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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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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3일 00시 14분 등록

김용규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

 

146

만일 이 회장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라고 물었다면 그는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모두 인간이 신에게서 등 돌리고 떠난 탓이지 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148-149

20세기 신정통주의의 문을 연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 1886-1968) 30여 년에 걸쳐 쓴 <교회 교의학> 곳곳에서 악의 문제를 다양하고 폭넓게 논의했다. 여기서는 그의 신정론이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인 창조의 그늘진 쪽 (Schattenseite)이라는 개념에 한정해 그가 말하는 악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창조에는 뿐만 아니라 아니요도 있다. 높음뿐 아니라 심연도 있다. 명료함뿐 아니라 모호함도 있다. 과정과 연속뿐 아니라 장애와 한계도 있다. 성장뿐 아니라 쇠락도 있다. 풍부함뿐 아니라 빈곤함도 있다. 아름다움뿐 아니라 잿더미도 있다. 시작뿐 아니라 끝도 있다. 가치뿐 아니라 무가치함도 있다. 피조된 존재, 특히 인간존재에는 시간과 날[) 그리고 해[] 속에 어두움과 밝음, 성공과 좌절, 웃음과 눈물, 젊음과 나이 듦, 얻음과 잃음, 태어남과 곧 또는 나중에 올 죽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개개인의 피조물들과 인간들이 대단히 서로 다른 척도로 이것들을 경험하는 것은 사실이다.

 

150

만일 이 회장이 바르트에게도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라고 물었다면 그는 신의 창조에는 어두움과 밝음, 성공과 좌절, 웃음과 눈물, 젊음과 나이듦, 얻음과 잃음, 태어남과 곧 또는 나중에 올 죽음이 함께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바르트의 주장은 이레네우스의 신정론에 제기되었던 반박, 이 세상의 고통이 신의 의도적 계획에 합당한지를 어떻게 아느냐하는 의문을 잠재울 수 있다. 왜냐하면 밤과 낮, 추위와 더위와 함께 자연에 속하고, 그둘이 함께 곡식과 과일을 성숙시킨다는 데 누구도 더는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신정론이 지닌 중요한 가치는 그가 이처럼 창조의 반대인 (Das Nichtige)”와 창조의 그늘진 쪽(Schattenseite)’, 다시 말해 죄와 악을 구분하고 그 관계를 밝혔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2000년 전통의 기독교 신학은 부지불식간에 또는 고의적으로 죄와 악을 분명히 구분하지 않고 그 관계 역시 명백히 밝히지 않은 채 혼용해왔기 때문이다.

151

그 결과 죄와 악의 구분은 물론이거니와 구원의 제도로서 칭의와 성화의 구분 역시 불분명해졌다.

 

정리해 조바. ….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신에게서 돌아선 인간의 죄 탓으로 돌려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레네우스는 악을 신의 구속사 안에서 성장과 진화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봄으로써, 그리고 바르트는 악을 죄와 분리해 선과 마찬가지로 창조의 한 축이라고 인정함으로써 문제 자체를 해소하려 했다.

 

153

신은 자연에게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운행하는 자연법칙을 주었고, 인간에게도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결정해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모든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불러오는 자연악과 인간악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질명, 지진, 홍수, 해일, 가뭄 등 자연악은 자연에 주어진 자연법칙에서, 그리고 탐욕, 잔인함, 불의, 악의 등 인간악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서 나온다.

이말은 신은 질병, 지진, 폭풍, 홍수, 해일, 가뭄 같은 일체의 자연악에 직업 개입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오직 자연에 부과된 자연법칙들의 부조화 때문에 일어난다는 의미다.

 

요컨대 모든 악은 신과 무관하며 그 원인과 책임은 자연과 인간에게 있다.

이것이 섭리의 이중구조를 통해 구축되는 신정론이다.

 

154-156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 10~1965. 12)의 고문으로 활약했

칼 라너 (K. Rahner, 1904-1984) 가 주장했듯, 신이 자연과 인간을 자신의 자동기계로 창조하지 않고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는 원리에 맡겨 미결정적으로 창조한 것은 오직 사랑때문이라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즉 자연과 인간에게 일정한 자유와 우연성을 허락하는 것이 강제하는 것보다는 신의 사랑에 합당하다는 말이다.

 

159

1961, 예루살렘에서 세기의 재판이 열렸다.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 중령이었던 칼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에 대한 재판이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유럽 각지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행해진 600만연 명의 유대인 살상에 관계한 일로 법정에 섰다. 이때 아이히만은 독일인 변호사 세르바티우스를 통해 그 일이 오직 주어진 일을 잘 처리하려는 것”, 즉 근대의 미덕 가운데 하나인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것이었을 뿐임을 강력히 피력했다. 그 자신 개인적으로는 유대인에게 악의가 전혀 없고 집단학살은 커녕 사람 하나 살해할 배짱도 없다면서

요컨대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의도된 것이 아니며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과정에서 그냥 일어난부수적 피해일 뿐이었다는 말이다. 아이히만은 자기에 대한 살인죄 기소는 잘못되었다며 스스로를 정당화 했다.

 

160

독일 태생의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가 주간 교양잡지 <뉴요커>의 청탁으로 이 역사적 재판을 취재했다. 그녀는 2년 후 출간한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우리가 아이히만의 증언을 듣고 충격을 받으며 몹시 괴로워하는 이유는 모든 범죄에는 반드시 사악한 의도가 있다는 현대 법체계에서 통용되는 가정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말은 괴물들과 악마들이 수백만 명의 학살을 설계한 것도 아니고, 당신이나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충격적인 사실을 명시하기 위해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161

이제 우리가 다룰 이 회장의 질문은 조금 수정되어야 한다.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신은 왜 우리 모두를 악인으로 만들었는가?’라고 말이다.

 

163

아우구스티누스도 플라톤 철학의 구세적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의 신학에 접목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란 단지 선의 결핍이라고 규정했다.

 

만일 당신이 이 말을 듣고 고개가 갸우뚱해진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라. 우리는 왜 빛을 내뿜는 기구들은 만들 수 있는데 어둠을 뿌리는 기구는 만들 수 없을까? 그건 빛은 실재로 존재하는 실재이지만 어둠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빛을 차단함으로써만 어둠이라는 현상을 만들 수 있다.

 

164

아렌트는 악의 본질을 무사유라고 규정했다.

 

165-166

아렌트가 파악한 아이히만처럼 이들 역시 어떤 특별한 악령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은 히틀러와 스탈린 그리고 이이히만처럼 신에게서, 다시 말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치로부터 돌아선 사람들이다. 노벨상을 받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 <이방인>에서 이 같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황폐한 어둠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166

뫼르소는그는 무감각하며 아무런 의식도 없이 그저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상을 따라간다.

 

그런 뫼르소를 판사뿐 아니라 그를 변호하는 변호사마저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그만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강조한다.

 

167

그렇다! 신에게서 돌아섬으로써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모든 가치를 상실한 인간이 바라보는 어둡고 황량한 들판이다. 이 벌판에 출몰하는 늑대와 하이에나가 바로 우리가 만나는 악이다.

 

168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아내조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기 2:9)하는 악담을 퍼붓고는 그를 떠난다. 신은 욥에게 왜 이런 일을 행했을까? 이에 대한 기독교의 답을 우리는 고난이라는 용어에서 찾을 수 있다.

 

고난은 당사자에게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분명 악이다. 하지만 고난은 그것을 견딘 사람에게는 오히려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선이다.

 

168-169

독일의 신칸트학파 철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이 <윤리학>에서 한 말을 들어보자. 조금 장황하지만 고난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난은 가치다. 고난이 어째서 가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불행을 견뎌낼 능력이 없는 자에게 고난은 가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견뎌낼 만큼 충분히 강한 자는 고난을 통하여 스스로 강화된다. 그의 인간성과 덕성이 증대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고난 또한 가치다. 고난은 도덕적 능력의 시련이다. 깊은 도덕적 능력을 일깨워주는 촉매제 구실을 한다. 고난은 인간의 활동력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감성 및 이해를 심화한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나 자신의 마음의 깊이뿐 아니라 남의 마음의 깊이를 알게 된다. 아니, 인생 일반의 깊이를 알게 된다. 가치를 인식하는 안목이 확장되고 예민해진다. 고난을 통하여 인격이 높아짐과 동시에 행복능력도 높아진다. 위대한 고난을 거친 위대한 기쁨과 행복감, 그가 스스로 취한 것은 고난이었는데 구하지 아니한 행복이 그에게 주어진다.

 

170

모든 역설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무력한 법이다. 고난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인간적 한계가 모든 인간적 한계가 모든 인간적인 것을 내려놓고 신에게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종교적 상황을 만든다.

바꿔 말하자. 인간은 오직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인정하고서야 비로소 신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신에게로 되돌아감’. 바로 이것이 고난의 종교적 의미다.

 

171

신은 그저 욥에게 우주가 얼마나 경이롭고 복잡한지, 그것을 창조한 신의 섭리가 얼마나 무궁한지를 가르칠 따름이다.

 

172

주께서는 못할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룰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기 42:2~3)

 

욥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신은 그를 축복했다. 이후 욥은 아들 일곱과 딸 pt을 두었고, 이전보다 갑절이나 많은 부와 행복을 누렸다.

 

정리하자! 고난이란 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먼저 내리는 고통과 불행이다. 그리고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신이 인간에게 악을 허락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다. 이 특별한 섭리의 본질이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것을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공포아 전율>에서 다음과 같이 탁월한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173

어린애의 젖을 떼야만 할 때 어머니는 자신의 유방을 검게 물들인다. 어린애에게 젖을 먹여서는 안 될 때 어린애가 유방에다 미련을 갖게 하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유방을 검게 물들여놓으면 어린애는 그 유방을 달라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어머니고 어머니의 눈길은 여전히 인자하고 부드럽다.

 

175

4년 동안의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청년(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수용서에서 정치범으로 수용된 지식인들 뿐 아니라 우매한 민중과도 함께 생활했다. 그런 가운데 많은 점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무식한 민중이 이성을 숭배하는 합리적 지식인들보다 훨씬 지혜롭고 선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닫는다. 이후 청년은 문학비평가이기도 했던 벨린스키로부터 물려받은 무신론적 사회주의를 떠났다.

 

176

하지만 청년은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무장한 유물론적 사회주의자 벨린스키의 논리적 주장을 논박할 근거는 찾지 못했다. 그의 내부에서 일어난 신념의 변화는 단지 경험에 근거한 것일 뿐 이성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에도 청년은 오랫동안 내적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그의 정신에는 경험으로 얻은 자신의 새로운 신념을 사색과 이론을 통해 증명하고 표현해야 할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왜 이성과 과학을 숭배하는 합리적 지식인들보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바보 같은 민중이 더 지혜로운지, 왜 사회개혁을 위해 고개를 쳐들고 일어서는 혁명가들보다 쓰러진 자들을 돕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백성들이 더 선한지, 왜 이성적 지식인들이 더 끔찍한 죄를 짓게 되어 더 무서운 벌을 받는지, 청년은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먼저 설명해야만 했다.

 

1854년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후부터 청년은 평생 이 문제에만, 오직 이 문제에만 매달렸고 그것에 관해 글을 썼다. 다행히 그는 문학에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다. 그 결과 청년은 니체가 내가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사람의 심리학자였다라고 평가하고, 러시아 태생 실존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다예프가 그를 낳은 것만으로도 러시아 민족의 존재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라는 찬사를 보낼 만큼 자랑스럽고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청년의 이름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트옙스키(1821~1881).

 

180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당연히 다시 신을 향하는 것’, ‘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것’, 그럼으로써 상실했던 존재를 회복하는 것, 등 돌렸던 본질, 생명, 행복, 정의, 지혜, 진리, , , 불사성 같은 가치들을 다시금 추구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당신은 우리를 당신께 향하도록 창조하셨나이다라고 했을 때 그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자 구원의 본질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181

신에게서 돌아섬과 신에게로 다시 향함. 신에게서 떠남과 신에게로 다시 돌아감. 바로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와 구원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틀이자 공식이다.

 

죄는 죄들이라고 복수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신에게서 돌아서는 죄’, ‘신에게서 떠나는 죄원죄라고 부른다. … 모든 인간이 그것을 반복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자신이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본래적으로 갖는 죄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요컨대 원죄는 보편적이고 숙명적이다.

 

184

기독교를 구원의 종교라 한다면 이때 구원이란 일차적으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든다라는 의미다. ‘신에게서 돌아선 자를 다시 신을 향해 돌아서게 한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존재를 상실한 자에게 다시 존재를 회복하게 한다라는 말이며, 안셀무스가 나열한 모든 가치로부터 돌아선 자에게 그것들을 다시 추구하게 한다라는 말이다. 이 같은 일을 기독교 신학에서는 칭의(justification)라 한다. 그리고 악인이 선인이 되는 성화(sanctification)는 칭의 이후에 따라오는 것으로 오히려 이차적인 일이다.

 

189

<죄와 벌>에서 죄라는 의미로 사용된 러시아어 프레스투플레니예는 본디 어떤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단어를 인간이 스스로를 높여 인간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으로 썼다. 그렇다면 그것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품었던 마음, 즉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자기 스스로를 신같이높이려는 자만과 결코 다르지 않다. 도스토옙스키도 죄의 뿌리가 자만이라고 보았다는 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뿐 아니라 <백치>의 이폴리트, <악령>의 스타브로긴, 키릴로프, 쉬갈로프, <미성년>의 아르카지, 베르실로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 등이 바로 그런 죄를 지은 사람들이다.

 

189-190

이 죄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가? 있다! 이론상으로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문제가 있는 곳에 답도 있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자기를 높이는 자만이 원인이며 자기를 낮추는 겸허가 해법이다. 몸은 키를 더하면서 크지만 영혼은 겸허를 더하면서 큰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좋아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겸허가 자만의 해독제. 자기를 믿는 이성이 원인이면 신을 믿는 신앙이 해법이다.

 

190

이제 우리는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고심했던 문제, 곧 왜 이성이 과학을 숭배하는 합리적 지식인들보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바보 같은 민중이 더 지혜로운지, 왜 사회개혁을 위해 고개를 쳐들고 일어서는 혁명가들보다 쓰러진 자들을 돕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백성들이 더 선한지, 왜 이성적인 지식인들보다 더 끔찍한 죄를 지어 더 무서운 벌을 받는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되었다. 이성을 믿는 지식인들은 자만했고 신을 믿는 민중은 겸허했기 때문이다. 사회개혁을 외치는 혁명가들은 타인의 희생을 종용했고, 쓰러진 자들을 돕는 민중은 자기희생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법대생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자만에 의해 타인의 희생을 종용하며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을 죄인이라 하고, 창녀 소냐처럼 순종으로 자기를 희생하며 신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을 의인이라한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유로지비라고 불렀다. ‘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190-191

유로지비는 러시아 정교에서, 오래전에 죽어버린 나무에 몇 년 동안 날마다 물을 길어다 부어 마침내 어느 날 푸른 잎을 피워낸 어떤 수도사를 일컫는 말이다. 신의 세속화를 통해 인간의 신성화를 꾀했던 예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러시아 출신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싀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 <희생>에서 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소재와 테마를 시적 영상에 담은 바 있다. 겸허와 신앙과 자기희생으로 죽은 나무에서 푸른 잎을 피워내는 것! 바로 이것이 기독교와 동방정교가 구원의 교리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에서, 그리고 타르콥스키가 <희생>에서 제시한 죄에 대한 해법이다.

 

196

스탕달 신의 유일한 변명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뿐이다.

니체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신은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대변되던 기존의 가치를 모두 잃고 거짓말, 도적질, 강간, 살인은 물론이거니와 제노사이드(학살)같은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둘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니체는 죽은 신을 대신한 도덕적 초인을 내세웠는데, 그가 바로 차라투스트라다.

 

197

철학자 하이데거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라고 규정

샤르트라가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언급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다라고 설파할 때에도, 신의 죽음에 의해 인간이 죄를 짓도록 내버려둠악행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둠이 이미 전제되어 있었다.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하자마자 곧바로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해범이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일들을 저질렀을까? 어떻게 우리가 대양을 마셔 말라버리게 할 수 있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가없는 수평선을 지워버릴 지우개를 주었을까? 지구를 태양으로부터 풀어놓았을 때,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이제 지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에서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위와 아래가 있는 것일까? 무한한 허무를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허공이 우리에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밤과 밤이 연이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낮에도 등불을 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것이 신을 죽인 인간들이 체험해야 하는 공포와 전율이다.

 

20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성이 가진 특성이자 질병이기도 한 이데올로기에서 나온 것이다.

 

210

진화만으로는 인간의 도덕성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211

이레네우스는 오이코노미아곧 구속경륜이라 불렀는데, 이는 마치 우리가 가정을 돌보듯 신이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뜻이다.

 

213

스피노자는 <에티카>의 마지막 정리에서 우리는 쾌락을 억제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고 행복해야 쾌락을 억제할 수 있다바로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인류 역사에서 모든 위대한 도덕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33

신학자들이 성서의 오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성서의 권위 자체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입장을 취하는 잭 로저스와 도널드 맥킴은 성경의 권위와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성경의 근본목적은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며,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사고와 언어 형태에 자신을 적응시켰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하게 나온 것은 단어의 형태가 아니라 구원의 메시지였다.

 

성경의 권위가 무오성이 아닌, 구원의 메시지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234-5

다시 말해 성서는 시대와 변화를 초월하는 표현 불가능한 신의 말 자체가 아니라, 인류가 신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왔는가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성경은 단순한 하느님의 증언이 아니라 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다라고 간명하게 요약했다.

 

235

옥스퍼드 대학의 성경학자 제임스 바의 성경의 위상은 완전성보다는 충족성에 있다라는 말도 귀 기울일 만하다.

 

성서를 신의 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인간과 세계 구원에 헌신하고 봉사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서가 신의 말이라는 증거다.

 

241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BC 106 ~ BC 43) <신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종교를 뜻하는 라틴어 렐리기오(religio)어떤 것에 마음을 집중한다’, ‘무엇을 세심하게 고려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렐레게레(relegere)로부터 파생된 단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종교를 신들에게 또는 (그들의 말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로부터 약 350년 후 초기 기독교 신학자 락탄티우스( 240?~320?)렐리기오결합하다’, ‘단단히 묶다라는 뜻을 가진 렐리가레(religare)에서 나왔기 때문에 종교란 신과 결합하는 것’, 신과 단절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정의를 받아들인 이후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교의 의미로 굳어졌다.

 

242

종교가 이끄는 새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가치 있는 삶을 뜻한다는 게 종교학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종교의 핵심은 가치 체험가치 생활이다. 따라서 종교가 이끄는 새로운 삶은 인간이 이전보다 더 높은 단계의 가치를 체험하고 그럼으로써 이전보다 더 가치 있게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영국의 종교학자 윌리엄 템플(1881~1944)은 이를 종교적으로 삶을 경험하는 형태)라고 표현했다.

 

종교의 종류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가 조금씩 다르긴 하다. 그래도 고급종교가 지향하는 가치는 진리, 선함, 아름다움, 정의, 사랑, 자비, 인자함 같은 인류보편적 가치다. 그리고 이런 가치의 최고 형태를 보통 신성또는 성스러움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종교란 성그러운 가치를 체험하게 하고 그 가치에 의해 생활하게 하는 의례들과 믿음들의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243

종교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종교적 욕구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정치사가이자 철학자인 샹탈 밀롱 데졸의 표현을 빌리자면 종교는 인간의 영원한 욕구.

 

프랑스 남부지역과 스페인 북부 지역 들 세계 곳곳에 산재한 구석기시대 동굴에서 발견되는 암벽화들을 보면 도구를 들고 사냥하는 내용과 사냥한 동물들을 위해 제의를 행하는 내용의 그림이 동시에 발견된다. 애초부터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일 뿐 아니라 호모 렐리기우스다.

 

244

종교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당신과 나는 종교에 대해서 수많은 말을 해도 좋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믿기로는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훌륭한 가르침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또는 삶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

-          비트겐슈타인

 

245

아우구스티누스와 비트겐슈타인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종교의 임무는 삶의 방향전환’, 곧 자만에서 겸허로 돌아서는 것이다!

 

246

종교가 하는 일은 결국 신앙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삶의 방향을 바꿔주는 것이다. 타고난 본성을 따라 사는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가치를 좇아 사는 가치중심적 삶(기독교에서는 신중심적 삶이라고 한다)’을 살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249

지적 설계론을 여전히 고집하며 과학자들과 날카롭게 맞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해묵은 과오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래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한다면,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원하는 바는 종교가 과학이 되는 것이고, 지적 설계론을 공격하는 무신론 과학자들이 원하는 바는 과학이 종교가 되는 것이다.

 

252

철학적 인간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스위스 태생 철학자 미카엘 란트만은 저서 <근원의 형상과 창조자의 행위>에서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를 각각 그리스 전통의 진리히브리 전통의 진리라 규정하고 두 진리의 차이를 거울반석에 비유해 설명했다.

 

253

무로부터 창조는 세계와 그 법칙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신에게는 바다를 가르고 해를 멈추며 처녀를 잉태하게 하고 죽은 자를 되살리는 초자연적인 일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니 하물며 당신이 지금 마주한 절망과 파국, 슬픔과 고통, 한걸음 더 나아가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에서 당신을 구하는 일이 신에게는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종교적 진리는 자연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의 삶, 바로 당신의 삶과 연관된다. 사실적 진리가 아니라 삶의 진리라는 말이다.

 

255

성서에 빌라도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진리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무식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 그는 로마에서 교육받았는데 당시 로마에는 스토아 철학이 번성했다. 스토아 철학이란 진리가 무엇인지를 최초로 밝힌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막강한 영향 아래 형성된 철학이다. 빌라도는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친 진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형이상학>에 적힌 그의 진리론을 직적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빌라도는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되물었을까? 일부러 딴지를 걸려고? 아니다! 빌라도 자신이 배운 진리와 예수가 가르친 진리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알던 진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사실적 진리였고, 예수가 말하는 진리는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믿어온 신이 내려준 삶의 진리였다. 그래서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던 것이고, 예수는 침묵했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하나 묻자! 사실적 진리만 추종하는 현대의 빌라도인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가 말하는 종교적 진리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래서 마치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내주었듯 종교를 망상이라고 몰아붙여 없애버리려는 것인가? 당신은 어찌 행각하는가?

 

257

영혼의 무게달기 도형을 사이코스타시아(psychostasia)라고 한다.

 

258

1907 3 11자 뉴욕타임즈 미국 매사추세츠 주 도체스터에 있는 블루힐에비뉴폐병요양원의 던컨 맥드걸 박사가 영혼의 무게를 쟀다. 미국의약학회 지 4월호에 개재. … 6명의 환자 모두 숨을 거두는 순간 갑자기 몸무게가 21그램가량 줄어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맥두걸 박사는 이 21그램이 바로 영혼의 무게라고 주장했다.

 

또 개 15마리를 대상으로 똑 같은 실험을 했지만 사람과 달리 개는 죽는 순간 몸무게에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라고도 발표했다.

 

2003년 멕시코 태생 영화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아냐리투가 이 실험에 착안해 <21그램>이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다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숀펜과 나오미 왓츠가 주연한 이 영하는 5센트 동전의 5개 무개, 벌새 한 마리의 무게, 초콜릿바 하나의 무게인 21그램 때문에 삶이 힘겨운 사람들의 죄의식과 구원을 주제로 한 종교적, 철학적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259

맥두걸의 실험 이후 정확히 100년이 지난 2007, 스웨덴의 룬데 박사팀이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이 실험의 진위를 검증해 보았다. 그 결과 임종시 일어나는 체중 변동이 정확히 21.26214그램이었다.

 

260

영혼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프시케psyche’는 서양문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에서 이미 발견된다. 당시 이 말은 사람의 생명력을 의미했는데, 특히 사람이 죽을 때 내뱉는 마지막 숨결을 가리켰다. 따라서 프시케는 정신 또는 마음과는 다르다. 프시케는 단지 생명을 유지하는 목숨 과 같은 것으로 맥두걸 박사가 쟀다고 주장한 바로 그 숨결이다.

 

262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에서 영혼은 형상이고 육체는 질료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 둘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이처럼 영혼을 육체에 작용하는 원리로 보는 영혼론이 가진 장점은, 한편으로는 플라톤 전통의 영혼론처럼 영혼의 존재를 별도로 가정해야 할 필요가 없는 데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을 물질과 구분하지 않고 일종의 물질 내지 물질의 기능으로 보는 유물론 또는 물리주의에 휩쓸리지 않고서도 영혼이 육체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266

영이란 본래 자아를 넘어서 존재하는 것을 열망하면서 일상적인 것을 초월해 가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에밀 부룬너

 

요컨대 인간의 영혼은 생명을 주관할 뿐 아니라 자기를 고양시키고 초월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원리다.

 

268

칼 세이건 <죽음이란 무엇인가> - 인간이 가진 활동능력이나 지적 능력 또는 욕망과 창의성 그리고 감정 등은 반드시 영혼을 가정해야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특성이 아니다.

 

269

칼 세이건의 주장에는 숱한 오류가 있다.

 

271

의식을 과학적으로 본격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20년 남짓이다. 또한 뇌과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273

인문학적 관점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이 같은 양립주의적 사유가 매우 흥미롭게 여겨지며 아주 기대가 된다.

 

275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는 모두 아홉개의 지옥이 차례로 나온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여기에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섬뜩한 글귀가 적혀 있다. 이 문을 지나자마자 도달하는 제1옥에는 그리스도를 몰랐던 자들이 갇혀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2옥에는 색욕에 빠진 이들, 3옥에는 폭식한 자들, 4옥에는 걸신들린 듯 돈을 모은 자들과 무분별하게 낭비한 자들, 5옥에는 쉽게 격노한 자들, 6옥에는 흉악한 이교도들, 그리고 제7, 8, 9옥에는 폭력, 기만, 배신처럼 악의에 찬 죄를 범한 자들의 영혼이 갇혀 각각에 해당하는 고통스런 형벌을 영원토록 받고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곳이 제1옥인 림보limbo. 우리말로 지옥의 변방이라는 뜻에서 변옥이라고도 부르는 림보는 절망의 장소이긴 하지만 다른 지옥들에 비하면 그다지 나쁜곳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한숨소리만 날 뿐 통곡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곳에는 세상에서 도덕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또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살아서 예수를 몰랐던 사람들의 영혼이 갇혀 있다.

 

283

4차 라테칸 공의회가 있고 얼마 후 가톨릭 교회가 아직 무소불위의 막강한 힘을 가졌을 때 살았던 단테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음을 알았다는 점이다. <신곡>에서 단테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BC 70~ BC 19)의 영혼은 제1옥인 림보에서 뜻밖에도 놀라운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는 본래 예수가 탄생하기 19년 전에 죽어 예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림보에 떨어졌는데 어느 날 그리스도가 친히 내려와 거기 있던 자기아 다른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은 예수가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베드로전서 3:19)했다든지,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베드로전서 4:6) 같은 베드로의 가르침을 근거로 기독교 신학 안에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테마다. 요컨대 예수를 모르고 살다가 죽은 타종교인이나 무종교인까지도 신의 진리를 알고 그에 따라 살았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톨릭교회가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단테 이후로도 거의 700년이나 걸렸다.

 

285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로부터는 다른 종교를 이단시하지 않는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가톨릭교회는 이들 다른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이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286

익명의 그리스도인 라너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활동하는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한 삶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나간다면 신이 그들의 삶에 간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이 같은 견해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293

우리말로 임사체험이라고 하는 사후세계 체험은 1982년에 실시한 갤럽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성인 중 약 800만 명, 20명에 1명 꼴로 경험할 만큼 더는 기이하거나 희귀한 현상이 아니다. 응급의료 체계가 발달하면서 죽음에 임박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가 많아 졌다.

이들의 체험에는 공통점이 있다. 즉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캄캄한 터널을 지나는 체험을 한 후에, 빛이 쏟아지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충만한 기쁨과 환희를 느낀다. 이후 이승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공간에 도달해, 거기서 유형 또는 무형의 절대자를 만나 지나간 삶에 대한 각성이나 삶에 관한 새로운 지혜를 얻은 다음, 다시 육체로 돌아온다.

 

295

임사체험이 뇌의 산소결핍에서 비롯된 환각이라면 심장마비 후 의식을 회복한 환자는 모두 임사체험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조사해 보니 평균 62세의 심장마비 환자 344명 중 18퍼센트 만이 임사체험을 했다고 진술했다. 이로써 임사체험이 산소결핍에 의한 환각이라는 가설은 무너졌다.

 

유물론적 세계관에 고착된 과학계의 일부 구성원들은 과학과 영성이 양립될 수 없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잘못 알고 있다. – 알렉산더 교수 <나는 천국을 보았다>

 

312

자 정리해 보자. 간략하게나마 살펴본 바에 의하면, 천국과 지옥에 대한 합의된 교리가 기독교 신학 안에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 해답을 찾아 어떤 것을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찾으려 한다.

 

315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큰 아들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을 통해 영생에 대한 믿음이 파괴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능력도 소진될 것이라고 표현했다.

 

316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천국의 소망>에는 1976년 일리노이 주 어바나에서 열린 대학연합선교집회에서 존 스토트 목사가 기독교인은 천국의 시민임을 알리기 위해 했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 젊은이가 길을 걷다가 5달러짜리 지폐를 주웠다. 그날 이후 그는 길을 갈 때 결코 눈을 들지 않고 땅만 바라보고 걸었다. 그 결과 여러 해가 지나자 그에게는 2 9516개의 단추와 5 4172개의 바늘, 1센트짜리 동전 12, 구부러진 등뼈와 인색한 성격이 남았다. 그리고 눈부신 햇살과 빛나는 별, 친구들의 얼굴에 가득한 미소, 봄에 핀 꽃들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의 눈은 그저 길가의 하수구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진리란 삶의 진리이고 삶의 진리는 삶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 요컨대 좋은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 진리이고 나쁜 삶으로 이끄는 것이 거짓이다. 그것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321

구약성서에는 히브리어 어근 brk에서 파생된 말과 신약에서 주로 그리스어 율로게오마카리오스로 표기되어 우리말 으로 번역된 단어가 놀랍게도 983번이나 언급된다. 이러한 사실은 복이라는 개념이 성서에서 아주 중요한 축을 담당함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개념을 비교적 등한시해왔다.

 

324

미국의 웹사이트 ‘Celebrity Net Worth’가 밝혀낸 바를 알리자면,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14세기 아프리카의 말리제국 황제 만사 무사(1312~1337 재위)였다 .그는 이슬람 교인이었으며 800여 명의 아내를 두었다.

 

330

요컨대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신의 섭리를 바꿀 수야 없지만 자기 자신은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로써 신의 뜻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는 말이다.

 

기도는 신의 뜻을 듣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같은 말을 키르케고르는 사람이 기도할 때, 처음에는 기도가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더 깊은 경지에 다다르면 기도란 결국 듣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라고 표현했다.

 

334

프란체스코야, 내 집이 무너지고 있으니 고쳐라

라고 명하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 가게의 돈을 가져다 기부하고 손수 흙과 돌을 날라 그 성당을 보수했다. 성 다미아노 성당이다.

 

340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 앞에 무엇이 놓여 있었던가? 가시덩굴과 엉겅퀴가 뒤덮인 저주받은 땅, 무의미한 노동,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이 아니었던가?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철학적으로 고발했던 내던져짐이라는 끔찍한 상황 아닌가? 장 폴 샤르트르가 소설 <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을 통해 문학적으로 묘사했던 현기증과 구토증 나는 낯선 세계 아니던가?

 

그런데 아담이 누구인가? 키르케고르가 <불안의 개념>에서 언급한 대로 아담은 그 자신이자 동시에 인류아니던가?

 

버림받음의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사망의 느낌 속에서 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단지 자기 자신을 챙기고 저주 받은 땅이라도 움켜쥐어야만 하는 것 아니던가!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붙들고 움켜쥐는 것 아니던가! 바로 이것이 기독교에서 혐오하는 자기중심주의, 현세중심주의의 본질 아니던가! 또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가진 참을 수 없는 성욕, 끈질긴 재물욕, 무한한 현세욕의 정체 아닌가! 그리고 또 바로 이것이 인간 실존의 가련함 아닌가! 내 생각은 그렇다.

 

341

하지만 기독교의 생각은 다르다. 전혀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바르트, 틸리히에 이르는 대부분의 중요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가진 버림받음의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사망이 느낌은 까닭없이 생긴 게 아니다. 신에게서 돌아섬, 신을 떠남, 존재상실, 가치상실이라는 원초적 분리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성욕, 재물욕, 현세욕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라, ‘신에게 돌아감존재회복가치회복뿐이다. 원초적 분리는 오직 원초적 결합에 의해서만 회복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342

대다수의 부자는 탐욕적이다. 그래서 예수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라고 교훈한 것이다.

 

구원은 본질적으로 부자인가 아닌가 또는 선한가 아닌가에 달려 있지 않다. 오직 의인이냐 아니냐에 달렸다.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재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의롭다고 하느냐일 것이다.

 

344

우리가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붙들고 섬기는 우상인 재물의 마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그것으로부터의 도피도 아니고 그것의 장악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한 문제지만 해답은 이미 2000년 전에 주어졌다. 한마디로 예수와 성 프란체스코가 그랬듯 세상보다 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 땅 위의 보물이 아니라 하늘의 보물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파괴적 재물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마디로 더 좋은 것을 가져야 손에 쥔 것을 놓을 수 있다!

 

356

성화는 죄 사함과 동시에 시작되지만 단 한 번에 완성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무한한 탐욕을 버리고 신을 향해 살면서 거룩하게 되는 일은 시간 안에서 점진적으로 전 생애를 두고 이루어진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에 의해 단 한 번에 의인이 되지만 단 한 번에 온전한 성인이 되지는 못한다.

 

362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자 프란체스코>에서 그리스도처럼 가난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기를 요구하는 프란체스코가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수도사들에게 들려주는 짧은 우화다. 내가 아는 한 이 이야기는 구원받으려는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성화되어야 하는지, 다시 말해 어느 정도까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지를 가장 탁월하게 묘사했다.

 

옛날에 평생을 바쳐 완전함에 도달하고자 애쓴 수도자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밤낮없이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다 마침내 죽음의 날이 다가와 하늘로 올라가 천국의 문을 두드렸다. 그때 안에서 거기 누구시오?’하고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도자는 접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목소리가 답했다. ‘여기는 둘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수도자는 다시 세상에 돌아와 가난, 단식, 끊임없는 기도, 울음 등 모든 고행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운명의 시간이 와서 하늘로 올라가 천국의 문을 두드렸다. ‘거기 누구시오?’ 똑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수도자가 대답했다.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답했다. ‘여기는 둘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수도자는 다시 세상에 떨어져 전보다 더 치열하게 헌신과 고행을 했다. 결국 100세 노인이 되어 죽은 그는 다시금 천국의 문을 두드렸다. ‘거기 누구시오?’ 어김없이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수도자가 황급히 대답했다. ‘당신입니다. 주님, 당신이에요!’ 그러자 즉시 문이 열려 천국에 들어갔다.

 

367

매우 유감스럽지만 신앙인들과 공산당원들이 때때로 보이는 광기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원인은 우리의 이성이 가진 특성이자 질병이기도 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이제 곧 드러나겠지만, 이데올로기는 우리 눈 안에 있는 맹점이다. 태양에 박힌 흑점이다. 한낮에 드리운 어둠이다.

 

368

도스토옙스키는 대신문관을 통해 자신의 대표작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그리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에서 일관되게 다룬 문제, 곧 이성적 인간이 왜 그리고 어떻게 악마가 되는가 하는 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극화했다.

 

370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을 교황에게 넘겨주지 않았소. 지금은 모든 것이 교황의 수중에 있단 말이오. 그러니 제발 나타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소. 적어도 어느 시기가 올 때까지는 방해하지 말아주시오.

 

371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서는 교회의 사역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을 위해서는 어떤 방해물도 제거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그리스도를 화형에 처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바로 이것이 대심문관의 진실이다. 바로 이것이 11세기 십자군의 진실이자 16세기 유럽의 가톨릭이 중남미 각국에서 행한 숱한 학살과 17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자행한 온갖 만행의 진실이고, 오늘날에도 교회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서글픈 진실이다!

 

371-2

막스 호르크 하이머 <도구적 이성>에서 사용한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수단의 정당성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절차적 방법의 적합성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런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면 마치 늙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막내둥이처럼 그 정당성을 등에 업고 수단이 목적에서 벗어난다. 막내둥이가 철이 없든 수단은 체계적 적합성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는 마치 막내둥이의 말에 휘둘리는 늙은 부모처럼 목적이 수단에 의해 왜곡된다. 그럼으로써 막내둥이에 눈이 먼 늙은 부모와 철없는 막내둥이의 관계처럼, 목적과 수단 사이에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순환적 폐쇄성이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구조적 특성이다.

 

374

신이 아닌 것을 마치 신처럼 여기는 것이 우상숭배인데, 마르크스가 보기에는 이것이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다.

 

375

아우구스티누스는 탐욕을 신에게서 돌아선 죄 때문에 생긴 참을 수 없는 성욕과 무한한 현세욕으로 보았다. ….

거짓 신인 우성도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적인 힘을 갖는다는 내용인데, 마르크스가 이 악마적 마성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보여주었다.

마르크스는 돈에 대한 사람들의 우상숭배가 지닌 마성을 <요한계시록> 13 17절에 등장하는 짐승(bestia)에 비유해 경고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아테네인 타이몬>에 나오는 다음 시구를 인용해 풍자하기도 했다.

 

, 황색의 휘황찬란한, 귀중한 황금이여!

이것만 있으면 검은 것도 희게, 추한 것도 아름답게,

악한 것도 착하게, 천한 것도 귀하게, 늙은 것도 젊게

겁쟁이도 용감하게 만들 수 있구나.

…… 신들이여! 이것은 왠일인가?

이 물건들은 당신 제관이든 하인이든 모두 다 끌어날 수 있으며,

아직 살아 있는 병자의 머리맡의 베개를 빼 가기도 하니 ……

이 황색의 노예,

이놈은 신앙을 만들었다 부수며, 저주받은 자에게 축복을 주며,

문둥병 든 노인 앞에서 절하게 하고,

도적에게도 원로와 같은 지위나 작위와 명예를 준다.

늙어 빠진 과부를 시집가게 하는 자도 이것,

…. 에이 망할 놈의 물건,

…. 인류 공동의 매음부야.

 

376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스스로 만든 어떤 것(상품, , 자본)마치 신처럼숭배함으로써, 결국 그 짐승에게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런 종류의 숭배를 물신주의(fetishism)라 그것의 자기파괴성을 매우 경계하며 인간성 회복을 주장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기독교와 궤를 같이한다. 마르크스 역시 물신숭배를 반그리스도적이라 규정하고 자신이 말하는 인간성 회복이 곧 그리스도의 요구라고 주장했다.

 

377

알튀세르가 <레닌과 철학>에서 지적한 대로 - 이데올로기는 절대로 자신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또한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적용되는 특정한 가치와 이해를 모든 인류의 가치와 이해로 과장해 투사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데올로기의 특성인 순환적 폐쇄성과 허위의식, 그리고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 따라서 그 해답은 당연히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 수단이 목적을 왜곡하는 것을 막는 방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허위의식이 우상숭배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378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비판>에서 도구적 이성이 비단 나치뿐 아니라 산업사회와 관리사회를 합리적으로 지지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통렬한 비판과 함께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성이 자기 스스로를 도구화 한다면 이성은 일종의 물질성과 맹목성을 갖게 되고 정신적으로 경험하기 보다는 단지 수용할 뿐인 마술적 실재, 즉 물신이 된다.

 

379

한다미로 우리의 이성은 이처럼 목적은 문제삼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 채 단지 합당한 수단만을 계산하는 능력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자기 부정과 자기 비판 만으로는 이성의 맹점을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피할 수 있으므로 여전히 유효하다.

 

382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은 언제나 폭동과 혁명을 부른다.

 

383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그 불길한 징표를 가장 먼저 알아챘다. 그의 서사시 <아모레스>에는 성곽 밖에 있는 사람들의 탄식이 실려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오래전……

어느 누구도 보습으로 땅을 파헤치거나

토지를 분할하거나

노를 저어 바다를 휩쓸지 않았다.

해안은 세계의 끝이었다.

영리한 인간의 본성, 당신의 발명들의 희생,

파격적이면서 창조적인,

왜 탑처럼 높이 솟은 벽돌로 도시를 경계 짓는가?

왜 전쟁을 위해 무장해야 하는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 같은 사람들을 아카드어로 하피루(hapiru) 또는 하비루 (habiru) 라고 불렀다. 요컨데 하비루들은 농업혁명이라는 문명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로서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 “인간쓰레기,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쓰레기가 된 인간들이다.

 

문명화 이야기를 꺼낸 내 의도는 단순하고 명백하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새로운 생산방식과 그에 따른 새로운 생활양식이나 사회제도가 정착될 때마다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는 사실을 당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정말 그랬냐고? 그렇다. 생활수단, 생활양식, 사회제도가 바뀔 때마다 경제발전질서구축을 명목으로 유무형의 새로운 성곽이 세워졌고, ‘안에 있는 사람밖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구별과 차별이 생겨났다. 문명화는 구별화이자 차별화다.

 

387

레 미제라블에 대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누구보다 먼저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바로 그 산물이 바로 <공산당 선언>이다. 이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젊은 공화주의사들이 바리케이드 위에서 부르던 두 유 히어 더 피플 싱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가사인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이들의 노래가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선언이다. 또한 기원전 9000년 경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시작된 문명화 이후 최초로 시도된 새로운 생산방식과 분배방식의 출현을 선포한 것이기도 했다.

 

388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이웃사랑이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혁명보다 더 근원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었고, 기독교의 교리다. 인간과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힘은 사랑과 자비라고 외치는 빅토르 위고의 목소리도 본디 여기서 나왔다.

 

389

예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려 자신이 수행할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사명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4:18-19)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병든 자, 억눌린 자, 요컨대 하비루들을 위해 기독교와 기독교인이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다.

 

390

그렇다! 기독교는 하비루의, 하비루에 의한, 하비루를 위한 종교다. 모태인 유대교부터 그랬다.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인 히브루(Hebrew)의 어원이 바로 하비루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히브리인들은 본디 성곽 밖에 있는 사람들로서 떠도는 사람들이자 쓰레기가 된 사람들이었다.

 

392

지금 세계에서는 20억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성곽 밖에서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생활비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 가운데 해마다 18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실제로 굶어 죽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7년 동안 죽은 사람들 숫자보다 훨씬 많다. 9억 명에 가까운 성인이 문맹이며, 3억명 넘는 학력기 아동은 교육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이처럼 쓰레기가 된 사람들의 숫자와 비율이 나날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점이다. 이 사람들은 오늘날의 식량생산 기술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굶주림과 현대 의학으로 확실히 치료 가능한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거리에서 자다가 이유 없이 매 맞고 끌려가 감금되고 강제노동을 당하며 살해되고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혹은 금융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21세기 자본주의가 쌓은 성곽 밖의 풍경이다.

 

393

과거의 일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본보기이다. 세상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현재의 일들과 미래에 다가올 일들이 그 언젠가 있었던 일들이다. 같은 것들이 되풀이 되고 있는데, 다만 치장을 새롭게 하고 다른 이름으로 다가온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프란체스코 귀치아가 남긴 말이다.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 아닌가!

 

395

우리나라에는 교회가 참 많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의하면 118종단에 7 7966개의 교회가 있다.

 

<다시 프로테스탄트>의 저자 양희송은 교회 수와 편의점 수를 비교해 보았다. 2012년 매일경제 기사에 의하면, 전국의 편의점 수가 2만개 정도이고 10년 후쯤이면 4만개에 달할 것이라고 업계는 추정한다.

 

우리나라 땅에는 편의점의 4배 가까운 교회가 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을 합하면 우리나라 사람 세 명 중 한명은 기독교인이라는 뜻이다.

 

400

가톨릭 신학자 알프레드 로이지는 <복음과 교회>에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러나 나중에 온 것은 교회였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에클레시아(교회)와 바실레이아(하느님의 나라)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에클레이사(교회)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것이요 미래에는 지양도리 것인 반면에 바실레이아(하느님의 나라)는 현재에 돌입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결정적으로 미래의 것이다. …… 에클레이사는 죄인과 의인을 동시에 안고 있는 반면에 바실레이아는 의인과 성읜의 나라다. 에클레시아는 아래로부터 자라나고, 현세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으며, 발전, 진보, 변증법의 소산이다. 요컨대 인간의 일이다. 그러나 바실레이아는 위로부터 돌입하고, 즉각적인 활동이며, 측량할 수 없는 사건이다. 요컨대 하느님의 일이다.

 

403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면 부당한 교회찬양론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다시 프로테스탄트<의 저자 양희송은 한국 교회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를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 세 가지로 요약했다.

 

405

성직, 성장, 승리라는 이념이 이데올로기로 변한 데 문제가 있다. …. 이데올로기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수단이 목적을 왜곡하는 자기 폐쇄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이념이다.

 

407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세가지 수사법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 가운데 에토스가 가장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한다고 했다. …. ‘일상에서 쌓아 올린 신뢰’, 곧 교회가 예수의 계명을 일상에서 실현해 쌓아 올린 신뢰가 성서를 바로아는 일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려는 열정을 갖는 일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409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교회가 참으로 행복한 때는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있을 때다

 

정리하자. 예수는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일일이 언급한 다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40)라고 당부했다.

 

412

바티칸의 공보관이던 아나톨리는 저서 <교황이 용서를 구할 때>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총 94회에 걸쳐 역사 속 교회의 잘못을 시인하거나 용서를 구했다고 지적했다. 역시 유래가 없는 일이다. 신학자들 상당수는 이러한 사실이 요한 바오로 2세가 간접걱으로나마 교황무오설이 그르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413

신학자 한스 큉은 1971년 출간한 <무오: 미해결의 탐구>에서 교황 무오설은 인간이 만든 교리일 뿐이며 절대적일 수 없다고 주장했을 때 교황청은 그의 교수 자격을 박탈했다.

 

417

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 –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300년 만에 열린 이 회의에서 합리주의, 자연주의, 유물론, 무신론 등 근대가 낳은 반 기독교적 사상과 신의 예정과 은총만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얀센주의 등이 이단으로 배격되었다. 그리고 교황의 무오성을 교리로 확정하는 교의 헌장 <영원한 목자>가 선포되었는데,,,

 

영국의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인 존 뉴먼(1801~1890) 추기경은 신중하게 저항했다. 뉴먼은 <그의 삶을 위한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안티오카에서 성 바울로와 성 베드로가 대립했을 때 과연 성 바오로는 무오성을 갖고 있었던가? 성 빅토리아가 아시아 교회들과 친교를 단절했을 때 그는 과연 무오성을 갖고 있었던가? 아니면 리베리오가 같은 방식으로 아타나시오를 파문했을 때 어떠했던가? 그리고 후대에 와서 그레고리오 13세가 바르톨로메오 학살 공로로 훈장을 내렸을 때는 어떠했던가? 아니면 바오로 4세가 엘리자베스에게 했던 행동은 어떠한가? 식스토 5세가 무적함대에 축복한 것은? 아니면 우르바노 7세가 갈릴레오를 박해했을 때는 어떠했던가?

 

421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에서 오류가능성의 문제는 소설 끝부분에서 윌리엄 수도사가 제자 아드소에게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고 한 교훈에 담겼다.

 

포퍼는 19657월 런던 베드퍼드 대학에서 개최된 국제 과학철학 세미나에서 자신은 상대주의자가 아니며 절대적 혹은 객관적 진리를 믿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바로 이어서 나나 다른 누구도 진리를 우리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의미에서 절대주의자느 ㄴ아니다라고 밝혔다.

 

 

422

에코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 제목을 12세기의 신비주의 수도사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가 쓴 <속세의 능멸에 대하여>라는 시에서 따왔다고 했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이라는 구절에서다. 그리고 그 해석은 독자들에게 맡겼다. 우리는 이렇게 해석하자. …. 교황무오설을 진니라고 믿는 한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이라고!

 

432

가톨릭의 신부와 수녀들이 독신으로 사는 목적은 가정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신과 이웃을 더욱 진실하게 섬기기 위해서다. 그들이 나는 여기에만 헌신합니다. 라고 종신서원 할 때, 여기란 바로 디아코니아, 곧 신고 이웃을 섬기는 일을 말한다. 물론 이 서약은 성서를 근거를 둔다.

 

437

참고로 동방정교에서는 사제들의 결혼을 허락하되 결혼한 사제들 가운데서는 고위 성직자를 선출하지 않는다. 또한 독신제도의 근본취지가 중세 교회의 재산보호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교회 세습이 사라져 재산이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오늘날에도 과연 이 제도가 필요할까?

 

439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유신체제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온 가톨릭단체다. 사제단은 1974 7월 민청학력사건으로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어 15년 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은 일을 계기로 그해 9 26일 명동성당에서 결성되었다. 이날 발표된 제1시국선언에는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 긴급조치의 전면적 무효화, 국민의 생존권과 기본권 존중, 서민대중을 위한 경제정책 확립 등의 요구가 포함되었다.

 

440

이후 사제단은 1975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 공개,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진상 발표, 1981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관련 성명 발표, 1987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사건 폭로 등을 주도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의 불을 지폈다. 1970~1980년대에는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화 운동에 주력하다가 1980년대 말부터는 통일운동으로, 1990년대 들어서는 교회쇄신운동으로 그 영역을 확대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새만금 갯벌과 생명평화를 염원하는 65일간의 삼보일배부터 제주해군기지 반대까지 다양한 환경운동을 벌이며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442

마르크스 이후 다양한 학자들이 쏟아낸 자본주의의 정의 안에는 몇 가지 공통 특징이 존재한다. 사유재산제도 인정,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경쟁주의,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영리주의, 모든 재화가 상품으로 생산되어 시장에서 교환되는 시장경제, 노동력의 상품화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모든 자본주의 체제 안에는 이 같은 특성이 낳는 장단점이 내재되게 마련이다.

 

443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에는 프랑스 경제학자 폴 시브라이트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일어나는 자기조직 현상을 설명하면서 든 예가 실려 있다.

 

하지만 아무도 내가 오늘 이런 셔츠를 살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445

프로테스탄트에서 금욕주의가 사라졌듯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미덕이 사라졌다. … 벨기에의 사회경제학자 어네스트 만델이 이름 붙인 후기자본주의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체생존을 위한 생산보다는 소비를, 절제의 윤리보다는 욕망의 충족을 강조하는 소비 이데올로기를 창출해냈다.

 

446

모든 여성은 공식적으로 쾌락에 초대되었다. 모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같은 68혁명의 구호들이 그대로 후기자본주의의 강령이 되었다. 성에서 소비로 그 대상만 바꾸었을 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명명한 이른바 소비의 사회가 열렸는데, … 차츰 모두가 빚을 진 인간, 곧 이탈리아 출신 사회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가 통렬하게 고발한 부채인간으로 전락했다.

 

447

부채인간은 후기자본주의가 금융자본주의로 다시 한번 진화하면서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 유형이다.

 

450

탐욕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과 현대 정신분석학의 귀결이 잘 맞아떨어진다. 즉 탐욕은 도덕적, 종교적 죄악일 뿐 아니라 정신병리학적 증상이다. 탐욕이 곧 우상숭배라고 가르친 바울이 탐욕을 심판과 연관지어 경계한 까닭이 이것이다.

 

자 이제 여기서 이 회장의 질문에 답하자. 기독교는 물질생활의 풍요를 가져오는 자본주의 체제의 미덕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탐욕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악덕에 저항한다.

 

463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사, 마르틴 루터, 요한 칼빈, 그리고 칼 바르트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도 창조는 구원의 시작이요 구원은 창조의 목적이라는 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강조했다.

 

466

철학에는 죽음에 관한 인간의 태도를 두고 두 가지 대립되는 주장이 있다.

 

가장 무서워해야 할 악, 곧 죽음은 우리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우리도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고대의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의 금언이 대변하고,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가 지지했던 태도다.

 

467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적극 권장했던 태도다.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감은 비본래적 존재에서처럼 죽음의 넘어설 수 없음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면서 그것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질 때에만이 우연히 들이닥치는 여러 가능성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넘어설 수 없는 최후의 가능성 앞에 있는 여러 현실적 가능성을 이해하고 선택하게 된다. 이 앞질러 달려감이 실존의 극단적 가능성으로서의 자신의 과제를 열어 보이며, 그때그때에 이미 실현된 실존으로 굳어버린 모든 태도를 부숴버린다.

 

468

20세기 들어 새로운 종말론적 해석이 나왔다. 예컨데 해방신학과 생태신학의 종말론 해석이 그렇다. 이들 신학은 종말을 세계와 역사의 최종 완성으로 보는 게 아니라,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에 비추어 현재의 세계와 역사를 변혁시키는 요청으로 파악한다. 요컨대 종말을 역사 속으로 끌어들여 매 순간 기억하고 변혁하자는 신학적 태도다.

 

키미로 트레스, 구스타보 구테에레스 해방신학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새하늘과 새땅이 내세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실현되리라는 종말론적 희망을 갖고 현재의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변혁하고자 한다.

 

토마스 베리 신부, 프로테스탄트의 셀리 맥페이그 같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생태신학은 지구의 종말은 묵시적이며 신비적인 역사의 끝에서 일어나는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 핵무기, 환경파괴, 기후변화 같은 생태적 위기에 직면한 지금 여기서 발생할 수 있는 현실적 사건임을 주장하면서 변혁을 요구한다.

 

몰트만도 <희망의 신학>에서 종말론적 미래를 현재로 끌어들여 우리의 삶과 세계를 변혁시킬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에게 종말은 희망이며, 앞을 바라보는 전망이요, 앞으로 나아가는 행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현재의 타개와 변혁이기도 하다

 

471

우주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우주가 이해 가능 하다는 점이다 라는 아인슈타인의 경탄을 떠올려주는 것도 밤하늘이다. 그런데 내게는 그 같은 경탄이 하나 더 있다. 조그만 웅덩이에 고인 물에도 별이 뜨듯이, 유한한 우리의 정신 안에 무한한 신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신이란 무엇인가?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가 설파했듯이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정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신이 죽고 진리가 사라졌다. 가치가 소멸하고 세계는 공허해졌다. 무신론과 허무주의가 횡행하고 삶의 이정표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갈 길을 잃었다. 바햐흐로 가치상실의 시대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우리의 딱한 처지를 대변할 만한 흥미로운 대화가 실려 있다.

 

앨리스 부탁인데 내가 어떤 길로 가야할 지 가르쳐 줘!

고양이 그것은 네가 어디에 가고 싶은지에 달렸지.

앨리스 난 어디에 가도 좋아

고양이 그러면 넌 어떤 길로 가도 좋아

 

그렇다. 이제 우리는 어떤 길로 가도 좋다. 하지만 어디로? 나는 당신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책 안에서 이미 찾았기를 바란다. 오늘밤에는 별을 보아야겠다. 기도도 해야겠다.

 

 

3. 내가 저자라면

2012년 사부님 소천하신 후 만일 9기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철학자 김용규의 책들을 기본 교재 삼아 나홀로 학습을 시작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김용규 철학자의 저서들을 정독 하고 싶었다.

이 책을 일기 위해 벼르고 별렀다. 책 한 권을 씹어 먹기에 한 주는 부족했고 일부러 두 주에 걸쳐 타이핑 쳤다.

 

소감부터 밝힌다. 이 만큼 논리적이며 개괄적으로 서양문화 속 기독교와 한국사회 기독교, 무신론과 유신론의 대결을 잘 풀어쓴 대중서를 본 적이 없다. 다만 제목이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이라는 제목이 눈에 거슬린다.

 

철학자 김용규를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의 표본을 배운다.

환기시키는 도입, 주제에 대한 어원적 접근과 논리학적 접근, 주제에 대한 연구시각을 역사순으로 나열, 각기 접근법의 한계, 저자만의 시각, “정리하자같은 문구로 마무리를 시작하는 깔끔함!

 

내가 쓸 책에서 종교와 성서에 대한 키워드는 이 책에서 광맥처럼 뽑고 또 뽑아낼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은 나의 수학정석이며 성문기본영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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