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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25일 07시 35분 등록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 경쟁사회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아서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 장혜경 옮김 / 로도스 펴냄

1. 지은이에 대하여
스베냐 플라스푈러
1975년 독일 뮈스터에서 태어났다. 뮌스터대학교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2006년 같은 학교에서 논문 <쾌락에의 의지, 포르노그래피와 현대 주체>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욕망과 탈진, 중독, 우울증 등에 관심을 가져 온 그녀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오늘날의 심리학>잡지와 라디오방송국 도이칠란트라디오와 도이칠란트풍크 등에서 자유 저술가로서 활동하며 다수의 글을 기고했으며, 2011년 11월부터 현재까지 <철학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의 저서 <나의 의지가 이루어지다. 자살시대의 죽음에 대하여>(2007)은 아르투어-쾨스틀러 저작상을 수상했고 이외에 <바람직한 중독, 질투와 사랑에 대하여>(2008)를 냈다. 이들 저서는 출간될 때마다 주요 언론과 방송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작가인 남편 플로리안 베르너와 딸과 함께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

장혜경
연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독일 학술교류처 장학생으로 하노버에서 공부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중이며 <왜 나는 우울한 걸까> <예술가의 여행>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철학은 어떻게 정리정돈을 돕는가><해적당>등 ㄷ수의 문학 및 인문 교양서를 우리말로 옮겼다.


2.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1. 향락노동 – 고통의 즐거움과 즐거움의 고통>

8 오늘날 우리에게 노동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우리는 좋아서 일을 하고,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일에 쏟아붓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의무 노동자가 아니라 향락 노동자이다.

향락 노동자인 우리는 일을 사랑한다. 일을 통해 인정받기를 원한다. 사실상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란 거의 불가능하고 가능하더라도 일시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인정을 끊임없이 희망한다. 그래서 우리는 의욕에 불타 일하고, 때로 미친 듯이 일한다.

9 과도한 향락 노동자에게 일체의 여가는 오히려 고통이다.

9 오늘날의 성과 사회에서 우리는 이런 노동 충동을 열정이나 활력과 쉽게 혼동하는데, 사실 이는 우울증에 저항하는 절망적 투쟁에 다름 아니다.

10-11
(막스 베버… 초기 산업 자본주의의 프로테스탄티즘적 노동 윤리와 현재의 차이)
- 신의 뜻에 따르려는 노력의 자리에 오늘날 노골적인 야망과 끝을 알 수 없는 인정 투쟁이 들어섰다.
- 우리는 세계화된 바겐세일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자드은 절대 누릴 수 없엇던 세속적 향락에게서 죄의 비늘을 벗겨내 줄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우리에게 존재한다. 결백한 향락! 이것이 오늘날 웰니스 시대의 모토이다.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지젝은 말한다. “모든 것이 허락되고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 단 그것들에게서 위험스러운 요소를 제거한 후에.” 웰니스의 향락은 죄가 없다.

14 아이들은 오직 놀기 위해서 놀고 도대체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아이들은 신비한 존재이다. 시간을 초월하며 비밀스럽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더 높은 힘에 자신을 내맡긴다. 아이들은 운명에 몸을 맡긴 존재이며 부모와 신의 힘에 자신을 내던진 존재이다. 그렇기에 평화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잊은 채 놀이에 몰두할 수 있다. 버팀목을 신뢰하는 자만이 놀이에 전념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신뢰야말로 향락 노동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이다.

18-19
공포를 유발하는 신경회로에 대한 지식보다 공포의 심리적 이해가 덜 중요한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공포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프로이트는 그렇게 말했다.

19
프로이트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모든 것이 ‘정상’이면 잘 작동하고 작동이 멈추면 약품이나 기술을 동원해 고칠 수 있는 논리정연하고 자율적이며 투명한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처음부터 흠집투성이 존재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갈망한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애정관계에서뿐 아니라 일에서도 탈진할 때까지 자신을 혹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타인과 관련이 있다.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좀 더 노력하면 가능할 것란 희망으로 인정에 대한 끝없는 야망을 붙태운다.

타인에 대한 바로 이 필수적인 의존성은 한편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끝없는 절망으로 밀어 넣는다. 우리는 절대로 타인의 인정에 대해 확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23
그래서 나는 쉼 없는 행동과 강박적인 자기 최적화의 시대에 다시 ‘놓아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 다양한 형태의 놓아두기는 이용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목적의 자유, “무목적”의 자유이다. 모든 요구에 반사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때에만, 모든 가능성을 가능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박적으로 활용하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다. 그것은 풀어주고 들여보내고 존재하게 하는 자유, 무위의 자유, 중단과 여유, 놓아주기의 자유이다. 능동성 옆에 수동성을 가져올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우리가 사는 사회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금욕과 방탕의 자리에 우리를 흥분시킬 향락이 들어서야 한다.


<2. 즐기면서 일하는 동물 – 인간, 그리고 그의 심연에 대하여>

27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모든 것을 파괴한 자”라고 불리기도 했던 칸트는 여기서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 오로지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 모든 취향을 억누르는 인간은, 사실 망가질 때까지 작동하는 기계와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엄격한 칸트마저 한 가지 점에서는 옳다. 쾌락에만 빠져있는 자가 가치 있는 문화 활동을 할 능력이 없다는 점 말이다.

29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늘 시선을 땅에다 박고 다니는데 비해 머리가 하늘로 솟아 있어서 별을 향하고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거만한” 인간은 저 멀리 형이상학적인 것에 시선을 돌리고,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과 추상적 사고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기어다니는 동물이 이 사과 저 사과를 킁킁대며 햝는 동안 인간은 사과의 종과속에 분류한다. 아무리 맛있는 향기가 풍겨도 과일을 날름 삼키지 않고 집어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며 다양한 종을 비교하고 체계화하고 범주화한다.

31
동물은 오로지 자연적인 필요만을 느끼나, 인간은 문화적 경계를 넘는 일을 매력적으로 느낀다. 인간의 충동은 자연적이기만 한 게 아니다. 우리 스스로 깨트리면서 동시에 유지하는 금기들은 우리들에게 강한 충동을 선사한다.

33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말했다. “초자아를 제외한 그 무엇도 향락을 강요하지 않는다. 초자아, 그것은 향락의 명령이다. 즐겨라!”
바로 이 명령이 현대 소비 사회의 핵심이란 사실은 물론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즐겨라! 어디서나 이런 외침이 들린다.

<3. 사우나에 간 오디세우스 – 쾌락은 어떻게 순화되었나>

39 결박당한 채 노래를 듣는 그 남자는 다른 이들처럼 사이렌에게로 가고 싶다. 그러나 그는 타락한 자로 사이렌의 것이 되지 않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르크하이며와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했다.

41 목숨을 위협하는 유혹을 이겨낸 것은 오로지 자기 몸을 제어했기 때문이다.

42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이런 점에서 매우 모범적인 인물이다. 사이렌에게 그냥 항목해버리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다. 그런 점에서 오디세우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계몽된 향락자이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소프라노 가수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도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되기에 못 박힌 듯 자기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강렬함과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 현대의 콘서트 관람객과 유사하다. 호르크하이며와 아도르노는 말한다. “결박당한 남자는 먼 훗날 콘서트에 참석한 관객처럼 꼼짝하지 않고 귀를 기울인다. 풀어달라는 그의 열적적 외침은 박수갈채처럼 사그러진다”

그러므로 향락은 연출과 각색을 전제하고, 또한 욕망의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전제한다. 향락을 누리는 자는 충동을 유예하고 자신을 통제하며 포기할 능력까지도 갖추어야 한다.

43 문명화된 향락주의자는 통제된 향락을 우상으로 승격시킨다.

47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말한다. “사유는 결국 완전히 예속된 두려운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는 가운데 탄생한다. 향락은 말하자면 자연의 복수이다. 인간은 향락하면서 사유에서 해방되고 문명에서 벗어난다. 옛날 옛적 사회들은 그런 귀환을 공동의 귀환으로 생각하며 축제로 준비했다. 원시 축제는 향락의 집단적 원천이다. 사람들은 미화된 원천적인 힘에 자신을 바친다. … 문명과 계몽이 더해가면서 비로소 강해진 자아와 확고해진 권력은 축제를 단순한 광대극으로 전락시켰다. 지배자들은 향락을 합리적인 것으로서, 완전히 제어되지 못한 자연에 부과하는 관세로서 도입하며, 향락을 해독시키는 동시에 더 수준 높은 문화에서 보존하려고 노력한다. 피지배자들에게 향락을 완전히 금지시킬 수 없기 때문에 적절한 용량을 처방하려는 것이다. 향락은 조작의 대상이 된다. 그런 과정에서 원시 축제에서 휴가에 이르기까지 계속 진행되었다.

49 호메로스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현대로 온다면, 그는 아마 제일 먼저 웰니스 센터로 달려갈 것이다. 합리적 향락이 최고점 혹은 최저점에 도달한 바로 그 장소로 말이다. 웰니스 향락이란 말 그대로 휴향의 향락이다. 무알코올 맥주처럼, 생산기계를 손상시키지 않는 치유의 향락이다. 그러나 치유의 향락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미리 미리 건강을 살피고, 관장이나 금식마저도 오락으로 선언함으로써 생산기계를 지원한다.


<4. 포르노의 지배 – 탈진 시대의 섹스>

54 피임약은 섹스를 번식에서 분리시켰고, 복제 의학은 거꾸로 번식을 섹스에서 분리시켰다.

61 휴식하지 않는 인간은 항상 똑 같은 것만 생산한다. 그는 항상 똑 같은 행위를 처음부터 다시 실행하는, 도무지 피로를 모르는 포르노의 신체와 아주 유사하다.

여기서 회의를 하고, 저기서 비즈니스 런치를 먹고, 도저히 미룰 수 없는 마감 일정에, 각종 스포츠 중계방송 시청까지, 우리는 언제나 지속적인 흥분 상태에 빠져 있다.

68 피트니스 트러이너가 애인을 대체하고, 스포츠가 섹스보다 더 중요하다. 마돈나가 하루 4시간을 피트니스센터에서 보내다 혼인을 파탄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그녀에 대한 한 신문기사에 실린 내용이다.


<5. 여유의 신성함 – 리추얼은 왜 필요한가>
75 축제와 결부된 방종은 충동의 방출뿐 아니라 공동체 의식의 햠양에도 크게 기여한다.

80 의례는 방향을 제시하고 버팀목이 되어준다.

81 의례화된 행동들이 일상 생활의 특수한 실천들에 틀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의 제약을 통해 불특정행동이 특정 행동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주의하라 의례는 단순히 정해진 습관 이상의 것이다. 습관은 세속적이지만 의례는 신성하다. 의례에는 축제성이 깃들어 있다.

<6. ‘커질 것 같아’ – 여성의 야망에 대하여>

90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신의 눈길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듯, 우리 역시 부적절한 상황에서 몸을 노출했다는 기분이 들면 사람들의 눈길로부터 숨으려 한다.

91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부는 인간의 내부를 가린다. 피부는 무서운 것을 속이는 외적인 가상이다. “얼굴은 얌전하고 피부 안쪽은 음탕한 그런 여자가 많다. 음란한 것은 덮여 있고 신성한 것은 노출된다” 프리드리히 폰 로가우스의 시 <수상한 순결>의 구절이다.


<7. 불타는 자아 – 우리의 야망을 추동하는 것>

104 충동의 포기, 불을 꾸고 싶은, 오줌을 누고 싶은, 경쟁을 하고 싶은 유아적 욕망의 포기가 비로소 불의 위대한 문화적 정복을 가져왔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꼭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는 깨달음이 아닌가 한다.

<8. 강박적 사랑 – 일중독에 대하여>

109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서 온 힘을 쏟는다. 반대로 사랑하지만 상대로부터 그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두려워서 온 힘을 쏟는다. 상대가 전혀 사랑을 주지 않거나 기껏해야 미심쩍을 정도의 사랑밖에 돌려주지 않기에, 상대를 얻기 위해서는 늘 노력해야 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

111 일중독자는 고도로 종교적인 사람과 비슷하다.


112 “사회적 죄의식을 구축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기능이다.” 철학자 마르쿠제는 말했다. “계속 새롭게 재생산되는 확신, 즉 모두는 온전히 혼자이며 사방에서 경쟁을 하여 자신의 생존을 획득해야 하고, 모두에게는 자신이 쏟아부은 노동력에 따라 보상받는다는 확신에서 기존의 가치법칙이 반영되어 있다. 행복은 일하여 얻을 수 잇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목표가 행복이어서는 안 되며, 노동의 보수는 향락이 아니라 이윤과 보수, 계속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야 한다.” 계속 더 일하게 만드는 죄는, 마르쿠제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이 갖는 가치와 기능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탈진할 때까지 일을 하는 것은 일을 하면서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며, 다시 말해 자아를 실현하기 때문도 아니다. 또 순전한 생활의 필요성 때문도 아니다. 일에 온 힘을 쏟아붓는 이유는 문화적으로 이식된 죄책감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경쟁에서 이겨야만 가치 있는 인간이 된다. 설렁설렁 일하거나 아예 일을 하지 않는 인간은 죄를 짓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노동력에 따라 판단하는 기존 사회의 법칙 앞에 죄인인 것이다.

114 중요한 것은 오로지 “위대한 타자”의 상상 속의 그리고 실제적인 요구뿐이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방식으로 소외된 노동은 포르노의 섹스와 유사하다. 섹스를 위한 섹스가 아닌, 카메라를 위한 섹스 말이다. 행위는 검은 구멍 – 상상된 요구 –을 향해 있다. 만족을 느끼는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118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은 여유가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펼쳐내려면 아무 목적 없이, 아무 두려움 없이 놀이에 빠질 수 있어야 한다. 실러는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에서 말했다. 인간은 가장 인간다울 때 놀고, 놀 때 가장 인간답다.

<9 하이데거의 침대 / 사유와 향락>

122 철학자 하이데거는 조용히 철학에 몰두하고 싶을 때마다 바위산의 초라한 오두막을 찾았다. 수돗물도 안 나오는 초막으로,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코딱지만한 “공부방”으로.

금욕과 은둔. 이 둘은 사상가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 같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복음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성 안토니우스는 어느 날 이 성경의 말씀을 듣고 가진 재산을 다 나누어 주고 혼자 조용히 물러나 평생을 은자이자 금욕주의자로 살았다. 하늘의 보물을 위해서.

123 살아있는 육체에서 심장을 뜯어내는 것과 같소. (하이데서 – 존재와 시간을 집필하면서 한나 아렌트를 잊어야 한다며 쓴 편지에서)
하이데거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차단했고, 순수한 정신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이 일에 바치기 위해 자신의 내장을 다 끄집어내고 모든 감각을 차단해버렸다.

125 사랑하는 연인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촛불을 켜놓고 포도주를 마시고 그런 다음 사랑의 행위로 초대하는 부드러운 침대에 몸을 누이는 것처럼,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는 사유를 시작하기 위해서 아마도 나무 의자와 차가운 샘물이 필요할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연구실이 침실보다 더 금욕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이 두 장소의 공통점은 쾌락의 생산이다. 한쪽에서는 체액이 흐르고 다른 쪽에서는 사상이 샘속을 뿐이다.

126 결핍의 상태에서만 순수 정신의 매력, 형이상학의 매력이 나타나는 것 같다.

127 안토니우스의 환상은 육체적 동경에서 나온 것이다. 하이데거 역시 결핍 때문에 철학에 몰두한다. 달리 말해 욕망하기에 철학한다.

128 그렇다면 사유는 원래 무엇을 위한 것인가? 진리를 위해서, 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진리를 찾는 것이 사유의 목표이다. 진리를 찾았을 때 비로소 모든 긴장이 해소된다. 철학을 하는 인간이 이 목표, 이 절정을 추구한다고 해서 나쁘게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진리는 금괴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도, 벌거벗은 몸처럼 어디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진리의 본질은 물러남에 있다. 그리고 물러나 있기 때문에 진리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인다.

129 철학적 사유는 진리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진리를 찾는 일이다.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철학적 사유는 포르노적이지 않고 에로틱하다고 말이다. 포르노그래피는 들쳐보아야 할 비밀이 없다. 모든 것이 다 보인다. 그래서 발작하듯 강박적으로 오르가즘들을 줄지어 늘어놓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 그와 달리 에로틱한 욕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것에서 점화된다.

130 사유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내 생각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다. 내 생각도 제 삶이 있고,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내 생각이 잠시 물러나도 견딜 수가 있다. 내 생각에 집착하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생각을 쫓아버리는 대신 놓아주고 열린 마음으로 생각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이다.

131 그러므로 꽃피는 나무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사유는 단순히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책상에서만 탄생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구체적인 경험이 아니라면 사유가 무엇을 먹고 살겠는가? 사유에게도 식량이 필요하다. 안 그러면 사상가는 고민만 하다가 날로 여위어갈 것이다.

영감은 금욕적인 적막, 현세적 향락의 부재가 아니라 충만도 필요로 한다.

132 고대 그리스에선 우리와 전혀 달랐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다. 그리스 사람들은 밖에서, 자연에서, 거리에서, 공동체에서 철학을 하곤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수도원 방에 처박혀 고민하지 않았다. 시장 광장에서, 이리저리 유랑하면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의 경험과 견해를 질문은 공동의 철학을 자극했다.

<10 에로스 / 악마는 어떻게 사고를 잉태하는가>
(소크라테스 향연 이야기)

135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만 결합한다. “그러므로 임신을 한 자가 아름다운 것에 가까이 다가가게 될 때는 인자하게 되고 즐겁게 이완되며 자식을 출산하고 낳는다. 반면에 추한 것에 가까이 다가가게 될 때에는 우울하게 되고 고통스러워 움츠려들며 외면하고 뒤로 주춤하고 자식을 낳지 못해 그저 태아를 안에 가진 채 버거운 생태로 있게 된다.”

136 철학자는 절대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창조하지 않는다. 불후의 사상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탄생한다. 소크라테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에로스에 대해 독백을 늘어놓았던 사람들과 달리 그는 함께 깨달음에 이르렀던 디오티마와의 대화를 들려준다. 혼자서는 진리로 향가는 길을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은 철학자로서 신과 같은 완전함을 갖출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자이다. 욕망하는 자이다. 무언가 결여된 한 인간이다.

137 소크라테스는 마지막까지 술자리를 지켰다. 동이 트고도 아가톤, 아리스토파네스와 ‘큰 술잔’으로 술을 마셨다. 하지만 이 대화 상대들이 깜빡 잠이 들자 소크라테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여느 때처럼 하던 일을 하러 나갔다.

그러니 사유와 향락에 관해서라면 기독교의 금욕주의자들보다 그리스인들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안토니우스도 사막에서 굶는 대신 소크라테스처럼 먹고 마시면서 에로스를 섬겼더라면 훨씬 더 행복한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악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에로스 역시 그 악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향락을 데리고 사유로 들어오는 것이다.

<11 경계를 모르는 인간 / 통증의 제거에 대하여>

141 현대 의학은 통증과 우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통증은 이제 더 이상 참고 견뎌야 하는 숙명이 아니라 최대한 빨리 제거해야 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142 통증은 진보가 제거해야 할 불필요하고 비생산적인 잔재로, 사라져야 할 무서운 시대 착오로 취급된다. –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이 <통증>에서 한 말이다.

143 통증의 신체는 우리의 관심을 경계선으로 돌린다. 철학자 폴커 카이자는 말한다.

자신의 통증에 귀 기울이는 사람만이 자신을 보호하고 스스로에게 휴식과 후퇴를 허용한다. 통증은 건강을 지키는 파수꾼이요, 온정주의의 방식으로 경계선을 그어주는 수호 성인이다. ‘여기까지만. 더 이상은 안 돼!’하고 말이다.

144 사무실에서 집중력 약화와 탈진 현상은 몸을 쉬게 하라는 경고 신호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효율적으로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146 진화생물학적으로도 고통과 도덕의 연결은 설명이 가능하다. 이미 원시 시대에도 고통의 표현은 공감의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고통은 얼굴을 찌푸리거나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보통) 관심과 애정, 도움을 받게 된다. “고통의 표현은 사회 환경에서 중요한 효소의 기능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부모와 같은 태도를, 공감과 보호를 선사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

통증치료사 코프와 자바토프스키의 말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보편적인 통증 제거 방법은 애정과 신체접촉, 마사지, 위로, 기도 등이다.”

148 상처의 이중성. 한편으로 상처는 우리를 인간적으로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공격받지 않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상처 입은 자리를 숨기고 은폐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데 자기 실존의 흉터가 언젠가 정말로 사라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유한성이, 자신의 허약함이 부인되는 상태는 죽음과 비슷한 상태가 아닐까? 통증을 느끼지 못하면 질문도, 욕망도, 요구도 없어진다. 상처를 노출된 상태로 두는 것이 건강할 수 있다. 19세기의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건강하고 노출된 상처. 때로는 그 상처가 아무는 것이 가장 나쁘다.” 상처가 노출되어 있어야만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갖는다. 상처가 아물자마자 모든 희망과 욕망은 질식한다.

150 의사인 리처드 셀저는 <칼의 고백>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조금 전에 수술을 마친 한 여성 환자의 병실에 들어갔다가 환자가 들고 있던 면도칼을 뺏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자기 아랫배를 칼로 가르고는 양손으로 상처를 후벼 파고 있었던 것이다. 곧이어 응급수술을 했고 여기서 깨어난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정말 엄청나게 아파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이게 내 몸이라면 아파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무 느낌이 없었어요.” 그제서야 셀저는 그 여성 환자가 자기 배 속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사라진 통증이었다. 아니면 사라진 쾌감이었을까?

152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은 현실을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세상과의 첫 만남부터가 고통이다. 인간은 탄생의 고통을 겪고 세상에 태어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53 어느 순간이라도 통증이 번개처럼 내려칠 수 있다. 하지만 최고 수준의 행복, 엑스터시(Ekstase, 이것의 그리스 어원은 ‘자신 밖으로 벗어남’이다)를 느끼려면 바로 이런 개방성이, 이런 취약성이 필요하다. 쾌감과 욕망, 사랑과 동경, 낯선 것이 풍기는 매력, 그 어떤 것도 고통에 나를 열지 않고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다.

< 12 나르시코의 새 코 / 완벽한 신체가 던지는 구원의 약속 >

161-162 가능성의 증가를 오로지 긍정적인 것으로, 즉 진보의 측면으로만 본다면 변증법의 실체는 절대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모든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름다울 수 있다니?

162 우리의 문제는 아름다움의 노예가 된다는 데 있지 않다. 우리의 문제는 끝없는 자유 앞에 서 있다는 데 있다. - 크리스티안네 츠쉬른트 <우리는 아름답다>

169 지배적인 취향의 이상은 ‘소비의 아름다움’인 상품 선전에서 나온다’고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말했다. 실제로 그륀들의 연구는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는 후기 자본주의에서 이미지가 가지는 힘과 대중문화의 단조로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더 많다.

171 모든 악을 내던져버린 깨끗한 무죄의 몸이라는 이런 오래된 심리의 논리는 오늘날 단순히 계승되는 수준을 넘어 완벽한 신체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는 성형 산업을 통해 날로 첨예화되고 있다.

173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헤겔의 문장을 상기해 보자. 그는 ‘자신의 현존재를 자신의 특수한 성격, 욕망, 의지에 맞추고 그래서 자신의 현존재를 스스로 즐기는 자, 그는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13 특별할인 가격의 구원 / 바겐세일 사냥>

180 후기 자본주의 인간은 항상 목이 마르다. 늘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지금 당장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 모든 것이 번쩍거리고 모든 것이 행복을 약속한다. 이 소파만 있으면… 그러나 카드 한도는 넘어선지 오래고, 절대 해소되지 않을 갈증만 남는다.

181 말의 자유는 곧 의견의 자유를 의미하며, 이는 계몽주의가 이룩한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이다. 하지만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말의 자유란 수다를 떤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그러니 결국 최대한 적은 돈으로 계속 떠들어댄다는 의미일 것이다.

183 신의 벌과 구원의 약속은 (적어도 신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탐욕적 행동을 막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184 그러니 왜 나만 도덕적이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멍청하지 않아!

185 동물은 탐욕을 모른다. 향락도 모른다. 인간만 탐욕적이다. 오직 인간만이 문화적 존재로서 충동의 포기를 요구당하고, 따라서 금지된 모든 것을 향한 더 큰 관심을 키우게 된다.

186 역사상 전례 없는 자본주의의 면모는 바로 종교가 더 이상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에 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무죄의 자연 상태에서 살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문화적 존재인 인간에게 충동을 만끽하면 안된다는 금기는 처음부터 존재했고, 지금까지도 우리 안에 살아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금기로부터도 죄로부터도 해방시키지 못했다.

187 벤야민은 두 가지 가능성을 언급한다. 선도 악도 모르는 니체의 초인 시대, 혹은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도래할 거라 주장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우리가 죄의 더미 꼭대기에서 불렀던 신은 조국이었고, 그 국가는 잃어버린 그의 어린 양들을 서둘러 자신이 지원하는 구제금융의 우산 밑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서둘러 수십 억의 보조금을 풀어 경제의 묵시록을 저지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경제 위기가 데려가지 않는다면 기후변화는 어떤가?

< 14 놓아두기의 칭송 / 무위에 대하여 >

189 기술로 시간을 버는 만큼 우리의 기대와 요구는 더 늘어난다. 울리히 슈나벨은 <행복의 중심, 휴식>에서 이렇게 말한다.

192 과잉 행동 환자에게는 – 라틴어에서 온 단어 inspiration의 의미 그대로 (in + spiritus) – 어떤 정령도 입김을 불어넣을 수 없다. “깊은 권태” (한병철)의 한가운데에서 영감에 마음을 열 수 잇는 시간도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좋은 생각은 말 그대로 선물이다. 버튼을 누른다고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비우고 내려놓을 때, 잠을 자거나 하릴없이 뒹굴거리거나 공상에 빠지거나 꿈을 꿀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이성의 볼륨을 줄이고 목적 지향적 의지를 꿈결처럼 몽롱한 이완의 상태로 해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정령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혹은 세속적으로 표현한다면, 무의식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깨어 있는 동안 우리는 논리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생각한다. 결합될 수 없는 대립적 사물들은 깨끗하게 분리되어 있고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면 자동적으로 양심의 가책이 고개를 들어 규제의 손길로 정리한다. 하지만 꿈을 꾸는 동안에는 검열이 힘을 잃는다. 꿈은 진짜 내용을 꿈의 영상 뒤편으로 숨겨버리기 때문이다.

193 창의적인 사람들이 하루의 경계 시간에, 즉 아직 깨어나지 않았거나 더 이상 초롱초롱한 정신이 아닌 시간에 작업을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꿈 대신 음악을 듣는 이들도 있고, 숲이나 도심을 산책하거나 걷거나 달리면서 발검음의 규칙적인 박자를 통해 행복한 몽환의 상태로 빠져드는 이들도 있다. “사고가 무엇인기 이해하고 싶으면 꿈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크리스토프 튀르케는 말한다.

196 우리가 자신의 유한성과 무능을 두려워하고 행동하는 편이 내버려두는 편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현대인이 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도 관련이 깊다.

우리 시대는 가족, 국가, 성의 모든 본질적 결정을 잃어버렸다. 우리 시대는 각 개인이 자신의 창조자가 될 정도로 완전히 각 개인을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197 인간의 이미지는 <물 위에 누워>라는 제목의 아도르노의 잠언을 떠오르게 한다.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로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 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 그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의 맹목적 분노”를 규탄하고, 놓아두기를 진정한 자유로 이해하라고 제안한다.


3. 내가 작가라면

내 책을 쓸 때 이 책은 좋은 연장통이 될 듯하다. 스베냐 플라스푈러는 ‘노동은 왜 우울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노동만으로 즐길 수 있는 향락은 가짜 향락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라고 역시 작가는 답한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일에 대한 강박적 사랑을 내려 놓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유로운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라고 권한다. 탈진과 중독이 아닌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라고 권한다. 물 위로 떠오르기 위해서는 몸에 힘을 빼야 한다. 몸에 힘을 빼는 게 그리 쉽지 않다. 그저 존재하는 것을 느끼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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