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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3일 11시 16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박영택

미술평론가ㆍ경기대 교수.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에서 미술교육을,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졸업 후 금호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1995년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연수를 했다. 제2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2010 아시아프 총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동아미술제 운영위원, 박수근미술관 자문위원, 한국미술품감정협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현재 경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경영학과 교수로 있다. 50여 개 전시를 기획했으며, 여러 편의 리뷰, 서문, 작가론을 썼다.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미술전시장 가는 날』, 『민병헌』, 『가족을 그리다』, 『얼굴이 말하다』, 『예술가의 작업실』, 『수집 미학』등이 있고 공저로는 『가족의 빅뱅』, 『우리시대의 미를 논하다』, 『나혜석, 한국근대사를 거닐다』, 『월전 장우성 시서화 연구』 등이 있다. 현재 경기대학교 예술학과 교수로 있으며 미술평론가로 일하고 있다.

[YES24 제공]

 

2. 마음을 무찔르는 글귀

 

목차

-숨어사는 예술가를 찾아서

-절대고독 : 김근태. 경주 작업실에서

-최소한의 생계 : 김을. 경기도 광주 작업실에서

-갑판위의 시인 : 청도. 없는 작업실에서

-심플라이프. 쥐스킨트 소설의 주인공처럼 : 박정애. 방배동 작업실에서

-황토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의 기억 : 박문종. 담양 작업실에서

-그림은 한 개인의 몸에서 나온다 : 염성순. 정릉 작업실에서

-그토록 서럽고 슬픈 추억 : 정일랑. 양평 작업실에서

-혼과 육체를 저당잡힌 단식광대 : 김명숙. 청주 작업실에서

-시간을 간직한 나무들 : 최옥영. 강릉 작업실에서

-보행명상. 소요하고 명상하며 찍은 사진 : 정동석. 양평 작업실에서

 

-숨어사는 예술가를 찾아서

 

특정한 형태로 굳어진 가치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아나가는 것,

그러한 노력과 시도야말로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자 예술가의 전제조건이다.

 

 

김근태

: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권진규의 조각을 본 것을 기점으로 그는 예술에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경주 산속 '남애서당'에서 20년 가까이 혼자 살며 판화지 위에 흑연가루를 묻힌 손가락을 수천 번씩 문지르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김근태: 자신의 영혼을 흔들어준 <자소상>만을 떠올리며

자신도 그 세계에 이르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혼자서 조각을 공부하고 책을 읽어가면서

그는 점점 미술의 길로 하염없이 빠지는 자신을 보았다.

인간의 내부에 이르는 길.

그 어둡과 컴컴하고 고독과 절망으로 절여진 공간 속으로

깊이 천착해 들어가는 작품세계만을 열망하면서

젊음을 완전히 소진시켜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말한다.

 

모든 미술이란 내 안에서 안 태어나면 끝장이라고.

또한 만들고 그린다는 것 모두가

결국은 명료한 자기성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그는 이후 유럽여행에서 자코메티와 브랑쿠시의 세계를 만났다.

 

김을

: 금속공예를 전공했지만 회화로 선회한 그는 경기도 광주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작업비용을 벌 목적으로 공사장 일을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배운 목수 일로 최소한의 생계와 작업을 꾸려가고 있다.

 

김을

그림을 본다는 것은 타자의 흔적을 좇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이 남긴 부정할 수 없는 물질을 좇아 그 안으로 들어가보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흔적을 쫓아다녔을까?

그림을 보고 말을 건네고 그렇게 개인적인 만남의

자취들을 글로 남기는 일이 직업이 되어어버린 지금,

나는 무수한 타자들의 피와 살,

정신과 사유를 뜯어먹고 살아온 느낌이다.

내 몸과 의식 속으로 들어와 박힌 그것들은 끝없는 관찰과 해도

설명과 명상을 요구하고 재촉하다가 잔해처럼 사라진다.

 

나는 미처 다 알지 못하고 내 것이 되지 못한 그 잔해들을

서글프게 바라보지만 또다른 것들이 내 눈앞에 다가선다.

그겋게 작가들을 만나고 작품들을 스치면서 세월은 속절없이 간다.

인맥과 경제력, 학연이 없는 작가, 미술계 제도권의 권력과 먼 작가들은

제아무리 프로페셔널한 작가의식과 근성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고 배제될 수밖에 없다.

작품의 질이란 원래 학력, 경력, 재력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일의 과정, 결과,

관점과 자세에서 드러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술계에선 작품의 질에 관한 논의나 불합리한 구조에 관해서는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회화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내고 그려낼 수 없는

것조차도 그려내야 하는 자기와의 싸움이죠.”

그는 말하기를 사람을 그리려면 사람을 그려서는 안되고

산을 그리려면 산을 그려서는 안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산을 그릴 때 산을 그리면 그냥 풍경화가 되는데

하늘을 정성스럽게 그리기 시작하면 산이 되듯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주변을 살펴 그리다 보면 오히려 대상이

정확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고 애기한다.

 

그날 그는 내게 말했다.

가벼운 그림을 그리고 싶고,

가볍고 못 그렸지만 감동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그의 말이 환경처럼 떠돈다.

지금도 김을은 세상과 절연된 그 공간에서 그렇게 그림에 몰두할 것이다.“

 

 

청도

: 선원인 그는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로 갑판 위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한 바다를 그린다.

그에겐 아틀리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두 번의 개인전 이후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갑판 위의 시인 청도

갑판 위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순간 세상에서 놓여난 시전들이 자율이, 목적 없이 떠돈다.

목표를 망실한 눈은 거침없이 대기와 바닷속으로 함몰한다.

해서, 나는 기꺼이 투항한다.

 

바다는 끊임없이 그 무엇인가와 관계를 맺어야 했던 내 눈을 비로소 쉬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내 바다에 가 닿은 누은 그 현란한 변신에 긴장한다.

바다는 결코 규정될 수 없는 상태로 수시로 변하고 있다.

바다느 쉼없이 생성하는 살아 있는 존재이고 그 어떤 단일한 속성으로 귀결되지

못하고 그저 흔들린다.

 

어쩌면 바다는 이렇듯 헤아릴 수 없다는 데 그 매력이 있어보인다.

청색 바다를 흠집내는 백색 물결과 바람,

빛들은 또한 내 시선에 상처를 입힌다.

우리는 바다를 보지만 물과 빛과 대기가 만나서 이루는 바다의 표면만을 들여다볼 뿐이다.

단 한번도 바다는 동일한 모습을, 육체를 우리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물과 공기가 만나는 접점인 동시에 액체의 공간과 기체의 공간이 분리되는 수평선이

미묘한 빛과 더불어 변모하는 질료성의 바다를 겨우 고정시킨다.

바다는 우리의 삶과 역사와 함께했던 일상적 보금자리로서의 이미지요.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 내재한 무한함과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관념적 풍경으로 다가온다.

자연은 어디에나 있지만 풍경은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에게만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은 진정한 자연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이미지일 것이다.

언젠가 바슐라르는 “바다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크고,

항구적인 모성적 상징 중의 하나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의 근원인 물은 양수의 눅눅하고 따뜻한 원초적 기억을 자극한다.

거대한 모체로서의 바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고 흩어지는 접점을 동시에 지닌 원풍경이 바다다.

 

 

박정애

: 홍대 공예과에 입학했지만 다시 시험을 봐서 조소를 전공했다.

산행을 즐기는 그녀는 현재 방배동 작업실에서 심플하게 살며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심플 라이프, 주수킨트 소설의 주인공처럼 -박정애, 방배동 작업실에서-

자신의 일 이외에는 완전히 무심한,

심플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내가 만난 좋은 작가들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극구 두려워하는 존재들이다.

 

완벽하게 자신을 던지지만 동시에 그 모든 일을 무로 돌려버릴 줄 아는 그들은

낙관도 절망도 없이 그 경계에서 평심을 유지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자신의 작업이 결국 주어진 삶에서 잠깐 인연을 맺는 일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것밖에는 잘하는 게 없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 자들이다.

 

이런 무심함과 겸손함 속에서 결국 작업은 과하거나 넘치지 않고

신비주의나 허황한 예술지상주의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정확하고 예리하게 몸을 내민다.

다소 쓸쓸하고 호젓한 일상의 정경들을 단촐하게 추려낸

그 이미지들은 작가의 마음밭에서 일궈낸 것들이고

마음 깊은 곳의 시선으로 보아낸 것들이다.

 

작가가 떠올린 추억,

단상과 직관적인 느낌이 신체를 얻어 하나의 형상으로 출현한 것이다.

작가란 존재는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이는 자들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픔과 희망에 대해 발화하는 자들인 것이다.

환청처럼 떠도는 그 소리들...

 

최근의 산행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 흥겹게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왜 그처럼 산에 가는 게 좋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무엇보다도 목욕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에 그렇단다.

사물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되고 모든 게 맑아지는

그 느낌이 다른 무엇보다도 좋다는 것이다.

 

산행은 또한 일상을 슬쩍 지우고 사사로운 부딪힘이나 여러 관계들을

전체적으로 보게 해주는가 하면 좀 더 너그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작업하기에 여의찮은 겨울은 전적으로 산행에 바쳐지는 시간이다,

온통 눈 덮인 세계, 수직으로 상승하는 나무를 하염없이 보면서

그녀는 근본적으로 삶이란 끊임없이 헤매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단다.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완전히 삶을 연소하고 싶다는 바람은

결국 작업 속에서 자연스레 표현되고 있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작업은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의 자신의 삶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나온 것이다.

조각이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것,

그리고 사회와 역사 속에 포함된 나의 존재와 인간의 생명이 진화되어온

모든 시간이 농축된 집적소라고 그녀는 말한다.

따라서 작업하는 것은 사는 것에 다름 아니며

표현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에게 조각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박문종

: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동양화를 공부한 그는 한때 얼치기 동양화가로 행세하기도 했지만,

80년 광주 운동을 계기로 작품세계가 변모한다. 그는 현재 전라도 담양의 작업실에서 향토색 짙은 작품을 그리고 있다.

 

황토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의 기억 -박문종, 담양작업실에서-

좋은 그림이란 사물, 대상, 세계에 대한 작가의 깊이 있는 시선

(결코 상투적이거나 습관화된 것이 아닌) 아래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깊이 있는 느낌과 감각, 심화된 세계관이 어떻게 그림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특성과 효과적으로 융화되면서도 독립적으로 도드라질 줄도 아느냐

하는 점 또한 작가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조형적 힘과 그림에 대한 본원적이고 집요한 문제의식이 팽팽하게 균형을

잡고 있느냐 하는 점은 단지 그림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한 개인의 인생관, 삶의 자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벽을 하나 깨기 위해, 혹은 그것을 깰 때마다 만들어지는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삶의 방식은 우리의 사고와 삶이 나갈 수 있는 경계를 넓혀준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형태로 굳어진 가치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아나가는 것,

그러한 노력과 시도야말로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자 예술가의 전제조건이다.

풍경은 일차적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 환경을 대상으로 하지만

결국 그것은 인간의 감수성에 관한 문제이며

나아가서는 인간의 인식방법에 관한 문제이다.

자연을 대하는 인식의 방법이 실제의 현실적인 대상을 통하여 바라보거나

실천되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풍경이라 부른다.

 

즉 풍경이란 자연과 대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방법을 총칭하는 말이다.

대상에 대한 시각적인 관계에서 출발해 자연에 관한 태도로 귀착되는 풍경은

일종의 자연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이다.

따라서 우리가 풍경을 말하려는 것은 감미로운 감정을 되살려보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차 상실되어가는 가치관 그 자체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염성순

: 그녀의 회화에 대한 사랑은 화폭을 세개의 기초 단위, 모든 장르에서 맨 처음 입어야 할 속옷, 인류 문명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아름다운 희생자라고 일컫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현재 정릉의 작업실에서 예술가로서의 천형을 견디고 있다.

 

그림은 한 개인의 몸에서 나온다 -염성순, 정릉 작업실에서-

‘어쩌자가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가?’ ‘정말 무엇에 미쳐야 하느가’라는 고민과

넋두리를 거쳐 ‘어둠이란 실은 한 인간의 내면을 밝히는 램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단언에 이른다.

예술이 오늘날에도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비합리적인 소통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힘일 것이다.

그녀는 이미지를 다루는 예술이 비합리적인 신비의 세계를 드러내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그 세계와 소통하는 매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영성의 힘이자 이미지의 힘이고 그녀가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동인을 제공한다.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변신을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의 변신 욕망은 존재에의 향수를 원한다. 정신과 육체가 통합된 존재 말이다.

그녀는 문득 卽是現今 更無時節(즉시현금 갱무시절)‘을 말한다.

과거를 탓하지 않고 미래를 기대하지 않으면서 현재 이 시간이 전부라고 불교 선사어록 중의 한 구절이다.

 

‘그 예술가가 얼마나 심장으로 말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의 지혜는 우리의 광기보다 덜 현명하다.

우리의 환상은 우리의 판단보다 더 가치 있다.

진리는 방법 속에 있다. -타르코프스키-

 

정일랑

: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으며, 양평의 빈 농가를 손수 매만진 작업실에서

 흙을 가지고서 유년의 아름다운 시간과 기억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토록 서럽고 슬픈 추억 -정일랑, 양평 작업실에서-

삶이 다른 무엇에 의해 충만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의하여 충만될 수밖에 없다면,

제 몸을 매질하여 또 다른 연안을 꿈꾸는,

다소 무모해보이는 이 행위 또한 그녀에게는 운명적일 수 밖 에 없다.

그림 속으로 더욱 깊이 밀어넣으면 넣을수록

분명 두려움 또한 깊어지겠지만,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그녀의 운명인 것을.

 

 

최옥영

: 강릉의 폐교에서 한국의 나무, 흙, 자연과 만나고 있는 그는 원시적인 힘이 강조되는 구조와 형태 즉 순수한 조형성을 추구한다.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똥을 재료로 사용한 그의 작품에선 장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을 간직한 나무들 -최옥영, 강릉 작업실에서-

끌 자국이 고스란히 남겨진 나무 조각은 무엇보다도 내게 나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단단하고 격노한 나무의 일부는 나무로서의 그간의 세월을 묵묵히 보여준다.

 

나무는 그 자체로 온전한 역사고 삶이고 초상이고 하나의 자연이다.

나무는 스스로 나무다.

나무는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서 땅으로부터 수액을 끌어올린다.

그렇다면 나무는 땅 그 자체가 아닌가.

그래서 이 작가가 나무를 깎고 다듬는 행위는 흙을 매만지는 행위와 동일한 의미를 띠게 된다.

그간 나무와 돌과 소똥은 등으로 만든 그의 작품들이 결국은 모두 다 흙이었다고 생각해본다.

 

모든 생명은 땅으로부터 번식되어 나온다.

땅은 만물을 생기게 한다.

죽음과 삶을 번갈아 생산하고 또 재생산하는 영원한 모태가 바로 땅이다.

그러니까 땅은 거대한 자궁이다.

흙 토(土)란 한자는 여성의 성기를 상형화한 문자다.

그 자궁에서 수직으로 뻗어나온 나무는 돌과 함께 땅의 추억을 증거한다.

천상계와 지상계를 잇는 다리, 매개체로 여겨졌던 나무는 삶의 원천이고

생명(氣)이 뻗어나가는 시간의 과정, 생명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환경이란 결국 한 인간의 사고와 심미관의 윤곽을 규정하는 틀이다.

누구도 그 공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이나 유토피아 역시 인간이 구체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인간 역사 자체가 공간과의 관계에서 번져 나왔으며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의 창조와 관련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땅이라는 공간은 인간의 자기 실현의 장이자 심미적 장소에 다름 아니다.

조각을 하려고 주변에 쌓아둔 나무는 사계절의 변화를 몸소 겪고

밤과 낮의 온도차를 견디면서 오랜 시간을 거기 그렇게 있다.

작가는 그 오묘한 생존의 질서를 겸허하게 체득한다.

나무는 잘려서 이렇게 내 앞에 놓여 있다.

 

땅으로부터 추방당한 그 나무는 그러나 죽지 않고 숨을 내쉬며

수분을 빨아들이고 스스로의 몸을 치유하며 연전히 나무로서 생을 끌어간다.

작가는 그런 나무들을 보면서 그네들의 생명을 본다, 자연계의 엄숙한 생존질서를 깨닫는다.(중략)

나무엔 인간들의 삶의 흔적과 세월과 역사의 입김이 눅눅하게 배어 있다.

인간의 유한하고 찰나적인 시간을 넘어선 영원성이 나무의 피부와 살에 응집되어 있는 것이다.

그 표정은 위대하고 숭고하다.

 

오랜 시간이 깃들인 나무들은 자연히 둥근 형태를 띠고 있다.

시간은 하나의 둥근 원이다. 둥근 것은 구르게 마련이거,

그렇기에 원은 시간과 영원을 표상한다.

나이테가 둥근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최옥영의 근작은 대부분 둥근 형태를 띠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나무 속에서 끌어낸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의 흔적이란 말인가?

모든 형태들은 무리없이 자연스레 원형을 간직한 채 부드럽고 완만하게 놓여있다.

거기에는 자연과 생명을 여유롭게 관조하는 자의 마음이 깃들여 있다.

그것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조형에 인간의 손때를 묻힌다는 것은

인간의 미적 사고라는 미명하에 자연을 변형시키거나 변질시키는 일이다.

 

작가는 최소한의 표현언어를 보여준다.

그는 자귀와 평끌만으로 나무에 손을 댄다.

적당히 덜 만져서 미완성의 느낌을 주지만 그

건 작가가 물질의 본질과 평등하게 만나기 위해 의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질을 빌려 나를 표현하기보다는 물질 속으로 들어간 내가 물질과 만나 작품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조각의 질료인 물체(나무)의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스스로 견고한 물질감을 충분히 드러내면서도 자연스럽게 형태를 드러내는 그 미묘한 긴장이 엿보인다.

근작은 그런 체험,

 

깨달음 같은 것들이 훨씬 두텁게 감촉된다.

얼핏 보면 나무의 자연스러운 생김새를 거의 건드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우연히 모아둔 나무를 그저 오래도록 지켜보고 생각날 때마다 나무에게 말을 건네듯

다시 일정한 시간을 방치해두었다가

어느 날 또 눈에 들어오면 그네들 속에 감춰진 신비와 교감을 나눈다.

나무가 절단되거나 일정한 형상으로 변하는 데 있어

그 어떤 목적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작업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렇다면 자연 속의 모든 나무들이야말로 그 자체로 얼마나 완벽하고 아름답고 심미적인가?

 

그래서인지 그의 최근작은 인간의 손길을 더욱 줄이고 나무 본래의 상황을 존중해주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서구의 미니얼리즘과 연관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다.

서구의 미니멀이 물체의 본질을 극단적으로 제하히는 선에 머문다면

그의 작업은 나무의 본질을 파고들면서 자연을 최대한 존중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다만 작가의 나무가 자연의 나무와 다른 점은 일단

작가의 주관과 심미안에 의해 선택되고 일정한 공간에서 전시된다는 점일 것이다.

자연 속의 나무와 최옥영의 마무가 다른 점은 그의 몸의 감각이 나무에 어떤 식으로든 들어간다는 점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번의 만남이고 흔적이기에 역사성을 띤다.

그리하여 그는 물질을 깎거나 파들어 가거나 구축시키는 과정에 있어

최대한 벗어나 나름의 직관과 체험에 의지해 자발적으로 무의식적 형태를 찾아나간다.

 

지나친 외형의 추구를 배제하고 표현과 수식을 누르고 최대한 물질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질,

모양을 존중하는 자세는 결국은 생명존중,

자연에 대한 외경심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을,

그 같은 생태주의적 미술관은 우리의 전통미술의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자연의 미적 체험을 재현하려한 것이 동양의 미술 아니가!

오랜 경험과 명상을 통해 자연의 숨결과 율동과 조응하기를 기다려 통일된 질서고 표현된 것이 우리네 전통미술들이다.

 

 

정동석

: 그의 사진에 담긴 장소들은 모두 그가 얼마간 거처를 삼은 곳이기도 하다.

그는 전국 각처를 떠돌며 정직한 시선으로 우리나라의 자연을 담고 있다.

현재는 양평에 머물며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의 풍경을 찍고 있다.

 

보행명사, 소요하고 명상하며 찍은 자연 -정동석,양평 작업실에서-

자연이 바로 신이다.

사람이 사람다워진다는 사실은 자연과 얼마나 깊게 교감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알핏 우리네 풍수가 연상되는데

풍수란 땅의 질서와 인간의 논리 사이에 어떤 합치점을 찾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땅에 관한 지혜다.

땅에는 땅대로의 존재 근거와 질서가 있는 것이고

사람에게는 사람대로의 생존 본능과 윤리와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있다.

 

이 양자의 갈등관계에 화홰의 단서를 제공해줄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우리네 풍수일 것이다.

정직한 자연에서 배우고 그것을 평생 닯고 싶으며, 그렇게 살다 스러지고 싶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자연의 생태는 '생물이 자연계에서 스스로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렇게만 살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인간의 욕심이

그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약탈해 현재 자연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깨달음이란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깨달음 말이다.

그는 풍경이란 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작품 제목으로 '景'이란 말을 쓴다.

'경'이란 경치의 준말이다.하긴 풍경이란 말은 우리에게 원래 없었다.

풍경이란 서구적 개념의 특수한 장르 미술이며 역사적 산물이다.

동양화에서는 풍경화를 산수화山水畵 라고 한다.

풍경화에 합당한 단어는 없다.

우주를 간략히 표현하기 위해 산과 강(물)을 소재로 삼았을 뿐이다.

여기서 산과 강은 영원성과 변화를 상징한다.

사람들은 산과 강에 의해 표현되는 공간과 시간 안에 자연스럽게 놓인다.

그들은 익명의 존재이다.

 

산과 강의 풍경으로 상징된 우주 안에 사람ㅇ을 표사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알리고 있다.

그러니까 산수화는 인간과 자연의 특수한 관계를 상정하는 일종의 의미체계이다.

단순히 보이는 산천의 경계를 화폭에 옮긴 것이 아니라 특수한 자연관의 유형화, 의미의 체겨화를 뜻하는 것이다.

풍경은 서구의 랜드스케이프Landscape를 번역한 말이다.

풍風이란 공주의 대기를 가리키는 것이고 경景이란 빛 또는 그림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풍경이란 자연의 변화하는 대기와 기상 현상, 즉 물리적인 자연의 변화를 재현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서구인들의 자연관이고 자연풍경을 그리는 이유이다.

 

그것은 보는 이의 시선에 의해 대상으로 존재하는 자연을 물리적 현상 속에서 파악하고 기록한다는 것이다.

"당신이선을 공부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다.

선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산은 더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이상 강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운이 열리면 산은 다시 산이고 강은 다시 강이다".

선가어록의 한 구절이다.

진리는 동어반복인 것이다.

 

또한 산의 참다운 목표는 보잘것없는 일상적 삶을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 진리의 자리는 무위자연이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선 대상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속성은 자연의 미학화 또는 자연의 사회화, 지연의 문화화이다.

자연을 그대로 옮기거나 확대, 축소시키기도 하고 또는 자연을 뒤틀기도 한다.

다시 말해 자연을 낯설게 한다.

 

그것은 자연을 보다 더 잘 보고 의식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예술적 아이러니이며 모순어법이다.

그 텍스트는 또 얼마나 절묘하게 아름다운가?

그 아름다움에서 멀리 벗어나 있으면서 대상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를 참혹하게 발설한다는 의미에서만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하나의 틈으로, 상처로 벌어져 있다.

그는 사진을 통헤 생을 찍고, 생을 사는 동안 열심히 세상을 들여다보는 사진작가로서의 업에 가장 충실한 작가이다.

그래서 나는 그이 늘 변함없는 침묵과 눈가의 잔잔한 웃음에서 선승의 얼굴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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