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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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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25일 06시 43분 등록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1)

용규 지음

휴머니스트

 

1. 저자에 대하여

신을 이야기하는 철학자. 그에게 신은 다름아닌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정점이다.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본분이라고 생각하기에, 철학자인 그가 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언제부터인가 가치들이 소멸하고 삶이 공허해진 이유를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신이 죽고 진리가 사라진 데에서 찾는 그는 동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새롭고 가치 있는 삶의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있다.

지식의 상아탑에 갇히지 않고 대중과 소통하는 길을 끊임없이 고민해온 그의 지향은 인문주의에 있다. 신을 이야기하면서도 기독교 특정 종파의 관점을 취하지 않고,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부당한 주장과 폭력적 공격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며 합리적 길을 찾는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면 한번은 마주해야 하는 신과 인간 및 종교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그의 성찰은 독자들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는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기적의 양피지 캅베드> <설득의 논리학> <철학통조림> 시리즈,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데칼로그> <영화관 옆 철학카페> <알도와 떠도는 사원> (공저), <다니> (공저) 등이 있다.

 

차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1 (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두었는가?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11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12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13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14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15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16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17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 폴란드 등 동구 제국, 니카라과 등.

18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19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20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21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22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나오는 말

참고문헌

 

 

2. 가슴을 무찔러 오는 글귀

 

7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통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도서 1:2~8)

 

미국의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은 이 글을 지혜문학의 백미로 꼽았다.

 

이 글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고 근동에서 가장 부자였던 이스라엘의 제3대 왕 솔로몬이다.

 

8

이병철 회장의 24개 질문이 24년이라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 차동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해지는 바로는 삼성그룹을 창건한 호암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전 절두산 성당 박희봉 신부에게 자필로 쓴 다섯 쪽짜리 질문지를 보낸 것이. 단아한 필체로 쓴 24개의 질문들 가운데 첫 번째가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였던 것이 분명 그래서였으리라. 이 회장의 질문은 어투가 도전적이고 호흡이 긴박하다. 단순히 치기 어린 호기심으로 신은 존재할까, 아닐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9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다가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한번은 마주해야 하는 숙명적 질문이다. 그러니 뒤로 미룰 이유가 무엇인가? 이 회장이 던진 질문을 빌미 삼아 차제에 이 인간적이고 숙명적인 질문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게 옳지 않을까? 이것이 이 글을 쓰는 까닭이다.

 

13

어떤 종교의 주장을 그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설명하는 말이나 글은 그 종교의 구성원들에게는 은혜롭다. 하지만 자폐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그 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북스럽기 십상이다. 그러나 종교적 담론도 인문학적 관점과 언어로 설명되면 덜 은혜롭긴 해도 거북스러움이 덜하다. 이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다.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의 뒤를 이은 마키아벨리, 에라스무스, 토마스모어, 기욤 부데 같은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은 자신들의 인문학적 작업을 담아낼 고유의 글쓰기 방법을 개발하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 글쓰기의 한 전범으로 내려온 인문주의적 글쓰기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일반적 양식이 있다. 비교적 긴 문헌학적 설명으로 글을 시작하여, 개념을 정리하고 문법과 논리에 호소하며, 수사학적 표현을 집어넣고, 고대 작가들의 고전적 지식을 끌어다 활용하는 방식이다. 나는 이 회장의 질문들에 대해, 되도록 이 방법을 따라 답하고자 한다.

 

15

나는 이 책을 바람이 부는 언덕에 꽃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썼다.

 

25-26

성서에 보면, 신이 자기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밝힌 곳이 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난 신을 만나는 대목이다. 신은 이미 80이 넘은 노인 모세에게 이집트로 가서 그곳에서 노예로 사는 히브리인들을 구해내라 명한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그곳 왕궁에서 자랐지만 살인을 하고 도망 나온 모세는 그 일이 도통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신에게 다소 불손한 의도를 감춘 채 매우 위험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느님이 나를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까.(출애굽기 3:13)
   
   
이 장면이 가진 극적 긴장감은 신은 자신의 이름을 감추는 존재라는 데에 있다. 예컨대 야곱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라고 청했을 때 신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라고 되물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창세기 32:29) 모세에게도 처음에는 “네 조상의 하느님” 또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출애굽기 3:6, 15)이라고만 밝힐 뿐 자기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모세가 신이 맡기려는 사역을 빌미로 감히 신의 이름을 물은 것이다. 이름을 밝히든지, 자기를 이집트로 보내는 명을 거두든지 양자택일 하라는 뜻이다. 이 교활하고 영악한 질문에 대해 신이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고 선뜻 답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처음 밝힌 것이다
.
   
   
알고 보면 참으로 놀라운 뜻이 담긴 이 히브리 말을 고대로부터 신학자들은 ‘나는 있는 자다’ 또는 ‘나는 존재다’라고 번역해왔다. 우리말 성경은 그것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기 3:14)라고 재번역했다. 성서에 ‘여호와’로도 표기되는 신의 이름 ‘야훼’가 이와 연관되어 있다. ‘야훼’에 대한 일반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해석은 ‘그는 있다’ ‘그는 존재한다’이다. 그런데 잠깐! 자기 이름을 묻는 질문에 대한 신의 답이 ‘나는 존재다’라니

 

41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라고 딱 부러지게 가르친 것은 그래서다.

 

51

칸트는 인간의 정신이 무한성에 이를 수 없음을 가장 명확하고 예리하게 보았던 철학자임이 분명하다.

칸트에게 신은 초이성적 존재다. 초이성적이라는 용어도 새로운 무신론자들이 흔히 그러듯 비이성적 이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56

신에 대한 경험은 가능한가? 신학자들의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

 

사실상 신에 대한 경험은 모든 종교의 샘솟는 원천이다.

 

58

독일의 현대 신학자 루돌프 오토(R. Otto) <성스러움의 의미>에 의하면 …. 우리를 무서워 떨게 하며 말을 잃게 하고, 신경조직의 가장 말초에 이르기까지 내적으로 전율하게하고, 그것에 완전히 압도당해 자신의 모든 능력은 무능함이고, 총체적 무()이며, 장엄한 위엄 앞에서는 한갓 먼지와 재일 뿐이라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어느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행복을 준다.

 

60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일상적 형태로 이어질 수 있으며, 또 이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초자연적 사건들을 통해 신비적 형태의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의미의 중심점이자 삶의 전환점이 되어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ㄹ 나타나야 한다. 쿤의 용어로 말하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하고, 신약성서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메타노이아(metanoia)’, 회심(悔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62

정리하자. 신의 존재증명은 이성의 문제도 경험의 문제도 아니다! 신앙의 문제다!

 

63

영국의 시인 존 옥센함(J. Oxenham)이 남긴 시를 소개하면 당신의 대답을 기다린다.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네,

이 길, 저 길, 그리고 또 다른 길이.

숭고한 영혼은 높은 길을 오르고,

미천한 영혼은 낮은 길을 더듬네.

 

그리고 다른 영혼들은

이리저리 헤매고 있네,

저 안개 낀 들판 사이를.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다네,

높은 길, 낮은 길이.

그대는 골라야 하리.

그대 영혼이 나아가야 할 길을.

 

 

65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68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137억 년 최근의 관찰결과로는 8000만 년이 더 늘어 138억년 전으로 추산되는 아주 먼 옛날 일이다.

 

71

2000년 영국에서 출간된 리스의 저서 <여섯 개의 수>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우주는 측정 가능한 여섯개의 숫자에 지배받는다.

 

72

그런데 리스는 이 숫자들이 빅뱅 후 10-43초 이전에 이미,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으로 우주를 세팅했다고 했다. 만일 이 숫자의 값이 조금만 크거나 작았더라면 현재의 우주와 생명체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77

, 그럼 정리해보자.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우우구스티누스의 창조론 해석과 현대 천체물리학의 우주발생론이 적어도 외관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둘이 갈라지는 결정적 분기점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했듯 기독교에서는 오이코노미아’, 즉 우주의 역사는 시작부터 종말까지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에 의해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지적 설계론에는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자연스레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78

태초의 순간만 봐도 그렇다! 전지전능한 신의 창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10-43초 만에 지금의 우주가 펼쳐지는데 딱 맞는 초기상태가 만들어졌겠는가? 그런 우연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10-43초는 1초의 1조 분의 1조분의 1조분의 1000만 분의 1만큼 짧은 시간이다. … 바로 이것이 신이 존재하며 그의 계획에 의해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과학적 증명 아니겠는가?

 

79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드디어 찾아냈는데, 이른바 다중우주해석론(many worlds interpretation)’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가설이다.

 

다중우주론은 스탠퍼드 대학의 교수인 러시아 태생 물리학자 안드레이 린데(A. Linde)가 처음 제기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아주 작은 시공거품(space-time bubble)’에서 시작한다. 이 거품 속에서 모든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되는데, 그것이 갑자기 팽창해 하나의 우주가 된다. 그런데 그것이 포함된 전체 우주는 마치 부글거리며 끓는 죽과 같아 이 작은 시공거품이 하나가 아니고 무수히 많이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카오스다. 그것을 린데는 다중우주(multiverse)’라고 불렀는데 수학적 계산으로는 그 수가 무료 10500개 정도다.

 

82

이제 당신 스스로 판단할 차례다. 고대로부터 철학자들에게는 정신(nouse)으로 불렀고 성서와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는 말씀(logos) 또는 진리(aletheia)로 나타났던 신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우주를 창조했다는 창조론이 옳을까? 아니면 우리가 사는 우주는 1 다음에 0 500개나 붙은 숫자만큼 많은 우주 가운데 하나라는 다중우주론이 옳을까? 아니, 바꿔말하는게 낫겠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허무맹랑할까? 이에 따라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도 정해질 것이다.

 

86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93

요점은 이렇다. 일반인들의 상식이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정통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창조와 진화는 도저히 화해하지 못할 만큼 철저히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97

자연과학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섬기는 이신교(deism), 인류를 신으로 숭배하는 인류교(religion de l’humanite)처럼 기독교를 인간중심적이고 과학적인 종교로 개조하려는 이단들의 이론적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신교는 17세기 중엽 영국의 자유사상가와 과학자에 의해 기독교를 과학적 합리성과 조화시키려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했다.

 

98

18세기 들어 볼테르와 디드로, 그리고 루소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유럽 각지에 퍼졌으며, 프랑스대혁명 성공 이후 종교화되기 시작했다. 예컨데 로베스피에르와 그가 이끄는 자코뱅당 당원들은 이성을 뜻하는 프랑스어 raison 의 첫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해 Raison 이라 쓰고, 인간의 이성을 새로운 신으로 숭배하는 이신교를 제도화했다.

 

이신교에서는 신을 세계의 창조자로 인정하지만 세상일에 관여하는 인격적 존재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마치 시계공이 완벽하게 설계해서 만든 시계가 일단 작동하면 그것을 만든 시계공의 개입 없이도 정해진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 처럼 이신론자들의 세계는 신의 참여 없이도 충분히 조화롭게 작동한다. … 한마디로 이신교의 신은 자연법칙과 같다.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자 이신론자인 토머스 제퍼슨은 복음서에서 기적을 묘사한 구절은 모두 오려낸 <제퍼슨 성경>을 출간했다. … 거기에 그들은 예수를 뉘었으며, 무덤의 문에 커다란 돌을 굴려서 입구를 막고 떠났다. 라는 구절로 끝을 맺는다. 예수의 부활과 그에 의한 구원의 기록을 삭제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신교도들은 에틸렌 질송의 표현을 빌리자면 엄숙한 도덕을 획득하고 거룩한 종교를 버렸다.

 

99

인류교는 1825년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생시몽이 창설했다. ….

인류교에서는 집단적 인류가 곧 신이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예술가, 통치자, 과학자가 성인들이다. 19세기에는 이른바 신계몽주의자로 불리는 지식인들, 즉 콩트와 같은 실증주의자들, 슈트라우스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 오엔과 프리에 같은 초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그리고 조지 엘리엇 같은 뛰어난 예술가까지 이 종교에 몰입했다.

 

100

진화론과 무신론을 그 둘은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지 않다. 오히려 양립한다.

 

105

결론부터 말하자! 정작 다윈은 진화론이 무신론과 연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무신론자였던 적이 없다. … 말년에 불가지론자였다.

 

107

데스먼드와 무어가 쓴 <다윈 평전>에 의하면 다윈은 열렬한 유신론자인 동시에 다윈론자가 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창조와 진화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입장을 철학자들은 양립주의라고 부른다.

 

115

진화론이 창조론의 일부라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이른바 진화를 위한 창조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바꿔 말해 눈뜬 하나님이 눈먼 시계공을 창조해 인도해간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당신 생각은 어떤가?

 

117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행할 바를 하느님이 예지하시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가 자유의지로 무엇을 원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맞대응했다.

 

119

따라서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양립주의가 아무 어려움 없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눈뜬 하나님이 눈먼 시계공을 인도한다.

 

122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124

이번에는 결론부터 밝히고 가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125

그 이유는 과학의 속성과 신의 본질 사이에 놓인 극복할 수 없는 질적 차이 때문이다. 한 마디로 유한과 무한의 차이다.

 

133

파스칼의 팡세에서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은 신과 인간의 차이를 무한과 유한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은 동등하다.

 

135

영상기술자들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두 개의 2차원 영상을 나란히 겹쳐놓음으로써 실사에 더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3차원 영상을 얻어낸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선사한다. 진리를 드러내는 작업도 마찬가지 아닐까? 과학과 종교가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명해 하나로 통합하려 들지 말고 외려 나란히 겹쳐놓음으로써, 진리에 더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지식이 제 스스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우리의 삶과 세계가 더 풍요로워질 터이다.

 

136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137

볼테르 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계몽사상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신은 재난을 방지할 수 있는데도, 방지하려 하지 않는가. 아니면 방지하고 싶지만 방지할 능력이 없는가?

 

알고 보면 이 시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처음 제시한 이래 지난 2300년 동안 이어 내려오는 딜레마의 한 변형이다.

 

138

(에피쿠로스)가 신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딜레마

 

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능력도 있고 없애려고도 하는가?

그렇다면 악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고 하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나?

 

140

철학에서는 에피쿠로스가 제시한 딜레마와 그 변형들에 대한 다양한 답변을 신정론(theodicy)라고 한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용어

 

우리에게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가져오는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신은 정의롭고 공정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인데, 철학자들은 신정론은 이른바 일원론과 이원론이라는 두 종류로 나뉜다.

 

일원론은 우주가 궁극적으로 예정조화된 통일체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궁극적 관점 또는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악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오히려 선으로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말인즉 자연에는 선도 악도 없다.

 

143

스피노자는 악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신을 살리고 악을 죽인 것이다. 그래서 유신론자들이 일원론을 선호한다.

 

이원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로는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이 대표적이다.

악이 고통과 슬픔, 그리고 죽음을 유발하려는 신의 의도적 목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창조하고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시스템이 오작동을 일으켜 나타나는 것으로 판단했다.

 

145

아우구스티누스 악은 실재가 아니고 선의 결핍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마치 빛의 결핍이 어둠인 것과 같은 논리다. 이 말은 악이 선처럼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스피노자가 말하는 환상도 아니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선의 결핍은 인간이 선자체인 신에게서 돌아서 그를 떠난 죄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내용이다. 태양을 등지고 돌아선 자가 어둠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는 곧 악의 원인과 책임은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아우구스티누스는 불행과 죽음은 모두 인간이 신에게서 등 돌리고 떠난 탓이지 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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