨씬 빨라요. 더 가볍고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잖아요. 그거 가지고 뭘 써도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일단 감정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철학자들은 자신에게 든 감정을 토대로 계속 건물을 지어 올리는 거예요. 짓느라고 바쁘죠. 어찌 보면 그런게 철학자의 리얼리티이기도 하고요.

탁월한 시인일수록 대우주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게 그 시인의 깊이와 폭인 거죠. 허접한 시인들은 딱 시 한편만 좋아요. 그런데 시 한 편만으로도 기가 막힌 시인들도 있죠.

 

어쩌면 철학 체계나 개념 체계라는 것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일지도 몰라요. 철학자는 굉장히 여린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철학자는 상처받기 싫은 거예요. ‘이 호두 껍데기를 뚫고 들어오세요. 그러면 따뜻한 과실을 맛볼 거에요’ 그런데 시인들은 껍질이 없는 과실재로 드러나 있으니까 세계를 더 많이 느끼는 거죠. 그러니까 철학책 읽을 때는 성곽에 좌절하면 안 돼요. 잘 넘어야 해요. 넘어가 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고요.

 

 

chapter 4

제자백가를 통하라

 

혁명가와 시인

[231-233]

모든 혁명가는 시를 쓰죠. 왜냐하면 시라는 것의 정의가 ‘나니까 쓸 수 있는 글’이거든요. 문체와 형식에 있어서 나니까 쓸 수 있는 글. 그러니 당연히 새롭죠. 내가 새로우니까요. 혁명가는 기존에 통용된 생각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생각을 관철하려고 하죠. 시인이 꿈을 꾼다면 혁명가는 그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거예요.

‘시인은 자유를 읊고 자유를 산다‘는 표현도 있잖아요. 그게 아니면 시인이 아니죠.

모든 사람이 자기니까 살 수 있는 삶을 살고 자기니까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자기니까 생각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사회, 검열이 없고 아이들도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사회, 인문학자가 꿈꾸는 사회는 그런 사회예요.

 

움직이면 산이 아니다.

[237]

한 번도 누구한테 의지하면서 공부한 적은 없어요. 보통은 교수들 말 듣고 박사 학위 논문을 쓰니까 박사 학위 논문이 정신적으로 상처투성이가 되거든요.

군자불치君子不恥, 군자는 쪽팔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제가 싫어하는 것,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기서는 얘기 못 하고 뒤에 가서 구시렁구시렁 하는 거예요.

철학박사 중에서 어디 가서 굽실거리지 않고 이상한 보고서 안 쓰고 살아가는 사람은 제가 처음일지도 몰라요.

그게 하루아침에 된 것은 아니고요. 제가 단행본만 17권을 썼잖아요. 지치지 않고 쓸게 있었고, 그러다 네댓 권 중 하나 얻어 걸려서 갑자기 뜨는 거죠. 갑자기 글이 잘 써지는 건 아니에요. 지금은 어느 정도 고정 독자층이 형성됐는데, 제 책을 읽고 고정 독자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 지난 6,7년간 만났던 사람들도 많아요.

 

지: 강연 같은 데서

 

강: 강신주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들이죠. 저 사람은 우회하지 않고 직구 승부하고, 아는 척하지 않고, 빙빙 돌려서 얘기하지 않고 중요한 것만 애기한다. 이런 걸 아는 사람들이 제 책을 사는데 그게 제 힘이에요. 중간에 제가 잔머리를 굴렸으면 그렇게 안 됐겠죠.

요새는 기획이 돼 있거나 어느 정도 원고가 마련돼 있어서 그 다음부터는 편집자들한테 기대는 편인데요. 제가 못 읽었던 현실 텍스트를 읽고서 이러한 현실을 조망할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해주는 편집자가 많이 없어요. 편집자는 제가 못 보는 것을 봐줘야죠. 둘이 마주보고 있으면 저는 그 사람 뒤를 봐주고 그 사람은 제 뒤를 봐줘야 하거든요. 같은 곳을 보는 게 아니에요. 뒤에 호랑이가 오면 어떻게 하려고 안 보는 것. 못 보는 것을 봐줄 수 있어야죠.

 

제자나 수강생들을 만나는데 그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상당한 보편성이 있다면 그에 대한 책이 나올 수도 있겠고요. <철학vs철학>을 통해 기존 철학사를 정리한 후로 많이 자유로워졌고 시를 공부하면서 문맥을 예리하게 파악하는 능력. 시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많이 길러졌거든요,

 

저는 인문학자니까 다 끌어안고 가야해요. 보수적인 사람들이 왜 저렇게 보수적으로 변했는지도 설명해주고,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도 다르게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얘기해줘야죠.

내가 판단하지 않고 스스로 반성하도록 하고 변하게 하는 것.

보수적인 사람도 제 글을 읽고서 한번 고민을 해볼수 있도록 해야죠. 적을 가차 없이 공격하는 건 정치예요. 인문학은 정치가 아니라 10년 뒤에 어떻게 변할까를 기대하는 거니까 길게 봐야죠. 조급하면 안 되고요.

 

동양의 정치철학과 “역린”

[242]

사람 만나도 그렇다고요. 역린만 안 건드리면 돼요. 역린을 건드리면 영원히 적이 되는 거예요. 동양인들은 사람을 먼저 파악하고 대화를 해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파악하지 못하면 무조건 실패하는 거예요. 역린을 잡았다는 것은 건드려도 되는 다른 데를 잡았다는 거예요.

지: 홍준표 같은 사람은 나름 토론의 고수잖아요. 봐달라고 엄살 부리기도 하고, 센 것 같지는 않는데 나름 방아도 잘하고, 끝나고 나서는 또 유하게 넉살을 부리잖아요.

강: 그래서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보다 타인의 상태를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한 거예요. 머리 좋은 사람은 타인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아는 사람이에요.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면 처음 대화할 때 제 얘기만 듣고 있는 사람이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

[246 - 253 ]

제가 백가 시대의 상용어가 ‘도’예요. 길. 정확하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이예요. 그게 다 끊어져버린 상황에서 제자백가는 그 길이란 무엇인가. 그 길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렇게 갔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길을 제시한 거죠. 공자의 도, 묵자의 도, 노자의 도, 장자의 도, 이런 게 쭉쭉 나오는 거예요. 인간이 바닥을 쳤을 때, 공동체가 외해되어 버렸을 때 이 사람들이 꿈꿨던 길들의 가짓수가 다 나왔다고 보면 돼요.

 

제자백가를 연꽃에 비유할 수 있는데, 연꽃은 진흙탕에서 피거든요. 시궁창처럼 더러운 데서 피지만 꽃이 피면 썩은 냄새가 안 나요. 제자백가는 자신들이 나름 연꽃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절절함이 묻어나죠.

석사과정 때 제자백가서를 원전으로 다 봤는데 읽을 때마다 각각의 서양철학자를 짝지을 수 있겠더라고요. 세련되진 않지만 문제의식와 방향은 같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사유의 가짓수가 다 나와요.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와 시선이죠. 이렇게만 볼 게 아니라 다른 쪽으로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시선으로 본 것을 얼마만큼 디테일하게 묘사하느냐 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예요. 진짜 인문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선이예요. 시선을 틀어서 보기 시작하면서 고유성이 생기는 거죠. 인문학자의 가치는 시선의 고유성이거든요 이미 누군가가 그 시선으로 다 봤는데 더 디테일하게 묘사해봤자 큰 값어치가 없어요. 그 사람은 안 남아요. 칸트 이후에 후기 칸트학파 철학자들이 있는데 철학사에 한 명도 안남았잖아요. 현대 철학자 중에서 들뢰즈 같은 사람은 철학사에 남을 거예요. ‘차이’라는 시선은 굉장히 중요한 시선이거든요. 들뢰즈의 저서 자체가 중요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시선으로 우리가 현재나 미래 사회의 문제들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양주’는 ‘국가에 이롭다는 이유만으로 털 하나라도 뽑으면 안 된다

철저한 아나키즘이죠. 그런데 중국 민중의 반 정도가 양주를 따랐다는 것이 의미심장한 거예요. 전쟁이 휘몰아치는 것이 국가 체제 때문이라는 통찰에 이른 거예요. 항상 이데올로그들은 ‘너 하나 희생하면 공동체가 산다’는 식으로 공격해 들어온다고요. 그때 모든 사람이 ‘안 해’라고 하면 전쟁이 안 일어나죠.

 

그래서 제자백가 시리즈를 쓸 때 양주를 복원해내야 하는 거예요. 전체 제자백가 시리즈에서 5분의 1 정도는 그런 래디컬한 담론들을 복원하는 데 할애했어요. 사람들이 그 부분을 읽으면서 자유로운 공동체라는 코뮤니즘의 이념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에요.

철저한 절망 속에서 꿈꾸는 희망의 폭이 그 사유의 깊이를 말해준다면 제자백가의 사유에는 깊이가 있어요. 그때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전쟁이 있었어요. ‘인간은 원래 전쟁을 하는 건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죽었을 거예요. 당시 평균 수명이 30~40세였으니까요. 자기의 비겁함은 싸울 때 드러나거든요. 머릿속에서는 누구든지 다 이길 수 있고 정의를 바로잡을 수 있을것 같은데, 경찰 한 명이 곤봉을 휘두르면 꼼짝도 못 하잖아요. 그런데 항시 전쟁이었던 제자백가 시대에는 머릿속에만 있는 그런 정의로운 담론 같은 것들이 다 날아가버린 거예요. 거품이 다 제거된 채로 그렇기에 우리가 이 절망에서 어떻게 벗어날까에 대한 꿈을 제자백가가 제시해줄 수 있는 거예요.

 

민(民)이라는 한자가 원래는 눈알이 뽑힌 노예들의 모습에서 나왔다.

인문학 책을 읽을 때 핵심적인 것은 시선이에요. 잘못 공부하는 인간들은 시선이 아니라 디테일한 묘사들만 외우는데, 중요한 건 시선이에요. 그 시선을 가지고, 그 안경을 가지고 우리 삶을 봐야죠.

그 안경으로 바라본 상(像)에만 집착하면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데요. 젊은 친구들은 철학자의 시선을 익히기보다 철학자가 그 시선으로 봤던 것을 보려고 해요. 왜냐하면 그게 디테일해 보이고 구체적으로 보이니까 안심이 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상을 보여준 철학자의 그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좀 성숙해질 텐데.

철학자가 그 시선으로 봤던 것. 개념을 외우고 그걸 가지고 떠드는 거죠. 그래서 시선을 배워야 하는 거죠. 인문학적 독해는 그렇게 해야 돼요.

 

chapter 5

유가를 넘어서

 

유학의 패권

[257-261]

지: ‘한 제국에서 어떻게 유학이 사상적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나?’가 석사 논문의 주제이기도 했는데요. 당시에는 유학보다 다른 사상들이 주도적이었던 같습니다. 유학이 패권을 차지하면서 다른 사상을 억압하고 발전 못 하게 했다고 봐야 하나요?

강: 그렇죠. 묻어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유학은 가족주의 전통이라서 왕조가 생기면 제일 좋죠. 개인이 살아가야 해요. 제자백가 시절은 개인 단위로 살아가야 하는 시대였죠.

 

<논어>만 봐도 사실은 춘추전국시대 담론이니까 수기치인(修己治人)할 때의 기(己)와 인(人)을 계속 사용해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한테 하지 마라’처럼 나와 타자의 관계를 얘기했거든요.

화기위국‘가문이 변하면 국가가 된다’라는 전통 때문에 삼족을 멸한 거죠.

승려는 해탈한 자유인이기 때문에 왕한테 예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와요. 내가 내 삶으 주인이라는 거죠. 선불교에서도 아나키즘적 전통이 있고, 승가공동체라는 것도 있고, 나름대로 그 전통이 내려오죠.

그 체제 안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건 한 사람의 내면 안에 그 체제의 사회구조가 자리를 틀었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체제가 무너지기 힘들어지죠. 진시황이 10년만 더 살았어도 기존의 귀족들에게는 공포스러운 사회가 됐을 거에요.

 

공자와 진시황

[269]

중국에 공자상이 들어서면 ‘아. 기득권 세력 인정하고 대충 타협하고 가겠다는 거구나’라고 봐야죠. 지금은 당이 중심. 즉 황제고 주변에 있는 자본가가 제후인 구조예요. 유학의 이념은 화, 조화, 이질적인 것의 공존이고요. 법가의 이념은 동(同), 같음 혹은 하나에요. 공자가 ‘군자는 화이부동, 소인은 동이불화’라고 했죠. 군자는 화를 지향하지 같음을 지향하지는 않는데, 소인들 보니까 다 똑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화를 모른다는 말인 거예요. 유학자들이 만든 비유가 얼마나 많은데요. ‘음식을 보라. 다양한 종류의 맛이 섞여야 맛이 나지’ 같으면 안 된다는 논리를 엄청 만들었어요. 조화라는 말이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각자 기득권 지키고 대충 타협 봐서 가자, 이게 유학의 이념이에요. 중국 공산당에 공자가 쑥 들어온 거죠. 자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는 화밖에 없어요. 중국은 공산주의 아니예요. 자본이 들어오면 끝나는 건데.

 

[271-272]

신하들이 항상 꿈꾸는 것은 화합, 조화, 기득권을 인정하는 거거든요. 강력한 왕권과 신권(신하들)의 대립 이게 동아시아에서 반복되는 패턴이에요. 동아시아가 농경 사회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지역마다 농업 기반이 있고 경제 기반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 지역에 경제 기반을 가진 주체들이 민중을 가지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이고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친일파가 된 거죠. 을사보호조약에 서명한 사람들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노론 계열이죠. 노론 계열이 친일을 한 대가로 자식들이 경성제국대학에 갔고, 나중에는 트렌드가 바뀌어서 미국 유학을 가고 서울대 교수가 된 거예요. 그래서 친일파를 제거하려면 우리 사회의 지배층 자체를 붕괴시켜야 하는 거예요. 더더군다나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인데.

 

묵자와 양주

[273]

양주는 동지의 범주를 없애요. 뭉치지 말자. 우리가 우리로 뭉치는 순간 우리가 아닌 것들은 적이 되니까. 그래서 양주의 사상을 위아주의爲我主義라고 해요. 나만 위하면 된다. ‘너만 잘 살아. 뭉치지 마’이런 거예요. 이 두 사상이 국가주의에 저항한 대표적 사상인데요. 묵자는 적이라는 범주를 무력화한 거고 양주는 동지라는 범주를 무력화한 거죠.

영화<묵공>이 잘 보여주듯이 묵가가 세 명만 가도 성을 다 고쳐서 10만 명을 물리칠 수 있어요. <묵자>는 중국 고대의 고학 사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텍스트예요. 기하학, 금속학서부터 오만 광학까지 다 나와요. 묵가가 그런 걸 다루는 것 역시 다 약자를 돕기 위해서였죠.

 

제자백가를 읽고 그들의 시선을 좀 배운 다음에 서양철학자들 책을 읽으면 다 보인다니까요.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 양주의 텍스트가 부족하면 슈티르너에서 어느 정도 끌어올 거예요.

 

제자백가와 담론 지평의 확장

[278]

제자백가서가 읽히면 오늘날 우리의 담론들이 몇 가지 숨은 전체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폭로가 돼요. 제자백가를 통과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담론 지평이 넓어지는 거예요.

기억의 전쟁이잖아요. 우리가 과거의 어떤 요소,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니까요.

 

중국 담론과 위계 사회

[282]

<예기>에 예는 민중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예부하서인 형불상대부 禮不下庶人 形不上大夫“ 라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같은 귀족끼리는 육체적 형벌을 가하지 않아요. 민중한테만 썼어요. 그게 유학의 법률이에요.

서울대에서 조교 성추행 사건 났을 때 그 교수 안 쫒아냈잖아요. 성추행해도 안 쫒겨나면 다른 교수들도 안 쫒겨날 테니까. 서울대 교수들의 기득권 문제에요. 한번 밀리면 나중에 자기들도 잘릴 위험에 처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대충 타협해서 넘겼잖아요. 만약 대학원생이 성추행을 저질렀으면 가차 없이 날려버렸을 교수들이 그렇게 하잖아요.

 

기득권을 가진 자들과 기득권을 못 가진 자들에 대한 위계질서를 담고 있는 것이 유학의 법률이에요.

 

[284]

자본이라는 것이 제왕적이거든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잖아요. 인사고과를 하고, 그 구조가 딱 국가주의거든요.

자본가 마인드에 두 가지 모델을 적용할 수 있어요. 법가적 자본과 유학적 자본, 계열사 사장들의 자율권을 인정하면 유학적인 것이고, 총수가 철저하게 총괄하고 사장 갈아버리면 법가적인 것이죠.

 

사마천과 공자

[288]

왜곡의 문제도 있어요. <사기>에서 세가는 왕이나 제후를 다룬 기록인데, 공자는 제후가 아니었음에도 사마천이 <공자세가>를 남겨요. 한나라 대의 시선이 투사된 거죠. 공자가 신성시되니 왕이라고 치자 한 거예요. 그 당시 나왔던 말이 ‘소왕(素王)’인데, 본디 왕이다. 왕이라고 치자는 거예요. 이게 딜레마인 게 제후를 다룬 기록서부터는 연도와 월별로 행적이 다 나오거든요. 공자의 사생활이 다 까발려진 거죠. 다른 사상가들의 열전에는 큰 에피소드만 나오거든요.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공자가 신성시될 수 있는데, <공자세가>에 온갖 애기가 다 나와요. 공자의 이중적인 면모도 다 드러나요.

 

지: 공자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그 텍스트들을 무시한다고 봐야 하나요?

 

강: 안봐요. ,<논어>만 보니까. 공자는 공자 아버지와 공자 어머니의 ‘야합(野合)’으로 태어났어요. 주나라 이전의 은나라는 모계 중심적 사회인데, 중춘이란 절기에 남녀가 집에서 나와 마음껏 성관계를 갖는 걸 야합이라고 하거든요. 들판에서 마음만 맞으면 급미팅 해서 모텔로 가는 거예요. 그렇게 공자가 태어나요. 모계사회 전통이기 때문에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자기가 키우면 되요. 그런데 공자가 자꾸 아버지를 찾으려고 해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존재를 가르쳐주지 않아요. 어렸을 때 보니까 애가 가부장적인 주나라 예법을 따라요.

 

어머니가 볼 때는 싸가지가 없죠. 내가 사랑해서 내 아이 낳아 내가 키우는데, 이놈이 자꾸 아버지를 찾아가려고 하니까요. 그래서 아버지 묘소를 안 가르쳐줘요. 아버지가 먼저 죽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공자가 알아내서 어머니를 아버지 묘소에 합장해버려요. 유학식으로, 주나라식으로, 어머니가 알았다면 노발대발했겠죠.

그걸로 공자가 유명해졌어요. 예가 무너졌던 춘추시대에 드디어 주나라의 예를 몸소 실천하려는 놈이 나타난 거죠. 그래 가지고 상복 입고 돌아다녔을 때 계손 씨 집에 갔는데 계손씨가 문전박대를 해요. 그때부터 계손씨를 엄청 싫어한 거예요. 공자가 특이한 사람이에요. 자유로운 영혼은 아니예요.

 

지: 공자가 자기를 키워준 어머니에게 예를 다하는 것은 그 동네에선 별로 차별성 없는 행동이잖아요? 그래서 자기가 보지도 못한 아버지에게 예를 갖추는 것을 출세의 방편으로 삼았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강: 예를 따른다는 것, 가부장적 질서를 따른다는 것은 출세의 방편이었죠.

출세욕이 좌절되자 철학자로 대변신하는 거죠. 원래 제자들이 공자를 따랐던 이유는 딱 하나예요. 그 당시 객경(客卿)제도라고 있었어요. 손님 객 자에 벼슬 경 자, 그게 뭐냐면 어떤 제자백가 사상가를 재상으로 등용하면 그 사상가를 따랐던 제자들이 다 내각에 참여하는 제도예요. 그러니까 공자를 모셨던 사람들은 언젠가 대박 난다고 기대한 거죠. 그런데 공자가 제후들에게 계속 외면당하니까 한 명씩 한 명씩 떨어져 나가요. 그러다가 공자가 나중에 변해서 ‘우리는 벼슬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철학을 한다’고 뻥을 치는데, 제자들은 황당하죠. 지금까지 벼슬하려고 쫓아다녔는데 갑자기 순수 학문을 얘기하니까. 공자가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것에 속았던 제자가 안연인데요. 그래서 공자가 안연을 좋아해요. 안연이 일찍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고, 어쨌든 공자는 관료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인데 안 되니까 좌절해서 철학자로 남은 거죠. 공자의 <논어>를 보면 벼슬을 하려는 것이 반, 아니면 내면 세계로 침잠해서 철학자인 양하는 것이 반이예요.

 

공자와 예법

[298]

인문학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문맥 파악이에요. 잘 파악해야 해요.

재밌는 게 우리나라는 다 양반집이잖아요. 귀족이랑 양반,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람만 성이 있어요. 천방지축마골피는 진짜 양반 집안이에요.

 

공자의 인간적 면모

[304]

책에는 안썼는데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공자가 남자南子를 만나요. 남자라고 하는 사람은 제후의 부인이에요. 여자 이름이 왜 남자인지 모르겠어요. 햇갈리게. 아무튼 남자라는 여자가 공자와 만나요. 그런데 몰래 만나요. 그 당시 몰래 만난다는 것은 둘이 성관계를 갖는다는 거예요. 공자가 몸이 진짜 좋았어요. 그래서 남자가 유혹했다는 얘기가 있었요. 공자 입장에서도 제자들 데리고 다니는 게 힘든 거죠. 남자가 제후의 부인인데 이 사람만 후리면 배갯머리 송사가 있잖아요. 부인이 제후한테 ‘공자가 괜찮더라’라고 하면 재상이 될 수 있는 거예요.그래서 공자가 남자를 만나고 와요.

저는 단언컨대 그날 공자가 남자와 잤다고 봐요. 실패한 거지.

영화 <베사메무쵸>를 보면 빚을 진 이미숙한테 동창이 제안을 하잖아요. 하룻밤만 자면 돈을 준다고. 그래서 하룻밤 자고 오잖아요. 그때 두 부부의 어색함에서 자로와 공자 사이의 어색함이 연상 되더라고요.

 

고전 독법과 대안 교육

[308-310]

중요한 게 제자백가 시대는 논쟁의 시대니까 논쟁이 얼마만큼 비판을 많이 받느냐도 자세히 보고, 동시대 문맥도 정확하게 살펴야 하고요. 그런 다음 텍스트 중에서 문맥이 확실한 것과 해석의 확실성이 높은 구절부터 시작해 추상적인 것으로 독해해가야 해요. 안 그러면 삼천포로 빠져요. 그래서 <논어>를 강독할 때 저는 제자들한테 밑도 끝도 없이 ‘자왈’하고 나오는 건 일단 제치고, 질문자의 질문이 뭐고 대답이 뭔지 잡히는 게 있으면 우선 그것부터 읽자고 해요.

 

그리고 그 시대의 맥락에서 파악해야 하고요. 아까 얘기했던 공자가 남자를 만났다는 구절도 그 당시 예법을 모르면 독해가 안 돼요. ‘둘이 만났는데 왜 자로가 불쾌해하지/ 무슨 일이지?’ 이렇게 되는 거죠. 의미가 있으니까, 중요하니까 그 장면을 본 제자들이 기록으로 남긴 거잖아요.

 

우리가 일기를 쓸 때도 특이한 일을 기록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제자들도 특이한 가르침을 기록했다고 본다면 조심해야죠. 그런 가짓수를 다 염두에 두고 제자백가서를 읽어야 해요.

 

[312-316]

전체를 보고 줄거리가 뭐냐가 아니에요. 매번 해석에 들어가요. 내가 봤던 페이지 이후는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보는 거예요. 그 강도로 읽는 겁니다. 여기서 해석이 끝났는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좌초되기도 해요. 에이. 이후의 페이지들이 다 불탔으면 내 해석이 맞는 건데, 이런 게 나오다니. 텍스트를 읽어낼 때 독창적 해석이 나오는 근거는 그거에요.

 

<차이와 반복>을 읽어내는것과 들뢰즈의 철학은 이거라고 전제하고 나서 <차이와 반복>을 읽는 것은 달라요.

<논어>에 조문도석사기의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이 있어요. ‘아침에 도에 대해서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저는 그 구절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침에 들었으면 아침에 죽어도 좋다고 해야지. 왜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을까? 도가 뭐지?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아침서부터 저녁 사이의 시간은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에요.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혼자 있는 시간이고요. 그러니까 공자의 도는 사람과 만나는 거예요. 아침에 사람과 만나서 도, 길, 방법을 들었어요. 그리고 그 도에 따라 아주 잘 산거예요. 그랬기에 저녁에 돌아와서 이제 죽어도 좋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 의문 없이 이 부분을 그냥 넘어가요.

 

===> 생각하고 질문하는 것이 공부하고 자신에게 다다른 방법이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옛날에 한문 배웠을 때 제가 물어봤어요. “선생님. 아침에 도를 들었으면 아침에 죽어도 좋다고 해야지 왜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나요?“ 그랬더니 막 혼내면서 ‘독서백편의자현

讀書百遍義自見‘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속으로 ’지랄을 한다. 그럼 녹음기는 뜻을 다 아냐‘ 그렇게 생각했어요.

 

===>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 와~~. 무조건적인 순종과 복종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야. 자신이 스스로 서는것, 그것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야.

 

예컨대 아까 공자가 남자를 만났다는 부분도 저는 안 놓쳐요. 그러면 물어보게 되잖아요. ‘남자는 왜 만났지? 자로가 불쾌해하는 건 왜지?’가능한 상황을 다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런 다음 하나씩 하나씩 그 해석을 맞춰가는 거죠. 그렇게 맞춰가다 보면 다른 사람의 해석을 넘어서게 돼요. 열 가지 구절로 이루어진 조목이면 대개 한 가지 구절에 주목해서 나머지 구절들을 읽거든요. 그런데 저는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디테일한 구절을 가지고 해석 체계를 쌓으면서 하나의 해석을 밀어 붙여요. 그게 독해하는 요령이에요.

 

(연습하고 실행독해)

제 글이 다른 사람들이랑 다른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매번 한 문장 한 문장과 싸워서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 다음 구절에서도 또 검증에 검증을 하다 보니 쉽게 한 구절 한 구절 넘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게 읽으면 진짜 재미있어요.

===> 독해는 가설과 질문을 반복하면서 하는 거다. 나도 해보자 이런식으로.

 

[313-315]

서양철학자 중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힘들었는데요. 이건 80퍼센트를 읽어도 막막했어요. 동양에서는 니가르주나의 <중론>이 가장 힘들었고요. 그 두 권의 책이 제가 싸워봤던 책 중에 제일 강력한 책이에요. 진짜 힘들었어요. 그걸 돌파했을 때 기뻤죠. 지금 하라고 하면 기력이 딸려서 못할 거예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분석하려면 쇼팽이 어떤 사람이고, 어느 때 이걸 썼고, 뭘 담으려고 했는지를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처럼 텍스트를 읽을 때도 작가의 사상, 삶 속에까지 육박해 들어가야 해요. 그걸 놓치면 안 돼요. 사람들이 평전을 우습게 생각하는 데요.

인문학의 기본은 평전이거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글쓰기 형태가 문학 쪽에서 나왔는데, 그게 김윤식의 글이에요. <이상연구>, <이광수의 그의 시대>, <임화 연구> 등등 평전과 작품 분석을 겸비한 글쓰기의 전범이죠. 특히 염상섭에 대한 글은 정말 좋아요. 염상섭의 삶과 시대를 통해서 그의 텍스트를 독해해내고, 그 텍스트에서 염상섭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은 동서양 할 것 없이 그 전에는 없던 기법이에요. 보통 그 사람의 약력을 쓴 다음에 텍스트로 들어가잖아요. 그게 아니라 바로 피드백 되어서 들어가는 거에요. <이상연구>도 압권이죠. 정말 재밌었어요. 김윤식이 근대문학 문인들을 다뤘거든요. 김유정, 이상, 임화, 그리고 이병주까지. 김윤식의 최대 업적은 <한국문학사>가 아니에요. 평전도 아니고 텍스트 분석도 아니면서 작가와 작품에 육박해 들어가는 그 글쓰기가 매력적이죠.

 

저도 그 작가나 사상가의 삶의 궤적이 정확하게만 잡히면 그런 식으로 글을 읽고 쓰려고 노력해요. 그 시대에는 이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이렇게 쓰였다. 그렇게 이해하고 들어가야 디테일에 방해받지 않고 보편적인 것을 볼 수 있어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잘 읽은 사람이라면 내가 베르테르여도 그렇게 사랑했을 거라는 것을 느꼈어야 해요. 그러려면 일단 베르테르의 자리를 알아야 하잖아요. 보편적인 것, 나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디테일을 알아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디테일로만 보면 안돼요, 디테일만 보는 순간 에피스테메, 인식 불가능성에 빠져버린다고요.

 

내가 진짜 제대로 사랑을 했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읽히는데, 내가 베르테르였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고 베르테르가 나였으면 나처럼 사랑했을 거라는 경지에 오를 때 느껴지는 공감과 울림이 있어요. 이게 인문학적 독법의 핵심이에요. 역사책을 읽든 고전을 읽든, 이게 왜 중요하냐면 우리의 의사소통 가능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여자라면 어떤 여자처럼 하겠다는 것이고, 어떤 여자가 ‘내가 남자라면 강신주처럼 하겠다’라는 게 공명이라고요. 제가 여자가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남자와 여자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공명하는 거예요. 그게 공명의 조건이에요. 고전도 마찬가지에요. 인문학적 독법을 연습한 사람만이 공명할 수 있는 거죠. 권력은 우리를 깨알처럼 쪼개잖아요. 그에 대항하려면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공명할 수 있는 구조를 잡을 수 있어야 해요.

 

‘나는 여자의 마음을 안다’는 남자를 조심해야 해요. 아주 웃기는 소리에요. 이렇게 말해야 정직한 거죠. ‘나는 남자인데, 내가 너였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 정도까지. 이건 굉장히 달라요. ‘나는 남자니까 여자인 너를 모른다. 끝!’ 내지는 ‘우린 모두 인간이야. 끝!’ 이렇게 퉁치고 들어가는 것. 그런게 아니라 디테일과 보편성, 이 두 가지를 같이 보자는 거예요. 보편성은 공감의 구조고요.

저는 강연할 때도 이 원칙을 따져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지평에 육박해야 얘기가 되는 거에요. 꼰대처럼 내 주장만 가르치려 들면 사람들은 안 들어요. 일단 5분, 10분 동안 사람들을 찔러봐서 그들의 공통 관심사를 찾고, 집요하게 그 주제를 가지고 얘기하거든요.

 

[319-320]

경쟁이라는 것이 내가 시작해서, 우리가 시작해서 우리가 멈출 수 있다면 괜찮은 거예요. 그런데 경쟁이 필수가 되어버리는 것. 내가 스톱 못 하는 게임이라면 문제가 있는 거죠.

부모들은 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실험한다. 그건 부모의 몫이다. 하지만 이제 스무 살이 됐다면 드디어 네가 너 스스로를 만들 기회를 잡은 거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뭘 가르치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런 경쟁 교육을 받는 아이든 아니든 똑같다. 문제는 스무 살 때 네가 너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너는 너 자신을 만들고 있니?‘ 이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해요.

 

 

chapter 6

길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관중, 순자, 여불위

[324-325]

제자백가 시대의 종합적 텍스트가 세 권 있는데 <관자> <순자> <여씨춘추>라는 책이에요.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게 <관자>는 관중이 쓴 것이 아니에요. 똑같아요.

<순자>는 논문집이에요. 순자는 제나라의 직학학사라는 제자백가 최초의 공동 연구 집단에서 총장 역할을 세 번이나 역임했어요.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죠. 밑에 교수급 제자들이 쫙 있는데, <순자>는 그 제자들이 한 편씩 한 편씩 써서 모은 거예요. 공자의 적통은 맹자가 아니라 순자예요. 한나라 초기까지 그 지위가 유지됐는데 나중에 호족들이나 제후들이 득세했을 때 맹자가 복귀되면서 순자가 내쳐졌죠.

 

<여씨춘추>도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한 편, 한 편씩 논문을 써서 모은거에요. 편집만 여불위가 한 거고요. <브리태니커>같은 완벽한 백과사전이죠. <순자>는 유학의 입장에서 정리한 제자백가 백과사전이고, <관자>는 관중의 입장에서 정리한 춘추전국시대의 백과사전이에요.

춘추전국시대를 이해하려면 ,논어. 장자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자, 순자, 여씨춘추, 한비자>까지 추가해서 4권 정도 먼저 읽어야 해요. 춘추전국시대의 마지막 전국 후기의 작품들이라 지난 400년의 사상을 집대성해보려 한 거거든요.

<관자>를 보면 중국 고대 한의학의 전통이 다 담겨 있어요. 침술의 모든 기원이 거기 다 나와 있고요. 제나라의 문명 수준, 정치철학, 심리학이 <관자>라는 책에 다 들어 있거든요.

 

중국철학 최초의 악플러, 맹자

[328-331]

<순자>에는 성악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성악설과 성선설의 대조를 만든 것은 후대의 유학자들이에요. 순자에게서 성악이라 함은 자연성, 생물성이에요. 어린아이 같은 터프함, 성악에서 악이라는 말은 윤리적 함의를 띠는 게 아니라 거칠다는 뜻이에요. 도자기가 안 된 진흙같은 거예요. 즉 학습해야 한다는 거죠. 예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거예요. 순자가 생각하는 악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거예요. 우린 거칠다는 거죠. 극기복례, 즉 우리의 성은 악하지만 인위적 노력으로 선하게 된다는 거예요.

성선설과 성악설은 정치철학 데마예요. 성악설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거칠잖아요. 진흙이 제 혼자 그릇이 되진 않는다고요. 선생이나 사회의 규범이 필요하죠. 그래서 정치권력을 정당화해요. 반면 성선설대로라면 인간은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스스로 수양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득권 세력이 등장하면서 맹자를 복원시키는 거예요. 국가권력이 제후를 간섭하지 마라. 군주가 신하를 간섭하지 말라는 거죠.

 

이처럼 중국에서의 성선, 성악 논의에는 정치철학적 함축이 있어요. ‘나는 자율적으로 다 할 수 있어’하면 맹자 쪽으로 가는 건데, 이걸 강조하는 이들이 호족들. 기득권층이에요. 사회를 개혁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지만 정권은 ‘스스로 그릇이 될 수는 없다. 내가 그릇이 되게 해줄게’ 이런 걸 강조하죠. 사법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스승의 법이 있어야 한다. 예법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 스스로 노력은 할 수 있지만 기준은 바깥에 있다.

 

<맹자>에 ‘조장(助長)’ 얘기가 나오잖아요. 도울 조자에 길 장 자, 즉 길게 자라나도록 돕는다는 건데요. 농부가 모를 낸 벼를 잘 자라게 한답시고 벼를 잡아당겨 놓고 온 거예요. 그러면 나중에 벼가 논에 둥둥 뜰 거 아니예요. 잘 자라게 도와주고 왔다고 하는데 벼는 죽는다고. 맹자가 그 비유를 왜 들었겠어요. 건드리지 마라. 나는 나대로 잘 자란다 이거죠 그래서 한무제 이후 제후들의 힘이 강할 때 <맹자>가 각광받은 거예요. 자기들을 정당화해주니까.

 

<맹자>는 지식인 자율의 담론이에요. 군주권 중심이 아니라, 유학의 비극은 순자가 죽고 맹자가 뜬 데 있어요. 여기에는 주자의 공이 크죠. <순자>를 빼버리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요>으로 사서를 묶어 ‘공맹’을 만들어버렸으니, 순자로서는 안타깝죠. 당시 최강이었는데, 그래서 사상가는 뒤에 가봐야 알아요. 뒤에 빛을 내주는 사람이 없으면 사상가는 죽어요.

공격하고 비판하는 자는 약자의 위치에 처한다고요. <맹자>는 중국 고대 철학,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를 읽을 때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예요. 강력한 악플러였던 맹자가 공격했던 담론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요. 당시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으면 그렇게 공격을 했겠어요.

 

공자의 모순

[333-335]

‘유(儒)’라는 글자는 원래 기우제 지내는 무당을 뜻하거든요. 하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무당 같은 역할이 유예요. 그게 소인유예요. 지금 종갓집에서 제사 지낼 때 제문 읽고 하는 사람들이 유예요. 일종의 무당이죠. 고급 무당.

묵자가 집요하게 공자를 공격해요. 공자는 소인 무시하잖아요, 여자도 무시하고.

 

공자는 ‘우리는 군자유다’라는 자의식은 있어요. 우리는 정치에 참여하고 객경이 되려는 유다. 우리는 제사 기법 테크니션이 아니다. 이런 자각이 있는 거죠. 하지만 관직에 올라가지도 않았으면서 공자 집단은 뭘로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했을까요? 최소 72명, 전설에 따르면 3천명에 이르는 제자를 데리고 있었는데요. 단언컨대, 춘추시대의 상조 회사였을 거예요. 이걸 탈피하려면 벼슬을 해야 하는데, 벼슬을 못 했잖아요. 벼슬을 하지 못한 공자 제자들은 뭘 먹고 살았을까? 제가 봤을 때 상갓집 개예요. 이건 경제적인 문제예요. 지원도 따로 안 받은 공자의 수많은 제자들이 먹고 살려면 자기들의 전문 기술을 팔아야 했을 텐데. 그게 상례 제례 같은 행사에서 발휘됐던 거죠. 그리고 묵자가 그걸 본 거고요. 그래서 저놈들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람 죽은 것을 제일 사랑하는 놈들이라고 비판한 거죠. 말은 사랑이지만, 죽은 사람을 둔 사람만 사랑하는, 이런 상조 회사.

 

[337]

제 책을 보고 ‘이렇게 해석할 여지도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들을 하는데요. 사실은 진 거죠.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대충 퉁치고 ‘너는 그렇게 해석해라. 나는 이렇게 해석하겠다’하는 것은 그 사람이 졌다는 거예요. 보통 자기의 해석이 강하면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받아들이지 않아요. 산산이 부숴버리니까요. 그리고 제가 제자백가 전체에 대한 안목을 갖추고 그 당시 삶의 맥락 속에서 공자를 다루니까 텍스트만 보고서 추상적으로 독해했던 사람들이 당해내지 못하는 것예요. 제자백가 시리즈를 쓸 때 제일 많이 읽은 것이 역사책이거든요. <캠브리지 중국사>서부터 하버드 대학 중국학의 최신 연구 성과를 읽으면서 쓴 거예요. 일본의 연구 성과도 참조하고요. 그러니 협소하고 자의적인 독해 가지고는 싸우기가 만만치 않을 거예요.

 

[338]

저처럼 제자백가 원전을 다 읽고 정리하려면 10여 년이 걸리는데요. 제가 쉽게 써놓으면 5~6개월 만에 제가 10여 년 동안 공부하고 고민하고 재구성했던 것을 그냥 날로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이건 약간의 의무 같기도 해요. 제가 안 하면 못 하는 거예요. 저는 좀 힘들지만요. 힘들다는 건 다른 게 아니라 지루함에서 오는 건데요.

 

도는 걸어야 만들어진다

[342]

노자의 정치철학 테마는 피통치자 입장에서 보면 안 돼요. 노자는 ‘빼앗기 위해서는 먼저 줘야 한다’고 하는데, 재분배를 하는 이유는 수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복지란 것도 사람들의 생산력을 증대해서 세금을 더 걷으려고 하는 거잖아요. 국가에서 관개시설을 정비하려는 것도 사람들을 잘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을 증강시켜서 더 많이 빼앗으려고 하는 거고요. 국가가 수탈과 재분배의 기관이라는 것을 노자는 알아요. 군주가 재분배를 안 하면 나중에 국민들이 혁명을 일으켜서 다 빼앗아요. 그런데 그걸 나눠주면 국민들이 세금을 내고 복종을 해요. 그래서 비우면 찬다는 거예요. 비유를 들길, ‘그릇은 비어 있을 때 쓸모가 있다’고 해요.

 

덕의 정치

[345-346]

한비자는 덕(德)이라는 글자를 얻을 득(得)자에 마음 심(心)자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파자했어요. 마음을 얻으면 몸이 오지만, 몸을 얻는다고 마음이 오지는 않아요.

제일 중요한 것이 지인(知人), 사람을 알아보는 거죠. 덕이고 뭐고 간에 사람을 못 알아보면 헛짓을 하는 거예요.

 

[348-350]

‘죽으면 우리 국가가 지켜준다. 유골 다 찾아온다’ 현충 행사가 그거예요. 덕이라고요.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것이 있다. 교환의 논리예요.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의 기관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거죠. 국가가 재분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원초적 축적량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재분배 이전에 원초적으로 수탈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국가주의즐 싫어하는 거예요.

어쨌든 마음을 얻는 것하고 사람을 아는 게 제일 중요하죠. 혁명 조직이든 뭐든 조직을 구축할 때는 그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마음을 얻는 조직이 제일 강해요.

 

포숙, 관중을 부리다

[352-353]

<서경>에도 나와요. 지인이 안민, 어전 사람이 능력이 있는지를 알아봐야 민중을 편안하게 한다. <논어>에도 나오잖아요.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말 잘하고 얼굴색 밝은 사람 중에 어진 사람, 진솔한 사람이 드물다. 공자가 그 얘기를 왜 했겠어요. 제자한테 사기를 많이 당한 거예요. 공자를 존경한다 해놓고는 공자가 벼슬살이 못하니까 자기 혼자 자수성가해서 배반 때리는 애들이 많았거든요. 나중에 공자 제자들이 ‘줄 잘못 섰다. 공자는 아닌가 보다’하고 흩어지는 거죠. 애당초 공자한데 모여든 이유가 벼슬하기 위해서였거든요. 그래서 각개 격파 하다가 제후국의 조그만 지역에서 도지사 정도 하는 애들이 많이 나와요. 그러게 ‘스승님. 저 도 닦을게요’ 해서 가르쳤던 놈들이 훅 하고 배신하니까 ‘교언영색 선의인이다’이런 얘길 한 거죠

동양에선 지인(知人)이 핵심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관상이나 사주 같은게 발달하는 거예요. <인물지>라는 책도 있잖아요. 사람들이 어렸을 때는 얼굴이 같은데 나이를 먹어가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얼굴에 대충 나타나거든요. 쓰레기는 쓰레기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간사한 놈은 간사한 얼굴을 가지고 있고, 돈 버는 놈은 돈 버는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유소라는 사람이 <인물지>를 썼는데, 얼굴을 보고서 그 사람의 상태를 파악하는 방법이에요. 주구장창 사람을 알아봐야 하니까 이런 책들이 나오는 거예요.

 

[354]

동양의 사유는 노회해요. 서양은 안 그렇거든요. ‘믿자. 열정이 중요해’ 이러거든요. 배신을 안 당해봤어요. 그런데 춘추전국시대를 겪은 동양담론들은 ‘지금 흥한다고 계속 흥하냐. 지금은 흥해서 사람이 많지만 곧 훅 갈수도 있다. 그러니 마음을 얻어놔야 한다’고 논리를 전개하는 거예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만든 담론이죠. 애초에 전쟁에서부터 사율를 시작한 것이 동양 담론의 비극이에요. 서양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아테네의 화려했던 논쟁과 토론, 얼마나 좋아요. 동양은 애초에 바닥까지 가는 전쟁을 보고 산전수전을 다 겪으니 인간에 대한 나이브한 희망 같은 게 없어요. 내 사람으로 만들까 말까를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죠.

 

마음을 얻으려면 내가 뭔가를 줘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권력이 있을 때 그 씨앗을 심어야지 권력이 붕괴된 다음에는 주위에 사람도 없는데 무슨 마음을 주겠어요? 권력이 있을 때 미래를 꿈꾸면서 보험 들듯이 뭔가를 내줘야 하는 거죠.

 

유교 자본주의와 조폭 문화

[364-367]

완전 조폭이죠. 가서 칼침 놓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 문화가 유교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인 거죠. 유교 문화의 특징이 조폭 문화라는 거에요. 학연. 혈연. 지연이 다 조폭 문화인데, 배타적이잖아요. 우리 안에서 쇼부 치는 것, 한비자나 법가가 그런 걸 싫어하는 거죠. 사회를 좀먹는 거예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도 공자가 조폭의 원조라고 보는 시각이에요. 조폭문화, 가족주의, 폐쇄주의, 패거리주의, 어떻게 보면 전체주의나 박정희가 나타나기 이전에 조선 시대 전통에서부터 조폭 정신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어요.

 

우리에게는 조직 문화와 조폭 문화를 깰 수 있는 강력한 개인주의가 여전히 필요해요. 강력한 개인주의 속에서 유대와 연대를 얘기해야 하는데, 우리는 조폭적으로 유대와 연대를 맺고 있어요. 이걸 깨기가 힘들어요. 사람들이 자꾸 공동체 애기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는 일단 방법론적으로 개인으로 서야 해요. 그러고 나서 유대와 연대를 얘기해야죠. 왜 우리가 유대와 연대가 안 되냐 하면 이미 어딘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중적으로 힘들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한 개인으로 서는 작업이 우리한테 더 필요한 거죠.

우리는 반복적으로 전체주의를 겪었고, 전쟁을 겪으면서 패거리에 들어가 있어야 생존한다는 걸 체득했잖아요. 독재가 패거리를 강요했잖아요.

 

작가는 모름지기 자기 개성으로 글을 써야 하는데 패거리 의식 속에서 글을 쓰니까 창작이 죽어요. 최근에 고은 시인이 사람들 모아서 시집을 냈는데 저는 거기서 문학의 죽음을 봐요. 정치적으로는 괜찮아요. 그런데 김선우 시인이 4대강 가지고 뭘 쓰겠어요? 사랑 얘기만 쓰는 시인한테 자꾸 그런 걸 쓰라고 하면 안 되죠. 좋은 뜻으로 하는 거지만 억압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문인들도 조직 문화 속에 있고, 지금도 보면 창비다 문지다 해서 소속이 갈려 있잖아요. 최소한 문인들은 그러면 안 되죠. 개인으로 서 있어야 하거든요. 조직에서 벗어나려는 방랑자 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문인들이 상 타려고 발악을 하고 어느 출판사에 속해야 한다하고.

우리한테 시급한 과제는 자유로운 개인이에요. 가족으로부터의 독립까지 포함해서요. 우리 사회에서는 결혼식도 조직에 속한다고 선포하는 거예요. 온전한 독립이 아니에요.

 

민족주의가 가진 조폭성, 페미니즘이 가진 조폭성, 피해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가진 조폭성, 용서될 수 있는 조폭성이지만 그 조폭성이 또 다른 공격성을 낳으니까 문제죠. 용서는 돼요. 이해는 되지만 더 악한 사람을 공격할 때는 큰 문제죠. 우리 민족주의가 제3세계 노동자들을 수탈하는 것 보세요.엄청나다고요. 일본 놈들한테 그렇게 당해놓고서.

 

 

chapter 7

철학, 한국 사회를 보다

 

정치, 인간과 노예 사이

[371-373]

민주주의는 개개인이 주인인 거지 대표자를 뽑는 게 아니에요. 그게 벤야민의 입장이에요. 직접민주주의, 그러니까 정치의 소멸이죠.

정치의 분업,전문화가 제일 싫어요. 유인촌이 김제동보고 정치하려면 연에인 그만두라고 했잖아요. 이게 분업 논리거든요. 정치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너희는 너희 일이나 하라는 거죠. mbc 노조가 파업할 때도 그러잖아요. 너희는 방송이나 해야지 정치는 하면 안된다고요. 이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요? 정치를 독점하겠다는 거거든요. 이제 정치의 분업, 전문화예요. 모든 억압의 기초는 분업에 있어요. 분업의 논리를 붕괴시켜야 해요.

 

사람들은 매번 저 사람이 나를 구제해줄 거라는 착각에 빠져서 스스로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아요. 이 구조 자체가 보수적이에요. 그 구조를 따르는 사람이 아무리 진보적이라고 해도 구조 자체가 보수적인 거예요.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조건들을 공격하고, 그렇게 만드는 인간을 지탄해야 해요. 모든 억압이 총집결된 것이 인간의 내면이에요. 개개인 스스로가 처절하게 노력해서 주인으로 서지 않으면 이 구조를 극복할 수 없는 거에요.

 

<포이어바흐 테제>가 그거예요. ‘시대가 교육을 규정하지만 교육자도 스스로 변해야 한다. >그는 사회구조에 따라서 인간이 결정된다고 봤어요. 그런데 마르크스는 한마디 더 해요. ’교육자 스스로 변해야 한다‘ 그게 혁명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굉장히 래디컬한 정치적 입장이죠. 저는 직접민주주의자거든요.

 

===> 현 시대에서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일체의 정치는 억압이라고요. 정치가 개개인의 삶에서 분리되면 억압이라고요. 대표자나 국외, 대통령 같은 억압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개개인이 어떻게 회수해올 것인지에 사활를 걸어야 해요.

김남주 시인이 <어떤 관료>라는 시에서 썼잖아요. 일제 강점기 때 면서기였던 놈이 미군정 때는 군주사 하고, 공화당 시절엔 서기관 하고, 식인동이 쳐들어와도 관료를 할 거라고^__^

짐승이라니까요. 사랑이 없어요.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잖아요? 공체 생활의 원리는 사랑이에요. 아껴주고, 도와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정신이 없는 거죠.

 

오감의 세계 vs 시각의 세계

[380]

스마트폰의 세계는 시각의 세계에요. 그걸로 만족이 된다면 협소한거죠. 어떤 커플들은 오늘 전화 통화 한 것으로 만났다고 착각을 해요. 그렇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에 만족한다면 지금 동영상을 찍어놓고 헤어지면 돼요. ^__^ 시각은 관계에서 가장 얕은 단계에요. 키스할 때 상대방이 내 얼굴을 쳐다본다고 생각해보세요.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눈을 감아요. 꼭 껴안을 때도 왜냐하면 눈이라는 것은 깊은 관계에서는 불필요한 것이거든요.

가장 깊은 관계는 손잡고, 만지고, 등 두드려주고, 머리 쓰다듬어주는 거예요. 성적인 관계에서 가장 농밀해요. 그게 아니더라도 손잡고, 꼭 껴안아주고, 서로 머리도 감겨주고 목욕도 시켜주는 관계가 유지된다면 그 두 사람은 괜찮은 거예요. 손잡고 가는 노부부들은 서로 사랑하는게예요.

 

[382]

SNS 라는 건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 공간이죠. 배설하는 공간이가도 하고, 발악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이상한 공간이 됐어요. 감정의 쓰레기장처럼 되어가는 것 같아요.

지: 누군가는 ‘거대한 정신병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더라고요.

강: 직접적 만남이 회피되는 외딴 우주선 공간이 될 거예요. 거기서는 자기 혼자밖에 없기 땜누에 검열 안 된 오만 생각들이 오바이트처럼 쏟아져 나올 수 있어요. 소통보다는 자폐성을 강화시킬 수 있죠. 인터넷도 소통의 공간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자기블로그에 자기 공간을 가꾸는 거잖아요. 모두 다 외딴 우주선 속에 있는 거예요.

 

신상털기과 인민재판

[387]

일단 남의 일에 간섭하면 안 돼요. 어떤 사람이 해를 당하거나 그럴 때에나 간섭할 수 있는 거예요. 나에게만 간섭 안 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에요. 타인에게 근본적인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우리 이웃이 뭘 하든 건드리면 안 돼요. 반면 누가 나나 우리 이웃을 건드렸을 때는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선이 있어요. 그 선을 지킬 수 있는 여지. 우리 사회엔 그런게 없는 것 같아요.

 

===> 관심과 간섭을 구분하기. 내가 관심이라고 하지만 상대가 간섭이라고 느꼈다면 그건 폭력이 되고 폭력이 지나치면 하지 말아야 할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특히 부모와 자식간에 가족간에 그런 일들은 흔히 나타난다.

최인훈<광장>에서 광장과 밀실 얘기를 해요. 사람에겐 밀실도 있고 광장이 있어야 해요. 광장이 없으면 사람은 파괴되고, 밀실이 없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분열돼서 죽어요. 신상털기의 핵심은 너무 밀실로 들어간다는 거에요. 어느 정도까지 공적 영역이냐 아니야, 광장의 일이냐 밀실의 일이냐 하는 균형감각에 대한 문제거든요. 한 사람의 밀실까지 너무 육박해 들어가는 건 곧 그 사람을 파괴하는 거라는 의식을 가져야 해요.

 

다른 옷 입기. 같은 옷 입기

[391]

김수영이 이런 애기를 했어요. 체제나 권력자의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를 ‘방종’이라고 한다고. 그기고 그런 애기를 하는 사람들이 제일 방종한다고. 김수영의 기준에서는 자유에 사랑이 있으면 어떤한 자유든 방종이 아닌 거에요. 사랑도 없이 함부로 검열하는 것이 방종이죠. 타인에 대한 애정이 있는 한도 내에서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해요. 사람들도 그런 표현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본다면 아무것도 문제 될 게 없어요.

 

스티브잡스와 이건희

[394-395]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고 그 결과로 돈을 버는 것과 돈을 목적으로 자기가 하려는 일을 조정하는 것은 달라요. 잡스의 예술가적 기질은 그거죠. 진짜 정직하게 자기 영화를 만들어서 대박 나 돈 벌기를 원하는 영화감독 같은 거예요. 돈 벌 작정하고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는 영화를 만드는 것과는 다른 거죠. 그래서 예술가적이라는 건데, 순수예술 쪽은 아니고 실천적 예술가 쪽에 가깝다고 봐요. 그런 정신은 좀 배워야죠.

저자들도 돈을 벌기 위해서 책을 쓸 수도 있고,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책을 썼는데 사람들이 그 책을 사줘서 인세를 받을 수도 있어요. 겉보기에는 같지만 굉장히 달라요. 이걸 구별해야 해요. 저자한테 자본은 수단이에요. 목적이 아니라, 그래서 잡스가 복귀하면서 돈을 안 받은 거에요. 저는 그게 아주 의식적인 제스처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396]

인간의 삶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제품만 보는 거고, 제품에 무슨 스펙이 있으면 잘 나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는 창조적이고 예술가자적인 것이 나오기 힘들어요. 수율이 높은 반도체는 만들 수 있지만 인간의 삶을 편하게 해줄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내긴 힘들어요. 삼성이 아무리 커져도 그런 한계가 있어요. 실제로 직월들을 봐도 예술가적 기질이 없으니까요. 그런 기질을 북돋아주는 환경이 아니죠. 정확히 말해 삼성은 직원들에게 창의성을 요구하지 않아요. 삼성은 항상 말 잘 듣는 사람을 선호하거든요. 말 잘 듣는 아이들이 무슨 창의력이 있어요? 삼성 연구진들 만남보면 갑갑해요. 중학생, 고등학생 같아요.

 

[401]

자발적 복종은 이미 형식적으로 자살과 마찬가지에요. 자기 부정의 형태죠. ‘자발’이라고 하면 자기가 주인이어야 하는데, 그 귀결이 ‘복종’이에요. 그게 자살이잖아요. 이 사회에 살면서 사람들이 조직 탓도 안하고 자본주의 탓도 안해요. 자기가 버려졌다고 자살해요. 자기는 노예이고 싶은데 버려졌다고. 그래서 면접장에서 노예로 간택받잖아요.

 

신은 죽었다. 카르페디엠

[408-409]

사랑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인데, 결혼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예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사람은 내일 가도 또 내일이 있고, 도 내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람은 오늘만 있고, 내일 가도 또 오늘만 있어요. 그러니까 매번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극단적인 원리지만, 사랑의 원리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거예요. 결혼이나 소유, 경쟁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체제에 포획된 사람들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고 하죠.

 

[410-411]

니체는 진정한 허무주의자는 기독교인이라고 봐요. 자신의 현재 삶을 부정하기 때문에 허무주의라는 거죠.

기독교와 자본과 국가권력. 이들의 매커니즘은 기본적으로 각 개인에게서 오늘을 빼앗는 건데, 그건 사랑을 빼앗은 거거든요. 어떤 형식이든 구조는 똑같아요. 우리의 억압 체제를 비판하려면 자본, 기독교, 권력을 삼위일체로 비판해야 해요. 자본 비판해놓고는 교회 나가면 말짤 도루묵인 거예요. 그래서 니체도 ‘신을 죽인 다음에 신이 돌아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한 거죠. 신을 죽인 다음에는 우리가 주인이 되어야 해요. 주인이 못 되면 신은 망령으로 돌아올 텐데, 그게 국가권력일 수도 있고 CCTV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저 3가지를 한꺼번에 다 죽여야 해요.

 

자본을 공격하는 사람이 어떻게 국가를 공격하지 않고, 국가를 공격하는 사람이 어떻게 신을 공격하지 않아요? 다 공격해야 해요. 국가와 자본만 공격하면 우르르 신으로 가고요. 신과 자본만 공격하면 국가로 가요. 그들 중 어디로도 못 가게 해야 돼요.

 

예수 작두를 타다

[411-412]

지: <철학VS철학> 에필로그에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면,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면,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라며 신채호 선생 < 낭객의 신년만필>

원리주의는 그만큼 개개인의 실존이 나약하기 때문에 신이라는 갑옷을 입고 있다고 보면 되요. 너무 나약하니까 그 갑옷을 못 벗는 거에요. 어떤 하나의 원리를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약하다는 거거든요.

 

스피노자와 동학

[416]

지: 인문정신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와 동학의 가르침을 다시 음미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인문정신의 핵심이다라고

60,70년대 경북대 하기락 선생이 있을 때만 해도 아나키즘의 본거지였어요.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곳이었거든요. 하기락 선생을 중심으로 신채호서부터 이어져 온 한국 무정부주의 운동의 메카였거든요. 대구 경북대 강연 가서 ‘하기락 선생과 김춘수 시인이 있었던 이곳에 와서 무척 감개무량하다’고 했더니 학생들이 김춘수는 아는데 하기락은 모르더라고요. 영남대 박홍규 교수가 하기락 선생 제자예요. 그래서 존 레논을 좋아하고. <이매진>같은 걸로 글 쓰고 그러는 거예요. 푸코를 번역햇던 것도 아나키즘 성향에서 한 거죠. 어쩌면 동학의 정신일 수도 있어요.

 

자본의 한계를 돌파하는 사랑

[423-425]

젊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게, 신뢰하지 못하게, 우정을 나누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에요.

우리 아이를 죽이는 것은 상태 안 좋은 미숙한 어머니와 정권과 자본의 결탁이라고 보면 돼요. ^__^ 카이스트 학생들도 부모나 교수는 무시하고 연애에 몰두하면 자살 안 할 수 있어요. 성적이 떨어졌어도 애인이 ‘ 난 오빠가 카이스트 다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그러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안 죽는 거예요.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개를 키워도 돼요^--^ 사랑하면 안 죽어요. 갈 데가 없을 때 죽는 거예요.

 

얘들이 사랑할 줄을 모르니까 성적이 떨어지면 여자도 자기를 싫어할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해요. 공부도 하고, 음악도 듣고, 산도 가고, 영화를 보고 그러면서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엄마가 성적으로만 사랑받게 만들어 놓았으니 성적 떨어지니까 존재감이 없어지는 거예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짜리들이 카이스트 들어가는 것도 반대예요. 애들을 경쟁시키고 전문화시켜 천재로 만들어서 죽여버려요. 기형적으로 자라게 하는 거라고요.

천재의 재(才)자가 재목이에요. 써버리겠다는 거에요. 그 아이의 행복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애는 재목이에요. 서까래로 쓸 거에요. 예전에 ‘교육인적자원부’라고 했잖아요. 교육부가 애들을 인적자원으로 보는 나라가 어디 있어요? 전체주의도 아니고, 대학들도 ‘글로벌 인재’를 키우니 어쩌니 그러는데, 좌우지간 인재를 키우겠다는 학교 치고 제대로 된 학교가 없어요. 인재를 왜 키워요? 학생들을 행복하게 해줘야지. 인재는 그 발상이 제목에 있잖아요. 그 발상을 없애야 해요.

 

노무현과 진보의 증발

[429-431]

새누리당이 좇는 건 이념이 아니라 힘이에요. 힘센 놈한테 붙는 거예요. 보수가 아니라고요. 진짜 보수는 유교적 가치 같은 옛 가치를 숭상하는 거죠. 낡았어도 지키는 이념이 있어야 해요. 새누리 당은 힘 때문에 이합집산을 하는 거예요. 지킬 만한 가치가 없으니까 타협이 가능한 거고요. 손익관계를 따지잖아요.

마르크스를 들먹인다고 다 진보가 아니에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미래를 보지 않으면 진보가 아니거든요.

 

법이 왜 반인문적이냐 하면, 국회의원들이 법을 만드는데 이 법은 자기한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앞으로 태어날 모든 후손들의 이해를 반영애햐 하는데, 그게 불가능하잖아요. 대개 법은 동시대에 머무른다고요. 법의 폭력성이 거기에 있어요. 법을 전가의 보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왜 보수적이냐, 법대로 하자는 말이 왜 보수적이냐 하면 미래의 진보성을 안 보기 때문이에요. 법을 만들었을 대 앞으로 한반도에 태어날 수천만, 수억명의 아이들이 거기에 규정되는 건데, 법은 이걸 고려하지 않아요. 자기도 모르게 자기 기득권과 ‘쇼부’친다고요. 그런데 ‘그 법을 지키자. ’법대로 하자‘ 라뇨?’ 철학적으로 최장집, 조국은 보수에요. 미래의 아이들까지 보지 않아요.

 

사랑과 혁명이 필요한 시간

[441-444]

인문학자로서 FTA를 반대하는 이유는, FTA로 인해 자본이 팽창해서 전체 산업으로 경쟁이 확산되고 결과적으로 개개인은 더욱 과도한 경쟁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에요. 농민이 붕괴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삼성에 근무하는 사람들한테도 엄청난 압박이 가해질 거예요. 더 많은 경쟁을 요구받을 거예요. 인문학자나 철학자 입장에서는 그런게 보여요. 그런데 사람들은 FTA가 손해냐 이익이냐, 이런 좁은 프레임에 갇혀 있어요. 포인트는 그게 아닌데, FTA는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고 과도한 경쟁에 빠지도록 해서 끝내 개개인을 파괴시킬 거란 말이에요.

 

하여간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너무 자본주의화 됐어요. 우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정도가 진보인 거예요. 자본주의는 인간의 탈을 썼다가 벗을 수도 있는 건데, 인간의 틸을 쓰면 인간이 되리라고 착가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안철수 같은 사람도 자본가인데 자꾸 인간적인 한단 말이에요. 그게 진보로 보이는 거죠. 사실 안철수는 보수적이거든요. 조국, 최장집이랑 같은 계열이에요.

세계가 하나의 자본주의로 묶여 있어서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 게다가 이명박이 다 민영화 해놓으면 사유재산권의 원리 때문에 복구가 안 된다고요. 헌법에서 보장하는데 남의 사유재산을 어떻게 가로채요? 부르주아 헌법은 소유권에 근거한다고요. 민영화한 건 회수가 안 돼요. 헌법소원 내면 재산권에 위배된다고 무조건 깨요. 이런 조건에서 누가 정치를 하든 정부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공공안전망을 어떻게 마련해요?

 

이명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구소련의 계획경제나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 같은 걸 보면 개발 독재엔느 사회주의적 경향이 있었거든요. 국가가 유일한 자본이에요. 웬만한 사업체를 국가가 가지고 있으니까 국가가 이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뭔가를 할 수 있었어요. 우리 의료보험이 다른 나라들이 놀랄 정도로 발달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그런데 이런 공공안전망을 다 민영화한다고요. 그러면 헌법이 바뀌기 전에는 해소가 안 돼요. 혁명이 일어나야 바뀌어요. 그래서 민영화가 진짜 무서운 거에요.

다른 건 몰라도 의료나 교육은 공공에서 맡아야 하거든요. 안 그러면 공동체가 붕괴돼요. 아픈데 병원ㅇ르 못 간다면 말이 안되잖아요. 의료가 공공화되어야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되는 거예요. 쿠바처럼 모든 사람이 의료 혜택을 받아야 해요. 아픈 것 가지고 장난치면 끝나는 거예요. 나중에는 결국 가난한 사람들 장기도 사고팔게 된다고요. 사람 잡아서 장기를 훔칦 수도 있어요. 장기 기증했다고 퉁치고, 이런 것들을 근본적으로 막으려면 의료와 교육은 국가에서 맡아야 해요. 그러려면 혁명이 필요해요. 헌법을 완전히 바꿔야 해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무상으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한다고 쿠바처럼 헌법으로 보장해야 해요.

 

노무현 따라 흔들리고, 안철수 다라 흔들리고, 그러면서 ‘참여정치’ 를 한 대요. 결과적으로는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에 불과한데,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예요. ‘아 네가 뭔데?’ 이런 당당함이 없으면 민주주의가 안 돼요. 우리가 아직 주인이 안 된 거죠.

제가 해야 할 역할은 스스로 어떻게 주인이 되는냐 하는 것을 글을 통해서, 강의를 통해서 교육하는 거예요. 그게 근본적인 혁명이라고 봐요. 사랑해서 스스로 자유를 찾고 주인이 되려는 경향이 정치적인 영격으로까지 확장되는 거니까요. 어쩌면 가장 급진적일 수 있어요.

 

 

chapter 8

자본주의에 맞서라

 

소유냐 사랑이냐

[447-451]

지: “소유는 타자가 소유할 수도 있는 가능성에 대한 원칙적인 폭력이다. 소유는 곧 권력이라는 사실에서 지배와 복종의 논리를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도 얻을 수 있다. 소유가 철폐되면 권력도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며 루소를 인용하셨잖아요. 소유욕을 멈출 수 없는 사회가 된 셈인데, 그런 권력 관계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강: 소유 형식의 극복을 고민해야 해요. 과연 소유 형식이라는 게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해요. 예컨대 우리는 토지를 소유하잖아요. 그런데 과연 인간이 땅을 가질 수 있는 걸까요? 땅이 인간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요? 수명이 짧은 인간이 수명이 긴 것을 가질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자기땅이라고 울타리를 쳐서 지나라겨는 사람들을 돌아가게 만들어요. 과연 그게 정당한 것일가요? 그래서 공동체를 고민해보면 사적 소유의 토대가 붕괴돼요. 어느 정도까지 사적 소유를 인정할 것인가. 어디까지 공적인 소유라고 얘기해야 하는가. 공적인 공간을 어떻게 넓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는 거죠.

사유재산이나 소유의 논리가 있으면 갈등이 불가피하거든요.

 

저장에 대한 욕구, 냉장고가 확장된 것이 은행 잔고예요. 썩지 않게 하는 것. 화폐는 안썩잖아요. 안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여러 체제와 전산 시스템이 우리의 소유를 저장해준다요. 소유 형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이죠.

자본주의는 미성숙한 야만적 상태 내에 인간을 국한시키는 거예요. 자본주의는 따로 안 배워도 돼요. 그냥 적응이 돼요. 인류가 만든 체제 중에서 자본주의는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성, 사랑과 무관한 소유의 본성에 가장 근접한 체제예요. 어떻게 보면 인류에게 아주 치명적인 거죠.

 

소유라는 것은 사랑의 형식이 아니에요. 소유의 형식의 제일 반대편에 있는 것이 사랑의 형식이에요. 저 여자를 내가 갖겠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내가 저 여자한테 뭘 주겠다. 저 남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사랑이에요. 결혼도 소유의 형식이에요. 상대를 포획해서 내 집에다 두고 호적에 올리는 형식이 딱 소유의 형식이라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거든요. 저 돈이 사장의 돈일 때는 관심이 가는데, 내 통장에 들어오면 별 관심이 현저히 사라지요. 그리고 또 다른 것을 얻으려고 해요. 남자들이 결혼하면 다른 여자를 얻으려고 하잖아요.

 

[452-453]

남태평양의 어느 원주민 사회를 보면 젊은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으면 노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다 나눠줘요. 노인들은 젋었을 때 자기한테 물고기를 나눠줬던 사람들이고, 아이들은 자기가 노인이 됐을 때 물고기를 나눠줄 사람들이에요. 이게 공동체예요. 소유의 형식과 사뭇 달라요.

인류학 책을 왜 많이 봐야 하냐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몰라요. ‘소유 형식이 문제야’라고 하면 ‘안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반문해요. 그런데 인류학 책을 보면 지금 우리 문명의 흐름과는 다른 사회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소유 형식이 필연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자살도 자신의 삶을 자기가 가졌다는 소유 의식에서 생겨요.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우주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자기가 어떻게 죽어요? 소유 형식이 파괴의 원흉이라니까요.

 

===>이 세상에 내것이 어디 있는가?

돈을 벌어도 내 통장을 잠시 스쳐 모두 빠져나간다

책이라는 것도, 책을 읽으면 저자와의 영혼을 읽고 그냥 남의손에 간다.

사랑하는 이도 순간순간을 불태우고 헤어지면 각자의 삶을 산다.

진정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내 마음, 내생각이라는 것도 있는가.

타자와의 만남, 책과의 만남, 음악, 영화, 그림의 만남으로 사람으로 시시각각 변해가는데. 모든 것은 잠시 나를 스치고 가는 것일뿐.

 

장기 기증인가 매매인가

[455-458]

인간이 땅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땅이 인간을 가지는 것이듯 ‘나’라는 자의식이 육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나’라는 자의식을 갖는 거예요. 이 육체가 지속되는 동안 나는 몇 번의 변화를 겪었어요. 판단력도 달라지고요. 그런데도 내가 육체를 소유한다는 마인드가 있어요. 내가 육체를 소유할 수 있는게 아니라면 장기 기증을 어떻게 해요?

장기 기증 문제에도 자본의 논리, 소유의 논리가 바닥에 깔려 있어요. 나라는 자의식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해요. 내 몸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몸이 나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라고.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다

[458-461]

지: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라는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셨잖아요.

 

깅: 최소 폭력을 얘기하는 거죠. 우리는 유한자니까 뭔가를 먹어야 하고 뭔가를 해쳐야 하잖아요. 빵도 먹고 배추도 먹어야 하잖아요. 단지 어떻게 하면 그걸 최소화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일 따름인 거죠. 그러니까 오만하지 말자는 거예요. 인간은 순진무구함을 선택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과대한 폭력을 선택하면 안 돼요. 최소한의 폭력. 이게 중요해요. 균형 감각이 중요한 거고요. 적정하게, 최소 폭력의 지혜가 필요한 거죠.

 

지: 괴물과 싸우다 보면 괴물이 된다고.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의 선을 잠기가 어렵잖아요.

 

강: ‘괴물과 싸울때 조심해라. 너도 괴물이 된다’- 니체가 한 말처럼.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싸우다가 만들어졌잖아요. 그러면 제국주의가 사라졌을 때 해체돼야 하는데, 우리는 해체를 못 해서 이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폭력으로 변질돼요.

지: 피해자들의 자기 집단에 대한 방어본능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기 집단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싫어하잖아요.

 

하이퍼리얼리티

[463-465]

지:“발달한 대중매체는 대중매체 속의 이미지들을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일종의 착시 효과가 생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자연재난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전쟁이나 재난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만든 전쟁 영화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요. 무인 폭격기 이런 것이 현실을 게임같이 만들어 버리잖아요.

강: 하이퍼리얼리티. 가상현실. 전쟁 영화가 너무 리얼한 거예요.

과다한 현실성. 이게 언론 매체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이자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거예요. 하이퍼리얼리티가 우리를 지배하면 사랑에도 문제가 생겨요. 왜 쟤랑 키스할 때는 그 영화에서 봤던 느낌이 안 나고 입 냄새만 나느냐는 거죠. 장미도 안 쏟아지고, 종소리도 안들리고^__^

 

대중매체와 스펙터클

[465-472]

지: “바보상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권력의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다. 현실에 치열하게 참여하는 실천가가 줄어들고 거리를 두고 냉소적으로 구경하는 방관자가 늘어나게 되니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중매체의 볼거리들이 기본적으로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볼거리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일수록 우리는 대중매체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자본은 이를 이용해 우리의 내면에 신상품의 유행과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결국 우리는 여가 시간마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셈이다”라고 지적하셨는데요.

 

강: 언론 자유에는 두 단계가 있다고 보는데요. 하나는 권력으로부터의 자유고 다른 하나는 자본으로부터의 자유예요.

우리는 tv를 통해 관음증적 욕구를 충족하기도 하고 피해 의식을 보상받기도 해요. tv에서 대통령 욕하고 싸우는 것 보면서 희열을 느끼잖아요. 그런데 평소에 국회의원을 만나면 우리는 꼼짝도 못 해요. tv라는 매체가 그런 피해의식을 보상해주죠. 우리 사회는 관음증적인 사회에요. 그게 어떤 형식이든 간에, 하이퍼리얼리티가 지배하고, 폐쇄적이고, 유아적이고, 피해 의식으로 가득한.

지: “스펙터클 사회에서는 특권적인 인간 감각을 당연히 시각에서 찾는데, 다른 시대에 그 특권적 인간 감각은 촉각이었다”- 기 드보르.

 

강;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는 많이 읽어봐야 해요. 정치에 있어서의 구경거리. 그게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이고 정당 제도의 핵심이에요. <스펙타클의 사회>를 경제 비판. 자본주의 비판으로만 읽으면 협소해져요. 오히려 이 책의 매력은 프랑스 68혁명 때, 소련을 진리하고 생각했던 그때, 소련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한 최초의 책이었다는 데 있어요.

드보르는 영화감독이었어요. 자유로운 예술가, 아방가르드 예술가였죠. 나중에 권총으로 자살하는데, 자기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려서 자기를 죽여버린 거예요. 어느 사이인가 자기가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거예요. 멘토가 돼버린 거예요. 자꾸 68혁명의 전설이 돼버리니까 자신을 쏴버린 거예요. 철저한 사람이죠.

 

‘구경거리가 없는 사회를 구축하자’고 하는데 영화가 흥행했겠어요? 구경거리. 스펙터클을 쫒아내는 실험영화만 만드는데, 교수도 아니다 보니 프랑스 사상사 기술한 책들을 보면 드보르가 빠져 있다고요. 그런데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어보면 뒤에 나오는 들뢰즈나 보드리아르 같은 사람들이 모두 드보르의 통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실제로 68혁명 대는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보드리야르도 들뢰즈도 데리다도 아니고 드보르와 그의 친구 바네겜의 글을 벽면에서 옮겨써다고요. 드보르는 공산당의 실체를 폭로한 거예요. 당이 지금 스펙터클, 구경 거리고 전락했다고. 사람들을 구경꾼으로 만들고 지배권을 자기들이 갖는다고.

 

시각의 세계, 자본의 세계

[473-475]

누구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 순간 진보는 보수로 변하는 거예요. 한 단계 더 나아가면 ‘나만 이끌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우리도 진보 정당들이 진보에 방점을 찍지 않고 정당에 방점을 찍으니까 그런 본질적인 보수성이 있는 거예요. 권력을 잡으니까 보수성이 난무하잖아요. 죄다 자기 기득권 싸움이지 만중에 대한 시선이나 사랑은 없어요.

이것이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예언했던 거죠.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책을 꼽는다면 현 시점에서는 <스펙터클의 사회>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시각 분화는 스펙터클을 가능하게 하고, 관조하게 만들고, 실천하지 못하게 한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어요. 드보르의 주장은 우리가 관조하면 관조할수록 더 못살게 된다는 거고요.

지: “촉각으로 접할 수 있는, 즉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현실감각을 키워야 한다. 단지 이것만이 권력과 자본이 내건 집어등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요.

강: 자본주의와 정치를 붕괴시키는 것은 사실 쉬워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처럼 사람들 눈을 멀게 하면 돼요. 그러면 투표도 하기 힘들고, 서로 더듬으면서 살아야 해요. 프라다도 의미가 없고 tv도 못 봐요. 그러면 자본주의는 붕괴돼요. 알량한 시각 문화만 없으면 자본주의는 무너진다고요.

 

<시각의 세계란>

권력과 자본이 우리를 통제하려면 우리를 시각 중심적 인간으로 만들어야 해요. 볼 수 있는 것만 소유할 수 있거든요. 예컨대 음악은 소유할 수 없지만 눈에 보이는 CD는 소유할 수 있잖아요. 소유하려면 시각화시켜야 해요. 시각화는 소유의 핵심이에요. 따라서 시각이 붕괴되면 소유도 붕괴돼요. 내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시각의 세계가 곧 자본의 세계이기도 한 거죠.

또 하나, 시각의 세계는 정치의 세계에요. 왜냐하면 보는 자는 우월하고 보이는 자는 열등하거든요. 그래서 높은 사람에게 눈 깔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거예요. 안 보고 숙이는 것은 목을 쳐도 된다는 거예요. 굴복의 의식이죠. 골목길에서도 힘센 형들이 눈 깔라고 하잖아요.

 

시각의 세계는 저주받은 세계라니까요. 체제가 우리를 길들이려고 하는 이미지는 두 종류인데요. 하나는 우리를 공포로 몰아가는 CCTV 영상, 범죄 영상, 전쟁 장면, 혹은 MRI 같은 진단 영상의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물건을 사도록 부추기고 유혹하는 이미지예요. 공포를 주거나 유혹하는 이미지. 이 두가지예요. 유혹하거나 쫄게 하거나 둘 다 효과는 똑같아요. 쫄아도 타인과 사랑하지 못하고, 유혹에 빠져도 살아 있는 타인을 사랑하지 못해요. 시각 문화라는 것을 협소하게 보면 안돼요. 시각은 정치가 가능하고 경제가 가능한 곳이에요. 시각적 세계는 본질적으로 정치, 경제적인 의미에서 소유의 세계에요.

 

[477-478]

자본주의의 원리 중 하나가 고립되고 분리돼야 소비가 촉진된다는 거예요. 개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예요. 예컨대 형이 입었던 옷을 쭉 물려 입는데, ‘나는 나만의 개성이 있어’ 이러면 옷을 따로 사야 하잖아요.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소비하도록 우리를 조개요. 더 심각한 것은 개인의 내면도 쪼갠다는 거예요. 개인의 내면을 분열시키는 거예요. 직장인으로서의 소비, 딸로서의 소비. 기타 등등으로 소비를 쪼개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관계가 많으면 소비가 많아져요. 왜냐하면 그 인간관계에 따라 자아의 형식을 정해야 하니까요.

 

자본주의는 우리를 콩가루처럼 쪼개려 해요. 단결해서 같이 쓰지 못하게 해요.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싫어한다고요. 개성, 개성 하는데, 소비의 자유를 개성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죠. 지금 광고에서 떠드는 개성이란 건 다양하게 고를 자유에 불과한 거예요. 사지선다형 식의 자유일 뿐이죠.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고르는 게 무슨 자유예요? 자본은 이렇게 인간을 파편화시키고, 개인과 개인을 떨어뜨려놓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을 산산이 쪼개놓을 수 있어요.

 

민주주의는 데모의 정치

[478-480]

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시간도둑들로 가득하다”고 하셨잖아요. 빚을 권해서 그 빚으로 개인들을 통제하는 사회가 됐는데요.

 

강: 조금이라도 가진 게 있다는 게 문제예요. 다람쥐는 산사태가 날 것 같으면 떠나요. 그런데 어떤 다람쥐는 그 산에 도토리가 많이 열리는 나무를 알아요. 하지만 거길 못 떠나면 죽거든요. 우리가 바로 도토리를 가진 다람쥐가 아닌가 싶어요. 알량한 도토리 몇 개 지키려고, 굴속에 도토리 모아놨다고 바위가 무너지는데도 떠나지 않아요.

‘그나마 비정규직이라도 있으니 스마트폰 대금이라도 내지’ 그런 약하고 파편화되어 있는 모습들이 있어요. 구조가 바뀌면 그런 모습들이 사라지겠죠. 그런데 사람들이 구조를 바꾸지 않고 구조가 바뀌기만을 기다려요.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파시즘이 출현하다는 거예요. 자기가 바꿔야 하는데, 바꾸려고는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제가 글을 쓰는 이유가 그거죠.

 

[480-482]

자본주의를 우회하면 안 돼요. 그게 우리 삶에 고통과 고민을 안겨주는 근본적인 원인이니까요. 산사태가 나는 것에 대한 직감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도토리에 정신이 팔려서 산사태가 나는지도 모르잖아요. 체제가 너무 기만적이에요. 장밋빛 꿈을 계속 미래로 연결시키죠. 자꾸 저축하고 보험 들고 미래를 꿈꾸게 함으로써 현재의 세계를 영위하지 못하게 해요. 미래를 염려하게 하는 사회죠.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 기관이예요. 세금은 자발적으로 내는 게 아니라 수탈하는 거지만, 수탈하고 나서 여러 가지 사업에 쓰잖아요. 재분배를 하는 것도 다시 수탈하려고 하는 거에요. 그게 국가기구의 핵심이에요.

현명한 군주는 좋아하고 나쁜 군주는 싫어하는데,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군주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거든요. 그런 이해에까지 이르러야 해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너희에게 있는가?’

민주주의의 덕목 중 하나가 자유인데 자유가 가능하려면 용기가 있어야만 해요. 자기 삶에 굉장히 당당해야 해요. 자본가한테 쫄아 있고 권력자한테 쫄아 있으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거예요.

진짜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데모의 정치예요. 직접민주주의가 별건가요? 민주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에요. 그런데 지금의 정치는 과두정치예요. 민주주의가 아니예요. 다들 알 텐데도 그걸 안 보려고 해요. 협소한 시각으로만 봐요. 투표할 때만 보고. 그리고 정치인들이 표 달라고 구걸할 때만 보고는 ‘내가 주인인가 보다’하죠.

쫄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그래야 자기 상처라든가 비겁함, 남루함에도 직면할 수 있어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굽실거리다가 죽지 말고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책에 싸인해줄때도 이렇게 써요. “항상 당당하세요!

 

민주주의의 양 떼가 되다

[482-483]

전두환을 왜 용서하냐고요. 이해가 안 돼요.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용서해요? 받아들이는 거거든요. 용서는 강자들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강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착한 척해요. 그러니까 매번 당하지. 사람들이 독해지면 독재도 함부로 못해요. 독재했다가는 삼대가 힘들다. 애들이 복수한다. 이러면 감히 어떻게 독재를 하겠어요? 광주 시민들이 독재자들을 테러하고 죽인다고 해봐요. 독재자가 어떻게 생기겠어요? 임기 마치면 훅 간다. 이런 것들이 민주주의의 토대라고요.

 

그런데 너무들 착해. 양 때들 같아요. 그래서 니체가 민주주의가 되면 사람들이 양 떼가 된다고 비판한 거예요. 그렇다고 영웅주의로 가자는 게 아니라 개개인이 굉장히 강해야 한다. 다 야수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권력자는 야수인데, 니체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요. 사람들이 다 양 떼가 되어서 현세에서 저항도 못 하고 천국 가려고 하잖아요. 니체의 잣대는 항상 그거거든요. 사람을 강하게 만드느냐 약하게 만드느냐, 사람에게 힘의 의지를 증진시키느냐 약화시키느냐. 그러니까 기독교도 딱 걸린 거죠. 적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런 것을 싫어하는 거예요. ^__^

혼자 생각해서 다 용서하고 그러면 안 돼요. 자기는 의식적으로, 순간적으로 용서했다고 생각하는데 화병이 남아요. 그러면 사람이 위축되고 활력이 없어지고 피해 의식이 생겨요. 나중에 그런 상황이 되면 미리 피하고, 겁이 많아지고 소심해지고, 김어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쪼는’게 되는 거죠.

 

자살에 이르는 길, 자기계발

[484-489]

자살은 굉장히 이기적이예요. 내가 나의 죽음을 통제하는 거예요. 죽음은 그냥 밀려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자살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겠다는 거예요. 자살이라는 것은 가장 여린 상태에서 벌어지는 자의식의 폭력이에요.

 

지: “자살은 바깥을 장악하겠다는 인간의 야망, 즉 동일성의 야망이 극단적으로 펼쳐지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살하려는 인간은 죽음을 겸허하게 기다리기보다는 그것을 미리 정복하고자 합니다‘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강; 자살은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에요. 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느냐면 내가 패배자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스스로 패배자인 나를 단죄하는 거예요. 자신에 대한 처형 행위죠. 내가 어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부정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패배자고 못난 모습이기 때문에 나를 제거하는 거예요.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경쟁을 안 받아들인다고요. 사회 불만 세력들은 안 죽어요. 그런데 체제의 수혜자였던 아이들. 경쟁을 받아들였던 아이들이 많이 죽죠. 사실은 체제가 살인을 하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쇼팬하우어 인생론>의 자본주의화된, 세속화된 버전이거든요. 열심히 자기를 계발하는 거죠. 계발하면 자본주의가 좋아해요. 노예가 되기 위해서 노예적 기능을 익히는 거에요.

 

수양론이라는 것은 자기에 대한 개조 작업이잖아요. 영어로는 셀프 컬티베이션self-cultivation. 뭔가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 자기 폭력이에요. 자기를 변화시키겠다는 거잖아요. 조직 생활에서 자기계발, 자기 수양 얘기가 나오는 건 조직을 바꾸자는 애기다 아니예요.

자기계발 따위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는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이 경쟁 시스템, 자본주의 체제가 굉장히 강화하다는 거예요.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거죠. 안하면 죽는 거죠. 자본주의가 극복의 대상이 아닌 거예요. 자본주의가 너무 큰 벽이 된 거예요. 자본주의의 벽이 너무 높으니까 올라가기보다는 그냥 내가 안 보겠다는 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계발과 자살은 사뭇 구조가 유사해요. 세계를 죽여야지 왜 자기를 죽여요?

 

지: 자기계발은 자기를 서서히 죽여가는 거네요.

 

강: 서서히 죽이다가 자기계발에 실패하면 죽어요. ^--^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의 특징인데 오래됐죠. 1997년 IMF 이후 두드러진 현상이에요. 그만큼 체제 자체가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높아지고 압도적이라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멘토를 기다리는 거예요. 우리를 한 방에 구제해줄 사람. 자기는 절망하니 다른 사람의 꿈을 이용해 건너려는 거죠. 파시즘의 징후가 있는 거예요. 우리를 자살 안 하게 이끄실 그분은 누구신가. 이런 식이 되는 거죠. 체제는 그걸 철저하게 이용하는 거고요.

 

 

chapter 9

음악이 필요한 시간

 

편집자는 첫 독자

[493-495]

제 원고는 제가 통제해요. 장 구분하고 띄어쓰기 하는 것도 제가 하고, 표도 직접 만들어요. A4로 된 초고 상태에서 거의 완전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하려는 얘기는 명확하게 쓰고, 쓸데없는 소리는 가급적 안 하려고 해요. 아마도 편집자들이 봤을 때 그게 느껴질 거예요.

왜 편집자들을 높이 평가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면, 편집자는 첫 독자, 그것도 고급 독자이기 때문이에요. 편집자가 제 글을 재밌게 읽는지가 독자들이 어떻게 읽을지에 대한 바로미터예요. 내용이나 주장은 건드리면 안 돼요. 만약 그것까지 건드리면 그 친구랑 작업하면 안 돼요. 그럴거면 자기가 저자를 해야죠. 대개 보면 잘 안 읽힌다는 애기예요. 원고 고칠 때 편집자 애기를 많이 듣죠. 무조건 들어야 해요. 그건 필요한 거니까. 이 편집자한테 감동을 주는 글을 써야 하잖아요. 그러려면 이 편집자를 신뢰해야 해요 . 공부가 안 되어 있거나 돈 벌려고 하거나 사장 편을 들거나 하는 편집자들은 몇 번 보면 알잖아요.

저자로서 제가 해야 하는 것을 편집자에게 미루지 않아요. 원고는 가급적 정확하게 제시간에 맞춰 주려고 하고요. 제가 침해하지 말아야 할 건 절대 침해하지 않아요. 제목도 제가 안 정해요. 글이 아무리 좋으면 원해요? 편집을 통해 예쁘게 목욕도 시켜주고 이상한 데 치료도 해주고 그러지 않으면 건강하지 않거든요.

===> 편집의 중요성, 좋은 편집자는 저자를 돋보이게 한다.

 

저는 제가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지를 알고 글을 쓴데요. 책들 보면 막 쓰는 사람도 많아요. 이 책을 내야만 하는 이유가 저에겐 있어요. 그 이유를 가지고 글을 쓰고요. 그 이유를 편집자는 금방 알아요. 항상 편집자들에게 강조하는 게 이런 거예요. 책이 많이 안나가도 된다. 최소 10년 이상 나가는 책을 쓰는 게 중요한 거다. 이 연습이 돼야 내가 쓴 책이 죽어도 팔릴 수 있고 사람들이 꺼내볼 수 있는 책이 된다. 제 책이 저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하니까요.

편집자는 제 첫 독자예요. 이 첫 독자가 설득이 안 되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독자도 힘들죠. 편집자는 자기가 그 책을 가장 먼저 보는 독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해요. 나쁜 편집자들은 출판사 사장의 입장을 들어요, 저의 정신성이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를 보는 게 아니라 팔릴 것이냐 안 팔릴 것이냐의 문제로 접근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처음에는 햇갈렸는데 몇 번 만나보면 알아요. 그러면 같이 작업 안 해요.

 

전문분야가 협소한 저자들은 고전 텍스트나 자기 전문 분야는 잘 독해하지만 현실은 못 읽어요. 그래서 편집자는 현실을 읽고 그렇지 못한 저자들에게 종합의 능력을 선사해야 해요. 저자의 생각이 사회의 어떤 부분을 치고 들어갈지 사회 전체의 맥락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해요. 지금 사람들에게 어떤 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거죠.

어떤 책이 잘 나가는지에만 관심이 있으니까 표지도 똑같고 제목도 비슷해요. 그게 편집자에요? 장사꾼이지. 선생님 이런 자료 보셨어요? 이렇게 책 쓰시면 좋은데, 우리 시대는 이런 문제가 있거든요. 저는 선생님의 이런 책을 읽고 싶어요. 이런 얘기를 못 하면 편집자 아니에요.

 

언어 이전의 고통과 대중적 글쓰기

[496-497]

대중적 글쓰기는 어려워요.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게 아니라 책이 읽는 이의 정곡을 질러 해요. 인문학 책은 자기 계발서나 스티브 잡스 책과는 달라요. 사람들이 읽었을 때 표면적이고 너무 쉬운것. 그게 대중적 글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독자가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끔 글을 쓸 수 있느냐에요. 그게 인문학에서의 대중성이죠. 독자들과 우리 이웃이 어떤 심리 상태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요. 제 글이 조금씩 조금씩 더 읽히는 이유는 하나에요. 제가 굉장히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의 고민을 들었기 대문이에요. 그게 글 쓸 때 반영되는 거예요. 대중적 글쓰기를 따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제 글인데 문체가 그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루소책만 대중적이에요. 자기 문체를 가지고 동시대에서 사람들과 가장 강력하게 교감하면서 쓴 책들은 몇 십 년이 지나고 그 가치가 바래지 않고 나중에는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거예요. 순간적인 것으로는 고전의 반열에 못 올라요. 다행히 제가 4년 전에 냈던 책이 지금 계속 팔리는데, 앞으로도 계속 가야 해요. 10년은 달 수 있는 글을 써야해요. 그러한 주제를 잡아야 하고요. 대중적 글쓰기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대부분 고전이 대중적이라는 점을 알아야죠. 고전은 읽기 쉬워요. 오히려 고전에 대한 해설서가 어렵죠. ^---^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책만 해도 얼마나 쉬운데됴. 대학이라는 제도가 출현하면서 학술적이고 죽어 있는 문체가 만연해졌죠.

또한 대중적 글쓰기를 하려면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계속 업데이트해야 해요.

 

<경향신문> 칼럼을 쓰면서 그때그때 현실을 읽으려고 했던 노력도 나중에 글 쓸 때 반영돼요. 일단 칼럼 주제를 잡으면 사람들하고 얘기를 해요. 강의 나갈때 그 주제를 한번 던져봐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자들 만나서도 던져보고, 칼럼 쓸 때도 고전 텍스트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 텍스트도 읽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다음 책을 쓴다면 허점이 별로 없을 거예요. 독자들이 볼 때도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라 자기 얘기일 테고요.

어쪄면 제 책은 ‘당신들 남루하다. 남루하다는 것 알아야 한다’ 이런 비판일 수도 있어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희망일 수도 있고요. 글은 출간 안 할 거면 쓰지 말아야 해요. 글 쓸 때 제가 염두에 두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한테 읽혀야 해요.

===> 타겟 독자층을 정해 놓고 써야 한다.

 

이 맥락에서도 편집자가 중요한 거에요. 내 의도는 이렇고, 나는 이런 책을 쓰고 싶다는 것을 공유했으면 편집자가우너고를 보고서 ‘이 부분에서 이런 점이 부족하다’, 선생님의 정신성을 이런식으로 표현하면 좋겠다‘하는 식으로 제게 테크닉을 가르쳐줘야 해요.

 

[498}

한 권의 책이라면 그 책만 읽고도 그 책을 좋아할 수 있어야 해요. 그 책을 읽기 위해서 제 이전 책들을 다 읽게 해선 안되거든요. 대하 인문학 서적이 아니라 매번 하나로 끝나야 해요. 그러려면 편집자의 역할이 필요하고요.

 

[499-500]

지: 한 출판사랑 세 권 이상 안 하신다고 한 것도 그런 이유겠네요.

 

강;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요. 편집자도 안 좋고 저도 안 좋아요. 자본에 포획되지 않으려면 저자가 출판사를 옮겨야 해요. 출판사가 ‘내 저자다’이러면 안 돼요. 최대 세 번하고 도망가야 해요. ^__^ 그러면 출판사 사장들이 제게 함부로 못 해요. 지난번 <김수영을 위하여>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고 난 다음에 올해 나올 책 몇 권의 계약금을 다 돌려줬어요. 그리고 책 나올 때 계약한다는 원칙이 생겼죠. 수틀리면 안 낸다. 이게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방식이에요.

지: 제자백가 시리즈요요?^__^(책쓸때 주의점)

 

강: 2천만 ~ 3천만 원 돌려줬더니 치명타예요. 인문학 저자들은 미리 돈 받으면 안 돼요. 그러면 글이 안 나와요. 저자가 자본에서 독립적이어야 인문학 책을 쓰죠. 인문학 저자들이 살기 힘드니까 계약금으로 인세를 당겨 받는다고요. 일단은 3천 부 해서 5백만 원인가를 받아요. 그리고 조금 있다가 돈이 또 부족해지면 다른 출판사에서 5백만 원을 받아요. 그러면 계속 글의 질이 떨어져요. 원고가 안 나와 독촉 받으면 위축되고, 그러면 납품 원고가 되는 거예요. 납품 일자가 되니 대충 쓰고, 그러니까 망가지는 거예요. 출판사가 그걸 조장하는 거고요.

 

출판사 사람들은 돈을 주고 부채 관계가 성립됐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펀집자가 돈을 먼저 던져주면 안 돼요. 돈을 주더라도 계약금 형식으로 하지 말고 다른 식으로 그냥 도와주든가. 저자를 신뢰한다면 “책 보는 데 쓰세요”하고 줘야죠. 그러면 저자가 나중에 인세 받은 데서 돌려줘요. 그런 식으로 하면 인간적이잖아요. 돈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 인문학 출판은 자본의 논리가 무척 횡행하는데 이걸 너무 방치했던 것 같아요.

 

인문학 저자는 돈 때문에 책 쓰면 안돼요. 책을 써서 사람들이 많이 읽고, 자기에게 공감한 다음에 그 결과물로 돈이 들어오는 건 괜찮아요. 그 정도 되면 돈이 수단이 되거든요. 그런데 잘못하면 돈이 목적이 될 수가 있어요. 그걸 바로잡아야죠. 편집자들도 너무 쉽게 일종의 채무 관계를 만들려고해요. 저자들 잡는다고요. 계약금으로 5만 원 부치라고 했는데, 5백만 원 부친 출판사가 있어요. 다 돌려주고 “니네랑 안 해” 했죠. ^__^

 

[501-502]

김수영이 문인들에게 ‘당신들은 언어의 고통 이전의 고통이 없다’며 비판했다고 했잖아요? 이걸 거꾸로 읽으면 우리에겐 두 가지 고통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우선 자기 얘기를 하려고 하고 자유롭고자 할 때 당하는 고통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런 고통이 있은 다음에 그것을 잘 표현해야 하잖아요? 내가 전쟁을 겪었으면 묘사를 더 잘해야 해요. 그러면 전쟁을 안 일으킨단 말이예요. ‘힘들었지만 남자라면 전쟁을 해 볼 만해’ 이러면 전쟁을 또 일으킨다고요. 그래서 제대로 잘 표현하기 위한 언어의 고통이 있어야 히요. 두 가지가 다 필요해요. 대학교수들은 논문 쓰니까 언어의 고통은 있는데 언어 이전의 고통이 없는 거죠. 반면 어부들은 언어 이전의 고통은 있는데 언어의 고통이 적은 거고요.

 

두 가지가 다 중요해요. 인간은 언어를 쓰니까 지식인을 떠나서 모든 사람이 언어 이전의 고통이 필요한데, 그 언어 이전의 고통이 자기 글의 리얼리티를 낳는 거예요. 언어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은 그 리얼리티를 못 담아내서 그런 거고요. 리얼리티도 언어 이전의 고통도 없는 사람은 흉내만 내려 해요. 랑시에르처럼 써야 해. 들뢰즈처럼 써야 해, 라는 식으로요. 그건 허구적 고통이죠. 글 보면 그런게 많이 느껴져요.

제 잣대는 그거예요. 지식인을 평가하거나 저 자신을 평가할 때 물어봐요. ‘지금 충분히 힘들어? 지식인으로서의 역할 때문에 힘들어? 최선을 다하려고 하고?’ 그래서 매번 고민해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강의할 것인가. 그게 제 문체에 나타나는 거예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기 쉽게 글을 써요?”하고 물으면 그 두가지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주죠.

‘신주야. 너는 언어의 고통 이전의 고통이 충분하냐?

 

자본과 책 사이의 인문학 출판

[503-505]

자기가 내고 싶은 책이 진짜 중요하다고 확신하고 내면 당장은 안 팔려도 스테디셀러가 되거든요. 당장 돈을 벌려고 하니까 안되는 거죠.

인문학 출판사 편집자들이 1년에 6권 내야 하더라고요. 딱 두 권이면 적당하죠. 인문 책인데. 집중해서 저녁까지 일해야 한다는 헛소리는 사장이 하는 소리고. 편집자는 푹 쉬고 영화도 보면서 편안하게 원고를 봐야 해요. 그래야 원고가 더 좋아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편집자가 노조 만들지 않는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 돼요. 안 움직이겠다는 거잖아요. 출판사는 일반 회사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 거예요. 나중에 부당하게 해고돼서야 깨닫죠. 이 책을 내야 하는데 사장이랑 어긋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안 움직이게 하는 생각이 보수적인 생각이예요. 그게 현실을 직면 못하게 하고 수용하게 만들어요.

편집자의 에디터십이 굉장히 강해져야 하는데, 그런 차원에서 노조가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외국에 가면 에디터들은 비자 같은 것도 거의 다 해결돼요 에디터는 지식인이고 특권층이에요. 사회적 이슈를 잡고 글을 모으고 글에 근보넞ㄱ으로 개입해서 글이 읽히게 해주는 제2의 저자에요. <김수영을 위하여>를 내면서 제가 처음으로 편집자 이를을 올렸잖아요. ‘강신주 지음, 김서연 만듦’으로. 편집자에게 권한을 다 줬어요. 얼마나 글을 꼼곰하게 고치고 만졌는지 알아요. 그래서 제가 이름을 올린 거예요. 떠들지만 말고 뭔가 실천을 해야 하니까요.

 

편집자로서 자본과 책 사이, 자본가인 사장과 저자 사이의 고통을 감당하면 단언컨대 4~5년이면 최고의 편집자, 최고의 지성인이 될 수 있어요. 그러면 웬만한 텍스트는 다 읽혀요. 사회의 불의, 이런 것도 다 읽혀요.

 

블로그와 책

[507-509]

지: 블로글에 쓰는 글과 책으로 내는 글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블로그를 1인 미디어처럼 활용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강: 블로글에 글들이 다 쓰였을 때, 어떤 체례로 묶었을 때 하나의 독립된 우주가 될 것인가. 저는 안 된다고 보거든요. 단편적이고 파편적이라고요. 한 저자가 책으로 묶는다는 것은 하나의 완결된 우주를 만드는 거예요. 질적인 하나의 단계가 있어야 해요. 얻어걸려서 한두 마디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유기적 연결이 되는지가 문제에요.

 

최악의 컨디션일 때 쓴 글이 곧 그 저자의 퀄리티거든요. 몸이 불편하고 망가진다고 해도 글을 써야 하는데 그 글을 사람들이 봐도 아픈지 전혀 모르게 글을 쓰는 것. 술 취해을 때도 맨정신처럼 글이 나오는 것.^___^ 그게 저자의 진짜 실력이죠. 시를 평가할 때도 열 편 이상 보고 평가해야지 한 편만 봐선 몰라요. 제일 좋은 것은 다 좋아요. 연재해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몸이 안 좋을 때가 많잖아요. 바쁠 때도 많고요. 그래도 퀄리티는 유지돼야 해요. 그리고 자기 글의 퀄리티가 떨어질 때를 알아야 하고요. 블로그는 좋은 글과 나쁜 글이 난분분한데 나쁜 글들을 다 제거하고 나면 얼마 안 남아요. 그래도 그런 것들이 양적으로 충분히 쌓여서 하나의 우주가 되면 책이 나오겠죠.

 

하나의 우주를 구성해서 하나의 단행본을 내놓는 건 좀 달라요. 자기 아이를 낳듯이 낳고서는 ‘너는 너대로 잘 살아라’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것이 책과 블로그의 차이죠. 그러니까 내 탯줄에서 끊어져야 하는데, 블로그는 탯줄에서 아직 안 끊어진 거예요. 맹아적인 것은 맞아요. 그런 면에서 좋기도 하고요.

문과대 대학원은 사실상 글쓰기 연습이거든요. 철학과 같은 경우는 자기가 글 써서 발표하고 코멘트 듣는 과정이 있고요. 매번 리포트라든가 완성된 글을 쓰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교수한테 평가도 받고, 그런데 블로그에 쓰면 구태여 대학원 다닐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글쓰기 연습은 될 수 있죠.

이건 언제 끝나나. 이런 책들은 못 쓴 책이에요. 양만 겨우 채운 거죠. 그런 책을 방조한 것은 편집자예요. 저자 이름만 믿고 그냥 낸 거예요. 욕은 저자가 먹어요. 저자에 대한 애정이 없는 거죠.

 

내가 챙긴다

[510-517]

제가 정직하게 직구 승부를 하는 것은 제가 떠든 얘기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서예요.

제가 많이 얘기하는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는 건 경혐에서 얻은 통찰이에요.

사람들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 배신감, 이런 게 상처가 되고 힘든거죠.

 

등산할 때의 모습이 제가 강연할 때의 모습이기도 해요. 스스로를 압박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게 저란 사람을 설명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인문학 하는 다른 사람들이랑 달라요. 저는 힘들면 더 힘을 내요. 이게 저 자신을 소모하는 건데,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댓글로 욕이 달려도 들여다볼 여력이 없어요. 피곤해요. 그런게 저는 안 들려요^__^ 제가 여유가 좀 있으면 그런 비판들도 들릴 텐데 그런 여유가 없어요. 이런 거에요. ‘야. 니들 나보다 힘드냐?’ 저는 힘들거든요. 힘든 것에 진정성이 있기 때문에 제일 무서운 것은 저보다 더 힘든 사람이 뭐라고 할 때예요. 그땐 항복이죠. 자기 스스로 당당하게 살고자 해서 생긴 고통의 폭이 큰 사람이 선생이에요.

트위터 하는 사람들 보면 참 여유롭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발적인 배설에 가까운 말들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 트위터가 글자 수가 제한되어 있잖아요. 너무 짧아서 문맥을 모르겠으니 인문학자로서 뭐라 얘기를 못하겠어요. 너무 짧아요. 굉장히 폭력적이에요. 데이터가 부족하니 대화를 못 하는 거고, 사실 그런 거 할 여유가 없기도 하고요. 저는 트위터의 글들은 글이라고 보지 않아요. 그런게 제 기질상 별로 안 맞기도 하고요.

 

저는 사랃한테 참 잘하려고 노력하는데, 저한테도 잘해주길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잔인하게는 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너무 큰 상처가 돼요. 저는 제가 애정을 주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정말 좋아요. 바라는 것은 아닌데, 안 그러면 상처로 다가와요.

제 소원이 뭐냐면 제가 좀 유명해져서 좋은 인문 출판사들을 일으켜주는 거예요. 세 권 정도 내서 출판사를 세워주고 싶어요.

저는 편집자의 고유 권한은 건드리지 않아요. 편집자를 신뢰해야죠.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제 글을 읽었을 때 편집자가 감동을 해야 해요. 얘도 감동 못 시키는 글이면 독자를 감동시킬 수 없는 거죠. 그런데 대개 자기도 감동 안했으면서 표지 예쁘게 만들고 마케팅해요. 저는 그게 싫거든요. 그래서 이런 시도를 하려는 거예요.

저는 철학을 모르는 40,50대가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고 자신의 경험을 철학적으로 설찰할 수 있게끔 해주는 글을 쓰고 싶어요. TV나 라디오에 출연하는 것도 30명 가지고 강의하는 것보다 그게 더 효과적이라서 그래요. TV나 리디오 매체의 강력함이 있거든요. 그런데 방송에 나간다고 하면 지랄들을 해요. 저는 책과 방송, 강의가 따로 구별된다고 보지 않아요. 방송에 나가서 제 책만 소개하는 것도 아니에요.

 

부산에 백년어서원이라고 하는 인문학 서원에.

 

거리 두기

[518-

지: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강: 요즘엔 사람들이 너무 조바심쳐요. 흥행하려고 하고 그러지 말아야죠. 길게 가야지. 인문학은 농사짓는 것과 같아요. 천천히. 천천히 가야해요.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폐강하면 안 된다고요. 한 명이었던 수강자가 두 명이 되도록 늘려 나가야죠.

상상마당에서 강의할 때가 가장 행복햇어요. 사람들이 강신주를 모르니 막 들이대는 거예요. 그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이 배웠어요. 무엇을 쓰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운 거에요 사람들이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알게 된 거죠. 전에도 애기했지만, 제가 상상마당을 그만둔건 얘기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사랑한다면 흉내 내 선 안되거든요. 자기 애길 해줘야죠. 저는 다른 사람 경험을 느낄 준비와 연습이 되어 있는데, 그걸 잘 안 해줘요.

저를 선생님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해요. 저는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다 대답 안 하고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쿨하게 끝내요. 그런 다음에 질문 안 해요. “선생님. 이 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하고 묻는데, 모르는 거면 안 읽어봤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요 .한 번도 사람들 만나서 거짓말하거나 아는 척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제 가 판단이 서는 것은 애기해주지만 한 번도 선생으로서의 꼰대 짓은 안 했어요. 내가 느낀 범위 내에서 얘기하자. 그게 제가 가진 기질이고요.

 

산을 오르면서 느끼는 게 많아요. 갈림길에서 주저하면 아무 곳도 못가요. 길을 선택하고도 저 길이 아닐까 생각하면 속도가 떨어져요. 거기서 많이 배웠어요. ‘결정하면 그냥 간다’는 것은 야간 산행에서 길을 잃었을 깨 하는 결단이죠. 이런 것들이 살아가는 데 굉장히 도움이 돼요. 힘들어야 한다. 힘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

산은 주로 혼자서 야간 산행을 해요. 암벽에 올라가서 바위에 누워 별보면서, 야경 보면서 커피 좀 마시고 담배 서너 개비 피우고 내려오면 세 시간 정도 걸리거든요. 산은 굉장히 빨리 타는 편이에요. 피로가 심하다고 느껴지면 본능적으로 산에 가요. 갔다 와서 좀 자고.

 

제 생활은 단순해요. 강연하고 방송하고 글 쓰고, 그 다음에 제 시간이죠. 그러면 쉬고 음악 듣고 자고, 잠은 잘 안와요.

지:“10여층 빌딩들이 산에서 보면 저렇게 적으니 내가 만났던 사람은 얼마나 작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가진 감정은 또 얼마나 작은가”라고 쓰셨는데요. 등산하시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를 변하게 만드나요?

강: 지치면 비판적으로 못 봐요. 휩쓸려간다고요. 그러다보면 그 사람을 위해서 철학자로서 해줄 수 있는 얘기를 못 한다고요.

그럴 때 저를 재충전해줘요. 산에 오르는 것은 거기 두기의 과정을 반복하기 위해서예요. 거리를 둬야지 보이는 게 있잖아요. 사람들과 너무 붙어 있으면 인력이 생겨요. 계속 붙어요. 그런데 무언가를 묘사하려면 떨어져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야 보이는 거죠. 잘 묘사하기 위한 거리가 따로 있어요. 그러한 거리 감각이 글 쓰는 사람에게 필요하죠.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서 글을 쓰는 거거든요. 보통 사람들이 글을 못 쓰고 비판이나 반성을 못 하는 게 생활에 딱 밀착돼 있어서 그래요. 머리에 컵을 붙이고 있으면 안 보이는 것처럼요. 그래서 거리두기가 중요한 거예요.

 

제가 산에 가는 건 산에 처박혀 있으려는 게 아니라 다시 내려오기 위해서예요. 만약 산에 가서 살면 산이 생활이 돼요. 그러면 산에 붙어서 거리가 사라지는 거죠. 저에게 중요한 건 산이라는 장소가 아니에요. 제가 사람들과 만나고 관계를 맺는 우리 사회, 우리 공동체와 거리를 두고 보기 위해서 산에 가는 것이지. 어떤 산에 가니 생각이 난다는 건 아니예요.

산에 오르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거리 두기이기도 히요. 강신주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거리 감각이죠.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면 마음이 맑아요.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더 잘 보이게 되죠. 그런 거리 감각이 필요해요.

 

음악과 정신성

[524-530]

우리나라 음악계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에게 가술만 가르치는 것이 큰 문제에요. 시와 마찬가지로 음악도 그 음악을 만든 이의 정신성에 어떻게 육박해 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진자 중요한데, 우리나라 연주자들은 그런 노력이 없어요. 인문학 책도 안 보고 어렸을 째부터 그대로 흉내만 내요. 기술은 있는데 누구 흉내만 내는 거예요. 유명한 연주자 사사하면서 흉내 내는 거예요.

우리는 흉내는 잘 내요. 흉내 내는 사람은 잘해봤자 2인자예요. 어느 순간 흉내 안 내려고 했을 때 정신성이 없느니 자기가 흉내 내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요. 천재들 있잖아요? 기술적으로 천재가 되었는데 나중에 자기 정신성이 그걸 감당 못해요. 차라리 멍청하고 흉내만 내면 2인자라도 되는데, 그 사이 읽은 책도 없고, 연습하느라 사랑도 못해봤고, 부모의 애완견처럼만 지내다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자유를 좀 얻으면 음악도 감당 못 하게 되는 거에요.

 

지; 철학이든 음악이든 결국 자기 것을 만들어내야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거네요.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거고요.

 

강: ‘나는 나다’ 이것에 뿜어져 나와야 해요.

인문학적 기초에다 살아잇는 경험이 더해져야죠.

중요한 건 정신성이에요. 누군가를 진짜 사랑하면 방법을 찾아내죠. 방법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에요. 방법 가지고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바람둥이라고 하잖아요. 저 사람을 진짜 사랑하면 아껴주는 방법을 찾아요. 그래서 정신성이 중요한 거거든요. 흉내낸다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른 거니까요.

 

제가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을 비판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에요. 흉내낸다고요. 자본가가. 사회가 원하는 것이 영어니까 영어 공부하는 거잖아요. 흉내 내는 것은 얼마 못 가요. 더 이상 흉내 낼 필요가 없어지면 배우는 걸 멈춰요. 박사 학위까지 흉내 내는 거거든요. 제대로 공부해서 그 다음에 어떻게 글을 쓰느냐가 중요한 건데, 일단 박사 학위 따면 끝이에요. 이게 우리 학문의 남루함이에요. 교수들이 기술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정신성을 키워줘야죠. 그래야 독창적인 사람이 나와요. 표현할 정신성이 있다면 기술적인 것. 기법은 다 찾아서 하게 돼 있어요. 기법부터 배운다고 해서 없던 정신성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나니까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 나의 시선, 이것을 얼마나 글정하고 표현해낼 수 있는가는 사활을 건 문제에요.

이건 예술가나 저자뿐 아니라 각 개인도 마찬가지예요. 그럴 때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건강해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흉내 내면 자신을 부정하게 되잖아요. 자기는 개나린데 사회에서 장미를 요구한다고 해서 장미를 따라 하면 정신성이 파괴되는 거예요. 흉내 내고 사는 것도 않아요. 더군다나 개나리 싹을 잘라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싹이 올라와버리면 사람이 분열되는 거예요. 죽도 밥도 안 돼요. 변호사인데 밤에 나가서 재즈 피아노 연주하는 게 더 좋다고 하면 이상한 괴리 속에 사는 거잖아요. 개나리 싹이 올라오면 아예 개나리를 죽여보리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싹을 죽였던 사람이 자기 아이를 어떻게 가르치겠에요? 자기가 안 해봤는데.

 

겁 많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안 해본 것은 무서운 것이고, 무서운 것은 나쁘고 저주스러운 것이라고 여긴다는 거예요. 제가 “번지점프 무섭죠?”하고 물어보면 무섭대요. 해봤냐고 물어보면 안 해봤대요. 갇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그냥 하라고, 하면 된다고, 번지점프를 연속으로 다섯 번 하라고, 다섯 번 했는데 무서우면 그때는 진짜로 무서운 거라고 얘기해주요. 고소공포증이라는 것 다 뻥이거든요. 산에 올라가면 고소공포증이 있대요. 그냥 무섭다고 하면 되지. 고소공포증은 무슨 고소공포증이에요? 그냥 무서운 거예요. 나 무섭다. 비겁하다. 용기 없다. 그러면 되잖아요. 고소공포증 하면 뭔가 본질 적인 게 있는 것 같잖아요.

 

불교에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말이 있어요. 무슨 말이냐면, 자기가 자기 상황에서 벗어나고 자기를 극복하려면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거예요.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 달랑 서 있는 것 만으로도 무섭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얘기거든요. 떨어져 죽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한 걸은 더 나가면 평지라는 것을 안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걸 못 하니까 계속 거기에 사로잡혀서 무섭다. 무섭다 하는 거예요.

 

‘나 무섭다. 비겁하다’ 그러면 되는데 ‘저건 악마다. 저건 악이다’^__^ 나중에는 그런 식으로 정당화해요. 그렇게 스스로를 가두는 거죠. 사람들이 사태를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을 보면 참 비겁해요. 결국 자기는 안 움직이겠다는 거에요. 가장 마지막에 가서는 ‘내가 일희일비하면 우리 가족이 상처받는다’ 이 지랄을 히요. 상처 안 받아. 해봐. 마지막으로 남의 탓을 한다고요. 이것도 인간의 허영이죠. 자기가 비겁하다는 사실을 직면하려 하지 않아요. 대개 남 탓을 하죠.

 

심지어 어떤 선생은 행정 업무에 치여 지내면서도 뭐라고 하냐면 자기는 교장의 입장도 이해가 된대요. 웃기는 소리죠. 약자가 강자를 이해한다는 얘기는 우직이지 않겠다는 애기거나 조금있으면 자기도 교장이 된다는 것. 이 두 가지밖에 없어요. 뭘 이해해줘요? 그냥 참겠다는 거예요. 행정 업무가 과다하다는 걸 얘기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무섭다고 하는 건 괜찮아요. ‘너무 무서워요. 부당하지만 하고 있어요. 교장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식으로 자각하게 되면 그렇게는 못 살기 때문에 바꾸려고 해요. 그런데 ‘이건 교장을 위한 거고, 학교 조직을 위한 거예요. 그래서 저 하나 희생하는 거에요. 고귀한 거예요’ 이렇게 정당화를 해요. 사람들은 패턴이 거의 비슷해요.

 

사람들이 사회를 한탄해요. 선거에서 졌다고 한탄해요. 대개 그런 사람들 보면 탱크 앞에 설 때 제일 마지막에 서겠다는 사람들이에요. 다 안 서도 자기 혼자 서면 되는 건데, 모두가 탱크에 저항할 때 자기도 숟가락 하나 얹겠다는 사람들이에요. 투덜거리는 사람. 비겁한 사람들이 뭘 그렇게 요구해요? 그냥 가면 되지. 투덜대면서 어떻게 새누리당을 뽑을 수 있냐고요. 사회가 다 민주화되면 마지막에 자기도 합승하려는 사람들이에요. 비겁한 거죠.

어쨌든 정직해야 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음악, 바벨탑 이전의 역사

[532-533]

철학자로서 제가 음악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음악이 감정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언어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언어가 달라도 우리는 이 노래가 슬픈지 아닌지 들으면 딱 알잖아요. 또 사람들이 말할 때의 리듬만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감정 전달이라고 한다면 바벨탑 이전에 음악이 있었을 것 같아요. 사투리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들어요. 사투리는 소리의, 말의 고저장단이 있는 거예요. 원래 서울말도 고저장단이 있었거든요.

 

유리가 유대하고 연대해야 권력을 이겨요. 체제는 항상 우리가 쪼개지길 요구하고요.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쟁시키는 것은 우리를 깨알같이 쪼개고 분리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죠. 그걸 극복하고 유대와 연대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제가 본 것 중에는 음악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음악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반면 본다는 것은 공간을 쪼개고 분리해요 무언가를 보려면 그쪽에 집중해야 하잖아요. 다른 각도에서는 못 보기도 하고요. 시각 문하가 가지고 있는 분리성이 있거든요. 청각적인 것, 음악을 복원해야 해요.

 

피아노 소나타와 리듬

베토벤의 <템페스트>얘기했잔하요? 교향곡은 대중적인 음악인 데 반해 소나타, 특히 피아노 소나타는 작곡가의 영혼이거든요. 소나타는 혼자서 자기 방에서 쓰는 거예요. 그래서 음악가를 이해할 때는 무조건 소나타를 이해애햐 해요. 그래서 베토벤 소나타는 교향곡 <합창.의 대중성과는 달라요. 그리고 28번에서 32번까지의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에는 이후 쇼팽과 슈만의 성취까지도 다 들어 있어요. 그 5곡 말이에요. 베토벤은 위대해요. 클래석은 역시 베토벤 소나타죠. 교향곡보다는 소나타를 많이 들어야 해요.

일산의 고양아람누리 공연장

 

[538-539]

음악에는 어떤 기능성이 있어요. 언어는 다 달라서 이해가 안 되지만, 음악은 가장 추상적이지만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껴요. 보편적인 정감과 인간이 공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저는 음악에서 봐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종과 민족을 넘어설 수 있다고 봐요. 묘한 언어에요.

 

시를 소리 내서 읽어야 그 시인의 리듬을 알게 돼요.

시는 리듬을 찾아야 해요. 그 리듬 속에서 읽으면 다 읽히는데 그걸 찾기가 힘들죠. 사람들이 평소에 시를 눈으로 읽어서 그래요. 소리 내서 읽어야 하는데, 시에는 행과 연이 있잖아요? 그것에 맞춰서 쉬다 보면 호흡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알아요. 그래야 리듬이 잡히는 거고요.

어떤 시든 시는 소리애서 읽어야 해요. 시인의 글을 통해서 소리에까지 육박하고 그 사람의 정신성에까지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감정 수업

 

[540-541] (책 쓸때 내내 참고하면서 쓰기)

언제 강연하고 언제 책을 쓰세요?하는데요.

어떤 상황에서든 발언하거나 생각하는 것들을 전체 구조 속에서 연결지어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그것들이 쌓여서 책이라든가 하나의 정리된 결과물로 나올 수 있어요. 그러니 막 던지지 말고, 뭘 하는지 알고 해야 돼요. 이 발언이 책의 어느 꼭지에 들어갈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서 해야죠.

 

단행본뿐 아니라 잡지에 쓴 칼럼, 신문에 쓴 칼럼. 짧은 글들이 하나의 전체를 그려 나가는 거예요. 그런 활동 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걸 정리해서 하나의 작은 우주로 만들어야겠다 싶을 때 집필을 하는 거고요.

처음에는 힘들어요. 자료를 모으는데 집을 지어본 적이 없으니 재료가 모자라기도 하고 남기도 해요. 예컨대 목차를 구성해보니까 경제문제만 너무 많아요. 그러면 책 균형이 안 맞잖아요. 그런 것처럼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모아야 될 것과 나중에 책으로 묶일 것이 최적화되죠. 17권째 쓰니까 지금은 최적화가 된 거에요. 천재적이어서 그런 게 절대 아니고 17

권의 시행착오가 있었던 거예요. 이제는 대충 길다다 보면 눈에 띄는 거죠. ‘이건 문으로 쓰면 되겠네.

그런 감각은 눅한테 배우는게 아니에요. 해봐야 해요. 이것저것 모아서 만들다가 너무 많이 모았다. 이건 모자라네. 그러면 돌아다녀야겠죠. 힘들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해요. 적어도 단행본 3권은 서 봐야 그감이 생겨요. 한 권 쓰고는 ‘난 안 돼’ 이러지 말고, 열심히 하면 한 권 정도는 다 쓸 수 있어요. 그러고는 그때 다 절망하죠. 잔뜩 지쳐서, 거기서 노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요. 그래서 첫 책 내는

 

사람들을 항상 격려해줘요. 5권 덩도 내고 나면 6번째 책에서는 좋아진다고. 구성도 좋아지고 책 자체가 아름다워진다고. 마치 자신

이 좋아하는 인문학 책이나 고전을 봤을 때 느껴지던 품격이 생겨요. 균형미도 잡히고.

<경향신문> 칼럼 같은 경우도 마감 이틀 전에 2시간 내로 끝내거든요. 글을 쓰려면 일단 내가 그 문제에 대해서 정서적 동요라든가 감정의 확신이라든가 이런 것이 있어야 해요. 영화를 보고 비애든 뭐든 느낌이 확 왔어요. 그러면 글이 좋아져요. 그런 느낌의 리얼리티가 없으면 글에 힘이 없어요. 촉이 닿아야ㅑ 해요. 어떤 리얼리티. 절박함이 필요해요. 혹은 현상학 용어인데 ‘핍진성’이라고 리얼리티가 꽉 찬 느낌. 그것이 필요하죠.

 

사실 글이 잘 안 나오는 사람들은 감정 없이 글을 쓰려고 해서 그래요. 그러면 말장난이 되죠. 글재주가 아주 탁월하다면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어요. 그러나 웬만한 글재주면 사람들이 안봐요.

실존적인 자기 자신의 세계가 있느냐. 무언가에 대해서 울림과 동요가 있느냐. 이게 중요해요. 저자에게서 그게 사라지면 그 저자는 끝나는 거예요. 시인이 시를 못 쓰는 이유는 그 울림이 없어서 그런 거에요. 시 나부랭이는 쓸 수 있지만 이미 시가 아니죠. 감정을 담아서 표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날조하는 거죠. 영화를 보고 울면서 평론을 쓰면 글이 좋잖아요. 그보다 더 센 것은 자기가 직접 사랑해보고 힘들어서 쓴 글이고.

 

울림이 없으면 글을 못써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없고, 사람들이 잘못됐는데도 안타깝지도 않고, 어떤 현상에 대한 분노노 없고, 노을을 봐도 아무 느낌이 없고..... 이렇게 일체의 감정이 고갈되면 글을 못써요. 글을 어떻게 쓰겠어요?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자기의 감정을 직시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자기의 감정을 정확하게 봐야지 표현의 당당함을 얻을 수 있어요, 저 사람에 대한 것이 사랑의 감정인지 우정의 감정인지 모르면 표현을 못 하잖아요. 인간이 가진 감정을 매번 풀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감정 수업이죠.

 

자신에 대한 당당함을 회복하는 첩경이 감정에 대한 솔직함이에요.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고, 웃기는 짓을 하면 웃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어야죠.

제가 인문학자니까 감정을 다루는 거예요. 사람들 감정을 깨워야 하니까요. 제 책도 어떤 삶이나 현상에 대해서 감정을 환기시키는 거예요. 감정을 살린다는 것은 사회적 감수성을 계발하는 것이기도 해요. 노숙자를 보고 화낼 수 있는, 노숙자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 왜 이런 사람이 있지?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 하고 화낼 수 있잖아요. 그런데 학교에서 ;ㅅ‘신자유주의 때문에 노숙자가 생겼다. 그래서 노숙자를 도와줘야 한다’ 이렇게 머리고만 배우는 것은 오래 못 가요. 반면 감정으로 일어나는 것은 지속력이 굉장히 크다고요.

인간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액면 글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구나. 그런 사람은 정말 소수고, 찾기 힘들구나. 그런 비겁함이 권위주의가 관철되는 데 이바지하는 거죠. 도미노처럼 넘어질 테니까요.

운동이나 변화라는 것에 내 이득을 더 많이 얻겠다는 부르주아적 가치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간다는 인문학적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고요.

 

예전에 김정환 시인이 ‘나한테 중요한 것은 사회적 감수성을 제고하는 것이다’라고 한 애기가 참 많이 다가오더라고요.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사회적 감수성이죠.

자기의 안위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모여드는 그 이상한 연대, 축제 때 보면 그런 힘들이 있거든요. 이걸 어떻게 제고할 것인가. 이걸 어떻게 해서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감수성으로 바꿀 것인가. 이 문제는 저를 포함해서 인문학자라면 모두고민해야 하는 문제에요.

옳다고 해서 사람이 하지 않아요. 옳다 . 나쁘다 , 하는 척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진자 화가 나면, ‘저게 나한테 어떻게 이래’ 그런 생각이 들면 다른 사람이 뭐라 안 해도 가서 때린다고요. 각자 다 희생 안 하려고 하고 옆 사람이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거죠. 일제강점기 때 아나키스트들이 화나니까 혼자서 하잖아요. 화나면 혼자서 해요.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채 머리로만 바뀌어야 한다고 하면 결국 자기는 안 움직여요. 사람들이 자본이든 뭐든 우리 삶의 조건에 대해서 사회적 감수성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유리병 편지

[549]

인생은 만나고 마주치며 지내는 시간이 반, 그리고 그것을 추억하는 시간이 반이에요. 그래서 만나고 마주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시간들이 나중에 그럴 기력도 없을 때 추억의 대상이 되고 힘이 돼요. 그래서 1년이든 2년 이든 사랑은 진하게 해야 하는 거예요. 나머지 시간 동안 그것만 기억할 수 있어도 살아갈 힘이 된다고요.

벚꽃이 열흘 반짝 피어도. 나머지 기간은 볼품없는 시커먼 나무도 있어도 그 기억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견디는 거잖아요. 겨우 열흘 남짓한 그 시간 대문에 벚나무라고 불리는 거예요.

사람도 어떤 만남이 일어날 때, 유리병 편지를 받을 때 그게 어떤 만남이든 그 시간으로 그 사람이 규정되는것 같아요. 책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에요. 그만큼 책이란 경력한 건데.

그런 책들이 저를 키웠듯이 제 책들도 누군가에게 그런 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이 ‘아프게 다가왔다’고 얘기할 때 글 잘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보를 전하는 책이 아니라 감동을 전하는 책을 썼다면 잘 쓴 거예요.

 

고통의 폭과 ‘에밀’

[550-551]

지: “매번 유리병 편지(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볼때)를 받아 펼쳐볼 때마다 저의 고독과 외로움은 경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저는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강: 글쓰는 사람은 다 외로워요. 애정 결핍이고요. 그래서 글을 쓰는 거예요. 글 쓰겠다고 덤비는 제자들 보면 애들이 너무 행복해 보여요. 저런 애들이 말할 게 뭐가 있나 싶어요. 글이란 마치 교도소에서 조그만 담뱃갑에서 시 쓰듯이 그런 건데. 너무나 아파서 어디 외치려고 쓰는 게 글인데....

 

내 마음을 누군가한테 전달해서 내 마음을 받아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위로가 될 까봐 글을 쓰는 건데요. 유리병 편지를 받았다는 건 그런 글이 저한테 온 거잖아요. ‘진짜 더럽게 외로운 인간이 또 있네’ 하는 거죠. 그러면서 또 하나의 보편성을 확보하는 거예요. 자기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면 괜찮아요. 살 만해요.

 

[552-556] 루소에 대하여

위로는 자기 삶을 살고 있는 한 존재가 거의 유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밝은 모습을 띠고 있는 걸 볼 때 와요.

루소는 자기 같이 못된 아비를 만나도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꿈꾼 거예요. <에밀>은 그렇게 읽어야 해요 그게 얼마나 아파요. 아이들을 부모가 키우지 말고 사회가 키우자는 말이 사회주의 애기가 아니에요. 루소가 생각해봤는데 이런 정치적 상화에선느 애를 데리고 있지 못하겠다는 거에요. 루소가 얼마나 많이 암살당할 뻔했는데요. 고앙원에 맡기고 돌아서는 마음이 어땠겠어요? 나와 같은 불행한 아버지를 만나는 아이들, 앞으로도 그런 아이들이 굉장히 많이 나올 텐테, 그렇다면 필요한 시스템이 뭘까? 그게 <에밀>이에요. <에밀>이 두꺼운 이유는 루소의 고통의 폭이 크기 때문이죠. 어떻게 보면 루소의 저서 중에서 <에밀>이 제일 중요해요. 루소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회계약론>이나 <인간불평등기원론>보다 <에밀>이 중요해요. <에밀>을 읽으면 아파요. 제도적인 것들을 고민하는 그 이면에는 아이들의 행복에 대한 소망이 있어요. 그래서 루소는 탁월한 인문학자예요.

자기도 죽을 것 같은 데, 같이 있으면 다 죽는데, 루소는 그 고통의 폭, 그 절절함에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의 고통의 촉에서 그의 작품을 읽어줘야 해요.

 

루소를 폄하하는 것은 실질적인 타깃은 <인간불평등 기원론<인 거죠. 우리는 사유재산이라는 것을 고나습 속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왔기에 루소를 읽어야 해요. 루소만 봐도, 아니 로크만 제대로 읽어도 지금 우리의 담론이 남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우리의 경제 체제, 윤리 체제, 통념을 비판하려면 시민론, 통치론 등 로크의 책을 읽어야 해요. 우리가 가진 기초가 얼마나 남루한 지 알 수 있어요.

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루소가 위험하죠. 그런데 루소를 공겨하기가 만만치 않을 거예요. <에밀>은 두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어요.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는 부모가 아이가 행복하게 자라길 바라는 시선으로 볼 수도 있고, 버려진 아이의 신선으로도 읽을 수 있어요. 알튀세르도 루소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chapter 10

인간을 위하여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565-567]

지:“라캉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불일치를 극복했을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 아니었으며, 혹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었다는 때늦은 후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셨는데요. 진실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강: 꼬맹이 때는 부모의 욕망을 다 받는다고요. 내가 1등 하려고 했던것은 어머니로부터 사랑받아야 하니까. 따뜻함을 받아야 하니까 그랬던 거예요. 정신분석학의 핵심 테마가 인간은 다 미숙아라는 거예요. 정신분석학의 핵심 테마가 인간은 다 미숙아라는 거에요. 독립을 못해요. 스무 살이 돼도 독립 못하는 애들이 있으니까요.

 

아프리카 초식 동물들은 한 시간 안에 일어나서 걸어야 해요. 안 그러면 하이네나들이 달려드니까. 부모가 해줄 것이 없어요. 태어날 대부터 이빨 다 나오죠. 털이 다 나오죠. 일어나는 것만 하면 돼요. 얘들이 2,3일만 지나면 풀을 뜯어 먹어요. 독립이 빠르죠. 독립이 빠른 만큼 동물의 세계에는 역사와 문화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독립을 빨리 못 해요. 기지도 못하고 이빨고 늦게 나니까. 부모 곁에서 부모 말을 들어야 하니까 부모의 문화가 전달되는 거예요. 인간한테 역사와 문화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과거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인에, 과거에 의존한다는 건 곧 부모한테 의존하다는 얘기예요. 결과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게 김치면 김치를 먹어야 하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이 1등이면 1등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 가치를 받아들이면 내가 욕망하는 거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욕망하는 거죠. 내가 김치찌깨를 먹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김치찌개를 먹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바람이 실현되는 거예요.

사람이 재미있는 게 나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자기의 욕망이 달라져요.

 

그런데 성숙해진 다음에 사랑할 때, 이성이든 존경하는 사람이든 내가 독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랑할 때는 달라요. 내 욕망을 내가 선택하는 거니까.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선택한 거니까요. 스피노자가 얘기했듯이 사랑의 기준은 나한테 기쁨을 주는 것인데, 여기서 기쁨이란 그 사람을 만나서 내 삶의 의지가 확장되는 거예요. 가능성이 더욱 열리는 거예요. 저 인간을 만났더니 좁아죠. 그러면 사랑 안 해요. 사람을 만나서 삶을 더 누릴 수 있다는 느낌. 확장된다는 느낌이 중요하거든요.

 

라캉의 핵심 테마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의 타자성인데, 문제는 그 타자가 내가 선택한 타자냐, 아니면 부모처럼 내가 절대적으로 그 타자에게 던져져서 적응하는 것이냐 하는 거예요. 인생에 있어서 딱 한 번의 혁명이 필요한데, 그게 어른이 되는 거예요. 부모의 가치관을 철저하게 버리는 이 과정은 굉장히 힘들어요. 한번 어른이 되면 어른인 거예요. 자기 욕망을 갖추는 것이 어른이 되기 위한 기본이에요. 핵심은 내가 타자를 선택한다는 거죠. 생존하기 위해서는 동물적 의미에서 어머니의 욕망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있어야 내 삶이 더 확장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타자의 욕망을 선택하는 거죠. 그럴 때 어른이 되는 거예요.

기존의 내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부모나 사회의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런 거예요. 할까 말까 주저하게 되는 행동들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건 하고 싶다는 거거든요. 그럴 때 해야 돼요. 100퍼센트예요.

 

[568-569]

위악<위악이란 비범한 의지, 채널 예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억지로 해보라는 건데, 그건 제 얘기가 아니라 이상이 한 얘기예요. <날개> 앞 부분을 보면 위악의 의지를 가져보라고 해요. 19세기 문학이 도스토에프스키에 갇혔잖아요. 그를 벗어나려면 위악을 저지르는 우아함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봐야 한다는 이상의 표현, 그게 핵심적적인 거예요. 자기로 서겠다는 것. 도스토에프스키를 벗어나보겠다는 것. <날개>를 위악적으로 쓰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기존 가치관에 따르는 거잖아요. 왜냐하면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기존 가치관에 따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행해보는 거예요. 바로 그 악이라는 요소 속에 나에게 맞는 욕망이 있어요.

그런 애들 있잖아요. 무모하게 모험하고, 젊었을 때 도서관에 갇혀 있지 않고 막 들이대는, 일단 해보는 거예요. 해보고 결정하는 거죠. 해보고 나서 ‘이거 더럽게 나쁘다. 하지 말자’라고 판단하는 건 온전히 내 판단인 거예요. 하지만 하지 말라고 머릿속에서 겸열해서 영원히 하지 않는 것은 내 판단이 아닌 거죠. 그걸 겪어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악 중에서 ‘이건 악이 아니라 선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의 고유성을 차제 괴고 어른이 되는 거거든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고,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은 감당할 용기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니체.

위악이 우리의 탈출구예요. 악이라고 금지하는 걸 행해보려는 우아함.

위악으로 시도했던 것들이 다 좋아진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걸 자기화한다는 차원인 거예요. 반반이에요. ‘야, 이거 너무 좋다.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할 수도 있고요. ‘역시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고 떡을 얻어먹는다더니’ 이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어쨌거나 내가 검증해본 거잖아.

 

[570-573]

내가 선이라는 것을 아무 생각없이 행해버리면 부모의 가치관이나 사회의 가치관에 따르는 것일 뿐이니 내가 하는 것은 아니에요. 위선일 수도 있어요. 위악이 선일 수도 있고, 위선이 악일 수도 있어요. 그걸 많이 고민해봐야 해요.

그래서 여행 많이 다니고, 많이 부딪치고, 우리가 봤을 때 ‘왜 저런 걸 하지’싶은 사람들이 가진 건강함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만큼 자기를 찾은 거니까요. 거기에서 오는 여유들이 느껴지죠. 예술 하는 친구들이나 힘들게 자기 장르를 개척한 사람들 보면 해맑잖아요.

그런데 직장 생활 편안하게 하는 친구들 보면 비비 꼬여 있어요. 자꾸 ‘신 포도’ 전락이나 쓰려고 하고^___^

 

내 삶은 하나인데 너무 많은 가치관이 혼재해 있으니까 복잡하다고요. 복잡한 사람은 행동을 못해요. 단순해야죠. 어쩌면 행동이 빨리 나오는 편이 나아요. 생각은 항상 뒤에 가도록 해야 해요. 저지른 다음에 반성하고 ‘어디서 잘못됐지’ 하고 고민해야 하는데, 해보지도 않고 고민만 해요.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는데, 일단 이 길인 것 같다 싶으면 걸어가고 나서 막다른 골목이 나왔을때 ‘여기가 아닌가벼’ 이러면 되는데. 맨날 똑같은 데만 왔다 갔다 하면 평생 어디가 잘못된 길인지도 몰라요. 자기가 직접 걸어보는 것, 해보는 것, 실마리는 위악에 있어요. 부모가 애써 금지했던 것, 사회가 하지 말라는 그것, 바로 그 부분에 내 욕망이 있을 수 있어요. 그걸 실제로 해봤을 때 나의 힘이 증진되고 내가 행복해진다면 제대로 잘 찾은 거죠.

 

오만 가지를 다 해보게 하고 싫은 것도 해보게 해야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자기가 어떤 점에서 남과 다른지 알 수 있단 말이에요. 그래야 자신의 욕망,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데, 애들이 너무 똑같은 경험을 하니까 그게 문제에요.

발악을 해요. 악이라는 것들을 다 해보는 거고요. 자기를 찾으려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죠.

경험을 좀 많이 하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야영 같은 것도 많이 하고, 많은 경험을 쌓게 해줘야 해요. 무조건 돈 가지고 처바르면 안 되고요. 그러면 표준화가 돼요.

 

돈이란 게 묘해서 순간의 고통은 줄여주지만 경험은 안 생기게 해요. 그걸 여행이라고 착각한다니까요. 여행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만드는 것이란 말이에요.

산이 매력적인 게 뭔지 아세요? 대통령이든 누구든 희열을 느끼려면 똑같이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거예요.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를 반대하는 것도 그래서예요. 다리 불편한 분들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문제는 다리가 불편한데 목발 짚고 산에 올라가서 느끼는 희열, 그것을 박탈한다는 거예요. 약한 사람에게 더 큰 희열을 주는 것이 산이에요. 그걸 박탈하면 안 돼요. 사실은 지체부자유자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돈 받겠다는 거잖아요. 공짜로 하든가. 지자체에서 공짜로 한다면 인정해요. 그런데 절대 공짜로 안 해요. 케이블카 만들면 설악산에 더 많은 사람이 오고 관광산업이 육성된다는 거죠,.

 

페르소나와 결혼

[573-577]

지:‘에픽테토스는 페르소나와 맨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간파했던 철학자였다. 다시 말해 페르소나에 집착하다가 맨얼굴을 망각하거나 혹은 맨얼굴에 신경쓰다가 페르소나를 경시하는 것. 이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성찰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어디로부터 유래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맨 얼굴을 드러내야 할 때 페르소나를 쓰거나, 반대로 페르소나를 드러내야 할 때 맨얼굴을 보여주려 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맨얼굴이 없다면 페르소나를 쓰는 일고 없다는 사실을. 페르소나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우리에게 맨얼굴의 관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맨얼굴이 건강하다면 우리는 다양하나 페르소나를 쓸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불행히도 맨얼굴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쓰고 있는 페르소나를 벗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벗는 순간 망가진 맨얼굴을 볼까 두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에피텍토스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철학이 필요한 시간>.

페르소나가 아닌 맨얼굴과 어떻게 대면할 수 있을까요? 페르소나만 가지고 살 수도 없는 거고, 맨얼굴로만 살 수도 없잖아요.

 

강: 중요한 것은 페르소나를 약자가 쓴다는 거예요. 가부장제 사회면 여자가 더 많이 써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쓰는 건데. 그런 게 너무 강해지면 보호가 아니라 페르소나에 갇혀버러여. 최승호 신인의 <고슴도치의 마을>이란 시집이 있잖아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시 있는 채고, 갑옷 입은 채로 안으면 상대를 지른단 말이에요. 사랑을 하려면 가시 옷을 벗어야 해요. 사랑의 위대함은 페르소나를 벗게 해요. 정직함을 요구하니까요. 그래서 사랑하면 벗게 돼요. 벗었다가 상처도 많이 받게 되죠.

지: 얼마전에 한 설문조사를 봤는데. ‘당신의 배우자가 결혼 전 몇 명의 이성과 잠자리를 했어요 관용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까 62퍼센트가 한 명도 없어야 한다고 대답했더라고요.^__^

 

강: 그게 가부장제예요. 내 권력을 내 아들한테 주는 종교적 신념을 가부장제라고 하거든요. 가부장제는 종교적 신념이에요. 내 아이한테 다 주면 내 피가 흘러서 영원성이 보장될 것 같다는 거 거거든요. 그러니까 남자들은 무조건 여자의 순결, 순수성을 요구해요. 더 놀라운 건 여자들이 그 순수성을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또 악용하는 남자들이 있어요. ‘네가 순수를 주장하면서 나랑 사랑 안 하려고 하는데, 그게 다 가부장제의 노예다. 너를 풀어라.’

너 자신에게 정직하란 얘기를 성적으로 자유로우라는 얘기로 환원하는 것도 굉장한 폭력이거든요. 인문, 사회 과학 읽은 남자애들이 여자를 잘 유혹해요. 말로 잘 구워삶아요. 조심해야 돼요.

---> 악용하는 나쁜 놈들.

 

[578-580]

결혼의 논리는 독점과 소유의 문제고, 순수성의 문제고, 자기 혈통을 내리겠다는 논리거든요.

사랑은 소유와 반대되는 논리라고요. 내가 배고파도 음식을 주고, 서로 서로 상대방의 욕망에 맞추려고 하고, 내 것을 내려놓은 과정이라고요. 결혼은 내 것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주장하는 거예요. 나중에 이혼을 해보면 알아요. 위자료, 바로 돈으로 환산해요. 그거 보변 단순해요. 연애하다가 헤어진다고 위자료 얘기 안 하잖아요. 결혼 제도가 소유의 제도라는 거예요. 배타적 성적 소유, 그러니까 간통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나만이 네 성기를 만져야 하는데, 왜 다른 사람이 네 성기를 만졌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소유의 논리라고요. 결혼이라는 형식도 소유의 형식이에요. 주민등록도 옮겨오잖아요. 남성 중심적으로 한 집에 소유되는 형식으로 옮겨놓잖아요. 그런데 연애한다고 해서 옮겨가지는 않잖아요. 홍대 카페로 주민등록을 옮겨간다든가 그러진 않잖아요. 그렇게 기록을 하고 등재를 한다는 것은 소유의 형식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혼전 성관계다 뭐다 말하는 발상 자체가 이미 결혼이라는 걸 전제해놓은 거예요. 웃기잖아요. 모든 남녀의 만남이 결혼이라는 미래상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이. 결혼이 지배하는 순간이 되면 사랑을 제대로 못 하죠. 사랑하는 연인이 결혼 생각하면 서로에게 집중 못 해요. 지금 사랑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결혼은 미래의 일이잖아요.

우리의 소유된 제도하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을 하려면 자기가 죽을 때가 되어서나 해야 해요. 그래야 내 재산을 사랑하는 사람한테 물려줄 수 있으니까.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자는 것도, 내가 죽으면 동성애를 반대했던 부모한테 내 재산이 간단 말이에요. 내가 죽더라도 내가 가진 것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갔으면 좋겠는데, 사랑은 소유의 제도가 아니지만,이렇게 자기 재산을 물려줄 때, 그리고 아이를 낳았을 대에는 결혼이 정당화될 수도 있겠죠. 아이가 복잡해니까 결혼을 하는 거죠. ‘씨바, 어쩔 수 없이 결혼해야겠네’ 이렇게 하는 것은 괜찮아요.

 

김어준: 결혼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닌데 이혼은 나 혼자 하는 것이다. 세계랑 모두 싸우고 반대하고 이혼하겠다. 그때 어른이 된다.

그 얘기가 왜 정답이냐 하면, 결혼은 모든 사람의 동의속에 이루어진 것 같으니까 안정감을 느껴서 착각에 빠진다고요. 통념과 관습을 다 받아들이고 산 거에요. 그런데 이혼해보면 알아요. 이혼은 진짜 내가 주인으로 서야 할 수 있어요. 내 편이 없어요. 다 욕해요.

저는 철학자니까 이렇게 얘기해요. ‘이혼하듯이 결혼해라’ 이게 더 멋지지 않아요^__^

두 사람이 주인공이 괴고 모든 것이 배경으로 물러나는 것을 사라이라고 불려요. 거기에 어머니가 와서 두 사람과 맞먹는 자세를 취한다. 이 자체가 사랑이 아니에요.

 

[581-584]

멀리 있으면 감정을 속일 수 있어요. 거리를 두면 제스처를 취할 수 있어요. 하지만 꼭 껴안아보고 사랑을 나눠보면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전체로 만나면, 몸으로 만나면, 손잡아보면 냉정해요. 연기의 여지가 없어요. 몸이, 실존이 만나는 거예요. 키스해보고 만져보고 하면 다 알아요. 서늘하죠.

 

사랑의 경험이 중요한 것은 사랑을 하면 감정에 정직해지기 때문이에요.

현실에 대한 집중도가 제일 중요해요. 그런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집중할 테니까. 한곳에 신경을 써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낭비하면 다른 쪽에다 에너지를 못 쓰잖아요.

기대면 한 쪽이 넘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나 때문에 상대가 넘어지는 것을 보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아요. 사랑은 내려놓는 거예요. 붙잡는 게 아니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려고 할 때 ‘야 이 죽일놈아’ 그러는데, ‘지금까지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라고 얘기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대개는 막장 드라마같이 서로 정을 때고, 다시는 사랑 못 하도록 치명적인 휴우증을 남겨놓고 끝내죠. 그래서 사랑을 아무나 하면 안 돼요.

===> 사랑할 때는 후회를 남기지 않는 완전연소를 하라.

 

20대 후반까지는 여자들이 더 성숙해요. 그런데 여자들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집에 갇혀 지내면서 퇴행해요. 굉장히 탐욕적으로 변하고, 내 아이만 챙기잖아요. 내 아이를 버리고 다른 아이를 구할 대 사랑이라고 하지. 내 아이만 챙기고 지키는 것은 사랑이 아니거든요. 남자들은 바깥에서 계속 성장을 하는 거예요. 남자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에 제일 성숙해요. 제일 좋은 커플은 20대 후반 여성과 40대 후반 남성이야. 성숙도에서 완벽하죠.

물론 다 성숙해지는 건 아니고 아저씨가 되는 사람도 있어요. 양대 산맥이죠. 아저씨와 아줌마, 평화로운 결혼 생활이 가능하려면 남자는 충분히 아저씨가 되고, 여자는 충분히 아줌마가 돼야 하는 것 같아요. 한 사람이라도 여전히 한 남자나 여자로 남아 있으면 힘들어요. 상대방이 아저씨로 변하거나 아줌마로 변해 버리면 절망하죠. 그러니까 세상에는 네 종류의 인간이 있는 셈이에요. 남자, 여자, 아저씨, 아줌마 ^__^

 

가면을 벗고 어린아이가 돼라

[584-589]

지: “무릇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마음이다. 처음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동심은 왜 갑자기 없어지는 것일까? 처음에는 견문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자라나서는 도리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서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기를 지속하다 보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나날이 넓어진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좋은 줄 알고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괸다. 또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분서><동심설에 나온 구절>

 

강: 동심은 가면 벗은 얼굴이에요. 맨얼굴이에요.

인문학자가 되면서 제가 배운 건 사람 만날 때 가급적이면 그렇게 정직하게 만나야 한다는 거예요. 인문학은 화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정직하려는 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김수영도 사상보다 백배나 중요한 것이 정직함이라고 했어요. 정직한 사람만이 뭐든지 배우니까. 정직하다는 것은 맨얼굴이고, 동심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거니까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아요. 내 맨얼굴을 저 인간이 못 받아들이네. 이런 것도 빨리 알고요. 그러면 그 인간이랑 안 만나면 돼요. 계속 나보고 가면을 쓰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인간들은 안 만나야죠.

 

가면을 벗어야 상대방을 알아요. 가면을 한 번만 벗으면 돼요. 세상이 홍해처럼 갈라져요. 내 맨얼굴을 인정해주는 사람과 아닌 사람들. 그런데 가면을 써도 이 가면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나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가면ㅇ르 벗으면 가변 쓴 모습이나마 좋아해주던 사람마저 없어질 것 같다고 두려워해요. 그런데 안 그래요. 새롭게 재편되는 것일 따름이에요. 그러니까 맨얼굴을 인정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으로 양분하는 편이 나아요. 선택의 문제가 아니예요. 그렇게 살아야 해요. 가면을 썼을 때도 내 가면을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가면을 벗으면 내 가면을 싫어하던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줄도 있다는 것은 모르고, 좋아했던 사람이 없어지리라는 생각만 해요. 그래서 무서워하는 거예요. 폐를 다 까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랑 있는 편이 낫죠. 그게 더 건강한 거니까.

 

가면의 역할은 일대일의 관계를 못 하게 하는 거예요. 가면은 대개 사회적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이런 얼굴을 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는가. 이렇게 흉내를 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고 연기니까 배역이 정해져 있고 시나리오가 정해져 있잖아ㅛ,. 그러니까 가면은 일대일의 관계를 막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가면을 쓰게 되면 일대일 관게가 안 되는 거예요. 가면이라는 존재 자체에 사회적 가치가 들어와 있는 거니까요. 돈 있는 척, 유식한 척, 허점이 없는 척, 지금까지 만난 남자만 해도 열 명인데고 ‘남자가 뭐예요’ 이러는 거^__^

 

정직해라. 네가 쓰레기면 쓰레기라는 것을 밝혀야 네가 쓰레기라는 것에서 벗어난다. 네가 소시민이면 소시민이라는 자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네가 부끄러워서 벗어난다. 병이 있으면 병이 있다는 것을 밝혀야 고칠 희망이라도 얻는다. 맨얼굴고 있어야 한다는 게 김수영의 생각이에요.

 

그리고 사랑과 자유

[588-

글을 쓴다는 것은 가지치기예요. 아무리 문장이 보석 같아도 전체 흐름에서 벗어나면 버려야 하거든요. 글은 명료해야 하니까요. 좋은 독자들은 행간에서 제가 쓸까 말까 주저한 그 부분까지 읽어주는 거고요.

아이들을 만나면 항상 이런 얘기를 해요.

 

너희는 천 년 전에도 없었고, 천 년 뒤에도 없을 존재들이다. 그러니 남 흉내 내지 말고, 가면 쓰지 말고 정직하게 자기답게 살아라. 남이 좋아한다고 해서, 남들이 간다고 해서 우르르 몰려가지 말고 자기답게 살아야 한다

저자는 선생이거든요. 책을 쓰면 사람들이 읽잖아요. 그러면 선생의 의무가 있는 거예요. 선생의 의무를 내가 몇 년까지 충실히 할 수 있을까. 간혹 이런 생각도 해보는데, 바라건대 정직하게, 더럽게 힘들었으면 좋겠어요. 힘든 게 사랑이라고요. 편한 것은 사랑이 아니고, 젊었을때는 여자에 대한 사랑이든 뭐든 나 자신이 편한 쪽으로 추구했어요. 후회가 많이 되죠. 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의 구절처럼.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다 자기 사랑에 불과했다고요/ 다시 태어나면 실 수 안할 것 같은데, 너무 실수를 많이 해왔던 것 같아요.

 

‘선생님은 행복해요?’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불행해서 온 통찰이다. 그게 더 리얼하지 않나? 행복하면 사랑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행복을 성찰한다는 것은 행복에서 멀어져 있다는 거다.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자유를 깨달았듯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거다’

철학이 필요한 것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옳은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판단은 각자가 해라. 그른 얘기면 지키지 말고, 옳은 애기라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리고 ’옳게 사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것‘이라고 덧붙이죠.

옳은 것을 관철시키려고 살 때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죽을 때 얼마나 편한데요. 옳은 것을 지킬 필요가 없고, 옳은 것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게 안식이죠. 연어가 언제 제일 행복하냐면 더 이상 헤엄질 힘이 없어서 마지막에 손을 놓을 때에요. ‘아. 이제는 버티지 않아도 된다’ 제대로 산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안식으로 여겨요. 제대로 못 산 인간들이 생명 연장을 꿈꾸죠. 왜냐하면 옳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예요. 그래서 반체적이고, 김수영이 얘기했던 것처럼 불온한 거죠. 사랑과 자유의 힘을 믿을 때 우리는 강해져요. 반대로 제대로 사랑을 못 할 때, 인간에 대한 근본적 신뢰가 붕괴되어버릴 때 사적인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관계에서도 절망이 오는 거예요.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어요. 사랑하는 사람만이 구속이 뭔지 느끼니까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귀가 시간을 어기게 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옛날에는 엄두도 못 냈던 사람들, 깡패들과도 싸워야 해요. 사랑을 하면 자유롭고 강해져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고요. 사랑과 자유가 동의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사랑과 자유는 같이 가요.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층위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에 바치는 헌사에요. 그래서 저도 제가 하는 인문학을 사랑과 자유에 바쳐야 하고요. 그래도 훌륭하지 않나요? 한국에서 인문학 하기 더럽게 힘들거든요. 흉내만 내느라고, 다행히 제게는 김수영이 있었어요. 그리고 김수영과 바이런. 니체와 장자. 기타 여러 진정한 인문학자들 사이의 공통점이 뭔지를 안 거죠. 그들이 어떤 디테일을 봤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관통하는 정신이 중요한 거고요.

===>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정신에 육박해서 읽는 것. 글과 글 너머에서 말하고자 하는 정신을 읽는다. 가슴을 울리는 글은 나를 변화하게 만든다. 생각의 방향이 바뀌면 일상의 행동이 바뀐다. 은 내가 선택한 것들의 누적분이니까.

 

에필로그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웠다 -강신주

[593]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상태를 말한다.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이란 지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미성숙에 머무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 그대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칸트

 

[584-598]

인문학이 무엇보다도 인간의 사랑과 행복을 위해 연주되는 오마주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인간의 소중한 가치를 파괴하는 외적 권위에 저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 소설, 음악, 미술, 그리고 철학은 모두 확연히 개성이 있는 작품만이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위대한 작품에는 모두 고유명사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위대한 작품은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만의 개성과 스타일이 살아 있어서 위대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정신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정치가나 자본가, 혹은 멘토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저 자신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원햇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문정신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우리에게 항상 물어봅니다. 스스로 주인으로 사유하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은 용기가 있는가? 당신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힘이 있는가?

누누이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생각에서나 삶에서나 그리고 글에서나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스타일이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 내 이름을 걸고 책을 쓰는 것은 ‘나’라는 고유명사를 나타낸다.

 

강연 말미에 저는 항상 반복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여러분! 저를 선생이나 멘토로 기억하지 말고, 강신주라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기억해주세요.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고 기억해주세요.‘ 저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을 저는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선생님과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신주와 여러분 각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선생님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가라고 가르치지 않으니, 저는 선생님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학생들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여러분은 학생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저의 책이나 강연이 여러분 스스로 한 번밖에 없는 자신의 소중한 삶을 돌아보고, 자신만의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여러분을 자극했으면 좋겠다는 것 말입니다. 제가 스스로 당당하게 저의 목소리를 내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신도 그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제가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일체의 검열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사실 그것마저도 생각보다 그렇게 녹록한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대담이 저녁 7시경부터 새벽 5시쯤 동이 틀 때까지(약 10여시간 크약) 진행되었기에 체력을 요했지요. 모두 지승호 선생님이 가진 인터뷰어로서의 역량으로 거의 열 두시간에 이르는 대담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심지어 피로로 코피가 터지는 것도 감내하며 진행할 수 있었던 겁니다.

 

3. 내가 저자라면

 

3-1. 이 책을 선정한 이유

 

우연히 벙커1특강 다상담을 들으면서 강신주에 빠져들었고 저자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강신주’라는 사람에 대해 매력을 느겼다. 저자에 대해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저자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책, 지승호가 인터뷰한 책 ‘지승호가 묻고 강신주가 답하다.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이 책이 ‘강신주’라는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감이 왔다. 나의 감은 적중했다. 강신주가 썼던 모든 책이 ‘저자의 정신이 무엇이고 무슨 목적으로 썼는가?’에 대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글쓰기나 책쓰기는 어떤 정신을 가지고 써야 하는지에 대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더군다나  책을 읽을때 저자의 정신에 육박하고 현시대와 함께 독해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책을 쓰고자 한다면 왜 책을 써야 하는 목적성이라든가. 독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자신을 돌아보게 하면서 가슴에 불을 당겼다. 나를 울리는 삶은 글에 대한 리얼리티를 갖게 한다. 책은 나 자신과 거리를 두고 쓸 수 있으면 나를 거리로 두고 보기가 된다.

 

3-2. 제목에 대하여

 

지승호가 묻고 강신주가 답하다.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한국의 유일무이한 ‘인터뷰 전문, 인터뷰 전업작가’ 지승호는 인터뷰를 책으로 출간하는 새로운 장르의 개척자이자, 근성있는 출간인이다. 지승호는 강신주 저자를 인터뷰하기 위해 강신주가 쓴 책을 모두 읽었으며, 인터넷이나 방송에 나온 강연을 들었다 고 추측한다. 왜냐? 어느 인터뷰에 지승호는 이렇게 말했다.

 

“ 인터넷에 올라와 있거나 활자화된, 상대방에 관한 각종 자료를 최대한 섭렵한다. 인터뷰 대상이 공지영 작가라면 그의 모든 책을 사서 읽고, 관련된 평론과 인터뷰 기사를 다 찾아본다. 영화감독이라면 그의 영화 DVD를 전부 구해서 본다. 사실 영화감독들 인터뷰집 ‘감독, 열정을 말하다’ 같은 걸 한 번 내려면 DVD값 지출이 인세 수입과 거의 맞먹는다. ”

 

위와 같이 질문 목록을 평균 300개 안팍을 준비해가는 그의 바보스러울 정도의 준비정신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으니까.

강신주는 ‘거리의 철학자. 대중의 철학자. 무려 철학박사’등 불리는 이름이 많다. 철학을 사람들은 어렵게 생각한다. 어려운 철학을 우리 삶의 모습과 함께 숨쉬게 풀이한다. 즉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과 고민들을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고 10대~80대까지 모든 연령층을 두루두루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풀어간다. 그게 바로 강신주의 매력이다.

 

“라캉에 따르면 불행히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전자가 페르소나라면, 후자는 맨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우리에게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반면 거짓된 인문학은 여러분에게 더 두텁고 화려한 페르소나를 약속할 것이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 <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

 

우리는 어느 순간 맨얼굴이 아닌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사회화 과정에서 배우게 된다. 페르소나위에 계속 덧씌운 페르소나는 어느 순간 자기가 누구인지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페르소나를 벗어야 할 때 당당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는 나를 넘어서고 세상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한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을 배우는 힘이다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한다. ‘나’라는 고유성을 가지게 한다. ‘나’라는 사람은 천년 전 에도 없었고, 천년 후에도 없다는 자기 긍정과 자기 애정을 갖게 한다.

순간에 살고 현재에 살기. 나에게 내일은 없다.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에 보내는 헌사이다.

그대 자유롭고 싶은가. 그러면 자신을 사랑하라. 자기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땅을 딛고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라. 사람들과 마주치고 겪으면서 느껴라. 쫄지 말고 당당하라.

 

쫄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그래야 자기 상처라든가 비겁함, 남루함에도 직면할 수 있어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굽실거리다가 죽지 말고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책에 싸인해 줄때도 이렇게 써요. 항상 당당하세요!

 

3-3. 책에 대한 소개

 

책에 대한 소개는 간단히 목차로 합니다.

 

차례

 

프롤로그

세상에 맨얼굴로 당당히 맞서기 위해-지승호

 

chapter 1

인문정신은 당당하다

강신주라는 고유명사

김수영과 인문정신

너나 잘하세요

인문학적 독서

인문학과 저항

찰학을 종주하다

철학에 이르는 길

철학의 숲에서 김수영의 길로

경계를 허무는 철학

철학이 필요한 시간

‘현재’라는 텍스트

평론과 글쓰기

철학과 영화

 

chapter 2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사랑과 기다림

사랑과 자유

잃어버린 열쇠

인간은 사랑의 존재

사랑하려면 신을 죽여라

이별을 각오하고 사랑하라

사랑은 ‘아까징끼’

어른이 된다는 것

혁명의 조건

 

chapter 3

철학적 시 읽기와 김수영

‘김일성만세’라는 시금석

김수영의 정신, 인문학의 정신

스스로 도는 팽이

불온시 논쟁

김수영과 아버지, 박인환과 김춘수

절정에 서서 버티기

사랑과 폭력

긍지의 날

시와 철학

시인들

문학과 에로티시즘

시의 힘

보편적 공감의 구조

강신주를 위하여

강신주다운 글쓰기

시인과 철학자

 

chapter 4

제자백가를 통하라

혁명가와 시인

움직이면 산이 아니다.

동양의 정치철학과 “역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

 

chapter 5

유가를 넘어서

유학의 패권

공자와 진시황

묵자와 양주

제자백가와 담론 지평의 확장

중국 담론과 위계 사회

사마천과 공자

공자와 예법

공자의 인간적 면모

고전 독법과 대안 교육

 

chapter 6

길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관중, 순자, 여불위

중국철학 최초의 악플러, 맹자

공자의 모순

도는 걸어야 만들어진다

덕의 정치

포숙, 관중을 부리다

노자와 장자에 대한 오해

유교 자본주의와 조폭 문화

 

chapter 7

철학, 한국 사회를 보다

정치, 인간과 노예 사이

마르크스에게 욕먹는 마이클 샌델

오감의 세계 vs 시각의 세계

신상 털기와 인민재판

다른 옷 입기, 같은 옷 입기

스티브 잡스와 이건희

망령의 귀환

신은 죽었다, 카르페 디엠

예수, 작두를 타다

스피노자와 동학

자본의 한계를 돌파하는 사랑

노무현과 진보의 증발

억압과 야만의 시대

사랑과 혁명이 필요한 시간

 

chapter 8

자본주의에 맞서라

소유냐 사랑이냐

장기 기증인가 매매인가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다

하이퍼리얼리티

대중매체와 스펙터클

시각의 세계, 자본의 세계

민주주의는 데모의 정치

민주주의의 양 떼가 되다

자살에 이르는 길, 자기계발

 

chapter 9

음악이 필요한 시간

편집자는 첫 독자

언어 이전의 고통과 대중적 글쓰기

자본과 책 사이의 인문학 출판

블로그와 책

내가 챙긴다

거리 두기

음악과 정신성

음악, 바벨탑 이전의 역사

피아노 소나타와 리듬

감정 수업

유리병 편지

고통의 폭과 ‘에밀’

글쓰기의 동력

 

chapter 10

인간을 위하여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페르소나와 결혼

가면을 벗고 어린아이가 돼라

그리고 사랑과 자유

 

에필로그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웠다 -강신주

 

인용작품출처

 

3-4. 저자 강신주가 자주 사용하는 말

 

-비겁하다, 비루하다, 남루하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볼 때 작가의 정신성에 얼마나 육박해 들어갔느냐 하는 건데, 사랑하면 보이게 된다. 사랑하면 알고 싶어하니까 보이게 된다. 음악이든 책이든 그림이든 시이든. 운동이든... 사랑은 기다림이다. 기다리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과 기다림은 함께 간다.

-인문학은 ‘나’라는 고유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나’라는 고유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3-5. 챙겨보아야 할 것들

 

- <경향신문 칼럼란, 철학자의 강신주의 비상경보기>

- “인문정신은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다” -<인문정신을 다시 생각하며> 기획회의, 313호, 2012. 2.5

-돌아가신 김현 선생은 평론가의 전범이에요. 김현은 소설을 평해도 자기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 마지막에 촌철살인의 글을 써요. 평론도 작품이 된다는 것을 보여줬죠

-미카엘 팜 감독의 <감시통제>라는 다큐멘터리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급전 필요해서 중앙일보 기자 후배에게 돈을 받기로한 상황.

-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도 애인 많잖아요. 1,000 페이지 정도 되는 서간집

-이성복 시인

-황지우 시인

-김수영 <벽> 박인환에 대해 쓴 글

-신해철의 <아버지와 나> 노래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민음사

- <경향신문>2012.4.1. 색깔론 유령에 맞서는 당당함.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 김수영이 인정한 시인 2인: 조태일, 신동엽

-영화 < 베티블루 37도 2>

-영화 <묵공>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중앙선더에>- 강신주의 감정 수업

-<경향신문>-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로크<사회계약론.

-<경향신문, 2012,3,18> 철학자의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너희들은 문맥을 아느냐?

-<파시즘의 대중심리>- 라이히의 책은 정신분석학에서 진짜 중요하다.

-랑시에르는 직접민주주의

 

3-5. 가슴에 감동적인 문구

 

- 언어의 궁극적인 목적은 항상 침묵이고, 침묵은 실천이거든요

 

-나는 나다. 나는 십 년 전에도 없었고, 천 년 전에도 없었고, 천 년 뒤에도 없을 거라는 걸 알면 자기 삶을 살아야 하거든요. 그게 인문정신이에요. 고유 명사를 되찾는 것,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안 하려고 하는 것.

-어떤 철학자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 사람 책을 잘 인용하면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라면 이 현상에 대해 이런 판단을 내렸을 거라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거예요

 

-인문학을 읽을 때는 그게 시인이든 철학자든 영화감독이든 간에 그 사람의 정신성에 육박해 들어가야 해요. 그 바로미터가 뭐냐 하면, 만약 지금 베토벤이 소녀시대를 지휘한다면 어떻게 할까. 그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54p)

 

어떤 책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할 때에는 그 책을 딱 한 번만 보고 써요. 그 다음에는 안 봐요. 그 책을 흉내낼 수 있거든요. 책을 탈고하고 나서야 그 책을 다시 봐요. 혹여 영향을 받았나, 내가 그 책에서 얼마만큼 벗어났나, 나는 그 작가에게 얼마만큼 육박했나, 이런 걸 확인하기 위해서예요. 이 과정을 마치고 나면 그제야 출판사에 전화하는 거죠. 강신주의 책인데 강신주다워야죠. 모름지기 인문학자라면 그래야 해요. 그런 식으로 벽에 부딪혀 고통도 직접 느껴보면서 리얼리티를 얻어야 해요

-철학을 통해서 철학적 사유에 적응하는 순간, 누구든지 사회학, 정치학, 문학, 공연예술 등 다양한 텍스트가 전제하는 사유 논리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독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인문학적 감성과 사유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철학 공부가 불가피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78p)

 

-인문정신이라는 것은 고유명사예요.

 

-저자가 책을 쓸 때는 그 책이 없기 때문에 쓰는 거라니까요

-음악이든 영화든 무용이든 한 인간이 자기를 표현했다면 그 사람은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그 느낌 속에서 그 사람의 정신성에까지 육박해 들어가는 연습을 많이 해요

 

-좋은 평론과 나쁜 평론을 가르는 기준은 작가의 정신성에 얼마나 육박해 들어갔느냐 하는 건데, 그게 곧 ‘사랑’이에요. 어떤 작품을 정확하게 보려면 작가를 사랑하고 이해하려 해야 해요. 해석하지 말고 먼저 이해하려고 해야 해요. 사람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이해라려고 하잖아요. 그 작가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가 얼마나 깊이 파악했느지의 척도예요. 만약 이해하지 못했다면 사랑이 부족했던 거에요.

 

-글은 두 종류가 있는데요. 먹다가 게워낸 글이 있고 따끈따끈한 똥처럼 나온 글이 있어요.

하여간 지라시 글들을 모아서 책 쓰기 시작하면 그 작가는 끝난 거예요. 글 쓰는 사람은 긴 호흡으로 가야 해요, 산 잘 타는 사람은 종주의 역량에서 확인되는 거죠. 산에서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 그렇게 버텨서 써낸 글이 좋은 글이에요.

 

-인간은 스스로가 굉장히 당당하고 자유로워야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요.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의 주인인 거잖아요. 그

러니까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어요. 내가 내 삶의 주인이어야지. 자유로워야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요. 스스로 자유로워야 자기를 긍정할 수 있고,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어요. 자유와 사랑은 결과적으로 같이 가는 거예요.

 

-실천하도록 하는 글,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들, 관조하지 않도록 하는 글, 삶에 직면하고 살아감에 직면하는 글을 써야 해요. 죽었다 깨어나도.

 

-천하도록 하는 글,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들, 관조하지 않도록 하는 글, 삶에 직면하고 살아감에 직면하는 글을 써야 해요. 죽었다 깨어나도.

 

인간 속에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발견하려는 단호한 용기가 인문학자에게 필요하거든요.

네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고, 너의 남루함을 자각해야 하고, 자꾸 저승에 있는 천사를 볼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여기서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걸 인문학자가 이야기해야만 해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해요

인문학 정신은 자기 긍정, 자기 애정이에요. 하루하루가 다 행복해야 전체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해야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람은 내일 돼도 또 오늘이잖아요. 그날 잘 살면 돼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사람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데, 내일이 되면 또 내일이에요

 

-“초월자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하도록 만든다

 

-사랑은 힘든 거예요. 사랑은 이별을 감당하면서 시작하는 거예요. 언젠가는 헤어진다고요. 한 사람이 나이 들어서 먼저 죽든지, 떠나든지 결국 다 헤어져요. 그것까지 생각하고 사랑하는 거예요. 헤어짐을 각오할 때 사랑하는 거예요. 사랑하려면 쉰 살 정도는 돼야 하는데, 그때 되면 힘이 빠져서.....

 

-자유롭고 당당하지 않은 인간이 글을 쓰면 쓰레기가 돼요

 

- 자기를 투철하게 봤던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금방 공감해요. 그 리얼리티를 확보하지 못하면 작품을 못써요.

좋은 철학책은 지적인 이해와 분석을 요구하는데, 책이 딱 끝나고 나면 마음속에 확 들어와요. 후배들이랑 원전 강독할 때 ‘책이 네 마음을 울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한다. 그걸 써나가는 과정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과정이고 그 사람에게서 독립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논문을 써야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나중에 독립된 저자로서 살 수 있다’라고 조언해줘요. 강의할 때도 항상 제자들에게 ‘감정을 못 지키면 끝장이다. 오늘 너희들 감정이 들었니?’하고 얘기해요

 

-인문학은 나의 발견이거든요. 책을 읽어도 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음악을 들어도 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시를 봐도 나를 발견하는 것이예요. 나의 발견으로 가야 해요. 합의한 요약, 정답으로 가면 안 돼요. 모든 글은 고통이든 기쁨이든 감정을 느낀 다음에 써야 하는 거

 

-모든 글은 나다운 게 있어야 하잖아요. 나의 감정과 관련되니까 나다운 게 있어야 해요. 인문학은 고유명사라고 하는 게 그런 거예요.

모든 인문학은 구체적인 거에요. 그 구체성을 어떻게 확보하고 느낄 것인가가 문제고요. 그것만 잘 잡으면 인문학도 시도 어렵지 않아요

어떤 텍스트, 어떤 사람을 읽는 다는 것은 보편적 공감의 구조와 디테일까지 이해하는 거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나 자신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누군가를 이해하는 과정은 곧 나 자신을 파고 들어가는 과정인 거요.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글이라는 것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해본 사람’이라고 했어요.

자기가 반영돼 있는, 자기의 삶이 투영되는 책 읽기를 해야 하는 거죠.

 

-한 사람의 고통의 폭이 곧 그 사람의 자유의 폭이거든요

 

-모든 사람이 자기니까 살 수 있는 삶을 살고 자기니까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자기니까 생각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사회

 

-사람들이랑 같이 공감하고 사람들이 읽었을 때 감동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쓰는 게 제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거예요

 

-정직해라. 네가 쓰레기면 쓰레기라는 것을 밝혀야 네가 쓰레기라는 것에서 벗어난다. 네가 소시민이면 소시민이라는 자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네가 부끄러워서 벗어난다. 병이 있으면 병이 있다는 것을 밝혀야 고칠 희망이라도 얻는다.

 

3-6. 나의 감상

 

2주 동안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을 읽으면서 그 외 참고자료를 읽었다.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는 웃으면서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나의 시선이 편협되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철학적 읽기의 즐거움, 강신주>은 전체 다 읽지 못했지만 책쓰기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지승호와 강신주. 지승호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이 저절로 일어났다. 자기의 일에 철저히 몰입하고 우직스럽게 인터뷰를 준비하는 모습에서 왜 그가 인터뷰에 대해 독보적인지에 대해 추측이 되었다. 자신을 유령같은 존재라고 했지만, 내가 읽은 지승호는 살아있는 유령에게 인터뷰이는 더 자신을 이끌어 내게 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지승우, 압축 파일을 풀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도 지난 해 구본형 선생님이 소천하신 이후, EBS 고전읽기 <할아버지의 기도> 55분정도 5회분 방송분을 받아 쓰기 하면서 만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50시간의 압축파일을 풀었을 때 4,500매를 썼다하니 이 얼마나 작업량인가. 성실함은 기본 갑옷으로 무장해야 뭔가를 할 수 있음을 지승우 인터뷰어를 보고 가슴이 울렸다.

 

저자 강신주는 30여권의 책을 썼다. “인문학적 책읽기는 내가 감응하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는 저자에 육박해 들어가서 텍스트에 감응을 해야 한다. 또한 그 저자라면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까지 읽어내야 한다. 감응이 없다는 것은 내 삶이 심화되지 않았다”

 

“어떤 철학자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 사람 책을 잘 인용하면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라면 이 현상에 대해 이런 판단을 내렸을 거라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거예요”

 

“인문학을 읽을 때는 그게 시인이든 철학자든 영화감독이든 간에 그 사람의 정신성에 육박해 들어가야 해요. 그 바로미터가 뭐냐 하면, 만약 지금 베토벤이 소녀시대를 지휘한다면 어떻게 할까. 그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책을 읽을 때 저자에 육박해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에 밑줄 긋고 외우고 그런 것은 책읽기가 아니다. 어느 부분에 감응을 했고, 내가 책 속의 그 인물이라면 나라도 그랬을텐데 라는 감수성이 느껴져야 한다.

 

책을 읽고 저자를 만나고 그 책에 감응을 받을때. 나에게도 그런 정서가 스며드게 하는것.

강신주는 말한다. “삶은 원래 힘든거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운다.

 삶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힘든거라고. 힘들다는 전제하에 들어가면 웬만한 일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사랑을 구걸하고 애정을 구걸하는 것처럼. 과거의 정신분석의 황당함,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가지고 어쩌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현재를 긍정하라. 현재를 지금 내 앞에 있는 현실을 긍정하는 힘만이 내가 살아가고 사랑하는 거라고.

 

내가 말하는 것이 “인생이 계획대로 안될때가 있다. 삶은 우연의 씨실과 필연의 날실로 짜여져 있다. 삶의 흐름에 나를 맡기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이다.

그래서 나는 삶에 계획을 별로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계획했다고 해서 되었던 것이 있었던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고 그 다음에는 되면 좋고 안되면 안되는 대로. 그래고 하고 싶으면 다시 또 한다. 그게 내 삶의 태도였는데, 바로 순간의 몰입과 즐기려고 한 나의 태도를 돌아보면서 이런 것이 아마도 지난날의 마음아프고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내 나름대로 삶의 지혜를 터득했다고 할까. 삶의 리얼리티가 있으면 어떠한 글을 읽어도 감응할 수 있다. 사랑은 이별하는 거처럼 찬란히 그 순간을 즐기는 거다.

 

“실천하도록 하는 글,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글, 관조하지 않도록 하는 글, 삶에 직면하고 살아감에 직면하는 글을 써야 해요”

 

인문학의 정신, 글쓰기의 태도 , 책 쓸때 는 자기스타일 고유한 ‘나’를 알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강신주는 19시간씩 120일 동안 글을 써서 자신의 한계를 알아갔다.

강신주의 공부법이다. 고전을 비롯한 철학책 시집을 독해할 때의 방법이 나왔다. 가설을 세우고 그 시대상을 읽고 한 문장이라도 왜? 라는 질문에 다양한 시선으로 가설을 세우면서 읽는 독해법이 바로 독서법이고 한 권의 책이 가슴으로 들어와 머리를 울리고 지성을 울려서 다시 내 발로 내려와 땅위에 살아가는 현실에서 적용해 가는 법이었다.

 

책은 머리로 읽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읽어야 한다. 공감하고 울림으로

 

책읽는 법, 공부법, 책쓰는 사람이란, 글을 쓰는 사람이란, 삶을 살아가는 태도란....

온전한 독립이란 혼자서 가야한다.

 

내가 비겁함을 알아야 나중에 그 비겁함을 마주 대하고 고칠 수 있는 여지를 가진다. 쫄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당당한 삶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에 대한 예의

삶에 대한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배우다

세상을 독해하는 방법을 배우다

왜? 일까라는 질문을 계속한다

 

2주동안 읽고 북리뷰한 것을 프린트해서 또 읽을 때는 안개너머의 불빛으로 다가왔다. 내 가슴에 불이 다가왔다.

 

이 책은 ‘내 사유의 진화를 일으켰다.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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