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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4일 09시 41분 등록

<신화의 힘>

2014.04.14 이동희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1954-2013)

 

무엇보다 익숙하지 않은 학문의 소유자료서 신비감마저 갖게 하는 그의 저서와 말들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별을 보여주는 듯 큰 길잡이가 되고 있다. 내가 조셉 캠벨을 처음 접한 것은 변화경영연구소의 단군의 후예 프로그램에서였다. 단군의 후예 프로그램은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을 모델로 삼아 300일간의 새벽 활동 프로그램이었다. 새로운 환경 또는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각성과 실천에서 우리는 영웅이 되고 이 영웅의 임무를 완수 하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 당시 조셉 캠벨의 그러한 통찰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주는 새로운 문이었다.

 

그는 미국의 유명한 신화종교학자이자 비교신화학자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소년 시절 북미대륙 원주민의 신화와 아더왕 전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콜롬비아 대학과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1904~1920

190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면서 신화에 관심이 많았다

1910년 가족과 함께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보면서 아메리카 인디언에 푹 빠져 버린다

뉴욕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 곳에 수집된 토템 기둥들에도 매료된다이후에도 수녀 선생님에게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브가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있다는 사실과 여러 민화들이 아더왕 전설의 상징체계가 유사한 것을 발견한다

1921~1928

1921년 코네티컷 주 뉴 밀포드의 캔터베리 학교를 졸업하고 콜롬비아 대학교에 진학

1925년에 영문학사 학위취득

1927년에는 중세 문학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를 받는다그 후 콜럼비아 대학교로부터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연구원 장려금을 받았고 프랑스 파리대학과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배운다또한 이 시기에 그는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모던 아트를 접하게 되면서 폴 클레앙리 마티스파블로 피카소에 매료된다그리고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칼 융(Karl Jung)의 작품에 빠져들었다.

1929 ~ 1937

1929년 미국으로 돌아온 캠벨은 영문학 대신 인도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했지만 컬럼비아대학 측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박사학위취득을 포기하고 학교를 떠났다.

1934년까지 5년 동안 혹독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진다그는 뉴욕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하루 9시간 동안 책을 파고 들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면서 작가 존 슈타인벡(John Steinbeck)과 해양 생물학자인 에드 리켓츠(Ed Ricketts)와 교류한다.

1933년에는 캔터베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자신의 소설을 출간하려 하기도 했다.

1934년 캠벨은 사라 로렌즈 대학의 교수 제의를 받아 들인다그는 이후 38년간 이 대학 문학부에 재직한다

1938 ~ 1987

1938년에 자신의 옛 제자이고마사 그레이엄 무용단 단원이었던 진 어드먼과 결혼한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의 신화이야기는 학문뿐만 아니라 영화 매트릭스나 스타워즈처럼 문화예술 등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신의 가면>을 펴냈다

그는 83세의 나이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던 본인의 자택에서 암으로 타계했다대표적인 저서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의 가면> <신화의 힘>등이 있다

사후

그의 사후에 아내진 에드먼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조셉캠벨 재단을 설립했다. 캠벨의 유고와 대담집 그리고 강의 록 등을 정리하여 출간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캠벨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되었다. <신화의 힘>은 저명한 방송인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정리한 책이다.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를 주제로 하여 대담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신화의 힘>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캠벨은 대담을 하면서여기 있는 나는 여든을 헤아립니다. 그런데도 나는 몇 권은 족히 될 책을 쓰고 있어요. 이 일을 마칠 때까지 살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내게는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거예요.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이 없다면 죽는거야 언제 죽어도 좋아요.”라고 말했다.

 

저서로는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4), 『신화의 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의 가면 1~4,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 이미지 1~5』 『세계신화지도』 등이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p 11

괴테가 파우스트에다 쓴 게 바로 이것인데, 루카스는 시쳇말에다 옷을 입혔지요. 결국테크놀로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메시지 아니겠어요?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직관이라는 것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이성으로부터 후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는지요?”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p 12

자기 내부에 자기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그렇게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지요.

 

P12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解脫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P15

그는 독서와 삶에서 엄청난 기쁨을 누리고 살았는데 ,이것을 슬쩍 내비치는 솜씨 또한 절묘했다. 매튜 아놀드는 최상의 비평은 이 세상에 기왕에 알려진 것, 기왕에 사유된 것을 알고, 다음에는 이 지식을 참되고 신선한 사상의 흐름으로 창조하는 행위라고 갈파한 바 있다.

 

P17

캠벨은 이 이야기 끝에, ‘여기에 종교의 귀한 메시지가 있지요. 너희가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대접이 되느니라라는 메시지가 그것이랍니다. 하고 덧붙였다.

 

P18

그는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신의 가면이다.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이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마땅히 자각되어야 할 삶 자체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P19

고대 신화가 그 시대에 그렇게 했듯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를 섬겨, ‘우리 자신과 우주의 기적 (무서운 것인 동시에 황홀하기도 한)을 향한, 우리 지각의 창을 깨끗이 닦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인간을 타락하게 한 것, 인간으로 하여금 신성한 것들과 헤어지게 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 투사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자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귀이자 하느님의 눈이자 하느님의 생각이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P21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는 마치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 켐벨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끌었을까? 그렇다. 지혜이다.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박식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전인미답의 광대한 우리 과거의 파노라마를 아는사람이었다.

 

P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면적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나는 일전에 인생은 자신에 대한 경험이라고 썼다. 인생은 자신에 대한 경험의 여정이고 이는 신의 발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으로 살아가되, 신의 뜻으로 그것이 종교가 나에게 부여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인 것이다. 신화의 힘을 읽고 내가 갖게 된 또 하나는 지구 종교가 필요하는 것이고 이는 민족의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든 지구인들이 자각하고 공유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문제의식이다. 물론 경제, 정치, 역사적인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지만 이 모든 문제를 넘어선 공동체 의식의 발견과 이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P30

삶의 경험이라고 하기로 합시다. 마음은 의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답니다. 꽃의 의미는 무엇이지요? () 이야기에는 꽃과 관련된 석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석가는 그저 꽃 한 송이를 쳐듭니다. 그런데 좌중에 딱 한 사람이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석가를 향해 웃어 보입니다. 석가라는 분 자신은 이렇게 해서 오신 분 (如來)’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에는 의미가 없어요. 우주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용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P30

신화를 읽었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P33

사람은 결혼을 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P34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P36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서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P38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 같은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P41

테마가 시공을 초월해 있습니다. 문화는 이런 이야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요

 

P41

젊은 사람들은 덥석 집더군요.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이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 것을 벗어 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P42

왕이나 여왕에 대하여 반응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인격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지닌 신화적인 역할에 따라서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P46

페요테에게는 생물학적, 기계적, 화학적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영적으로 변모시키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지요.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영적으로 변모하면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는 영적인 체험은 LSD를 통해 환각 상태에서 하는 체험이나 다를 바가 없는 거지요. 말하자면 신비 여행이 최악의 여행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고 있으면 전혀 다른 신비 여행이 되는 것이지요.

 

P46

헤엄을 쳐야 하는데도 헤엄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가는 물이지요. 영적인 삶의 경우 이것은 진실입니다. 의식의 변모라고 하는 것은 정말 엄청난 체험인 것이지요.

 

P46

의식을 머리가 지닌 특수한 기능으로 여기는 것은 데카르트식 사고방식의 일부이지요. 데카르트파 사람들은 머리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어떤 방향, 혹은 어떤 목적에 맞게 작용하게 하는 기관이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은 아니지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의식을 하는 주체에게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는, 의식과 에너지는 어떤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P48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내리락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 있다가 거리로 나오면, 문득 내 의식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는데, 지금은 아주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구나 하는 인식이 생기겠지요. 의식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이러한 신비는, 가령 돈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합니다. 이른바 돈이라고 하는 것은 에너지를 감추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는 단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p 48

신화는 이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P53

자동차는 벌써 신화가 되었어요. 이미 우리의 꿈이 되었으니까요. 이제 비행기도 우리의 상상력을 섬기는 존재가 되었어요. 가령 비행기가 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새가 상징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지요. 인간은 이승의 속박에서 영혼을 해방시키고자 하는데, 뱀이 이승의 속박을 상징한다면 새는 이승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상징하지요. 이제부터 비행기가 그 역할을 맡는 겁니다.

 

P54

확실히 <스타워즈>에는 신화적인 원근법이라고 할 만한 게 있습니다. <스타워즈>는 기계가 지배하는 상태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묻지요. “기계가 인간성을 마모시킬 것이냐, 아니면 기계가 인간을 섬길 것이냐?”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스타워즈>에서 보는 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 똑 같은 질문입니다. 기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우리에게 어떤 수단이든지 다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생의 과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말끔하게 정의해줄 듯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P56

그러니까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P57

옛 전통을 가꾸는 유일한 방법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것을 쇄신하는 길뿐입니다.

 

P59

서구에서는 특정한 집단 문화에 제국주의적 밀어붙이기를 하는 일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만물의 본성에 대해서도 이 같은 밀어붙이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로써 본성의 세계를 열게 된다면 가능성은 그 안에 있습니다.

 

p 59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 마리가 끼어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p 60

오늘날에는 구속적인 범주라는 것이 없어요. 오늘날에 유효한 단 하나의 신화학은 지구라고 하는 행성의 신화학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이것은 없어요. 내가 아는 한,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이를 것이냐 하는 겁니다. 문제는 만유(萬有)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P61

내가 아는 형제애는 모두 구속적인 사회에 갇혀 있어요.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는 공격성이 밖으로 투사되지요.

 

P61

신화가 무엇이지요? 사전적인 의미를 좇으면, 신들에 관한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면 응당, 신들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이어서 나와야 합니다.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 (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P61

신화학에는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유파가 있습니다.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후자의 경우 한 인간은 한 자연인이 아니고 특수한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유럽의 신화학 역사를 보면 이 두 신화학 체계의 상호 작용이 눈에 띕니다. 개의 경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체계입니다. 대신 자연 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것인 경우가 보통이지요.

 

P63

그러나 성서에서는 영원은 물러나고, 자연은 부패하고 타락해 있어요. 성서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우리는 추방된 채 살고 있지요

 

P63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은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 알지, 이 시대의 삶,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이것은 우리 현대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종교의 실패를 증명하는 무서운 본보기입니다. 베이루트에서 치고 받는 세 신화학은 결국 현대 세계를 때려눕히고 있어요. 이들은 저희의 신화학이 미래를 이끌 자격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어요.

 

P64

미합중국은 이 세계에서 전쟁이 아니라 이성을 바탕으로 세워진 최초의 국가입니다. 이 국장을 제정한 사람들은 18세기의 이신론자(理神論者)자들, 점잖은 신사분들 이었지요. 이 위에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믿는다는 구절이 있어요.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성서에서 나오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이것을 제정한 양반들은 에덴의 낙원 이래의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2의적(第二義的)인 관심과 현세적 관심에서 초탈한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의 이성적인 마음이 비치는 맑은 거울에서 반사되는 빛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성입니다. 결과적을 국장을 제정한 사람들에 대한 성서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류의 가능성에서 온전하게 해방된 사람의 마음은 얼마든지 하느님에 대한 앎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계시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든지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나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P71

인류는 기원전 5백 년경에 큰 전기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 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천체 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

 

P71

인도가 열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하게 합니다. 우리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지 않고 측면에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P73

이성은 생각의 하나 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이성이 아니지요. 새앙쥐가 코를 내밀어 밖을 내다보고는, , 여기라면 나가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P74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P74-76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신화의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 하고 반문합니다. 성냥을 켜면 불이 입니다. 불이 무엇이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 됩니다.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의 신화도 있고, 단혼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혼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화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 줄 수 있어요.

 

P76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하면, 만유신론이라고 매도합니다. 하지만 이 만유신론이라는 말은 사람을 오도하는 말입니다. 만유신론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로지 인신만 이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이라는 관점은 그게 아닙니다. 이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신학적입니다. 이것은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

 

P77

우리를 어딘가에서 이쪽으로 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이 땅에서 나온 존재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곧 이 땅이요. 우리가 곧 이 땅의 의식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기가 쉬울 겁니다. 이것이 곧 이 땅의 눈이요. 이것이 곧 이 땅의 음성입니다.

 

P77

오늘 밤에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 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항입니다.

 

P81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P85

우리와, 우리와 관련된 모든 사상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 방면의 학문에서는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 파스키난스 (Mysterium tremendum dt fascinans)’라고 합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시켜줄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P85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흙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P86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 우파니샤드(바라문교의 철학사상을 나타내는 성전)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에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원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바람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P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고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민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P91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 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P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P100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서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P102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너머에 존재하지요.

 

P103

칸트의 말마따나,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상은 사상이 아니지요.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상은 사상성을 초월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합니다.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될 수 없습니다. 차상은 오해됩니다. 왜냐,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이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좋은 것이 바로 우리가 언표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이랍니다.

 

P105

어느 날 자기라고 하는 신이 내가 있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자기내가 있다고 생각하는순간에 두려움을 느겼더랍니다.

 

P107

한 가지 설명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P107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과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 (정신적 상흔) 경험의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서의 생리적인 것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생리적 원인은 생물학적 원리에 비하면 2차적인 것입니다.

 

P109

내 생각으로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요.

 

P111

가령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큰 신화는 신전의 신화, 대규모의 신성한 의례의 신화이지요. 인류는 의례를 통하여 자기네끼리, 혹은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데, 큰 신화는 바로 이 의례를 설명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은유로 알고 해석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P113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P113

내가 시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는 행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접하면 우리 자신이 우주적인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P114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가령 우리의 신화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종교에는 윤리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와 화해, 정당함과 부당함을 정해놓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쪽으로 사람들을 모는 경향이 있습니다.

 

P114

라마크리슈나는 늘 죄만 생각하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어린 시절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토요일마다 신부님께 고해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토요일만 되면 한 주일 동안 짓지 않을 수 없었던 시시콜콜한 죄를 모두 생각하게 되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 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 이럴 걸 그랬다 싶군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P116

모든 종교에는 일장일단이 있지요. 즉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일 수도 있고 저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은유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은유라는 것을 오해하여 사실로 해석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됩니다.

 

P117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P117

셰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의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바로 이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P118

재림과 대응하는 기독교의 메타포는 정죄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벗지 못한 채로 죽어 지복직관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즉 약점이 말끔히 씻기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약점이라는 것이 곧 죄악입니다. 죄악은 의식을 한정시키고, 의식으로 하여금 온당하지 못한 조건에 얽매이게 하는 약점인 것입니다.

 

P119

그것은 우리가 우리는 이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관념에는 우리의 존재 및 우리의 깨달음과 의식의 잠재력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우리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P120

창조적인 글을 써 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P123

상징의 마당은 백성 무리의 경험을 그 바탕으로 합니다. 특정한 사회, 특정한 시공을 함께하는 무리는 같은 상징의 마당을 공유하지요. 신화는 문화와 시간, 장소와 정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일 상징과 은유가 예술을 통해 되살아나지 못한다면, 삶은 신화에서 떨어져나가 버립니다.

 

P123

가시적인 측면의 배후에 있는 실제성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

 

P124

신비 체험을 한 사람은 상징적인 드러냄이 말짱 헛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상징이라는 것은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경험하지 못한 것을 두고,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눈을 본 적조차 없는 열대 지방 사람들에게 스키의 재미를 아무리 설명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메시지, 메시지에 이르는 단서를 간취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어느 누가 진리를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P126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 (이것은 사물이 아닙니다.) 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P133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P133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P134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나는 누가 이런 식으로 되기를 의도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제임스 조이스의 한마디가 기억납니다. 그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P134

단언은 어려워요. 우리는 늘 조건을 붙여가면서 단언하지요. 나는, 산타클로스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하던 것과 똑 같은 조건을 붙이면서 단언하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단언하는 것, 그것도 실은 어려운 거에요. 그래서 의례가 있는 겁니다.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은밀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행위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P137

키르티무카 (배가 고프기에 자기 자신을 먹고 얼굴만 남은 아귀)– 영광의 얼굴. 시바 신전이나 불교 사원에 가보면 시바나 부처의 대좌에서 이 가면 같은 것, 즉 영광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시바 신은 이 영광의 얼굴을 향하여 누구든 너를 예배하지 않는 자는 나에게 올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삶의 기적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P138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직관에서 끊임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P141

고대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는 수단입니다.

 

P146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은 맹수와 마찬가지입니다. 신화를 보면, 사냥하는 맹수와 사냥감이 되는 짐승이 어울려 의미심장한 역할을 연출해냅니다. 이 양자는 삶의 두 측면을 암시하지요. 즉 공격적이고 죽이고 정보하고 창조하는 삶의 측면과,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삶의 측면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P148

신화가 그 죄의식을 닦아줍니다. 그 짐승을 죽인 것은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었거든요. 자연의 일을 대신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P155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 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랍니다.

 

P157

암벽화를 볼 때마다 예술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하지요. 어느 단계까지가 우리의 미학이라고 부르는 예술가의 의도이고, 어느 단계까지가 아름다움을 간직한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지, 어느 단계까지가 그들이 습득한 바를 드러내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겁니다.

 

P166

의례를 소중하게 재현시킴으로써 그 가르침이 살아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례 중 대부분은 죽고 말았어요. 원시 문화, 혹은 자연 문화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들이 민담이나 신화 같은 것을 환경에 따라 늘 변화시키는 데 놀라고는 해요. 사람들은 식물을 주식으로 경장하던 곳에서 초원으로 나왔습니다. 기마인디언 시절에 대초원에 살던 인디언들의 대부분은 원래 미시시피 문화권에 속했습니다. 그러니까 미시시피 연안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스페인 사람들에게서 말을 손에 넣게 됩니다. 말이 있으니까 광대한 초원을 지날 수 있게 되고, 대규모 들소 사냥도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바로 이즈음부터 신화는 농경 신화에서 들소 신화로 바뀝니다. 다코타 인디언, 포니 인디언, 키오와 인디언의 신화를 보면 초기 농경 신화의 구조를 읽을 수 있지요.

 

P167

전통 문화는 엘리트의 경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의 귀는 우주의 노래에 열려 있어요. 이들이 민중에게 이야기하면 민주에게서 반응이 생기는데, 이 작용과 반작용이 상호 작용하는 겁니다. 민중의 문화를 빚겠다는 최초의 충동은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P173

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내가 본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성스럽게 바라본 세계의 모습니다.”

 

P174

악시스 문디는 중심점, 모든 사물의 회전 중심인 극점을 말합니다.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이 함께 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어야 말로 신화 체험인 것입니다.

 

P175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P178

큰 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들어가면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고 한 사람이 키케로였지요. 아마? 성림은 도처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자주 숲을 드나들었는데, 그때 나는 와 살아도 많이 살았겠고 알아도 많이 알겠다는 생각에서 숭배하는 느낌이 들어 나무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창조의 실재에 대한 느낌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P179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P180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P183

하지만 모든 땅이 다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땅에서 삶의 에너지의 상징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의 전통은 그랬어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 땅을 성별했던 것입니다.

 

P187

모든 궁극적인 영적 암시는 침묵에 담겨져 있지요. 이 침묵은 소리 너머에 있어요. 육이 된 말씀은 최초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 너머에 있는 것이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 불가지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침묵, 혹은 공, 혹은 초월적인 절대자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P188

자연 위에서, 자연에 군림하는 것으로서의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관념은 정말 몹쓸 것입니다. 중세에, 이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린 것이 바로 이러한 관념입니다.

 

P189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P189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우도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됩니다.

 

P192

단수로서의 우림의 신도 아니지요. 우림에는 복수로서의 신들이 있었어요. 사막으로 나오면 하늘도 하나요, 세상도 하납니다. 그러니 신이 하나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정글에는 지평선은커녕 10야드 앞을 보기도 어렵습니다. 유일신 관념이 생길 리 없지요.

 

P195

숲과 농경 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여기에서는, 개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는 이 이미지를 이용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하고 말합니다. 이 포도나무 이미지는 동물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농경 문화는 먹이가 될 식물을 끊임없이 추켜세웁니다.

 

P201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P204

초월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육으로 죽고 영으로는 다시 나야 하는 겁니다.

 

P209

죽음의 신이자 생성의 신이기도 한 이런 신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발견해간다는 것이에요. 하이티의 부두교 전승에 따르면 죽음의 신 케테는 섹스의 신이기도 해요.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는 사자의 신이자 사자의 심판자인 동시에 생명을 생성시키는 신이기도 해요. 이것은,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P211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P213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 없이 미래를 맞을 수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현재는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 상실, 죽음, 탄생 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가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삶의 신비를 상징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P213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P216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낳으신 분이자, 그 살로 우리를 먹이신 분입니다. 우리 어머니의 몸이 곧 우리의 양식인 것이지요.

 

P218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이 연민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성배 전설에 나오는, 상처 입은 성배왕에 대한 사람들의 연민이 바로 이러한 변모를 드러냅니다. 바로 여기에서 아벨라르적 관념이 태동합니다. 아벨라르는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지요. 즉 인자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연민 쪽으로 열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추잡한 관심을, 고통을 나누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인간만이 지닌 가치를 세계 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함이다.

 

P222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P223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P226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P227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P227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22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P233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P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P243

과학기술상으로 약진을 이루는 일이든, 이웃의 도움 없이 혼자서 꾸려나가야 하는 삶의 문제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런 모험을 할 때는 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위험은 우리가 너무 열광한 나머지 과학기술적인 측면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면 언제든지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지요. 이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추락합니다. ‘위험한 길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디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P248

많은 영웅이 목숨을 내어놓지요. 그러나 신화는, 내어놓은 목숨에서 새 생명이 비롯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영웅의 목숨이 아니라 새 생명, 새로운 존재, 혹은 육화의 길일 겁니다.

 

P255

인간의 내면 탐색에 관한 신화로 되돌아가, 깨달음의 단계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어떤 시련을 경험하게 되는지, 어른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읽어보세요. 이야기는, 우리 곁에 없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있어요. 종교에 있어요.

 

P259

신화는 시예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종교는 시를 산문으로 바꾸지요. 하느님은 글자 그대로 저기에 있다. 이거야말로 글자 그대로 하느님 말씀이다. 저 위에 계신 하느님께 가까워지려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식이지요.

 

P263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화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P263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이 두 사람은 기초적인 신화 테마를, 현대 젊은이들의 경험하는 개인적인 문제, 어려움, 깨달음, 관심의 해석에다 응용하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소설가의 작품에서 신화 모티프를 선택해서 길잡이로 삼는 것도 좋겠지요.

 

P266

벤 케노피는, “포스란, 살아있는 만물이 지어내는 에너지 장()을 말한다. 포스는 우리를 감싸고 있고, 포스는 우리를 관류한다. 이 우주를 하나로 묶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포스이다

 

P267

낯선 사람은 주인공에게 물리적인 것만 주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의지와 심리적인 중심 같은 것까지 가르치지요. 이 이미지의 참여는 주인공의 관념 체계를 훨씬 넘는 데까지 미칩니다. 즉 비로소, 거기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주인공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P270

우리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요. 사고를 하기는 하되 가게를 운영하는 것처럼 사고를 해요. 하지만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P271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자신 있게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P272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그대는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P272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 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P273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라도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자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부서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P275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선생님 소리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P276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울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 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P277

서구인들은 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P277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구상하게 하고 그렇게 구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해주지요. 그러니까 학생은 자기 나름의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니까 그 길은,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향한 잠재력, 다른 사람은 체험해보지 못한 것,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P278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P278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서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P286

사람들 중에는 대기만성형이 있어서 아주 늦게야 빛을 보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P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P296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P296

부처는 보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獸性,짐승의 성질)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자비)’라는 말은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P297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또한 그만큼 큽니다.

 

P299

정점에 이르러 있는 운동 선수는 내부에 정점을 하나 가지고 있어요. 그의 움직임은 바로 이 정점에서 생겨납니다. 움직임의 장에서 뛰고 있는 하, 운동 선수는 제대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어요. 내 아내는 춤꾼인데요, 내가 물어보니까 춤의 세계에도 그런 게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 안에 정점이 있다는 건 거의 확인이 된 셈입니다.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P301

진정한 예술가는, 조이스의 이른바 만물의 광휘를 그 자체가 가진 진리의 드런냄으로 인식하고 해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P301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 사람, 보통 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P302

내가 추천하고 싶은 두 방법이 종교와 예술을 통해 이르는 방법입니다. 삼엄한 철학으로는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학문이라는 것은 개념이 정교하게 얽힌 숲과 같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타인에게 자비의 문을 열고 온 가슴으로 사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요.

 

P303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P307

어머니는여기에 있으니까요.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돌보고, 아버지를 찾으러 떠날 나이가 될 때까지 아들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선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P316

오늘날의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전 인류 사회를 향하여 그런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P318

아 놀라워라, , 놀라워라, , 놀라워라! 나는 먹거리이다. 나는 먹거리이다. 나는 먹거리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리가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생명의 흐름이 끊겨버립니다. 이 흐름을 타는 것은 매우 신비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먹거리가 된 동물에게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할 거에요

 

P320

우리 가슴 가까이 있는 중심을 깨닫고 자비를 실천할 때, 곧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 바로 이 중심에서 인간성이 비롯됩니다. 종교적인 명상도 바로 이 중심에서 이루어집니다.

 

P320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보았던가요? 우리가 언제 동물의 근성을 죽이고 자비로운 인간으로 화신해본 적이 있던가요?

 

P328

우리 삶과 우리 생각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즉 과거의 죽음과 미래를 향한 부활, 곧 수성의 죽음과 영혼으로서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죽음과 재생의 상징을 보면 이 점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지요.

 

P334

이 사회에서 어떤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는 우리의 기대는 우리 인간의 정신에 어떤 변화가 와야, 이로써 사회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사회, 그 사회의 어떤 무리와 동일시하는가?”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속한 특정 무리와만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 하는 질문입니다.

 

P337

우리는 이런 데서 살고 있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사람은,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용한 존재인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야야 합니다.

 

P341

아시겠지만 에로스의 체험은 일종의 사로잡히기에요.

 

P343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그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할 수밖에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획일적인 체계는 기계적인 체계입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다른 기계와 똑 같은 기능밖에는 발휘하지 모하지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P344

리비도는 삶의 충동입니다. 가슴에서 나온 것이지요.

 

P345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P348

저와 파울로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기사 랜설럿과 귀네비어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두 주인공이 첫 입맞춤을 나누는 대목을 읽다 말고 저와 파울로는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러고 나서는 그날 그 책을 한 줄도 더 읽지 못했습니다.”

 

P349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P350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

 

P350

그럼요. 그게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P354

오리려 그들은 사랑의 경험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인간의 정제하는 힘으로, 인간을 더 높은 존재로 승화시키는 힘이라고 대놓고 찬양했다. 그들은 그 힘이, 사랑을 통하여, 개인의 고뇌와 기쁨을 통하여 마음을 인간 존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가락으로 여는 것이라고 믿었다.

 

P357

황무지의 거죽은 실제성을 표상하지 못합니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들어봤을 겁니다.

 

P358

자연이 성배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P369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겁니다.

 

P368

미래는 우리에게, 미래의 모습은 이럴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준다는 거지요. 시간의 신비, 시간의 초월성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겁니다. 어쨌든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굉장히 심오한 신비와 만나게 되지요.

 

P376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고방식은 원시적인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신들을 결국 비인격적인 에너지의,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이자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따라서 이들에게 신들은 에너지의 본원이 아닌 겁니다. 신은 그러니까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인 것이지요.

 

P379

아시다시피 우리의 영혼은 서로 다른 중심, 혹은 서로 다른 원형적인 경험의 단계를 지나 상승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아와 탐욕 같은 기본적인 동물적 경험단계에서 시작하여 성욕의 단계를 지나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이행합니다. 이런 단계가 바로 경험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부여하는 단계인 겁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타자가 사실을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 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이 처녀 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략,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 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P383

원수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뽑아내려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럴 수 있으면 원수가 사는 삶의 방법을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P386

아버지의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

 

P387

남의 삶에서의 삶을 인식하는 것, ‘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 하나의 삶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는 질문을 자주 던지지요. 사람의 현상을 놓고 자꾸만 그러한 현상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 하느님이 만드신 거야”, 이러고 말겠지요.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이 삶의 본원입니다.

 

P391

새 교황이 취임하면 어부의 반지를 낍니다. 여기에도 원의 상징이 등장합니다.

그 반지는 제자를 부르는 예수를 상징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제자는 어부 출신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는 어부들에게 내가 너희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고 말하지요. 사실 이것은 기독교 이전에 있던 모티프입니다. 오르페우스 역시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불렀지요. 그의 삶은, 물 속에서는 물고기 같았고, 솟아오르면 및 같았지요. 물고기가 환영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있던 관념 체계입니다. 물고기와 같은 본성은, 인간의 본성 중에서도 가장 조악한 수성에 속하지요. 종교라는 낚시줄을 바로 그런 수성에서 인간을 건져 올리는 겁니다.

 

P392

우리는 이 만달라를 만들어 우리에게 적용시켜볼 수도 있어요. 우선 원을 그리고, 우리 삶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충동 체계와 가치 체계를 명상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이 두 체계의 자리를 정하고 다음에는 자기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검토해봅니다. 만달라를 그려본다는 것은 우리 삶의 흐트러진 여러 측면을 하 자리에 모으는 훈련 방법이 될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중심을 찾아 여러 측면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결국 우리 자신의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 관계를 맺게 하는 작업입니다.

 

P394

우리 삶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보세요.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보세요. 이 한 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괴테는 신성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P395

중요한 것은 이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P398

절정 경험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느 한 순간에 하는 경험입니다. 존재의 조화와 나 자신의 관계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P399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조이스의 말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액자에 넣어 두게 하고,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이 작품임을 느끼게 하고, 다음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 다음에는 부분과 전체, 그 다음에는 전체와 각 부분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작품이 지녀야 하는 미학적 요인(관계의 조화 정연한 리듬)입니다.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입니다. 이순간을 종교 술어로 설명하자면,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지요.

 

P403

산스크리트어로는 이것을 비베카라고 합니다. 분별이라는 뜻이지요. 머리 위로 불칼을 높이 치켜든 부처 이미지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 이게 어디에 쓰이는 칼일까요? 이게 바로 분별의 칼입니다.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것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째깍, 째깍, 째깍 흐르는 시간이 영원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그러 시간의 장에 삽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의 장에 비치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영원의 원리입니다.

 

P405

흔히들 천국과 지옥을 영원하다고 하지요. 천국은 끝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은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 가고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불교에는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이 세상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 이 개념은, 시간이 있는 데엔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 모습입니다.

 

P409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때의 깨달음을 나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이 깨달음은, 이 세상에서의 영생불사 체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P410

되기라는 것은 단편적입니다만 존재하기는 전체적인 겁니다.

 

P412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 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P413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3. 내가 저자라면

 

신화의 힘은 책 자체가 대담형식으로 되어 있는 interview 형식의 책이다. 질문이 명확하지 않으면 대답도 명확하지 않고 앞뒤 문맥에 맞지 않으면 대화가 연결이 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본 책은 8개의 단원으로 나누어 조셉 켐벨과 빌 모이어스의 대담을 전하고 있다. 본 책을 읽을 때 어려운 점은 단연 익숙하지 않은 여러 신학적 개념들이다. 이는 개론서가 아니라 대담형식이라 여러 기초 지식을 간략하게 소개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고 초심자인 나로서는 먼저 관련 서적을 우선 읽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이 책 하나만으로 전체 신화학에 대한 개괄을 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무엇이 신화학에서 다루어지며 왜 그 부분이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잘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책은 신화학으로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전체를 조망하는 안내서로서 하나씩 알아가면서 던지게 되는 질문을 모이어스가 대신하여 주고 그에 대한 답을 조셉 켐벨이 하여주기 때문에 적당한 속도로 음미하며 읽어 나간다면 전체적인 내용을 잘 구성하여 습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몇 가지 느낀점은 깊은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나로서 늘 의문이었던 세계 종교가 왜 없는가? 왜 특정 민족의 종교가 있고 이들간에 반목하는가? 앞으로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많은 질문이 있는데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일부 있어 나를 흥분 시켰다. 말로 할 수 없는 우리의 존재가 어찌 놀라움이 아니겠는가? 나는 모두가 부처이고 모두가 하느님이라는 생각에 매우 동감한다. 하지만 그 것은 가능성이지 실제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각성과 사랑의 실천 등 삶이 달라져야 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마음은 그 것을 향해 있다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바라는 바는 조셉 켐벨이 이루어 놓은 학문적인 성취와 저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신화에서 다시 종교를 발견하고 종교를 발견한 자리에서 이 세계의 주인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 더 좋은 세상에 이바지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 또한, 이와 같이 되길 바라면서 하루 하루를 정진해 나가겠다.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책의 아쉬운 점은 목차에서 던져주는 용어들에 대한 친숙도가 낮다 보니 몰입도가 떨어지는 부분과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다. 용어이니 바꿀 수는 없으리라 생각이 된다 하지만 책 서두에 약간의 설명 page들을 넣어 이해를 도우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대화에서 질문이 짧고 자주 있는 것이 이야기의 흐름을 잡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어느 부분에서는 단절이 되는 면도 있었다.

 

내가 저자라면 본 책을 영웅의 여정으로 역어보고 싶다. 신화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신화를 만난다. 신화를 만난 자는 각성을 통해 영웅의 여정을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귀환하여 영웅이 된다. 이를 현대적인 한 개인의 시각에서 풀어본다면 하루, 한달, 일년, 일생을 조망할 수 있는 새로운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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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23:47:31 *.160.136.54

신화의 힘은 크게는 두가지 첵터로 이루어 진다고 봅니다.

 

신화라는 큰 형상과 그 힘을 이루는 내적인 도도한 줄기가 그것이지요.

종교와 문화라는 타이틀 밑바닥에는, 인간의 내적인 호흡과 기질, 속성 등이 담겨져 있습니다.

결국 신화를 이루는 근간은 인간이라는 토뎀의 요소 입니다.

 

인간. 그 화두를 사부님은 잡고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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