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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3일 21시 09분 등록

4월 신화, 내 원형을 찾아서

2014. 4. 13 정수일

신화의 힘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대담, 이윤기 옮김 / 21세기북스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1904. 3. 26~1987. 10.30)

미국 뉴욕주 출생,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오?”

봉직하던 대학의 이사진이 학교의 커리큘럼으로 잡아두려 했을 때 캠벨이 내 뱉은 말이다. 그는 박사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책의 숲으로 들어갔다.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 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있음을 깨우쳤다. 그는 뉴욕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인디언의 토템 기둥과 가면에 매료당한다. 소년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한다. 바로 이 공부가 그를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화끈한 스승으로 만든 것이다. 캠벨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카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자랐으며, 특히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탐독했다고 한다. 다트머서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자신이 어렸을 적 즐겨 읽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왕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1927년 캠벨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으로 유럽으로 건너가, 이후 2년 동안 파리 대학과 뮌헨대학에서 공부한다. 이 무렵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독파하였다. 1929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영문학 대신 인도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하지만 대학 측의 반대로 결국 박사학위를 받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때마침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불황을 맞은 상황에서 캠벨을 이후 5년 가까이 칩거하며 독서와 사색 그리고 습작에 몰두한다. 이때의 시간들을 천복을 누린 시간이었다고 술회하면서 가난은 조금 불편할 뿐 행복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고 했다. 1934년 캠벨은 뉴욕의 사라 로렌스 대학의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고 1972년 퇴직할 때까지 38년 동안 재직한다. 1938년 제자였던 연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하였다.

캠벨은 어려서부터의 관심사였던 인류학과 민속학을 바탕으로, 비교종교학과 분석심리학 등의 이론을 이용하여 신화와 종교 연구를 지속해 명성을 얻는다. 그의 대표작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은 세계 각지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주저인 4부작 <신의 가면>(1959-1968)을 비롯하여 <신화와 함께 하는 삶>(1972), <신화의 이미지>(1974), 그리고 최후의 역작인 총 2부 5권의 <세계신화지도>(1983-1989) 등을 펴냈다. 하지만 캠벨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 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1988)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캠벨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한 대담집 <신화의 힘>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캠벨은 1987년 10월 30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캠벨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자리, 바로 그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그는 세상과 마지막으로 작별했다. 


‘나는 캠벨만큼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원시 사회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 하늘이라고 하는 거대한 지붕 밑으로 펼쳐진 광막한 들판으로 나가거나 수목에 묻혀 있는 숲 속의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을 맛보고는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신들의 이야기가 왜 바람 속에서 천둥 속에 울려나올 수 있는지 어째서 산자락의 시내라는 시내는 다 하느님의 육성을 내는지 어째서 온 세상이 다 성소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_ 빌 모이어스’



2.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8.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 필멸하는 인간이야말로 신화의 주인공이며 신화탄생의 전제다.


9. 아, 이그쥬가르쥬크 말이오? 북부 캐나다 카리부 에스키모의 샤먼이었소. 이 사람은 유럽 손님들에게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 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을 했지요.


10. “왜 하필이면 신화 같은 게 필요하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런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 신화는 인류 최초의 이야기다. 그런고로 인류의 모든 이야기는 신화에서 시작되었다. 신화는 인류 이야기의 시조이며 원형이다.


11. 괴테가 <파우스트>에다 쓴 게 바로 이것인데, 루카스는 시쳇말에다 옷을 입혔지요. 결국 ‘테크놀로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메시지 아니겠어요?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 인간의 한계, 현대 문명 즉 과학의 한계와 함께 물질적인 것들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1.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12.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14. 운명은 앞서서 뜻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15. 그는 큰 스승들이 그러하듯 예증을 통하여 가르친다. (......)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 텐데 말이오.”


15. 메튜 아놀드는 최사의 비평은 ‘이 세상에 기왕에 알려진 것, 기왕에 사유된 것을 알고 다음에는 이 지식을 참되고 신선한 사상의 흐름으로 창조하는 행위’라고 갈파한 바 있다.


15. 그는 자기의 작업을 관류하는 ‘중심사상’이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임을 인정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

“아니지, 그게 아니오. 살아 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지요.”


16. 이렇게 해서 옛 모듬살이는 일찍이,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을 깨닫게 된다.


18.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이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마땅히 자각하여야 할 삶 자체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19. 우리 현대인들은 이 땅으로부터 신비라는 신비는 모조리 벗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울 벨로의 말마따나 믿음을 대청소해버린 상태입니다. 자, 이제 어떤 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살찌우지요? 할리우드의 영화, 텔레비전 영화에게 이 일을 맡겨야 할까요?


25. 나는 남들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주제라고 해서 관심을 두는 것을 신용하지 않아요. 내가 신용하는 것은 어찌어찌 하다보니 사로잡히게 되는 주제입니다.

-> 자기 주도적 삶, 내가 삶의 주인인 삶, 밖으로 향하는 삶이 아니라 안으로 향하는 삶이어야 한다.


26. 나이를 먹어 나날의 삶에 대한 관심에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인 삶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 내면적인 삶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 참 곤란한 일이지요.

->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그리고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


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31.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영해 같은 것과는 달아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오랫동안 연애하던 사람이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아 갈라서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왜 갈라설까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33. 그래요.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 사람은 결혼을 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34.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42. 입대해서 군복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삶을 방기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를 섬기기 위해 사회적으로 조직된 삶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 제복을 입는다는 것, 조직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 조직을 위해 규정된 것을 받들고 섬긴다는 것이다.


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74.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신화의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 하고 반문합니다. 성냥을 켜면 불이 입니다. 불이 무엇이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 됩니다.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의 신화도 있고, 단혼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혼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 도덕률을 말하는 겁니다. 좋은 사회라면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우리 삶의 법 같은 것 말이지요. 선사 시대에 믿어지던 야훼의 책을 보세요. 페이지마다 무엇을 입어라. 어떻게 처신하라는 잔소리가 잔뜩 실려 있지요. 하지만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77. 하지만 우리를 어딘가에서 이쪽으로 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이 땅에서 나온 존재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곧 이 땅이요. 우리가 곧 이 땅의 의식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기가 쉬울 겁니다. 이것이 곧 이 땅의 눈이요. 이것이 곧 이 땅의 음성입니다.


78. 시애틀 추장은 구석기 시대 도덕률의 마지막 대변자 중 한 사람이었지요. 1852년을 전후해서 미합중국 정부가 나날이 늘어나는 미국 국민을 이주시키기 위해 그 부족의 땅을 팔 것을 요구했을 때 시애틀 추장은 명문의 해답을 보냈지요. 이 서한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도덕의 문제 진자 도덕의 문제를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 인용해 보지요.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 한,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곰,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그대들은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 백성의 삶에 묻어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 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줍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주며 우리 자식들을 먹여줍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 강 또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 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여겨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이나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르쳐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땅을 낳은 것은 이 땅의 모든 자식을 낳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육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의 냄새에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수풀은 어디에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 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는 그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85.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이게 왜 놀라운 것이냐 하면, 우리와,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상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 방면의 학문에서는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 파스키난스(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고 합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시켜줄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85.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 모험이란 것이 미지로의 여행이며 모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89. 그들(몽상가, 영적인 지도자, 영웅...)은 모두 자기네의 방패막이가 되는 사회에서 뛰쳐나와 미지의 어두운 숲으로, 불의 세계로, 원초적인 경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이지요.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어 있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잇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 결국 이번 여행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91. 이때부터 삶과 죽음이 갈리고, 살기위해서 다른 생명을 먹는 일이 생깁니다. (......)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 처음부터 인간은 모순과 역설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었다. 죽은 자의 몫을 채우기 위해 새 사람을 만들려니 성이 갈려야 했다. 사람이 죽어 묻힌 자리에서 나무가 한 그루 솟았는데 여기서 먹을 것이 열렸다. 이제 인간은 살기위해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여야 한다. 숙명이란 이런 것이다. 이 가운데 자연의 섭리에 합당할 수 있도록 균형과 조화를 찾는 것이 결국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목표가 되는 것이다.


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96. (뱀의 상징) 뱀은 과거를 벗어던지고 계속해서 새 삶을 사는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들이 말이지요. (......)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이지요. 삶 역시 한 세대에서 이울면서 다음 세대로 넘겨져 거듭납니다.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합니다. 끊임없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삶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문득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뱀 역시 삶에 대한 놀라움과 섬뜩함 같은 이미지를 지닙니다. (......) 뱀은 대부분의 문화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 뱀이 기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물처럼 흐르는 것 같지요. 혀를 보세요. 불꽃같지 않아요? 결국 우리는 물과 불이라고 하는 한 짝의 대극을 뱀에게서 발견합니다. (......)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관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입니다. 결국 뱀은 에덴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겁니다.


98.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살던 꿈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102.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105.  어느 날 ‘자기’라고 하는 신이 “내가 있다”라고 했더랍니다. 그런ㄷ 이 ‘자기’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두려움을 느꼈더랍니다. 영원이라는 것을 인식했으니까요. 그래서 이 ‘자기’는 “왜 내가 두려워하느냐? 존재하는 것은 나뿐인데?” 하고 생각했더랍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번에는 외로워지면서, 다른 하나가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일더라지요. 욕망을 느낀것이지요. 그래서 이 ‘자기’가 부풀어 둘로 나뉘어 각각 남성과 여성이 되어서는 이 세상을 낳았더랍니다.


106. 그게 바로 ‘하나의 금제’라고 하는 민담의 표준 모티프랍니다. <푸른 수염>이야기를 생각해 보세요. 푸른 수염은 아내에게 “저 벽장문은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디 이게 지켜집니까? 아내는 그 금제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를 보아도 하느님은 하나의 금제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111. 신화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가령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큰 신화는 신전의 신화, 대규모의 신성한 의례의 신화이지요. 인류는 의례를 통하여 자기네끼리, 혹은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데, 큰 신화는 바로 이 의례를 설명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은유로 알고 해석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113. 이 세계라는 대교향악단과 조화를 이루려면 우리 개인의 하모니를 이 큰 하모니에 맞추어야 하는 거지요.


114.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117. 현실의 개념을 넘어서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라는 범주도 초월합니다. 신화가 바로 우리를 늘 이 지점에다 데려다 놓고는 합니다. 신화는 우리에게 그것의 신비에 이르는 사다리를 마련해줍니다. (......)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바로 이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119. 그것(재생, 환생)은 우리가, 우리는 이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관념에는 우리의 존재 및 우리의 깨달음과 의식의 잠재력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 알고 잇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120.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133.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135.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은밀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행위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니,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136. 우리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일 중 하나는, 속으로는 구역질이 나는 타인, 혹은 타인의 행동, 혹은 타인의 조건에 대해서도 ‘옳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 삶 토록 자연스럽게 스미는 치욕을 부정하지 말라. 삶은 처음부터 모순과 역설로 이루어졌다. 


136. 시바신의 이야기


141. ‘눈에 보이지 않는 권능’의 사절이던 동물은 이제 원시시대처럼 인류를 가르치고 인류를 인도하지 않는다. (......) 끊임없이 불바퀴 별을 도는 이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먹을 것과 살 데를 다투는 다른 인간이다. 지복의 석기 시대 수렵민의 삶과 삶의 양식이 우리 육신을 형상 짓고 우리 마음의 얼개를 짜놓았는데도, 그 수렵민의 세계는 우리 육신에도 남아 있지 않고 마음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수렵민들의 동물 사절에 관한 기억은, 우리가 광야로 나갈 때마다 깨어나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으로 보아 우리 안에 잠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 기억은, 우리가 천둥소리에 놀랄 때도 잠을 깬다.


142.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삶에 관한 나의 사고방식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삶에 관한 관념 자체를 바꾼 겁니다. (......)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155.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159. 사원은 우리 영혼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성당으로 들어감으로써 사실은 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갑니다. 성당은 우리 영적인 삶의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교회인 것이지요. 주위의 모든 형상은 모두 영적인 삶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 성당의 모든 이미저리는 신인동형동성의 형태를 취합니다. 하느님과 예수와 성자들이 모두 인간의 형상으로 그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동굴에 그려진 이미지는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같은 겁니다. 형상은 부차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형상이 전하는 메시지이지요.


179. (성소)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185. (가장 높은 건물의 주인) 중세 도시에 가보면 성당이 가장 높은 건물 행세를 합니다. 1세기에 조성된 도시에서는 정치가 벌어지던 장소가 가장 높은 건물 행세를 합니다. 현대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은 누가 차지하고 있지요? 당연히 경제생활의 중심인 업무용 건물이지요. 


190.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209. 죽음 없이 새 생명이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다음 세대가 오게 하려면 앞 세대는 모두 죽어야 한다.


211.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하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듯입니다. (......) 사람들은 자기를 잊은 채로 서로에게 무엇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213. 자살 역시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사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 (......) 하지만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215. 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있다.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이 젊은이는 전우를 위해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217.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대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 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 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2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가 있지요. (......)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

오토 랑크는 <영웅의 탄생 신화>라는 작은 책에서, 양수에서 수생동물 상태를 지나고, 공기를 호흡하는 포유동물 상태를 지나 홀로 서기까지는 엄청난 심리적, 육체적 변모 과정을 거치기에,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라고 주장하지요. 


232. 개가 사람을 깨물고 하면 이야깃거리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를 깨물었다고 하면 이야깃거리가 된다는 옛말알지요? 얼마나 영웅적인지 상관없이, 늘 일어나는 일은 뉴스거리가 되지 못해요. 그러니까 모성은 이제 별로 신기할 것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할까요?


233. 여기서 핵심은,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고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모든 신화가 다르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 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235. 도덕적인 목표는, 자기가 속한 민족을 구하는 것, 특정 개인을 구하는 것, 어떤 관념을 받는 것이 될 수 있지요. 영웅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 우리 시대의 영웅의 임무는 우선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다. 


237. ‘통찰의 탐색’이라고 불러도 좋은 특정한 신화 유형이 있어요. 통찰의 탐색은 홍익의 탐색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이것은 세계의 모든 신화에서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영웅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의식하지 못하던 것, 혹은 의식에서 빠져 있던 것과 만납니다. 이렇게 되면 영웅에게는 문제가 생깁니다. 즉 그것을 만난 상태로 그곳에 머물 것인지, 세계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홍익이 될 만한 것을 기지고 원래 있던 세계로 귀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245. 오늘날의 사람들은 영웅이 아닌 명사를 숭배하는 것 같은데요.


251. 이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땅에서 새로운 것을 싹 틔울 잠재력이 있는 씨앗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263. (진짜 자기를 만나는 방법)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하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이것은 운동선수가 코치를 찾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좋은 코치는 선수에게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아요. 좋은 코치는 선수가 달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선수의 천성적인 동작 양식만 조금 수정해줍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게 좋은 스승이 되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시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265. 다스 베이더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거지요. 그는 로봇입니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위협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이 조직은 우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조직이 과연 우리 인류의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조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 조직을 더 이상 섬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 정도의 행동은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이상을 움켜 안고, 루크 스카이워커처럼, 조직이 가해오는 비인간적인 압제에 저항함으로 써요.

->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삶


272.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죽이고,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 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278.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283. 거웨인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석가가 취한 방법을 택하건 거웨인이 취한 방법을 택하건 욕망과 공포라는 이 무서운 계곡을 벗어나야 성취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283. 영혼의 세 가지 변모 


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291. 모험 자체가 모험에 대한 보답이고 말고요. 하지만 모험이라는 것은 위험해요. 모험에는 긍정적인 가능성도 있고 부정적인 가능성도 있는데, 둘 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길이 아닌 우리의 길을 좇고 있어요. (......)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악마와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지요. 그러나 희망도 있어요. 우리를 부름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짐으로써 여행을 상상 밖의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노인은 도처에 있으니까요.


296.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298. 앞에서 말한 내 여자 친구는 늘 “하느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준 겁니다.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299.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가령 우리 부모가 서로 눈이 맞는 것부터가 우연이지요.


299. 정점에 이르러 있는 운동선수는 내부에 정점을 하나 지니고 있어요.

-> 몰입이다. 나는 이 장면을 ‘그 분이 오셨다’라고 표현하는데 인식하는 내가 아니라 그 안의 내가 인도하는 점인 것이다. 이런 단계에 있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저절로 되어진다.


303. 아니에요.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 우리 삶은 우리가 원하는(선택하는) 방향으로 자란다.


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349. 어거야 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견딜 수 있다.


351. 중세 기사가 섬기던 다섯 가지 미덕 : 절제, 용기, 사랑, 충성, 예의


353. (자비慈悲)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지요. ‘passion’은 곧 고통인데 이걸 ‘com-'하는 것이 곧 ’자비 compassion'인 것이지요. 독일어가 자비의 의미를 가장 확연하게 표현합니다. 독일어로 자비는 ‘미틀라이트 mitleid' 라고 하는데 ‘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leid'는 ’고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은 이 남자가 자기와 사랑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테스트 한 겁니다.

-> 사랑은 결국 고통이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는 것을 옛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사랑은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므로 웬만한 신뢰(운명적인, 신이 맺어준)가 없으면 함께 헤쳐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란 감정을 행복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잊게 만드는 마취제 같은 것이다. 


360. 낭만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가 두 세계에 걸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면 밖에서 강요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세계를 조화 있게 상화 관계 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는 이 모듬살이로 태어났으니까, 모듬살이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모듬살이의 울타리에 살지 않겠다는 것도 우스운일이지요. 왜냐, 살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기 대문이죠. 그러나 이 모듬살이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간섭하고 나서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모듬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듬살이가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364. 강요에 의해 부부가 된 사람들의 일상적이 삶에서도 사랑이 자랄 수는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종류의 관계도 상당히 깊은 사랑의 간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가족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 삶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도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나머지 한쪽을 발견했을 때 여기서 생기는 사랑과는 견줄 수 없지요. 음유시인이 찬양한 사랑, 오늘날 우리의 이상이 되어 있는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 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 놀음은 쾌락을 겨냥한 관계입니다. 쾌락이 끝나면 사랑 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370.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사랑이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삶의 양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이 은밀한 게 다 이 때문이랍니다.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

사랑의 고통이란 다른 고통이 아니라 곧 삶의 고통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삶이 있는 거죠.


373.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377. 천사나 마귀란, 나를 이끌고 인도하는 충동을 의인화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393. 바로 그겁니다.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잇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394. 괴테는 신성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시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 무구한 한 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 나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식물 생장의 신비이자 전쟁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413.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 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 중요한 것은 목표(목적지)가 아니다. 삶은 여행 그 자체이며, 삶은 바로 길 위에 있는 것이다.


415.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3. 내가 저자라면


주옥같다는 말은 이 책을 두고 한 말이다. 통으로 베껴 쓰고 싶게 만든다. 대담자 빌 모이어서와 조셉 켐벨과의 대화가 마치 육성을 듣는 것처럼 느껴진다. 신화의 모티프나 메타포에 관한 켐벨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내 안의 신화를 일깨워 삶의 길로 곧장 나아가 영웅의 삶을 살라는 그의 충고는 강력한 에너지다. 시시하고 지루하던 옛 이야기가 그를 통해 인간 원형의 이야기, 태초 인간의 이야기, 우리 내면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다. 신화속의 인물들과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며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그를 통해 깨닫게 된다. 삶은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삶의 이미지’가 궁금한 이들이 공부를 시작하면서 얼개를 잡고 몇 가지 키워드를 가져갈 수 있게 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며, 더불어 이에 관한 공부가 어느 정도 쌓였을 때 다시 한번 정독하면서 그간의 공부를 한 꾸러미로 꿸 수 있게 하는 의미로도 좋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편린들이 얼개를 만들지 못하고 길을 잃었을 때 찾아 읽어 볼 것이다.


[책의 구성]

이 책은 모두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빌 모이어스의 서문과 옮긴이의 말이 본문 앞에 삽입되어 있다.


빌 모이어스 서문

대담자 빌 모이어스가 조지 캠벨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또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모이어스가 만난 캠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책의 얼개를 읽고 책 내용의 주요 키워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정리가 잘 되어 있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오늘 날 신화가 왜 필요한지, 왜 신화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 신화가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야기 하고 있다. 일상적인 우리 삶 속에 신화적 모티프가 어떻게 숨겨져 있으며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 흔적들은 어떻게 어떤 형식으로 현대의 여러 가지 의례에 남아있는지 그 얼개를 짐작할 수 있는 단원이다.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의 본질이 우리 내면으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신화가 우리의 영적인 생명에게 주는 은유의 메시지들에 관한 통찰을 이 단원에서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론 이 장이 쉽게 읽히지 않는다. 영원, 창조, 은유, 종교 등을 키워드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3. 태초의 이야기꾼들

신화가 가지는 은유와 의례, 의식 따위가 당시 사회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녔으며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져 오고 있는가에 대한 얼개를 이야기 하고 있다. 


4. 희생과 천복

성소에 대한 이야기, 심연의 깊은 경험을 위한 방법, 죽음의 이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더하는 일, 천복을 누리는 삶 등에 관해서 신화와 저자 본인의 이야기를 끌어와 이야기 하고 있다.


5. 영웅의 모험

개인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장이라고 생각된다. 신화에서 나타나는 영웅의 삶을 통해서 우리 모두는 영웅의 씨앗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삶을 원하는 사람들은 길을 나서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아 이야기 하고 있다.


6. 조화여신의 은혜

사람의 모습을 한 신, 기운의 형태로 존재하는 신, 부계 중심의 남신과 모계 중심의 여신, 아버지와 어머니, 처녀 수태의 모티프 등에 관하여 지역과 민족의 특성에 따라 나타나는 다양한 신들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다. 


7. 사랑과 결혼이야기

연애, 결혼, 사랑, 이별에 대하여 신화적 모티프를 끌어와 이야기 하고 있다. 


8. 영원의 가면

신화의 이미지가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감동적이었던 장과 절]


78. 시애틀 추장은 구석기 시대 도덕률의 마지막 대변자 중 한 사람이었지요. 1852년을 전후해서 미합중국 정부가 나날이 늘어나는 미국 국민을 이주시키기 위해 그 부족의 땅을 팔 것을 요구했을 때 시애틀 추장은 명문의 해답을 보냈지요. 이 서한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도덕의 문제 진자 도덕의 문제를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 인용해 보지요.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 한,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곰,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그대들은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 백성의 삶에 묻어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 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줍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주며 우리 자식들을 먹여줍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 강 또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 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여겨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이나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르쳐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땅을 낳은 것은 이 땅의 모든 자식을 낳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육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의 냄새에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수풀은 어디에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 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는 그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211.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하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듯입니다. (......) 사람들은 자기를 잊은 채로 서로에게 무엇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보완점]


- 대담형식의 구성이 주제에 관한 일관된 시선을 깊이 있게 유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질문의 이동 간에 비약이 크고 질문과 대답의 비약 역시 큰 점이 아쉽다. 

- 역시 대담형식의 한계일 수 있겠으나 다소 선문답식의 이야기 전개는 읽는 동안 집중도를 떨어뜨리고 감추는 듯(머뭇거리는 듯) 암시를 담는 듯한 켐벨의 대화 태도는 다소 어렵게 다가온다.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질문이 생긴다는 것이다.

- 여덟 개의 큰 주제로 내용을 분류하여 편집되어 있으나 각 장에서 다루는 내용 역시 그 예화나 질문의 비약이 심하고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완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뜬금없는 다음 질문으로 이어지는 따위의 편집은 독자들의 집중도를 배려하지 못한 것이다.

- 신화에 관한 입문서라고는 하지만 신화에 대한 이미지와 메타포에 치중한 나머지 신화 자체에 대한 내용이 부분의 언급에 지나지 않음으로 신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은 켐벨의 말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대담의 흐름을 함께 따라가기 어려운 점 역시 아쉽다.

- 스타워즈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스타워즈 영화 6편을 다 보아야 했다.

- 난 평소 번역가들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다. 그들은 정말이지 지대한 공헌자들이다. 이윤기의 번역 역시 훌륭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일부 단어들의 경우 생소하고 개념적으로 난해한 용어들이 다수 사용된 것이 매우 아쉽다. 

- 아울러 인용된 이야기나 책, 사람 등에 대하여 별도의 각주가 첨기 된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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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09:27:08 *.196.54.42

1등 등극! 추카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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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5 00:04:48 *.160.136.54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오?”

 

연구원 일년의 여정을 떠나는 그대에게 조셉 캠벨에게처럼 누군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이가 있다면,

어떤 대답을 해주리오.

 

'내 안의 신화를 일깨워 삶의 길로 곧장 나아가 영웅의 삶을 살라는 그의 충고는 강력한 에너지다.'

영웅의 출발점은 시작 되었습니다. 그 여정 천천히 꼭꼭 음미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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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5 11:47:45 *.94.41.89

역시 1등으로 저희를 이끌어주셨네요 ^^ 정신적 지주 다운!!!!

스타워즈 6편까지 다 보셨다니 그 노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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