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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기 레이스 4주차_소통이란 무엇인가?
2014. 3. 2 정수일
“다른 사람을 우리에게 동조시키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네.” _ 괴테
사는 동안 가장 힘든 것을 말하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사람과의 소통’이라고 하겠다. 나는 활달하거나 사교적인 성품이 아니다. 내성적인데다 소심하다. 필요이상으로 감성적인편이어서 쉽게 상처받고 쉬이 잊어버리지도 못한다. 에둘러 말하기에 서툴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때론 도를 넘는 배려 때문에 오히려 일을 망치기도 하고 경우가 아닌 일을 참아내는 것을 무척이나 힘들어한다.
직장생활을 떠 올리려보면 정치적이지 못해서 늘 무리에서 심리적으로 한 발짝 밀려나 있었으며 때문에 많이 외로워했다. 회의가 있거나 브리핑 자리에서는 펄펄 날아다닌 반면 회식자리는 매우 힘들었다. 이 놈의 회식자리는 상사랑 있건 부하들이랑 있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마시지 못하는 술은 딱 잘라 마시지 않는 편이었고 하기 싫은 노래 역시 억지라도 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 정도면 불편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인데 버거운 부하, 불편한 상사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아내 말처럼 소통에 장애가 있는 것이 맞는 모양이다.
내 성격에 맞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애써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이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찍부터 관계와 소통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관련 책들을 많이 찾아 읽었다. 거개가 스킬에 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겠으나 이런 표피적인 노력만으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모든 사람들과 깊은 소통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사람도 있고 주는 것 없이 괜히 미운 사람도 있는 법이다. 단지 사무적인 관계에 머물러야 하는 관계도 있겠고 이해관계에 머물러야 하는 관계도 있다. 그러나 소통하고 싶은 사람과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면 이것은 문제다. 진정으로 교우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른다면 관계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소통전문가 괴테는 소통에 대해서 어떤 생각과 실천을 했을까! 그는 우리가 타고난 자신의 경향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특히 다른 사람을 우리에게 동조시키려고 하는 것을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는데 그 스스로 결코 이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괴테가 말했다. “나는 이제는 어떤 인간과도 사귈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만 비로소 각양각색의 성격들을 알게 되고 인생살이에 필요한 민첩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성미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무난히 지내기 위해서는 자제해야만 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내부에 있는 모든 다양한 측면들이 자극을 받고 발전하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누구와 부딪쳐도 당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년의 괴테는 누구와도 사귈 수 있는 소통의 능력자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나는 그 동안 소통에 장애를 겪으면서 나름대로 몇 가지를 터득하였다. 물론 지금도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믿는데 간단히 소개해 보려한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먼저 열려있는 것’이다. 나는 꼭 닫아놓고 상대보고 먼저 열라고 하는데 열어 줄 바보가 있을 리 없다. 그도 역시 나처럼 사람사이에서 상처받고 있는 사람이다. 상대는 내가 열려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내가 닫혀있다는 것은 아주 정확하게 안다. 이것은 틀림없다. 특히 나처럼 포.커페이스가 어려운 종류의 사람은 안 그런 척 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래서 나름대로 방법이라고 개발한 것이 특별히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없다거나 느낌이 좋은 만남에서는 경계나 탐색의 단계를 생략하고 처음부터 나를 놓아버린다. 털털하다거나 버릇없어 보여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어설프게 간본다고 머리 쓰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 가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不可近不可遠이란 옛말이 있다. 가까이 하기에도 멀리하기에도 어렵다는 말인데 바꿔 말하면 너무 가까워서도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인 소통과 관계의 단상을 한마디로 이처럼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또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의미를 더 부여해서 이 옛말을 담아두고 있다. 서로 지킬 것은 지키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신의, 배려, 나눔 따위의 가치를 일컫는 것이다. 이런 가치들은 일방적일 수 없는 것들이며 상호작용 함으로써 그 가치들이 배가 된다.
사랑은 소통의 가장 완전한 형태이다. 이건 내가 아주 잘 하는 종목인데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동짓달 기나긴 밤 한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정든 임 오신 날 밤이면 구비 구비 펴겠다는 여인을 만날 즈음이면 ‘월하정인’을 상상하면서 어느새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면서 나의 프란체스카를 꿈꾸고 ‘첨밀밀’을 보면서 나는 소군이 되기도 한다. 유난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내게 사랑은 이렇게 헤픈 것이다. 이성과의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산선생을 만나면 그와 사랑하고 구본형 선생을 만나면 또 그와 사랑에 빠진다. 술병이 나서 배가 불러 죽은 아암 혜장에게선 마치 나를 대하는 듯 안타까워 폭풍 같은 눈물을 쏟고 굶어 죽은 이덕무의 어미와 여동생에게선 마치 동기간의 슬픔을 느낀다. 오지랖도 팔자라는데 어쩔 수 없다. 생긴 대로 살 일이다. 문제는 서로 교감하는 것에 서툴다는 것이다.
소통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사랑타령을 늘어놓는 것은 ‘사랑’만이 소통의 가장 완전한 형태라고 믿기 때문이다. 세상에 흔해 빠져서 존귀한 것이 사랑 말고 또 있는가! 사랑 말고는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린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진지하게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의 가치는 환금됨으로써 비로소 그 권능을 부여받는다. 소통과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계약과 계산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많은 관계들이 현대인들의 관계를 잠식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이 스승과 제자가 부부와 연인들의 관계에 언제부터 이렇게 계산과 거래가 판을 치게 된 것일까? 길거리에 사랑이 넘쳐나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롭다. 감각적 쾌락을 탐닉하지만 그럴수록 사랑은 점점 더 고갈될 뿐이다. 오천만대가 넘는 최첨단 모바일 소통 장비들이 세상을 점령하고 있지만 소통과 관계의 양만큼 그 질이 담보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만나는 소통과 관계이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적 사랑의 고갈에 대하여 ‘참된 자아의 상실’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자신을 사랑하는 훈련 즉 ‘깨어있는 나’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수련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소통 역시 결국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여전히 ‘소통’이 내게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인 것을 보니 나는 아직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 성격에 맞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애써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여전히 모든 사람들과 깊은 소통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별히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없다거나 느낌이 좋은 만남에서는 경계나 탐색의 단계를 생략하고 처음부터 나를 놓아버린다."
"문제는 서로 교감하는 것에 서툴다는 것이다. "
"소통 역시 결국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칼럼 쓰시느라 생각이 많으셨겠습니다.
오늘도 지나가고 있네요. 여기는 이란의 테헤란이랍니다.
잠시뒤에 한국으로 출발합니다.
3차 모임에서 뵙고 십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