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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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나무 꽃 피었고 떠났던 철새 돌아와 숲은 낮밤으로 더욱 소란해지고 있습니다. 여우숲 양지바른 자리에 달래와 명이나물 풍성하게 돋은 지 꽤 되었기에 냉이를 더 해 뜯어다가 반찬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봄입니다. 마당 산수유 꽃 사방으로 터져있고 곧 홍매화 봉우리 다퉈 열릴 기세입니다. 밤에 불 밝히면 한두 마리 나방도 날고 낮엔 한두 마리 너풀너풀 나비도 날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렇게 이곳의 봄은 더욱 찬란해 지려합니다.
허나 계절이 봄이라고 도처가, 또 생명 모두가 봄일 수는 없습니다. 봄 더욱 찬란해 지더라도 숲학교 옆에 아주 오래토록 살고 있는 산중 팽나무는 여름 문턱까지도 침묵할 것입니다. 죽기라도 한 것 아닌지 한가득 걱정할 즈음, 그 초여름 문턱에서 팽씨 그는 삽시간에 잎을 뽑아올릴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여름 입구, 그 언저리의 애반딧불이가 제 몸을 덥혀 개똥벌레의 봄날은 여름 입구임을 증명할 테고, 다시 더 뜨거워지는 진짜 여름날에야 물봉선과 달개비 따위의 풀들이 제 꽃을 피워 여름이 자신들의 봄임을 말할 것입니다.
절대 시간은 늘 태양이 이끌지만 생명 저마다의 시간은 태양이 이끌어가는 그 힘과 생명 스스로의 기운이 마주치는 순간을 만나야 피어나고 또 소멸하는 법. 나는 그것이 바로 理와 氣의 현묘한 작용임을 자연의 흐름을 헤아리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삶의 흐름 역시 그런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이 봄의 나처럼 봄날이건만 봄 아닌 봄날을 보내는 이 계시겠지요? 마당에 심은 두 그루 매화 중 한 그루는 막 고운 꽃을 피우려 하는데, 그 옆에 서 있는 다른 매화나무는 영영 침묵의 기세입니다. 지난 해 닥친 혹한에 입은 상처 때문이었나 봅니다. 꽃망울도 만들지 못한 채 봄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봄이라는 절대시간으로부터 소외된 그 가여운 매화나무처럼 얼어붙은 봄날을 보내고 계시는 이 계시겠지요?
같은 처지의 나를 다독이는 마음으로 위로의 편지를 보냅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 산국은 이 봄날이 아닌 서릿발 내리는 계절이 봄날이라는 말씀, 방크시아 속의 생명들은 산불의 뜨거움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싹을 틔우는 기운을 가졌다는 말씀 전해드립니다. 십오 년쯤 기다려 첫 꽃을 피우는 은행나무 같은 생명도 있음을 기억하라 전합니다. 감나무나 대추나무조차 어떤 해에는 스스로 멈추어 숨고르기를 하는 지혜 발휘한다는 이야기 알려드립니다.
한 오 년 넘도록 올해의 봄처럼 쓸쓸하고 마음 어지러운 봄을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심장이 아파오도록 시린 날들을 보내지만 나는 이 시간을 피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 내게 다시 간결함을 요구하는 시간이 오는 구나‘ 그 신호라 느끼고 있습니다. 하여 나는 자주 숨을 멈추어 나를 봅니다. 그리고 자주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짐합니다. ‘올 봄을 혹독한 겨울로 삼자.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내 것 아닌 것으로 선언해 오는 모든 것을 보내자. 내 빛깔인 줄 알았으나 내 것 아니었구나 자각되는 색 역시 벗어던지기로 하자. 그리하여 감당해야 하는 아픔, 외로움, 가난함 기꺼이 맞이하기로 하자. 이곳에서 첫 겨울을 보내던 해에 그랬듯, 그 한 삼 년의 시간 동안 자주 엎어져 홀로 울고 또 울며 보냈듯, 다시 다가오는 시리고 아픈 날 기꺼이 껴안자. 울고 울어도 해결할 수 없는 날에는 다만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보내자. 오직 한가지, 사랑만 빼고 다 보내자!’ 그대 봄 아닌 봄날을 보내는 이라면 시리고 험한 날을 봄으로 삼는 생명에게서, 혹은 어설픈 나의 방법에서 위로 한 자락 얻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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