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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4일 11시 59분 등록

<신화의 힘>-조셉 캠벨

1. 저자에 대하여

1904년에 미국의 뉴욕에서 태어나 1987년에 생을 마감한 조셉 캠벨은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라는 다소 낯선 이름으로 불린다. 그는 어렸을 때 아메리칸 인디언의 민담을 듣고 감명을 받아 맨하탄의 자연사 박물관을 즐겨 찾았으며, 그 중 토템기둥에 매료되었다고 하니 이때부터 천복의 길이 시작된 행운아 중의 행운아이다. 캠밸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로마카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인디언 문화의 관련서적을 탐독했다고 한다.

캠벨은 대학을 졸업하고 영문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는 동안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왕의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파리대학과 뮌헨대학에서 신화를 공부했다. 1929년 미국으로 돌아온 캠벨은 영문학 대신 인도철학과 미술쪽의 공부를 하기를 원했으나, 대학 측의 반대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 후 5년 가까이 칩거하면서 독서, 사색, 습작에 몰두하며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게 된다. 누구나 부러워 하는 이 시간이 캠벨 인생에서는 불편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신화학자의 길을 가는데 밑거름을 만들어 주었을 것은 분명하다.

 1934년 미국의 명문 여자대학 새러 로렌스대학에 문학담당 교수가 되었으며, 1938년 그의 제자였던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하여 일생을 해로한다. 그리고 이 대학에서도 38년을 재직하고 퇴직하였으며 1987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캠벨의 저서로는 세계 각지의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웅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을 집필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그 후 <신의 가면>(1959-1968)을 비롯하여 <신화와 함께 하는 삶>(1972), <신화의 이미지>(1974), 그리고 최후의 역작인 총 25권의 <세계신화지도>(1983-1989) 등을 펴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중에게 어필되지 못했다. 그가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 죽기 전에 한 대담이 사후 1988년 미국의 PBS 방송국을 통해 방송되면서 신화가 현대에 미치는 영향을 알려주면서 이다. 이것이 <신화의 힘>(1998)을 탄생시켰다.

 캠벨은 어렸을 때의 호기심으로 한평생을 살았으니 신화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평생을 살아도 삶의 무게에 눌려 자신이 좋아하는 것조차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캠벨은 천복의 길을 찾고 걸었으니 대단한 행운아 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캠벨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대중과 상관없이 자신의 길에 매진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후에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통해 더 유명해진 사람이다. 하지만 캠벨은 내면의 울림을 따라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과연 나는 무엇에 평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0 “왜 하필이면 신화 같은 게 필요하냐” (중략)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 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à나도 왜 하필이면 신화 같은 것이 필요하냐고, 공부할 것도 많은데 우리가 그런 것까지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떨어내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11 영웅의 역정에서 얻은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12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중략)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à어찌 내가 영웅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까? 구도도 하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말이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26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에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길을 가는데 도료 표지가 없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도로 표지에 상응하는 걸 만들어서 길잡이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신화라는 주제를 마음에 두게 되면 우리는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à한 번도 신화가 인류의 표지판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신화는 허구, 현실과 동떨어진 옛날 이야기, 나와는 상관 없는 먼 세계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신화를 통해 읽어낼 수 있는 인류의 유전자가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것 같다.

30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은 것이 아니랍니다.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32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à결혼을 했으면서도 아직 결혼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럼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고 있는걸까 생각해본다. 남들 다 하는 결혼이라 하기 때문일까? 단순한 호기심에 의한 선택이어서 그럴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하나임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고통의 안내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34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34 젊은이들은 의례를 통하여 한 겨레 혹은 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데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의례를 베풀어주지 못한다는 것이군요. 사실입니다. 모든 아이는 거듭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어린 시절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à어린이가 건강하게 어린 시절을 떠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많은 몫의 기능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종종 어른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성인들을 보게 되고, 때로 이들은 신문이나 방송의 뉴스를 장식할 때가 있다. 어린 시절을 잘못 떠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들을 비판할 수 없음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된다.

38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학자들을 이렇게 부르면 큰일납니다만)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à항상 전문가를 동경했지만, 조화로운 사고와 통합능력이 없는 전문가가 되느니 차라리 조셉 캠벨같은 잡학가가 되고 싶다.

41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54 내가 <스타워즈>에서 보는 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 똑 같은 질문입니다. 기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우리에게 어떤 수단이든지 다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생의 과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말끔하게 정의해줄 듯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60 우리의 신화학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자기가 사회의 어떤 동아리에 속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요. 모든 신화학은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 자라납니다. 그런 신화학이 밖으로 나오면서 충돌하고, 충돌을 거쳐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가

61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à신화의 힘이 이 정도까지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느껴보고 싶다.

71 그런데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 우리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지 않고 측면에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à지나친 열정은 때로는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탐욕과 열정이 같은 뿌리임을 다시 생각해본다. 돈과 권력에 대한 열정은 탐욕으로 자라나므로 자신만의 경계의 선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76 하지만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 줄 수 있어요.

à나도 신화가 전달해주는 것을 배우고 싶다.

76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하면, 만유신론이라고 매도합니다. 하지만 이 만유 신론이라는 말은 사람을 오도하는 말입니다. 만유신론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로지 인신만 이 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이라는 관념은 그게 아닙니다. 이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 신학적입니다. 이것은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

77 오늘밤에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 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85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7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넘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시험이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반영하게 될 경우에 이것은 개인적인 단계의 꿈이 아닙니다. 이런 꿈을 원형적인 꿈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개인적인 것 같은데 사실은 신화적인 테마가 나타나는 꿈이 있습니다. 이 두 단계(개인적인 단계와, 개인적인 문제가 하나의 본보기가 되면서 일반적인 문제로 나타나는 단계)는 이 세계의 모든 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죽음과 직면하는 문제를 안고 있지 않나요? 이와 관련된 꿈은 표준이 되는 신비라고 할 수 있어요.

89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à이 세상에 이름을 남긴 수 많은 영웅들의 용기에 감사한다.

91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 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가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à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남의 생명을 먹고 사는 나의 생명은 얼마나 잔인하고 위대한가? 이것은 생명을 가진 자의 속성이며 숙명일까? 신화가 어떻게 해석해 줄지가 궁금하다.

102 …’’, 이것과 저것, 진실과 허위이 세상 만물은 대극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시인 블레이크는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고 했지요.

106 그게 바로 하나의 금제라고 하는 민담의 표준 모티프랍니다. <푸른 수염>이야기를 생각해보세요. 푸른 수염은 아내에게 저 벽장문은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디 이게 지켜집니까? 아내는 그 금제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를 보아도 하느님은 하나의 금제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à금제의 존재의 이유는 깨지기 위해서 일까? 나는 언제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나의 삶에 입문했을까? 시간을 돌이켜본다. 내가 스스로 그어놓은 경계의 선을 넘었을 때, 수 없이 많은 번민과 고뇌의 시간을 보냈지만 내 삶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금제….참 매력적이다.

117 셰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à여태껏 내가 범했던 오류이다.

124~125 모이어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초월을 부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데요, 혹시 이것이 종교적인 무아 상태, 황홀 상태의 부재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해보신 적은 없는지요? 초월을 부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가 마약에 기대는 것은 아닐는지요? (중략)

캠벨: 열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아요. 종교는 신비체험을 이야기하는 대신 사회적 문제, 윤리적 문제를 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지요.

à종교가 신비체험을 하게 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 낯설다. 항상 사회적 문제, 윤리적 문제에 대해 연설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종교인과 범인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26 ‘초월자라는 말의 본뜻은 모든 개념을 초월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시공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은 어떤 공간 안에서, 어떤 시간대에 생기는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것은 사물이 아닙니다)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à생각에 갇히지 않기 위해 애를 썼는데, 생각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틀이 될 수 있다니.

127 내 말은, 무엇이든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느냐, 없느냐는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부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둘 다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궁극적인 신비로서의 하느님은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

132 , 우리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금생을 사는 인드라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빠질지, 속세에 남아 있을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면서 사는 일은 모두 다 금생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때요? 내가 보기에는 아주 근사한 신화 같은데요.

à가족을 사랑하면서 사는 일, 우리가 해야 할 일, 아주 근사한 신화멋지다.

133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중략)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à고통이 없는 세상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 찬란한 발상인가? 한때는 나도 이런 세상을 꿈꿔온 적이 있었지만, 삶을 살면서 그 자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고통을 어찌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삶과 고통은 동체인것을. 그리고 나의 고통만 무겁고 남의 고통은 작아보일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 또한 자신의 감당할 수 있는 무게만큼 주어지기 때문에 누구에게다 버거운 것도 똑같을 것이다.

133 인생이라는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à누구나 인생을 통해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함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헤매는 고통을 감당하기가 한결 쉬울텐데

135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고 옳고 의로우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은 옳아 보이고 어떤 것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의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의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à이 속세의 착각일 뿐인 선과 악이 아무 차이도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 기준을 두고 살아야 할까?

138~139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직관에서 끊임없이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à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영원이 존재한다아주 심오하고 멋진 말이다.

3. 태초의 이야기꾼들

142 인간의 발달 단계는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146 인간은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은 맹수와 마찬가지입니다. 신화를 보면, 사냥하는 맹수와 사냥감이 되는 짐승이 어울려 의미심장한 역할을 연출해냅니다. 이 양자는 삶의 두 측면을 암시하지요. 즉 공격적이고 죽이고 정복하고 창조하는 삶의 측면과,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삶의 측면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à현재를 살고 있는 인간은 사냥꾼 중에 가장 강하고 탁월하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현존하고 있으므로.

147 짐승이 화살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 사냥꾼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않는다는 식의 자기 희생적인 금제를 지킵니다. 그 동물의 죽음에 대해 일종의 신비에의 참여를 하는 거지요.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 짐승의 죽음은 자기네 들로 인한 것이고, 또 그 짐승의 고기가 자기네들의 음식이 될 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동일시, 신화적인 동일시가 개입합니다. 따라서 죽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도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 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의 의례인 것이지요.

à우리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의례 행위가 놀라울 뿐이다. 관습에 의해 생활습관으로 굳어진 것들의 유례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예전부터 존재하였기에 어떤 의심이나 호기심 없이 그냥 투영되어 삶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 조셉 캠벨의 능력이 점점 감탄스러워진다.

163 성인식이 바로 이런 의례의 현대판입니다. 카톨릭 교회에 나가는 아이들에게 견진성사를 통해서 받은 이름이 있는데, 아이들은 바로 이 이름으로 나중에 성인식을 치러 받습니다. 원시인들의 성인식에서는 사제자가 입문자의 몸에 상처를 내거나 이를 쪼아내거나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인식에서는 사제가 웃으면서 뺨을 한 대 살짝 쳐주는 것으로 끝납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약화한 거지요. 이런 성인식은 치러봐야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유태의 관습 중 성인식에 해당하는 게 바르 미쯔바라고 하는 의례입니다. 성인식이 입문자를 정신적으로 변모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입문자 개인에게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성인식을 거치면, 소년은 전혀 다른, 씩씩한 성인이 되어 제 몫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168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à예술가들 중에서 이 의무와 책임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4. 희생과 천복

179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179~180 초원의 사냥꾼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의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à우리의 천복의 찾는 일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189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190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à그 동안의 나의 독서방법에 대해 반성을 갖게 하는 구절이다.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베스트셀러와 마음이 가는 곳에 눈을 머물게 하는 독서법이었다. 1주일에 1권이상을 읽으면 대단히 책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렇게 시간을 투자한 사람치고는 얇은 독서력을 갖고 있다. 우리 삶에서 접신 경험을 해볼 수 있는 방법, 독서의 힘은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인듯하다.

195 따라서 숲과 농경 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여기에서는, 개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는 이 이미지를 이용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하고 말합니다. 이 포도나무 이미지는 동물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농경 문화는 먹이가 될 식물을 끊임없이 추켜세웁니다.

198 신화를 익다 보면 가장 놀라운 게 바로 그 점이지요. 나는 평생 이 짓을 해왔습니다만, 한 문화권의 이야기가 다른 문화권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데에는 여전히 놀라고는 합니다. 같은 이야기의 복사판이 퍼져 있으니 놀라울 수밖에요? 차이가 있다면 옥수수와 야자의 차이 정도라니까요.

à사람의 욕망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싸이클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201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à누구나 죽지만 어떻게 죽어야 할지에 대해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성공이란무엇이든지 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가는 것, 자네가 이 곳에 살다간 덕분에 단 한 사람의 삶이라도 풍요로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성공이라네

213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 하지만 융 박사의 말마따나 상징적인 상황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à정신적인 탄생….삶을 살면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필수 요소이다. 이런 탄생을 경험해보지 못한 삶은 자신을 다 쓰고 가는 삶이 아닐 것이다.

227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à나는 아직도 가끔 두려울 때가 있다. 나의 선택과 행동이 옳은 것일까?에 대한 물음이 날 노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 동안의 걸어온 길과 욕망을 들여다본다. 미천한 재주와 강한 끌림, 마음을 두들기는 북소리에서 평생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될 때, 마음은 더 크게 이야기 한다. “Keep going”

5. 영웅의 모험

234~235 지구촌 전부가 우리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 마당에, 특정 국가, 혹은 특정 국민의 영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나폴레옹은, 20세기 히틀러의 19세기판입니다. 나폴레옹의 유럽 침공 역시 무서운 사건이었지요.

à새로운 영웅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241 현대인 노릇을 한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가족을 부양하는 많은 사람의 삶은 대단히 고단합니다이건 정말 끝없는 소모전이지요.

263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하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이것은 운동선수가 코치를 찾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좋은 코치는 선수에게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아요. 좋은 코치는 선수가 달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선수의 천성적인 동작 양식만 조금 수정해줍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게 좋은 스승이 되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à나는 마음의 스승을 모시고 그 분의 책을 접하고 있으니 얼마나 행운인가? 멀리서 볼 때보다 가까이서 보고 들을 때, 더 작아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건만, 스승님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큰 힘을 갖고 계시면서 일상에서 실천하셨으니, 내 마음에 그 분의 자리가 점점 커진다.

279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296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à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성장할 수 있음을.

298 앞에서 말한 내 여자 친구는 늘 “하느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준 겁니다.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6. 조화여신의 은혜

322 두 번째 태어남이란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337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345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à사견이지만 정신적으로 성숙되지 못한 20대에 결혼을 선택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것은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성숙의 문제일 터인데, 때가 되면 거행되어야 하는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는 것은 결과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성숙되지 못한 사람은 문제에 대해 대처하는 방법이나 풀어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347 “죽음이라니…, 이 사랑의 고통이 죽음이라면 그것도 팔자소관이지요. 죽음이라니…… , 이 사랑이 발각되었을 때 내가 받을 벌이 죽음이라면 나는 달게 받겠소. 그대가 말하는 죽음이 화염지옥에서 받게 될 영원한 벌이라고 해도 이 역시 나는 받겠소.” 어마어마한 뱃심 아닙니까?

373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란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à과연 사랑의 모습은 진정 이런 것일까?

8. 영원의 가면

380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 궁극적인 존재를 경험하는 단계가 되면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이 허깨비로 보이게 됩니다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 하나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되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나된 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도 없고 나도 없어요. 모든 개념을 완전히 초극해 버린 나의 마음은 사라져 존재의 바탕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신의 은유적인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이 곧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라는 궁극적 신비는 세계라는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389 원은 전체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원은 공간적 측면뿐 아니라 시간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어딘가로 갔다가 되돌아오고는 합니다. 그렇듯 원도 항상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 옵니다. 신은 알파요 오메가요, 본원이자 종국입니다. 따라서 원은 시공의 장에서 완결된 완전성을 상징합니다.

398~399 절정경험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느 한 순간에 하는 경험입니다. 나는 절정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이게 어떤 경험인지 알았습니다. 달리기 경기 때인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기게 되어있다"는 확신을 가졌어요. ? 계주인데 내 앞을 뛰는 선수가 나에게 바통을 넘겨 주었을 때 상대편 선수는 나보다 30 야드쯤 앞서 있었어요. 그런데도 나는 이긴다고 확신 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걸 미리 알고 있었어요. 이게 나의 절정경험입니다. 그 날은 어떤 선수도 나를 이길 수 없었어요. 나와 나의 존재가 완벽하게 만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어요. 내 평생 그 날의 경기만큼 내가 완벽하게 해낸 것은 없습니다. 온몸으로 온전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경주를 끝낸 그 경험을 나는 잊을 수가 없어요.

à나의 절정경험이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 경험은 과거보다는 앞으로 하고 싶은 경험이기도 하다.

413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 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à그래서 천복을 얻고 그 길을 가는 것은 행운이지만 또한 어려운 길이다. 하지만 천복이라면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함께 걷게 될 것이다.

3. 저자와의 대화

 이 책을 보니 이 번이 세 번째 도전이다. 2010년과 2011년에 시도를 해보았지만 끝까지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항상 1장을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1장이 가장 어려웠다. 그뿐 아니라 알다가도 모르겠고, 쉽다가도 난해한 부분이 책 곳곳에서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캠벨은 신화를 빌어 인생과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만큼 스케일이 크고 깊이가 있는 책은 만나보기란 쉽지 않다. 캠벨이 이야기한 그 작가에 대한 책 전체읽기에 대한 유혹이 샘솟는 것이 느껴진다. 참 매력적이다. 또 한 명의 위대한 작가를 만날 수 있어 오늘이 기쁘다. 스승님께서 왜 조셉 캠벨을 좋아하셨는지 알만하다. 캠벨의 책 곳곳에서 스승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으며, 또한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어 좋았다. 시간을 두고두고 계속 읽고 싶은 책이다. 다른 책들도 그렇지만 이 책은 유난히 사유를 해야하므로, 읽을 때마다 깊이와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달라질것 같다.

*<신화의 힘> 목차 및 전체적인 뼈대

빌 모이어스의 서문

 

1. 신화와 현대 세계

2. 내면으로의 여행

3. 태초의 이야기꾼들

4. 희생과 천복(天福)

5. 영웅의 모험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지혜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8. 영원의 가면

 이 책은 대담 형식으로 되어 있어 딱딱하지 않아 좋았다. 책을 읽으며 생기는 의문을 빌 모이어스가 잘 질문을 해주었고, 캠벨이 적절한 대답을 주었다. 마치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본것처럼. 하지만 아직 깊이가 부족한 탓에 어려워서 넘어가지 않는 부분 때문에 힘이 들었으며, 좀 더 쉬운 단어를 썼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좀 더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그리고 신화의 힘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시 풀어내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각 지역의 신화들을 더 많이 비교해 주는 사례가 있었으면 훨씬 더 재미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감동적이었던 장절

 많이 있었지만 가장 깊숙히 들어온 글이다.

227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조셉 캠벨은 이 길을 걸었다. 대중과 상관없이 자신의 천복의 길을 죽을 때까지 한결 같은 걸음으로 걸었다. 말과 글이 일치하는 삶을 여기서도 볼 수 있어 감동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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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22:58:37 *.160.136.54

세 번째 도전. 저하고 같은 시도 이네요.

세 번째 읽으면서야 드디어 내용이 쉽게와  박힙니다. 본인의 이야기대로 스케일이 크고 깊이가 있는 책이지요.

깊고 울림있는 일년의 여정을 통해 조셉 캠벨처럼 천복을 사는 삶을 이루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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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5 17:15:37 *.213.31.92

감사합니다.

과제를 내고 나면 언제나 후회와 아쉬움이 남을뿐입니다.

새로운 다짐으로 월요일을 시작하게 되는데...

후회와 아쉬움을 충만감으로 교체하고 싶습니다.

선배님께서 봐주시니 더 기운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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