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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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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3일 11시 58분 등록

 

칼럼11. 책쓰기 

--첫 책을 위한 이런저런 단상들  

 

1.  의심 없는 믿음 한 조각  -  내 안의 불꽃,  재능  

2.  왜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지 않나?  -  넘고 싶은 한계

3.

4. 

 

 

 

 

나는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요리는 그리 열심히 하지도 않고 잘 하지도 않으면서도 그냥 만만하다. 자신이 있다. 이 자신감은 6살 무렵, 몰래 성냥불을 그어 보고, 부엌에 들어가 가스불을 활짝 켜봤던 그 두려운 모험의 손맛 끝에 생겨난 쾌감에서 비롯되었는 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무렵, 부엌에서 요리하는 할머니 옆에 딱 붙어서 오늘은 뭐 만드냐 어떻게 만드냐 물어보는 게 내 하루의 중요일과였다. 초등 3학년 어느 날, 아무도 몰래 시도해 보았던 밥짓기, 나는 하나도 태우지 않고 가스불을 조절하여 양은 냄비에 흰 쌀밥을 성공적으로 지어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무슨 요리든 나는 다 할 수 있다는 진정한 자신감을 내 왼쪽 가슴에 훈장처럼 달 수 있었다.  타인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말이다. 요리는 나의 유년시절의 즐거운 취미가 되었고..... 

 

 

유년시절 나의 대표요리는 오므라이스였다. 

 

노란 해바라기가 그려진 6장의 애나멜 재질의 큰 양식 접시를 휙휙휙휙휙휙 깔아놓는다.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 각 가정의 주부들 손에는 일본산 플라스틱 애나멜 그릇이 열풍적인 인기 몰이를 하고 있었다.  당신 일에 바빴고 요리에 별 취미가 없는 터라, 요리의 '요'자도 시도하지 않았던(?)  엄마였지만,  일하는 여성으로서  평소 요리 못하는 미안함을 보상이라도 하듯 엄마는  별의 별 그릇, 요리기구 등을 다량으로 사들이곤 했다.  엄마가 가족 수 대로 사 놓은 해바라기가 그려진 노란 무늬의 접시는  그 날 이후 내 요리의 기본 캔버스가 되어주었다.  어떤 요리라도 마음대로 담아내는 무한의 상상 공간이 되었다.

 

감자, 당근, 양파를 넣어 달달달 볶아낸 볶음밥을 지져낸 달걀물로 말아서 오므라이스 6인분을 만들어낸다.

 

오므라이스가 완성된 후라이팬에  노란 애나멜 큰 접시에 엎고 '하나 둘 셋'  마음 속으로 다짐하듯 조심조심 기운을 조절하여 횟딱 순식간에 접시 위로 뒤집어 내면 나만의 오므라이스가 완성,  발갛고 새콤달콤한 케찹만 그 위에 주욱 짜서 둘러 내면  정말 군침도는 행복한 순간이다.

   

때는 바야흐로 초등 5학년 시절이었고, 평소에 나를 무척이나 괴롭혔던 셋째 언니도, 늘 나에게 대들던 우리집 장손,  나 바로 밑의 남동생도 나의 오므라이스 요리 앞에서는 고분고분 순한 양이 되어 아주 맛나게 음식을 먹었다나는 흡족한 눈빛과 만족스럽게 그릇을 싹싹 비워내는  집에서의 내 적(?)들을 바라보며 묘한 쾌감이 들었다.  요리 하나로  꿀먹은 벙어리로 한 방에 정리해 버린 느낌이랄까? 먹는 이 순간 만큼은 평화의 순간이다.  나의 요리 앞에서는 내가 더 이상 괴롭힘(?) 당할 필요가 없었고  6남매가 서로가 하나가 됨을 느꼈다.

 

이렇게 요리는 나에게 아주 즐거운 놀이이자 타인을 컨트롤하는 수단이었다. 

요리는 나를 표현하는 무기였고 나 스스로를 의심없이 세상에 세워주는   내 안의 자존감이자 재능이었다.   

 

 

 

**

그런데 마흔이 넘은 지금, 나는 그리 열심히 요리를 하지 않는다. 

그냥 필요한 만큼 보통의 여느 주부들 정도로만 할 뿐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언제나 내가 아주 맛있는 요리를 하여  자기네을 초대할 거라고 상상했던  언니 동생들은 약간 실망한 눈치지만,  초등시절 찬란하게 내뿜었던 내 요리에 대한 열정은 지금 내게 없다.  왜 그럴까?  왜 그 열정이 사라진 걸까?  물론 지금도 나는 요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뭐든지 나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만만함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창조적이고 실험적인 놀이로서의 요리를 더 이상 하지는 않는다.  내가 잘하는 것에 싫증이 난 것일까?  더 잘 하고자 하는 기대수준이 너무 낮아서일까?  나는 그저 요리 자체를 즐겼을 뿐 더 잘하고자는 생각도 요리로 내 인생의 직업으로서의 승부를 걸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요리를 무기로 더 이상 누군가를 유혹하고 컨트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요리는 언제 하여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니 특별히 배울 필요도 더 많이 해보고 싶은 욕구도 못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현재 우리 집안에는 '요리가 제일 싫다'며 늘 설거지를 도맡아 하던 둘째 언니가 열심히 요리 중이다. 

벌써 몇 년 째 매주 요리 수업을 마실 나가듯 다니고 있고  우리 집안에서 가장 많은 레시피를 보유하고 있다.  나 역시 새로운 요리,  특별한 양념 비법은 둘째 언니에게 물어보고 힌트를 얻는다.  그런데 언니는 매일같이 요리하지만 자기는 요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누가봐도 요리를 잘 하고 요리 선생에 가까울 정도로 요리에 뛰어난 사람은 바로 둘째 언니다.  나의 요리실력은 그냥 대충 내 마음대로 하는 정도다.  매일같이 수련하고 연구하고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지 않았기에, 물론 레시피를 컨닝하고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맛도 모양도 우리 언니처럼 균일하게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런데도 나는 요리가 좋으냐 물으면 '요리가 좋다,  잘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도대체 재능이란 뭘까?   '그것이라면 내가 잘 할 수 있다는 자기 안의 믿음 조각'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이거 잘 하세요?" 라고  물으면

내 안의 재능은 의심없이 "네"라고  얼른 대답한다. 

비록  지금 내가  그걸 하고 있지 않거나 아주 잘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재능은 재능일 뿐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때,  깊은 몰입에 빠져 열정을 불태우는 법을 배우며 순간 재능이 주는 자존감의 극치를  경험한다. 

재능은 스스로를 의심없이 믿게하는 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재능은 부싯돌과 같다.  삶의  열정을 붙히는 첫 불꽃.  하지만 재능은 삶을 꾸준히 끌고가는 원료가 되지는 못한다.  삶을 끌고가는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습관이다.  내 둘째 언니는 요리를 싫어했지만 요리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매일 매일 꾸준히 새로운 요리 만들기를 시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재능은 어린 시절 자신을 들여다보고 느끼는 첫 마음,  자존감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매일의 습관으로 굴러서  현실적 무기로 더 이상 키워지지 않은 재능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숱한 재능이 있고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을 10분의 1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사람들은 키워지지 않은 재능을  헌신짝 버리듯이 던져버린다.  하지만 재능은 살아가면서 난관에 부딛혀 순간 자신의 무릎팍이 꺾였을 때,  다시 삶을 일으켜 세우는 부싯돌 같은 불꽃으로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재능이 제대로 발현되어 그 사람의 꿈으로 키워지고 사회적 성공과 자기실현으로 연결되면 더욱 좋겠지만, 어린시절 처음으로 느꼈던  내 안의 첫 믿음으로서의 재능은 '자기 몰입과 열정의 경험' 그 자체로도 의미롭다.

 

 

어린시절의 재능,  내 안의 잠재력은  여전히 우리 삶을  은은히 밝혀주는 내면의 불꽃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2014년 3월 3일

                                                                                                                                                서은경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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