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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4일 11시 42분 등록

Book Review

강종희

2014. 4.13

 

 

  1. 저자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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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3 26, 조셉 캠벨은 뉴욕주 화이트 플레인에서 카톨릭 집안인 찰스 캠벨과 조세핀 캠벨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곱살 때 서부활극을 모티브로 한 빌의 와일드 웨스트쇼를 보다가 땅의 소리를 듣고 창과 화살을 들고 다니는 인디언의 이미지에 매료되었다. 이후 그는 평생 카톨릭 전통과 미국 인디언 문화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세계관은 이 두 신화적 관념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역동에 의해 형성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일랜드계 카톨릭 유산에서 비롯된 의식과 상징, 다양한 전통에 깊이 빠졌으며, 한편으로는 원시 부족들에서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전체 풍경과 자신의 하나됨을 보여주는 절대적인 선험이자 보편적인 내재를 끊임없이 다양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묘사한 직접적인 경험에 매료되었다. (Historical Atlas , I.1, p. 8)

열살 때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실제 거주했던 델라웨어의 인디언 부족 이름을 딴 "Lenni-Lenape” 라는 자신의 부족을 창시하였으며, 미국자연사박물관을 수시로 방문하며 토템기둥과 가면에 매료된 그는 이후 평생에 걸쳐 관련 유물들을 탐색하고 수집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카톨릭기숙학교인 캔터베리 사립고등학교를 다니며 평탄한 성장기를 보내던 그는 1919년에 화재로 할머니와 가족의 전재산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다트머스 칼리지에 진학, 이후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긴 그는 중세문학을 공부하며 재즈밴드에서 연주를 하고 달리기선수생활을 하는 등 활발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서왕의 전설을 공부하며 석사를 마쳤고, 이후 장학금을 받고 파리대학에서 공부한 후 다시 독일 뮌헨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유럽에 있는 동안 캠벨은 처음으로 모더니니즘의 석학들, 앙트완 부르델, 칼 융, 폴 클레,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지그문트 프로이드를 접하고 그들의 예술과 통찰력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과의 만남은 궁극적으로 그가 모든 신화는 인간심리의 창조작품이며, 예술가들은 동시대 문화권에서 신화창조자이고, ‘신화는 심리적, 사회적, 우주적, 정신적 현실을 설명하려는 인류의 보편적 욕구의 창의적인 발현이라는 자신의 이론으로 발전시키는 토양이 되었다.

1929년 대공황시절의 미국에 돌아온 그는 모교 컬럼비아에서 박사 입학 및 교편의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거절당하고, 2년간 가족과 교류하며 책을 읽고 논문을 쓰는 일로 시간을 보내다 미국의 영혼’(soul of America)를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그의 삶의 목적을 발견하겠다는 포부로 전국일주 여행에 나섰다.    


9k=그는 이 여행 중에 전공인 문학과 일생동안 그를 매료시킨 미국인디언문화, 원시시대에 대한 관심을 접목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인류를 돕는 최선의 방법은 자기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크리슈나의 격언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한 캠벨은 이곳에서 존 스타인벡과 에드 리켓 등과 교유하며 글을 쓰고 70여 곳이 넘는 대학에 지원서를 보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캔터베리 스쿨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문학교수직을 제안 받아 이곳에서 38년간 교수직을 역임했다.

이후 그는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다수의 역저를 편집하면서 자신의 책을 내기 시작했다.


조셉 캠벨의 저서

  •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Bollingen Series XVII: 1949). 이 책에서 그는 ‘monomyth’(원형신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서 차용한 단어로 모든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이자 보편적 패턴이라 할 원형신화의 개념을 소개했다.

  • The Masks of God: Primitive Mythology (Vol. 1: 1959)

  • Oriental Mythology (Vol. 2: 1962)

  • Occidental Mythology (Vol. 3: 1964)

  • Creative Mythology (Vol. 4: 1968)

  • The Flight of the Wild Gander: Explorations in the Mythological Dimension (1969) Myths to Live By (1972)

  • The Mythic Image (1974)

  • The Inner Reaches of Outer Space: Metaphor as Myth and as Religion (1986); unfinished Historical Atlas of World Mythology (1983-87).

이와 같이 그는 탁월한 편집자이자 저자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진정한 재능을 펼쳐보인 것은 강연을 통해서다. 천부적인 스토리텔러이자 탁월한 강연가로서 캠벨은 1956년에 국무부의 외무연구소(Foreign service institute)에서 강의를 요청 받았는데, 이때 어떤 메모도 없이 이틀 동안 강연을 펼쳐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그는 17년간 외무연구소의 연자로 초청되었으며 다양한 연구기관과 행사에서 더욱 다양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이후 사라로렌스대학에서 퇴직한 그는 스스로 태평양 연안의 천국이라 이름한 은퇴지에서 저술활동에 집중하면서, 1년에 두 달은 강연여행을 다녔다.      


1985, 국립예술클럽에서 캠벨에게 문학 부문의 명예 메달을 수여할 때, 제임스 힐먼은 그를 가르켜 우리 시대의 그 어떤 석학도, 프로이드나 토마스 만, 레비 스트라우스도 캠벨 만큼 세계의 신화적인 감각과 그 영속성을 일상의 인식으로 가져오지는 못했다고 치하했다.


조셉 캠벨은 1987년 암에 걸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1988년 미국공립방송인 PBS에서 수년에 걸쳐 빌 모이어와의 대담 형식으로 만들어낸 조셉 캠벨과 신화의 힘을 방송함으로써 전세계 수백만 명이 그를 만나게 되었다. 캠벨이 사망하자 뉴스위크는 캠벨은 미국 역사상 드물게 대중문화로서 수용된, 가장 귀중한 지성인의 한명으로 남았다고 그를 기렸다.


말년의 그는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호기심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이라는 작품을 써나가는데 있어 예상치도 못한 플롯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말한 쇼펜하우어의 문장을 즐겨 언급하곤 했다. 서부극에서 인디언에 매료되었던 소년시절이 캠벨을 어디로 이끌었는가를 생각하면, 쇼펜하우어의 관찰은 분명, 진실임에 틀림없다. (Joseph Campbell Foundation에서 번역,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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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음에 들어온 글

 

감히 말합니다만,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것이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 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p32)

 

그래요,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 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됩니다. 중국에서 ()’를 나타내는 이미지를 보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서로 꼬리를 물고 상호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음양(陰陽)의 관계, 남성의 원리와 여성의 원리가 지닌 관계를 의미합니다. 결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결혼을 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p33)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해야지, 상대를 위한 희생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다시 잘 해석한 글이 있을까? 자꾸 귀에 들어오는데, 명확한 의미는 모르겠다. 지금 나의 딜레마와 맞닿는 부분이어서인지 자꾸 밟히는 글이다. 관계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상대를 위한 희생이라고 인식하면서 의미 있는 희생이 있는 일방적인 강압과 포기로 떨어지게 되고 관계는 파탄으로 다가서는 것 아닐까.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p41)

 

갔다오기를 통한 변신과 성장의 코드가 거의 모든 이야기의 원형적 구조이고, 성인식, 결혼과 같은 통과의례는 이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체험하게 해주는 사회적 장치다. 결혼에 대해서 나는 너무 공부를 하지 않았다. 가족을 이룬다는 것과 성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나 부족하다. 경제적인 인간으로서 기능하기 위한 공부와 기술을 익혔을 뿐이다. 가족 간의 대화를 회사에서 팀프로젝트 진행하듯 하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게 나에게 더 효율적이고 성과로 이어지는 방식이었다 보니, 나는 15년의 결혼생활보다 15년의 회사생활에 훨씬 많은 것을 쏟아 붓고 살았던 거다.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p48)


, 자동차는 벌써 신화가 되었어요. 이미 우리의 꿈이 되었으니까요. 이제 비행기도 우리의 상상력을 섬기는 존재가 되었어요. 가령 비행기가 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세가 상징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지요. 인간은 이승의 속박에서 영혼을 해방시키고자 하는데, 뱀이 이승의 속박을 상징한다면 새는 이승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상징하지요. 이제부터 비행기가 그 역할을 맡는 것입니다. (p53)

 

이야기를 지어내고자 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상징의 의미다, 하핫~ 온 몸으로 땅을 안고 디디고 살아가는 뱀은 이승의 속박이구나. 좋아, 좋아! 뱀에 관한 신호와 민담이 그토록 많은 데는 이유가 있겠지. 새는 자유를 향한 인간의 욕구, 혹은 완벽한 자유, 즉 죽음의 은유? 다이지로 모로호시의 조류도감이 이것과 완전히 일맥상통하는 만화였던거지. 써먹을 데가 많겠구나. 창작자에게.

 

인류는 기원전 5백 년 경에 큰 전기(轉機)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만일에 노자가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설이 옳다면)가 살았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천체 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p71)

 

기원전 5백 년 경에 이런 사상의 빅뱅, 이성의 빅뱅이 일어난 까닭은 무엇일까?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신화의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 커녕 질문도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하고 반문합니다. 성냥을 켜면 불이 입니다. 불이 무엇이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됩니다.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의 신화도 있고, 단혼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혼이든 상관없습니다.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잇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p74-75)

 

시애틀 추장은 구석기 시대 마지막 대변자 중 한 사람이었지요. 1852년을 전후해서 미합중국 정부가 나날이 늘어가는 미국 국민을 이주시키기 위해 그 부족의 땅을 팔 것을 요구했을 때 시애틀 추장은 명문의 해답을 보냈지요. 이 서한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도덕의 문제, 진짜 도덕의 문제를 더 이상 서명할 수 없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 인용해보지요.


시애틀 추장은 구석기 시대 도덕률의 마지막 대변자 중 한 사람이었지요. 1852년을 전후해서 미합중국 정부가 나날이 늘어나는 미국 국민을 이주시키기 위해 그 부족의 땅을 팔 것을 요구했을 때 시애틀 추장은 명문의 해답을 보냈지요. 이 서한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도덕의 문제 진자 도덕의 문제를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 인용해 보지요.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이 지구라는 땅 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 한,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그대들은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 백성의 삶에 묻어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 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줍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주며 우리 자식들을 먹여줍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 강 또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 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여겨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이나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주십시오.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르쳐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은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땅을 낳은 것은 이 땅의 모든 자식을 낳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육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의 냄새에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수풀은 어디에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 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는 그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p78-81)


가령 독수리와 뱀이 싸우는, 우리 주위에 아주 흔한 이미지를 하나 예로 들어 봅시다. 뱀이라고 하는 것은 땅에 붙박여 사는 동물입니다. 독수리는 영적인 비상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이 두 동물의 싸움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가 늘상 체험하는 갈등과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이지요. 이 양자가 하나가 되면 놀랍게도 용의 이미지가 됩니다. 용이라면 날개 달린 큰 뱀이 아니던가요? 이 세계에 이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폴리네시아 신화를 읽건, 이로쿼이즈 인디언 신화를 읽건, 이집트신화를 읽건 그 이미지는 동일해요. 어떤 신화에든 여기에 관련된 똑 같은 문제가 등장합니다.(p85)


용이 이승의 사투와 영적인 자유를 한 몸에 결합한 상징임을 처음 알았다. 재미있다!!!!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p89)

 

그들(몽상가, 영적인 지도자, 영웅...)은 모두 자기네의 방패막이가 되는 사회에서 뛰쳐나와 미지의 어두운 숲으로, 불의 세계로, 원초적인 경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이지요.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해석되어 있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에 범접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잇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p89)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 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있는 것이니까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p92)

 

먹는다는 것과 죽인다는 것의 화해. 이것에 대해 어떤 도덕적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의례의 기원이라니.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라는 말이 와 닿았다. 사고라는 것이, 도덕이라는 것이 아주 원시적인 시대의 동물로서의 인간에도 존재했다는 것이고, 최초의 인간은 몰라도 진화하면서 그런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것이 놀랍다.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게 하기 위해서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이 양자는 대응하는 상징입니다.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입니다. 삶 역시 한 세대에서 이울면서 다음 세대로 넘겨져 거듭납니다.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합니다. 끊임없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삶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뱀 역시 삶에 대한 놀라움과 섬뜩함 같은 이미지를 지닙니다.

 

더구나 뱀은 주로 먹는 것과 관계되는 삼의 아주 원초적인 기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을 먹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어요.… 뱀이 무엇을 잡아먹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원형질적인 삶의 모습에 원초적인 의미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신비입니다. (p96)

 

삶은 섬뜩한 것이다, 으악.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고,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 죽고 또 다시 일어서고. 산다는 것의 맨 얼굴은 실제로 무자비한 충격일 때가 많지 않은가. 직면하고 싶지 않을 뿐, 알고 있다.

 

그게 바로 ‘하나의 금제’라고 하는 민담의 표준 모티프랍니다. <푸른 수염>이야기를 생각해 보세요. 푸른 수염은 아내에게 “저 벽장문은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디 이게 지켜집니까? 아내는 그 금제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를 보아도 하느님은 하나의 금제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p106)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 뜻은 다른 데 있는 표현법입니다만일에 은유를 은유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를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달라고 한 뒤, 그 메뉴에 비프스테이크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페이지를 씹어먹는 것이나 같지요. (p116)

 

말 참, 은유를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도 있구나. 역시 위대한 스토리텔러답게 개념을 참 쉽게 잘 풀어낸다.

 

인간의 발달단계는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 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두 가지를 두루 섬깁니다. 즉 젊은이를 이 세상의 삶과 만나게 할 때도 신화가 끼여들고(여기에서 바로 종족 특유의 관념이 기능합니다), 이 삶에서 해방될 때도 신화가 개입합니다. 말하자면, 종족적 관념은 인류의 근본적인 관념의 껍질을 벗기는데, 이 근본적인 관념이 바로 우리를 내적이 삶으로 안내해준답니다. (p142)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신화에서 배웠어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빛을 내는 전구인가, 전구가 수레가 되어 실어 나르는 빛인가.... 나이를 먹어갈 때 생기는 심리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죽음의 문을 한사코 거부해요. 그러나 육체는 의식의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p143)

 

중년의 문제.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다고. 의식은 위로 위로 솟구치는데 육신은 더 이상 청춘의 빛나는 한 때를 벗어났다. 그것은 나쁜가? 어차피 한 번도 나의 신체적 기능에 제대로 기대어 살아본 적은 없는 듯. 아니다. 이것도 오만이다. 먹고 사는 것, 일하고 뛰고 웃고 즐기는 데 필요한 것이 정신 뿐이라는 이 따위 오만. 몸을 너무 무시하며 살아서, 중년이고 청년이고 별 차이 없다는 착각. 아니지. 돌봐야지. 그러므로 중년의 초입은 질풍노도의 시기이자, 성년의 사춘기가 맞다. 정체성의 혼란, 그러니까 내 몸과 정신이 일치하지 않는 부조화의 기간, 거기에 무엇보다 무거운 생활의 압박에 더해져 멘붕의 시간을 겪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살 날이 이리 많은데, 어쩌라고!’를 외치며.

 

신화를 보면 사냥하는 맹수와 사냥감이 되는 짐승이 어울려 의미심장한 역할을 연출해냅니다. 이 양자는 삶의 두 측면을 의미하지요. 즉 공격적이고 죽이고 정복하고 창조하는 삶의 측면과,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삶의 측면을 암시하는 것이지요.(p146)     

 

짐승이 화살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 사냥꾼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않는다는 식의 자기 희생적인 금제(禁制)를 지킵니다. 그 동물의 죽음에 대해 일종의 신비에의 참여를 하는 거지요.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 짐승의 죽음은 자기네들로 인한 것이고, 또 그 짐승의 고기가 자기네의 음식이 될 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동일시, 신화적인 동일시가 개입합니다. 따라서 죽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 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p147)

 

사냥이 의례이고, 먹는다는 것이 곧 다른 생명을 취한다는 것인 만큼 그 의미가 절대 가벼울 수 없다. 먹는다는 행위는 곧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다른 생명을 빼앗는 것이므로, 신성한 의례로 승화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담게 된다. 그래서일까.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들과 생기는 그 연대의식, 동질감의 뿌리는 이토록 원시적인 기원에 있는 것인가.    

 

 인디언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지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랍니다.(p156)

 

어떤 사람을, 또는 집단을 좌빨로 낙인찍는 것도 이러한 타자화, 비인칭의 그것으로 만들어 죄의식 없이 공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가. ‘그대그것의 차이.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의미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룬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신화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부패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연 자체를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따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p189)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p190)

 

읽고 또 읽는 것, 지난 한 해 몇 권의 책을 읽으면서 돌아본 것에 대해 고민해보아야겠다. 결실을 맺지 못하면 앞으로 더 나아가기 어렵다. 편하게 슬슬 흘러가듯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이제 치열해질 때가 다가왔다. 

 

가치, 즉 평가의 결과는 삶을 지배하는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령 사냥꾼의 의식은 늘 외계의 동물에게도 쏠립니다. 그의 삶은 동물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래서 사냥꾼의 신화는 외계지향적입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씨가 죽고, 여기에서 새 식물이 움트는, 말하자면 식물의 경작과 깊은 관계가 잇는 농경 신화는 내계 지향적입니다. 사냥꾼에게는 동물이 신화를 촉발합니다.  권능과 지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숲으로 들어가 금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동물이 나타나 권능과 지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농경 문화에서는 식물의 세계 자체가 스승 노릇을 합니다. 식물의 세계는 생멸의 반복이라는 의미에서 사람의 삶과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내계지향적 관계가 이루어지지요. (p194)

 

빵의 역사에서 말한 농사의 종교적 함의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멋지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던 책의 글귀가 이 곳에 와서 더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역시, 먹는다는 행위의 본질적인 의미를 어떻게 신화가 다루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성서를 보면 은 카인이고, ‘부싯돌은 아벨입니다. 성서에서는 아벨이 사냥꾼이라기보다는 양치기로 나옵니다. 여기에서 양치기와 농부는 서로 반목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하는 것은 농부입니다. 이것은 농경 문화권을 정복하고, 피정복자인 농경민들을 욕보인 수렵민족, 즉 유목민의 신화입니다. (p200)

 

성서 문화에서는 승자가 되는 쪽, 선한 쪽은 늘 둘째 아들이에요. 둘째 아들은 나중 온 자 아닙니까? 즉 히브리인을 상징하지요. 둘째 아들이 그 땅으로 왔을 때, 이미 그 땅에는 맏아들, 즉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카인은 농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 당시의 도시 문화를 상징하지요. (p201)

 

왜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공평무사하지 못하고 곡식은 받지 않고 양만 좋아했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명쾌한 이해관계가 있었던 것이었군.


자살 역시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사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p213)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대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 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 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p217)


나는 그 숲에 들어섰다. 다시 돌아나갈 길은 보이지 않고 헤아릴 길 없는 불안과 쇠락의 기미를 감지한다. 무서운 숲이 맞다. 그럼에도 희망과 기대는 자꾸 솟아오른다. 철이 없는 탓인지, 아직도 하고 싶은 것들이 내 안을 채워 정착하지 못하는 철없는 중년.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날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p227)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가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모험의 구조와, 모험이 지니는 영적인 요소는 태고의 성인식에서 충분히 예고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 성인식으로 통하여 아이는 아이의 시절을 포기하고 어른이 되기를, 혹은 유아기의 인격과 정신을 벌고 책임있는 어른이 되기를 강요당하지요. 이것은 모든 사람이 거쳐야 하는 일종의 기본적인 과정이며 정신적인 변모 과정입니다….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p230-231)


우리의 장례식 또한 치르지 못한 중년의 성인식과 같은 의미가 있었으리라. 제대로 죽었어야 하는데 나는 또 다른 데에 온 정신에 팔려 한번 죽어보지도 못하고여튼 의식의 중요성, 무언가 계기로 삼고 달라지기 위해 필요한 의례의 중요성을 강의나 워크샵 과정에서도 응용할 필요가 있다. 써먹자!


여기서 핵심은,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고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모든 신화가 다르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 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P.233)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더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영웅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인식하지 못하던 것, 혹은 의식에서 빠져 있던 것과 만납니다. 이렇게 되면 영웅에게는 문제가 생깁니다. 즉 그것을 만난 상태로 그곳에 머물 것인지, 세계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홍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원래 있던 세계로 귀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p237)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하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이것은 운동선수가 코치를 찾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좋은 코치는 선수에게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아요. 좋은 코치는 선수가 달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선수의 천성적인 동작 양식만 조금 수정해줍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게 좋은 스승이 되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p263)


다스 베이더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거지요. 그는 로봇입니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위협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이 조직은 우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조직이 과연 우리 인류의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조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 조직을 더 이상 섬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 정도의 행동은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p265)


스타워즈를 보는 행위, 그 에피소드를 수십년이 지나도록 밤을 새고 재개봉 영화관에 가서 감독판으로, 불과 수초의 장면이 더 추가된 편집분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며 다 함께 몰려가 관람하는 행위는 이러한 신화를 목격하고 그 경험을 의례처럼 만들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여전히 신화가 필요한데, 그 욕구를 스스로 알지도 못하고, 채워줄 신화는 너무 오래 전에 그 기능을 빼앗겼기에.


조직의 식물인간이라는 표현은 매우 익숙하며 그럼에도 매우 불편한 단어다. 너무 가까운, 그럼으로써 그 비인간성이 더욱 도드라지는 상태. 다스베이더는 관료일수도 있고 기업의 임원일 수도 있다. 인성이 마비된 인간. 조직을 인간보다 앞세우는 인간. 인간을 희생해 조직에 기생하려는 인간. 무엇이 되었든 전하는 메시지는 캠벨의 해석으로 충분히 알겠다.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 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p273)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 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고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p273)


자아를 잃는게 아니라, ‘놓는다’. 자아를 놓는 행위의 중요성. 이게 되면 부처가 되는건가. 그러나 부처는 도처에 있고, 나도 부처가 될 수 있고 너도 부처가 될 수 있다 했다. 집단적인 의식의 한 가운데에서도 나를 놓지 못하는 고집과 한계 속에서 불편했다. 기쁘다 어색하다 불편하다를 반복했다. 이런 노골적인 상황을 제처놓고, 나는 나의 용을 처치하여 나를 해방시킬 수 있을까. 1년이 그런 여정이 될 수 있을까?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p286)


여자가 물 속에 있었다는 것은, 결혼을 통하여 여자가 합리적, 의식적인 세계에서 무의식의 강박 충동의 세계로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수중 여행 모티브는 거의 다 이런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지요. 결국 개성이, 의지로 통제가 가능한 영역에서 초개성적인 충동의 영역으로 함몰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것은 개인에 따라 통제가 가능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어요.(p290)


물속에 잠긴, 강박 충동에 사로잡힌 삶. 결혼이 물 속에 잠긴 삶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의미 심장한가. 초개성적인 충동의 영역으로 함몰되었다고. 이 부분의 영어 원문이 어떠한지 찾아보고 싶다. 너무 잘 알 듯, 그럼에도 또 모를 듯 아슬하게 다가오는 문장들. 모든 인간의 최우선 순위는 본인의 욕구다. 그 목적이 안전이든 생존이든 성공이든 뭐든 여튼 자신의 욕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것은 모든 동물의 당연한 본능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나의 욕구를 타인을 위해 묵살하거나 타인의 욕구를 우선시해야 하는 결혼. 강박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어떻게 통제하는가,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혼란기다.   


모험 자체가 모험에 대한 보답이고 말고요. 하지만 모험이라는 것은 위험해요. 모험에는 긍정적인 가능성도 있고 부정적인 가능성도 있는데, 둘 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길이 아닌 우리의 길을 좇고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강한 권능자의 땅으로 들어서고 있는 셈이지요….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악마와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지요. 그러나 희망도 있어요. 우리를 부름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짐으로써 여행을 상상 밖의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노인은 도처에 있으니까요.(p291)


니체에게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의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 또한 그만큼 큽니다.(p297-298)


악마를 삼켜버리느냐 삼킴을 당하느냐가 문제로구나. 인내가 능력이라고 했던 이충헌 기자의 칼럼이 떠오른다. 고통이든 뭐든 간에 이것을 어떻게든 소화하여 견뎌내는 것이 능력, 내가 주인인 삶을 만드는 유일한 길.


아니에요.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p303)


자기계발서가 싫은 이유는 그 노골적인 지시문에 있다. 나의 앎과 삶이 유일하기에 다른 누군가의 지시 그대로 이뤄질 수 없지 않나. 무엇을 따르든 소화하든 그 뒤에는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상상과 해석의 여지가 있는 상징으로 이야기하는 신화, 다른 이의 눈과 목소리를 빌리는 문학이 훨씬 더 큰 깨우침과 감정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영어에는 아버지와 화해(atonement)’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이 화해는 곧 하나 되기(at-one-ment)랍니다. (p307)


화해는 하나 되기’(at one-ment). 이런 뜻이 있었구나. atonement. 원래 속죄, 회개라는 뜻인 단어.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 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곤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p320)

우리 안에 일어나는 심리적인 격동과 외부적인 현상을 이해하기 만들어낸 개념이 신이라고 한다면, 그렇다. 우리가 곧 신이다. 그렇구나.


그래요, 어머니는 모든 자식을 고루 사랑합니다…. 그래서 여성 원리는, 자식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포괄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격합니다.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질서와 사회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실제로 아버지 이미지는 사회 속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기능하지요.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지요.(p334)


가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 조건부 사랑이라는 생각, 내가 이렇게 무엇을 잘 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나를 신경쓰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로군. 우리 아이들도 나와 남편을 그렇게 인식하게 될까? 그리고 언젠가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이해하게 될까? 나는 마흔이 넘어서야 좀 알 것 같은 이해의 초입에 와있는 데. 말해 뭐하리. 인생은 각자 깨닫는 것. 진도 빼기가 아니다.


아모르적인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입니다이런 사랑은 교회가 주장하는 사랑과는 극과 극이지요. 이것은 개성적인 사랑,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입니다. 나는 서구를 위대하게 한 것, 다른 전통과 전혀 다른 전통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 경험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곤 한답니다….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남들에게서 이어받는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그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할 수 밖에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획일적인 체계는 기계적인 체계입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다른 기계와 똑 같은 기능밖에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p343)


이분법적인 기독교의 병폐를 그나마 상쇄한 것이 개인적인 사랑, 개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체험을 우선시하는 위대한 개인주의의 발현인가. 아모르적인 사랑. 생각지 않았던 부분이다.


진정한 결혼은 상대방에게서 동일성은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p345)


상대방에게서 발견한 나의 모습. 그것이 동일성이라면. 결국은 나에 대한 사랑이 진정한 결혼이 출발인가? 여튼 도피를 위한 결혼이 안 되는 이유는 알 것 같다. 나를 피할 방법이 어디 있다고.


서구 선진사회는, 개인을 살아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우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p350)


그렇지. 개인을 꽃피우기 위해 존재하는 사회가 자꾸 개인을 잡아 먹으려고 하니그런 현상이 계속 허용되다 보면 혁명의 순간이 오는 것이다. 늦기 전에 반성! 


권력! 권력이에요. 유럽역사의 근본적인 충동은 권력이에요. 그런데 그게 우리의 종교 전통으로 흘러 들어왔어요.(p362)


권력 충동으로 움직인 유럽. 권력 충동으로 꽉 찬 역사에 의해 사회지배층의 지배논리로 기능하게 된 종교. 그래서 누구보다 횡포한 권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 기독교. 철저한 이분법으로 나를 살리고 남을 죽이는 논리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정신의 체계화.


에덴은 있었던게 아니고 있게 되는것이군요.  

있는것이지요. ‘아버지의 왕국은 도처에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고통과 슬픔, 죽음과 폭력이 있는 이 세상이 에덴이라고요?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것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꾸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p413-414)


이 세상의 종말.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리는 순간. 연구원의 장례식도 그런 종말의순간을 체험하기 위한 소박한 제의였을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한번은 죽어야 한다. 죽음의 순간에 온전한 자신을 기뻐하며 죽을 수 있도록 우리는 자의적인 죽음의 순간을 미리 경험하려 했다. 그리고 심리적인 변화의 순간에 다시 보인 세상을 엿보고 싶다. 다시 한번 죽어봐야 하겠다. 

 

  1. 저자의 입장에서 다시

 

조셉 캠벨이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걸 알겠다. 이 책이 조셉 캠벨의 입문서라는 말도 알겠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기에 탁월한 기자의 입으로 한번 더 풀어낸 질문과 캠벨의 막힘없는 언변으로 나눈 대화를 그대로 옮긴 것이니 분명 맨땅에 헤당하듯 캠벨의 저서로 그대로 다이빙하는 것보다는 접근이 용이하리라. 그러나 원저를 읽고 다이제스트판에 접하는 것이 나의 방식인지라 읽는 내내 답답한 점도 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무리 헤메든 간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리뷰나 해설을 읽고 난 후 책을 접하는 것이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 일단 내 눈으로 내 맘으로 느낀 후에 다른 해석을 접하지 않으면 부정행위를 한 듯 개운치가 않다. 그러나 신화의 힘은 나의 찝찝함을 완전히 날려버릴 만큼 셌다. 캠벨 신화학의 다이제스트판, 해설판이라는 설명이 맞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신화의 힘은 빌 모이어와 조셉 캠벨이 수년간에 걸쳐 나눈 대화를 6편의 대담으로 묶어 방송한 PBS의 프로그램에 기반한 책이다. 책을 읽고 나니 그들의 대화를 화면을 통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연하게도 조셉 캠벨의 책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징과 은유와 본능과 통찰로 가득한 신화 이야기다.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저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뜯어보아야 하는데 자꾸 옆길로 새게 된다. 일단 이 책은 책을 기획하기 위해 구조를 짰다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대로 쓰여진지라 정교한 구성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각 장마다 주제가 매우 명확하고 흐름은 아주 자연스럽다. 일단 책의 구조를 살펴보자.

 

목차

옮긴이의 말

빌 모이어스의 서문

1. 신화와 현대 세계

2. 내면으로의 여행

3. 태초의 이야기꾼들

4. 희생과 천복(天福)

5. 영웅의 모험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지혜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8. 영원의 가면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 ‘현대의 우리가 왜 신화를 알아야 하는가라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신화의 기능과 의미를 살필 수 있는 각각의 장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각 장의 서두에는 그 장의 주제를 요약하는 캠벨의 어록이 기가 막히게 자리하고 있어 이해를 돕고 이 장에서 펼쳐질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  첫 장, 신화와 현대세계의 서두를 여는 어록을 살펴보자.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있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p25)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기 힘든 현대인들을 위해, 신화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암시를 주는 멋진 문구다. 이런 장치는 매우 유용하다.

 

각 장의 제목을 죽 살펴보면 오해의 여지나 미진한 부분이 없다. 딱 한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에필로그다. 이 책은 조셉 캠벨의 사후에 제작된 책이다. 빌 모이어의 서문에서 이미 이런 부분에 대한 언급이 있기도 하였지만 캠벨의 생애나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설, 약간의 평전 등이 추가되었으면 어땠을까. 끝나지 않았으면 싶었던 빌과 조셉의 대화가 광명의 순간에 대한 공감으로 끝날 때, 그것은 의미 상 대단히 적절한 엔딩의 주제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끝나기에는 너무 갑작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빌 모이어의 손으로든, 또는 번역가 이윤기의 손으로든 캠벨을 좀 더 제대로 보내주기 위한 마지막 글이 덧붙여졌다면 정말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그의 저서 리스트와 에피소드들이 어느 정도 소개되었더라면 캠벨의 세계로 초대하는 보다 충실한 입문서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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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13:55:55 *.228.119.26

신화는 어느 민족에게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문명화되기전에 기독교가 들어간 곳은 대체적으로 신화가 없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요정이야기(fairy tale)는 있어도 신화는 없습니다. 서구인들에게 신화는 그리이스 로마 신화 또는 북유럽의 오딘 신화 정도가 있을 듯 합니다. 신화는 어떻게 보면 그 민족의 화석이자 나이테와 같은 존재입니다. 고대인들이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가 그 나라의 언어로 적혀 현재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어쩌면 고대인에게는 신화는 DC 코믹스나 마블 코믹스의 같은 역할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고대인의 생각과 풍습을 현대의 언어로 다시 재구성해서 교훈을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은유와 상징속에 내포된 그들의 편견과 잘못된 생각까지도 함께 들어있기 때문에 잘 새겨 읽어야 할듯 합니다. 은유는 은유일뿐 그 자체의 본질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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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17:45:50 *.103.163.9

안 그래도 그 부분이 궁금했어요 fairy tale과 myth의 차이는 뭔지, 왜 영국과 프랑스에는 딱히 신화라 불릴만한 전통이 보이지 않는건지.  하지만 켈트족에도 분명히 신화와 전설이 있었는데 왜 이 부분이 그리스 신화나 바이킹 족의 오딘 신화만큼 회자되지 않았는지... 그것이 말씀하신대로 그 지역에서 기독교가 너무 빨리 헤게모니를 잡은 탓인지...  오히려 게임이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 류에서 이런 켈트족의 신화적 전통을 활용하는 모습은 보아온 것 같은데 말이죠. 여튼 흥미로운 신화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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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23:12:47 *.160.136.54

구조, 구성, 형식의 분석. 그렇죠. 중요 합니다.

 

그 중요성에 더하여 속살에 깊이 빠지는 진정한 매력은, 자신의 삶과 연관시켜 깊이있는 성찰을 하는 것입니다.

연구원 일년의 여정이후 얼마나 성장된 본인의 모습을 보게 될까요.

 

바다를 알기 위해서는 바다에 풍덩 빠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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