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땟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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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창립 60주년이 코 앞이다. 지난 60년을 기념하고 다가올 날들을 조금 더 성공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회사는 연일 분주하다. 임원진을 비롯해 직원들은 1분기 실적 집계에 신경이 곤두서 있고 새로운 슬로건을 선정하고 창립기념일 행사를 준비하는 등 환갑을 맞이하는 회사는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간다.
주말에 태백산 천제단을 올랐다. 매년 창립기념일즘엔 산에 오르거나 부서별로 체련 대회를 했다. 하지만 올해의 행사는 무박 2일 태백산 등산으로 정해졌다. 이 또한 창립 60주년 행사의 일환이었다. ‘아마도 새로운 마음을 다지기 위해 오르는 것이겠지. 그래도 무박2일 새벽산행은 좀…….’ 2년전 경주에서 치렀던 새벽산행을 떠올리며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태백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밤 9시에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다음 날 새벽 1시 즈음 천제단에 오르기 위한 입구인 유일사 매표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약 1시간 반 가량 버스 안에서 취침을 취한 뒤 2시 40분에 매표소 앞에서 집결하여 등반하기로 했다.
잠들었나 싶더니 벌써 2시 반. 버스에서 내려 맞이하는 산 새벽 공기가 쌀쌀했다. 생각보다 추워 손이 시릴 정도였다. 태백산 정상의 찬 공기를 버텨내기 위해 겹겹이 옷을 입었지만 손이 시릴 것을 대비해, 그리고 손을 보호 하기 위해 껴야 할 장갑은 챙겨오질 못했다. 등산을 잘 안한다. 안하니 잘 모르고 그러니 필수 장비를 챙길 리 만무했다. 등산복도 회사에서 지급해준 상의가 전부였고, 하의는 대형 아울렛에서 할인해서 팔고 있는 15,900원짜리 트레킹복, 일명 추리닝이라 불리는 것을 입고 갔다. 신발은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었다. 평소 등산을 하지 않는 나에게 등산화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1년에 한번 있을 회사 산행을 위해 십수만원에서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등산화를 구매하는 것은 나에게는 사치였다. 결국 운동화를 신고 가기로 맘 먹었다. 이런 나였으니 장갑을 챙겨가지 않은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데 태백산의 새벽공기는 상당히 차가웠고, 손이 시려도 너무 시렸다. 마침 산에 오르는 입구에 등산용품을 파는 가계가 있었다. 장갑을 구매하기로 했다. 가게에 들어가 장갑을 사려는데 얇고 후줄근해 보이는 장갑이 만원이란다. ‘이런 사기꾼들….’ 하지만 뭘 어쩌겠나.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아쉬운 놈이 사야지…….’ 울며 겨자 먹기로 장갑을 구매했다. 우리는 – 팀 단위로 움직였고 우리 팀은 총 9명이었다 - 곧 쉼터의 은은한 불빛을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산에 오르는데 별 다른 생각은 없었다. 별 다른 각오도 없었다. 그저 주어진 일정이었고 해야만 했기에 시작한 산행이었다. 하지만 삼십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나이에 책상에 앉아 있을 줄만 알았지 바쁘다는 핑계로, 귀찮다는 핑계로 운동을 해본 지 오래됐다. '남자의 힘은 허벅지'라는데 매년 정기점진 때면 1센티씩 줄어드는 허벅지 둘레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입장인지라 약간의 걱정으로 시작한 산행이었다. 다행히 2주 전부터 조금씩 시작한 출퇴근길 지하철 계단 이용하기 덕분이었는지, 산행이 그리 힘들진 않았다. 물론 오르는데 2시간 내려가는데 2시간, 왕복 4시간이 걸리는 그리고 험하지 않은 코스였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홀로 맞이 하는 어둠의 새벽 산행이었다면 꽤나 무서웠겠지만, 팀 동료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에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귀신 얘기를 하자며 너스레를 떨고 분위기를 올리는 팀원들도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참여한 회사 등산이었지만 소소한 즐거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올랐을까. 발 밑만 보던 나는 회사에서 지급한 랜턴으로 우리를 둘러싼 숲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즐비했다. 4월 이면 봄일 터인데, 자연은 여전히 한 겨울에 있는 듯 했다. 수많은 나무들이 우리가 오르는 길 양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지, 본래 나무들이 그 자리에 있었겠지. 그리고 그 자리를 사람이 지나다니고 조금 더 편하게 다니기 위해 길을 만들었겠지. 그렇게 우리는 나무의 보금자리를 조금씩 조금씩 옆으로 밀어 넣은 것이겠지.’ 뭣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길 양 옆을 빼곡히 채운 게 나무들이겠지만 자연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게 다름 아닌 사람인 것이다.
랜턴으로 주변을 보는 나의 행동은 계속됐다. 양 옆을 돌아보니 숲 여기 저기에 검은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검은 구멍, 나무와 그 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어두운 공간들, 구멍들…… ‘어린 시절 즐겨봤던 [전설의 고향]에서는 저기 저 어두운 곳에 하얀 소복을 입고 흐느끼는 한 맺힌 처녀귀신이 자주 등장하곤 했는데……’ 스리슬쩍 등골이 오싹해졌다. 황급히 랜턴을 돌리고 하늘을 보았다. 수많은 나뭇가지가 우리가 지나는 길 위를 오묘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인간의 몸 이곳 저곳을 둘러싸고 있는 혈관의 모양과 비슷한 듯 했다. 우리 몸 이곳 저곳을 끝도 없이 둘러싸고 연결하고 있는 혈관들은 피를 품고 있다. 심장은 분당 60~80회씩 펌프질하고 이 때문에 피는 산소와 영양분을 싣고 지구의 두 바퀴 반에 해당하는 길이(약 100,000km)의 혈관을 따라 온몸을 돌아다닐 수 있다. 인간은 그로 인해 살아갈 수 있다. 산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수 많은 나무들과 수많은 가지들. 수 많은 나무들과 이를 품고 있는 산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기를 제공하고 있으니 그 모습 뿐 아니라 기능에서도 실로 지구에 피를 운반하고 공급하는 혈관과 같은 존재 아닐까. 나는 나무와 혈관의 이런 오묘하고도 조금은 억지스러운 공통점을 떠올리며 산을 올랐다.
천제단 정상까지 오르는데 약 2시간 반이 걸렸다. 원래 2시간 코스였지만 앞에서 쉬이 올라가지 못하는 상사를 기다리느라 조금 늦어졌다. 정상에 도착했다. 천제단까지는 약 200~300미터 정도의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산을 오르니 문들 떠오른 기억, ‘이 곳에 와본 적이 있었구나. 그 때도 이 길을 걸었었지’. 중학생 때였는지 고등학생 때였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수학여행으로 이곳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여년 만에 다시 왔다. ‘10대 청소년이었던 녀석이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는 아저씨가 되어 이곳에 왔다니. 시간 참 빠르네.’ 느닷없이 찾아온 기억이 신기하면서도 반가웠다. 하지만 한 편으로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시간만 흐른 듯 해 씁쓸하기도 했다.
후발대로 올라 맨 마지막으로 도착한 우리 팀은 천제단에 올라 단체 사진을 찍고 별도로 팀별 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태백산 정상의 찬 바람에 노출된 몸은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태양이 떠올랐다. 하늘 가득 구름이 낀 날이라 일출은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조금 지난 시간, 흐린 구름 사이로 붉은 태양이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나 그랬듯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는 마음이 경건하고도 진지해진다. 괜히 엄숙해지고 차분해진 마음으로 한참을 바라본 뒤 내려왔다.
날이 밝았고, 기온도 올랐다. 그래서인지 내려오는 길은 오르는 길보다 한결 수월했다. 심적 여유도 생기고 어둠도 걷히니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였고, 들리지 않은 것들이 들렸다. 새들이 지저귐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순간 순간 사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때면 녀석들의 지저귐과 바람소리가 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듯했다. 순간의 황홀함에 숲에 조금 더 머물고 싶었지만 정해진 일정이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혼자 사는 삶이 아닌 이상, 원하지 않아도 함께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은 그런 때였고, 그로 인한 아쉬움 적지 않았다. 다시금 나뭇가지들을 보였다. 어둠 속 랜턴불빛에 비친 나뭇가지들은 한 겨울의 앙상한 그것 인줄 알았는데, 새벽에 다시 본 나뭇가지 끝에서는 보일 듯 말듯한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마른 나뭇잎들이 떨어져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는 숲의 밑바닥에도 연녹색의 푸릇푸릇한 생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산에 문외한인 나에게 녀석의 이름 알 길 없지만 분명 봄이 왔음을 말하고 있었다.
문득 떠올랐다. ‘아, 그날이구나’
지난해 오늘, 나의 스승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봄꽃이 한창인 4월의 중간 – 그의 기일은 4월 13일이다 – 그는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활짝 핀 벚꽃의 아름다움을 참으로 많이도 좋아했다던 그였는데, 아름다운 벚꽃이 한창이던 그 날 그는 세상을 떠났다. 1년이 흘렀다. 맘이 바빴는지 일상이 바빴는지 잠시 잠깐 이었지만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그 즈음 떠올랐다.
나뭇잎 자신의 몸이 썩어 문드러져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 것처럼 어떤 이는 자신의 숭고하고도 올곧은 정신을 남겨, 남은 이들이 새로운 마음과 깨우침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마 나의 스승도 그런 존재일 것이다. 비교적 짧은 생을 살다 간 그였지만, 그의 정신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이 새로운 삶의 살 수 있도록 선동하고 있다. 그의 죽음이 그나마도 덜 슬픈 이유는 이런 그의 정신과 그로 인한 희망들 때문 아닐까.
내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스승이라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인물처럼 보여지는 키팅 선생님 정도였다. 현실에서는 이렇다 할 스승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이십여 년을 살았는데, 인생의 중간 즈음에서 그를 만났다. 스승이라고는 하지만 가르침은 그가 쓴 책에서 받았고 그와의 만남도 죽음을 목전에 둔 그의 눈을 바라보고 그의 손을 만진 몇 분이 전부였다. 그는 나의 개인사를 알았지만 나는 그의 개인사를 알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 사이의 사적인 역사는 없었고 그로 인한 아쉬움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나는 책으로 그를 처음 만났다. 그의 글을 좋아했으며, 수년의 고민 끝에 그의 밑에서 수학하기 위해 그가 만든 사설 연구소의 연구원에 지원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아홉번째 연구원 중 한 명으로 뽑았다. 그의 제자로 뽑혔다는 소식에 뛸 듯 기뻤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나의 지원서를 읽고 자신의 제자로 선발했을 즈음에는 이미 그의 몸 전체에 암세포가 퍼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새로운 정신을 가진 이들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그에게 개인적인 가르침과 사적인 언질 한 번 받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그를 스승으로 칭할 수 밖에 없는, 그리고 그를 놓을 수 없는 이유다.
1년이 흘렀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시간은 무심하게도 아무 일 없는 듯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생의 중반에 만난 스승 그리고 그의 기일 즈음에 만난 자연 나에게 말했다. 죽음은 생명을 낳는다고……
어느 덧 아침식사가 예정된 식당 앞에 도착했다. 두 시간에 걸쳐 내려왔다. 총 네 시간 반에 걸친 산행으로 운동화 밑창은 너덜너덜해졌고-역시 등산화를 챙겨갔어야 했을까......- 두 다리는 힘이 풀려버렸다. 하지만 스트레스와 운동부족으로 뭉쳐 있던 목 뒤 근육도 같이 풀린 듯 개운했다. 언제나 그랬듯 산에 오를 땐 ‘이걸 왜 오르나’ 싶다가도 내려올 땐 ‘역시 잘 왔다’란 생각이 들었다. 1년에 한 번 하는 등산, 이제는 조금 더 자주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 입장에서는 거의 청소년을 보는 듯한 연배에 용모지만 ^^
대수씨는 속이 깊고 자기규율도 잘 되는 훌륭한 사회인이지요.
사회생활을 안다는 점에서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사부님이 보여주신 길을 따라 갈 수 있으리라 믿어요.
본인이 평범하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많은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잘 어울릴 수 있다. 만일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시도’를 하여 성공한다면, 단 한 번의 도약만으로 빛나는 인물이 될 수 있다. ... 특히 평범한 지지자들을 많이 가질 수 있다. 평범한 다른 사람들도 나를 통해 비범함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 세월이 젊음에게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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