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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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 전쯤 전화기를 공짜로 바꿔주겠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만해도 일이 이렇게 복잡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쓰던 전화가 자꾸만 오락가락하던 차라 공짜폰을 집으로 바로 보내준다는데 제안에 두 번 고민도 안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쯤은 그런대로 잘 썼구요. 그런데 며칠 전 계속 미뤄두던 은행업무를 처리하는 중에 휴대폰 본인인증을 하려는데 계속 에러가 나더군요. 이상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메이저 통신사가 아니면 본인인증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달 전에 바꾼 전화기는 속칭 ‘알뜰폰’이었던 거죠. 통신사 이동이 없다고 알고 있던 저는 황당했습니다. 콜센터에 상황을 설명했더니 잘 못 공지된 점은 정말 죄송하나 규정상 3개월 동안은 해지가 안 된다는 답변만 계속할 뿐이었습니다. 속이 상했지만 은행업무가 급했던 저는 하는 수 없이 업무처리가 가능한 번호를 새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겨우 은행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전화 한 통을 하려고 해도 그냥 되지가 않습니다. 저만해도 저장되지 않은 번호는 잘 받지를 않으니까요. 먼저 문자를 보내고 기다렸다가 전화를 해 전화번호 바뀐 사정을 설명하고 용건을 처리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물론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소원하게 지내던 사람들과 핑계김에 안부를 나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부담스럽게만 느껴지는 걸까요?
하필이면 4년만의 복직준비로 마음이 분주할 때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엄마가 일하러 나가 있는 동안 아이들이 불편없이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만으로도 남은 시간이 모자라는 상황이니까요. 이리 동동거리고 싶지 않아 충분히 여유있게 잡은 일정이었는데, 닥쳐서 정신없고 싶지 않아 미리미리 차근차근 준비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 시간들이었는데 어찌 또 이리되고 마는 것인지. 결국 또 이도 저도 제대로 못하고 마음만 상하는 시간들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맥이 풀립니다.
도대체 지난 4년 너는 뭘 한 거니? 자신 있다더니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리 질질대면 어쩌겠다는 거야? 까짓 거 전화통화가 뭐 그리 어렵다고 그리 절절 매는 거야? 그렇게 쓸데없이 진을 빼니까 정작 해야 할 일도 자꾸만 엇박자가 나는 거잖아. 뭐 하나 마음에 들게 해내는 게 없으니. 너 정말 이것 밖에 안 되는 거니? 너 겨우 이렇게 되겠다고 그 아까운 시간을 4년이나 썼던거니?
어느 한마디 반박할 여지가 없는 다그침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눈물을 삼키는 것 뿐이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하소연할 데도 없었습니다. 저를 이리도 힘들게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저 자신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제 안의 또 다른 저는 늘 주장합니다. 다 너를 아끼기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라고. 네가 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그래요. 그것도 너무나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언젠가가 지금은 분명히 아니라고. 아직은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은 게 현실이라고. 이런 나를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그 ‘언젠가’는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거라고.
어쩌면 그녀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알면서도 좀처럼 어쩌지를 못하는 것이기가 쉬울 겁니다. 그 마음이 어떨지 알기에 도저히 그녀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녀에게도 필요한 건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역시 편안하게 기다려주는 것이겠지요?
바뀐 번호가 익숙해지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싸우고 또 화해할테구요. 하지만 이젠 무섭지 않습니다. 그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품어가게 되리라는 것을 믿으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깊어지는 꼭 그만큼씩 우리가 품을 세상도 그리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니까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은 해치워버려야 할 미션이 아닌 삶 자체라는 것을. 변화의 불편함을 즐기지 못하고 따로 즐길 삶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삶이란 흔들리는 것이고 균형을 잃었다가 이내 다시 그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되돌아오는 불안정한 체계인 것이다. 오직 죽은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 변화는 삶의 원칙이다.
- 떠남과 만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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