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희동이
  • 조회 수 6767
  • 댓글 수 5
  • 추천 수 0
2014년 2월 17일 02시 39분 등록

10기 레이스 2주차 북리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2014.02.17, 이동희

 

1. 저자에 대하여 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은 1905년 오스트리아의 빈 출신 정신과 의사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3년 동안 다카우와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에서 보냈다. 강제 수용소를 거치면서 아버지, 어머니, 아내, 형제를 잃었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그는 생에 대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수감자들의 심리 상담을 통해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게 조언하여 자살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강제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을 자유와 책임 있는 존재로 파악한 독자적인 실존분석을 세우고, 그 치료이론으로서 의미치료로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주창하고 정신요법 제3학파인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하였다.

 

빅터 프랭클이 창시한 로고테라피는 권태와 공허가 자리잡은 현대에 꼭 필요한 심리치료 방법으로서 생의 의미, 어떠한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자유, 미래에 대한 믿음, 자유에 대한 책임을 토대로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을 지키며 인격을 유지할 수 있는 치료법을 제시한다. 이는 엄청난 고통과 말할 수 없는 가족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낸 것으로서 경외감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다. 자신의 훈련 과정과 이론은 물론 29 일 명예 박사 학위, 21개의 탁월한 수상 경력, 그리고 27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그가 창시한 로고테라피는 프로이트와 아들러 이후 가장 중요한 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원제:Man’s Search for Meaning),Psychotherapy and Existentialism』『The Unconscious of God』『The Unheard Cry for Meaning』『The Doctor and the Soul』 등 27권의 그의 저서는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세계 19개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그 중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그의 대표작이며 9백 만부 이상 판매되었다.

 

빅터 프랭클의 연대기를 정리해 본다.

(VIKTOR FRANKL INSTITUT 참조, http://www.viktorfrankl.org/index.html)

l  1905 3 26 : 빅토르 에밀 프랭클 어머니 엘사 프랭클과 아버지 가브리엘 프랭클 사이에서세 아이의 둘째로 비엔나 에서 태어났다.

l  1914-1918 1 세계대전 동안 가족의 어려움으로 농부들에게 구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1915-1923
년에는 고등학교 프랭클은
Nature Philosophers" 읽었고 응용 심리학 공개 강의를 들었으며, 정신 분석을 접하게 된다.

l  1923 고등학교 졸업 에세이에 쇼펜하우어의 심리 분석을 다룬 철학적 사고에 대한 심리학에 대하여 작성하였다. 일간 신문의 청소년 섹션에 실린 그의 초기 출판물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l  1924 프랭클의 에세이 "긍정 부정 모방적 움직임에 대하여" 국제 정신 분석학 저널에 게재됩니다. 프랭클은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 고등학교 학생 협회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의학을 연구하였다. 일년 그는 개인적으로 프로이트 만났지만 알프레드 아들러와 연계되었다.

l  1925 프랭클의 논문 "심리 치료 관념론" 국제 개인 심리학 저널에 게재되었다. 인생의 중심 사상이 주제인 의미와 가치의 근본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심리 치료 철학 사이의 접점을 탐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l  1926 프랭클은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 베를린의 공개 강의에서 처음 LOGOTHERAPY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l  1927 알프레드 아들러와의 관계는 줄어들었다. 프랭클은 루돌프 말러스와 오스왈드 슈바르츠 (정신 의학 창시자) 친분을 맺습니다. 그는 Max Scheler "윤리의 형식주의와 가치의 비형식적인 윤리" 대해 열정적이었다. 프랭클은 자신의 의도도 달리 아들러 모임에서 제외된다. 아들러의 알렉산드라, 루돌프 Dreikurs 기타 중요한 Adlerians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l  1928년부터 1929년까지 비엔나에서 여섯 유럽 도시에서 프랭클은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조언을 제공하는 청소년 상담 센터를 구성하였다. 샬롯 뷜러 어윈 Wexberg, 개별 심리학자 프랭클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해부학 교수와 비엔나 의원 줄리어스 Tandler 금융 지원을 제공하였다.

l  1930년에 처음으로 비엔나에 학생 자살이 발생하자 그는 학기 말에 특별 상담 프로그램을 구성합니다. 프랭클은 국제적인 관심을 얻어 Wilhelm Reich로부터 독일 베를린으로 초대되었고, 프라하와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강의를 요청하였다. 성인 교육 센터에서 그는 정신 위생에 관한 교육 과정 강의하였다. 그는 석사학위를 받기 직전에 정신과 대학 병원의 심리 치료 부서에서 일을 시작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Assistant" 승격 되었다.

l  1931-1932년에 프랭클 신경과에서 교육을 받았고, 비엔나에서 "마리아 theresien Schloessl"에서 일했다.

l  1933년부터 1937년까지 프랭클 연간 3000 환자를 돌보면서 비엔나의 정신 병원에서 "Female Suicidals Pavilion" 수석 됩니다.

l  1937 프랭클은 신경과와 정신과 의사 훈련 프로그램을 개설하였다.

l  1938 히틀러 군대에 의해 오스트리아 침략이 발생하였다.

l  1939 그의 논문 "철학과 심리학. 실존 분석의 기초에 대하여" 에서 그는 "실존적 분석"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내었다. 프랭클은 미국의 이민 비자를 취득하지만 그의 오래된 부모를 버리고 싶지 않아서 비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l  1940년부터 1942년까지 그는 로스 차일드 병원의 신경 학과, 유대인 환자 병원의 이사가 된었다. 자신의 생명에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신적으로 아픈 환자의 안락사를 방지하기 위해 허위 진단을 함으로써 나치 절차를 거부하였다. 그는 스위스의 의학 저널에 여러 기사를 게재하고, 그의 “AERZTLICHE SEELSORGE (의사와 영혼)” 번째 버전을 쓰기 시작했다.

l  1941 프랭클은 그의 번째 아내 틸리 가르와 결혼했다.

l  1942 나치는 젋은 프랭클 부부의 아기를 낙태시켰다. 9 월에 빅토르 틸리 프랭클은 그의 부와 함께 체포되었고 테레지엔 슈타트 게토라는 프라하의 북쪽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그의 여동생 스텔라는 직전에 호주로 탈출했고, 형제인 월터와 그의 아내는 이탈리아를 통해 탈출을 시도하였다.  테레지엔 슈타트에서 그의 아버지는 과로로 사망하였다.

l  1944 프랭클과 틸리 그리고 65세의 어머니는 멸종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그의 어머니 바로 가스실에서 살해 되고, 틸리는 Bergen-Belsen으로 옮겨졌고, 24 세의 나이에 죽었다. 가축 수송 차량으로 빅토르 프랭클은 비엔나를 거쳐 Kaufering and Türkheim (Dachau 지역 캠프) 수송되었다. 심지어 캠프의 극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랭클은 운명과 확실한 자유에 대한 그의 이론을 발견하였다.

l  1945 마지막 캠프에서 그는 장티푸스로 쓰러진다. 그는 도중 심각한 좌절을 방지하기 위해 캠프 사무실에서 훔친 종이 전표에 자신의 원고를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깨어 있게 하였다. 4 27 캠프는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8월에 프랭클은 비엔나에 돌아와 일안에 그의 아내와 어머니 그의 동생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l  1946 프랭클은 자신의 절망을 극복하고, 25 동안 수행하게 비엔나 신경 병원 외래 환자 진료부의 관리자가 된다. 그가 재구성한 "ÄRZTLICHE SEELSORGE (목회적 간호치료)" 그는 비엔나 의과 대학의 대학에서 자신의 "재활 치료", 또는 교육 기회를 갖는다. 그는 9 이내, 나중에 영어 번역본 "의미에 대한 인간의 탐색"으로 출판 "EIN PSYCHOLOG ERLEBT DAS KONZENTRATIONSLAGER" 출간했다. 1997년까지 책은 900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l  1947 Eléonore Schwindt 결혼 12 월에 가브리엘을 낳았다. 프랭클은 그의 가장 실천적 저서인 "봉착 심리 치료" 출간했다. 또한, "시간과 책임" "시간 문제의 실존분석" 출간합니다.

l  1948 프랭클은 "의식이 하나님" 대한 논문으로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l  1948년에서 1949년까지 프랭클은 비엔나 대학의 신경과 정신과의 부교수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인간"(절대 남자) 출판된 그의 "Metaclinical 강의" 제시한다.

l  1950 프랭클은 오스트리아의 심리의학협회를 만들고 회장이 된다. 그의 강의를 바탕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지원과 안락함을 제공하는 방법을 중심 주제로 "HOMO PATIENS. VERSUCH EINER PATHODIZEE” 씁니다.

l  1951 그의 "LOGOS UND EXISTENZ" (로고스와 실존)에서 프랭클은 Logotherapy 인류학적 기초를 완성합니다.

l  1952 Otto Potzl 함께, 추락하는 산악인의 경험에 대한 정신생리학적 연구를 출간합니다.

l  1954 런던,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의 대학에서 강연을 위해 프랭클을 초대했습니다. 미국에서는 Gordon Allport 프랭클을 널리 알렸고 그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l  1955 프랭클은 비엔나 대학에서 교수로 승진하였습니다. 그는 해외 대학에서 초빙교수 활동을 시작합니다.

l  1956 logotherapy 관점에서 신경증의 이론 실제적인 측면은 "이론과 신경증의 요법" 책으로 다루어졌다.

l  1959 logotherapy 실존 분석 체계적인 치료는 프랭클, Gebsattel 슐츠 의해 편집된 "가르침과 정신 신경증 설명서" "로고테라피 실존분석 계획" 나타난다.

l  1961 프랭클은 하버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의 객원 교수가 되었다.

l  1966 남부 감리교 대학, 달라스, 텍사스에서 개원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강의 원고를 바탕으로 영어로 자신의 가장 체계적인 책인 "의미에의 의지" 출간합니다.

l  1970 캘리포니아의 미국 국제 대학의 Logotherapy 의장에 취임합니다.

l  1972 듀케인 대학, 피츠버그에서 객원 교수로 활동합니다.

l  1988 히틀러의 군대 침략 50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프랭클은 비엔나 시청 광장에서 유명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l  1992 비엔나에 빅토르 프랭클 연구소가 설립된다.

l  1995 자서전 ( 책이 아닌 것은 무엇입니까) 발표합니다. 책은 1997년에 영어 번역본으로 출판됩니다.

l  1997 프랭클은 그의 마지막 "MAN'S SEARCH FOR ULTIMATE MEANING" 출간합니다.

l  1997 빅터 프랭클은 9 2 생을 마감합니다.

 

빅터 프랭클의 생을 돌아보면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 대한 그의 열정과 수용소 생활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생에 대한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으로서 인격을 유지하기 위한 순간의 고민과 선택에 존경과 경외감을 느낀다. 과연 그러한 순간에 마주치면 어떤 결정을 나갈 있을까? 그와 같이 있다는 장담은 못하지만 그를 통해 선택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유명한 말들은 다음과 같다.

Everything can be taken from a man but one thing: the last of the human freedoms – to choose one’s attitude in any given set of circumstances, to choose one’s own way.”

 

"We have come to know man as he really is. After all, man is that being who invented the gas chambers of Auschwitz; however, he is also that being who entered those gas chambers upright, with the Lord's prayer or the Shema Yisrael on his lips."

 

"Man is capable of changing the world for the better if possible, and of changing himself for the better if necessary."

 

"Live as if you were living for the second time and had acted as wrongly the first time as you are about to act now."

 

"It did not really matter what we expected from life, but rather what life expected from us.”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P26

보통 수감자들에게 먹을 것이 아주 조금 있거나 아예 없을 때에도 카포들은 절대로 굶는 일이 없었다. 그들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카포들은 오히려 수용소에 있을 때 가장 영양섭취를 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시하는 병사들보다도, 나치대원들보다도 카포들이 수감자들에게 더 가혹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카포들은 수감자 중에서 뽑았다.

 

죄수나 포로 또는 피지배자들을 지배할 때는 그들을 나누어 갈등관계가 발생하게 하여 하나된 모습을 갖추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직접적인 관리나 지배 행위에 대해 1차적인 공격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카포와 수감자들 간의 갈등과 지배행위는 생활 곳곳에 상시 있으므로 수감자들은 감시병보다 카포를 1차적으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감시병들이 관여할 수 없는 숙소나 휴식처에서의 수감자 관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아직 수많은 카포들이 여전히 있다. 그들은 자그마한 권력으로 그들이 속해 있는 지역사회나 사람들의 모임을 위임된 권리라는 것으로 더 혹독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그렇게 관리되는 피해자 입장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생각과 개인적인 욕심으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고 돌봐야 할 사람들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 말로가 좋지 못한 것을 보면 사람으로서 할 일이 못되는 것이다. 카포의 입장이 되어서 감히 목숨을 걸고 수감자를 대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같이 생활하는 환경에서는 그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도와줄 수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럴 경우 카포 자리가 욕심이 나는 수감자에 의해 고발되어 되려 빨리 처형될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P27

수용소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수용소 생활에 대해 그릇된 생각, 즉 감상이나 연민을 갖기 쉽다. 하지만 밖에 있던 사람들은 당시 수감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과 목숨 그 자체를 위한 투쟁이자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친구를 구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었다.

 

인격과 인간의 존엄성이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곳에서 사람은 자신의 목숨과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겠다는 노력 외에 다른 것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 되기 쉽다.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사랑을 갖게 될 지라도 실행에 옮기기 어려울 것이고 설사 용기를 갖고 맞서 나간다고 해도 오래 실행하게 놓아두지 않는 카포나 감시병에 의해 그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그러니 우선 살고 보자는 마음이 큰 것을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입장에서 목숨을 유지하는 것을 최선으로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자신을 보면서 더더욱 비참해지고 스스로 하찮아지며 스스로 목숨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P27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희생자 명단에서 자기 자신의 이름이나 친구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 한 사람을 구하려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P28

수감자들에게는 모두 번호가 있었고, 그들은 번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이름을 갖고 산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과거의 행적을 모두 연상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느끼게 할 수 있고 과거를 연상하게 하므로 수용소 생활에 적응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저 죄수를 번호로 부르고 관리하는 것은 그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그들의 과거를 무시하여 수감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점점 더 하찮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도 이와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호칭을 함부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손님이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관리자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인격을 비하하는 호칭을 사용하는 사례가 너무도 많다.

 

P28

모든 사람들은 오로지 한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이제 곧 끌려갈 친구의 목숨을 구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래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를 대신할 다른 사람, 즉 다른 번호를 수송자 명단에 집어 넣는다.

 

인격을 서로 인정하지 않으니 오로지 내가 아는 사람만이 중요한 사람이 된다. 이는 현대 사회의 병패인 인맥이란 부분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단지 번호가 아닐 뿐이지 서로 자신과 아는 사람을 추천하려고 하고, 자신도 어디든 줄을 대어 뭔가 빨리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이 사회에 팽배해 있다. 남이 하면 비난하고 자신은 어떤 줄이라도 잡으려고 오늘도 골프채를 들고 필드로 나가는 사람이 많다. 능력을 보고 그 능력에 따라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이 사회에 얼마나 통용되는 기준인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P29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 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 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어쩌면 괜찮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그나마 지옥 같은 곳에서도 사람의 생명이 조금 더 유지되고 그나마 서로의 훈기를 느낄 수 있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들이 일찍 명을 달리하였지만 그들의 죽음이 남은 자들의 영혼을 덮여주는 난로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P29

이 책에서는 비록 실제 일어난 일이더라도 그것이 한 개인의 체험과 관련된 경우에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앞으로 전개될 글에서 내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런 체험의 명확한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수용소 생활을 겪어본 사람들을 위해 나는 그들의 체험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수용소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 그래서 아직도 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당했던 일에 대해 말해 주고, 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 관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았을 때 이 책에서 보는 만큼의 상황의 비참함을 못 느꼈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많은 끔찍한 사건 사고 및 영화들을 보면서 약간 무감각해진 것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나 무엇 보다 동포나 이웃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먼나라의 아주 옛날이야기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인류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로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어떠했을 지를 생각하면 우리 선조들이 일제 시대 때에 감당해야 했을 그 고통도 더 절실하게 다가 오게 된다..

 

P31

그러나 원고를 완성했을 때, 익명으로 책을 출판할 경우, 책이 지닌 가치의 반을 잃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신념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용기를 가져야 했다.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장 하나도 빠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나도 했었다. 언젠가 책을 낼 때 가명을 써서 낼까? 내가 대중에 드러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책도 내기 전에 작가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생각하기 전에 말이다. 플랭클의 말처럼 신념을 갖고 글을 쓴다면 이름을 드러낼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P32

여하튼 그때 나는 신나게도 무려 담배 열두 개비를 바꿀 수 있는 쿠폰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담배를 수프 열두 그릇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고, 수프 열두 그릇이면 한동안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P32

그 밖의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수 없었는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었거나 아니면 자기에게 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저 즐기려는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였다. 따라서 어느 날 동료가 자기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지탱해나갈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그 믿음을 잃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는 힘들었다.

 

금연 열풍은 가장 바람직한 동향이다. 하지만 아직도 골초들이 있다. 매일 담배를 피우며 시간과 자신의 건강을 태워 없애고 있다. 10여 년 전에 피우던 담배를 끊은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왜 담배를 그만 피우자고 결심했는지 막연하지만 다음 같았다. 회사에 들어가서 근무를 하는데 담배를 피운 상태로는 아침에 머리가 무거워 회사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초조함을 떨치지 못해 담배를 피우는데 그 초조함이 더 커졌고 신경증으로 발전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바로 잡고 싶었고 그 첫째로 담배를 끊었다. 담배를 피우는 현대인들 중 상당 부분은 습관으로 담배를 피우지만 어쩌면 그 담배에 절망이 담겨 있는지 모른다. 그 것이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P33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적 반응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 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의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이다.

 

P33

첫 번째 단계의 특징적인 징후는 충격이다.

 

P34

잠시 후 기차가 덜컹거리며 옆 선로로 들어갔다. 종착역이 가까워진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 불안에 떨고 있던 사람들 틈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우슈비츠야. 저기 팻말이 있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멈췄다. 아우슈비츠! 가스실. 화장터. 대학살. 그 모든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이름. 아우슈비츠! 기차는 망설이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불쌍한 우리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아우슈비츠라는 끔찍한 현실로부터 구해내고 싶다는 듯이

 

정말 두려웠을 것이다. 기차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들어간다는 것은 관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떨쳤을까? 혼자 간 사람은 차라리 마음이 편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저 스스로 절망만 하면 되므로 눈 감고 가면 되므로. 하지만 가족과 친구가 같이 간 경우는 그 마음을 어떻게 하였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바로 옆에 있다가 다른 건물로 가게 되고 그리고 소식도 모른 채 있다. 죽었다는 소식을 받을 때까지 노심초사하는 마음을 차마 알 수 없다. 그 곳으로 들어가는 기차는 퉁퉁 부어 있었을 것이다.

 

P35

마침내 우리는 역 안으로 들어갔다. 최소의 정적이 고함치는 명령 소리에 의해 깨졌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모든 수용소에서 그 거칠고 날카로운 고함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또 들어야 했다. 그 소리는 마치 희생양의 마지막 비명 소리와 같았다. 하기야 다른 점이 있기는 했다. 그들의 목에서 컥컥거리며 나오는 그 쉰 목소리는 칼에 찔리고 또 찔려서 죽어가는 사람이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애쓸 때 나오는 소리와 비슷했다.

 

 

P35

열차 문이 열리자 몇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모두 줄무늬 수의를 입고 머리를 깎았지만 영양상태는 좋아 보였다. 그들은 유럽 여러 나라의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우스개 소리를 던지는 사람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그것이 아주 기괴하게 느껴졌다. 본래 낙천적인 성격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는 감정의 평온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을 가진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아주 신수가 훤하군. 괜찮은 사람들처럼 보여. 심지어는 웃고 있잖아. 누가 알아. 내가 저 사람들처럼 혜택 받는 처지에 있게 될지

 

그래도 아직은 희망을 본다. 당면한 모든 것에 환상을 입히고 마음은 안도한다. 잠시뿐일지라도.

 

P36

정신의학에 보면 소위 집행유예 망상’ delusion of reprieve 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P36

1,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기껏해야 200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는 가축우리 같은 건물에 구겨 넣어졌다. 우리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바닥에 드러눕기는커녕 쭈그려 앉아 있을 만한 자리조차 없었다. 나흘 동안 우리가 받은 양식이라고는 5온스짜리 빵 한 개가 전부였다.

 

P37

그런데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 중에는 나치대원으로부터 거의 무제한으로 술을 공급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스실이나 화장터에 배치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언젠가는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로 대치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요된 사형집행인의 역할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고, 대신 자기 자신이 그 희생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P37

하지만 나와 함께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언젠가는 자기에게 집행유예가 내려질 것이며, 만사가 잘 풀릴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P39

외투 속에 감춘 빵 봉지가 몸을 왼쪽으로 약간 기울게 했다. 하지만 나는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했다. 친위대원은 나를 살펴보면서 약간 망설이는 듯했다. 그는 자기 손을 내 어깨 위에 올려 놓았다. 나는 그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민첩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자 그는 내가 오른쪽을 똑 바로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내 어깨를 돌렸다. 그래서 나는 오른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 날 저녁에야 우리는 그 손가락의 움직임이 가지고 있는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최초의 선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첫 번째 판결이었던 것이다. 우리와 함께 들어온 사람의 90퍼센트는 죽음 행을 선고받았다. 판결은 채 몇 시간도 못 되어 집행되었다. 왼쪽으로 간 사람들은 역에서 곧바로 화장터로 직행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 화장터의 문에는 유럽 여러 나라 말로 목욕탕이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화장터로 들어가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비누 한 조각씩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다음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그 끔찍한 사건을 기록해 놓은 것은 너무나 많으니까.

 

이 부분의 묘사에서 감춘 빵 봉지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목숨과 바꿔야 하는 상황인데 왜 그 빵 봉지를 감추고 들어갔을까? 그 모험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었을까? 아직 현실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았더라면 그 왼쪽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빵을 감출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아직 그 빵 봉지는 목숨과 바꿀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P40

그 친구가 왼쪽으로 갔습니까?” “내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마 저기로 갔을 거요.” 이런 대답이 들렸다. “어디요?” 그러자 그가 손가락을 들어 몇 백 야드 떨어진 곳에 있는 굴뚝을 가리켰다. 굴뚝은 폴란드의 회색 빛 하늘 위로 불기둥을 내뿜고 있었다. 불기둥은 곧 불길한 연기구름으로 변했다. “당신 친구가 간 곳이 바로 저기요, 아마 지금쯤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쉬운 말로 사실을 얘기해 줄 때까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눈물이 났을까? 정말 눈물이 났을까? 굴뚝을 가리키는 손을 보고 허공으로 퍼져가는 연기를 보았을 때 눈물이 났을까? 울컥해진다.

 

P41

나치대원들도 모두 호의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우리의 손목시계를 보고 그것을 달라고 좋은 말로 설득하는 동안만 친절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아야 하잖아. 저렇게 좋은 사람들이 시계를 못 가질 이유가 없지. 언젠가는 이것이 보상이 되어 돌아올 거야.’

 

끝까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 정말 좋은 것일까? 아니면 비관적으로 볼까? 결국 내 목숨까지 털어 갈 것이야 하며 절망할까? 이 시점에서 어떤 마음이 더 좋을까? 그래도 낙관일 것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닥칠지라도 말이다.

 

P41

그때 나는 한 고참 수감자에게 비밀을 털어 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에게 살며시 다가가 외투 안 주머니에 있는 원고 뭉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이건 과학서적의 원고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지 잘 알고 있어요.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그것이 내가 운명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말도요. 그렇지만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원고를 지켜야 하거든요. 제가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것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 그는 이해하는 듯했다. 희미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서 번져나갔다. 표정이 처음에는 동정 어린 빛을 띠더니 점점 장난스런 웃음으로 바뀌었다. 이 웃음이 경멸과 비웃음으로 바뀌는 듯하더니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수용소 생활을 체험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도 통용되고 있는 말이다. 빌어먹을 놈 그 순간 나는 진실의 실체를 보았다. 그리고 심리적 반응의 제 1단계를 특징짓는 감정, 즉 충격을 경험했다.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 전부를 박탈당했던 것이다.

 

점점 목숨 이외의 모든 것들이 저울 위에 놓인다. 목숨과 저울질을 해서 아닌 것은 저울에서 떨어져 나가 없어진다. 하나 하나 결국은 모두 떨어져 나간다. 목숨이 가장 중요하므로. 하지만 어느 순간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보일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이 정할 것이다. 그 가치관을 따라 가보면 그 인생의 끝이 비록 수용소 일지라도 성자의 길이 있을 것이다. 목숨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 저울에서 목숨을 내려 놓은 사람들 말이다.

 

P42

샤워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은 우리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는 이제 벌거벗은 몸뚱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심지어는 털 한 오라기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그 동안의 삶과 현재를 연결시켜 주는 물건 중 과연 내게 남은 것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안경과 벨트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벨트는 나중에 빵 한 조각과 바꾸어 먹고 말았다.

 

P44

이런 일을 당하면서 우리가 그때까지 갖고 있던 환상이 하나 둘씩 차례로 무너져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섬뜩한 농담기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벌거벗겨진 자신의 몸뚱이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서로를 재미있게 해주려고 그야말로 안간힘을 썼다. 어쨌든 샤워기에서 정말로 물이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P45

그런데 이런 냉담한 궁금증이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도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이것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데,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런 마음가짐을 가꾸었다. 우리는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결말은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을 무척이나 궁금해 했다. 한번은 쌀쌀한 늦가을에 샤워를 하고 아직 물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밖에 서 있었는데, 우리는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몹시 궁금해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그 궁금증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우리 모두 감기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P46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것 말고도 이와 비슷하게 놀라운 일을 많이 경험했다. 나 같은 의학도가 수용소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우리가 공부했던 교과서가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이었다. 교과서에는 사람이 일정한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으면 죽는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정말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것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고, 이것 혹은 저것이 있으면 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아닐 수 있다. 그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 수 있다. 원시시대가 아니라도 고대에는 부족이든 씨족이든 나라이든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싸움에서 죽어야 했고 그 죽음의 길을 나서는 사람은 그 죽음의 의미를 알고 있으며 남은 자들은 그 의미를 기리며 살아갔다. 현대로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지키며 노력하고 희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윤택해지고 보다 나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망각하게 되면 그들의 노력이 헛되어 지고 그들의 어깨에 힘이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퇴색되고 가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슬픈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과 동료와 국민들 서로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되는 가족이고 서로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다.

 

P47

잠은 비록 몇 시간 동안이지만 우리에게 고통을 잊고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다 주었다.

 

P47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을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P48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만든다. 수용소에 있던 사람 중에서 잠깐 동안이라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과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나에게도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면서 겪는 고통이 자살을 생각하게 했다.

 

P49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 조차도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P51

죽음에의 선발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마 자네만은 예외일 거야.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솔직하게 얘기하는 걸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그런 다음 그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말했다. “자네들 가운데 다음 번 선별을 두려워할 사람은 바로 저 사람뿐이야. 그러니 모두 안심들 하게.” 그 말에 나는 웃었다. 그리고 확신하건대 누구라도 당시 나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나와 똑같이 웃었을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죽을 것을 알면서 농담을 던지며 죽을 자리로 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에 나온다. 회사에서도 어려운 일에 투입되면서 농담 한마디 던지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다. 멋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상황을 지배하는 사람일 것이다.

 

P51

혐오감.

레싱이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 정상적인 것이다. 이런 반응들은 며칠이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상대적인 무감각의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감정과는 별도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은 너무나 간절해서 그리워하는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말 정도가 된다.

 

P53

수용소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화장실을 청소하고 시궁창의 오물을 치우는 일에 배정되었다. 늘 있는 일이지만 땅이 울퉁불퉁한 들판이기 때문에 오물을 버리러 가는 동안 똥물이 얼굴에 튀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싫은 기색을 보인다거나 얼굴에 묻은 똥물을 닦아내려고 하면 카포가 가차 없이 주먹질을 해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일에 대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어디를 가던지 처음 하는 일은 제일 하찮은 일이다. 왜 그럴까? 그건 그 사람의 위치를 알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수용소는 더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멋모르고 날뛰는 사람을 빨리 그들의 규칙에 맞게 적응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아무 것도 모르고 나서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P54

그때 12살의 소년이 실려 들어왔다. 눈 속에 차렷 자세로 여러 시간 동안 서 있었거나 아니면 수용소 안에 맞는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밖에서 일을 해야 했던 것 같다. 그는 그것도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소년의 발가락은 이미 동상에 걸려 있었는데 의사가 집게로 시커멓게 썩은 살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정말로 혐오감과 공포, 동정심 같은 감정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죽어가거나 또 이미 죽은 것은 너무나 일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용소에서 생활한 지 몇 주가 지나면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P56

주검과 수프

시체를 끌고 간 사람이 그 계단 앞까지 갔다. 그는 힘겹게 자기 몸을 끌어올렸다. 그런 다음에 시체가 끌어올려졌다. 처음에는 발이, 그 다음에는 몸통이, 그리고 드디어 제일 마지막으로 괴상하게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머리가 올라갔다. 당시 나는 막사 맞은편에 있었다. 바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그릇을 들고는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창 밖을 보게 되었다. 방금 전에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일상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익숙함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권태란 참혹한 것이다. 그러니 나 자신에게 일상처럼 대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대하고 권태롭게 대한다는 것은 정말 참혹한 짓을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하루를 만들어 주자.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만들어 주자.

 

P57

죽음보다 더한 모멸감.

그런데 이렇게 줄이 삐뚤어졌다는 사실이 감시병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나는 내 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고, 감시병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내 머리통을 두 번이나 강타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나는 몽둥이를 휘두른 감시병이 내 옆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어른들이나 벌을 받는 아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인데 정작 어른들이나 벌을 받는 아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인데 정작 참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회사에서도 가장 대하기 힘든 사람이 모멸감을 느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자신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하였으므로 더 이상 나서서 더 좋은 생각과 더 나은 방향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무시 당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더 있고 싶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P58

나는 자갈을 가지고 철로를 고치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추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딱 한순간 숨을 돌리기 위해 일하던 손을 멈추고 삽에 몸을 기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운 나쁘게도 감시병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은 무례한 행동이나 주먹질이 아니었다. 넝마 같은 옷에 초라한 몰골을 하고 서 있는 나를 인간의 형체를 한 물건쯤으로 여겼는지 말은 몰론 욕지거리도 할 가치가 없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욕을 하는 대신 그는 장난하듯이 돌멩이 한 개를 집어 나에게 던졌다. 그 행동이 나에게는 맹수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 가축들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자기와는 닮은 점이 전혀 없어서 벌을 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짐승을 향해 하는 행동같이 느껴졌다.

 

P59

그는 유난히 무거운 도리를 들고 철로 위에서 절뚝거렸다. 자기가 넘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넘어뜨릴 것 같았다. 마침 그때 나는 도리를 옮기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그를 도와 주기 위해 달려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등으로 한 방이 날아왔다. 감시병이 나에게 심하게 욕을 하면서 내 자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나를 때린 그 감시병은 불과 몇 분전에 우리를 향해 멸시하는 투로 너희 같은 돼지들에게는 동지애가 전혀 없다고 욕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어떤 존엄도 인정하지 않을 때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일관성을 유지할 이유를 못찾을 것이다. 짐승을 대할 때 어제와 오늘과 내일 같은 말과 태도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일관된 입장과 태도를 보인다면 그 태도가 어떻든 간에 일단 나를 의식하거나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 태도의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인정 받지 못해 무시당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반대로 내가 어떤 사람을 귀히 여기고 인정한다면 나의 태도에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그 것으로 존중의 뜻을 보여야 한다.

 

P59

무감각한 죄수도 분노할 때가 있다.

내가 여기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아무리 감정이 무뎌진 수감자라고 할지라도 분노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P61

한 카포에게서 받았던 작은 혜택들

나에게 다행스러운 일 중의 하나는 우리 작업반의 카포가 내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막사에서 작업장까지 먼 길을 행진해 가는 동안 나는 그의 연애 이야기와 결혼생활의 불화에 얽힌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의 성격을 진단하고, 그에게 정신요법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나에게 고마워했으며, 그 때문에 나는 그로부터 작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일단 어디를 가도 부지런해야 하고, 어디를 가도 내세울 기술이 있어야 하고, 어디를 가도 호감을 사게 되면 밥은 굶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라도 쓸모가 있어야 세상이 자리를 내어주는 것과 같이 사람도 쓸모가 있어야 밥을 먹을 수 있다. 하물며 먹을 것이 부족하고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비굴한 것과 쓸모가 있어 쓰이는 것은 다른 것이다. 늘 쓸모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P62

눈 덮인 길을 행진하는 동안 신발 위로 얼음이 얼어버렸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미끄러졌고, 따라가던 사람들이 그 위로 엎어졌다. 그러면 행진이 일시적으로 정지되곤 했다. 하지만 그 상태가 그렇게 오래 지체되지는 않았다. 감시병 중 한 명이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넘어진 사람들이 빨리 일어날 수 있도록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앞줄에 설수록 도중에 행진을 멈추어야 하는 일이 적게 일어났다. 따라서 지체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아픈 발로 뛰어야 할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친애하는 카포 각하의 주치의로 임명된 나는 앞줄에 서서 일정한 속도로 행진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P64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도 일반 노동자들은 짧은 시간 안에 우리보다 몇 배나 많은 일을 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일반 노동자들이 하루에 빵 10온스 반(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것도 안 되는)과 묽은 수프 1 4분의 3만 먹고는 살 수 없다는 것, 일반 노동자들은 우리가 겪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지 않는다는 것, 다른 수용소로 보내졌거나 혹은 방금 가스실로 보내진 가족에 관한 소식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일반 노동자는 매일매일 시시각각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위협을 받고 있지 않다는 말을 하면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언젠가는 한 마음씨 좋은 감독에게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약 내가 당신으로부터 도로공사 일을 배운 시간만큼 짧은 시간 안에 당신이 나에게 뇌수술을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존경하겠소.” 그 말을 듣고 그는 씩 웃었다.

 

P65

수감자들이 가장 흔하게 꾸는 꿈

저녁이 되어 작업장에서 수용소로 돌아올 때 수감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 이제 또 하루가 지났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그와 같은 긴장상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필요성과 결합되어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밖에서 정신분석을 배운 적이 있는 동료 수감자들은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퇴행현상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정신세계가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그들의 소원과 욕망은 꿈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현대의 대기업에서도 이러한 퇴행 현상을 자주 목격한다. 일은 고차원적인 것을 하지만 그 마음은 위와 같을 때가 있다. “, 이제 또 하루가 지났군참으로 비참할 때가 있다.

 

P65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잠을 자면서 몸부림을 치는 것을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 특히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놀라면서 그를 흔들어 깨우려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순간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곳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니

 

어떤 사실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차라리 악몽이라도 꿈속에 있으면 현실을 잊을 수 있으니 말이다. 현대인은 죽음의 두려움은 없지만 생의 두려움을 갖고 있다. 노후의 두려움과 실직의 두려움. 자신이 행동하고 있는 데로 나이 들어서 되갚음 받을까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그 두려움을 떨치려 더 돈에 매달리고 뭔가 안전함이란 달콤한 유혹에 쉽게 빠지고 있는 것이다. 안전한 이웃과 가족이 없어지니 믿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늘 이동하니 자주 보고 따스함을 나눌 이웃이 얼마나 되겠는가. 부초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P66

먹는 것에 대한 원초적 욕구

하지만 나는 이렇게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간신히 우리 몸이 적은 양의 음식과 낮은 칼로리에 적응하게 되었는데, 맛있는 음식에 대해 그렇게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해서 내장기관에 자극을 주면 나쁜 결과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던 것이다. 먹는 이야기가 당장은 마음의 위안을 줄지 몰라도 생리적으로는 위험을 수반한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P67

마지막 남아 있던 피하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 놓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키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갔다. 우리는 모두 다음에는 누가 죽을 것인지,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언제 죽을 것인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징후가 보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 오래 못 갈 것 같아.” “다음 차례는 저 사람이군.” 우리는 이렇게 수근거렸다.

 

P68

매일 저녁 몸에 이를 잡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여기 있는 몸뚱이. 이제 정말로 송장이 되었구나. 나는 무엇일까? 나는 인간 살덩이를 모아 놓은 거대한 무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철조망 너머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막사에 갇혀 있는 거대한 무리의 한 부분, 그 구성원의 일부가 죽어서 뭄뚱이가 썩기 시작하는 바로 그 거대한 무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의미를 갖지 못한 것은 없겠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 의미를 실현시키는 것은 어렵다. 많은 의미들이 동시에 요구되지만 그 중 선택되는 것은 일부이고 그나마 실현되는 것은 더 적다. 나는 무엇일까? 내가 무엇이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를 하기 때문에 내가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P69

수용소 생활이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에는 하루에 한 번밖에 빵이 배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 빵을 어떻게 먹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끝도 없이 논쟁을 벌였다. 생각은 두 편으로 나뉘었다. 그 중 한 편은 그 자리에서 빵을 다 먹어 치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비록 잠깐 동안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도둑맞거나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다른 한 편은 배급 받은 빵을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편 중에서 나는 결국 후자에 들기로 했다.

 

P70

어느 날 아침에는 평소 꽤 용감하고 의연한 것으로 알려진 한 친구가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것을 보았다. 신발이 그가 신기에는 너무 작아 할 수 없이 맨발로 눈 위를 걸어 작업장까지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료가 슬퍼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다른 신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작은 빵 조각을 꺼내서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P70

영양실조가 수감자들의 정신을 먹는 것에만 집중시키는 현상만 초래했던 것은 아니다. 수감자들에게 성욕이 없었던 원인도 아마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초기의 충격이 성욕을 감퇴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모든 남자 수용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영양실조밖에는 없다.

 

P71

메마른 정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수감자들의 정서가 완전히 메마르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P73

수용소 안에서의 정치와 종교

전쟁 상황에 관한 소문은 대개 모순된 것들이었다. 이런 소문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면서 결국 수감자들의 마음을 신경과민 상태로 만들었다.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소문이 결국은 사람들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보다 더 분통터지는 사람들은 도저히 못 말리는 낙관주의자들이었다. 한편 일단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아주 진심으로 그 속에 빠져들었다. 믿음의 깊이와 활력이 종종 새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경탄과 감동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종교와 관련된 의식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막사 귀퉁이나 자물쇠가 채워진 컴컴한 가축운반용 트럭 안에서 행해지는 임시 기도나 예배였다. 넝마 같은 옷을 입은 채 멀리 떨어진 작업장에서 피곤하고 굶주리고 얼어 붙은 몸을 이끌고 막사로 돌아가는 바로 그 트럭 안에서 즉석 예배와 기도회가 이루어지곤 했다.

 

P75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는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은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 (그런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P77

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요? 제발이지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소.”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P77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사랑은 궁극적 목표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타인과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늘 타인을 위해 실현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삶의 의미가 풍요롭고 사랑함으로써 그 의미를 실현하게 되므로 삶이 구체적이고 목적이 있는 삶이 된다.

 

P78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P79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그때도 내 마음은 여전히 아내의 영상에 매달려 있었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나는 아내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만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서야 내가 깨달을 것이었는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P80

사실 그때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에 내 자신을 바쳤을 것이다. 나와 그녀가 나누는 정신적 대화 역시 아주 생생하고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라오.”

 

P81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수용소에서 일할 때도 우리들은 종종 옆에서 일하는 동료의 눈을 돌려 바바리아 숲의 키 큰 나무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풍경(뒤러의 그 유명한 수채화처럼)을 바라보게 했다. 그 숲은 우리가 대규모 비밀 군수품 제조공장을 짓는 데 동원되었던 바로 그 숲이었다.

 

P82

아니 어쩌면 당시 나는 내 고통에 대한 그리고 내가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닥쳐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으며,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수평선 저 멀리에 그림처럼 서 있던 농가에 불이 들어왔다. 바바리아의 동트는 새벽의 초라한 잿빛을 뚫고 불이 켜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얼어 붙은 땅을 파면서 서있었다. 감시병이 지나가면서 욕을 했고, 나는 또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점점 더 그녀가 곁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으며, 그녀는 정말로 내 곁에 있었다. 그녀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손을 뻗쳐서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녀가 정말로 저기에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가 파놓은 흙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P84

우리가 게걸스럽게 수프를 먹고 있는 동안, 한 사람이 술통 위로 올라가 이탈리아 아리아를 한 곡 불러 제켰다. 우리는 그 노래를 정말로 좋아했으며, 그에게는 곧 바닥을 긁어서 퍼주는’ – 이것은 콩알 몇 개가 더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프 두 국자가 상으로 돌아갔다.

 

P85

나는 대체로 칭찬에 너그러운 편이어서 만약 내가 그의 작업반에 배치되었다 하더라도 (사실 그 전에 하루 동안 그의 작업반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 하루로 충분했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 살인적인 카포에서 호의적인 측면에서 좋은 인상을 심어준다는 것은 아주 유용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죽어라고 박수를 쳤다.

 

나는 왜 이런 것이 가슴에 와 닿는지 모르겠다. 나의 생존에 대한 고단한 시간들이 나로 하여금 약간은 비굴한 것에 너그러운 것은 아닌지. 나는 오늘도 박수를 친다.

 

P86

막사 입구에 있는 고참 관리의 방에서 무언가 축하연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해 왁자지껄하는 소리 중에 흔해 빠진 노랫소리도 섞여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방이 조용해졌다. 곧이어 바이올린이 흐느끼듯 토해내는 애끓는 탱고 선율이 조용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너무 많이 연주되어서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곡이 아니었다.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흐느꼈다. 바로 그날은 어떤 사람이 24번째 생일을 맞는 날이었다. 그 사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다른 편 막사에 누워 있다. 어쩌면 겨우 몇 백 야드 혹은 몇 천 야드에 불과한 거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 갈 수 없는 그곳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내 아내였다.

 

그냥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깜깜한 밤 조용히 누워 있는데 베개를 적시는 그런 눈물이 있다. 아무런 흐느낌도 없고 요동치는 가슴도 없지만 그렇게 주르륵 흐르는 눈물이 있다. 많은 이야기를 한 줄기 눈물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전등불이 꺼진 거실의 소파에서 창가에 흐르는 달빛을 볼 때 불현듯 눈물이 흐를 때가 있었다. 무엇 하느라 그리 살았니 하며 누군가 말을 걸어 오는 걸 느꼈다. 앞으로는 어떻게 살거니 하고 물어 온다.

 

P86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 준다.

 

P87

때로는 다른 동료들이 미래와 관련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풀려난 후 어느 날 저녁 초대를 받았는데, 자기가 풀려났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는 그 집 안주인에게 이렇게 부탁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밑바닥에서 퍼주세요

 

제발 밑바닥에서 퍼주세요. 회사에서 세끼를 다 해결하는 나로서는 가끔 마음에 와 닿는 말이다. 맛있는 반찬이 있거나 하면 조금 더 주세요 라고 한다. 배고픔과 영향실조 때문은 아니지만 그럴 때가 있다. 밑바닥에서 퍼주세요.

 

P88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번 유추를 해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 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P89

도착 후 인원점검을 하면서 한 사람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없어진 사람을 찾을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차가운 바람과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는 막사 안에서 발견 되었다. 피곤에 지친 나머지 그만 잠에 곯아떨어진 것이다. 그 다음 점호는 기합 행렬로 바뀌었다. 오랜 여행의 긴장도 풀지 못한 채 우리들은 밤을 꼬박 새우고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꽁꽁 언 채로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행복했다. 이 수용소에는 굴뚝이 없고, 또 아우슈비츠는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 다양한 보고 준비와 제안서 작성, 설계 문서 작성, 회의, 교육 등 다양한 일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런 일 중에서도 피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하면 고된 것도 있고 어려운 것이 있는가 하면 하기 싫은 일도 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나마 저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다라고!

 

P91

한번은 운 나쁘게도 내가 우연히 그런 작업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약 두 신간(그 동안 감독이 줄곧 나를 주시해서 보고 있었다) 만에 공습경보가 울려 작업이 중단되고, 그 후 작업조가 다시 편성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지쳐서 죽었거나 아니면 죽어가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대형수레로 실려 수용소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이렌 소리가 가져다 주는 안도감이 어떤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한 라운드가 끝나는 종소리를 듣고, 마지막 순간에 넉 아웃 될 위기를 모면한 권투선수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참 심각한 회의에서 온갖 질타가 난무할 때 갑자기 상사에게 전화가 와서 회의가 중단될 때 그런 심정이다.

 

P92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 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 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한번은 즐거움에 대해 일종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았다. 그 결과 지난 수준 동안 나에게 즐거운 순간이 딱 두 번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일을 마치고 난 후, 취사실에 들어가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요리사 F 앞으로 난 줄에 설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우리와 같은 수감자 출신인 요리사 F는 커다란 국 냄비를 앞에 놓고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내미는 그릇에 수프를 퍼 넣어 주고 있었다. 그는 수프를 퍼주면서 그릇을 내민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 유일한 요리사였다. 자기 친구나 고향 사람에게는 몇 알 안 되는 감자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위에서 살짝 걷어낸 희멀건 국물만 주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수프를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자기가 아는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우선시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자기 친구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해서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정말로 정직하게 그런 일을 하지 않을 확신이 서지 않는 한 그런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P95

이 모든 일들이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보는 순간 마음 속에 떠 올랐다. 나는 이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들려 주었고, 그때서야 그는 내가 그 사진을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어쩌면 전혀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P95

나는 내가 작업반에 들어갈 경우, 짧은 시간 안에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내 동료들을 돕다가 죽는 것이 그 전처럼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살면서 죽을 자리를 찾아 간다는 것이 제대로 죽을 자리를 알면 그 죽을 자리에 맞게 살게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로서 죽고, 무기를 쓰는 사람은 무기를 쓰다가 죽는다. 고대에는 생이 곧 죽음이었다. 이 말은 항상 목숨을 걸로 살았다는 것이고 생을 걸로 삶을 펼쳤다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세상의 시스템의 일부분에 안주하며 생을 걸며 살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죽을 자리를 모른다. 죽을 자리를 모르니 늘 방황하는 것이다. 무엇이 내 인생이지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P96

생존을 위해 군중 속으로

수용소에서는 자기 목숨이나 친한 친구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와 관련이 없는 그 모든 것들이 가치를 일었다는 얘기를 이미 했을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다른 모든 가치가 희생되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가치를 위협하고, 또 그것을 의혹 속으로 내던져버린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지닌 가치가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계,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고, 그를 단지 처형(처음에 그를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다가 육체의 마지막 한 점까지 이용하도록 계획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계, 이런 세계에서 개인의 자아는 끝내 그 가치를 상실할 수 밖에 없다.

 

P97

떼를 지어 무리 한복판으로 슬금슬금 들어가려는 양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대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 행렬의 양 옆과 앞뒤에 있는 감시병들의 주먹질을 피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행렬의 한가운데는 매서운 바람을 덜 맞을 수 있다는 추가적인 이점도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글자 그대로 군중 속에 자기 자신을 파묻으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일은 대오를 형성할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일이 수용소 안에서 가장 절박한 자기보존의 법칙에 따라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 법칙은 될 수 있는 대로 눈에 띄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치대원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항상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P98

나 혼자만의 공간

수용소에서도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었다. 잘 알다시피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끄는 강요된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기를, 혼자서 사색에 잠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은 자기만의 개인적인 공간, 혼자 있는 고독을 열망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요양소로 옮긴 후, 나는 한번에 5분 정도 혼자 고독을 즐기는 흔치 않은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관리자의 위치가 되면 계속되는 회의와 업부 지시, 업무 코치, 결과 검토 등으로 계속 사람과 일을 하게 된다. 실무자일 때는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면 되므로 혼자 일할 때가 많지만 관리자는 그럴 수 없다. 가끔 어떤 순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회사에서 혼자 있는 다는 것은 일을 하지 않고 잠시 쉬면서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데 장소가 마땅치 않다. 혼자 영혼을 쉬게 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혼자 먹는 경우가 가끔 있고 빈 회의실을 찾아가 혼자 앉아 있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안될 경우 화장실을 찾아 갈 경우도 있다. 가끔 정신이 쉬고 싶을 때가 있다.

 

P98

내가 일하는 막사에는 약50명의 정신착란증 환자가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 막사 뒤 수용소를 두 겹으로 둘러친 철조망 한 귀퉁이에 아주 조용한 곳이 있었다. 이곳에는 시신 여섯 구(수용소에서는 하루에 평균 이 정도의 사람이 죽는다)를 보관하기 위해 기둥 몇 개와 나뭇가지를 엮어서 세운 임시 천막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배수관으로 통하는 구멍도 있었다. 나는 일이 없을 때마다 이 구멍의 나무 뚜껑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곤 했다. 그냥 앉아서 꽃이 만발한 초록빛의 산등성이를 바라보거나 철조망의 마름모꼴 그물눈 안에 들어가 있는 먼 바바리아의 푸른 언덕을 바라보았다. 나는 간절하게 꿈을 꾸었다. 그러면 내 마음은 북쪽에서 북서쪽, 나의 집이 있는 방향을 날아갔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구름뿐이었다.

 

P100

번호로만 취급되는 사람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번호뿐이다. 오로지 죄수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글자 그대로 번호가 되었다.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번호의 생명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 번호의 이면에 있는 것, 즉 그의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된다. 그의 운명과 그가 살아온 내력 그리고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P102

운명의 장난

아우슈비츠에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을 위한 하나의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그 후 내 동료들도 모두 이 규칙을 따랐다. 나는 대체로 모든 종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딱 꼬집어서 질문을 받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만약 누군가 내 나이를 물으면 나는 나이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내 직업을 물었을 때는 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그냥 의사라고만 대답했다.

 

이 규칙은 매우 좋은 것이다. 모든 종류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또 없다. 특히 대한민국 사람들은 틀린 답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답이 확실하지 않으면 말 자체를 하지 않는 희귀병에 걸려 있다. 누구도 답을 모르는데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으니 답 찾기가 참 요원한 경우가 있다. 나의 입장에서도 질문에 성실히 답하는 것이 참 어렵다. 하지만 모른다, 아는 바가 없다에 먼저 익숙해지면 그 다음은 쉬운 것 같다. 어차피 대답을 회피하면 상대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명확하게 모른다는 것을 명확하게 답하는 것이 더 좋고 나도 떳떳하다.

 

P103

병든 사람을 요양소로 호송하게 될 때 내 이름(즉 내 번호)이 리스트에 올라갔다. 의사가 몇 명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적지가 요양소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몇 주 전 비슷한 호송계획이 있었는데, 그때도 역시 사람들은 호송되는 환자들이 모두 가스실로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수용소 측에서 호송될 환자 중에서 자원해서 야간작업반에 가겠다는 사람들은 호송자 명단에서 빼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82명의 사람들이 자원을 해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15분 후, 환자 호송계획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82명은 야간 작업반 리스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다수의 환자들에게 야간작업을 한다는 것은 곧 2주 안에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P105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네가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 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 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 번째로 내가 그녀와 함께 했던 그 짧은 결혼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 주게.” 오토.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살아있나?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네 아내를 다시 만났나? 그리고 기억하나? 자네가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자네에게 내 유언을 한마디 한마디 외우게 했던 것을.

 

P106

테헤란에서의 죽음

이것이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한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승낙을 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지요.”

 

아무리 좋은 결정을 해도 죽을 사람은 죽는다. 확률적인 선택의 결과인가? 참 덧없이 죽는 사람이 많다.

 

P107

운명을 가르는 결정

때로는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생과 사를 가르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때도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을 내려 주기를 원했다. 이렇게 어떤 일의 실행을 회피하는 태도는 수감자가 수용소에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몇 분 동안 이런 문제는 항상 몇 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는 지옥의 지문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탈출을 해야만 할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까?

 

매 순간 결정해야 한다. 늦은 밤 신호등은 이제 점멸등으로 바뀌어 주황색이 깜박 깜박한다. 건널목은 건너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 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할까? 많은 사람이 이 순간에 무심하게 건널목을 건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위험을 감지하고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건너되 빨리 오는 차가 없는지 살피고 빨리 건너는 것이 방법이다. 그런데 위에 이어폰을 끼고 느긋하게 걸어가는 것은 정말 자신의 목숨에 너무 무책임한 것 같다.

 

P109

나는 마지막 회진을 빨리 끝냈다. 환자들은 막사 양쪽에 깔아 놓은 널빤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나는 환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나와 같은 고향 출신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심각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정말로 살리고 싶었다. 나는 탈출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내 고향 친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어쩌면 내가 약간 초조한 기색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도 나갈 건가요?” 나는 부인했다. 하지만 그의 슬픈 눈초리를 피하기가 힘들었다. 회진이 끝나고 나서 나는 다시 그에게 갔다. 그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나를 맞았다. 어쩌면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친구에게 함께 탈출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나를 엄습했던 그 불편했던 감정이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갑자기 운명을 내 자신의 손으로 잡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막사 밖으로 뛰어나가 친구에게 그와 함께 탈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연한 태도로 환자 곁에 그대로 남기로 했다고 친구에게 말하자마자 그 불편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막사로 돌아가 고향 친구의 발끝에 앉아서 그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아마 남지 않고 떠난다고 했으면 그는 돌아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 것이며 남은 생에서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견디고 살아갈까? 결국 마음 편한 데로 살아야 하는 것이 맞는 말일 지도 모른다. 뭔가 마음이 불편한 결정을 하게 되면 두고 두고 마음에 남아 자신을 힘들게 한다. 결국 자신의 존엄도 깎아 먹고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일로 커질 수도 있다. 자책이 그것이다.

 

P112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

친구가 돌아온 바로 그 순간 수용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적십자 마크가 그려진 번쩍번적하는 알루미늄 차가 천천히 점호장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제네바에 있는 국제적십자사의 대표가 도착한 것이다. 수용소와 수감자들은 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는 수용소 가까이에 있는 농가에 숙소를 정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누가 탈출을 걱정하겠는가? 차에서 약 상자가 내려지고 담배가 공급되었다. 우리는 사진이 찍혔으며, 기쁨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제 전선을 향해 달려가는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P114

엇갈린 운명

그로부터 여러 주가 지난 후, 우리는 이 마지막 순간에도 운명의 신이 우리를 우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는 인간의 결정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그 것이 특히 생사와 관련된 문제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우리 수용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수용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그날 밤 자유를 향해 간다고 믿었던 우리 친구들은 트럭에 실려 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막사 안에 갇힌 채로 불에 타 죽었다. 사진으로도 군데 군데 불에 탄 동료들의 시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또 다시 테헤란에서의 죽음을 생각했다.

 

늘 경계에서 일이 발생한다. 늘 변화의 시점에 문제가 생긴다. 늘 그 지점에 방심하게 된다. 상대는 모든 오점을 지우려 할 것이다. 상대는 변하지 않은 것이다. 단지 상황이 변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태도의 변화에 진정성은 결과를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것은 의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므로 끝까지 치열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회사의 경영도 이와 같이 경쟁사들의 태도의 변화, 전략의 변화가 내가 따라가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결정은 절대적은 자사의 몫이다. 경쟁사는 경쟁사의 길을 갈 뿐이다. 그러니, 매 순간 치열하게 판단할 뿐이다.

 

P115

무감각의 원인

물질적인 요인 외에 정신적인 요인도 있었는데,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대단한 사람이었거나 혹은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수감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계층이 하락했다는 것을 느꼈다.

 

부장 승진 후에는 임원이 되거나 만년 부장이 되거나 길이 갈린다. 극 소수의 인력만이 임원이 되는 회사의 속성상 많은 만년 부장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느 순간 임원 대상자 list에서 제외되는 것을 느끼는 고참 부장들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계층이 하락하는 것을 상대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회사에서 영향력 행사에 약간의 두려움과 주저함을 갖게 된다. 어떤 사람은 보신의 길을 걷기도 한다. 나서지 않고 주어진 일만 하고 변화에 앞에 서지 않고 늘 숨어서 일하는 사람이 된다.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 답답함에 이직이나 전배를 고민하게 된다.

 

P116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질투와 불평을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이것을 표현하는데, 이것이 때로는 농담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번은 어떤 사람이 한 카포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상상해 봐! 내가 알고 있기로 저 사람은 그 전에 은행의 총재에 불과했거든, 그런데 지금 저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으니 얼마나 출세한거야!”

 

P118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에게서는 무감각 증세가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전혀 반응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때로는 이것조차 실패로 끝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을 때리지 않기 위해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 무감각한 것을 보면, 특히 그 때문에 위험한 상황 (예를 들어 검열이 임박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보면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다.

 

P119

인간의 정신적 자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제수용소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수감자들이 보인 반응이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는 이론을 입증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자기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단 말인가? 이론은 물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을 통해서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있다는 것이다.

 

자유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늘 책임을 수반한 무엇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자유라고 명징하게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이 선택의 결과는 모두 그 선택을 한 사람의 몫이다. , 책임이란 것이다. 나의 인생이 그러하였고 다른 모든 인생도 그러하다. 선택과 책임이 결국 자유라는 것이다. 선택을 해 놓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언젠가는 인과응보를 받게 될 것이다. 비록 그 세대가 지나갈 지라도 말이다.

 

P120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해서 나아가는 것만이 자유를 누리는 길이다. 그리고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매 순간 선택해야 하는 것이 본능으로 반응하는 짐승과 다른 인간의 길이기 때문이다.

 

P121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내 고통은 내가 선택한 길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길의 의미, 그 고통의 의미 또한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찾은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찾은 의미가 자신이 선택한 길 위의 고통에 의해 실현될 때 그 고통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결국 자신이 찾은 의미가 참 의미가 있어야 되는 것이고 그 의미는 자기 혼자만의 의미가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의미 있는 일이면 비록 작은 일을 해 내었다고 하여도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볼 때 선조들께서 대의명분을 중요시 한한 것이 틀린 것은 아니나 그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가 역사의 평가 대상이 된 것이다. 그 결과 대의명분을 중요시 하는 것 자체가 매도되어 온 것이니 이 또한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P121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가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P122

시련의 의미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 목적이 있다. 반면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 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도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한다.

 

죽음은 인생의 완성이다. 그러니 어디서 그 완성을 이끌어 낼지 늘 고심하고 고심해야 한다. 느닷없이 그 인생을 마무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몸 둘 곳을 알아 죽음이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비명횡사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예전처럼 목숨을 걸고 할 일이 많이 않다. , 전쟁 상황이 아닌 경우 대부분 산업 안전 기준에 따라 인권을 보호해 나가는 추세이다. 이러한 보호 아래 사람들은 안전하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좀더 창조적인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이러한 안전한 환경은 때로는 안전 불감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평소 모든 것이 너무 안전하기 때문에 안전에 대한 불감증이 생기고 안전에 대한 불감증은 죽음에 대한 망각을 초래하는 면도 있다. 죽음에 대한 망각은 결국 내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놓치게 만들고 공허한 일상으로 삶을 채워나가는 무기력함을 보이게 한다. 매 순간의 삶과 죽음, 매 순간의 선택이 곧 인생이며 매 순간의 선택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엄을 얻고 인격을 높일 수 있는 과정이 될 것이다.

 

P123

병든 사람의 경우, 특히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언젠가 병에 걸린 한 젋은이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편지에서 젊은이는 친구에게 방금 자기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수술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그 젊은이는 언젠가 자기가 본 영화 이야기를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아주 용감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기다리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영화였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죽음을 그렇게 의연하게 맞는 것이 인간으로서 참 위대한 성취였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제 운명이 자기에게 그와 똑 같은 기회를 주었다고.

 

P125

이 젊은 여자는 자기가 몇 일 안에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녀는 아주 명랑했다. “나는 운명이 나에게 이렇게 엄청난 타격을 가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그 전에 나는 제멋대로였고, 정신적인 성취 같은 것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녀는 창밖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해다. “여기 있는 이 나무가 내 외로움을 달래 주는 유일한 친구랍니다.” 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밤나무 가지 한 개와 그 위에 피어 있는 꽃 두 송이였다. “저는 저 나무와 자주 이야기를 나눈답니다.”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한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헛소리를 하는 것일까? 환각에 빠졌나?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나무가 대답을 하는지 물었다. “물론이지요.” 나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녀는 말했다. 나무가 이렇게 대답해요. 내가 여기 있단다. 내가 여기 있단다. 나는 생명이야. 영원한 생명이야.”

 

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류의 긴 여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가끔 던지는 질문이다. 긴 인류의 역사에서 오늘은 다가올 시간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무엇을 위해 나는 또 무엇을 하는가? 이런 막연한 질문에 질문. 답은 없지만 계속 던져지는 질문이 있다. 앞으로 백 년, 앞으로 천 년 뒤에는 국가라는 의미의 조직 체계가 남아 있을까? 없어 진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살아갈까? 무엇이 사람을 살게 만들까? 결국 신의 무엇을 실현 시키기 위해 인류가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의미는 또 무엇일까? 인류가 나타나서 사라지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구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지구와 같이 사라질 것이다. 많은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에서 다루는 주제이지만 아직 답은 없다. 결국 지구를 떠나는 것이 대체로 결론이다. 떠나는 이유는 대부분 황폐해진 지구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전제를 달고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른 방향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으로서 인류로서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새로운 시대를 창조해 낸다면 그 시대를 다른 행성에게도 전파하기 위해 우주로 나가는 시나리오는 없을까? 다른 행성의 입장에서는 외계인일 뿐인 우리 지구인의 그러한 간섭이 필요할까? 어쩌면 우리 지구에 그러한 경지를 깨달은 다른 우주의 외계인들이 그저 들러보고 있지는 않을까? 간섭을 피하되 도움을 주고자 하는 방향으로 뭔가를 아무튼 현재를 초월하는 가치의 발견과 이의 전파와 실현을 할 수 있다면 전 지구적인 평화와 조화로운 삶이 인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이를 위해 오늘 내가 할 일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인류 미래에 대한 꿈은 누가 꾸고 있을까?

 

P127

우리는 언제 석방되는지를 몰랐다(내가 있던 수용소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형 기간은 불확실했으며, 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저명한 연구전문 심리학자는 강제수용소의 이런 삶을 일시적인 삶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한마디 더 붙이자면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127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현상을 볼 수 있다.

 

P128

수감자들 역시 기이한 시간 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바르게 지나간다. 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얘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이었던가!

 

P129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P130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P131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는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P131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 일으킨다.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병리적 상처를 정신요법이나 정신 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수감자들 중에 몇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스스로가 그런 목표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P132

나는 우리의 누추한 생활과 연관된 끊임없이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게 될까? 만약 특별배급으로 소시지가 나온다면 그것을 빵과 바꾸어 먹을까? 2주일 전에 상으로 받았던 담배 한 개비를 수프 한 그릇과 바꾸어 먹을까? 한쪽 신발끈이 끊어졌는데 끈을 대신할 철사를 어디서 구하지? 시간 안에 작업장에 가서 평소에 내가 일하던 작업반에 길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 다른 작업반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고약한 감독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매일 긴 행렬에 끼어서 작업장에 가지 않고 대신 수용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 주는 카포는 없을까? 그 카포와 잘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다가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서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두려움은 그 두려움의 실체를 모를 때 더욱 커진다. 제대로 알게 되면 두려움도 없어진다. 고통도 제대로 보고 제대로 느끼면 무엇이 고통의 원인인지, 그리고 그 고통을 느끼고 있는 자신은 왜 그러고 있는지 그 의미를 알게 되면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산을 오를 때 고지 앞에서 가장 힘들 듯이 그러한 고통도 나의 인격과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이 될 뿐일 것이다.

 

P133

미래 그 자신의 미래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믿음은 늘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인 것은 틀림 없다. 미래에 대한 믿음 불확실한 시간들이 확정된 과거가 되기 위해 매 순간 내리는 결정들은 결국 미래를 믿느냐 못 믿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힘은 믿는 것에서 비롯된다. 믿지 못하면 힘이 빠진다. 날이 선 사람은 그 날의 모양이나 방향이 어찌되었든 믿음이 있다. 잘못된 믿음일 수 있겠으나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은 힘이 있다. 잘못된 믿음은 잘못된 힘을 만들고 잘못된 영향을 줄 수 있다. 결국 잘못된 믿음을 만드는 잘못된 가치관과 의미의 해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대부분 잘못된 믿음은 구체적이지 못하고 대략 두루뭉실하여 세세히 따지면 그 믿음이 무너지게 마련이다. 가슴을 건드려 동질감과 편안함을 주지 못하고 머리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고 대부분 두려움만을 전해서 사람을 꼼짝 못하게만 할 뿐이다.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것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들로 이루어 진다는 것은 그 것들이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고 그 이해가 믿음으로 이어 질 수 있는데 그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실현하는 과정에 힘이 생기고 하나 하나 구체적인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이다.

 

P135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인간의 정신상태 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 와 육체의 면연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내 친구의 죽음을 오게 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기대했던 해방의 날이 오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몹시 절망했으며, 잠재해 있던 발진티푸스 균에 대항하던 그의 저항력이 갑자기 떨어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살고자 하는 의지는 마비되었고, 그의 몸은 병마의 희생양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꿈 속의 목소리가 했던 말이 맞기는 맞았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믿음의 상실은 힘의 상실이다 힘의 마음의 힘은 물론 육체의 힘을 상실하게 만든다. 육체는 힘을 상실하게 되면 곧 소멸하게 되는 자연의 산물이므로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믿음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을 동반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 구체적인 실천들이 그 믿음을 더욱 곤고히 하고 더 믿음의 힘을 더욱 키우게 된다. 믿음에 수반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없는 때는 그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 , 잘못된 믿음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막연한 믿음을 통해 현실을 도피할 뿐 미래의 믿음을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P137

살아야 할 이유

니체가 말했다.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상황도 견딜 수 있다

슬프도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 모든 충고와 격려를 거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기대와 믿음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일까? 믿음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대할 것이다. 과연 그 기대를 해도 되는 것인가? 그 기대가 무너지면 믿음도 무너지는 것인 것? 믿음을 시험하는 많은 것 중에 기대를 무너뜨려서 시험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믿음 갖게 하는 것은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가는 길에 실천에 대해 기대만큼의 결과를 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갈린다. 믿음을 유지 하는 사람과 믿음을 저버린 사람으로 말이다. 이때도 우리는 판단해야 한다. 그 믿음을 유지하려면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막연한 믿음만 남아 있는지? 계속 구체적인 실현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때 그 믿음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P138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를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락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 주는 글로써 이 책 전체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닫는 부분이다.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시대적인 사명일 수 있고, 가족에 대한 책임일 수 있고, 일터나 지역사회에서 맡은 소명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기대에 부응하는 것에 우리의 삶이 있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성인과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신의 삶이 요구하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분들이다. 어느 기대를 선택할 지는 그 사람 사람의 능력과 포부와 사랑과 뜻이 다를 수 있지만 모두 삶이 요구하는 기대를 부응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 온 것이다. 삶이 어지럽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를 보면 정작 다른 사람이나 직장, 가족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기대에 아무 것도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결국 자신을 몰라서가 아니라 과도한 기대가 있을 수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자신이 그 기대들을 외면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어떤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P138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 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P139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오래 전에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단계를 통과했었다. 그 순수한 물음은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 것으로 삶을 이해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삶과 죽음, 고통 받는 것과 죽어가는 것까지를 폭넓게 감싸 안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시하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낸 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140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 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141

자살 방지를 위한 노력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요법은 일종의 인명 구조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말하자면 자살 방지책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금하는 엄한 규칙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목을 매 자살하려는 사람의 목에 달려 있는 줄을 끊는 것도 금했다. 따라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P142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P143

행동을 통해 즉각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대개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인 법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말이 더 효과적인 경우도 있다. 어떤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에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의 폭이 넓어졌을 경우이다. 나는 어떤 외부적인 조건으로 이런 정신적 수용력이 넓어졌을 때, 우연히 막사에 있던 모든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정신요법을 시도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P145

나는 단순한 위로의 말부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여섯 번째 겨울을 맞지만 지금 유럽의 정세를 살펴보면 우리 처지가 그렇게 최악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이것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P147

나는 누군가가 친구나 아내, 산 사람, 혹은 죽은 사람, 혹은 하느님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죽어야 하는지를 알기를 바란다고.

 

P150

수용서의 여러 인간 군상

어떤 사람이 수감자였는가 아니면 감시병이었는가 하는 단순한 정보만 가지고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인간의 자애심은 모든 집단, 심지어는 우리가 정말 벌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집단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과 집단 사이의 경계선이 서로 겹쳐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천사, 저 사람들은 악마라고 부르면서 문제를 단순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수용소에서 그렇게 나쁜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수감자들을 친절하게 대했던 감시병이나 감독은 대단한 인간적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같은 동료 수감자를 괴롭힌 사람의 비열함은 정말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P152

이것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으며, 고매한 인격을 가진 부류와 미천한 인격을 가진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를 배울 수 있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P152

강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영혼을 파헤치고, 그 영혼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성에서도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인간 본연의 특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수용소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P153

해방의 체험

자유. 우리는 스스로 몇 번이나 이 단어를 되뇌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얼마나 자주 이 단어를 입에 올렸는지 이제는 그것이 의미를 잃고 말았다. 현실이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P155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이웃에 있는 친절한 농부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 갔는데, 거기에도 그는 먹고 또 먹고 그리고 커피까지 마셨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혀를 풀리게 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고 도 했다. 몇 년 동안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알았을 것이다. 그에게 말이 필요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는 것을.

 

P156

자유를 찾은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수용소 근처에 있는 시장으로 가기 위해 꽃들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 시골길을 걸었다. 종달새가 하늘로 날아올랐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주변 몇 마일 안에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대지와 하늘, 종달새의 환호 그리고 자유로운 공간만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런 다음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은 물론 이 세상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단 한가지만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그때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말을 되풀이했는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바로 그 순간부터 새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는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어느 순간 깨달음은 찾아 온다. 멈춰 서서 그 순간을 음미해야 한다. 그러면 그 순간 다음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삶은 죽는 것이다. 매번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인생이 깨달음이 주는 인생인 것이다.

 

P156

해방 이후 나타난 현상들

그렇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받았던 사람에게는 자유를 얻은 후에도 그전과 똑 같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그런 정신적 억압상태에서 갑자기 벗어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위험은 정신위생학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잠수병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 속의 잠함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아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P158

이런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평범한 진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진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귀리 수천 포기를 잃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P159

비통과 환멸

비통함은 그가 살던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가 부딪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그저 어깨를 으쓱하거나 상투적인 인사치레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는 점점 비통해지면서 자기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겪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거의 모든 곳에서 거의 똑 같은 말을 듣는다. “우리는 그것을 몰랐어요.” 그리고 우리도 똑같이 고통을 받았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저 사람들은 정말로 나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일까?”

 

환멸을 경험하는 것은 이와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 환멸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토록 잔인해 보이는 운명 그 자체이다. 몇 년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의 절대적인 한계까지 가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련에는 끝이 없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을, 더 혹독하게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생이 끝나지 않는 한 시련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시련이 멈추지 않는 다는 것은 그 뜻이 큰 탓에 있다. 그 뜻은 생의 의미 이므로 그 생이 인류에 주는 영향 또한 클 것이다. 십자가는 그런 의미에서 인류에 주는 의미가 큰 것이다.

 

P160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갑진 체험은 모두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P167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동시에 로고테라피는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는 악순환 형성과 송화기재를 약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집중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P167

실제로 로고테라피에서는 환자가 삶의 의미와 직접 대면하게 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렇게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우치도록 만드는 것이 정신병을 극복할 수 있는 환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P168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

인간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지 본능적인 욕구를 2차적으로 합리화시키기 위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의미는 유일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반드시 그 사람이 실현시켜야 하고, 또 그 사람만이 실현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자신의 의지를 충족시킨다는 의의를 갖게 된다.

 

P169

인간은 그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위해 살 수 있는 존재이며, 심지어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P170

실존적 좌절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의지도 좌절을 당할 수 있다. 이것을 로고테라피에서는 실존적 좌절이라고 한다. 여기서 실존적이라는 단어는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1) 존재 그 자체, 즉 인간 특유의 존재방식 2) 존재의 의미 그리고 2) 각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 즉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P171

누제닉 노이로제

누제닉 노이로제는 욕구와 본능의 갈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 원인 중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한다.

 

P172

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다 신경질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통도 역시 모두 다 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그 고통이 실존적 좌절 때문에 생긴 경우에는 그것을 신경질환 증세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성취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거나 아니면 그런 것이 과연 있을까 하고 의심하거나 간에 이런 현상이 병 때문에 생긴다거나 혹은 이것 때문에 결국은 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나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실존적 좌절 그 자체는 병적인 것도 병원적인 것도 아니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절망도 실존적 고민이지 정신질환은 아니다. 후자의 견지에서 전자를 해석하다 보면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절망감을 한 움큼의 신경 안정제로 해결하려고 하게 된다. 하지만 의사의 역할은 이런 것이 아니다.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위기를 통해 그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 주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그렇게 하려면 환자의 실존 안에 숨겨져 있는 로고서를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상당한 분석과정을 필요로 한다.

 

P174

환자가 자기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 정말로 소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인간을 그저 충동과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쾌락을 얻거나 서로 갈등하고 있는 이드와 자아, 초자아를 절충시키거나 혹은 사회와 환경에 그저 순응하고 적응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주된 관심사가 어떤 의미를 성취하는데 있다고 보고 있으면, 그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석과 구별된다.

 

P174

정신의 역동성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기보다는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라는 니체의 말에는 이런 예지가 담겨져 있다.

 

P175

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아우슈비츠에 처음 잡혀 갔을 때 나는 출판을 위해 집필 중이었던 원고를 압수당했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 장은 인간에서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P175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그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 동안 숨어 있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긴장이 없는 상태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나는 정신건강에 대해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P176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P177

실존적 공허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의 일면을 잃게 되었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그런 동물적 본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낙원에서나 얻을 수 있는 그런 안전함은 이제 영원히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되었으며,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P177

여기에 덧붙여서 근래에 들어 인간은 또 다른 상실감을 맛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동안 자기 행동을 지탱해 주던 전통이 빠른 속도로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 본능도 없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전통도 없다. 어떤 때는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 (전체주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P 178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고민과 권태의 양 극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실제로 요즘은 고민보다는 권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동화 과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여가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애석한 것은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 얻게 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데에 있다.

 

P179

게다가 이런 실존적 공허는 가면을 쓰거나 위장을 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권력욕으로 그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욕인 돈에 대한 욕구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실존적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성적 탐닉에서 그 보상을 잦으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P181

삶의 의미

인간의 실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각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되어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P181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

 

P182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이 말처럼 인간의 책임감을 자극하기에 좋은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첫째 현재가 지나간 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둘 째, 그 지나간 과거가 아직도 변경되고 수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교훈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유한성은 물론 그가 자신과 자신의 삶으로부터 성취해낸 성과의 궁극성과도 대면하게 만든다.

 

미래를 믿고 그 삶의 의미를 찾고 구체적인 실천을 할 때 우리는 매 순간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 결정을 내리는 순간은 길지 않으나 그 결과는 영원하기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은 그 순간의 결정에 묵직한 저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의미를 위해 나아가는 순간 순간이 되게 이끌어 줄 것이다.

 

P183

로고테라피 치료사의 역할은 환자의 시야를 넓히고 확장하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잠재되어 있는 의미의 전체적인 스펙트럼을 환자가 인식하고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잇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취해야 할 의미 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남을 향하는 모든 것은 고귀하다. 나를 향한 모든 것은 추하다. 현대라는 시대가 추해지는 것은 실체도 없는 나를 위해 시간과 돈과 자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개인들이 소비 대상으로서 지구 만물의 운용을 모두 이 개인의 소비에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소비가 커지는 것이 경제가 발전하는 것이 자본주의 대 명제인데 그 대상이 개인이다 보니 점점 더 추해지는 것이다. 개인이 남을 위해 돈을 쓰게 되면 어떻게 될까? 지금과 같은 무책임한 돈을 쓸까?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 남을 위해 돈을 쓴다면 아마 우선 순위가 달라 질 것이고 그로 인해 자원의 흐름이 변하게 될 것이고 낭비도 줄고 더 효율적으로 세상은 돌아 갈 것이다. 하지만 경제는 줄어 들것이다. 그런데 경제가 줄어드는 것이 문제인가? 경제가 줄어듦은 세금과 잉여가 줄어 든다는 것이고 그만큼 세상에서 부자 되기가 어려워지는 시스템이 될 것이다. 사실 더 궁극적으로 좋아 질 것이지만 과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허상에서 빨리 벗어나야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실제적인 세상이 만들어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P184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을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첫 번째를 완수하고 달성하는 방법은 아주 분명하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두 번째 방법은 어떤 것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 을 체험하는 것,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거나 (마지막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P184

사랑의 의미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이런 잠재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사랑할 때를 기억해 보면 좋은 것만 보이고 나쁜 것은 다 묻힌다. 나쁜 점은 보이지도 않는다. 모든 잠재력이 발견되고 그 잠재력에 매료된다.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 스스로 알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제한적이다. 따라서 경험을 우선하게 되고 그 경험에 비추어 자신의 잠재력을 서서히 발견해 나가는 수 밖에 없다. 경험의 폭이 좁고 단순하다면 결국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할 가능성이 매우 줄어들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많은 경험을 해보는 것은 인생을 사는데 매우 도움이 된다.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가 치우러야 한다. 그러므로 무한정 경험을 넓힐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의 다양한 시각을 통해 자신을 발견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랑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의 시선을 받는 것으로 그 시선 속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전달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날 무작정 사랑해 주는 일은 잘 없다. 결국 내가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만이 결국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게 되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닐지라도 사랑하다 보면 그곳에 자신이 보이기 마련인 것이다. 모두 사랑하는 길밖에 없다.

 

P185

사랑은 섹스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근원적인 하나의 현상이다. 섹스는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섹스는 그 안에 사랑이 담기는 순간, 아니 사랑이 담겨 있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성화될 수도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섹스를 사랑이라 불리는 궁극적인 합일의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P187

시련의 의미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는 것은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의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밝혀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단지 시련 속에서도 그 시련이 피할 수 없는 시련일 경우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학대에 불가하기 때문이다.

 

P188

오늘날 정신건강 철학은 인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가치체계가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의 짐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만들어온 것이다.” 또 다른 논문에서 그녀는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불행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불행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고 하면서 피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시련에 수치심보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고 있는 미국 문화의 잘못된 풍토를 바로 잡는 데에 로고테라피가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한 바 있다.

 

P190

과연 이 모든 시련,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이런 상황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궁극적으로 여기서 살아남아야 할 의미가 없기 때문에, 탈출하느냐 마느냐와 같은 우연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는 삶이라면 그것은 전혀 살 가치가 없는 삶이기 때문에.”

 

P191

내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P193

나는 아이를 갖기 원했고, 이 소망은 이루어졌습니다. 아들 하나는 죽었고, 또 다른 아들, 불구자인 그 아들은 만약 내가 돌봐주지 않았으면 아마 보육시설로 보내졌을 겁니다. 비록 다리를 못쓰고,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그 아이는 어쨌든 내 아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을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해주었고, 내 아들이 보다 훌륭한 인간이 되도록 키웠습니다.” 이 말을 한 순간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다음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얘기를 하자면 저는 제 삶을 평온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삶은 의미가 충만한 삶이었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 아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따라서, 제 삶은 절대로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P194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인간이 삼라만상의 진화과정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세계를 초월하는 도 다른 차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인간이 겪는 시련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또 다른 차원의 세계 말입니다.”

 

이 세상이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주는 왜 있고 별은 왜 있으며, 우리와 같은 생명체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가 말하는 신이란 존재는 무엇 때문에 이 같은 일을 저질렀을까? 아무것도 없는 것과 지금이 있는 것은 무엇을 실현하기 위해 있는 것일까? 우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P195

초의미

이런 궁극적인 의미는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이것을 초의미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실존철학자들이 가르친 대로 삶의 무의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로고스는 논리보다 심오하다.

 

P199

삶의 일회성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빼앗아가는 것은 고통만이 아니다. 죽음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서 정말로 무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재 가능성이라는 말을 입이 닳도록 해왔다. 가능성은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바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과거로 옮겨간다. 이렇게 과거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일회성을 탈피해 영원한 실체로 보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속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된 상태로 보존된다. 따라서 삶이 일회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일회성이 우리의 책임 아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일회적인 이런 잠재 가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실현시키느냐에 다라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수많은 현재의 가능성 중에서 끊임없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을 무위로 돌리고, 어떤 것을 실현시킬까? 어떤 선택이 단 한 번의 실현을 시간의 모래 위에 불멸의 발자국으로 만들 것인가? 언제나 인간은 좋든 싫든 자기 존재의 기념비가 될 만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P199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책에서도 말하지만 최근의 노인 경시 풍조는 사회적 효용성 관점에서 논하는 경우가 많다.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 정말 쓸모가 없을까? 그 쓸모는 정작 어떤 쓸모일까? 쓸모의 의미를 안다면 효용성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살아온 시간과 명징한 그 과거의 시간들은 실체이다. 허상이 아니다. 그 실체를 제대로 봐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조만간 또 다른 변화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P199

기법으로서의 로고테라피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공포 때문에 진짜로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꼭 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이 그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과도한 의도, 과잉욕구는 성적인 문제로 고생하는 환자에게서 자주 발견 된다. 남자가 그의 정력을 과시하려고 하면 할수록, 여자가 오르가즘에 이르는 능력을 보여 주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떨어지게 된다. 쾌락은 어떤 행위의 부산물로, 파생물로서 얻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얻어져야만 한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정도가 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망가진다.

 

P203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이 역설의도라고 하는 로고테라피의 치료기법이 적용될 때마다 발휘된다. 로고테라피에서 역설의도기법이 먹혀 들어가는 것은 인간에게 이런 거리두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는 자기 병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고든 W. 알포트가 쓴 개인과 종교 라는 책에 나온 말과도 일치한다. “신경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P208

환자가 강박증과 맞서 싸우기를 중단하고 대신에 아주 반어적인 방식 역설의도와 같은 으로 그것을 비웃어 주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고, 증세가 점점 약해지면서 결국에는 없어지고 만다. 이런 증상이 실존적 공허에 의한 것이 아닌 다행스러운 경우에는 환자가 자신의 신경증적 공포를 비웃는 데에서 더 나아가 나중에는 아예 그것을 무시하게 된다.

 

P208

예기 불안은 역설의도로 좌절시켜야 하고, 과잉의도와 과잉투사는 역투사의 방식으로 좌절 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 역투사는 환자가 자신의 삶에 주어진 특정한 과업과 사명을 바라보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자기 연민이든 멸시든 간에 환자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치료의 핵심은 환자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데에 있다.

 

P209

집단적 신경증

어떤 시대든 그 시대 나름의 집단적인 신경증이 있었고, 어느 시대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치료법이 있었다. 현대의 집단적 신경증이라고 할 수 있는 실존적 공허는 허무주의가 개별적이고도 개인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허무주의는 존재가 아무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P210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인간의 자유 또한 제한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조건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경학과 정신의학 두 분야를 전공한 교수로서 나는 인간이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환경에 어느 정도까지 굴복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강제수용소를 네 곳이나 전전하다 살아 돌아온 사람으로서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저항하고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도 사실입니다.”

 

P211

범결정론에 대한 비판

인간은 조건 지워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P211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은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P213

그렇다고 자유가 결론은 아니다. 자유는 이야기의 부분이고, 절반의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책임이라는 적극적인 측면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극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책임이 전제되지 않는 자유는 방종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내가 동부 해안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에 보완이 되도록 서부 해안에 책임의 여신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214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P220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이 말은 독일어로 쓰인 내 책의 제목이기도 한데,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요한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최선이란 라틴어로 옵티넘이라고 하는데, 내가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이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1)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2)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3)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 모든 요구에 대해 예스로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요구 하는 기대에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내가 찾은 의미에 대해 기대하는 것에 대한 예스”. 받아 들이는 삶을 살아간다.

 

P221

유럽 사람의 눈에는 미국의 문화가 인간에게 행복하기를끊임없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P222

강제수용소에서는 이런 체념상태가 아침 다섯 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물론 밖으로 일하러 나가는 것도 거부하고, 대신 막사에 남아 똥과 오줌에 절은 짚더미 위에 누워 있기를 고집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아무것도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 경고도 협박도 소용이 없다. 그런 다음에 아주 전형적인 행동을 한다. 주머니 깊숙이 감추어두었던 담배를 꺼낸 다음 그것을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그가 앞으로 48시간 안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없어지고, 순간적인 쾌락의 추구가 뒤를 잇는 것이다.

 

P224

그 책에서 나는 이런 신경질환이 두 개의 잘못된 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을 자신이 쓸모 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과 동일시하고, 쓸모 없게 되었다는 것을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나는 환자들에게 청소년기관이나 성인 교육기관, 공공 도서관 혹은 이와 비슷한 기관에서 봉사하도록 권유했다. 말하자면 그들이 엄청나게 남아도는 자유 시간을 비록 돈을 받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일에 쓸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그렇게 하자마자 경제 상황에 변화가 없고 전과 같이 굶주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우울증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이 복지정책에만 의지해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 셈이다.

 

P226

집단 신경 증후군의 두 번째 요소인 공격성과 관련해서는 캐롤린 우드 셰리프가 주관했던 한 실험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그녀는 인위적인 방법을 써서 보이스카우트 그룹들이 서로 공격성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런 다음 관찰해 보니 소년들이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행동할 때에만 공격성이 누그러진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공동의 목표란 자기들이 먹을 음식이 실려 있는 차를 진흙구덩이에서 꺼내는 일 같은 것을 말한다. 공동의 목표가 생기자마자 그들은 자신들이 달성해야 할 목표의 도전을 받았고, 그래서 서로 협동하게 되었다.

 

P228

유사한 예로 영화를 들어 보자.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에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P229

의미에 대한 지각은 현실에 깔려 있는 가능성을 깨닫도록 만든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일이 행해져야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방법을 통해 의미를 찾을수 있을까? 샬롯 뷜러가 말했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사람들의 삶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여 공부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런 전기적인 접근법에 생물학적인 접근법을 가미할 수도 있다. 로고테라피는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프롬프터로서의 판단력을 갖고 있다. 그런 과제를 수행해나가기 위해서 판단력을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에 잣대를 갖다 대야 하고, 이 상황은 어떤 일련의 판단기준과 가치의 중요도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P230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 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에비트 바이스코프 요엘슨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무엇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을 성취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는 로고테라피 시료 상의 개념이 정말로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적인 경험의 세계를 희생시키면서 외적인 성취의 세계에만 지나치게 편중되는 것을 보완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세 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인 비극을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앞 장에서 이미 얘기했던 것처럼 에디트 바이스코프 요엘슨은 로고테라피에 대한 희망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로고테라피가 오늘날 미국 문화가 지니고 있는 건전하지 못한 성향을 근절시키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오늘날 미국에는 자신의 시련을 자랑스러워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만들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치유 불가능한 환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불행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P232

비극 속에서의 낙관중에서 내가 가장 강력하게 동조하는 것은 라틴어로 소위 인간에 대한 논의 라고 하는 것이다. 제리 롱은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인간정신의 도전력을 보여 주는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텍사르타나 가제테지에 의하면 제리 롱은 3년 전에 다이빙을 하다가 사로를 당해 목 아래 부분이 마비되었다. 사고를 당했을 때 그는 17살이었다. 요즘 롱은 입에 막대를 물고 타이프를 친다. 그는 특수하게 고안된 전화기를 통해 지역사회 대학에서 제공하는 강좌를 두 개 듣고 있다. 인터콤이 롱에게 강의를 듣고 교실에서 하는 토론에도 참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밖에 그는 독서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고, 글도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리 롱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 삶이 의미와 목표가 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운명의 날에 대한 나의 태도가 삶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신조가 되었습니다. 나는 내 목을 부러뜨렸지만, 내 목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대학에서 처음으로 심리학 과목을 듣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장애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 내 능력을 더욱 향상시켜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시련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 도달한 인간적인 성숙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말이 독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2장에서도 얘기 했지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가하기 때문이다.

 

P234

이제 비극의 세 가지 요소 중 두 번째에 해당되는 죄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죄는 신학적인 개념의 죄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소위 죄의 미스터리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죄를 발생시킨 생물적, 심리적 그리고 사회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죄에 대한 최종분석에서도 여전히 그 죄가 해석 불가능한 것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의 범죄 그 자체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은 죄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고, 죄지은 사람을 자유의지와 책임을 지닌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리해야 할 시계로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심지어는 범죄자들조차도 이런 식으로 취급 받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책임지기를 원한다.

 

P235

죄수들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변명거리 중에서 하나의 선택할 기회만 있었지요. 사회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데 많은 경우 비난의 화살이 그 희생자에게 돌아갑니다.산 틴 교도소에 있는 수감자들 앞에서 강의를 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죄를 짓고 죄인이 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죄를 털고 일어나 자기 자신을 초월해서 성장하고,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그 죄를 극복해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P236

집단적인 범죄의 개념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어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의 행동에 대해, 혹은 다른 집단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는 지칠 줄 모르고 집단적인 범죄의 개념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해왔다. 하지만 이런 고정관념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기 위해 요령 있는 가르침이 필요할 때가 많았다.

 

P237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적절하게 행동할 기회와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실제로 우리 삶이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잠재적 가능성 그 자체도 큰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기회를 써버리자마자 그리고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키자마자 단번에 모든 일을 해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P238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나이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한다. 물론 나이든 사람에게 미래도 없고, 기회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 대신 과거 속에 실체, 즉 그들이 실현시켰던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는 누구도 과거가 지니고 있는 이 자산들을 가져갈 수 없다.

 

P238

시련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의미는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절대적인 가치와 보조를 같이 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 사람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은 절대 아니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유용성은 그 사람이 사회에 이로운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기능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정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람이 이루어낸 성과를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 사회의 특징이다. 실제로 이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가치는 무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차이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만약 이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가치가 오로지 현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자행된 안락사, 즉 나이가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서, 혹은 고통스러운 어떤 장애 때문에 사회적으로 더 이상 쓸모 없게 된 사람들을 죽였던 자비로운행위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오로지 개인적인 모순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P242

여러분은 원칙에 어긋나는 예외적인 경우만 들었다고 나를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스피노자 (윤리학)의 마지막 문장이다. 여러분은 우리가 굳이 성자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저 훌륭한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소수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소수의 반열에 합류하려는 도전의지를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금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더욱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경계심을 갖자. 두 가지 특면에서의 경계심을.

아우슈비츠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히로시마 이후로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3. 내가 저자라면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두껍지 않고 로고테라피라는 학술적인 치료법을 소개하면서도 딱딱하지 않게 쓰여진 명저이다. 제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저자인 빅터 프랑클의 나치 수용소 생활을 토대로 그의 심리 분석 치료법의 근본과 효과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책의 목차를 보았을 때 낯선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원저에서도 이와 같이 분류를 하였을 것으로 본다면 특이한 목차 구성이다. 목차는 핵심 전달을 위해 채택된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목차는 저자가 하고자 하는 포인트를 잘 추려놓은 결과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목차 구성으로 인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과 그 부수 사항을 구분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강제 수용서에서의 체험에서 다양한 경험과 관찰 사항 및 깨달은 바를 포함하고 있는데 무엇을 중점을 전달하려는 지가 목차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면이 있다. 반면 내용을 보게 되면 목차 보다는 내용 안에서 흐름을 통해 따라가다 보면 목차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 책은 제1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과 제2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과 제3 <비극 속에서의 낙과> 세 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강제수용소의 입소에서 해방까지의 긴 시련을 시간 순으로 잘 풀어 놓아 독자가 읽으면서 충분이 간접 경험을 통해 그 시련의 깊이와 지속된 고통의 시간을 체험할 수 있게 하였다. 강제수용소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한 적이 있지만 빅터 프랑클의 글처럼 가슴에 와 닫기는 처음 경험하였다. 이는 미묘한 심리 상태를 잘 표현해 놓았고 수감자들의 행동의 원인과 내면에 대해 잘 이야기 해주어 당시의 상황을 심리적으로 같이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주어 강제수용소의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2부는 빅터 프랭클이 창시한 로고테라피에 대해 핵심 위주로 사례를 포함해서 잘 제시해 주고 있다. 1부를 읽고 제2부를 읽게 되면 요약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유는 제1부 체험의 사이 사이에 로고테라피 이론에 근거한 심리 분석이나 상황 설명이 포함되어 있어서 다시 듣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3부는 현대에 필요한 로고테라피의 실 적용 사례로서 로고테라피의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인 고통, , 죽음에 대해 사례를 통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 그리고 현 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

 

 

본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사실적 기반을 확보하고 그 기반 위에서 나오는 깨달음과 저자의 소회는 체험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설득력을 배가 시켜준다. 또한, 강제 수용소에서의 죽음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꼭 강제 수용소가 아니더라도 죽음을 포함한 주위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다양한 심리적 요소들을 드러나게 하여 느낄 수 있게 하였다. ,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선택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보여주고 이 선택의 결과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함으로써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더 절실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경험 많은 어르신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편안하면서도 긴장을 놓칠 수 없게 하는 것이 빅터 프랭클의 글에서 나오는 매력으로 보인다.

 

 

훌륭한 작품인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하면, ‘그래서 뭐!’이다. 어쩌면, 전체 이야기를 듣고 나서, 현재를 사는 나로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좀 미흡한 점이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옛날의 사람처럼 한가하지가 않다. 매사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고 이는 잘 짜여진 현대라는 사회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이 빡빡한 시간을 관통하는 인생의 의미와 그 의미를 실현할 방법과 그 방법을 찾을 곳은 어디 인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이 많이 아쉽다. 어쩌면 이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멈춰 서서 다시 음미하며 생각하게 하고 결정하게 하는 측면에서 말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본의 아니게 늘 깨어 있다. 3분에 한번씩 올라오는 다양한 메시지, 카톡, 이메일, 전화 등으로 인해 항상 깨어 있게 된다. 하지만 깨어 있으되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들로 인해 스스로의 시간들이 공허해지고 그러다 보니 매 시간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고 의미가 없으므로 늘 똑 같은 것들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이니 권태롭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행동 방식이나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었다면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높아 졌을 것이다. 의사의 눈이 아닌 보통 사람의 눈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한 방법 제시가 아쉽다.

 

 

한번 쓰여진 책은 그 구성을 달리해서 출판되기는 매우 어렵다. 이야기 구성의 틀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1부 체험, 2부 로고테라피 소개, 3부 사례에 대해 구성의 아쉬움이 있다. 내용의 중심은 로고테라피로 보이는데 체험 부분이 강렬하다 보니 로고테라피의 내용이 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체험을 통해 그러한 악조건에서 승리한 한 인간의 영웅적 이야기를 담은 것인지? 관찰자로서 수용소 수감원의 체험들을 해석한 것인지? 로고테라피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서 체험들이 사례로 이용되고 있는 것인지? 좀 헷갈리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눈으로는 2부와 3부는 별도의 책으로 분리해서 출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1부는 죽음의 수용소라는 특징 지워진 장소에서의 체험과 그 체험에서 오는 심리적인 면과 인간의 행동에 대한 분석에 좀더 초점을 맞추어서 내용을 더 풀어 나간다면 1부 하나로서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충분히 전달 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1부를 기반으로 2부까지 한 곳에 묶는 다면 1부의 사례가 중복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따라서 로고테리피의 이론에 집중해서 설명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례 중심의 1부에서 이론 중심의 2부로 넘어 갔을 때, 읽는 느낌이 확 변해버려서 독서의 느낌이 떨어지는 면이 있다. 내가 저자라면 1부와 2/3부를 분리해서 별도의 책으로 내는 것이 필요하고 1부에서 본인의 체험외에 다른 사람의 체험을 포함해서 좀더 많은 사례를 제시하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주제를 전달하는 장소가 수용소다 보니 절실함을 느낄 수는 있으나 동질감을 또는 공감을 이끌어 내는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한편의 영화를 보듯 많은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책의 한계일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삶과 느낌을 연결하는 시도가 필요해 보인다. 어쩌면 이 부분은 독자의 몫일 수도 있다. 현재의 버전으로 다시 쓴다면, 수용소의 사례와 대비되는 현대의 대표적인 사례를 직장이나 지역사회 혹은 정치나 경제에서 찾아 실감나게 적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직장이라는 곳에서 여러 해를 보내다 보면 로고테라피에서 주장하는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무뎌지고 매사가 권태로워 지기 쉽다. 이러한 직장인들을 위해 일상의 로고테라피 요령 또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면 나치 수용소는 아닐 지라도 늘 답답한 일상을 역어 나가야 하는 직장이란 장소에서 좀더 의미 있는 하루 하루를 만들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속편 직장에서 의미찾기정도의 제목이면 좋겠다.

북리뷰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 2주차 (이동희).docx

IP *.255.177.61

프로필 이미지
2014.02.17 13:41:13 *.94.164.18

정말 일목요연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잘 하시네요.

출간회에서 뵐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도 즐거운 레이스 되세요.

프로필 이미지
2014.02.17 15:37:48 *.94.41.89

네, 감사합니다.

두 번 뵈었는데 웃는 모습이 늘 보기 좋으십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4.02.17 14:51:52 *.94.41.89

책에 번역된 내용의 원문을 읽을 수 있어 더욱 느낌이 새로웠습니다 ^^

모두 사랑하는 길 밖에 없다! 라는 말이 가슴에 콕! 꽂히는 기분입니다.  
인식하지 못하되 깨어있는 시간으로 인한 공허함에 대한 발견도 와닿네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남은 시간도 행복한 레이스 되세요!

프로필 이미지
2014.02.17 15:39:26 *.94.41.89

제 깨달음은 사랑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인데,

정말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슴에서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머리로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어려운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4.02.18 12:37:22 *.94.41.89

이 글을 남기실 때, 애쓴 시간을 어제는 미쳐 알아채지 못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읽어주시고 콕 찝어서 알려주셔서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자 2009.03.09 106497
58 생각의 탄생을 읽고 [3] 정세희 2009.02.22 8924
57 생각의 탄생 Spark of Genius [1] 김성렬(백산) 2009.02.22 9217
56 [좋은 詩]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윤동주- 라비나비 2012.12.21 9476
55 <9기레이스북리뷰3주차-닥터노먼베쑨>-오미경 file [2] [4] 오미경 2013.02.18 9531
54 [7기 레이스] 김용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아래... file [13] [2] 김경인 2011.03.13 9613
53 [8기] 1주차 – 헤로도토스의 역사 file 펄펄 2012.02.19 9830
52 [2주차 북리뷰] 클린 - 임수진 [1] 수진 2018.03.05 9926
51 북리뷰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1] 수진 2018.03.12 10082
50 어떻게 하면 남자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물푸레나무 2016.12.06 10109
49 [2주차 북리뷰] 클린 - 이경종 [1] 12기_예비독수리_경종 2018.03.03 10141
48 4주차 북 리류 -천 개의 문제 하나의 해답 애호박 2018.03.19 10146
47 [2주차 북리뷰] 클린 - 박혜홍 [1] 애호박 2018.03.04 10154
46 위대한 멈춤 - 예비 12기 이경종 file [2] 12기_예비독수리_경종 2018.02.26 10159
45 <3주차 북 리뷰 >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1] 애호박 2018.03.12 10201
44 9기 레이스 북리뷰 2주차-법의정신-오미경 file [1] 오미경 2013.02.11 10453
43 [4주차 북 리뷰] 대한민국 개발자 희망보고서 예비12기_이경종 2018.03.18 10520
42 '여성을 위한 비즈니스 파워툴' openwide 2004.10.01 10524
41 [외식경영] 무조건 성공하는 작은 식당(백종원) [3] 향인 이은남 2010.04.28 10564
40 정재엽, <파산수업>-파산의 위기를 문학으로 이겨내다 한 명석 2016.11.25 10643
39 [3주차 북리뷰]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 이경종 [1] 예비12기_이경종 2018.03.11 107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