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14년 3월 17일 00시 22분 등록

구스피릿 40번째 북리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돌배게)”

 

1. 저자소개

신영복(申榮福) - (): 위경(葦經), 소당(紹堂), 우이(牛耳), 쇠귀

1941년 경남 밀양 출생

1963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숙명여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1988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1989년 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

2006 8월 정년퇴임

 현재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석좌교수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2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8년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수감 중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을 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것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출소 후,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를 역임하였고 2006년말에 정년 퇴임하였다. 퇴임 당시 소주 포장에 들어가는 붓글씨를 그려주고 받은 1억원을 모두 성공회대학교에 기부하였다.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나눔과 소통을 하고 있다

육군 교관으로 장교였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된 후 충격을 받고 ',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마침내, 그 고뇌와 사색은 20년내내 이어져 완전히 '인간성이 개조'되는 내적 자기혁명을 이루어 낸다. 신영복은 교장의 아들로 성장하여 민중의 삶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남다른 애착은 없었다. 그런데 감옥에서는 밑바닥을 살아온 기층민중과 24시간을 맨살을 부대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을 통해 자신이 지식청년으로서 가지고 있던 창백한 엘리트주의적 관념성과 '먹물성'을 통절히 비판하고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된다. 감옥에서의 삶은 서로가 알몸으로 부대끼며 가식없이 숨김없이 사는 탓에, 한방에서 오래 살다보니 서로의 과거와 생각을 공유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번은 목수출신이 집을 그릴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책이나 이론으로 배운 세계가 현실과 완전히 다를 수있다는 생각에 그간의 인식틀을 깨부순 것이다. 무엇보다 10여년간 교도소에서 노동을 하면서 목공, 영선, 제화공, 재단사등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며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인간 개조론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특히, 감옥에서의 비전향 장기수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관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지 않을 수없었다. 막연하게 책에서나 보아온 분단과 전쟁의 피투성이 현대사의 이야기를 직접 이를 경험한 빨치산과 투사들을 통해 생생히 들음으로써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화석'처럼, 살아있는 역사체험을 한다. 또한, 한학자 출신의 사상장기수로부터 동양고전과 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서구사상에 매몰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자존을 깨닫고 고전학습에 몰입한 나머지 이후 성공회대에서 동양철학도 강의할 수 있게 된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다. 이도 감옥에서 여러 장기수 선생으로부터 지도받은 결과라 한다. 한문 서체로 익힌 필법은 한글에도 응용해 민중 정서에 맞게 민체, 연대체, 어깨동무체라는 글씨체를 창안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감옥 20년의 삶이 완전히 인생을 바꾼 진정한'나의 대학시절'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의 동무들은 그가 출소하자 ', 너 하나도 안 변했네'라고 감탄했다 한다. 그의 삶의 철학과 신념은 변함없이 "더불어 숲"을 이루는 것이었기에.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엽서(1993년)

나무야 나무야 (1996년)

더불어 숲 1 (1998 6월)

더불어 숲 2 (1998 7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 8월)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 4월)

신영복의 엽서 (2003 12월)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 12월)

처음처럼: 신영복 서화 에세이 (2007 1월)

청구회 추억: Memories of Chung-Gu Hoe (2008 7월)

•For the First Time: 처음처럼(영문판) (2008 8)

신영복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2010 12)

변방을 찾아서 (2012 5)

 

「역서」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년)

사람아 아!사람아(1991년)

루쉰전(1992년)

중국역대시가선집(1994년)

 

[ 출처 ] 

1)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EC%8B%A0%EC%98%81%EB%B3%B5

2) 더불어 숲(신영복선생님 홈페이지)         http://www.shinyoungbok.pe.kr/

3) 한겨레 21 칼럼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6/05/021075000200605110609056.html

4) 한길사 '사회와 사상 제 15' : 대담/인터뷰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 만에 가석방된 신영복씨 - 월간 '사회와 사상' 1989 11월 통권 제15

http://www.shinyoungbok.pe.kr/index.php?mid=writings&document_srl=147&sort_index=title&order_type=desc

 

*** 신영복선생님의 홈페이지더불어 숲에는 그의 저서 전권이 오픈되어 있다. 온라인을 통해서 그의 책과 그와 관련된 대부분의 인터뷰를 만나볼 수 있다 ***

 

< 저자 인터뷰에서의 인상적인 글귀 >

- "모든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버리지는 않아요. 바깥에 나가면 뭘하고 어떻게 될 거라는 환상까지 포함한 희망을 여전히 갖고 살지요. 나의 경우 오랜 세월 여기 살아야 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나간다는 희망 그것보다 여기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배운다는 사실이 훨씬 더 자신을 지탱하는 데 큰 희망이 되어주었습니다. 공장에서 전혀 새로운 사람들과 같이 작업을 한다든가 뜨거운 인간관계를 만든다든가, 스스로의 관념적인 껍질을 하나하나 벗어나는 체험을 하면서 그날그날 살아간다는 것은 아득한 희망에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생동감 있게 스스로를 견뎌내게 했습니다."

- 나는 관념적이든 창백했든간에 지식인의 사고를 갖고 있다가 전혀 인연이 없던 재소자들의 사회, 우리 사회 밑바닥의 소외된 동네에서 20년이란 세월을 살았던 것인데, 이 기간 동안 제가 의도적으로 시도했던 것은 자기개조 자기변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이들과 더불어 어울리면서 나의 관념성을 척결하고 뜨거운 현실성과 구체성을 획득해보겠다는 노력을 의식적로 했는데, 20년을 그 속에서 있다가 나와서 만나본 옛날 친구들은 그 외형은 많이 변했지만 그 사고의 유형이라 할까 의식구조는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았어요. 사람이 참 달라지기 어렵다, 자기 자신을 변혁시키고 개조해나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걸 느꼈습니다. 나의 경우를 투사해보아도 마찬가집니다. 징역들어가기 전과 징역살다 나온 이후 나는 과연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결국 개인을 단위로 하거나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인간의 변혁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를 어느 동네, 누구의 이웃에, 어떤 문제 속에 자기를 세우는가에 따라 그 변혁은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고 완성된다는 겁니다. 한 개인의 변혁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2.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의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 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잇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와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1985 8계수님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오늘은 다만 내일을 기다리는 날이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며 내일은 또 내일의 오늘일 뿐이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저녁에 날기 시작한다. (20)

프리드리히 헤겔 [법철학] 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오른다로 언급.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철학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통, 역사연구에서는 거리두기의 지혜를 의미한다. 아침부터 낮까지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그 즉시 관찰해선 모든 걸 제대로 알기 어렵다. 일이 끝난 황혼녘에 가서야 지혜로운 평가가 가능해진다는 주장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오랜 시행착오 끝에 갖게 된 지혜의 가치를 역설할 때에 쓰이기도 한다.

방안 가득히 반짝이는 이 칼끝 같은 빙광 氷光이 신비스럽다. (…)천공의 성좌 같은 벽 위의 빙광은 현재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세계이다.(이십일)

기온이 내려갈수록 이 빛은 더욱 날카롭게 서슬이  서는 듯하다. 나는 이 빙광이 날카로워지면서 파릇한 빛마저 내뿜는 때를 가장 좋아한다.

그저께는 바깥날씨가 많이 풀린 모양인지 이 벽의 성에가 녹아내리는 것이었다. 지렁이처럼 벽을 타고 질질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흡사 시체처럼 처량하고 징그럽다. 지렁이의 머리짬에 맺힌 물방울에서 흐릿한 물빛이 반사되고 있기는 하다. 흐릿하고 지루한 빛을 둔하게 반사하면서 느릿느릿 벽을 타고 기어내린다. 그것도 한두 마리의 지렁이가 아니라, 수십 마리의 길다란 지렁이가 거의 같은 속도로 내려올 때 나는 공포를 느낀다. 끈적끈적한 공포가 서서히 나를 향해서  기어오는 듯한 느낌이 눈앞의 사실로 다가온다.

이런 축축한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에 나는 어서 기온이 싸늘히 내려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방안 가득히 반짝이는 그 총명한 빙광을, 그 넓은 성과를 보고 싶다.

그 번뜩이는 빛 속에서 냉철한 예지의 날을 세우고 싶다.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22)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 평범한 능력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따라서 문화는 이러한 능력을 계발하여야 하며, 문명은 이를 손상함이 없어야 한다.

가장 선한 것은 무릇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Das beste solite das liebste sein.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칭 옥살이라는 것은 대립과 투쟁, 억압과 반항이 가장 예리하고 표출되어 팽팽하게 긴장되고 있는 생활이다.  궁핍은 필요를 낳고 필요는 요구를 낳으며 그  요구가 관철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투쟁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판이다.

그런데 그 요구의 질과 양이 실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일광욕 투쟁, 용변 투쟁, 치료, 식수…… 바깥 세상에서는 관심 밖의 것들이 거의 전부이다.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24)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24)

세상이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투쟁은 그것을 멀리서 맴돌면서 볼 때에는 무척 두려운 것이지만 막상 맞붙어 씨름할 때에는 그리 두려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창조의 쾌감 같은 희열을 안겨주는 것이다.(24)

오늘날의 문학  예술인에게 필요한 것은 과감한 쿠데타이다.

농촌 아이들은 참 많이 죽는다농촌에서는 강한 아이만이 어른이 될 수 있다. 살아남은 그 어른들을 보고 성내 사람들은 농촌 사람들이 무병하고 건강하다고 말한다. 맑은 공기에 산수, 일광이 좋아서 농촌 사람들은 무척 튼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골 어머니들이 흘린 그 숱한 눈물을 모르는 것이다. (26)

농촌 사람들은 흡사 초목과 같다. 어려서는 푸성귀를 솎아내듯 약한 놈들을 솎아버리고 늙어서는 수목처럼 모든 질환의 고통으로부터 감각의 문을 닫아 버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26)

고독하다는 뜻은 한마디로 외롭다는 것, 즉 혼자라는 느낌이다. 이 것은 하나의 느낌이다. 객관적 상황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주관적 감정의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27)

자신이 혼자임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반드시 타인이 없는 상태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감정이다.

사회란 모두살이라 하듯이, 함께 더불어 사는 집단이다. 협동노동이 사회의 기초이다.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함께 만들어낸 생산물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 곧  사회의 이유이다. 생산과 분배는 사회관계의 실체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관계의 토대이다.
그러므로 고독의 문제는 바로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의 소외문제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만들어내고 나누는 과정의 무엇이 사람들을 소외시키는가? 무엇이 모두살이를
살이로 조각내는가? 조각조각 쪼개져서도 그 조각난 개개인으로 하여금 흩어져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28)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이간관계가 대안의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계절……. 담장과 울타리. 공장의 사유, 지구의 사유, 불행의 사유, 출세의 사유, 숟갈의 사유……
개미나 꿀벌의 모두살이에는 없는 것이다.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나는 어린이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중요한 것은 첫 대화를 무사히 마치는 일이다.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서로의 때에 따라서는 몇 년씩이나 당겨주는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꼬마들에게 던지는 첫마디는 대답을 구하는, 그리고 대답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31)

여기가 서오릉 가는 길 맞니?” “,맞아요가 아니라 , 일루 곧장 가면 서오릉이에요였다..(…)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것이었다.(32)

버스 종점에서 반쯤 온 셈인가?” “아니요, 반두 채 못 왔어요.” (…) 이렇게 하여 일단 대화의 입구를 열어놓았다. 이제 더 깊숙히 이 꼬마들의 세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때 그들로부터 한 묶음의 진달래 꽃을 선물(?) 받았다.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서 가장 밝은 진달래 꽃빛은 항상 이때에 받았던 진달레 꽃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34)

가창 독수리 부대이며, 옷차람이 똑똑치 못한 이 가난한 꼬마들과의 가느다란 인연은 이렇게 봄철의 잔디밭에서 진달래 맑은 향기 속에 이루어졌다. 이 짧은 한나절의 사귐으로 나는 나대로의 자그마한 성실을 가지고 이룩한 것이었다. (35)

(조대식, 이덕원, 손용대 세 녀석이 보낸) 이 편지는 분명히 일침의 충격이며 신랄한 질책이 아닐 수 없었다. 나보다도 더 훨씬 더 성실하게 그 날의 일들을 기억하고, 또 간직하고 있었구나 하는 나의 뉘우침, 그 뉘우침은 상당히 부끄러운 것이었다.(36)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장충체육관 앞의 넓은 광장에서 우리 일곱 명은 옛친구처럼 반가이 만났다. 그러나 이미 한 시간 전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 녀석들의 정성앞에서 나는 또 한번 민망스럽고 초라할 수 밖에 없었다. 한 시간이나 먼저 와 있었다는 사실이 무모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되기는커녕 그들의 진솔함이 동상처럼 높이 올려다 보이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7시에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968 7월 내가 구속되기까지 매우 충실히 이행된 셈이었다. (37)

과연 길 저편의 전봇대 뒤에 꼬마 둘이 서 잇었다. 우리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리자 그 두 명의 꼬마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같이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두 명의 아이가 틀림없이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전봇대 뒤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마음씨야말로 딱할 정도로 착한 것이 아닐 수 없다.(39)

언젠가 멋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46)

큰 슬픔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작은 기쁨이 이룩해내는 엄청난 역할이 놀랍다.(49)

개인의 생명이든 집단의 생명이든 스스로를 지키고 지탱하는 힘은 자신의 내부에, 여러 가지의 형태로, 곳곳에 있으며 때때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는다.(49)

8초 총원들은 대게 세면 시간까지 다시 취침을 하시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이 시간에 책을 읽는다. 요즈음은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읽는다. 읽을 만한 책이 귀하여 읽는다기보다 거의 외우다시피 읽고 또 읽는다.(51)

최근 내가 보고 있는 책은 [Analytic Geometry and Calculs], [난중일기], [네루의 옥중서간집] 등이다.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 한 번씩 읽은 책이지만 책이란 자기가(독자가)변하면 내용도 변하는지 다른 느낌을 받는다.(53)

어쩌면 사형수는 물론이고 장기수들은 모두 인생을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누구보다도 약하고 서러운 자이기 때문에 그 표현이 치열하고 극성인지도 모른다.(55)

괴롭고 서글픈 하루의 마지막을 알리는 취침 나팔소리마저 자지러지고 나면 이 8호 감방에도 이윽고 무덤 속 같은 정적이 찾아든다. 가끔 악몽에 시달리는 잠꼬대가 이 정적을 깨뜨리기도 하지만 내일 아침 기상 나팔소리가 칼끝같이 이 정적을 쪼갤 때까지 여기 이 감방은 그대로 하나의 무덤이 된다.(55)

20 2개월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신영복 선생님이다. 이 글은 그의 옥생활 초기인69~70년 새인, 초기 2년에 쓰여진 글이다. 물론 훗날 감옥생활이 어느 정도 적응되고 나름 편해(?)지긴 했을지 모르나. 매일 밤 하나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생활을 20년이나 견뎌온 것이다. 관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인상이라고도 하는 그 분의 푸근한 인상을 보면 20년 의 감옥생활이 무색하리만큼 순수해 보인다. 거울을 보면 미간에 정확히 세 줄에서 네 줄 정도의 주름이 간 얼굴, 팔자주름도 짙게 자리잡기 시작한 한 남자가 보인다. 과연 그는 이 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57) (…) 그러나 오늘같이 비가 내리는 날이면 자구만 밑이 꺼지는 공허를 어쩔 수 없습니다. 진흙바닥에 발이 박혀서 신발마저 뽑아내지 못한 채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국민학교 시절의 기억

지금 막 취침 나팔이 울리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취침 나팔을 스피커를 통하여 녹음방송하기 때문에 이 소리마저도 나무토막처럼 감흥이 없습니다.(58)

감옥의 벽은 태풍에도 꿈적 않을 만큼 견고하고, 높고 작은 반달창은 해가 떴는지 별이 떴는지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미래를 창백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 과거가 가장 찬란하게 미화되는 곳이 아마 감옥일 것입니다. 감옥에는 과거가 각박한 사람이 드뭅니다. 감옥을 견기디 위한 자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만 이 자위는 참혹한 환경에 놓은 생명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명운동 그  자체라고 생각됩니다. 자위는 물론 엄한 자기성찰, 자기비판에 비하면 즉자적이고 감성적인 생명운동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그것이 갖는 의미와 필요에 대하여 너무 심하게 폄하할 생각이 없습니다.(59)

불모의 영토마다 자리잡고 있는 과거라는 이름의 숲은 실상 한없이 목마른 것입니다. 그들도, 샘물도, 기대앉을 따뜻한 바위도 없습니다. 머물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 나는 벽 앞에 정좌하여 동공을 나의 내부로 열기로 하였습니다. 내부란 과거와 미래의 중간입니다. 과거를 미화하기도 하고, 현재를 자위하기도 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색이 머리 속의 관념으로서만 시종하는 것이고 보면, 앞뒤고 없고 선후도 없어 전체적으로 공허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 숲이 아님은 물론이고, 정정한 상록수가 못됨도 사실입니다. 비록한 토양도 못되고 거두어줄 손길도 창백합니다. 염천과 폭우, 엄동한설을 어떻게 견뎌나갈지 아직은 걱정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이 나무는 나의 내부에 심은 나무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가슴을 헤치고 외부를 향하여 가지 뻗어야 할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과거에다 심은 나무이지만 미래를 향하여 뻗어가야 할 나무입니다. 더구나 나는 이 나무에 많은 약속을 해두고 있으며 그 약속을 지킬 열매를 키워야 하기 때문에 당장은 마음 아프더라도 자위보다는 엄한 자기 성찰로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60)

자연의 위대함에 경탄하다가 창가에 목을 뽑고 있는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면, 광막한 자연으로부터 지극히 사소한 나의 애환으로 돌아오면 순간 고적감이 송곳같이 파고듭니다.

고독한 상태는 일종의 버려진 상태입니다.

고독은 고독 그것만으로도 가까스로 한 짐일 뿐 무엇을 창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이 고독을 깨뜨리지 않고는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우렁찬 저 햇빛 찬란한 합창을 향하여 문 열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독방의 영토 (안양교도소 1970 9 ~ 1971 2)

형님의 결혼에 대하여 네가 몇 가지 객관적 조건에 있어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어떤 기성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개인이 이룩해놓은 객관적 달성보다는 주관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지향을 더 높이 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너도 알고 있듯이 인간이란 부단히 성장하는 책임귀속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간관계는 상대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일종의 동태관계인만큼 이제부터는 그것의 순화를 위하여 네 쪽에서 긍정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1970.10(66)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대전교도소 1971 2 ~1986 2)

기계적이고 습관화된 대화는 인간관계의 정체를 가져오며 인간관계의 정체는 관계 그 자체의  퇴화를 가져오며 필경은 양 당사자에게 오히려 부담과 질곡만을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70)

그 위에 출가하여 이미 외인이 된 누님들의 일까지 아울러 생각해보면 부모으 ㅣ일생이란 결국 아들딸을 길러서 어디에다 빼앗기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척에서 조석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치마 끝에 매달리는 어린 시절과는 달리, 점차 장성해서 성인이 되어감에 따라 부모의 영향권을 벗어나버린다는 점에서 이 경우 역시 아들을 빼앗긴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75)

이제 더위도 지나가고 결실과 수확의 가을입니다. 저는 물론 씨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거두어들일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높아져가는 하늘 밑에서 묵묵히 사색의 결실은 가능하리라 생각해봅니다.1973.9.4(82)

청년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는 두 번 새벽이 없다”(83)

꽃을 시새움하는 풍설에도 아랑곳없이 봄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84)

旣耕亦已種 기경역이종 밭 갈고 씨 뿌렸으니 時還獨我書 시환독아서 이제는 책을 꺼내 읽는다(85)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 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하여야 사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85)

획기적인 아이디어, 듣는 이의 가슴 깊숙히 까지 전달될 수 있는 울림. 이 모든 것은 지식이 아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이다. 생각도 경험의 일종이다. 깊이 생각하고 길게 생각하는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사랑이란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86)

아름답다는 것은 알 만하다는 숙지, 가지의 뜻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미의식의 형성과 미적 가치판단의 훌륭한 열쇠를 주고 있다. 이를테면 너의 머리 속에 들어앉은 이러저러한 여인상이 바로 너의 미녀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기실 너는 사제의 도량형기로써 측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게 아름다운 여자가 어머니께는 모름다운 여자가 되는 차이를 빚는다. (86)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 이란 말이 있거니와 부단히 자기를 갱신하지 않는 한 미는 지속되지 않는다.(87)

너는 아직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하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같은 가격이면 그 염색료만큼 천이 나쁜 치마이기 십상이다. 어쨌든 금년에는 네가 결혼하기 바란다.

제비가 날아오니 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봄이기 때문에 제비가 날아오는 것일 터 입니다.(93)

어제 오늘 흩뿌리는 우각에는 아직도 춘한이 스산하게 느껴집니다만 이내 줄기를 타고 올라 유록빛 잎새로 빛날 생명 같은 것이 번뜩입니다. 아무튼 봄은 창문 가득히 다가왔습니다. 1977.3.24 (100)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독존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 합니다.(101)

유리창을 깨뜨린 잘못이 유리 한 장으로 보상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수고가, 인정이 배제된 일정액의 화폐로 대상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쓸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획과 획 간에, 자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인과 인 간의 그 뜨거운 연계위에 서고자 합니다.(102)

저는 이달부터 행장급수가 2급으로 진급되어 서신과 친견이 매월 4회씩 허용됩니다. 자주 편지 드리겠습니다.

월 회의 엽서만이 허락되던게 월 4회로 허용되기까지 약 10여년의 시간이 흘러야했다. 10여년이면 초,중 고등교육의 12년과 맞먹는 시간이다. 내가 회사생할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작은 전세집에서 조금 더 큰 전세집으로 옮기기까지 걸린 시간도 약 10여년이다. 그렇기 긴 세월에 걸쳐 월 1회에서 월 4회로 편지 쓸 기회가 허용되었단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이 단순한 행위가 그 누군가에게는 생을 유지하고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유일하고도 절박한 행위였단는 사실에 묘한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징역살이 속에는  물론 토요일  오후의 그 상쾌한 여유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무기징역이라는 길고도 어두운 좌절 속에는 괭잇날을 기다리는 무진장한 사색의 광상이 원시로 묻혀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우선 제 사고의 서랍을 엎어 전부 쏟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까울 정도로 과감히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지독한 지식의 사유욕, 어설픈 관념의 야적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늦게 깨달은 저의 치부였습니다. 사물이나 인식을 더 복잡하게 하는 지식, 실천의 지침도, 실천과 더불어 발전하지도 않는 이론은 분명 질곡이었습니다. 이 모든 질곡을 버려야 했습니다. 섭갹담등 짚신 한 켤레와 우산 한 자루 언제 어디로든 가뜬히 떠날 수 있는 최소한의 소지품만 남기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씩 조심해서 하나씩 챙겨넣기 시작하였습니다.(105)

10년 저는 많은 것을 잃고, 또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은 서운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버린다는 것은 상추를 솎아내는, 더 큰 것을 키우는 손길이기도 할 것입니다.(105)

나에게 지난 10년이란, 가장 비겁하게 살고, 가장 나답지 못하게 살아온 살 아닐까…… 10년 즈음이 되는 얼마 전부터 물론,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이 있다면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보기 시작하였다는 것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 생겼다는 점?

바깥은 언제나 봄날 : 우리가 가장 놀랐던 것은 엉뚱하게 바깥은 봄철이 아니라 뜨거운 여름이었다는 착각의 발견이었습니다. 계절의 한서에 아랑곳없이 우리의 머리 속에 그리는 바깥은 언제나 따스한 봄날이었던 것입니다. 수인들의 해바라기같이 키 큰 동경 속에서 바깥 사회는 계절을 어겨가면서 까지 한껏 미화되었던 셈입니다. (107)

더위에 후줄근한 길가의 쇠비름이며, 공사장의 남포소리와 풀썩이는 먼지, 시골 아낙네들의 걷어붙인 옷자락……, 바깥은 한더위의 한복판이었습니다. 다만, 직진의 고속도로 위 그 선명한 백선과 상점에 진열된 마치 기념사진 속의 아이들 같이 단정한 과실들의 대오 隊伍 만이 유독 여름을 거부하는 어떤 질서의 표정 같았습니다.

교회종이 높고 연속적인 금속성임에 비하여,  범종은 쇠붙이 소리가 아닌 듯, 누구의 나직한 음성 같습니다. 교회종이 새벽의 정적을 휘저어놓는 틈입자라면, 꼭 스물아홉 맥박마다 한 번씩 울리는 범종은 승고월하문의 고 처럼, 오히려 적막을 심화하는 것입니다.(109)

빌딩의 숲 속 철제의 높은 종탑에서 뿌리듯이 흔드는 교회 종소리가 마치 반갑지 않은 사람의 노크 같음에 비하여, 이슬이 맺힌 산사 어디쯤에서 땅에 닿을 듯,  지심에 전하듯 울리는 범종소리는 산이 부르는 목소리라 하겠습니다. 교회 종소리의 여운 속에는 플래시를 들고 손목시계를 보며 종을 치는 수위의 바쁜 동작이 보이는가 하면, 끊일 듯 끊일 듯하는 범종의 여운 속에는 부동의 수도자가 있습니다.

매직펜과 붓 : 그러나 저는 이 모든 편의에도 불구하고 이것(매직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종이 위를 지날 때 내는 날카로운 마찰음 기계와 기계의 틈새에  끼인 문명의 비명 같은 소리가 좋지 않습니다. 달려들듯 다가오는 그 자극성 냄새가 좋지 않습니다.(111)

붓은 결코 소리내지 않습니다. 어머님의 약속같이 부드러운 감촉이, 수줍은 듯 은근한 그 그 묵향이, 묵의 깊이가 좋습니다. 추호처럼 가능은 획에서 필관보다 굵은 글자에 이르기까지 흡사 피리소리처럼 이어지는 그 폭과 유연성이 좋습니다. 

붓은 그 사용자에게 상당한 양의 노력과 수고를 요구하지만 그러기에 그 만큼의 애착과 사랑을 갖게 해줍니다. 붓은 좀체 호락호락하지 않은 매운 지조의 선비 같습니다.

어느 특정기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과 계통적인 독서는(물론 정강이 위에 책 한 권 달랑 얹어놓고 따르르 읽어내리는,  그리고 시루에 물 빠지듯 쉬이 잊어버리는 징역 속의 현실과는 아예 인연이 먼 이야기지만) 대부분의 독서가 실족하기 쉬운 그 파편성, 현학성을 제거해준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113)

짧은 년, 긴 하루(아버님께) : 이곳의 저리들은 호연한 등반과는 대조적으로, 열리지 않는 방형의 작은 공간 속에서 내밀한 사색과 성찰의 깊은 계곡에 침좌하고 있는 투 입니다.

우리는 거개가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면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는 무척 관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의 실수에 있어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  우여곡절, 불가피했던 여러 사정을 잘 알고 있음에 반하여, 타인의  그것에 대하여는 그 처지나 실수가 있기까지의 과정 전부에  대해 무지하거나 설령 알더라고 극히 일부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므로 자연 너그럽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115)

저희들은 이 실패자들의 군서지에서 수많은 타인을 만나고, 그들의 수많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가능성 속에 몸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115)

가을이라 옥창에 걸리는 달도 밤마다 둥글게 자랍니다. 가을은 글 읽던 밤에 달이 떠 있는 우물물을 깨뜨리고 정갈하고 시원한 냉수를 뜨며잠시 시름을 쉬고 싶은 게절입니다. (116)

이곳 우리들에게는 여름과 겨울, 덥다와 춥다의 극지가 존재할 따름입니다. 가을은 5의 계절’, 다만 추위를 예고하는 길 바쁜 전령일 뿐 더불어 향유할 시간이 없습니다.(117)

나더러 역마살이 들었다던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역마살은 떠돌이 광대넋이 들린 거라고도 하고 길신이 씌운 거라고도 하지만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꿈 찾아나서는 방랑이란 풀이를 나는 좋아합니다.

나에게도 역마살이아직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꿈을 찾아나서는 방랑벽이 있는 것이겠지?

옥죄이는 징역살이 속에서 이나마 조용한 시공을 점유한다는 것은 흡사 옥담 위의 풀처럼 귀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혼자라는 것이 결코 사람의 처소가 아님을 모르지 않습니다.  숱한 사람들의 은원 속 격려와 지탄과 애정과 증오의 와중에서 비로소 바르게 서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119)

생활의 편의와 이기들이 생산해내는 그 여유가 무엇을 위하여 소용되는지. 그 수많은 층계, 싸늘한 돌계단 하나한의  높이가 실상 흙으로부터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나 아닌지…… 생각은 사변의 날개를 달고 납니다.(123)

노장은 시종 자연과 무위와 그리고 더러는 피안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또 하나의 빛나는 손가락은 인간과 역행과 차안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고 놀랍니다. (125)

옥창의 풀씨 한 알 (계수님께)

우리 방 창문 턱에
개미가 물어다 놓았는지
풀씨 한 알 싹이 나더니
어느새
한 뼘도 넘는
키를 흔들며
우리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국추추황 자모년년백

(
뜰의 국화는 가을마다 노랗고
어머니의 머리는 해마다 희어지네)

그래도 최후의 한 잎마저 떨어버린 겨울의 수목이 그 근간만으로 뚜렷이 바람 속에 서고, 모든 형태의 소유와 의상을 벗어버린 징역살이는 마치 물신성이 척결된 논리처럼 우리의 사고를 간단명료하게 해줍니다.(130)

단혀 있던 일상의 울타리가 열리며, 부산한 준비와 장만, 어른들의 상의 그리고 술렁이는 소문, 그리하여 답습과 안일의 때묻은 자리에 급속히 충만디는 새로움활기’. 이것은 어른이 되어 굳어진 모든 가슴에까지 메아리 긴 감동으로 남는 것입니다.(131)

자연을 적대적인 것으로, 또는 불편한 것, 미개한 것으로 파악하고 인간생활로부터 자연을 차단해온 성과가 문명의 내용이고, 차단된 자연으로부터의 거리가 문명의 척도가 되는 도시의 물리’, 철근 콘크리트의 벽과 벽 사이에서 없어도 되는 물건을 생산하기에 여념이 없는, 욕망과 갈증의 생산에 여념이 없는, 생산할수록 더욱 궁핍을 느끼게 하는 문명의 역리에 대하여, 야만과 미개의 대명사처럼 되어온 한 인디언의 편지가 이처럼 통렬한 문명비평이 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문명과 야만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옳다고 생각됩니다. (133)

땅에 넘어진 사람은 허공을 붙들고 일어날 수는 없고 어차피 땅을 짚고 일어설 수밖에 없듯지족과 평정을 얻기 위하여 다름아닌 지족과 평정을 닦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굵고 큼작한 사고야말로 그 속에 가장 견고한 건강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듯합니다. (135)

절실한 일이 없으면 응달의 풀싹처럼 자라지 못하며, 경험이 편벽되면 한쪽으로만 굴린 눈덩이처럼 기형화할 위험이 따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살면서 성격의 굴절을 막고 구김살 없이 되기란 무척 어려운 것 같습니다.(136)

대개 책은 실천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너무나 흰 손에 의하여 집필된 경험의 간접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책에서 얻은 지식이 흔히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그림자이기 쉽습니다.(139)

출석부의 명단을 죄다 암기하고 교실에 들어간 교사라 하더라도 학생의 얼굴에 대하여 무지한 한, 단 한 명의 학생도 맞출 수 없습니다. ‘이름은 나중에 붙는 것, 지식은 실천에서 나와 실천으로 돌아가야 참다운 것이라 믿습니다.(140)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가을에는 여늬 사람도 저마다 철학인이 되어 생활의 내부를 응시합니다. (144)

붓끝처럼 스스로를 간추리게 하는 송연하리만큼 엄정한 마음가짐이 아니고서 감히 무엇을 이루려 하는 것은 한마디로 탐욕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145)

좋은 글씨를 남기기 위하여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상식이 마음 흐뭇합니다.(148)

겨울 밤 단 한 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밤잠의 권리는 없다던 친구의 글귀를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불행이란 그 양의 대부분이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149)

작업장 창문턱에 메리 골드라는 꽃 한 포기를 올려놓았습니다. 메마른 땅에 살고 있는 제 족속들과 달리 이 엄청난 가뭄의 세월을 알지 못한 채, 주전자의 물을 앉아서 받아마시는 이 작은 꽃나무는 역시 땅을 잃은 연약함을 숨길 수 없습니다. (153)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주관의 양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더 많이 수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바닥에는, 주관은 궁벽하고 객관은 평정한 것이며, 주관은 객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객관은 주관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155)

저는,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히 발목 박고 서서 그 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고의 동굴을 벗어나는 길은 그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155)

스스로 시대의 복판에 서기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시대와 역사의 대하로 향하는 어느 가난한 골목에 서기를 주저해서도 안되리라 믿습니다.

서울의 흙에 실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밑에서도 서울의 흙은 필시 차가운 지하수를 가슴에 안고 생생히 살아서 숨쉬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157)

사람들은 누구나 거미줄같이 수많은 관계 속에 서지 않을 수 없고 보면 관계는 존재라는 명제의 적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혼자라는 느낌은 관념적으로만 가능한 정신의 일시적 함정에 불과하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162)

낮은 곳(형수님께) : ‘푸른 과실이 햇빛을 마시고 제 속의 쓰고 신 물을 달고 향기로운 즙으로  만들 듯이저도 이 가을에는 하루하루의 아픈 경험들을 양지바른 생각의 지붕에 널어, 소중한 겨울의 양식으로 갈무리 하려 합니다.

숱한 사연과 곡절로 점철된 내밀한 인생을 모른 대, 단 하나의 상처에만 렌즈를 고정하여 줄곧 국부만을 확대하는 춘화적 발상이 어안처럼 우리는 왜곡하지만
수많은 봉별을 담담히 겪어오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파낸 한 덩이 묵직한 체험을 함께 나누는 견실함을 신뢰하며
,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일찍 깨닫게 해주는 지혜로운 곳에 사는 행복감을 감사하며
,
세상의 슬픔에 자기의 슬픔 하나를 더 보태기보다는 자기의 슬픔을 타인들의 수많은 비참함의 한 조각으로 생각하는 겸허함을 배우려 합니다,.(164)

간결한 대화, 절제된 감정으로 그 짧은 접견시간마저 얼마큼씩 남기시는 아버님의 접견은, 한마디라도 더 실으려고 마지막까지 매달리는 여느 사람들의 접견돠는 대조적으로, 흡사 여백이 넉넉한 한 폭 산수화의 분위기 입니다. (168)

세월의 아픈 채찍 (계수님께) : 기상시간 전에 옆사람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뽑아 벽 기대어 앉으면 싸늘한 벽의 냉기가 나를 깨우기 시작합니다. 나에게는 이때가 하루의 가장 맑은 시간입니다.(169)

겪은 일, 읽은 글, 만난 인정, 들은 사정……. 밤의 긴 터널 속에서 여과된 어제의 역사들이 내 생각의 서가에 가지런히 정돈되는 시간입니다.

손가락을 베이면 그 상처의 통증으로 하여 다친 손가락이 각성되고 보호된다는 그 아픔의 참뜻을 모르지 않으면서, 성급한 충동보다는, 한 번의 용맹보다는, 결과로서 수용되는 지혜보다는, 면면한 기도가, 매일매일의 약속이, 과정에 널린 우직한 아픔이 우리의 깊은 내면을, 우리의 높은 정신을 이룩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스스로 충동에 능하고, 우연에 승하고, 아픔에 겨워하며 매양 매듭 고운 손 수월한 안거에 연연한 채 한마리 미운 오리새끼로 자신을 한정해오지나 않았는지…….

교도소의 문화는 우선 침묵의 문화입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 과거를 열지 않고 그리고 입마저 열지 않는, 침묵과 외부와의 거대한 벽이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쓸쓸히 차단하고 있습니다.(170)

교도소의 문화는 또한 요설의 문화입니다. 요설은 청중을 미아로 만드는 과정과 허구와 환상의 숲입니다. 그 울창한 요설의 숲 속에 누가 살 고 있는지 좀체 알 수 없습니다. 숲 속에 흔히 짐승들이 사람을 피해 숨어살 듯이 장광설은 부끄러운 자신을 숨기는 은신처이기도 합니다.

3의 문화는 침묵과 요설의 어중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믿습니다. 버리고 싶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을 정갈히 씻어 볕에 너는 자기 완성의 힘든 길 위의 어디쯤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위로는 하늘에 달이 둥글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마음이 원만하다는 정월 보름입니다.(171)

천 년도 더 묵은, 검은 침묵을 깨뜨리고 서슬 푸른 불꽃을 펄럭이며 뜨겁게 부타오르는 한겨울의 연탄불은, 추위에 곧은 손을 불러모으고,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젖은 양말을 말리고…… 그리고 이 따금 겨울 창문을 열게 합니다. (172)

당무유용’[노자]의 일절입니다. /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利, 無之以爲用

: 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경우,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는 그릇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생긴다. ‘없음으로써 쓰임으로 삼는 지혜. 그 여백 있는 생각, 그 유원한 경지가 부럽습니다.

있으면 없는 것보다 편리한 것도 사실이지만 완물상지, 가지면 가진 것에 뜻을 앗기며, 물건은 방만 차지함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 속에도 자리를 틀고 앉아 창의를 잠식하기도 합니다. (177)

짧은 시간에 대어 돌아가며 하는 대수롭지 않은 몇 마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나의 노력은 버들잎 한 장으로써도 천하의 봄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실함과, 한 그릇의 물에 보름달을 담는 유유한 시정을 지니고 싶어하는 소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180)

더 좋은 잔디를 찾다가 결국 어디에도 앉지 못하고 마는 역마의 유랑도 그것을 미덕이라 할 수 없지만 나는 아직 달팽이의 보수와 칩거를 선택하는 나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마살에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며 바다로 나와버린 물은 골짜기의 시절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가물었더냐 싶게 요즈음은 이틀거리로 비가 쏟아집니다. 등 뒤에 이렇게 많은 비를 감추고도 비 한 줄금 그렇게 어렵던 여름철의 즉흥이 무척 우둔해 보입니다.(182)

엄상은 정목을 가려내고 설중에 매화 있듯이 고난도 그 바닥에 한 톨 인정의 씨앗을 묻고 있는가 봅니다.(183)

글씨도 그 속에 인생이 들어 있는 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어떤 때는 글씨의 어려움을 알기 위해서 글씨를 쓰고 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187)

가을날 새벽이 자라고 있는 창 밑에서 저희는 이따금 책장을 덮고 추상 같은 엄정한 사색으로 자신을 다듬어가고자 합니다. 영위하는 일상사와 지닌 생각이 한결같지 못하면 자연 생각이 공어해지게 마련이며 공허한 생각은 또한 일을 당함에 소용에 닿지 못하여 한낱 사변일 뿐이라 믿습니다. 저희들이 스스로를 통찰함에 특히 통렬해야 함이 바보 이런 것인즉, 속빈 생각의 껍질을 흡사 무엇인 양 챙겨두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190)

겨울 준비를 하느라고 비닐을 쳐서 바람창을 막고 작업장에 칸막이를 하는 등 서툰 목수일을 하다가 망치로 검지손가락을 때려 하는 수 없이 손톱 한 개를 뽑았습니다. (…) 손가락의 아픔보다는 서툰 망치질의 부끄러움이 더 크고, 서툰 솜씨의 부끄러움 보다는 제법 일꾼이 된 듯한 흐뭇함이 더 큽니다.(193)

이번 이사때 가장 두고 오기 아까웠던 것은 창문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능선과 오뉴월 보리밭 언덕이 내다보이는 창은 우리들의 메마른 시선을 적셔주는 맑은 샘이었습니다. (194)

그러나 생각해보면 창문보다는 역시 이 더 낫습니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힘찬 실천의 현장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194)

캄캄한 밤이 오히려 낯설어 늦도록 깨어 있으니 불 켜 있던 밤에는 미처 듣지 못하던 여러가지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 어둠은 새로운 소리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놀랍게도 나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어둠은 나 자신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캐어물으며 흡사 피사체를 좇는 탐조등처럼 나 자신을 선연히 드러내주었습니다. 교소도의 응달이 우리 시대의 진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주듯 하룻밤의 어둠이 내게 안겨준 경험은 찬물처럼 정신 번쩍 드는 교훈이었습니다.(199)

한 마리의 연약한 나비가 봄하늘에 날아오르기까지 겪었을 그 긴 역사에 대한 깨달음이 겨우내 잠자던 나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습니다. 작은 알이었던 시절부터 한 점의 공간을 우주로 삼고 소중히 생명을 간직해왔던 고독과 적막의 밤을 견디고……, 징그러운 번데기의 옷을 입고도 한시도 자신의 성장을 멈추지 않았던 각고의 시절을 이기고……, 이제 꽃잎처럼 나래를 열어 찬란히 솟아오른 나비는, 그것이 비록 연약한 한 마리의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람한 승리의 화신으로 다가옵니다.      담 넘어 날아든 무심한 나비 한 마리가 펼쳐보인 봄의 뜻은, 이곳에는 꽃나무가 없어 봄조차 가난하다던 푸념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를 뉘우치게 합니다.(200)

생명이란 이런 것.

필재가 있는 사람의 글씨는 대체로 그 재능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견 빼어나긴 하되 재능이 도리어 함정이 되어 손끝의 교를 벗어나기 어려운 데 비하여, 필재가 없는 사람의 글씨는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쓰기 때문에 그 속에 혼신의 힘과 정성이 배어 있어서 단련의 미기 쟁쟁히 빛나게 됩니다. (202)

사람의 아름다움도 이와 같아서 타고난 얼굴의 조형미보다는 그 사람의 지혜와 경험의 축적이 내밀한 인격이 되어 은은히 배어나는 아름다움이 더욱 높은 것임과 마찬가지입니다.

첩경과 행운에 연연해하지 않고, 역경에서 오히려 정직하며, 기존과 권부에 몸 낮추지 않고, 진리와 사랑에 허심탄회한……. 그리하여 스스로 선택한 우직함이야말로 인생의 무게를 육중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돌과 돌이 부딪쳐 불꽃이 튀듯이 나라는 생각은 처지가 부딪쳤을 때 공중에 떠오르는 생각이요, 한 점 불티에 지나지 않는 것. 그 불꽃이 어찌 돌의 것이겠는가, 어찌 돌 속에 불이 들었다 하겠는가고 싯달타는 가르칩니다. (204)

라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에 억눌려 무척 작아졌을 때 일어나는 불티 같은 순간의 생각이며 물에 이는 거품과 같은 것. 찰나이며 허공인 나를 버림으로써 대신 무한히 큰 나를 얻고, 더 큰 고통을 껴안음으로써 작은 아픔들을 벗는 진지와 해탈은, 불꽃을 돌에 돌려주고 거품을 물에 돌려주고 빈비사라 왕의 마음을 백성들의 불행에 돌려주려는 싯다르타의 뜻과 한뿌리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새의 울음소리가 그 이전의 정적 없이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206)

팽이가 가장 꼿꼿이 선 때를 일컬어 졸고 있다고 하며, 시냇물이 담을 이루어 멎을 때 문득 소리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선한 것을 향하여 부단히 마음을 열어두는 내성과 공감의 고요함인 동시에 자기 개조의 숨가쁜 쟁투와 역동을 속 깊이 담고 있음이라 생각됩니다.

아직은 모난 감정에 부대끼고 집념의 응어리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 저에게……(208)

그러나 버섯이 아무리 곱다 한들 화분에 떠서 기르지 않듯이 욕설이 그 속에 아무리 뛰어난 에능을 다고 있다 한들 그것은 기실 응달의 산물이며 불행의 언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9)

그러나 황소가 일단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자 이제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우람한 역동 뒤의 어디메에 그런 엄청난 한이 숨어 있었던가. 물기어린 눈 및, 굵어서 더욱 처연한 두 개의 뿔은, 먼저의 우렁차고 건강한 감동을 밀어내고 순식간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잔잔한 슬픔의 앙금을 채워놓습니다.(210)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213)

…….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떻나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213)

열다섯 해는 아무리 큰 상처라도 아물기에 충분한 세월입니다. 그러나 그 긴 세월 동안을 시종 자신의 상처 하나 다스리기에 급급하였다면, 그것은 과거 쪽에 너무 많은 것을 할애함으로써 야기된 거대한 상실임이 분명합니다.(215)

세월은 다만 물처럼 애증을 묽게 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옛 동산의 그 흙에 새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 것또한 세월의 소이입니다.

다른 사람과 아무런 내왕이 없는 순수한 개인이란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처럼 소설 속에 있는 것이며, 천재란 그것이 어느 개인이나 순간의 독창이 아니라 오랜 중지의 집성이며 협동의 결정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219)

우리들이 잊고 있는 것은 아무리 담장을 높이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함께 햇빛을 나누며,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되라고 한다면 나는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 속에 서고 싶습니다. 한 알의 물방울이 되라고 한다면 저는 단연 바다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지막한 동네에서 비슷한 말투, 비슷한 욕심,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싶습니다.(1982.10.9)(220)

그러나 우리는 숱한 가을을 보내고 맞는 동안 가을에 맞는 우리의 회한이 결코 회한으로만 끝나지 않음을 압니다. 풍요보다는 궁핍이, 기쁨보다는 아픔이 우리를 삶의 진상에 맞세워주는 법이며, 삶의 진상은 다시 위대한 대립물이 되어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도록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일견 비정한 듯하나, 빈약한 추수에도 아랑곳없이 스스로를 간추려보게 하는 용기의 원천이기도 합니다.(225)

우리들의 생각, 우리들의 역사는 실은 겨울에 키 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226)

지금이 삶의 겨울이라고 본다면, 얼마간 느낀 심정적 한파는 내 삶의 키를 키워주는 양분이라 볼 수 있을지도…….

떠남과 기다림이 결국은 당사자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 마음을 탓하기에 앞서 그런 마음이 되기까지의 사연을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227)

사람은 나무와 달라서 나이를 더한다고 해서 그저 굵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젊음이 신선함을 항상 보증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 가 원숙이, ‘ 가 청신함이 되고 안되고는 그 연월을 안받침하고 있는 체험과 사색의 갈무리 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229)

새해란 실상 면면한 세월의 똑 같은 한 토막이라 하여 1월을 13월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 새로움이 완성된 형태로 우리 앞에 던져진다면 그것은 이미 새로움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모든 새로움은 그에 임하는 우리의 심기가 새롭고, 그 속에 새로운 것을 채워나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주어지는 새로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33)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성장과정과 경험세계가 판이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 맨 먼저 부딪치는 곤란의 하나가 이 언어의 차이입니다.(236)

가장 두드러진 예를 든다면 아마 책가방 끈이 길고 먹물이 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간의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자는 대체로 (…) 이에 비하여 후자의 그것은 구체적이고 그릇이 커서 손으로 만지듯 확실하고 시원시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단순화와 무리, 그리고 감정의 범람이 심하여 수염과 눈썹을 구별치 않고,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는 단색적 사고를 면치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236)

갇혀 있는 새가 성말라 야위듯이 두루미 속의 술이 삭아서 식초가 되듯이 교도소의 벽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날카롭게 벼리어놓습니다. 징역을 오래 산 사람치고 감정이 날카롭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238)

<벽 속의 이성과 감정 (형수님께) p.238~239, 감동적인 장절(‘청구회의 추억과 함께)>

갇혀 있는 새가 성말라 야위듯이 두루미 속의 술이 삭아서 식초가 되듯이 교도소의 벽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날카롭게 벼리어놓습니다. 징역을 오래 산 사람치고 감정이 날카롭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238)

벽의 기능은 우선 그 속의 것을 한정하는 데 있습니다. 시야를 한정하고, 수족을 한정하고 사고를 한정합니다. 한정한다는 것은 작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넓이는 좁아지고 길이는 짧아져서 공간이든 시간이든 사람이든 결국 한 개의 점으로 수렴케 하여 지극히 단편적이고 충동적이고 비논리적인 편향을 띠게 합니다.

징역 사는 사람들의 첨예한 감정은 이러한 편향성이 축적, 강화됨으로써 망가져버린 상태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망가진 상태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더욱 복잡하다는 사실입니다. 우연히 시계를 떨어뜨려 복잡한 부속이 망가져버렸다면 시계의 망가진 상태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복잡하다는 명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벽으로 인하여 망가진 감정을 너무나 단순하게 처리하려 드는 것을 봅니다. (239)

감정을 이성과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성에 의하여 감정을 억제하도록 하는, 이를테면 이성이라는 포승으로 감정을 묶어버리려는 시도를 종종 목격합니다.

이것은 대립물로서의 이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잘못 파악함으로써 야기된 오류입니다.

감정과 이성은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크기가 같아야 하는 두 개의 바퀴입니다. 낮은 이성에는 낮은 감정이, 높은 이성에는 높은 감정이 관계되는 것입니다. 일견 이성에 의하여 감정이 극복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경우도 실은 이성으로써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높이에 상응하는 높은 단계의 감정에 의하여 낮은 단계의 감정이 극복되고 있을 따름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이성의 계발입니다. 그리고 이성은 감정에 기초하고, 감정에 의존하여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은 벽의 속박과 한정과 단절로부터 감정을 해방하는 과제와 직결됩니다.

아마 우리는 이러한 추상적 연역에 앞서 이미 오랜 징역 경험을 통하여 그 해답을 귀납해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해답이란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한마디로 말해서 징역 속에는 풍부한 역사와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견고한 벽 속에는 수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각양의 세태, 각색의 사건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모든 고통과 가난과 갈등을 인정하도록 하며, 그 해결에 대한 일체의 환상과 기만을 거부케 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자유, 즉 이성을 얻게 해줍니다. 그리고 수 많은 가슴들은 그 완급, 곡직, 광협, 방원으로 하여 우리를 다른 수많은 가슴들과 부딪히게 함으로써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칩거하고 있는 감정도 수많은 총중의 한 낱에 불과하다는 개안을 얻게 하고 그 협착한 갑각을 벗게 해줍니다.(240)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사건에 매몰되거나 각자의 감정에 칩거해 들어가는 대신 우리들의 풍부한 이웃에 충실해갈 때 비로소 벽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바다가 하늘을 비추어 그 푸름을 얻고, 세류를 마다하지 않아 그 넓음을 이룬 이치가 이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됩니다.(240)(1983.3.15)

 

 

 

 

 

 

 

 

* 신영복 선생님의 말말말

책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너무 관념적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농밀한 인간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1:58. 정재승 교수, 신영복 교수 대담)

엽서에다 글씨를 쓴 이유는, 강물같이 흐려보내고 싶지 않아서 였다.  기록을 해두면 언젠가 내가 출소해서 이 편지를 이 기록들을 보면 그 시절을 다시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검열로 폐기된 편지들도 많다. … 이 책의 제목을 내가 붙인다면 다시 쓰고 싶은 편지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시간에서 한달에 한번, 간수 감독하에서 쓴 편지이다.

교장의 아들로, 교장사택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창백한 관념적인 지식인이 감옥생활을 통해 하나하나  깨뜨려나가는 그런 기간이었다.

출소할 때 역사성  어느 누구도 못해낸 자기 성분의 개조를  해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됐어요. 

관계야 말로 기쁨과 아픔의 근원이지 않는가. 

강물의 이미지,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 결국엔 바다에 이르는. 그리고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여서 바다인 것처럼, 그런 강물의 이미지가 아닌가.

신영복 선생님 인터뷰 중

 

힘내라 맑은 물
손이 시리면 따스히 만져주마 추운 날이면 두 볼을  감싸주마
너무 힘들거든 내게 기대보렴 눈물 나거든 내 품에 안기렴

냇물아 흘러 흘러 강으로 가거라

맑은 물살 뒤척이며 강으로 가거라
힘을 내거라 강으로 가야지 힘을 내거라 바다로 가야지

흐린 물줄기 이따금 만나거든 피하지 말고 뒤엉켜가거라

강물아 흘러 흘러 바다로 가거라

맑은 물살 뒤척이며 바다로 가거라

 

글을 막 잘 쓰는 사람들은 굉장히 일방적인 사람이다. 나는 글을 쓸 때 맥락과 상대방의 입장, 이해를 고려하면서 쓰기 때문에 글을 빨리 쓰지는 못한다. (변방을 찾아서 인터뷰 중)

변화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변방의 창조성은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

 

3. 내가 저자라면

우리 시대의 사상가이자 가장 존경받는 지식인, 삶을 이론으로 풀지 않고 사람들 속에서 풀고자하는 진정한 지식인인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언제 읽어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교회의 종이 아닌 범종처럼….. 나의 국어실력으로는 여러 번 읽어야 소화될 수 있는, 삶의 질곡이 그대로 들어가 있는 글인 듯하다. 

쉽사리 평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글을 보면 숙연해지고 고개가 숙여진다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몇 십권 안되는 책을 접하고 몇 십 편 안되는 글을 쓴 꼴에, 일상을 소재로 한 글을 쓰겠다니…… 그의 일상은 감옥이었다. 그의 일상은 죽음이었고 그의 인상은 본능적 욕구(먹고 입고 자기)와의 사투였다. 그는 가족들에게 엽서를 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한 달의 한번을 놓치지 않았다. 머리 속으로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기를 반복, 교정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교정한 흔적 이 없는 엽서를 써내려갔다. 10년이 지난 즈음엔 그 횟수가 한 달에 네 번 정도로 늘긴 했지만, 그렇게 일주일을, 그렇게 한달을 생각하고 사침하고 사무사하여 쓴 글이다. 그리고 그 엽서들을 모아 발간한 책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그에게 이 책은 고통의 역사이자 깨달음의 기록이다. 이런 책 앞에서 평범한 직장인이자, 풋내기 글쟁이가 무슨 책을 논하겠는가. 그저 숙연해지고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이, 내가 내고자 하는 책이 과연 진실될 수 있을지 돌아보기만 할 뿐이다. 그저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IP *.218.137.71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92 <오십후애사전> file 제이와이 2014.03.09 1893
991 #39.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무라카미 하루키) 땟쑤나무 2014.03.10 4015
990 (No.40-1) <두번읽기>-제임스 스콧 벨 [소설쓰기의 모든것: Part1.플롯과 구조] 다른 - 서은경 [3] 서은경 2014.03.10 9423
989 일의 발견 (조안 B. 시울라) 유형선 2014.03.10 5382
988 No 45 색의 힘 file [1] 미스테리 2014.03.10 3875
987 갈매기의 꿈_리차드 바크 [1] 라비나비 2014.03.10 2453
986 [2-25] 문제는 무기력이다 - 박경숙 타오 한정화 2014.03.11 4438
985 [2-26] 내 몸은 내가 고친다 - 김홍경 file 타오 한정화 2014.03.13 4442
984 피로사회 (한병철/문학과지성사) 유형선 2014.03.16 2524
» #40.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돌베개) 땟쑤나무 2014.03.17 4204
982 #41. 클라우드 혁명과 애플구글마소 / 오카지마 유시 쭌영 2014.03.17 2052
981 (No.41)움베르토 에코 [젊은 소설가의 고백] 레드박스 - 서은경 file 서은경 2014.03.18 3335
980 안병욱_인생론 file 라비나비 2014.03.18 5023
979 <중년의 발견> 데이비드 베인브리지 지음 file 제이와이 2014.03.18 2658
978 No 46 도형, 그림의 심리학 file 미스테리 2014.03.18 9707
977 #42.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때 / 파커J. 파머 쭌영 2014.03.25 5480
976 #[&] 떠남과 만남(구본형) 땟쑤나무 2014.03.25 1909
975 <나이듦의 기쁨 MY TIME> file 제이와이 2014.03.25 6117
974 우리의노동은왜우울한가_스베냐플라스푈러 유형선 2014.03.25 1986
973 No 47. 즐거움의 가치사전-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 file 미스테리 2014.03.25 3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