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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3일 00시 05분 등록

P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12년 여름이었다. 그는 팀원 중에 업무 역량이 뛰어나고 대인 관계가 좋아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다. 180 센티미터 넘는 훤칠한 키와 무에타이로 다져진 탄탄한 복근에 근육질의 상남자였다. 거기에다 명문대 출신에 흰 얼굴과 진한 눈썹을 한 그는 또한 엄친아였다. 거래처와 저녁 약속 모임에 P와 함께 가면 거래처 여직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내가 그녀들한테 잔을 권하면 술을 못한다며 슬슬 빼다가도 P  한 잔 하시죠. 잔 비우는 겁니다하고 건배 제안을 하면 쓰디쓴 소주를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단숨에 잔을 비워버리곤 했다.

 

P는 회사가 짧은 기간에 급성장해 사세가 정점을 찍을 때 입사를 했다. 높은 연봉으로 한때 대학생들한테 입사하고 싶은 선망의 회사 중의 하나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자연히 P와 같은 인재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일찍 핀 꽃이 먼저 시든다고 했던가. 회사는 몇 년 안 가 업황 부진, 급변하는 외부환경 대응 전략 부재, 무리한 사업확장, 사업 포트폴리오 편중, 그리고 유동성 위기라는 쇠망하는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P가 조용히 다가와 회사를 그만 두겠다고 했다. 당시 P는 대리로 발탁승진 된 직후였다. 사원에서 대리로 승진 시, 직급간 연봉 상승률이 제일 높아 적잖은 연봉을 받게 됨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그만 둔다니 좀 당혹스러웠다. 이유를 물어보니 계속 근무하다간 자신의 불행한 앞날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특단의 대책 없이 위기는 기회라는 식상한 구호만 외쳐대는 회사, 불필요한 야근, 퇴근시 상사 눈치 보기, 부서간 책임전가, 비효율적 토요 근무와 주말당직, 그리고 경영난 이유로 오십 전후 퇴출되는 선배들의 모습들, 더 이상 자신의 미래를 던질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교에 가 공부를 계속해 교수의 길을 걷고 싶다고 했다. 인문학 박사가 넘쳐 교수가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지만 그래도 한번 새롭게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흔들림 없이 의지가 확고해 그를 만류할 수 없었다. 그렇게 P는 회사를 떠났다.

 

내가 P라면 그렇게 과감히 행동에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전도가 유망한 친구였고 큰 과오나 실수만 없다면 십 년 이상은 안정적이고 탄탄한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승진과 인상된 연봉의 유혹도 뿌리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앞날이 보장되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기약도 없는 멀고도 험한 길을 향해 떠났다. 그가 퇴사한 후 6개월 지나 나 또한 회사를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해는 경영 악화로 오십 전후의 임직원 수십 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뜻있는 젊은 직원들도 살 길을 찾아 나섰다. P의 선택이 맞았다. 한꺼번에 몰아 닥친 위기 앞에 어떤 대책도 효과가 없었다. 더 이상의 비전도 없었다. .

 

지난 2, 1 6개월여 만에 그를 만났다. 대학원 석사 논문 쓰랴, 미국 유학 준비하랴 바쁜 모습이었다. 자비로 갈 형편이 않아 장학금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었다. 힘든 준비 과정에서도 얼굴은 밝았다. 퇴직금도 바닥이 나서 요즘에는 식사를 사주는 선배가 곧 결혼 할 여자 친구가 보내는 힘내라는 격려의 문자보다 몇 배 더 고맙다는 우스개 소리도 했다. 자신의 길을 홀로, 그렇지만   자신감 있게 걸어가는 P가 보기 좋았다.  그 또한 이제부터 자신과의 싸움이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감당할 수 없는 생활고와 강도 높은 통과의례 관문이 그의 마음을 짓누를 것이다. 중도에 그의 꿈을 포기하게 만드는 유혹이란 중역의 영이 그를 시험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퇴사를 할 때 안정과 돈의 유혹을 박차고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기에 나는 P가 자신의 꿈을 이룰 것이라고 믿는다. 혹여 도중에 그 꿈이 다른 꿈으로 변경되더라도 그가 쏟은 땀과 시간은 다른 긍정적인 결과물로 나타날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고의 세월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지나간 삶 또는 현재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인가? 지금 하는 일이 의미가 있는가? 일상의 삶이 어떤 의미를 주는 가? 퇴직 후 남은 인생은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등등 스스로에 질문을 던지곤 한다. 물론 답변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질문에 대한 진지한 자신성찰의 시간을 가진 사람들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앞에 놓여 있다. 해답을 찾아 떠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그 자리에 머물 것인가?  전자를 선택한 사람만이 자기와의 외롭고 긴 싸움을 시작한다.

 

오십에 무엇을 다시 시작할 것인가 고민을 해 보았다. 퇴직 한 직장 선배들의 인생 2막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전직 회사 또는 다른 동일 업종 회사의 도움에 의지해야만 했다. 이 경우 입사 3년 안팎의 직원을 상대해야 한다. 전직 직장 선배 또는 임원에 대한 예우를 기대했다간 큰 낭패를 당한다. ‘컴퓨터가 서툴러서’,’ 타이핑이 느려서라는 이유로 느린 일 처리를 변명할 수 없다. 젊은 직원들도 아버지뻘 되는 전 직장 선배와 일하기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또 다른 선배들은 나이 어린 사장이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했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만둔 회사에서 한때 잘 나갔던 시절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내다 일찍 노년에 들어갔다. 오십 대에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는 선배들이 거의 없었다.

 

오십 이후 인생은 이전의 삶과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 늦었지만 새로운 분야를 배우고 익히고 싶다. 며칠을 고민 끝에 평생 교육원에 등록을 했다. 일년 반 과정인데 기대감도 있지만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그 동안 인고의 시간 없이 순탄한 길을 걸어온 내게 늦었지만 한번은 통과해야 할 관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힘들 때는 더 큰 꿈을 안고 앞서 떠난 P를 생각하며 고통을 이겨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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