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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4일 10시 25분 등록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대담, 이윤기 옮김, 이끌리오, 2003.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Joseph John Campb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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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1904.3.26.. 미국 뉴욕 / 1987.10.30. 하와이 호놀루루(83)

 

활동분야

미국 신화학자, 종교학자, 작가, 교수, 20세기 최고의 신화해설자

 

발 자 취

1910.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관람.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에 관심

 

 

1913~1918. 인디언 신화에 관한 책 섭렵. 14세 병으로 집안에서 자연과학 공부

 

 

1919. 뉴로셀 집 화재로 할머니 사망. 수집한 인디언 책과 유물 불에 탐

 

 

1921. 다트머스 칼리지에서 생물학수학 공부. 2학년, 콜럼비아 대 영문과로 전입

 

 

1924~1926. 육상팀 주자로 경주에서 기록 세움. 재즈 밴드에서 색소폰 연주.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 길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동양철학의 세계에 이끌림

 

 

1926. 콜럼비아대 중세문학 공부. 성배에 관한 석사 논문가슴 아픈 일격

 

 

1927~1928. 컬럼비아 대 장학금 제공으로 파리 및 뮌헨 대학 수학.

 

 

1929. 귀국 후 인도철학미술 공부를 하려 하나 박사학위 취득 못하고 떠남

 

 

1929~1934. 우드스탁에 칩거하며 독서, 사색, 습작에 몰두

 

 

1931~1932. 친구로부터 존 스타인벡 부부, 생물학자 에드 리켓과 만나 교류

 

 

1933. 켄터베리 예비학교 취직. 연말 퇴직하여 우드스탁으로 돌아와 독서 및 집필

 

 

1934~1972. 미국 여대 새러 로렌스 칼리지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여 재직

조셉 캠벨

 

 

1938. 결혼(제자 현대무용가 진 애드먼)

……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

 

 

1941. 하인리히 침머와 만나 교류. 침머 사망(1943) 후 그의 유작 편집 출판함

 

 

1954. 안식년에 인도, 스리랑카, 타이, 미얀마, 홍콩, 일본 등 여행

 

저 서

1941. 그 두 사람이 아버지에게 온 곳:나바호족의 전쟁의례 주석본

 

 

1942. 스미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우파니샤트 번역 및 편집

 

1944. 피네간의 경야를 여는 곁쇠(헨리 모튼 공저.)

 

1949.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957. 편집 회보, 의미없는 상징

 

1959. 원시시대 사냥꾼과 농부의 재생 신화와 의례

 

1959~1968. 신의 가면

-1959 원시신화, 1962 동양신화, 1964 서양신화, 1968 창작신화

 

1969. 야생 수거위의 비행:신화적 차원의 탐험

 

 

1972. 신화와 함께하는 삶

1974. 신화의 이미지

1983~1989. 세계신화의 역사지도

1987. 신화의 힘 PBS반영(캠벨과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조셉 캠벨

 

 말장난에 혹하지 않으려 했는데, 캠벨, 캠벨을 되뇌며 어느새 나는 포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신맛과 향기가 강한 이 포도를 삼키며 캠벨 또한 그의 생에서 신화라는 강한 맛과 향기를 좇았고 살아내었구나 싶어 놀랍고 놀라웠다. ‘신화에 관한한 대표적인 학자인 그의 생애가 신화로 흘러가고 집약되기까지 그가 주장한 영웅의 여정과, 천복을 좇는 삶이 그의 생에 드러나 있었다.

뉴욕에서 태어난 캠벨의 유년 시절은 나쁘지 않았다. 상위 중산층에 가톨릭 가정이었고 아버지는 그를 늘 믿었고 자랑스러워한 듯하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 캠벨은 아버지와 함께 미국자연사박물관을 구경갔다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해 매료된다. 이후 인디언에 관한 신화와 민담들을 섭렵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신화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던 그는 14세 때에는 병으로 집안에 머물며 자연과학을 공부하였고 대학에서도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하였다.

 그의 인디언에 대한 매혹은 어쩌고 이과계 공부를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즈음, 그가 대학 2학년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는 것을 라았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어릴 적 그토록 인디언에 매료되었던 그의 공부의 방향이 다르게 흘러가는 듯 보였으나 그는 그의 천복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학사와 석사 공부를 하는 동안 어릴 적 읽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에 대한 공부를 지속한 것이다. 그리고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및 뮌헨의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섭렵하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배에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게 되면서 힌두교와 인도 신화에도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에 의견에 따르자면 그가 천복을 좇자 자연스레 그에게도 천복의 삶이 맞닥뜨려 지는 것이다.

콜롬비아 대학의 지원으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캠벨은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고자 하나, 대학 측의 반대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1929, 대공황의 시기였고 사회 전체가 경제적 불황으로 침체된 그 때, 캠벨은 우드스톡의 오두막집에 칩거하며 5년 동안을 독서와 사색, 습작에 몰두한다. 물론, 이 시기 많은 이들과 교류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캠벨은 소설가 존 스타인벡을 만났고 해양생물학자 에드워드 플랜더스 로브 리케츠와 교류하였다.

 우드스톡의 시기를 보내게 되는 캠벨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다시 저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야만 할까?”였다. 그가 여행을 하며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힌두교, 융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의 그 느낌은 강렬하였던 모양이다. 그는 대학으로 가서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학위 취득을 위한 필수과목을 모두 이수한 상태였고 논문만 쓰면 끝이었지만 학교는 다른 곳으로 옮겨 공부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는 이까짓 것 개나 줘 버리자라고 생각하며 우드스톡으로 들어갔다고. 그리고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지만 덕분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이 경이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책만 읽었다. 그리고 돈은 없었지만 당시 뉴욕의 큰 서점에서 책을 주문해 있었고 책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한다. 대공황의 시기에는 다 그랬다고 하니, 뭐 특별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서점은 그에게 돈을 재촉하지 않고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캠벨은 일자리를 구하고 나서 책값을 냈다고 한다. 우리나라 IMF 시기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를 한번 생각해본다. 자연스레 부정적인 답이 뒤따른다. , 캠벨은 배짱도 운도 좋았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드스톡의 칩거는 세라 로런스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끝이 났다. 그는 1934년 이 학교에서 문학 담당 교수로 임용된 후 38년 동안을 재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학교에서 교직 제안이 들어왔을 때에도 일자리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일자리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의 독서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그러나 그 학교에 가서 예쁜 여학생들이 와글거리는 것을 보자, 이것도 나쁘진 않겠다라고 생각했다 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 학교에서 제자였던 현대 무용가 진 해드먼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캠벨이 그의 강연과 저서에서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듯 그는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무언가 들떠 있는 느낌, 이끌림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난 후 캠벨이 졸업선물로 그녀에게 슈펭클러의 <서구의 몰락>을 전하며 그의 마음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캠벨의 아내 진 해드먼은 그의 사후에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셉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다.

 캠벨에 대해 그가 신화에 관한 책을 썼고 대공황의 시기에 실업자로서 우드스톡에 들어가 칩거하며 살던 시절만을 알았을 땐, 나는 그의 성정이 조금은 우울적 기질이 다분한 조용한 학자로서니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오히려 미국식 사고방식이 다분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미국식 사고방식이라 말하면서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약간은 난감하지만 쿨함과 유쾌함이 조합된 코믹적 느낌이 조금씩 들고 있다. 게다가 그는 색소폰을 연주했고 육상 선수로 달리기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샌님같은 학자 스타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더 많이 알게 되면 달라질까. 어쨌든 경제적인 좌절감으로 인한 칩거가 아니라 오로지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오는 칩거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의지대로 신념대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참고 자료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신화의 이미지, 살림, 2006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빌 모이어스의 서문

 

p9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隱居)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 북부 캐나다 카리부 에스키모의 샤먼 이그쥬가르쥬크의 말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개념과 체념이 동시에 떠오른다. 아마도 후자의 경우는 적극성을 결여한 느낌이 부가되긴 하겠지만.

p12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求道)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캠벨

그의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p14 “운명은 앞서서 뜻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로마 속담

p15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 아니 살아 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라고 캠벨은 말한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P25~26 모이어스: 왜 하필이면 신화입니까? 왜 신화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까? 도대체 신화가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캠벨 :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모이어스 : 그러니까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는 말씀이군요?

신화라고 하면 우리의 신화보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더 깊숙하게 물들여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신화라는 말에서는 고향의 느낌이 난다. 단순히 소설로, 이야기로 파악하든 아니든, 신화를 읽음으로써 분명 내 정신 작용이 복잡하면서도 상승한다는 느낌은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p26 캠벨 : 소설(위대한 소설)이라는 것은 놀랍도록 교훈적입니다.

당연, 위대한 소설은 그렇다. 소설은 타인의 이야기이며 의도하지 않게도 그러한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히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니 명확한 도덕적인 문구보다도 더욱 더 자연스러운 교훈을 얻게 된다.

P28 캠벨 : 토니오는 작가는 진실에 진실해야 한다고 씁니다. 그런데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가 어떠했습니까?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심지어는 떠나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경우에도 끈질기게 지니게 되는 어떤 곳에 대한 사랑, 고향에 대한 사랑의 이미지요. 사람이 사람들을 처음 발견하는 곳이지요.

작가는 진실해야 한다. 그러나 작가는 본질적으로 거짓을 이야기한다. 이 말은, 실제적 사건만을 그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어남직한 일을 다루는. , 신화가 고향이미지라고 했는데 여기서 고향이란 이미지가 나오다니(이 말을 도용한 것이 아니다!!!!).

P28 캠벨 :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애정과 연민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에게 가지게 되긴 하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늘 경외감과 더불어 어려움을 가지게 되긴 한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다..그 불완전함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듯...그러나 말장난식, 말의 꼬리 물기로서 그 불완전함을 얘기한다면, 존재부터의 증명을 요구하면 논의가 어렵게 될까.

p29 캠벨 :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아직까진..삶은 의미를 찾으며 진전시켜 나간듯했기에 이론을 배제하고 실체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오히려, 빅터 프랭클이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으면서 생을 살아 나갔던 것이 그의 경험과 더불어 와 닿는다. , 이렇게 그의 경험과 더불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경험을 찾고 있구나라는 생각 또한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p30 캠벨 :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신화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읽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책들이 그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외현적인 것을 요구하는 명백한 책들 조차도 내면의 인식과 의식을 득한 후에야 이루어지는 일.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은 내면적인 길을 거쳐 비로소 외면적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닐런지.

p33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중국에서 ()’를 나타내는 이미지를 보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서로 꼬리를 물고 상호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음양(陰陽)의 관계, 남성의 원리와 여성의 원리가 지닌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그러니까. 결혼은 관계이다. 관계는 결혼만이 아니고서도 이룰 수 있는 것. 사회는 결혼에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인류가 이어져가기 위해서는 종족 번식이 있어야 하고, 이 종족 번식은 오늘날이 사회 속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야 비로소 합법적이기에!

P35 모이어스 : 롤로 메이는 오늘날 미국 사회에 범죄가 이토록 많이 일어나는 것은 젊은 남녀에게 위대한 신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위대한 신화가 젊은 남녀로 하여금 세계와의 관계를 알게 하거나, 가시적인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젊은 남녀에게 신화는, 취업을 얼마나 빠르게 하는가에 대한 신화적 우상이 급하기에..

P36 캠벨: 범죄가 많은 또 하나의 까닭은 이 미국에는 에토스(윤리적 겨레 정신)가 없다는 것이지요.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우리의 에토스도 약해져 간다. 윤리적인 면에서만큼은 잘났다고 자부하던 한국적 윤리의식이 소멸되어 간다. 삶이란 결국 편리성으로 진행되어 가기에? 윤리적인 삶이 약해져가는 것이 편리성인가? 경제성으로 귀결되어 가는 삶이기에가 적절하게 느껴지는 듯. 경제성은 윤리성을 죽여 버리기에....

P37 모이어스 : 선생님께서 들려주시는 신화나 옛 이야기가 학생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캠벨 :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삶의 지혜와는 상관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교수들 역시 자기가 가르치는 학문이 삶의 가치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학문(문화인류학, 언어학, 종교학 등을 말합니다)에는 전문화 경향이 뚜렷해 보입니다. 한 방면에서 어엿한 전문가가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한 전문 학자가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알면 이런 경향이 있다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p38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雜學家)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학자들을 이렇게 부르면 큰일납니다만)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p41 캠벨 :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한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게 책임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지요. 사람들은 그 친구를 보고 일어서는 게 아니라, 그 친구가 입고 있는 법복, 그 친구가 맡고 있는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판사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역할로써 판사가 지니게 되는 완전무결함, 즉 그 역할의 원리로 대표되는 완전무결함이지, 저마다 나름대로 생각과 편견을 지닌 판사들의 무리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 자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인격이지요.

         나는 왕이나 여왕하면 우리가 흔히 만나는, 여자나 경주마에나 관심이 있는 참으로 멍청하고 형편없고 진부한 사람들을 상상한답니다. 그러나 왕이나 여왕에 대하여 반응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인격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지닌 신화적인 역할에 따라서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겠지. 현대 사회에서 그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직함...

p43~44 신화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 줍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시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삶의 모습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50년 전에는 온당했던 것이 지금은 온당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어요. 과거에는 미덕이던 것이 오늘날에는 악덕이 되었고요. 과거에는 우리가 악덕이라고 하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필요악이 되어 있는 경우도 수없이 볼 수 있어요. 도덕적인 질서는 지금 이 곳에서 우리가 사는 실제적인 삶의 도덕적 필요성과 발이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은 그렇지 못해요. 구시대의 종교는 다른 연령층, 다른 족속, 다른 가치 체계, 다른 우주에 속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이제는 역사와도 발이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린 세대는 앞 세대에게서 배운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고, 정작 들여다보아야 할 내면은 무시한 채 엉뚱한 내면만 기웃거리고 있어요.

내면을 기웃댈 시간이 없으므로. 우리의 삶과 수준에서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 아니므로. 인생에서의 심한 우울증을 겪을 즈음에서야 생각되는 것이므로. 사회의 변화가 그렇게 이끌었으므로.

p46 캠벨 : 의식을 머리가 지닌 특수한 기능으로 여기는 것은 데카르트식 사고방식의 일부이지요. 데카르트파 사람들은 머리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어떤 방향, 혹은 어떤 목적에 맞게 작용하게 하는 기관이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은 아니지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의식을 하는 주체에게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는, 의식과 에너지()는 어떤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 숲 속에서 많이 지냈습니다만, 숲 속에 살다보면 서로 각기 다른 이런 의식이 상호 관계 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숲 속에는 식물의 의식도 있고 동물의 의식도 있는데, 우리의 의식은 이런 의식들과 상호 작용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담즙은 우리가 먹은 음식에, 우리 의식에 도움이 될 만한 게 들어 있는지 없는지를 압니다. 이 모든 작용이 곧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을 단순한 기계적 술어로 번역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p48 캠벨 :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캠벨에게 신화는 이러하단다. 그럼 각자에게는? 개인은 그들의 삶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줄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신화일수도 아닐 수도 있다. 신화가 아니더라고 은유적으로 통칭하여 신화라고 칭할 수도 있다. 문제는, 신화가 없다는 것, 같은 맥락에서 누구나 신화가 있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본질은 외면한 채.

p60~61 캠벨 : 신화의 뼈대가 되는 모티프는 같아요. 옛날부터 그래왔어요. 우리의 신화학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자기가 사회의 어떤 동아리에 속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요. 모든 신화학은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 자라납니다. 그런 신화학이 밖으로 나오면서 충돌하고, 충돌을 거쳐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혼효(混淆)를 거치면서 더욱 복잡다단한 신화학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구속적인 범주라는 것이 없어요. 오늘날에 유효한 단 하나의 신화학은 지구라고 하는 행성의 신화학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이것은 없어요. 내가 아는 한,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이를 것이야 하는 겁니다. 문제는 만유(萬有)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p61 내가 아는 형제애는 모두 구속적인 사회에 갇혀 있어요.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는 공격성이 밖으로 투사되지요.

        가령, 십계명은 살인하지 마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에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는 한솥밥을 먹을 수 없다는 거지요.

p61 캠벨 : 신화가 무엇이지요? 사전적인 의미를 좇으면, 신들에 관한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면 응당, 신들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이어서 나와야 합니다.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化身)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그러나 개중에는 어떤 특수한 사회만 섬기는 신화와 신들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의 수호 신화(守護神話), 혹은 수호신 같은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신화학에는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유파가 있습니다.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후자의 경우 한 인간은 한 자연인이 아니고 특수한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유럽의 신화학 역사를 보면 이 두 신화학 체계의 상호작용이 눈에 뜁니다. 대개의 경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체계입니다. 대신 자연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것인 경우가 보통이지요.

           그런데 성서적 전승은 사회 지향적 신화학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쫓겨납니다. 19세기 학자들은 신화나 의례를 자연을 통제하려는 기도(企圖)라고 생각했지요. 그거야 마술이지 어디 신화나 종교겠어요?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이 악마로 간주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대신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긴장과 불안이 조성되면서, 삼림을 베어내고 토인을 몰살시키는 등의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이르면 사람은 자연과 헤어집니다.

p71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

열정을 다스리는 것은 이성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 그러나 정치에서의 열정이 탐욕이라는 것엔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p73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이성이 아니지요. 생쥐가 코를 내밀어 밖을 내다보고는, , 여기라면 나가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 이제까지 생각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은 이성이 아닌 역시나 생각이었다. 이성이란 보다 근원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 그저 스침이 아니라.

p74 캠벨 :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신화의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커녕 질문도 미처 다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하고 반문합니다. 성냥을 켜면 불이 입니다. 불이 무엇인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 됩니다.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重婚)의 신화도 있고, 단혼(單婚)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혼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p75 캠벨 : 도덕률을 말하는 겁니다. 좋은 사회라면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우리 삶의 법 같은 것 말이지요. 선사 시대에 믿어지던 야훼의 책을 보세요. 페이지, 페이지, 페이지마다 무엇을 입어라, 어떻게 처신하라는 잔소리가 잔뜩 실려 있지요.

         하지만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그러나, 이러한 교육적 기능은 신화 아닌 다른 것에서도 가능하다. 왜 신화이어야 하는가?

p78 캠벨 : 시애틀 추장은 구석기 시대 도덕률의 마지막 대변자 중 한 사람이었지요. 1852년을 전후해서 미합중국 정부가 나날이 늘어나는 미국 국민을 이주시키기 위해 그 부족의 땅을 팔 것을 요구했을 때 시애틀 추장은 명문(名文)의 해답을 보냈지요. 이 서한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도덕의 문제, 진짜 도덕의 문제를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 인용해보지요.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 하나,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 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그대들은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 백성의 삶에 묻어 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린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줍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주며 우리 자식들을 먹여줍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 강 또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들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여겨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이나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르쳐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땅을 낳은 것은 이 땅의 모든 자식을 낳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육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의 냄새에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wires)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수풀은 어디에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는 그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고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나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듯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인디언, 원주민..그렇게 어떠한 땅에서 자연과 공생하며 살던 이들이 희생양으로 스러져간 일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넘어선 분노가 스민다. 나약함에 대한 설움, 비합리성에 대한 분노, 이기주의에 대한 거부.

 

 

2. 내면으로의 여행

 

p85 우리와,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사상(事象)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 방면의 학문에서는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 파스키난스(Mysterium tremendum et ffascinas)’라고 합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시켜줄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가지고 있던 관념이 깨지는 순간이란 무서울 수밖에. 그러나 그 관념이 너무 확고한 경우 또한 마찬가지. 더구나 그것이 불필요하거나 또한 당연히 바뀌어야 함에도 고수되는 경우라면.

p86 캠벨 :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원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바람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p87 캠벨 :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넘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시험이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반영하게 될 경우에 이것은 개인적인 단계의 꿈이 아닙니다. 이런 꿈을 원형적(原型的)인 꿈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개인적인 것 같은데 사실은 신화적인 테마가 나타나는 꿈이 있습니다. 이 두 단계(개인적인 단계와, 개인적인 문제가 하나의 본보기가 되면서 일반적인 문제로 나타나는 단계)는 이 세계의 모든 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죽음과 직면하는 문제를 안고 있지 않나요? 이와 관련된 꿈은 표준이 되는 신비라고 할 수 있어요.

p88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꿈의 기억을 떠올려 메모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꿈의 작은 단편 중에서 하나, 두어 개의 이미지나 관념을 선택하고 이를 연관시켜보면서, 이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체험(우리 삶에서 의미심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다가 다른 꿈을 꾸면 우리의 해석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되지요.

p89 모이어스 : 신화는 왜 꿈과 다릅니까?

캠벨 :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꿈은 개인적인 것이고 신화는 사회적인 것이다!

p91 캠벨 : 인도네시아에는 신화적인 시대와 그 시대의 종말에 관한 아주 중요한 신화가 있어요. 이 신화에 따르면, 태초를 살던 조상들에게는 성()의 구분이 없었어요. 탄생도 없었고 죽음도 없었지요. 그러던 차에 대규모의 춤 모임이 있었는데, 이 춤 모임에서 참가자 하나가 무리의 발에 밟혀 갈가리 찢긴 채로 죽었어요. 사람들은 이 주검을 땅에 묻었지요. 그 사람이 죽은 바로 그 순간에 성이 갈렸어요.

         성이 갈려 새 사람이 탄생해야 죽은 사람 몫이 찰 것 아니에요? 그 사람이 죽어서 땅에 묻힌 자리에서 나무가 한 그루 솟았는데, 여기에 먹을 것이 달렸대요. 이 때부터 삶과 죽음이 갈리고, 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먹는 일이 생깁니다. 태초의 초시간적인(超時間的) 시간은, 고의적인 살인 혹은 공희제(供犧祭)를 통한 공동의 범죄 행위로 끝나버리는 것이지요.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p96 모이어스 : 이 두 이야기에서 모두 주인공은 인류 타락의 책임을 한 곳에 전가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캠벨 : 그런데 그게 뱀이란 말입니다. 이 두 이야기에서 뱀은, 과거를 벗어던지고 계속해서 새 삶을 사는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캠벨 :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기 위해서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이 양자는 대응하는 상징입니다.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이지요. 삶 역시 한 세대에서 이울면서 다음 세대로 넘겨져 거듭납니다.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합니다. 끊임없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삶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문득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뱀 역시 삶에 대한 놀라움과 섬뜩함 같은 이미지를 지닙니다.

더구나 뱀은 주로 먹는 것과 관계되는 삶의 아주 원초적인 기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을 먹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어요. 훌륭한 음식을 차려놓고 그 앞에 앉아 있으면 그런 생각이 별로 안 들기는 하지요.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음식이라도 그 재료는 조금 전까지도 살아 있던 것들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노라면 새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쪼는 것을 보게 되지요? 새는 무엇인가를 그렇게 끊임없이 잡아먹고 있어요.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보세요. 소 역시 무엇을 먹고 있습니다. 뱀은 자양이 될 만한 육식을 하기 위해 늘 분주합니다. 뱀이 무엇을 잡아먹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원형질적인 삶의 모습에 원초적인 의미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동물을 놓고 시비할 것은 없지요.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뱀에 대한 금기와 두려움. 성경에서부터 그렇게 상징화시켰기에 뱀은 늘 징그럽고 악의적인 동물로 여겨진다. 다리가 없이 맨 몸으로 평생을 땅을 기며 살아야 하는 숙명. 그것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인 죄...뱀은 이 이미지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나 강렬하다.

~97 대부분의 문화에서 뱀은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인도에서는 가장 강한 독을 지닌 코브라조차 신성한 동물로 여겨지지요. 신화에 나오는 사왕(蛇王)’은 부처님 다음 자리를 차지해요. 뱀은 시간의 장(), 죽음의 장이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장에서 기능하는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뱀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전승에도 등장하지요. 뱀은 친화력이라고 하는 대단히 중요한 힘을 지닌 것으로 믿어집니다. 가령 남서부 푸에블로 지역에 사는 호피족의 뱀춤에서 춤추는 인디언은 뱀을 입에 댐으로써 친구로 삼고는 산에다 놓아줍니다. 그러니까 뱀은, 산의 메시지를 가지고 인간에게 왔듯이 이번에는 인간의 메시지를 가지고 산으로 갑니다. 결국 인간과 자연의 상호 작용이 인간과 뱀의 관계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지요. 뱀이 기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물처럼 흐르는 것 같지요. 혀를 보세요. 불꽃같지 않아요? 결국 우리는 물과 불이라고 하는 한 짝의 대극(對極)을 뱀에게서 발견합니다.

p97~97 성서적 전승에 나오는 인류의 타락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자연은 썩은 것, 섹스도 썩은 것, 섹스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여자는 더욱 썩은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아담과 이브에게 왜 금지되어야 했던가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인류는 삶의 조건에 동참하지 못한 채 아직도 에덴 동산에서 멍청한 아이처럼 살고 있을 테지요.

결국 여자가 이 세상에다 삶을 일군 겁니다. 이브는 이 속세의 어머니입니다.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살던 꿈 같은 낙원은 시간도 없고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만 없습니까? 삶도 없어요. 죽어서 부활하고 허물을 벗음으로써 그 삶을 새롭게 하는 뱀은 시간과 영원히 만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세계수(世界樹)입니다. 결국 뱀은 에덴 동산의 실질적인 신이었던 겁니다. 시원한 석양의 바람을 쏘이다가 그곳에 들른 야훼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아요. 동산은 뱀의 본거지였으니까요. 물론 옛날 옛날 한 옛날의 이야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원 전 35백 년경에 만들어진 수메르의 봉인이 있어요. 이 봉인에는 뱀과 나무와 여신과 남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신은 외부에서 들어온 나그네인 남자에게 생명의 과실을 주고 있지요. 태곳적의 여신 신화가 여기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다. 성경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선악과의 존재. 인간을 시험하는, 시험에 들게 하는 절대자의 존재. 그로부터 파생된 여성에 대한 세상의 억압과 차별에 대한 안타까움.

p100 모이어스 : 아담과 이브의 신화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대극의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대체 대극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캠벨 : 대극이라는 것은 죄악에서 비롯되지요. 다른 말로 하면, 죄악으로 인하여 인류는 낙원의 동산이라는 신화적인 꿈의 시간대에서 쫓겨납니다. 초시간대(超時間帶)인 이 시간대는 시간이 없는 곳, 남성과 여성이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곳입니다. 이 낙원에서 남성과 여성은 그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도 실제로는 같습니다. 하느님은 석양의 서늘한 바람을 쏘이려고 이 남성과 여성이 잇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남성과 여성이 사과를 먹습니다. 이 사과가 바로 대극에 관한 인식입니다. 이 사과를 먹음으로써 둘은 대극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대극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보니,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황급히 부끄러운 곳을 가립니다. 보세요. 그전에는 서로가 대극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대극은 남녀뿐이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은 대극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또 하나의 대극은 인간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과 악마는 제3의 대극입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대극은 남성여성의 대극, 신인(神人)이라는 대극입니다. 이 대극을 인식하게 되자 선악의 분별이 생갑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이브는 단지 이원성(二元性)을 인식했다는 죄로, 초시간적인 융합의 낙원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나와 살자면 대극이라는 문맥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101 힌두 이미지에, 겉에는 모신(母神)을 상징하는 삼각형이 있고 안에는 점이 하나 들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점은 시간의 장으로 들어가는 초월적인 것의 에너지를 타나냅니다. 그리고 이 삼각형에서 사방으로 쌍쌍의 삼각형들이 뻗어나갑니다. 즉 하나에서 둘이 생겨나는 겁니다. 이것은 의식이, 동일성만 인식하는 의식에서 이원성에 참여하는 의식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의식이 이렇게 옮겨가야 시간의 장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p102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적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이 신을 우리의 영원불멸하는 측면과 동일시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그 신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동양의 대종교(大倧敎)에서 이러한 관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싶어하지요.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관념은 힘으로 자라 생각을 지배합니다.

p105 에덴 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 나위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랍니다. 바로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무지와 순진이 동일시되는 경우는 성경을 비롯하여 너무 많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무지와 순진은 한편으로는 타인에게 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p105 모이어스 : 만일 에덴 동산이라는 관념 속에 순진무구라는 관념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공포 때문에 동산이 뒤흔들리고 나뉘고 부패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캠벨 : 바로 그겁니다. 신에 과한 참 놀라운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날 자기라고 하는 신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두려움을 느꼈더랍니다.

캠벨 : 영원이라는 것을 인식했으니까요. 그래서 이 자기왜 내가 두려워하느냐? 존재하는 것은 나뿐인데?”하고 생각했더랍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번에는 외로워지면서, 다른 하나가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일더라지요. 욕망을 느낀 것이지요. 그래서 이 자기가 부풀어, 둘로 나뉘어 각각 남성과 여성이 되어서는 이 세상을 낳았더랍니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가 최초로 체험하는 것이랍니다.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분석심리학자 스타니슬라프 그로프는 수년 동안 LSD를 가지고 환자를 치료해 온 사람입니다. 그는 이 치료 과정에서 환자 중 일부가 환각 상태에서 탄생의 과정을 경험한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그런데 이 재경험(再經驗)의 첫 단계는 자궁 안에 태아 상태로 있을 때의 경험이래요. ‘라든지, 존재라든지 하는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지요.

~106 경험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으로 태어나기 직전에 자궁의 율동이 시작되는데 이때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낀답니다. 그러니까 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공포인 셈입니다. 이어서 태어나기 위한 무시무시한 단계, 산도(産道)라는 아주 험한 길을 지나면, 드디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지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자기, “내가 있다고 진술한 직후에 공포를 느낀다는 신화가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으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일단 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요. 한 쌍의 대극이 비롯됨입니다.

p106 <구약성서>를 보아도 하느님은 하나의 금제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느님은 인간에게 삶을 살라고 금단의 열매를 창조하신 건가요.

p106 모이어스 :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유사성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p107 캠벨 :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한 가지 설명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박사의 이른바 원형(原型)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캠벨 : ‘바탕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 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원형이라는 술어가 근본적인 관념이라는 술어보다 나은 것 같군요. 후자는 어쩐지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낸 관념 같아서 말이지요.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한 까닭은 이 원형이라는 것이 하의식(下意識)에서 위로 솟아오르기 때문일 겁니다.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과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정신적 상흔傷痕) 경험의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서 생리적인 것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생리적 원리는 생물학적 원리에 견주면 2차적인 것입니다.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이 원형 혹은 근본적인 관념은 각기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옷이 이렇게 다른 것은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동일시하거나 비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차이점이지요.

             그러나 유사성에 관해서는, 이 신화가 사실은 확산된 것이라고 하는 반론도 있어요. 가령 경작법은 최초로 개발된 지역에서 풍요의 신화(땅을 기름지게 하고 나무를 심고 곡물을 짓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와 함께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겁니다. 이런 종류의 신화가 바로 신을 죽이고, 그 몸을 토막내어 땅에다 묻었더니 거기에서 나무가 한 그루 자라나 먹을 것이 열리더라는 유의 신화입니다. 하지만 수렵 문화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요.

             따라서 신화의 유사성 문제는 역사적인 측면도 있고 심리적인 측면도 있다고 봐야지요.

p108 모이어스 : 인류는 창조 신화를 서로 각기 다른 이야기로 다루기도 하는데요. 인류는 어떤 것을 노리고 이런 식으로 이같은 신화를 다룬다고 생각하십니까?

캠벨 : 내 생각으로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요.

신화에 관한 한 캠벨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보다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강조한다. 역시 신화를 읽는 것이 체험이란 측면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p109 모이어스 : 하지만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 믿는 사람들, 삶 속에 녹여버려 사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 소박한 질문을 하는 게 아닐까요? 혹시,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을까,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왜 세상이 만들어졌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아닐는지요? 창조 신화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닐는지요?

캠벨 : 아니지요. 사람들이, 창조신이 온 세상에 실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은 그 해답을 통해서랍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우리가 앞에서 읽은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신은, 자기가 바로 창조 그 자체임을 알겠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곧 창조 그 자체이고, 개인이 그 피조물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느님이 남자든 여자든 바로 그 개인 안에 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한 신에게는 두 측면이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p114 각각 다른 의미에서 모두 믿을 만한 것입니다.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가령 우리의 신화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종교에는 윤리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와 화해, 정당함과 부당함을 정해놓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쪽으로 사람들을 모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화와 종교는 다르다는 것을 갈수록 인지한다. 이전에는 신화와 종교 모두 이라는 지칭으로 인해 같아 보였지만 이제는 그 둘의 차이를 알 듯하다. 그리고 나에게는 종교보다는 역시 신화 쪽이 더 끌린다.

p115 캠벨 : 아시다시피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종교적 관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그 단어, 죄악. 비종교인인, 아니 기독교인이 아닌 나도 그 단어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p116~117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내포된 의미)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입니다만 그 본뜻은 내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알파요 오메가인 우리의 바탕자리로의 되돌아옴, 육신의 껍질을 버리고 육신 자체의 역동적인 바탕자리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은유인 것입니다.

신화는 결국 내면의 여정, 영웅의 모험은 내면의 여정. 사람은 자기 내면의 세계를 공고이 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다.

p120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先見者)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그런 단어가 가끔은 절망하게 한다. 하느님이 정해놓은 수순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그 말. 마치 대본 속의 주인공의 인생처럼.

p122 근본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신화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르가(marga)'라고 하는데, 이것은 (path)'이라는 뜻입니다. 은 곧,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데, 이 길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되돌립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신화가 무엇인지 가르치는데, 마르가는 개인을 신화에서 떼어내고, 명상을 통해서 곧바로 을 좇게 합니다.

            문명은 신화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중세의 문명은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 십자가 위에서의 구속(救贖), 구속의 영광을 통하여 사람을 성사(聖事)에 이르게 하는 신화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삶이, 인류가 죄악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벗어날 수 없는 원죄적 사고....

p124 사제와 샤먼의 차이는, 사제는 기능적이지만 샤먼은 경험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의 종교 전통에 따르면 이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수도사입니다. 사제는 사회를 섬기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이고요.

           내 친구 중 하나가 방콕에서 로마 카톨릭 명상회(瞑想會)가 연 국제 모임에 참석했어요. 내 친구는, 카톨릭 수도사와 불교의 스님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 두 종교의 사무직 성직자들은 서로 도저히 꼴을 못 보더라면서 웃더군요.

          신비 체험을 한 사람은 상징적인 드러냄이 말짱 헛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상징이라는 것은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경험하지 못한 것을 두고,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p134 제임스 조이스는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상(事象)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의 일부입니다.

p137 '키르티무카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시바 신전이나 불교 사원에 가보면 시바나 부처의 대좌(臺座)에서 이 가면 같은 것, 즉 영광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시바 신은 이 영광의 얼굴을 향하여, “누구든 너를 예배하지 않은 자는 나에게 올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삶의 기적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실천과는 별개로 이 문장에 대해 고개를 끄덕거려본다.

p138~139 내가 하는 말의 뜻이 바로 그겁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至福)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 직관에서 끊임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영원은 시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다. 영원은 시간을 벗어난 것이기에.

 

 

3. 태초의 이야기꾼들

 

p141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p155~156 캠벨 :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래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敵國)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랍니다.

그대라는 어감에선 따스한 느낌이 난다 했더니 인디언들의 사고가 들어 있었구나.

p175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球體)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 씨가 앉아 있는 이 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이 신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

알듯 말듯한 신화의 세계. 캠벨의 인식, 나의 자각.

 

 

4. 희생과 천복(天福)

 

p17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천복을 좇는 삶이란 참 희열이 있으면서도 애달프다. 게다가 나의 천복이 무엇이지라는 생각에 머물면 더욱 그러하다. 인간은 천복을 따르라라고 캠벨은 강조하지만 그것은 내가 찾아서 가는 것일까, 나의 천복이라면 내가 의도치 않아도 자연적으로 흘러 만나게 되는 것일까.

p203 삶의 모습 자체는,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수렵 문화권에서 공희제가 치러질 경우, 제물 자체는 거기에 임재(臨在)한 신에게 바치는 선물, 혹은 뇌물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드시고 우리에게도 뭘 주십사, 하는 거지요. 그러나 농경 문화권에서 어떤 것이 제물로 희생된 경우는 다릅니다. 그 제물은 곧 신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땅에 묻히고 거름이 됨으로써, 거름이 되어 곡물을 기름지게 가꿈으로써 곧 우리의 양식으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났지요? 바로 그의 육신에서 영적인 양식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이야기는 원래 농경 문화권에 속하던 이미지가 승화된 것인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스도는 성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지요. 성 십자가는 나무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그 나무의 열매가 되는 셈이지요.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의 열매입니다. 이 나무는 에덴 동산에 있던 두 번째 금단의 나무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첫 번째 나무의 과실을 따먹자, 하느님은 이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 버리지요. 에덴 동산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곳입니다. 남녀와 선악과 신인(神人)이라는 이원적인 구별이 없는 곳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여기에서 이원성의 과실을 먹고는 쫓겨납니다. 이렇게 쫓겨난 인간을 다시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게 하는 나무는 영생(永生)의 나뭅니다. 이 영생의 나무 아래 이르러야 우리는 아버지가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나는 아직 아버지가 하나임을 알지 못했다. 과실을 먹어보고 쫓겨나봐야 알게 될까. 종교는, 아니 기독교는 나에게 늘 멀다.

p204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부처……. 이것은 같은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문 앞에는 그룹이 있는데, 이게 대체 뭡니까? 절에 가보면 두 문지기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것은 두 대극(對極), 즉 공포와 욕망을 상징합니다.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두문지기가 우리를 위협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사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 우리의 강박관념이 우리 스스로를 옥죄었구나!

p204 그러나 삶이 모든 사람에게 환희의 연속인 때도 있지요. 일상의 삶과 환희의 순간이 다른 점은 전자는 낙원 밖에서 사는 삶이고 후자는 낙원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낙원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공포와 욕망을 알지 못하는 것이 그 삶일 듯한데, 이미 공포와 욕망을 경험한 이들의 낙원으로의 귀환은 진정 낙원의 삶이 될까.

p211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하와이 경찰관은 자기가 목숨을 걸고 구하려던 청년이 누구인지 몰랐어요. 쇼펜하우어는, 자세히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은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장담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잊은 채로 서로에게 무엇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p215 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다…….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이 젊은이는, 전우를 위해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 …….

p217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기 위한 우리들에게 이미 영웅들의 실타래가 도움을 주고 있다.

p218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오로 열린 순간, 열정(passion)',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성배 전설에 나오는, 상처 입은 성배왕에 대한 사람들의 연민이 바로 이러한 변모를 드러냅니다. 바로 여기에서 아벨라르적 관념이 태동합니다. 아벨라르는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지요. 즉 인자(人子)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연민 쪽으로 열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추잡한 관심을, 고통을 나누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인간만이 지닌 가치의 세계 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함이다……

모든 삶의 평안은 누군가의 무언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p220 "하느님이 순종치 아니 하는 모든 사람을 거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는 이 대목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야 하느님의 자비가 소용에 닿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에게 찬스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루터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거든 용감하게 죄를 지어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큰 죄인은 연민하는 하느님을 크게 깨달은 자인 셈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역설과 삶의 가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아주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그 만큼의 용기를 지니지 못하여 늘 죄를 지옵니다.

p222 캠벨 :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 천복을 한 번도 좇아보지 못하고 산 셈입니다.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모이어스 : 이 천복을 좇으면 어떻게 됩니까?

~223 캠벨 : 천복에 이르는 거지요. 중세의 필사본에, 여러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성혼 서약(成婚誓約)에도, 성할 때나 아플 때나,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나,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나(중략)나는 그대를 중심으로 맞아들이고 그대를 천복으로 좇는다. 그대가 나에게 줄 재물도 아니요, 그대가 나에게 줄 사회적 지위도 아닌 오직 그대만 좇으리다……. 뭐 이런 대목이 있지요. 이게 바로 천복을 좇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동문서답인가. 천복을 좇으면 어떻게 됩니까. 천복에 이른다,. 천복이 수단이 아니라 그저 그것 자체로 목적임을...

p223 모이어스 : 천복이 있는 영생의 샘을 찾는 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시겠습니까?

캠벨 :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p224 캠벨 : 시인들은 시 쓰는 일을 자기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 자기 삶의 방법을 천복에 맞추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다른 일에 관심을 쏟지요. 정치적경제적 문제에 끼여들거나 군대에 입대하여 흥미도 관심도 없는 전쟁터로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 천복을 붙잡기가 어렵습니다. 천복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그리하여 천복을 찾기 위해서 모험을 떠나야 하는 건지요.

~225 그러나, 자기가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던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방향 전환의 계기를 기다리는 능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실제로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종종 있던 일이어서 나는 알고 있지요.

            남학생들에게 교양 과목을 가르칠 당시, 나는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어요. 어떤 학생이 나에게 와서, “제가 이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저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어요.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부모는 자식에게, “너는 법과대학에 가야 해. 법관이 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거든”, 이런 말을 능히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 돈이 중요하겠어요? 천복이 중요하겠어요?

두 개 다 중요하다고 하면요? 어느 하나 부족하다면 그것이 천복을 누리지 못하는 삶이라 여겨진다면요?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배고픔에 눈물 흘리지 않으리요, 배 부르다 해서 하고픈 일을 멀리로 보고 눈물 흘리지 않겠는지요. 삶이란 늘 이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것인 것만 같다.

p225 돈이 없다는 건 느꼈지만 가난하다는 느낌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어요. 그 당시 사람들, 좀 좋았어요? 나는 그 당시에 프로베니우스를 발견했어요. 문득 이 양반이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나는 프로베니우스가 쓴 것은 모조리 읽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돈이 있습니까? 나는 돈이야 어찌 되든, 뉴욕의 서적상(書籍商)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그 서적상은 내가 바라던 책을 모조리 보내면서 일자리를 구하거든 갚으라는 거예요. 자그마치 4년 뒤에나 갚았지만요.

~226 뉴욕의 우드스톡에 아주 멋진 노인이 있었어요. 이 양반에게는 방이 아주 많은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는 이 방을, 예술을 공부하는 가난뱅이 학생들에게 1년에 20달러 정도의 임대료로 빌려주었어요. 그런데 이 집에는 수도가 없었어요. 물은 우물물을 길어다 쓰거나 펌프로 자아올려 써야 했어요. 그런데 수도를 놓지 않는 이유가 걸작입니다. 수도를 설비해놓으면, 이 집이 수도가 있는 집에 살던 학생들의 관심을 끈다는 거예요. 나는 이 집에서 기본 독서와 공부는 거의 다 했어요.

           정말 멋진 시절이었죠. 나는 내 천복을 좇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말하는 이 천복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사트(Sat)' '취트(Chit)' '아난다(Ananda)'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p22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내가 길을 모름에도 문이 있을까. 고장나거나 닫힌 문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p227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5. 영웅의 모험

 

p229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될 것임을……. -조셉 캠벨

그러니 무지하고 약한 자는 자꾸 그들이 간 여정만을 따르려 한다.

p229 모이어스 : 신화에는 왜 그렇게 영웅 이야기가 많습니까?

캠벨 : 많은 가치가 있으니까요. 심지어는 대중 소설에서도 남자든 여자든, 주인공은 보통 사람의 성취와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발견하거나 이루어낸 영웅입니다.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캠벨 : 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어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 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週期)가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모험의 구조와, 모험이 지니는 영적인 요소는 태고의 성인식(成人式)에서 충분히 예고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 성인식을 통하여 아이는 아이의 시절을 포기하고 어른이 되기를, 혹은 유아기의 인격과 정신을 버리고 책임 있는 어른이 되기를 강요당하지요. 이것은 모든 사람이 거쳐야 하는 일종의 기본적인 과정이며 정신적인 변모 과정입니다.

            우리는 보통, 누군가의 보호와 감독 아래 의존적인 상태로, 줄잡아 14년에서 20년 동안이나 소년 시절이나 청년 시절을 보냅니다. 박사 학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기간이 35년쯤으로 늘어날 수도 있겠지요. 이 기간 동안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대신 벌이면 벌, 상이면 상을 받아야 하는 복종적인 예속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신화뿐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는 영웅이 많다. 현대 사회에서도 영웅은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영웅은 사회적으로, 아니 경제적으로 이용된다. 자본주의적 논리로, 그리고 자본주의를 좇는 이들의 정치적 도구로.

p234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내면의 길과 의식의 변모....모든 신화와 모든 책들에게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

p234 모이어스 : 의식은 어떻게 변모합니까?

캠벨 :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입니다.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과 계시. 늘 타인이 주는 굴레를 시련과 계시로 생각했다. 내가 숙명처럼 나의 시련을 창조하여 나아가야 계시를 얻을 수 있을 것.

p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제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길.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에서..전쟁같은 시험들의 연속.

p245 모이어스 : 사회에 영웅이 필요한 겁니까?

        캠벨 : 필요할 것 같군요.

        모이어스 : 왜요?

        캠벨: 분열 증세를 보이는 이 모든 경향을 한곳으로 모아 바람직한 목표를 향하게 할 수 있는 별자리 같은 이미지가 필요한 거지요.

p247 무덤에서 끝난다고 해서, 인생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p251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 영웅은, 기왕에 살던 땅에서 새로운 것을 싹 틔울 잠재력이 있는 씨앗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p263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술가들도 제자를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게 좋은 스승이 되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들려줄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어울리는 바퀴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p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p273 모이어스 : 여행을 떠나고, 우리 심층으로 내려가고, 용을 죽이는 일……. 반드시 혼자 해야 합니까?

캠벨 :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라도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 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모이어스 :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캠벨 :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도 있는데도,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짝 못하게 합니다. 이웃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조만감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

p278 햄릿의 문제는 자기의 운명에 깨어 있지 못했다는 거지요. 햄릿은 운명을, 너무 커서 도저히 다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운명이 햄릿을 다스려버렸던 거지요. 이런 일은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어요.

이성주의자의 대표자 햄릿, 여기 신화의 힘에서 나약하고 힘없는 인간이 되는구나. 운명에 순응한 자가 되는구나.

p283 캠벨 : 그 다음에, 석가에 가깝다기보다는 거웨인에게 가까우면서도 속세의 삶의 가치에 충실하는 방법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쓰는 방법입니다. 니체는 이 책에서 일종의 우화 수법으로 이른바 영혼의 세가지 변모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낙타의 변모, 즉 어린아이와 소년의 변모입니다.

             낙타는 무릎을 꿇고, “내게 짐을 실으라고 말합니다. 책임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과 수업을 받아야 하는 복종의 시절이 있는 법입니다. 낙타가 무릎을 꿇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짐이 실리면 낙타는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광야로 나가는데, 낙타는 여기에서 사자로 변모합니다. 등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사자의 힘은 그만큼 강해집니다. 이 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용을 죽이는 일인데, 용의 이름은 그대의 미래입니다. 이 괴물의 비늘이라는 비늘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의 미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요. 그 중에는 4천 년 전에 씌어진 것도 있고 바로 오늘 아침에 씌어진 것도 있습니다. 낙타, 즉 아이는 그대의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에, 사자, 즉 청년은 이것을 벗어던지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이 완전히 제압되면, 다시 말해서 그대의 미래가 완전히 극복되면 사자는 다시 그 사나운 본성을 버리고 아이로 변모합니다. 흡사 굴대를 떠난 바퀴처럼 말이지요. 이제 이 아이에게는 복종해야 할 법이 없습니다. 역사적인 필요에서 제정된 법률도 없고, 지역 사회를 위해 제정된 법률도 없습니다. 들꽃처럼, 그저 충동에 따라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내 안의 용,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용. 우리나라에서의 용은 아주 강렬한 긍정적 상징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의 용은 그 웅장함이 다르게 쓰인다. 나를 가두는 이 용을 물리쳐야 우리는 천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p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가만 생각하면 무엇이 행복인지를 느끼지 못하고 산 듯하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조건적 삶을 당연 행복인 듯 목적하며 살아, 스스로 행복했던 순간을 잊은 그 오랜 세월들.

p301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약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비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예수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블레이크는, “지각의 문전이 깨끗하면 만물이 그 자체로 영원하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고 씁니다.

속세적 욕망과 비속세적 욕망을 함께 가슴에 품은 이 슬픔... 어느 하나를 욕망하지 않는다면 삶이 차라리 행복했을까.

p301~302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 사람, 보통 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사람을 만나고 보면 그 모두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다들 가슴에 별을 품고 사는 사람들.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p308 여신 숭배는 주로 농경 문화, 농경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즉 대지와 아주 밀접합니다. 대지가 식물을 낳듯 인류의 여성은 인간을 낳지요. 대지가 그 식물을 기르듯 인류의 여성도 인간을 기릅니다. 따라서 여성이 지니는 마력은 대지가 지니는 마력과 같은 것이지요. 따라서 그 둘은 상호 관계 아래에 있어요. 그래서 만물을 낳고 그리는 에너지의 화신은 당연히 여성의 모습을 지니지요. 여신이 가장 중요한 신화 이미지가 되는 곳은 고대의 메소포타미아 문화권, 이집트의 나일강 문화권 같은 고대의 농경 문화권입니다.

            우리는 고대 유럽의 신석기 시대 조상(彫像)을 무수히 발굴했지요. 다 여신상입니다. 남성상은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황소나 멧돼지나 염소 같은 동물은 남성적인 힘의 상징이지만, 이것을 시각화한 일은 별로 없어요. 시각화된 이미지는 오로지 여신 이미지뿐입니다.

           여신이 창조신일 때 이 여신의 몸은 곧 우주가 됩니다. 이 여신은 바로 우주와 동일시됩니다. 우리가 이집트 신전에서 본 여신 누트의 상이 바로 이런 여신입니다. 누트 여신은 삶을 송두리째 감싸안는 거대한 하늘입니다.

p320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예요.

늘 판에 박힌 처녀에 대한 이미지.

p332 '존재하는 만물 중에서 으뜸가는 존재를 인도어로는 브라만이라고 하는데, 이건 남성 명사도, 여성 명사도 아닌 중성 명사예요. 여자를 인도어로는 마야-샤크티-데비라고 합니다. 이건, ’생명을 주신 여신이자 형상을 주신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파니샤드>에서 이 여신은 바로 <베다> 시대 신들에게, 자기네가 획득한 권능과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등장하고 있는 겁니다.

p332 여성은 생명에 형상을 부여했기 때문에 <베다> 시대의 남성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었던 거지요. 이 세상 만물의 존재가 비롯된 곳은 남성과 여성이 분화되지 않은 곳, 그러니까 성() 너머에 있어요. 그곳은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해 있어요. 그러니까 존재하는 곳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범주를 훨씬 초월해 있는 것이지요.

p334 어머니는 모든 자식을 고루 사랑합니다. 멍청한 자식도 사랑하고, 똑똑한 자식도 사랑하고, 말썽꾸러기도 사랑하고, 착한 지식도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에는 자식의 성격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지요. 그래서 여성 원리는,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포괄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격합니다.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질서나 사회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실제로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속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가능하지요.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근본으로 돌아서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곧 어머니 원리로 돌아가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경향이 언제 또 가부장적 원리로 되돌아갈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왜냐, 이 땅의 모든 조직은 거대 규모화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 자체가 남성적 기능이 두드러지게 생기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차 어떤 경향이 나타날지는 예견할 수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 근본, 혹은 자연은 언제 돌아와도 돌아옵니다.

여성에 대한 상징 또한 여성을 가둬두는 용이 되어 버린다. 시대가 변해도 여전한 여성을 향한 용들의 움직임.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p339 이렇듯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과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라서 마음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를 샅샅이 염탐한다. 이렇듯 서로 하나가 될 때, 두 눈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될 때, 두 눈이 본 것을 마음이 좋게 여기므로, 여기에서 온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두 눈이 마음에서, 두 눈과 마음이 기쁨을 누리는 덕에, 두 눈과 마음이 그리 하기를 바라는 덕에, 사랑이 태어난다. 진정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이, 가슴과 눈과 눈에서 태어난 온전한 정성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이 다름 아닌 희망임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연인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면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은 꽃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 귀로 드 보르네이유

p341 결국 에로스적 사랑이 충동에 따르는 것이니까 개인적인 열정이라고 할 수 없듯이, 아가페적 사랑도 사랑이라기보다는 자비에 가깝겠군요.

아모르적 사랑이 있음을.

p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p348 모이어스 : 트리스탄은 사랑과 천복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천복을 위해서라면 고통을 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지옥의 상태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가 이루려 했던 어떤 상태이겠지요.

캠벨 : 그래요. 윌리엄 블레이크는 그의 유명한 아포리즘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네가 지옥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천사는 내가 콘 고통을 받고 있는 줄 알았으리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지옥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천사가 아닌 사람들에게, 그 불길은 고통의 불길이 아니라 열락(悅樂)의 불길인 것이지요.

p349 모이어스 :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나에게도 내 세상 하나 있어야겠다...내 세상이 무엇인지 찾아야겠다.

p350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도권 사회에서 사회는 개인의 희생 위해서 꽃피려 한다. 그 기능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오래도록 굳어져 있다.

p367 제우스는 기왕에 장님이 되어버린 테이레시아스에게 미래를 예언하는 재능을 줍니다. 재미있지 않아요? 이것은 말이지요,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모르폴로지, 즉 사물의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나에게는 왜 직관을 주지 않으십니까.

p367 실제로 테이레시아스 자체가 남성과 여성의 합일을 상징하고 있어요.

p368 모이어스 : 남성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여성적인 측면을 알 수 있다면, 여성들은 자신의 남성적 측면을 알 수 있다면, 우리 자신에 관한 한, 신들이 아는 수준, 혹은 신들이 아는 수준 이상의 수준으로 알기까지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가끔씩 합니다만.

          캠벨 : 결혼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그런 정보에 접근할 수 있지요.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異性)의 측면과의 만남이랍니다.

          모이어스 :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문득, “나는 이 사람을 전부터 알고 있다”. 혹은, “이 사람을 좀더 알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에 관한 자기 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캠벨 : 참 신기한 일도 다 있지요. 이건 흡사, 그 사람과 함께 할 미래가 기정사실이 되어 우리에게, “이 사람이 바로 너와 함께 살 사람이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아요.

         모이어스 : 이런 메시지는 우리가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기억의 창고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 사람을 보는 순간 기억이 자극을 받으면서…….

          캠벨 : 미래에 대한 반응인 것 같아요. 미래는 우리에게, 미래의 모습은 이럴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준다는 거지요. 시간의 신비, 시간의 초월성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겁니다. 어쨌든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굉장히 심오한 신비와 만나게 되지요.

캠벨 또한 학교에서 수업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이 느낌 뒤에 그는 그의 아내를 만났다.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절절한 이야기다.

p370 모이어스 : 페르시아 신화에, 악마는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p372 캠벨 : 그래요. 악마를 신의 애인으로 간주하는 회교적 관념이지요. 악마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런 관념은, ‘악마는 어쩌다가 지옥에 떨어졌는가하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신은 천사들을 창조하고 나서, 신인 자기 외에는 어떤 것에도 절을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신은 인간을 창조하되, 천사보다 한 등급 높게 창조하고는 천사들에게 인간을 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천사 동아리의 하나인 사탄만은 인간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기독교에서는 이걸 사탄의 이기심 탓이라고 해석합니다. 사탄이 이기심 때문에 인간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신화에 따르면, 사탄은 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신에게만 절을 할 뿐 인간에게는 절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신이 규칙을 바꾸어버립니다. 즉 인간에게는 절을 해도 좋다는 거지요. 그러나 사탄은 첫 번째 규칙에 열중했던 나머지 도저히 이것을 어길 수 없게 됩니다. 글쎄요. 사탄에게 가슴, 혹은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사탄은 온 마음으로 사랑하던 신에게만 절을 하지, 인간에게는 끝내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이, “내 앞에서 꺼져라!”, 한 겁니다.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믿어보면, 지옥의 고통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사랑하던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사탄에게 이 사랑한 것은 신이었어요. 그러니 사탄에게 지옥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곳이었을 테지요. 그의 귓전에는 지옥으로나 가거라!”라고 하던 신의 음성이 쟁쟁합니다. 그에게는 사랑의 상징 같은 것이었겠지요.

지옥의 고통은 밥을 먹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라는 이야기가 기억나는 것은. 지옥과 천당은 다르지 않다 했다. 화려하고 좋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인상이 남는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무리의 사람들이 기거하는 천당과 지옥에서 배고픈 이들의 식사시간. 팔보다 아주 긴 숟가락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 지옥에 있는 이들은 그 숟가락으로 밥을 먹겠다고 아우성대다 한숟가락도 먹지 못하며 아우성댄다. 그러나 천당에 있는 이들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먹여 주며 그렇게 밥을 먹고 있었다. 천당과 지옥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8. 영원의 가면

 

p375 해지는 관경의 아름다움이나 신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었네..

p376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고방식-원시적인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만-신들을 결국 비인격적인 에너지의,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顯現)이자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따라서 이들에게 신들은 에너지의 본원이 아닌 겁니다. 신은 그러니까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인 것이지요.

p384 모이어스 : 제가 보기에 <신약성서>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믿사오니, 저의 믿음없음을 깨우치소서”, 바로 이겁니다. 저는 이 궁극적인 실재를 믿습니다. 저는 그 궁극적 실체를 체험할 수도 있고 실제로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제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있는가”, 이게 제가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는 의문입니다.

나의 질문을 대신 해주시는군요.

p399 모이어스 : 제임스 조이스의 에피파니는 어떻습니까?

         캠벨 : 미학적 체험에 대한 조이스의 정의는, 그 대상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그 작품이 그린 대상을 소유하고 싶다는 느낌을 일게 할 경우, 조이스는 그것을 예술작품이라고 하지 않고 포르노그라피(淫畵)라고 부르지요. 진정한 미학적 체험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을 비평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대상을 비평하고 싶게 하고 거부하고 싶게 하는 예술 작품을, 그는 도학적(道學的)인 작품, 혹은 예술 자체가 지닌 사회 피병 기능이라고 부르지요.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조이스의 말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액자에 넣어 두게 하고,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이 작품임을 느끼게 하고, 다음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 다음에는 부분과 전체, 그 다음에는 전체와 각 부분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작품이 지녀야 하는 필수적인 미학적 요인(관계의 조화 정연한 리듬)입니다.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입니다. 이 순간을 종교 술어로 설명하자면,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지요.

에피파니. 진리가 나타나는 순간.

p405 흔히들 천국과 지옥을 영원하다고 하지요. 천국은 끝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는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가고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불교에는,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이 세상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 이 개념은, 시간이 있는 데엔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 모습입니다.

p413 캠벨 :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천복을 얻는 대신, 굶주리는데..그래서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는 꿈꾸는 별이 되다 마는 인생을 사는 것이겠지.

        모이어스 :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제 믿음도 이쪽으로 기웁니다.

       캠벨 :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잇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니바호 인디언에게는 소위 화분(花粉)의 길이라고 하는 놀라운 이미지가 있어요. 그들에게 화분은 곧 생명의 근원입니다. 화분의 길은 곧 중심으로 향하는 길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내 앞도 아름답고, 내 뒤도 아름답고, 내 아래도 아름답다. 나는 화분의 길에 들었노라”, 이렇게 노래한답니다.

p414 이 세상 도처에 있는 언어의 신비를 드러내는 소리에 (AUM)'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소리의 의미를 깨달으면 밖으로 나가 다른 것을 위해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가만히 앉아서 이 소리를 정관하고, 경험하고, 알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절정 경험일 테니까요.

절정 경험, 행복 경험,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 캠벨이 제시하는 삶에 대한 경험을 듣고 있노라면 끊임없이 살아있으라라는 메시지가 들리는 듯하다.

P414 , 우리 귀가 들을 수 있는, 만상이 체현하는 우주 에너지의 소리입니다. 먼저 목구멍으로 !‘소리를 내고, ’라는 소리를 입안에 가득 채웠다가, ’하면서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이 소리를 제대로 내면 모든 모음이 이 소리의 발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한번 해보세요, “!” 자음은, 모음의 소리를 끊은 일밖에는 못합니다. 모든 형상이, 궁극적인 형상의 단편에 지나지 못하듯 모든 말 또한 이 의 단편에 지나지 못합니다. ’은 소리나는 것, 곧 우주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소리입니다. 티베트 승려의 ()을 한번 들어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겁니다. 우주는 존재의 송입니다. ’송을 통하여 우주와 접촉하고 우주를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절정체험입니다.

어떤 말로 표현되는 말이란 결국 형상의 단편에 지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한 말로서 형상을 나타낼 수 있음이 얼마나 황홀한가라는 생각. 내 언어가 그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궁극의 그 형상을 표현할 언어를 찾아내는 일...

~415 ……. 태어남, 존재하기 되기, 사멸하여 온 곳으로 되돌아감. ‘사대(四大)의 음절이라고 불립니다. A, U M……. 셋밖에 없는데 또 한 음절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끝나고, 또 한 이 시작되기까지 그 밑에 깔리는 침묵입니다. 내 인생은 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침묵도 있어요. 그 침묵을 우리가 여기에서 영생하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이것은 필멸의 팔자를 지닌 것, 저것은 영생하는 것, 영생하는 것이 없으면 필멸하는 것 또한 없습니다.

P415 모이어스 : 그런데도 우리 이 하잘것없는 인간은 이 하찮은 언어에 머무는군요. 아름답기는 하나 모자라서, 그리려고 해도 그리려고 해도…….

         캠벨 :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3. ‘내가 저자라면

 

신화의 힘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빌 모이어스의 서문

 

1. 신화와 현대 세계

2. 내면으로의 여행

3. 태초의 이야기꾼들

4. 희생과 천복(天福)

5. 영웅의 모험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지혜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8. 영원의 가면

 

 이 책은 캠벨과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와의 방송용 대담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처음 기획에서부터 책으로 엮을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인 캠벨 사후 대담의 내용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서문에서 빌 모이어스는 캠벨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집약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 8장으로 구성되어 각 장마다 모이어스의 질문에 캠벨이 답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현대 세계에서 신화가 가지는 의의를 설명하고 있으며 2장은 궁극적으로 신화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3장은 과거의 신화와 의례에 대해서, 4장은 희생과 천복(天福)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5장은 영웅의 모험의 여정에 관해 이야기함 6장은 우주의 어머니인 여신의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7장은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며 8장은 영원의 가면에 관한 신화의 이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대담 형식을 취함으로써 캠벨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이어스가 명료하게 요약하거나 의문점을 질문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어 읽으면서도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감동적이었던 장절

 

 캠벨이 이야기하는 형태는 안타깝게도 나에게 아주 명료하거나 구체적인 각인을 주기 보다는 그 전체적인 아우라로 나를 감탄시켰다. 물론 문장 하나하나에 매료된 구절도 분명 있으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데 분명 모자랐기에 그가 던지는 메시지를 제대로 받아먹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크다.

하지만 비교적 내 삶과 대입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천복에 관한 것, 내면의 길에 관한 내용들은 쉽게 와 닿았다. 천복을 좇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모이어스의 질문에, “천복에 이르게 된다는 그 말. 참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고 인디언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수집한 그 답게 인디언 추장이 자연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지는 인디언들의 삶에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더욱 되씹어 보게 된다.

 또한 캠벨을 신화학자로 부각하다 보니 간과했던 부분이다. 그 또한 종교학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종교와 신들에 대한 이야기 역시 내가 종교인이 아니기에 주의깊게 읽혀지기도 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두려움, 신에 대한 이야기..다시 보니 마음에 드는 글들이 많다. 신화의 힘은 두고 두고 되씹으며 읽어 봐야 할 듯하다.

 

보완점

 

 이 책은 대담의 기록이다. 즉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글로써 전달한 것이 아니라 질문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태로 캠벨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고 있다. 글과 말이라는 것은 전달형태면에서 여러 가지로 다르다. 그렇기에 글로써 읽어내려갈 때에는 전달력이란 측면에서 약한 면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힘으로 온전히 이야기를 엮어 갈 때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추어 내용을 정리할 수 있으나 대담은 질문자의 의도 또한 개입되어 때론 반복적이고, 때론 부연적으로, 때론 흐름과는 조금 동떨어진 형태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빌 모이어스가 적절히 질문의 형태를 조절하며 대담을 이끌고 있다지만 이 책이 대표적인 신화입문서, 신화개론서 이야기된다는 것을 볼 때 보다 쉽게 일반인의 눈높이의 질문이 이루어지지 못한 점이 아쉽다. , 개론서라는 것이 많은 내용을 다루기 때문이 아니라 보다 핵심적인 부분을 간결하고 쉽게 정리할 수 있다면 더욱 좋았을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이 책이 캠벨이 저술한 초기 저작물이 아니라, 캠벨이 많은 저서를 출간하고 생에 마지막 즈음 자신의 모든 저술에서 말한 바를 총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이미지, 신화와 인생, 신화와 함께하는 삶, 신의 가면 등의 내용이 각 장마다 조금씩 자리한 요약서의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서 오히려 다른 저서들을 살펴보아야 신화의 힘에 겨우 접근이 가능하다고나 할까.

 한편으론 저자가 살아 이 책의 출간을 주도했다면 지금의 형태와는 다른 정말로 신화의 개론서로서의 책을 서술했을 것이란 점에서 아쉽기도 했다. 의도적인 질문과 반박을 접어둔 채 오로지 그의 이야기에 대한 수용적인 자세로 책을 읽으려 하면서도 이해가 어렵거나 더한 답변이 요구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저 신화에 대한 메타포, 그가 자신의 일생을 바쳐, 그의 천복으로서 임했던 신화에 대한 생각과 신념으로서 글들을 이해하며 읽었기에 책을 읽고 난 이후의 몽상적인 상태가 지속되다. 캠벨의 저작들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접근하기 위한 대담으로서는 오히려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차라리 좀더 '신화'의 의미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들 뽑아내어 그것을 중심으로 한 질문과 경험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 갔으면 하는 생각이다.  방대함은 깊이에 대해 부족하게 한다. 이 책이 신화에 대한 이해, 개론서가 되어야지 조셉 캠벨이 그동안 쓴 책들의 요약 정리본은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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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23:27:26 *.160.136.54

포도의 알싸하고 달콤한 맛을 제대로 음미하는 방법.

 

껍질을 벗긴다. 그 속살을 혓속 깊이 살살 굴린다. 속으로 꿀떡 삼킨다. 아 ~

 

'그가 천복을 좇자 자연스레 그에게도 천복의 삶이 맞닥뜨려 지는 것이다.'

당신의 천복은 어떨까요. 그 여정에 일년의 시간은 어떤 과정으로 열매를 맺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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