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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7일 00시 58분 등록

 11 49분에 정확하게 약속된 수유리 음식점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10기 연구원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오미경 선배가 이름이 적힌 명찰을 목에 걸어주었다. 레이스를 함께하며 익숙한 아이디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제일 신기했다. 글을 읽으면서 이런 이런 사람일 것이다 짐작했던 것들 중에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었다. 서글서글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각자의 간단한 자기소개가 오가고, 가운데 불판에 불고기 냄비가 올라갔다. 한잔씩 맥주를 따라 마셨다. 쏘맥을 말아드시는 분들도 있었다. 구름~님은 일산부터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고 했다


한 선배가 잠깐 들렀다. 계속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점심한끼 하고 싶어서 들렀다고 말한 그는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본인의 연구원 수업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당신이 연구원을 했을 때,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앞에서 본인의 가장 깊은 속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털어놓고 나니 마음속에 꽁꽁 숨겨놓고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로부터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진심과 경험이 전해져 오는 듯해 두근거렸다. 그리고 나에게도 속내를 완전히 털어놓을 수 있는 가까운 동료들이 생긴 것에 감사했다.

 

산아래 담뱃갑 같은 건물들이 내려다보이는 아카데미 하우스의 넓은 방에 우리는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앉았다. 나눠준 잔에 와인을 돌린 뒤, 새로운 예비 연구원들이 한 명씩 자기 소개를 하고 자리를 함께 해준 선배 연구원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그 순간 연구원에 지원하면서 썼던 20페이지짜리 ME story 중 공헌력에 대한 부분이 생각났다. , 내가 정말 내가 힘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일에 관한 것만 썼구나. 나는 후회가 되었다. 만약에 내가 함께 레이스를 하던 이 사람들을 충실한 동료로 생각했다면, 진정한 친구로 여겼다면 힘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아이디어에 대해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또한 연구원을 시작하는 여러 단계들 겪으면서 선배 연구원들은 왜 연구원을 하게 된 것일까, 궁금해졌다. 간단한 면접 절차가 공지되고 우리는 대기실에서 담소를 나누며 차례를 기다렸다. 가나다순이었다. 내가 첫 타자겠구나 싶었는데 종종걸음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강씨가 있어 내가 아니었다.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던걸까. 긴장을 한걸까. 대답을 장황하게 하는지 말을 하는 동안 질문을 자꾸 잊어버렸다.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수록 내가 자신 속에 갇혀있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었을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한번도 불행하다 생각한적 없었던 스스로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어떤 상황에서 내가 상황의 주인이었던 적이 있던가. 늘 다른 사람들의 평판과 눈을 두려워하며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로소 누군가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어떤 선입견도 없이 나의 쓰임이 무엇일지 물어봐주었던 것이다. 여기서라면 괜찮다. 여기서라면 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억눌려있던 내가 말을 하려고 하자 그 위를 누르고 있던 것들이 들썩였다. 느닷없이 눈물이 나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적잖이 당황했지만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면접시간이 끝나고 다시 대기실 겸 우리의 메인 방으로 이동했다. 분위기가 아까보다 화기애애했다. 좀 기운을 차린 나는 아까 눈물을 보인 것이 좀 쑥쓰러워 그 부분은 동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 다음 면접자가 면접실로 이동하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 피울님이 버너에 불을 붙이고 검게 그을은 통에 물을 끓이고 계셨다. 보이차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한 잔 받아 마셔보니 아주 맛있었다. 고소한 나뭇가지 맛과 비 온 뒤 낙엽숲 같은 향긋한 묵은 냄새가 났다. 선배들은 뒷 산을 올라간다고 했다.

 

면접이 끝나고 저녁을 먹으러 산 아래로 내려갔다. 능이버섯 오리백숙집을 예약해두었는데 길을 잘못 찾아 한참 만에 도착했다. 버섯이 참말 맛있었고, 오리가 푹 익어서 닭처럼 연했다. 고기를 건져먹은 뒤 남은 국물에 찰밥을 말아먹었다. 밥순이인 나는 정말 행복했다.

 

열쇠를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뒤늦게 생각났다. 걸어서 산을 올라가 숙소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모두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미안했다. 그래도 참치 언니와 산을 올라가며 연애 상담을 할 수 있어서 편안하고 좋았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우리 모임에 무엇을 공헌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끝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약속했던 것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빵과 주전부리, 매 수업마다의 디지털 서기, 그리고 친구로서 우리집에 초대하는 것 세 가지였다. 번외로 이번 연구원 여행 전에 여행지에서 쓸만한 짤막한 스페인어 강의와 타롯카드 점을 봐주는 것도 제안해주었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내가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보다 풍부하고 많았다.  


본격적으로 여행의 밤이 시작되었다.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맥주와 소주. 와인들이 하나 둘씩 비워지고 이야기들이 많아졌다. 새벽 두 시가 지나자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반주도 없고 노래방 기기도 없었다. 내 차례가 되었는데 부를 노래를 하나도 준비해오지 않아서 적잖이 당황했다. 변경연 문화를 잘 알고 있는데 그 동안 노래를 소홀히 하다니 방심했다. 예전에 틀렸던 문제를 오답노트에 적어두고 여러 번 공부해놓고는 또 틀린 기분이었다. 급하게 가사를 찾아다 한 곡 조용히 불렀다.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구름~님이 서론을 길게 뽑으시더니 노래를 멋들어지게 한 곡 불렀다. 참치님은 개똥벌레를, 앨리스님은 사랑에 관한 귀여운 동요를, 에움길님은 곰 세마리를 불러 모두들 신선하게 생각했다. 녕이님은 분홍립스틱을 불렀고 찰나님은 뮤지컬을 불렀다. 종종걸음님은 언젠가는의 가사를 찾아주길 부탁했다. 노래가 맛이 있었다. 희동님은 아파트를 불렀다.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피울님은 심수봉처럼 깊은 감정을 표현해보였다. 우리는 두 곡을 더 청해 들었다. 모두 놀랐다. 그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했던 로이스 선배와 유인창 선배도 한 곡씩 노래를 했다. 모두가 좋아하는 노래라 다 함께 따라 불렀다. 병곤 교장선생님은 김광석의 노래를 불렀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는데 가사가 무척 아름다워서 마음을 움직였다. 우리는 다음에는 가사를 모두 외워서 부르는 걸로 결심했다.

 

좀 더 이야기들을 나눈 뒤에 새벽 4시가 되어서야 행사가 마무리 되었다. 우리는 장에서 요와 이불을 꺼내 펴고 양치질을 하고 화장을 지웠다. 고단했던지 머리를 베개에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홉 시였다. 이미 모두 일어나 있어서 깜짝 놀랐다. 어제 물을 엄청나게 마시고 보이차를 계속해서 같이 마셔서 그런지 컨디션이 괜찮았다. 준비를 마친 뒤 11시 정도에 체크 아웃을 했다. 점저를 어디서 먹을까 하다가 우리집 단골집인 기와집 추어탕을 가기로 했다. 아빠가 좋아하시던 집이라 모두를 만족시킬 자신이 있었다. 유형선 선배가 두 딸 수민, 수린이를 데리고 찾아오셨는데, 두 아이들도 잘 먹었다. 찰나님은 생애 처음으로 추어탕을 먹었다고 했다. 이제 나만의 맛집이 아니게 된 느낌이다. 그것도 좋다. 행사가 마무리 되고 기념 촬영을 한 다음에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멀리서 오신 분들이 돌아가실 길이 걱정되었다.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데 날씨가 따뜻했다. 행복한 주말이었다. 내가 바뀌니 즐길 것이 더 늘어난 시간이었다.

IP *.160.3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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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7 11:32:22 *.113.77.122

간만에 술마시고 해서 정신없었는데 노래 곡목하나까지 기억을 하다니 너무 놀라운데요 

나이는 제일 어리지만 정신적 성숙과 따뜻한 마음이 그냥 느껴지네요  


그동안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생각하니 이상해서 손도 안되었던 음식이었는데 그것도 다 고정관념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45년만에 추어탕 고정관념 숙제를 깔끔히 해결했습니다

집에와서 추어탕 얘기했더니 남편이 좋다고 다음번에 한번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확실히 추어탕 때문인지 피곤함이 없는 월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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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8 13:16:38 *.50.21.20

ㅎㅎㅎ 안 먹던 음식을 새로 먹게 되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만큼 즐길거리가 늘어나는 거라 생각해서요. :) 

맛있는 식당 소개로 그런 경험을 드렸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아주 기특하네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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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8 00:50:48 *.185.21.47

구~~~구름처럼 안개처럼 끼였던 마음속에 뭔가가 올라 왔나요

해~~~해가 지고 깜깜한 밤에, 너른 창 너머로 보이는 별빛과 달빛이 있듯이

언~~~언제 어디서 무슨일이 그대 앞에 일어나고 닥쳐와도

        그대와 함께 한 동기들과의 아름다운 밤을 기억하며

       그대! 늘 유일한 자기 자신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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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8 02:13:22 *.119.88.236

추어탕 만큼 진국인 해언님. 앞으로 함께 갈 시간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편안한 밤 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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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8 07:27:58 *.104.9.186
내 아이들이 그대를 닮아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졸린 것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 좋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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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8 13:49:03 *.94.41.89

쌍큼 매력녀 해언이 ^^* 가장 먼저 후기를 올리는 이 모범이란~~!

종종걸음님 말처럼 정말 진국!!!인 그대의 사려깊은 모습들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답니다.

다시 한 번 지날 주말의 풍광들이 눈에 선하면서 다들 넘 보고 싶어지네용~~ 추어탕도...또 먹고싶다. 츄릅츄릅~

오늘 하루도 기운차게 으쌰으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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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9 00:03:21 *.243.106.35

(합격전이긴 했지만) 연구원으로 만나니 감회가 남다르더군.

삶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멋진 추억들 많이 만들어 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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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9 00:27:40 *.255.177.78

"나에게도 속내를 완전히 털어놓을 수 있는 가까운 동료들이 생긴 것에 감사했다. "

"느닷없이 눈물이 나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매 수업마다의 디지털 서기"

"내가 바뀌니 즐길 것이 더 늘어난 시간이었다."

 

 

연애해봤는가라고 물었는데? 안해봤을 것같냐고 되물었지요.

그럼 다음 모임에 요즘 신세대 연애담을 들려주시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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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9 11:12:32 *.94.164.18

"나에게도 속내를 완전히 털어놓을 수 있는 가까운 동료들이 생긴 것에 감사했다. "


원하시는 만큼의 비밀이 보장 됨. 언제든지 애용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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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9 23:36:51 *.186.179.86
9기는 첫 만남에 이탈리언 레스토랑에서 선배들을 만났어요
그래서 변경연 분위긱 와인스럽고 조금은 이국적인가 했는데
아마도 10기는 추어탕 오리 삼합....
요런 방향으루다가 세팅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ㅎㅎㅎ
해언씨 만나서 반가웠어요
앞으로 자주 봐요. 아자~~♡♡
---9 기 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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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0 00:22:42 *.177.80.163

해언씨는 그 웃어주는 얼굴만으로도 나한테는 큰 공헌이 되던데~~

아, 너무 늙은 티를 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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