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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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법정(法頂) 스님 입적(入寂) 4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불자(佛者)도 아니고 법정 스님을 직접 뵌 적도 없지만 언젠가부터 스님을 마음속 스승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스님의 책을 읽으며 자아가 사라지는 동시에 고양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스님 책을 읽을 때마다 이런 체험을 하다 보니 어느덧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여행>에서 법정 스님에 관한 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시의 제목은 ‘초상화로 내걸린 법정스님’입니다.
눈 오는 날 거리를 걷다가
초상화를 가르쳐주는 화실 앞을 지나다가
초상화로 내걸린 법정스님을 만났다
서울에 내리는 첫눈을 바라보는
법정스님의 맑은 눈이 눈에 젖는다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라
지금이 바로 그때다
하나가 필요하면 하나만 가져라
법정스님이 오랫동안 불쌍히 나를 바라본다
네, 스님
만장도 없이 들것에 실려
사리 수습도 하지 않고 떠나가신 법정스님
말없이 말없는 대답을 드렸지만
나는 오늘도 내일을 걱정하면서
분분히 내리는 저 첫눈도 바라보지 못한다
‘감어인(鑒於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스스로를 비추어보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성찰의 거울로 삼아 자신을 닦는다는 의미입니다. 스승은 영혼의 거울이라 믿고 있지만 나는 법정 스님을 거울로 삼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물이 많고 부끄러움이 큰 탓입니다. 시인은 “법정스님이 오랫동안 불쌍히 나를 바라본다”고 했지만 나는 슬픈 눈으로 법정 스님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나란 사람, 시인만큼 성찰이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법정 스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의 ‘성체조배’라는 시에 나오는 마음이 지금 나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시를 옮겨봅니다.
꽃이 물을 만나
물의 꽃이 되듯
물이 꽃을 만나
꽃의 물이 되듯
밤하늘이 별을 만나
별의 밤하늘이 되듯
별이 밤하늘을 만나
밤하늘의 별이 되듯
내가 당신을 만나
당신의 내가 되듯
당신이 나를 만나
나의 당신이 되듯
사전을 찾아보면 ‘성체조배(聖體朝拜)’는 ‘성체 앞에서 특별한 존경을 바치는 행위. 즉 성체의 외형 안에 현존하는 신성에 마음을 모아 감사와 찬미를 하는 예배’입니다. 내게 성체조배는 특별한 존경심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신격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 분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싶은 마음입니다.
법정 스님은 내 마음의 별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마음은 밤입니다. 밤이 있어야 별이 빛나고, 별이 빛나야 밤이 아름답다고 믿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밤이기에 법정 스님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법정 스님이라는 별이 있기에 마음의 밤도 아름다울 수 있을 듯합니다.
정호승 저, 여행, 창비,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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