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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25일 11시 44분 등록

No 47

2014.03. 25

Oh! 미경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

                                  즐거움의 가치사전

                                  즐거움.jpg

                                         초판 2007년 5월 7일/ (주)도서출판 청년사

 

1. 저자에 대하여 : 박민영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문화평론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기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필자은행 대표 및 도서출판 우물이 있는 집 편집장으로 일했다. 전국대학생문학연합 의장을 지내고 오월문학상 시 부문 수상을 하는 등 학창 시절부터 독서와 문예 활동을 활발히 해 왔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주제로 하는 책에 관심이 많고, 글로써 자신과 세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글을 쓰며 블로그 「깊은샘물의 서정카페(http://blog.naver.com/fwriters.do)」를 운영하고 있다. 해마다 100권이 넘는 책을 읽어온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청소년 및 일반인을 위해 동화, 에세이, 영화비평, 사회비평과 같은 여러 장르의 글을 써왔다.

저서로 『책 읽는 책』(지식의 숲), 『행복한 중용』(북스토리), 『즐거움의 가치사전』(청년사, 2007년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 KBS 'TV 책을 말하다' 선정 도서), 『논어는 진보다』(포럼), 『논어로 배우는 한자』, 『공자 속의 붓다, 붓다 속의 공자』있다. 월간 <인물과 사상>에 문화비평을 쓰고 있으며,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인문학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YES24 제공]

 

2. 마음에 와 닿는 글

 

[5-6] 머리말

쾌락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철학, 과학, 역사, 문학, 예술, 정치. 경제, 심리학 등 거의 전 영역을 다루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더구나 과학기술과 자본의 논리에 힘입은 오늘날의 쾌락의 양상은 근대 이전과 사뭇 달랐다. 그에 대한 해명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쾌락이 쾌락이 되는’ 심리적, 철학적, 사회적 이유들을 탐구하고 있다. 내가 애초에 의도한 것은 쾌락의 문제를 고찰함으로써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1.사랑

로맨스_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합일에의 욕망

자녀 사랑_유한성의 극복,지배욕 충족,실용적 선택

효도_부모 공경하는 사회, 부모 버리는 사회

가족애_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안식처

우정_독립적인 사랑과 의존적인 야합

 

2.섹슈얼리티

 

섹스-원초적 욕망의 사회적 변주

[61]

인간은 성교를 하는 과정도 다른 동물과 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은 전희를 즐길 뿐 아니라, 성기를 결합하는 행위 자체에도 많은 시간을 들인다. 상대방을 섹스로 이끌기 위해 흥분시키거나 설득하는 과정에도 다양한 수단들이 동원된다. 의도적으로 장애를 설치하고, 주위 환경이나 자신을 돋보이게 치장하고, 상대방을 놀라게 하고, 무언가를 거짓으로 꾸미고, 긴장을 유발시키는 일 들이 사랑의 유희나 구애에 동원된다. 다른 영장류에겐 이렇게 지루한 구애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 인간 커플은 전희와 결합을 포함한 전 과정에 약 30분을 요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원숭이 커플보다 100배 이상 긴 시간이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성교는 어떤 영장류보다 격렬하다. 인간은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체위를 구사하고 도구까지 동원한다.

 

[62]

인간의 경우 3가지 종류의 섹스 - 이이를 갖기 위한 섹스, 짝짓기를 위한 섹스, 짝을 유지하기 위한 섹스- 가 모여서 일차적 기능인 종족 보존 기능을 이룬다.

 

[63]

섹스는 내부의 성적 충동을 외부의 성적 자극을 통해 해소시키려는 행위이다. 섹스가 인간에게 쾌락을 주는 것은 오르가슴 때문이다. 오르가슴을 경험할 때 인간의 자아영역은 다소 붕괴되고 환희를 느낀다. 절정에 도달했을 때, 남자는 애정이나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창녀에게조차 ‘사랑한다’고 외칠 수 있다. 그것은 창녀를 진짜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아영역이 붕괴되기 때문이다.

 

오르가슴이 가져다 주는 희열과 충일감은 고대 인도인들에게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되었다. 그들은 오르가슴을 종교적 법열, 황홀경으로 해석해 ‘우주와의 합일’이나 열반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통로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것이 4세기경 바라문교의 철학적 말라나가 바츠야야나가 성애의 경전 <카마수트라>를 편찬하고, 힌두교 신전에 인도의 신들과 여신들이 마치 요가를 하듯 기묘한 자에로 다양한 성행위를 하는 모습들이 새겨지게 된 이유이다. 이런 교리는 탄트라 불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성행위를 영적인 것과는 정반대되는 속된 것으로 치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런한 교리는 당혹스러워 보이겠지만, 본래 종교가 세계와의 합일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한다면, 성행위를 통한 해탈을 주장한다고 해서 논리적으로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64-65]

연인들의 전희는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어머니와 자식의 친밀성에 연원을 둔다. 성적 과정에서 최초의 행위는 어릴 적 부모와 그랬던 것처럼 손을 잡고 걷는 것이다. 보다 신뢰가 깊어지면, 두 사람이 몸을 맞대고 키스하거나 포옹하며 옛날의 행복으로 회귀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목소리도 유아기로 돌아간다. 공통의 안일감이 젊은 커플을 파도처럼 에워싸 갓난아기 때처럼 외계의 어수선한 소란은 거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성교 이전 단계에서 남녀는 남의 눈길을 피해 은밀한 곳을 찾는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는 자세로 강도 높은 접촉이 이루어진다. 그동안 청각과 시각신호는 줄어들고 촉각신호는 많아진다. 촉각신호에서는 손, 입술 및 혀의 압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녀는 옷을 일부, 혹은 전부 벗어버리고 되도록 넓은 면적에 걸쳐 살갗과 살갗이 맞닿는 촉감의 자극을 맛보려고 한다. 시계의 초침은 어머니의 젓을 빨던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키스는 입술과 혀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상대의 입에서 젖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서로 작용한다. 연인들은 귓불, 발가락, 클리토리스나 페니스, 연인의 유두에서 유사 젖꼭지를 발견한다. 의사 유방이 의사 젖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효과는 한층 커질 수 있다.

연인들은 그것을 침이나 성기의 분비물, 페니스의 정액 방출 등에서 얻는다.

 

[66]

인간의 섹스는 성숙한 영장류의 교미행위 더하기 유아기이 포옹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67]

인간은 만물의 영장답게 성행위를 자위의 목적, 경제적 목적, 권력적 목적에 활용할 수 있다. 자위의 목적에 해당되는 섹스로는 ‘권태를 이기는 섹스’가 있다. 이른바 ‘자극 투쟁 stimulus struggle'으로서의 섹스이다.

 

[68]

심한 권태에 휩싸인 사람은 단지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섹스를 할 수 있다. 만약 섹스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닌데 성적으로 그 권태를 이기고자 한다면, 가장 이용하기 쉬운 대상, 즉 자신의 몸을 이용해 자위행위를 할 수 있다. 그것이 원하는 만큼의 쾌락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권태의 반대는 쾌락이 아니라 자극이기 때문이다.

 

권태를 이기기 위한 섹스는 간혹 정상적인 패턴을 벗어난다. 극심한 권태에 바진 남녀는 과도하게 성행위에 집착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성적 만족을 넘어서 죽도록 섹스를 하거나 상대방을 못 살게 괴롭히면서 성행위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가까운 곳에 파트너가 있는데도 자위행위에 몰두할 수 있다. 그러나 자극 투쟁으로서의 섹스는 환멸을 낳기 쉽다

 

심리적 안정을 위한 섹스’ 도 위로의 목적을 수행한다. 심적으로 너무 고통스럽거나 긴장을 유발하는 상태에 있는 경우, 인간은 그것을 벗어나는 수단으로서 섹스를 활용할 수 있다. 모든 출구가 막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성행위가 마음의 고통을 유발시킨 문제와 전혀 관게가 없더라도, 그것이 가져다주는 자아영역의 붕괴를 이용해 마음을 달랠 수 있다. 이것은 ‘전이활동’이라고 부르는 동물의 행동과 비슷하다. 좌절한 사람은 단순한 행동에 열중함으로써 그 좌절을 잠시 잊을 수 있다. 섹스는 좋은 전이활동으로 선택할 수 있다.

 

[69]

인간은 지위를 획득하거나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확인하는데 섹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 지도교수와 학생의 관계, 학점이나 논문 지도나 통과 목적으로...

승진을 목적으로,

 

예컨대 여성은 직장 상사와의 성행위를 통해서 승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남자 상사는 자신의 높은 지위가 주는 우월감을 즐기기 위해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여성과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여성보다 경우의 수가 적긴 하지만 남성도 승진을 위해 여자 상사와 교제할 수 있다.

 

이러한 ‘위 섹스’가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곳은 사회의 핵심적인 권력을 가진 집단이다. 예를 들어 연예계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어린 여성들은 사회의 실력자들과 성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들의 후원을 받을 수 있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인 케네디의 문란한 성생활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며, 클리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도 많은 미국 정치인들이 그의 탄핵안에 찬성했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배우자 외에 섹스 파트너를 따로 두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은 우리 나라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어는 정치인의 섹스 스캔들이 터지면 동료 정치인들은 그것을 각 정파의 이익에 맞게 이용하기는 하지만, 내심 당사자에 대해서는 운이 없거나 자기 관리가 철저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할 뿐, 그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좀더 야만적인 ‘지위 섹스’의 예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한스 페터 뒤르의 주저 <음란과 폭력>에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 터키에서 정기적으로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구타 직후 성교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으며, 실제로 성교를 한 다음 다시 폭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구타에 대한 상대방의 반발심조차도 억누를 수 있는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확인하는 섹스였던 것이다. 이런 형태는 지금보다 여성들의 지위가 훨씬 열악했던 1970~198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일어났다.

 

[70]

성행동 연구자 매스트스R.E.L.Masters는 전쟁 중에 일어나는 주목할 만한 ‘지위 섹스’ 현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과거 독일을 점령했던 연합군 병사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패전국 독일의 많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점령군의 항문을 핥아주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점령군 병사들과 성관계를 가졌던 거의 모든 여성들 사이에서 이런 행동이 벌어졌다. 독일 여자들의 그와 같은 행동에 의해 제공된 쾌감은 상당히 자학적인 것이었고, 목적했던 대로 남자 병사들에게 사디즘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정복자에 대한 피정복자의 완전 항복을 상징하는 행동이었다.”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확인하기 위한 섹스는 꼭 이성에게만 행하는 것이 아니며, 동성에게도 행할 수 있다. 감옥에서는 지위 확인 차원에서 간혹 신참 재소자에 대한 고참 재소자들의 항문섹스가 이루어지며, 그러한 폭행에 가담하지 않는 동료 재소자는 ‘병신’ 취급을 받는다. 전쟁 중에 자주 보고되는 동성 포로에게 강요된 오랄섹스 역시 성적 쾌락 그 자체보다는 상대방을 모욕함으로써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확인하는 데서 오는 쾌감을 즐긴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폭력적인 지위 섹스는 동성애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행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71]

이런 행태는 동물들의 행동 패턴과 매우 닮아 있다. 동물들은 약한 놈이 암컷이든 수컷이든 자신보다 강한 놈에게 엉덩이를 들이댄다. 이런 성적 신호는 상대방의 공격적인 기분을 가라앉힌다. 그러면 우세한 수컷이나 암컷은 복종하는 수컷이나 암컷의 몸 위에 올라타고 성교하는 흉내를 냄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과시한다. 특히 이런 현상은 지위와 서열체계를 갖투고 있는 고등영장류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인간은 또 상업적인 측면에서 섹스를 활용한다. 창녀는 가장 노골적인 방식으로 성을 판다. 그러나 그 이외에도 나이트클럽의 쇼걸, 캬바레에서 춤 상대를 해주는 여자, 술집의 호스티스 역시 돈을 받고 성적 서비스를 해준다는 점에서 섹스를 상업적으로 이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 더 가벼운 형태로는 댄서, 배우, 모델, 미인대회, 수상자, 가수가 있다. 그들은 성행위를 암시하는 자세와 동작, 육감적인 모매를 통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판다.

 

상업적 섹스에는 하나의 법칙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직접적일수록 서비스 방식이 단순하고, 간접적일수록 복잡하고 과장된다는 것이다. 실제 섹스가 이루어지는 매춘에는 일반적으로 구애단계와 전희단계가 최소로 줄거나 생략되고, 곧바로 성교에 돌입한다. 그러나 육체 접촉이 없는 간접적인 방식일수록 육감적인 몸매나 전희적인 동작은 최대한 과장되어 표현된다. 과장은 간접적인 방식이 가지는 성적 서비스의 한계를 상쇄하는 데 이용된다.

 

상업적 섹스의 구매자는 성적 쾌락을 제공받지만, 그 판매자도 전혀 쾌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섹스를 파는 여성에게도 ‘지위 섹스’의 쾌감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한스 페터 뒤르에 따르면 프랑크푸르트의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어느 스트립 댄서는 이렇게 증언했다.

“무대 위에서 스트립쇼를 할때마다 객석에 앉아 있는 남자들의 음탕한 눈길을 느낄 수 있어요. 그 순간 내가 더 강하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들은 나를 만질 수 없으니까요.” 이런 식의 증언은 스트립 댄서들에게서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스트립 댄서들은 자신의 춤을 보며 흥분하는 남성들을 볼 때 오히려 자신이 남성을 폭행하거나 모욕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남자들을 흥분시켜놓고도 그 이상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자신이 남자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쾌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좀 더 광법위한 시각에서 보면, 돈을 위해 결혼한 여자도 성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결혼한 뒤에도 별다른 애정이 싹트지 않는 경우, 두 사람의 성적 관게는 비참하다. 애정이 없는 아내는 보기에 아무 반응도 없는 물건이 침대에 들어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연히 내 아내가 되긴 했지만, 성적으로 그녀는 물건이나 다름없으며, 자위행위를 할 때 손대신 질(膣)을 사용할 뿐이다.

사랑의 감정이 성행위를 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성행위를 하고 나서 사랑의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그에 대해 폴 고갱은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서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성관계를 가진다. 남태평양에서는 성관게를 가졌기 때문에 사랑한다. 누가 옳은가?”***

 

[73]

딱히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랑은 몸과 마음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 먼저 사랑을 이끌 수도 있고 몸이 먼저 사랑을 이끌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에서 시작되어도 상관없지만, 분명한 것은 궁극에는 몸과 마음이 모두 상대방을 향했을 때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졌을 때 성적 만족도 생기게 된다. 사랑은 성적 만족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다. 그런데도 많은 현대인들이 상대방을 사랑하는 데 신경 쓰기보다는 그 사랑의 공백을 성행위의 테크닉으로 채우려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성적 문제, 즉 여성의 불감증과 남성의 신인성 불능증은 문제가 섹스의 테크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심리적 억압에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성행위란 단지 성욕으로 인한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만이 목적이라면 자위는 가장 이상적인 성행위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무시되기 쉬운 것은 ‘관계’이다.

섹스는 인간이 타인과 ‘관계“하려는 욕망의 육체적 표현이다. 그 관계가 무시될 때 섹스의 쾌락은 공허로 빠지고, 오르가슴을 통과한 후에는 곧바로 자기환멸과 소외감을 증대시키며, 쾌감은 곧 불쾌감으로 바뀔 수 있다. 이것은 성행위를 배설과 같은 수준으로 타락시킨다. 섹스의 즐거움은 상대방의 육체를 탐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 상대방과 진심으로 관계하는 데서 온다. 섹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두 사람의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데 있어야 한다.

 

 

1. 스킨십-좌절된 커뮤니케이션의 욕망사디즘과 마조히즘-지배의 쾌락과 복종의 쾌락

 

[75]

인간의 터치는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원초적인 역할을 해왔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스킨십을 나눔으로써 관계를 맺고, 탐색하고, 친밀성을 증가시키고, 위로하고, 이해한다.

물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사랑이란 만지는 것, 스킨십을 의미한다. 사랑한다는 것은만지고 싶다는 의미이며, 사랑받는다는 것은 스킨십을 받고 싶다는 의미이다.

사랑이 솟구치는 감정 표현에는 대개 스킨십이 동반된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볼에 입을 맞추거나, 꼭 껴안거나, 가볍게 볼을 물어뜯거나, 상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마구 비빈다.

인간은 사랑의 감정을 드러낼 때뿐 아니라, 위로의 감정을 드러낼 때도 터치한다. 슬픔, 고통, 분노, 긴장 속에 있는 사람은 누군가 몸을 부드럽게 만져주거나 쓰다듬어주거나 안아주거나 가볍게 두드려주면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며, 격한 감정도 누그러진다.

 

[76]

인간에게 스킨십은 이처럼 단순히 피부로 느끼는 감각적 즐거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가족, 친족, 연인, 동료들과 스킨십을 나누고자 하는 욕망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도시문명은 그것을 배반한다. 스킨십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바글바글하지만, 도시의 거주자들은 역설적으로 스킨십 결핍에 시달린다.

 

[76-77]

인구가 밀집된 환경은 사람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과잉 접촉을 강요하게 되고, 본래 소규모의 친밀 집단생활에 맞게 설계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은 그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 결과 도시인은 스킨십을 추구하는 것보다 불필요한 스킨십을 회피하는 데 급급해졌다. 또한 사회생활에서의 불가피한 접촉은 상대방이 성적인 신호나 공격적 행동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고도로 양식화된다.

 

그 양식화된 스킨십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악수이다. 이것은 본래 전사들이 손에 무기가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나타낸 데서 유래한 것이다. 무기를 들고 악수하는 경우, 무기를 왼손으로 바꿔 들어서 원래 무기를 잡는 오른손은 아무것도 없는 맨손을 보여줌으로써 ‘나는 사실상 무장을 해제했다’는 것을 표시하고, 그것을 서로 확인하기 위해 손을 맞잡는다. 그런 비공격적인 표현은 나아가 ‘우의(友誼)’를 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악수가 가장 흔한 터치가 된 것은 스킨십 중에서 가장 성적인 신호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들 간의 악수보다 남녀 간의 악수가 더 적다는 점은 악수에도 약간의 성적인 신호가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80]

현대사회에 만연한 자살, 우울증, 범죄의 배경에는 스킨십의 부족이 한몫하고 있다. 아무도 ‘나는 스킨십이 부족해서’ 자살하고 싶다거나 우울하다거나 강간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 ‘나를 껴안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절망적인 심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 지배의 쾌락과 복종의 쾌락

[81]

1898년 독일의 성의학자 리하르트 폰 므라프트 예빙은 <섹스의 병리학 Psychopathia sexualis>을 저술하면서 오늘날 대표적인 성적 변태행위 용어인, 사디즘sadism(가학적 음란증)과 마조히즘masochism(피학적 음란증)을 만들어냈다. 그 명칭은 두 작가, 도나시앵 알퐁스 장 프랑수아 드 사드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두 사람이 용어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들의 문란한 성생활과 성애소설 때문이었다.

 

[84]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작가인 마조흐가 마조히즘의 주인공이 된 것은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 때문이다. 그는 이 체험적 소설에서 학대당하는 데서 오는 성적 쾌락을 그려싸.

 

[86]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즐기는 것은 지배와 복종에서 오는 쾌감이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저이다.

카뮈는 희곡 <칼리굴라>에서 고대 로마의 폭군 칼리굴라를 통해 사디즘의 본질을 암시했다. 칼리굴라는 이렇게 말한다.

*** “나는 내 마음대로 사람들을 살리고 죽이며 파괴자의 힘을 열광적으로 사용한다. 이에 비하면 창조자의 힘은 단순한 어린애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

사디즘의 본질은 타인을 완전히 지배하고, 타인의 의지를 무력하게 만들고, 타인의 신이 되어 타인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에 있다. 마찬가지로 마조히즘 역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빌헬름 라이히는 마조히즘적 쾌락과 고통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간파했다.

***“ 마조히즘적 인간은 궁극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며, 거기에 수반되는 고통은 하나의 부산물인 뿐, 목적 자체는 아니다” ***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이 추구하는 것도 보통 사랑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합일’이라는 사실이다. 건강한 사랑이 서로의 독립성을 유지한 채 합일하려 한다면,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지배욕과 복종욕을 충족시킴으로써 합일하려는 것이 다를 뿐이다.

 

[87]

흔히 마조히스트는 연약하고 수동적이어서 의존적인 존재로, 사디스트는 강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사디스트 역시 지배의 대상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면 갑자기 연약해져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달라”고 빌 수 있다. 그 역시 지배의 대상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은 지배의 대상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사디스트 역시 마조히스트 못지않게 의존적이라는 점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88]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상대방과 관계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에만 집착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자폐적 증상’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사드를 해명해주는 열쇠는 자폐증이다. 타자의 존재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정확한 지적이었다.

모리스 블랑쇼가 ***“사드의 모럴은 절대적 고독에 일차적으로 근거해 있다”***고 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사드의 성행위에서 파트너는 유희의 파트너가 아니었다. 쾌락의 희생양이고 도구였을 뿐이다.

 

[89]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단지 성적 현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뿐 아리라 사회학, 정치학, 철학, 예술, 역사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배와 복종은 인간관계와 사회 권력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여성학자 게이트 밀레트는

***“마조히즘과 고통을 참는 것이 태어날 때부터 여성적이라는 것은 대단히 교묘하다. 그런 견해를 논리적 결론에까지 가져오면 학대는 여자에게 좋은 것일 뿐 아니라 여자가 열망하는 것이 된다”***

며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문제를 여성 전체의 문제로 보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인간이라는 불행한 동물은 자기가 지니고 태어난 자유라는 선물을 가능한 한 빨리 양도해줄 상대를 찾아내려는 욕구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썼다.

자유를 양도하고 종속되려는 욕망이 인간 본연의 문제로 제기될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개인뿐 아니라 집단도 얼마든지 자유라는 짐을 벗어던지고, 강한 사람이나 권력에 복종하려는 마조히즘적 경향을 가질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합일’을 목표로 하지만, 그 귀결은 점점 더 눈덩이처럼 커지는 ‘파괴’일 뿐이다. 남에게 종속되려는 욕망이나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은 정반대지만, 자아의 허약함, 독립성의 결여, 혹은 고독을 견디는 것에 대한 무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둘은 공통적이다.

 

 

동성애-최선은 아니지만 나쁘지도 않은 쾌락

 

[91]

플라톤의 <향연>은 고대 그리스에서 동성애가 오늘날의 이성애만큼이나 지배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모두가 그것을 행했고 아무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부끄럽기는 커녕 자랑이었다. 뤼쿠르고스는 ‘침대 속에 남자 친구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유능한 시민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남자 섹스 파트너를 갖는 것은 오늘날 부자가 미인을 얻는 것처럼 유능함의 상징이었다. 상류층 남성들은 아내, 정부, 하녀가 삻증나면 아무 거리낌 없이 미소년들을 성적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것을 비정상적인 충동에 굴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에로스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본래 용감하고 이성(理性)이 풍부한 상대방을 좋아하게 되어 있으므로 여성보다 남성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었다. 지식이 남성들의 전유물인 상황에서 동성애는 육체적 결합과 수준 높은 지적, 정신적 결합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유일한 형태라고 생각되었다.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들 대부분이 젊은 제자들과 동성애 관계를 맺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자와 동침하면 육체를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서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 ”***

고 믿었던 것이다.

 

[92]

그리스에서 지식 계층과 더불어 동성애가 활발했던 부류는 전사집단이었다. 전사들끼리 커플을 이루는 것은 성적 욕구 해소, 단순한 동료애로는 불가능한 단결과 헌신성, 불굴의 용감성을 얻는 일거양득의 이점이 있었다. 소년병들은 천막 안에서 어른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군사기술을 배우는 대신 섹스 파트너로 봉사했다. 그런 남성들의 애정은 집안이나 가족 어른에 의해 강제로 맺어진 배우자와의 관계보다 친밀하고 다정다감한 경우가 많았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에 따르면, 남부 수단의 아잔데족Azande 병사들도 소년들과 '결혼해‘ 성적 욕구를 해소하다가 나이가 들고 재산을 충분히 모으면 여자에게 장가들었다. 그러면 아내 역할을 맡았던 소년병들은 독신자 군대에 편입되어, 새로운 소년 병사 견습생과 결혼했다. 동성애 관계는 연약한 소년을 용감한 전사로 만드는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수메르에서 동성애가 일상적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은 <길가메시 서사시>에 남아 있으며, 고대 인도에서도 남색은 당연한 일로 여겼다. 마호메트도 남성들의 동성애에 대해 관대했다. 로마에서는 아녀자들이 남편의 애정을 놓고 소년들과 경쟁해야 했다. 북미 인디언의 전사들 역시 버다치Berdache라는 동성연애자들을 두고 있었다.

 

길버트 허드Gilbert Herdt에 따르면 호전적인 삼비아족Sambia 남자들도 소년 시절에는 남자들 간의 오럴섹스에 몰입하다가 어른이 되면 여성과 성기 섹스를 했다. 시베리아에서 삽입당하는 남자는 제3의 성, 즉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으로 간주되어 자연과 초자연적 세계를 중재하는 샤면으로서 상당한 위세를 누렸다. 일본에서도 동성애는 사무라이나 승려 같은 상류계급에서 공인된 즐거움이었다. 다만 그것이 집안의 혈통을 잇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었으므로 고착된 동성애자가 될 위험은 거의 없었다.

 

[93]

동성애는 남자들 사이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성의 동성애도 매우 흔했다. 여성 동성애자를 일컫는 레즈비언Lesbian이라는 말은 그리스의 여성시인 사포Sappho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성 동성애자인 사포는 부유한 상인과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자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는데, 그 돈으로 레스보스 섬에 처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세웠다. 사포는 제자들을 ‘동지’라 부;르며 동성애를 즐겼고, 그로 인해 레스보스 섬은 레즈비언의 대명사가 되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여자들의 동성애를 단순히 철없는 놀이로 여겼을 분 변태적 행위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일부다처베로 인해 아내들끼리만 기거하는 중동의 하렘Harems에서 여성들이 동성애를 즐기다 발각되면 가혹한 처벌이 뒤따름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동성애를 즐겼다.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관념은 그레고리우스 개혁(1059~1123)을 통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교회는 섹슈얼리티를 성직자와 속인을 구분짓는 울타리로 삼았다. 교회는 성직자에게는 성적 순결을, 일반 신자들에게는 일부일처제를 강요했다. 성행위는 오직 자손을 얻기 위해서만 행해야 하고, 그 외의 모든 쾌락은 대죄가 되므로 동성애 역시 금기가 되었다. 십자군 원정(1096~1272년0을 계기로 형성된 인종적, 종교적 편견은 동성애를 막는 결정타가 되었다.

 종교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 억압받고 통제받고 복종의 욕망이다. 복종의 욕망을 갈구하는 자는 신이 자신을 통제하도록 자신의 자유를 신에게 헌납한다. 헌납한 자신은 신의 종이 되어 “신의 뜻대로”를 외친다. 너는 신의 종일뿐, 한 인간으로서 영혼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94]

동성애는 아시아의 이슬람교도들이나 하는 비도덕적이고 야만적인 풍속이라는 관념이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세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고 심지어 교회 내부에서도 꽃피곤 하던 게이 문화는 13세기에 이르러 거의 사라진다. 이제 입이나 항문을 통한 성교는 살인에 버금가는 중죄가 되어 사안에 따라 3~15년 동안 금식의 고해를 해야 했다. 그러나 금기가 된 후로도 동성애의 반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교황과 늘 대척점에 있었던 신성로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궁정 안에 뛰어난 가수와 무희, 대담한 묘기의 곡예사들을 두고, 가금 침실로 불러들여 동성애를 즐겼다. 교황이 동성애를 질책하면, 황제는 그런 즐거움은 누구든 취향대로 즐기는 것이 마땅하다며 비웃었다.

 

이 같은 동성애의 역사는 인간이 이성에만 하도록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성애를 즐긴다는 사실이 반드시 이성애를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동성애는 성욕이 충분히 해소될 만한 조건에 있지 않거나, 이성애와는 다른 성적 쾌락을 즐기고 싶거나, 심지어 그리스의 철학자들처럼 플라토닉한 사랑까지도 충족시킨다는 문화적인 이유로도 얼마든지 행해졌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의 섹스에는 늘 여분이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기피하는 것은 생물학적 요인이 아니라 생각만 해도 거부감이 들게 하는 훈련, 부모의 반대, 사회적 조롱, 불지옥의 위협, 억압적인 법률, 그리고 에이즈의 공포 때문이다.

 

[95-96

동성애는 보통 차선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성교할 수 있는 이성이 나타나면 대개는 사라진다. 그러나 동성애가 일시적인 수단을 넘어 고착화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테즈먼드 모리스에 따르면 동성애적 고착이 생기는 이유는 4 가지이다.

 

1) 최초의 성경험을 동성과 가진 경우. 초기의 성적 각인은 너무 강해서 ‘어린 시절의 애인’에게 심리적으로 영원히 고착되어버리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동성이 보내는 기본적인 성적 신호는 이성보다 열등하지만,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된 연상을 지울 만큼 열등하지는 않다.

 

2) 이성과의 성행위가 유난히 불쾌한 것으로 각인될 때이다. 어릴 적 강간을 당했거나, 이성에 대한 깊은 공포와 배신을 경험한 경우, 그에 대한 본능적인 반발로 동성애적 성향이 나타날 수 있다.

 

3)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 뒤집힐 때이다. 아버지가 허약하고 무능해서 어머니의 지배를 받는다면 남성 역할과 여성 역할이 성적으로도 혼동될 수 있다.

 

4) 기숙학교, 선박, 군대 등 이성이 없는 상황에서 행해진 기회주의적인 동성애에 완전히 적응한 경우이다. 그런 경우 이성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후에도 동성애를 고집할 수 있다.

인간의 성욕은 어떤 억압적 상황에도 나름의 출구를 찾는 것으로 보인다. 이성이 없으면 동성과 즐기고, 동성이 없으면 동물과 즐기고, 동물이 없으면 자신과 즐긴다. 정신적 쾌락을 추구한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인간에게 온갖 종류의 관능적인 쾌락은 삶의 주요 목적이었다.

 

 

매춘-부정한 여자가 아니라 불합리한 시스템이 있을 뿐이다

 

[98]

매춘 개념은 정절 개념과 쌍을 이룬다. 매춘이란 지켜야 할 순졀성을 전제로 성립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남편하고만 섹스해야 한다는 정절 개념이 없는 곳에서 매춘 개념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에스키모인들은 손님에게 자신의 아내를 제공하는 풍습이 있다. 아내는 손님에게 특별한 선물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가 그것을 남편에게 감추었다고 해도 매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절 개념이 없는 사회에서는 대개 일부종사의 개념도 없다. 그러므로 그런 곳에서는 설사 매춘으로 인정하더라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부간다에서는 한 남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 않는 여성은 공공의 여자로서 족장의 보호를 받았다. 그렇게 되면 자유롭게 몇 명의 남자를 일시적인 남편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인다. 또한 어떤 이유로 결혼하지 못한 적령기의 딸이 있을 때는 결혼에 대한 초보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임시로 매춘부가 되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도 있었다. 부족에 따라서는 매춘부- 보통은 과부나 약간 나이를 먹은 미혼여성- 를 써서 젊은 남자들에게 성교의 비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일부 사회에서는 여자가 남편과 헤어지고 싶으면 다른 마을로 이사하여 ‘자유로운 여자, 즉 매춘부로 개업하면 그만이었다. 이럴 때 매춘부는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말 그래도 ’자유로운‘ 여자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그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99]

매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성욕에 대한 이중규범, 즉 남자는 본래 방탕해도 좋지만 여자는 정숙해야 한다는 생각에 의존한다. 만약 여자의 성욕도 남자 못지않게 건강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섹스하는 행위흘 매춘으로 몰아붙일 근거는 협소해진다.

한국사회에서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사귀는 것을 ‘화냥년’이라고 몰아세우는 것도 가부장적인 이중적 사회규법에서 나왔다. 남자는 처와 수많은 첩을 거느리면 능력있는 사람으로 보았지만, 여자가 남편외에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은 억압하고 통제하는 조선사회를 거쳐 현대에 이른다.

 

실제로 많은 미개사회에서 여자들의 혼전 성교는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어떤 사회에서는 젊은 여자가 처녀를 상실하는 것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여자가 평생 처녀의 몸으로 지낸다는 것은 건강하지도 못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성의학자 번 벌로Ven Bullough에 따르면 어느 미개인이 서양 방문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30세가 될 때까지 성경험을 하지 못한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는 아마 주변의 누눈에 띄는 남자나 소년을 붙잡아 쓰러뜨릴 것이다. 소년들의 금욕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금욕 상태의 남자는 분별을 잃고, 미치기도 한다. ”***

이런 미개인의 생각은 현대의 문명화된 한 철학자의 의견과 별 차이가 없다.

조르주 바타유의 다음과 같은 의견과 비교해보면 그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생식기의 흥분은 의지와 무관한 것이어서 의지의 동의 없이도 발동한다. 일단 성기가 발동을 걸면, 정신력이 지배하던 질서와 유효성이 체계가 무너진다. 자태와 인격은 간 데 없고 암캐가 날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병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당분간 인격이 죽는다. ”***

 

[100]

종교인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얘기가 되겠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매춘은 종교에 의해 행해졌다. 이른바 ‘신전 창부’가 그것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스트라본Strabon에 의하면 코린트의 신전에는 1000명이 넘는 매춘부가 있었다. 수메르의 신전 창부들은 신전에 공물을 바치는 모든 남성들과 관계를 가졌다. 인도에서 사원 창부는 보통 일곱 살 정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신과 ‘짝지어진 ’ 창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포주는 누구였을까? 그것은 사제였다. 사제들은 신전 창부와도 즐기고 신도인 처녀들과도 즐겼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모든 여성은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바빌론에 있는 이슈타르Ishtar 신전에서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 수메르에서는 사제들이 신의 대리인으로서 신도 처녀들을 취했다. 처녀들은 사제를 신성한 화신이라고 생각하며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신전 매춘은 여성만이 행한 일이 아니었다.

 

동성애 서비스를 해주는 남자 노예도 있었다. 인도 사원에서 신전 창부들은 신과의 형식적인 결혼식을 치른 후, 의식에 따라 사제 혹은 사원의 후원자에게 처녀성을 잃거나 돌로 된 남근에 걸터앉음으로써 처녀막을 파손시켰다. 사제는 창부에게 춤이나 성교 기교를 가르친 후, 신도들에게 제공했다. 그녀들은 청소를 하고, 신의 상을 야자수 잎이나 야크 꼬리고 부채질하고, 성화를 받들고, 신전이나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고 춤췄다. 웃돈은 사제의 손으로 넘어가고 매춘으로 생긴 아이는 다시 사원의 노예가 되었다. 여인들의 성적인 신전 봉사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신전의 부와 권력을 키워주는 매춘으로 변했다. 신전 창부는 주로 종교적 신념으로 신에게 몸을 바친 처녀들, 전쟁을 통해 납치되어온 여인들, 가난한 집에서 버려진 딸들, 생계가 막막한 여인들로 구성되었다.

 

기독교가 성적 쾌락을 죄악시하게 된 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에수 때문이 아니라 사도 바울 때문이다. 바울은 섹스를 위험한 것으로, 독신주의는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기독교의 엄격한 성관념은 역설적으로 매춘을 양산했다. 왜냐하면 엄격한 성 관념으로 인해 매춘부의 딸, 외도의 결과로 태어난 딸, 강간당한 여자, 전쟁중에 적에게 순결을 잃은 여자, 간통죄를 범한 여자. 미혼모는 죄인이 되었고, 그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생계수단은 사실상 매춘 외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엄격한 성 관념은 겉보기에는 여성의 순결을 옹호한 것 같지만, 많은 여성들을 매춘으로 내몰았다.

 

종교적 순결성을 성적 순결성으로 치환한 사도 바울의 의도는 역사적으로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중세 매춘부의 주 고객에는 군인, 여행객과 더불어 성직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3 부류의 공통점은 모두 여자에 굶주리기 쉬운 상태에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성직자 영주와 고위 성직자는 매춘부와 동거생활을 하거나 예속민의 딸이나 부인에게 사랑의 부역을 강제할 수 있었다. 매춘부들은 십자군 원정이나 성지 순례도 동행했다.

 

근대에 들어 도시와 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사회적으로 성공한 창부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지성과 미모, 에의범절을 겸비한 ‘코티잔courtisan(궁정을 드나들던 고급 매춘부)’들이 위세를 떨치며, 정계의 거물이나 뛰어난 예술가들과 사교를 즐겼다. 심지어 장 프랑수아 1세는 고급 창부 한 명 정도를 꿰차고 있지 않으면 자신의 궁정 귀족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중국, 일본에서도 교양과 예술적 기량을 갖춘 매춘부들이 활약했다.

 

18세기에 매춘은 인생의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심지어 루소 같은 사람도 매춘을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상적인 매춘 경험을 <고백록>에 적어놓고 있다. 그는 아름다운 매춘부와의 밀회에 대해 이렇게 썼다. ‘마치 사랑의 미의 성전을 찾아간 듯 긴장하면서도 여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신도 이럴까 싶을 정도로 여자는 아름다웠다. 나는 그때까지 외경의 마음도 없이 상대에게 이렇게 격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여자의 요염하고 아리따운 모습에 자극된 나는 그 과일이 사라져버릴 것을 두려워하여 한시라도 빨리 그 과일을 따고 싶어 안달했다. “

 

[104]

매춘은 단지 생리적인 배출 욕구 때문에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매매춘은 사회의 고용불안, 성을 상품화하는 경제 구조, 여성의 열악한 지위, 어떻게든 돈만 벌면 된다는 물질만능주의, 만혼, 인간관계에서의 소외감, 스트레스로 인한 심리적 억압의 복합적 결과이다.

 

매춘은 흔히 불법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그것은 체제 밖의 산물이 아니라 체제 내의 산물이다. 많은 문명사회가 역사적으로 투옥, 벌금, 추방 등으로 매춘부를 괴롭혀왔지만, 실제로 처벌한 것은 가장 곤란한 처지에 있는 가난한 매춘부들뿐이었다.

매춘을 조장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과 투쟁하지 않는 한, 매춘부에 대한 비난은 단지 수사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애정에 기초한 섹스를 하기 힘든 사회에서 상업적 섹스는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고, 남성들 역시 성을 사면서도 그리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성폭력-범죄로 지각되지 못했던 비인간적 쾌락

 

[105]

인간은 두 손의 완력을 쓰지 않고도 상대의 성을 유린할 수 있다. 생사어탈권, 경제권, 정신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몇 마디 말만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꼼짝 못하게 제압하고 육체를 약탈할 수 있다.

 

[108]

강간의 ‘강제성’과 ‘폭력성’이 아니라, ‘음란성’과 ‘타락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수많은 피해자들이 오히려 수치심과 죄책감에 떨며 피해 사실이 밖으로 알려질까 노심초사해야 했다.

 

[109]

성폭력의 본질은 ‘몸에 대한 주체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데 있다. ‘몸에 대한 주체의 자율성’을 훼손함으로써 상대방을 모욕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욕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성폭행이 대개 단순한 삽입을 넘어서 잔혹함을 동반하는 것은 이 지배욕 때문이다.

 

[110]

성폭행이 ‘성적 만족’보다 ‘모욕하기에 집중되는 현상은 전쟁이나 내란 시기에는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자행되었다. 프랑스혁명 당시 혁명가들은 페리낭 백작 부인과 딸을 발가벗겨 테이블 위에 묶어놓고 유방과 성기를 도려낸 뒤 죽였다.

 

민중들도 다른 귀족 부인들을 붙잡아 방탕한 성생활의 증거를 찾는다며 옷을 벗겨서 음부를 관찰하고 짓이긴 후 죽였다.

베트남 전쟁 단시 수많은 베트남 여자들이 미군 병사들에게 항문을 폭행당하고 구강성교를 강요받았으며, 베트콩과 미군은 서로 성기를 잘라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붉은 군대 군인들도 독일 여자들을 온갖 방법으로 추행했다.

신체 노출 역시 직접적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다른 성폭력의 연장선상에 있다. 대부분의 노출증 환자들은 자신의 성기를 보고 놀라 도망치는 상대방을 보면 자신이 ‘힘 있는 존재’라는 유쾌한 느낌을 받는다. 겁먹은 상대를 바라보며 ‘힘이 솟는 기분’을 느끼므로, 가장 알맞은 대상은 아직 남자의 성기를 제대로 보지 못한 소녀들이 된다.

동물학자들에 따르면 원숭이는 흥분하면 성기로 상대를 위협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인간 사회 어디서나 발기된 페니스는 힘, 공격력, 투지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성기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여성들은 가슴으로 그것을 대체했다.

들라쿠르아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리면서 벌거벗은 가슴을 공격과 투지의 상지응로 내세운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11]

번 벌로에 따르면 강간이 도덕적 범죄에서 사회적 범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이다. 그리고 강간이 육체적인 폭력일 뿐 아니라. ‘정신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 강간은 강력 범죄가 아니라 타락의 죄였고, 정신과는 무관한 육체적 폭력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강간이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 이상으로 깊은 정신적 장애를 야기한다는 사실이 인정되고 있으며, 부부간의 강간도 인정되는 추세에 있다. 역사적으로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은 인권의식의 신장과 더불어 발달해왔다. 성폭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교육이 매우 중요함을 말해준다.

 

 

근친상간 -본능적 기피인가, 문화적 선택인가?

[113]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음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괴로움에 떨며 미친 듯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케를 찾으며 이렇게 절규한다.

“칼을 달라, 아내이면서도 아내가 아니고, 나와 나의 아들을 함께 낳은 사람은 어디 있느냐?‘ 그리고 자신의 두 눈을 바늘로 찌른 후, 두 아들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오오, 얘들아 어디 있느냐? 동기간이기도 한 나의 손을 잡아다오. 나는 자신을 낳은 어미를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몸에서 너희를 낳았다. “

 

[114]

여러 보고에 떠르면 실제로 섹스를 한 상대가 자신과 금기시되는 관계인 줄 몰랐던 사람들이 훗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발광하거나 기절사한 예가 여러 곳에서 발생했다. 터부란 사회적으로 규정된 심리적 사실이다. 그것은 ‘사건’ 그 자체에 아니라, 터부를 범했다는 ‘관념’이 고통의 실체를 이룬다는 것을 말해준다.

 

[115]

놀랍게도 근친상간은 그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여기는 기독교 안에서도 버젓이 등장한다.

구약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남색을 즐기는 소돔 사람들에게 분노하여 유황과불을 비같이 내려 소돔을 멸망시킨다. 그러나 선하게 산 덕에 놋과 그의 아내 그리고 두 딸은 소돔의 멸망에서 살아남는다. 하지만 롯의 아내는 천사의 계시를 따르지 않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 기둥으로 변하고 만다.

그에 “큰딸이 작은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서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이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딸도 아들을 낳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만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창세기에는 롯이 술에 취해 딸이 동침하는 것을 몰랐다고 기록함으로써 롯의 죄를 사실상 사해주고 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남색으로 인한 몰락이 근친상간으로 재건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약의 이러한 기록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근친상간을 허용했던 고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같은 철학자는 근친상간을 혐오하지 않았을분 아니라 오히려 옹호했다. 그른 <국가>에서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 여성과 전사들은 모두 공동으로 살아가며, 그 어떤 여자도 특정한 남자와 살지 않는다. 아들은 누가 자기의 아버지인지 모른다.”***

 

그는 사실상 족내혼, 즉 근친상간을 통해 소유 때문에 다투는 폐쇄적인 가정을 해체하고, 대신 평화로운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비슷한 사회는 실제로 있었다. 멜라네시아의 토로브리안드 섬에서는 자녀의 탄생이 아버지와는 무관하다고 여겼다. 어머니가 임신하는 것은 조상의 영혼이 태내로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믿었으므로 아버지는 자신의 딸과 동거를 해도 근친상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왕가에서는 재산과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형제자매혼이 흔하게 행해졌다. 클레오파트라가 막내동생과 결혼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며, 일본<고사기>에는 ‘내가 나의 할아버지’가 된 고대 일본의 왕 가게유키의 혼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기상천외한 혼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여 역사학자들을 고치 아프게 하고 있다.

 

헤롯 왕은 자신의 이복여동생과 결혼하였으며 우리나라 신라 왕조에서도 근친혼이 빈번했음이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근친결혼이 반드시 권력층에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다. 일부다처의 풍습이 있는 곳에서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들이 친어머니를 제외한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하는 것이 허락된 예가 적지 않았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배다른 형제(同父異母)의 결혼이 인정되었다. 학자들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 근친혼은 전체의 15~20%를 차지했으며, 고대 이집트에서 ‘형제’와 ‘자매’라는 말은 ‘연인’과 동의어였다. 고대 인도에서도 근친상간이 허용되었다.

 

[118]

들뢰즈는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있지도 않은 근친상간에 대한 죄의식을 만들어낸다며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비판한 바 있다. 들뢰즈는 프로이드가 욕망에 죄의식을 심어놓음으로써 인간을 원죄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묶어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로 인해 종교와 정신분석학에서 원죄의식이라는 동일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119]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근친상간 터부야말로 사회 형성의 근간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근친상간의 터부는 사실상 자가(自家) 소비를 금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타가(他家) 소비의 원천이 된다. 근친상간의 터부는 눈앞의 향락보다는 사회적 관계를 외부로 확장시키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여긴 결과이다. 그런 점에서 외부로 확장시키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여긴 결과이다. 그런 점에서 생물학적인 선택보다는 문화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족외혼은 외부 집단과 평화적이고 협동적인 관계를 맺게 하고, 나아가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이 근친상간의 터부가 생긴 이유였다.

 

 

에로티시즘 - 변칙과 위반, 그리고 죽음의 변증법

 

[121-125]

그리스 로마의 디오니소를 기리는 축제에서는 성행위, 폭식, 폭력이 난무했다. 고대의 제사에서는 참가자들 모두 희생양을 먹이 삼아 폭식을 했고, 전쟁에서 전사들은 무차별한 살육에서 오는 쾌감을 맛보았다.

에로티시즘이 종교와 배리된다는 오늘날의 관념과 달리, 고대의 많은 종교에서 에로티시즘은 신성에 도달하는 지름길로 여겨졌다. 신의 세계는 자연의 세게였고, 자연의 세계는 곧 동물의 세계였다.

 

축제는 인간세계의 코스모스를 신의 세계인 카오스로 돌려놓는 시간이었다. 규칙의 파괴와 위반을 통해서 고대인들은 동물로 돌아가 자연과의 합일, 즉 신과의 합일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르주 바타유는 <종교의 이론>에서 종교적 축제를 폭력의 시간, 대화재의 시간이요 신성의 시간으로 규정하며 그 양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사물의 질서는 지속을 위해 삶을 억제하지만, 신성은 그것을 비등시키는 놀라운 폭발, 즉 폭력이다. 축제는 끊임없이 둑을 무너뜨리려 위협하며, 소모가 갖는 순수 광채의 전염적 충동을 생상활동에 대립시킨다. 신성은 정확히 말해 나무를 태워 소진시키는 불길과도 같다. 축제는 사물에 대립하는 불길이다. 축제는 열과 빛을 내뿜으며 사물에 불을 붙이고, 축제의 불길에 휩싸인 사물은 다시 불길이 되어 다른 사물에 불을 붙이며 앞뒤 없이 타오른다.”***

 

그러나 맘껏 먹고 마시고 즐기는 쾌락을 신이 아니라 악마와 가까운 행위로 보는 기독교가 득세함에 딸, 로마제국 말기 디오니소스제는 점차 소멸해갔다.

낙원은 현실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내세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 됨으로써 죽음 이후로 연기되었다.

금기의 강화는 애초의 의도와 달리 인간의 성적 욕망을 쾌락을 거부하는 쪽으로만 잡아당기지 않았다. 인간의 욕망은 금지된 쾌락을 즐기려는 쪽으로도 잡아당겨졌자.

금지된 것의 매력은 바로 그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고 했다.

 

금기는 인간에게 한편으로는 공포를 , 다른 한편으로는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욕망의 진자는 두 자성(磁性)사이에서 격렬하게 요동쳤다. 인간의 형이상학적 능력은 위반으로 인한 쾌락을 있는 그대로의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신비화된 쾌락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금지된 것을 위반했을 때 느끼는 쾌락은 관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간이 의식적 동물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금기는 역설적으로 에로티시즘의 원동력이었다.

성행위를 통해 주체는 대상과 동일화된다. 그럴 때 주체는 ‘생기’ 즉 ‘나는 살아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성생활을 통해 느끼는 ‘생기’와 생식적 의미에서의 ‘존재의 연속’은 역설적으로 죽음으로 연결된다.

 

조르쥬 바타유는 <에로티시즘>에서 성행위 자체에 죽음이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생식과 죽음은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존재의 연속과 죽음은 동일한 것에 대한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처음에는 정자와 난자가 불연속적 개체들로 존재한다. 그러다가 그것들이 결합한다. 두 개체가 소멸하면, 즉 죽으면 새로운 개체가 생겨난다. 이 새로운 개체는 불연속적 존재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존재는 그 안에 연속성, 죽음에 의한 융합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성적 팽창이 끝나면 극심한 기력의 감퇴를 맛보지 않을 수 없는 에로티시즘을 죽음과 죽음의 고뇌를 미리 맛보는 행위로 보았다. 우리의 내부에 자원을 불태워 소진, 소멸 시키려는 욕망이 숨어 있으며 소진, 소멸은 우리에게 행복감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힘과 수단만 갖춰지면 누구나 끊임없이 낭비하며 부단히 위험에 직면하려 한다.” 그는 인간이 매우 복족한 존재라는 점을 잘 간파하고 있다.

 

에로티시즘은 늘 고양되려는 경향을 가진다. 더욱 큰 쾌락을 맛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더욱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을 이어주던 에로스적 행위는 절정을 넘어 두 사람의 관계를 파멸로 이끈다. 창의적인 변칙과 위반의 에로스적 성행위가 두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쾌락은 점점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고, 그럴수록 정작 두 사람의 관계는 주변화되고 사물화된다. 그렇게 에로티시즘이 극단적으로 추구되면, 그 악마적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 악이란 바로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비록 방탕아였지만 철학적 사유를 할 줄 알았던 사드는 에로티시즘의 본질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불행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조금이라도 악습에 뿌리를 내린 방탕아라면 성욕과 살해욕이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가지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성적 절정은 살해에 있다. ”***

 

성적 절정은 몸에 대한 물리적 자극과 상대방을 완전히 소유하고 합일하고 있다는 형이상학적 쾌감이 일치했을 때 도달한다.

쾌락이란 끊임없는 자극의 갱신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불행을 낳는다. 쾌락은 자극의 논리에 갇히게 되고, 새로운 자극은 새로운 고통으로 인간을 이끈다 . 맛보지 못한 쾌감에 대한 추구는 자연스럽게 맛보지 못한 고통을 탐색하는 것으로 전이되고, 그 종착역은 결국 죽음이 된다. 이러한 과정은 쾌락 속에 왜 죽음이 깃드는지를 설명해준다. 보들레르 역시 사드에 동의하듯 <악의 꽃>에서

***“관능은 확실하게 악을 자행하고 있다”***고 썼다.

에로티시즘은 계급성도 갖는다. 에로티시즘은 부와 지식을 갖춘 유한계급에서 꽃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사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생각할 수 있으려면 일정한 부는 필수적이다. 하류층보다 상류층에서 장시간에 걸친 전희가 이루어진다는 킨제이의 보고서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생계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성적 탐험을 감행할 만한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식자는 다른 사람보다 민감하고 활발한 의식활동이 가능하다. 그에 따라 규칙과 위반행위에 대한 창의적인 자극에 반응하기 쉽다. 희대의 쾌락주의자들인 사드, 마조흐, 돈 후안, 카사노바가 모두 유한계급이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에게 쾌락과 생기를 제공하는 에로티시즘은 과도한 욕망에 의해 그 죽음의 경향을 촉진시킬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바타유의 말처럼

***“ 그 본질에 있어서 방황이며 낭비”***이다.

불행을 촉진하는 것은 늘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다. 에로티시즘이 형이상학적 측면으로 인해 발현되는 것처럼, 생의 맹목적 충동에 대한 거부 역시 형이상학적 측면으로 인해 발현될 수 있다. 인간은 형이상학적 능력으로 인해 다른 생물들보다 훨씬 자신의 생명력을 무제한 낭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능력은 반대로 그것을 제어할 수도 있다. 인간의 형이상학적 능력과 쾌락의 관계를 깊이 이해할 때, 쾌락이 고통으로 전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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