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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4일 11시 21분 등록

신화의 힘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대담, 이윤기 옮김 / 21세기북스

 

1. 저자에 대하여

조셉켐벨(Joseph Campbell, 1904-1987)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리는 조셉 캠벨은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아일랜드계 중산층 가정의 장남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가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의 일생 동안 계속된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관심은 그가 여섯 살 때 부친에게 이끌려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버팔로 빌의 와이드 웨스트 쇼를 보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버팔로 빌이 분장한 위풍당당한 연방 기병대장을 동경했던 다른 여느 아이들과는 다르게, 어린 캠벨은 오히려 인디언에 대해서 강한 흥미를 품었다. 그 때부터 그는 뉴욕자연사 박물관을 통해서 인디언 문화를 공부하고 인디언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겨우 열살 때 인디언의 토템 기둥과 가면에 매료당하여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했다니 천복을 일찍부터 찾은 캠벨이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그 후 캠벨은 1921, 다트머스 대학에 입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는 메디치가에 관한 책을 읽고 인문학에 흥미를 품게 되어, 1922년 컬럼비아 대학으로 편입하여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24년에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인도의 저명한 종교지도자 지두 크리스나무르티를 만나 힌두교와 불교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마 책의 곳곳에서 보이는 힌두교와 불교의 흔적은 이러한 저자의 행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후 캠벨은1927년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2년간 유학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시간동안 그는 아서왕 전설의 권위자 밑에서 로망스어, 중세프랑스어, 프로방스어, 라틴어 등을 배우는가 하는 한편, 제임스 조이스의 <유리시스(Ulysses)>와 같은 새로운 문학이나 현대 예술의 거장인 피카소, 브라크 등의 그림에도 깊은 흥미를 품게 되었다. 그렇게 열정이 넘치는 1년을 보낸 그는 파리에서의 유학을 끝내고 1928년 뮌헨 대학으로 가서, 산스크리스트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을 공부하였다. 또한 그곳에서 괴테와 토마스만의 문학과 프로이트와 융의 사상을 섭취했다고 한다. 천복을 일찍이 찾았고 그러한 천복을 대학 시절 잠깐 잊었으나 이내 다시 찾아 편입 및 유학까지 하며 관련된 분야에 대한 배움을 깊이 하였던 그가 부럽기도 하고 또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1929년 미국으로 돌아온 캠벨은 영문학 대신 인도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했지만 컬럼비아대학 측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박사학위취득을 포기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주가의 대폭락과 뒤이은 대공황이었다. 캠벨은 이력서를 수십 통이나 썼지만, 그를 불러주는 직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자 그는 은자와 같은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조각가 지망생인 누이 앨리스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5년 동안 우드스톡의 숲속에 있는 값싼 작은 집을 빌려 극빈 속에서 독서와 사색에 몰두했다. 캠벨은 이곳에서 그저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노트필기를 했다. 그는 이러한 칩거의 5년 동안 8개월 정도 미국을 여행하면서 방랑생활을 하였다. 그 시절 러시아어를 배우기도 했다. 당시 28살이었던 캠벨은 캘리포니아에 일 년쯤 머물면서 소설가존 스타인벡을 만났고 함께존 듀이를 공부했다. 캠벨은 카멜도서관에서 우연히오스발트 슈펭글러의 두 권짜리서구의 몰락을 꺼내들었는데, 이 책이 캠벨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이렇게 은거했던 우드스톡에서의 시간은 캠벨이 천복을 진심으로 따른 기간이며 이 시기 이후 더 높이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공황의 시절, 용기 있게 결단하고 내 가슴이 비추는 빛을 향한 어둠의 시간을 묵묵히 견딘 캠벨이 존경스럽지 아니할 수 없다.

그는 1933년 모교인 캔터베리 스쿨의 교사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어학을 가르치면서 슈펭글러, 토마스 만, , 조이스, 제임스 프레이저 등의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1934년 미국의 명문여자대학인 새러 로렌스 대학의 전임 교수가 되었으며 1972년 퇴직할 때까지 38년 동안 재직했다. 그는 그곳에서 문학, 독일 철학, 비교신화학 등을 가르쳤다.

 

1938년 새러 로렌스 대학의 3학년생이었던 하와이 출신의 진 애드먼과 열애에 빠져 결혼했다. 근대 무용의 선구자인 마서 그레이엄의 제자였던 진 애드먼은 뒤에 일류 무용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캠벨은 아내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계속 강의를 들었고,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마침내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냈고, 그야말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나는 한참 뒤에야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아주 은근한 표시를 했다. 곧 졸업할 그녀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한 것이었다. 바로 슈펭글러의서구의 몰락이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의미심장한 것이기도 했다.” 왠지 떠올려보면 나 까지도 가슴이 떨려오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캠벨은 1940년 콜롬비아 대학의 인도 연구 교수였던 하인리히 침머와 알게 되어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42년에 침머의 소개로 융 학파가 주관하는 종교, 신화, 정신분석학 논문집인불링겐 시리즈의 편집자가 되기도 했다. 이후 캠벨은 인류학과 민속학을 바탕으로 비교종교학과 분석심리학 등의 이론을 이용하여 신화와 종교 연구를 계속하여 명성을 얻게 된다. 그는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최고의 스승으로 추앙받게 된다. 그는 그의 학식과 인품으로 인해 따르는 사람이 많아 80회 생일에는 무려 1,000여 명의 지인과 제자들이 생일 파티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의 대표적인천의 얼굴을 가진 영응은 세계 각지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4부작신의 가면을 집필하고 이어신화와 함께하는 삶’ , ‘신화의 이미지’, 그리고 최후의 역작인 5부작세계신화지도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벌이다가 1987 10월 호놀룰루의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조셉 캠벨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1986년 그가 죽기 2년 전 저명한 빌 모이어스와 대담을 통해 신화를 대중에게 소개한 미국의 pbs방송국의 대담 프로그램신화의 힘이었다. 방송은 결국 그의 사후에 방영되었으나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이 책신화의 힘은 이 대담을 정리한 책이다.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를 주제로한신화의 힘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2.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10. 법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강제력 이상의 어떤 힘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장의 권능이 의례화하고 신화화하는 것이다. 캠벨은, 종교와 전쟁에서 사랑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 삶의 양태는 이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11.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11.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12.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12. 그의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15.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15.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군요.”

  그는 대답한다.

  아니지, 그게 아니오. 살아 있음의경험을 찾는 것이지요.”

 

17. “제 조카를 사랑하기는 합니다만....”

  성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그 아이를 사랑하고 다독거리는 그 몸짓에, 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몸짓이 깃들여 있답니다.”

  캠벨은 이 이야기 끝에, “여기에 종교의 귀한 메시지가 있지요. 너희가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대접이 되느니라라는 메시지가 그것이랍니다하고 덧붙였다.

 

30.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31.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영해 같은 것과는 달아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오랫동안 연애하던 사람이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아 갈라서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왜 갈라설까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만일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려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번지수를 틀리게 찾은 거예요. 상대를 잘못 짚은 거지요.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상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까?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이거다, 하고 오는 게 있어요. 그러면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어떤 존재가, 이게 바로 그것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32. 그건 결혼이 아니라니까요. 감히 말합니다만,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 깨닫게 됩니다.

 

35.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의례를 베풀어주지 못한다는 것이군요. 사실입니다. 모든 아이는 거듭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어린 시절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35. 오늘날 이들은 어디에서 신화의 존재를 만날까요?

  스스로 만듭니다. 뉴욕이라는 도시가 온통 낙서투성이인 것도 그 때문이지요. 이렇게 낙서하는 아이들에게는 나름의 불량배가 있고 나름의 입문 의례가 있으며 나름의 도덕률이 있어요. 아이들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해 신화를 체현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은 위험합니다. 그 까닭은 이들의 법이 도시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나름의 입문 의례를 치르지만, 이들이 입문하는 곳은 우리 사회가 아니지요.

 

36.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이라고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37.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삶의 지혜와는 상관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교수들 역시 자기가 가르치는 학문이 삶의 가치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학문에는 전문화 경향이 뚜렷해 보입니다. 한 방면에서 어엿한 전문가가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한 전문 학자가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알면 이런 경향이 있다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가령 말이지요, 불교를 공부하자면 적어도 동양학을 논의하는 유럽의 몇 개 국어, 말하자면 영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는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산스크리트어, 중국어, 일본어, 티베트어, 여기에다 몇 개 국어를 더 보태야 합니다. 머리가 희어질 노릇이지요. 그런 전문가가 이로쿼이즈 인디언과 골곤퀸 인디언의 차이가 뭐냐고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가 있겠어요?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도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41.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지요. 사람들은 그 친구를 보고 일어서는 게 아니라, 그 친구가 입고 있는 법복, 그 친구가 맡고 있는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판사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역할로써 판사가 지니게 되는 완전무결함, 즉 그 역할의 원리로 대표되는 완전무결함이지, 저마다 나름대로 생각과 편견을 지닌 판사들의 무리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 자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인격인 것이지요.

 

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74.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신화의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해답은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 하고 반문합니다. 성냥을 켜면 불이 입니다. 불이 무엇이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 됩니다.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의 신화도 있고, 단혼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혼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무슨 뜻인지요?

  도덕률을 말하는 겁니다. 좋은 사회라면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우리 삶의 법 같은 것 말이지요. 선사 시대에 믿어지던 야훼의 책을 보세요. 페이지마다 무엇을 입어라. 어떻게 처신하라는 잔소리가 잔뜩 실려 있지요. 하지만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78.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 한,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그대들은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 백성의 삶에 묻어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 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줍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주며 우리 자식들을 먹여줍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 강 또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 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여겨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이나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르쳐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땅을 낳은 것은 이 땅의 모든 자식을 낳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육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의 냄새에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수풀은 어디에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 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는 그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105. 이 세상으로 태어나기 직전에 자궁의 율동이 시작되는데 이때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낀답니다. 그러니까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공포인 셈입니다. 이어서 태어나기 위한 무시무시한 단계, 산도라는 아주 험한 길을 지나면, 드디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지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자기, “내가 있다고 진술한 직후에 공포를 느낀다는 신화가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으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일단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요, 한 쌍의 대극이 비롯됨입니다.

 

106.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107.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109. 왜 우리도 기도할 때 두 손바닥을 붙이잖아요? 손바닥을 서로 붙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 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으니까요. 인도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님 신으로 대접받는답니다.

 

115.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건 창조와 타락에 관한 기독교적 관념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언젠가 아주 대단한 노선학자 D.T.스즈키 박사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양반이 바지 옆에다 손을 쓱쓱 문지르면서 일어나더니 이러더군요. “하느님 대 인간, 인간 대 하느님, 인간 대 자연, 자연 대 인간, 자연 대 하느님, 하느님 대 자연... 무슨 종교가 이래요?”

 

118. 40년 전에 이집트에서 발굴된 토마의 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내 입을 통하여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요. 나 역시 그와 같이 될 것이라.” 이것은 영락없는 불교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의 의식, 혹은 그리스도의 의식의 현현입니다. 단지 그걸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부처라는 말은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

119.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 알고 잇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22. 신화는 영적인 교시를 위한 것이지요. 인도에는 두 종류의 신화, 즉 민간의 관념과 근본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아주 멋진 말이 있어요. 민간의 관념이 지니는 측면은, ‘데시라고 하는데, 이 말은지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회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젊은이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젊은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사회 생활로 나서고, 들판으로 나가 사냥하는 법을 배웁니다. “, 군인이 되어야 하는구나. 그러면 사회를 위해서 군인이 되어 싸워야지”, 젊은이를 이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근본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신화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마르가라고 하는데 이것은이라는 뜻입니다. 은 곧,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데, 이 길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되돌립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신화가 무엇인지 가르치는데, 마르가는 개인을 신화에서 떼어내고, 명상을 통해서 곧바로을 좇게 합니다.

  문명은 신화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중세의 문명은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 십자가 위에서의 구속, 구속의 영광을 통하여 사람을 성사에 이르게 하는 신화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130. 이건 동양 특유의 방법입니다. 아무리 현자라도 질문을 받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아요. 알고 싶어하지 않는데 억지로 입을 열게 하고 집어넣어 줄 수는 없는 거지요.

 

133. 조르바는 인생에 대하여, “말썽?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닌가하고 있습니다.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133.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136. 우리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일 중 하나는, 속으로는 구역질이 나는 타인, 혹은 타인의 행동, 혹은 타인의 조건에 대해서도옳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139.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을 누리면서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 직관에서 끊임없이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145. 사람은 죽임을 통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러한 행위와 관계 있는 죄의식이 있지요. 매장에도 친구는 죽었지만 다른 곳에서 계속해서 살 것이라는 의식이 반영됩니다.

 

147. 짐승이 화살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 사냥꾼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않는다는 식의 자기 희생적인 금제를 지킵니다. 그 동물의 죽음에 대해 일종의신비에의 참여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 짐승의 죽음은 자기네들로 인한 것이고, 또 그 짐승의 고기가 자기네들의 음식이 될 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동일시, 신화적인 동일시가 개입합니다. 따라서 죽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155.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그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랍니다.

 

164.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한 몫의 여자가 되는 거지요. 여자라는 게 뭡니까? 생명을 나르는 수레 아닙니까? 생명이 여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여자는 이 생명을 낳고 먹여서 기릅니다. 여자의 힘은 대지의 여신이 지닌 힘과 동일시됩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이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166. ‘미사를 뜻하는 라틴어는 원래 우리를 일상성의 마당에서몰아낸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래서 사제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곳, 그곳이 제단입니다. 그렇게 등을 돌리고 있는 사제와 더불어 우리는 비로소 외계를 향했던 것이지요.

 

17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187. 옛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항상 영적인 원리를 의식하고 사는 삶이었어요. 아시리아 궁전에는 머리는 사람 머리, 몸은 사자 몸, 날재는 독수리 날개, 발은 황소 발로 된 혼성 괴물이 있어요. 12궁 가운데 네 가지 동물이 모인 이 이미지는 궁전 문지기를 상징하지요.

 

189.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189.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204. 삶이 모든 사람에게 환희의 연속인 때도 있지요. 일상의 삶과 이 환희의 순간이 다른 점은 전자는 낙원 밖에서 사는 삶이고 후자는 낙원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208. 동남 아시아, 특히 인도네시아의 해골 사냥 전통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해골 사냥은 신성한 행위, 신성한 살인입니다. 젊은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려면 반드시 제 몫의 살인을 해야 합니다. 죽음 없이 새 생명이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지요.

 

215. 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있다...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이 젊은이는 전우를 위해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222. “먹기 싫다는데 뭘 그래요? 싫다는 건 하게 하지 말아요.”

  이 말을 들은 아이 아버지가 자기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러는 겁니다.

  저 좋은 것만 하고 인생을 살 수는 없는 법이야. 저 좋은 것만 하고 세상을 살려고 했다가는 굶어죽어. 나를 봐! 나는 하고 싶은 일은 평생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어.”

 

222.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23.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서 열립니다.

 

227.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 생명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목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지요.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22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229. 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가 있지요.

 

230.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231.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니까요.

 

245. 오늘날의 사람들은 영웅이 아닌 명사를 숭배하는 것 같은데요.

  유감이지만 그렇군요. 브루클린의 고등학생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설문을 돌렸더니 3분의 2명사라고 대답했다더군요. 뭐가 되자면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하는 한심한 대답이지요.

 

262. 우리가 아기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의 의식 아래에는 이미 어떤 기억이 분명히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군요.

 

262. 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막연할 때는 이웃의 충고나 영향력이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요. 나는,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사회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그만큼 모르는 상태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263.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하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이것은 운동선수가 코치를 찾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좋은 코치는 선수에게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아요. 좋은 코치는 선수가 달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선수의 천성적인 동작 양식만 조금 수정해줍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게 좋은 스승이 되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265. 다스 베이더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거지요. 그는 로봇입니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위협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이 조직은 우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조직이 과연 우리 인류의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조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 조직을 더 이상 섬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 정도의 행동은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어떤 방법으로요?

  우리의 이상을 움켜 안고, 루크 스카이워커처럼, 조직이 가해오는 비인간적인 압제에 저항함으로써요.

 

270.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을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272.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272.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 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296.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297.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298.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303.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320. 우리 가슴 가까이 있는 중심을 깨닫고 자비를 실천할 때, 곧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 바로 이 중심에서 인간성이 비롯됩니다. 종교적인 명상도 바로 이 중심에서 이루어집니다.

 

337.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346.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그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350. 선생님께서는 이런 사랑의 파이오니아들에 대해서 이런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

 

355. 눈과 눈이 만나는 순간의 짜릿함, 그 후에 찾아오는 고통의 순간….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이지요. 그러나 음유시인들은 사랑의 고통, 의사가 낫게 할 수 없는 고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받은 상처를 찬양했지요. 그 상처는, 거기에 그 상처를 낸 바로 그 무기를 통해서만 나을 수 있는 상처였지요.

 

360. 낭만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가 두 세계에 걸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면 밖에서 강요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세계를 조화 있게 상화 관계 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는 이 모듬살이로 태어났으니까, 모듬살이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모듬살이의 울타리에 살지 않겠다는 것도 우스운일이지요. 왜냐, 살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모듬살이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간섭하고 나서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모듬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듬살이가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364. 강요에 의해 부부가 된 사람들의 일상적이 삶에서도 사랑이 자랄 수는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종류의 관계도 상당히 깊은 사랑의 간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가족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 삶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도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나머지 한쪽을 발견했을 때 여기서 생기는 사랑과는 견줄 수 없지요. 음유시인이 찬양한 사랑, 오늘날 우리의 이상이 되어 있는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 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 놀음은 쾌락을 겨냥한 관계입니다. 쾌락이 끝나면 사랑 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366.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370.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사랑이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삶의 양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이 은밀한 게 다 이 때문이랍니다.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사랑의 고통이란 다른 고통이 아니라 곧 삶의 고통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삶이 있는 거죠.

 

373.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381. 어떤 뜻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삶이라고 하나요? 나는 그때 우리는 자아나 욕망에 의지하면서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 안의 인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자각하는 문맥에서 살아야 한다. 이런 뜻으로 한 말이었어요. 힌두교 경전에 보면, “오로지 신만이 신을 섬길 수 있다는 말이 나와요. 신을 경배하고 신의 말씀에 따라 살자면 자신과 그 신이 표상하는 영적인 원리를 동일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394~395.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 무구한 한 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 나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식물 생장의 신비이자 전쟁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412~413.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 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 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415.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데 있는 것이지요.

 

 

 

 

3.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와 전체적인 뼈대

이 책은 대담 내용을 엮은 도서이다. 방송을 보는 느낌으로 빌 모이어스가 질문하고 조셉 캠벨이 답변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세부 목차는 총 8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옮긴이의 말

빌 모이어스의 서문

1. 신화와 현대 세계

2. 내면으로의 여행

3. 태초의 이야기꾼들

4. 희생과 천복(天福)

5. 영웅의 모험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지혜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8. 영원의 가면

 

1장에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있는 신화의 여러 모습을 소개하고 있어 신화라는 것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우리네의 이야기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신화를 잃어버린 우리 사회가 문제가 무엇인지, 왜 우리에게는 신화 공부가 필요 한지를 느낄 수가 있다. 

2내면으로의 여행에서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의 필요성을 알려주고, 나 자신이 그 스스로 완전한 존재이며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는 용기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3태초의 이야기꾼에서는 다양한 문화권에 존재하는 신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모습들이 신기하게도 비슷하며, 4희생과 천복에서는 지금의 삶을 온 맘을 다해 살아가되, 평생 가슴 뛰며 살 수 있는 나만의 천복 찾기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5영웅의 모험에서는 삶은 고통이며 영웅이 되는 길에는 희생이 따르는 것이 숙명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귀환을 믿으며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의지를 강조하고 있어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6조화여신의 은혜에서는 그간 억압받던 여성의 입지를 재고찰 해주고 있으며, 7사랑과 결혼 이야기에서는 사랑을 경험하기 위한 용기,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8영혼의 가면에서는 결국은 소중한 존재로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목적지가 아닌 천복을 따르는 여행길 자체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준다. ‘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여운 있는 마무리를 하고 있어 책을 한동안 덮을 수가 없기도 했다.  

 

2) 감동적이었던 내용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 신화에 대한 나의 오해를 깰 수 있었던 점에 감사한다, 사실 신화는 나에게 예전부터 전해지던 이야기 라는 인식이 강했고 신화 관련한 책을 읽더라도 크게 마음에 와닿는 경험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신화의 중요성에 공감을 하게 되었고 신화의 전승없는 우리네 삶이 얼마나 팍팍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 같다.  또한 조금 더 신화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하다. 앞으로 다시 몇 번을 더 읽어야 완벽한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단지 관련된 책을 더 읽어보자.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덮고 나니 Amor Fati, 천복, 고통, 영웅의 여정 등의 단어들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나의 현재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는 것 자체로 나는 왠지 위로받은 느낌이 들었다. 인생은 고통이라는 말 또한 왠지 '아 그래 원래 그런 거였어' 라며 나의 가슴을 촉촉히 적셨다. 욕심을 부리고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에게 실망하고...그러는 과정들이 그간 너무 힘들게 느껴졌던 탓이리라. 또한 왜 이렇게 시간이 지날 수록 책임질 일도,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은지 그러한 모든 것들이 내게만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삶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라 생각하니 기운을 낼 수 있었다. 거울 속의 나를 향해 미소지으며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그리고 현재 나의 가장 큰 숙제이기도 한 천복찾기! 아마 천복을 찾지 못해 아직도 하루하루가 이렇게 괴롭게만 느껴지고 방황의 시간이 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깊은 고독이 수반되는 내면 탐색을 통해 가슴이 가르쳐주는 천복을 찾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오랜 시간의 고독을 감수해서라도 꼭 찾고 싶다. 그리고 천복을 찾는 그 날, 그 길을 향해 과감히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영웅이 되어라. 모험을 떠나라. 라는 부분도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니! 용과 싸우고 파도와 싸우며 모험에서 돌아와 당당히 귀환하는 나의 모습을 떠올려보며 왠지 웃음이 났다. 10대 풍광에 모험에서 귀환한 나의 멋진 모습을 올려 놓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아울러 다시 한번 조셉 캠벨의 결혼에 대한 시각을 읽으며 내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결혼을 하고 서로 편하고 익숙해지면서 배려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누구보다 소중한 관계를  깨닫고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가 인생에 가장 중요하다는 그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찰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3) 보완점

대담형식이고 그림과 사진 등 예시들도 많아 생각보다는 쉽고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즉각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여러 번 반복하여 읽어내야만 했다. 반복하여 읽은 후에도 왠지 완벽히 이해한 느낌이 아니라 좌절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내용 자체가 고차원적인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고, 챕터가 나눠져 있긴 하나 일목 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듯한 느낌보다는 여기 저기 흩어져있는 모래알을 찾는 기분이 들었다. 이에 내가 저자라면 나같이 신화에 대한 일천한 지식만을 가진 일반 독자들을 위해 책의 구성을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고 또 그래서 독자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 같다.

 

우선 독자들이 조셉 켐벨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더욱 잘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왜 그가 이렇게 신화를 공부하게 되었는지 등 그의 일생에 대한 소개 및 신화가 그의 인생에 미친 영향력, 그리고 그가 신화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등 이 책의 관심도를 높이고 또 몰입도를 이어갈 수 있는 내용들이 맨 앞에 제시되면 좋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중간중간에 죠셉의 경험담을 들을 수 있긴 하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책일수록 작가와의 친밀도가 뒷받침이 될 때 끝까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는 만큼 책의 앞단에서 부터 좀 더 독자의 마음을 꽉 끌어당길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지 않았나 한다. 실제 그 사람의 인생을 예시로 기술되어 있는 책일수록 감동이 더한 법이니까 말이다.

 

빌 모이어스가 조셉 캡벨에게 선생님이 왜 신화를 공부하게 되었는가. 신화란 당신에게 무슨 의미인가. 등을 물어본 내용들을 모아 놓으면 더 좋을 것이나 일목요연하게 엮기가 어렵다면 조셉 캠벨의 생애와 그의 지인들이 밝히는 그에 관한 에피소드 등을 정리하여 저자에의 호기심을 높이거나 그와의 친밀도를 높이는 것도 고려 해봄직하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은 이 책을 다 읽은 후 독자들이 천복을 찾기 위해, 나만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지침들을 따로 정리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의 중간 중간에 이러한 방법들이 나오기는 하나 마지막에 마무리로 따로 정리하여 보여주었다면 책을 덮으면서 나의 구체적인 실천법을 짤 수가 있어 더욱 보람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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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22:07:37 *.160.136.54

저자신 <신화의 힘>을 처름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내용 이해 안됨, 도대체 무엇을 말함인지... 덕분에 첫번째 과제에 대한 스트레가 극도로 심했었죠.

금주 세번째 책읽기를 하고 나서야 조셉 캠벨이 무엇을 말함인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그 사색적 깊이가

얼마나 굉장한지가 이제서야 조금씩 와닿기 시작 합니다.

 

천복을 찾는일.

저는 마흔살에 들어서서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쫓아 갈려고 하는지를 깨달을수가 있었습니다.

결혼을 통한 풍요로운 삶과 연구원 여정을 통해 박윤영 님은 훨씬 빨리 자신의 천복을 찾게 되겠지요.

<신화의 힘>을 통한 촉촉한 느낌 그대로 일년의 여정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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