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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6일 22시 20분 등록

피로사회

병철

문학과지성사

 

1. 저자에 대하여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피로사회(2010)를 통해 독일에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가장 주목 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올랐으며, 한국에서는 2011년 출간된 권력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종류 죽음에 대한 철학적 연구’ ‘폭력의 위상학’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2.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6 이러한 예상밖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이 책이 소진증후군,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등과 같은 정신질환의 역사적 위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는 문장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심리 장애를 오늘날 성과사회의 근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반적인 패러다임 전환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 책의 테제였다. 자기 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원리로서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올린다. 그러한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11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 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의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12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13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15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16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 예방접종 역시 부정성의 변증법을 따른다.

 

17 폭력은 부정성에서 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질적인 것, 낯선 것 뿐만 아니라 같은 것도 폭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8 비면역학적 배척은 같은 것의 과다, 긍정성의 과잉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부정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19 보드리야르가 구성한 적의 계보학에 따르면 최초 단계의 적은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20 적대성의 계보학은 폭력의 계보학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도 눈에 덜 띈다. 긍정성의 폭력이 깃드는 곳은 부정이 없는 동일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

 

21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22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23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24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26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27 정작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저 인간형을 가리켜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자신을 착취한다.

 

28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30 멀티테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32 발터 벰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34 사색적 삶이라는 표제어로 그러한 삶의 본래 고향이었던 과거의 세계를 다시 불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색적 삶은 아름다운 것과 완전한 것이 변하지 않고 무상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존재 경험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러한 삶의 기본 정조는 사물들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조작 가능성이나 과정상에서도 벗어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감이다. 근대의 데카르트주의는 이러한 경의감을 회의로 대체한다.

 

35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 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려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38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버린다.

 

41 그런데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정확히 말해서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왜 모든 인간 활동이 후기근대에 와서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지는가,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초조하고 부산한 상태에 빠지는가 하는 물음은 다른 대답을 요구한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노동하는 동물이 어떤 유에 속하고 자신이 속한 유를 위해 노동하는 것이라며 여기에는 동물다운 느긋함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덜어주고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회되었으며,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

 

43 그러니까 배제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호모 사케르인 셈이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죽지 않는 자들이다. 여기서 사케르라는 단어는 저주받은 이 아니라 신성한을 의미한다. 신성한 것은 벌거벗은 생명 자체다. 그리하여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존되어야 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 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46 그러니까 그녀 (한나 아렌트) <활동적인 삶>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자기 의도와는 달리 사색적 삶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바로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무엇보다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이 있으며 근대적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47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한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배움의 목표는 니체에 따르면 고상한 문화이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눈으로 하여금 깊고 사색적인 주의의 능력,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아렌트는 활동성의 변증법을 인식하지 못한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없이 모든 자극에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49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 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53 무의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의의 순수한 부정성, , 공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55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는 빈번히 형이상학적 관심이나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지만, 병리학적 독해도 작품에 대한 또 다른 이해의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이 월Wall가의 이야기가 묘사하는 것은 모든 주민이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해버린 비인간적 노동 세계이다. 고층 빌딩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사무국의 음울하고 반생명적 분위기가 상세하게 그려진다.

 

57 바틀비 자신도 칸막이 뒤에서 일하면서 멍한 상태로 죽은 벽돌벽을 바라본다. 벽은 언제나 죽음을 연상시킨다.

 

(바틀비)그는 복종적 주체이다. 후기 근대적 성과사회의 표징인 우울증의 증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61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카프카의 단식곡예사에서 환상은 더 철저하게 사라진다.

 

62 단식곡예사에게 자유의 감정을 주는 것은 오직 거절의 부정성뿐이다.

 

65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 간다. 그 와중에 브레인 도핑처럼 부정적인 표현은 신경향상으로 대체된다. 도핑은 말하자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66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67 나는 그녀에게 나는 너한테 지쳤어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냥 지쳤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그렇게 외쳤다면 우리는 각자의 동굴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피로는,. 본래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아무 말 없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는다. 아마도 이러한 폭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직 타자를 일그러뜨리는 시선 속에서뿐이었을 것이다.

 

68 한트케의 피로는 시계를 신뢰하는 피로이다. 그것은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에 새어 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그것은 고독한 피로 속에서 완전히 파괴된 이원성을 복구한다. 우리는 보고 또 보여진다. 우리는 만지고 또 만져진다.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 그런 피로를 통해 비로소 머물러 있는 것, 한곳에서의 체류가 가능해진다. 자아가 줄어들고 이는 세계의 증대로 나타난다. 피로는 나의 친구였다. 나는 돌아와 있었다. 이 세상에 .

 

69 근본적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피로의 영감은 무의에 관한 것이다.

 

오히려 피로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

 

지친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의 사랑을 얻었다. 피로는 젊음을 가져다 준다.

 

70 한트케는 노동하는, 움켜쥐는 손에 놀이하는 손을 맞세운다. 놀이하는 손은 결연하게 움켜쥐지 않는다. 매일 저녁 여기 리나레스에서 나는 많은 꼬마 녀석들이 노곤해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쥔 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72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73 오순절 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수 있을지도 모른다.

 

81 카프카는 대단히 난해한 단편 프로메테우스에서 몇 차례에 걸쳐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재해석 작업을 수행한다.

 

나는 또 하나의 재해석을 통해 이 프로메테우스 전설을 내적 영혼의 장면으로, 즉 오늘날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며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성과주체의 심리적 기구에 관한 묘사로 파악하고자 한다.

 

82 끝없이 다시 자라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2의 자아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피로 속에서 자아는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긴다.

 

88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자와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반면 나르시즘에서는 타자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나르시시즘적 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타자관계가 소실되고 이에 따라 안정된 자아의 이미지도 형성되지 못한다.

 

91 우울증 환자는 무형적이다. 그는 성격 없는 인간이다.

 

93 우울증에는 무의식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우을증에 걸린 성과주체의 심리장치를 지배하는 것은 더 이상 무의식이 아니다.

 

95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

 

97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자주성에 지쳐버린 사람, 즉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될 힘을 상실한 사람이다. 그는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 있는 것이다.

 

101 사회적 정칮거 사건은 더 이상 이념들 사이의 분쟁이나 계급 간 분쟁으로 규정될 수 없다.

 

동의의 긍정성이 폭력의 원천이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의 전일적 지배는 현재로서는 합의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102 후기 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예속적 본성을 지닌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긍정화하고 해방시켜 프로젝트가 된다.

 

103 다만 타자에 의한 강제가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로 대체될 따름이다. 이러한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이 된다.

 

103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104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112 니체라면 활동괴잉의 인간을 역겨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영혼은 평정을 유지하고 천천히 움직이며 지나친 활발함에 대해 거부감을 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 못한다. – 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낳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113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단순한 생명 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

 

114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쓰고 당신은 당신 자신을 착취합니다라고 읽는 법을 한병철은 가르쳐준다. 정신의학의 트랜드를 통해 현대 사회 시스템을 진단하는 방식이 다. 이 책의 주제의식은 분명하다. 회의적 사고가 아니라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사색의 권위를 복권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는 니체에서 출발한다. 모름지기 니체가 외침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는 저자의 의지가 보인다. 동의한다.

 

다만 이 책이 말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아쉽다. ‘연대하라는 메시지가 이 책에는 없다. 요컨대 사색의 권위를 복귀시키는 니체는 있지만 시대의 피해자들이여! 연대하라는 맑스가 없다. 당연하다. 착취하는 자아는 있지만 착취하는 타인이 없다고 한병철은 보고 있다. 한병철니체는 니체로 읽어야지 마르크스로 읽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 할 것 같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주면서 동시에 자신을 착취하는 폭력을 준다고 한병철은 알려준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피해자들끼지의 연대는 불가능하다는 게 한병철의 입장이다. 자기착취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게으름’, 즉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 같다.

 

* 신진철 교수와 한병철 저자의 대화를 한부분 발췌한다. 타자의 착취, 즉 정의로움을 이야기하는것과 한병철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진철: ‘정의론’에서 ‘성과 정의’는 분배 정의의 중요한 한 차원으로 이해되어 왔다. 특히 사회민주주의 전통에서 노동, 성과, 기여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사회적 정의’의 중요한 측면이었고, 이는 자유주의 정의론이 주로 ‘기회의 정의’에 집중해온 것과는 구분됐다. 오늘날 사회 현실에 대한 주된 비판 가운데 하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동에 상응하는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반면 극소수의 사람들이 사회의 대부분의 자원을 가져간다는 것 아닌가? 이른바 ‘20 80 사회’ ‘1% 99%’ ‘승자독식 사회’ 등의 규정들은 그런 분배 정의의 훼손을 가리키고 있다. 한 교수의 성과사회 비판은 이런 분배 정의의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가?

 

한병철: 나의 피로사회 담론은 정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피로사회의 희생자는 분배를 못 받은 서민만이 아니라 수입이 많은 매니저, 교수들이다. 적은 양의 파이를 차지하는 대다수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양의 파이를 차지하는 소수도 희생자다. 신 교수는 분배를 적게 받는 사람들을 희생자로 보지만, 나의 피로사회 담론에서는 분배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착취한다. 마르크스주의적인 범주를 가지곤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를 이해하기 힘들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2872.html)

 

 

나는 내 책에서 경이로움을 다루고 싶다.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힘의 복권을 다루고 싶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한병철과 같은 정신의학적 배경지식이 나에게는 전무하다. 그렇다면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내 삶의 경험속에서 시작하는 방법외에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등산을 하면서 만난 경이로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의 경이로움. 두 딸을 얻을 때의 경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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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 (No.41)움베르토 에코 [젊은 소설가의 고백] 레드박스 - 서은경 file 서은경 2014.03.18 3335
980 안병욱_인생론 file 라비나비 2014.03.18 5023
979 <중년의 발견> 데이비드 베인브리지 지음 file 제이와이 2014.03.18 2658
978 No 46 도형, 그림의 심리학 file 미스테리 2014.03.18 9707
977 #42.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때 / 파커J. 파머 쭌영 2014.03.25 5480
976 #[&] 떠남과 만남(구본형) 땟쑤나무 2014.03.25 1909
975 <나이듦의 기쁨 MY TIME> file 제이와이 2014.03.25 6117
974 우리의노동은왜우울한가_스베냐플라스푈러 유형선 2014.03.25 1986
973 No 47. 즐거움의 가치사전-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 file 미스테리 2014.03.25 3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