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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4일 12시 32분 등록

신화의 힘, 조셉 캠벨, 이끌리오

10기 김정은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1954-2013)

 

미국의 비교신화학자.
20
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가로 불린다. 소년시절 북미대륙 원주민의 신화와 아더왕전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컬럼비아 대학과 파리 닟 뮌헨의 여러대학에서 세계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한 책을 즐겨읽었으며 뉴욕맨허튼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방문했다. 캠벨은 그 박물관의 한 코너에 있는 토템 기둥에 특히 매료되었는데, 그 뒤 1925년과 1927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대학과 뮌헨대학에거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 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와 교류하였다. 1934년에는 캔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스와미 이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하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개한 정히작업과 연구를 통해 '신의 가면'을 펴냈다.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 유명하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세상을 떠났다.

 

 

2.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8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8-9

언젠가 고통이라는 주제를 놓고 대담할 때 그는 조이스의 이름과 함께 이그쥬가르쥬크Igjurarjuk라는 말을 꺼냈다.

이그쥬가르쥬크가 뭡니까? 나는 발음을 겨우 시늉하면서 물었다. 캠벨이 물었다.

, 이그쥬가르쥬크 말이오? 북부 캐나다 카리부 에스키모의 샤먼이었소. 이 사람은 유럽 손님들에게,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 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는 말을 했지요.

 

11

루카스와 캠벨은 루카스라는 이 영화장이가 영화를 만들면서 캠벨의 저서에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캠벨이라는 학자를 초대해서 <스타워즈> 3부작을 틀어준 이래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캠벨은 루카스가 영웅에 대한 옛이야기를 최신의 막강한 이미지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며 우쭐거렸다. 듣고 있다가 내가 물었다. 그게 뭔데요?

괴테가 파우스트에다 쓴게 바로 이것인데, 루카스는 시쳇말에다 옷을 입혔지요. 결국 테크놀로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메시지 아니겠어요?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직관이라는 것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이성으로부터 후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는지요?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캠벨은 언젠가 인류는 자기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러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열정을 인류의 전염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루카스의 영화를 보고는, 영웅의 역정을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닌 자기 발견의 삶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이다. 인간은 자기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인간이 자기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한, 자기 발견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곧 영웅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p 12

자기 내부에 자기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그렇게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지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캠벨에게 영웅 역정의 끝은 영웅의 자기 확장이 아니다. 어느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解脫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에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오?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실에서 숨을 죽이고 강의를 듣던 학생에게 쏟아지던, 지적 가능성을 강타하는 에너지의 폭풍을 상기시키고 싶어서 편지를 썼노라고 했다.

 

13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있었던 그의 영결식장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뉴욕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인디언의 토템 기둥과 가면에 매료 당한다. 소년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한다. 바로 이 공부가 그를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화끈한 스승으로 만든 것이다.

 

내가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느낀 것은 전 세계, 인류의 문화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인류는 아름다움이라는 절대 가치를 추구하며 변화 발전해 왔다. 그것은 기계 문명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다. 몸을 아름답게 만드는 장신구 하나, 먹는 문화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밥그릇 하나에 있다.

 

14

언젠가 나는 그에게, 나를 이렇게 제자로 만들어 놓았으니 지금부터 생기는 일에 대해서는 깡그리 책임을 져줘야겠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웃으면서 로마의 속담을 인용했다.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 끄는 것은 아니라오.’

 

14-15

그는 나에게 가르침의 방법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 텐데 말이오.’

 

그렇다. 가르침은 말이 아니다. 보여 주는 것이다.

 

15

매튜 아놀드는 최상의 비평은 이 세상에 기왕에 알려진 것, 기왕에 사유된 것을 알고, 다음에는 이 지식을 참되고 신선한 사상의 흐름으로 창조하는 행위라고 갈파한 바 있다. 바로 캠벨이 그렇게 했다.

 

그는 자기의 작업을 관류하는 중심사상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임을 인정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군요.”

그는 대답한다. ”아니지, 그게 아니오. 살아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지요.”

 

17

그는 인도의 성자 라마크리슈나를 찾아갔던 고달픈 한 여자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여자는 성자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어르신, 저는 아직도 제가 신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이 말을 듣고 성자가 묻는다.

하면, 그대가 사랑하는 게 무엇인가요? 사랑하는 게 하나도 없지는 않겠지요?’

제 조카를 사랑하기는 합니다만…….’

성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그 아이를 사랑하고 다독거리는 그 몸짓에, 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몸짓이 깃들여 있답니다

캠벨은 이 이야기 끝에, ‘여기에 종교의 귀한 메시지가 있지요. 너희가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대접이 되느니라라는 메시지가 그것이랍니다. 하고 덧붙였다.

 

나는 사소한 일을 할 때, 예수님을 느끼곤 한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 쓰레기를 주울 때, 길 잃은 어린 아이에게 핸드폰을 빌려 줄 때, 내가 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로 묘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미국의 옷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 할 때, 옷을 들고 달리는 좀도둑을 쫓은 적이 있었다. 평소 달리기를 무지하게 못하는 나지만, 눈 앞에 불의앞에서 전력 질주를 했던 경험이 있다. 이는 생각할 겨를 없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 옷 가게 사장은 내게 목숨을 하나밖에 없는 것이니 그런 행동은 삼가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도울 수 있는 사소한 일 앞에서는 평소보다 훨씬 용감해지는 나를 목격하곤 했다. 이는 내가 신을 사랑하는 한 가지 행동 방식인 것 같다.

 

18

영적인 사람이었던 그는 인간의 믿음에 관련된 문학에서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는 인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해방되지 못하면 세계의 종교는 타인에 대한 능멸과 공격의 수단밖에는 되지 못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의 이미지는 무수하다. 그는 이것을 영원의 가면이라고 한다. 그는 세계의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신들이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을, 이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 창세, 처녀수태, 신자 성육,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최후의 심판 이야기 가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이다.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이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마땅히 자각되어야 할 삶 자체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19

만년에 그는 과학과 정신을 새롭게 통합시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인류의 우주선이 달에 착륙했을 때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천동설적 세계관에서 지동설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은 인류를 중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듯하다. 중심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영적으로 볼 때 중심은 시점이 있는 곳이다. 높은 곳에 오르면 지평선이 보인다. 달에 서면 지구가 떠오르는 광경이 온전하게 보인다. 비롯 텔레비전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안방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 결과 지평선이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이 확장되었다.

그는 인간을 타락하게 한 것, 인간으로 하여금 신성한 것들과 헤어지게 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 투사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자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귀이자 하느님의 눈이자 하느님의 생각이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21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는 마치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

사회철학자가 신주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는 신도의 종교 의례를 숱하게 보아왔고, 귀국의 성지도 여러 곳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신도의 종교적 이념을 모르겠어요. 신도의 신학을 이해할 수 없어요.

일본인 신주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응수했다.

글쎄요. 우리에게 종교적 이념 같은 게 있는 것 같지 않군요. 신학도 없고요. 우리는 춤을 출 뿐이지요.

그렇다. 캠벨도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

 

켐벨이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구본형 선생님과 유사한 점이 많아 보인다.

 

캠밸은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 점 또한 구본형 선생님과 많이 닮았다. 구본형 선생님께서 말년에 신화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집필하셨던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정리하자면, 구본형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고자 하셨으며, 신화를 통해 기쁨과 환상, 황홀의 세계로 인도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곧 구본형은 한국의 조셉 켐벨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종교란 곧 춤을 추는 것! 조르바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25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난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옛날에는 대학의 캠퍼스하면 일종의 철저하게 열린 사회였지요. 그래서 나날의 내면적 삶이, 우리가 전통으로 물려받은 분들, 말하자면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불릴 수 있는 분들인 플라톤, 공자, 석가, 괴테 등 우리 삶의 중심과 관련된 영원한 가치를 좇으라고 한 분들에 대한 관심과 상충되지 않았어요. 나이를 먹어 나날의 삶에 대한 관심에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인 삶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 내면적인 삶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참 곤란한 일이지요.

예전에는 그리스문학, 라틴문학, 그리고 성서와 관련된 문학이 교육과정이 일부를 이루었어요. 하지만 교육 과정에서 이런 게 다 떨어져 나간 지금은 신화에 관한 정보를 얻을 길이 깜깜해지고 말았어요. 앞에서 말한 고전 이야기를 마음에다 담아놓으면 그 이야기가 나날이 일어나는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될 터인데 말입니다. 왜냐? 우리에게는 앞에서 말한 것 같은 문학을 대신할 만한 게 없기 때문이지요.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에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길을 가는데 도로 표지가 없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도로 표지에 상응하는 걸 만들어서 길잡이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신화라는 주제를 마음에 두게 되면 우리는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28-29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고통이라는 거지요. 고통은 불완전한 존재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인간적인 고통, 인간적인 분투, 인간적인 삶……

거기에 그런 삶에 관한 지혜를 터득하는 젊은이가 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됩니다.

 

29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과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이 기나긴 삶의 길에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평생 영원의 의미를 이해하고, 영원을 접하고, 신비를 이해하고, 누군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면적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36

우주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벼룩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31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는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오랫동안 연애하던 사람이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아 갈라서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왜 갈라설까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을 왠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만일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려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번지수를 틀리게 찾은 거에요. 상대를 잘못 짚은 거지요.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상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까?

가슴이 말해 줍니다. 반드시.

그러니까 내적인 존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수수께끼의 요체가 거기에 있지요.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자기를 알아보실 수 있습니까?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이거다 하고 오는 게 있어요. 그러면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어떤 존재가 이게 바로 그것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33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34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34-35

젊은이들은 의례를 통하여 한 겨레 혹은 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데,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의례를 베풀어주지 못한다는 것이군요. 사실입니다. 모든 아이는 거듭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어린 시절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36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서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 정리되지 않은 않은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37

많은 교수들 역시 자기가 가르치는 학문이 삶의 가치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학문 (문화인류학, 언어학, 종교학 등을 말합니다)에는 전문화 경향이 뚜렷해 보입니다. 한 방면에서 어엿한 전문가가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한 전문 학자가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알면 이런 경향이 있다는 내 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가령 말이지요, 불교를 공부하자면 적어도 동양학을 논의하는 유럽의 몇 개 국어, 말하자면 영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는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산스크리트어, 중국어, 일본어, 티베트어, 여기에다 몇 개 국어를 더 보태야 합니다. 머리가 희어질 노릇이지요. 이런 전문가가 이로퀴이즈 인디언과 알곤퀸 인디언의 차이가 뭐냐고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어요?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 같은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41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38년간이나 신화를 가르쳐왔습니다. 고만고만한 중류 가정을 배경으로 하여 대학에 온 젊은 처녀들에게 정통 종교와 다른 이 신화를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어떻게 신화에 관심을 갖게 했습니까?

젊은 사람들은 덥석 집더군요.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이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8

신화는 이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50-51

(양배추 인형과 람보 인형) 그 둘은 신화에 등장하는 두 개의 인물상이지요. 문득 테세우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를 주제로 한 피카소의 작품 <미노타우로마키> 이미지가 떠오르는군요. 위기감을 조성하면서 접근하는 거대한 괴물소를 표현한 판화이지요. 이 판화에서, 철학자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달아나려고 사다리를 오릅니다. 투우장에는 죽음을 당한 말이 있습니다. 제물이 된 이 말의 잔등에는 역시 죽음을 당한 여성 투우사가 널브러져 있지요. 이 무시무시한 괴물과 맞서고 있는 것은 꽃을 든 가녀린 소녀 하나뿐입니다. 모이어스 씨가 조금 전에 말한 람보 인형과 양배추 인형이 바로 이 미노타우로스와 소녀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하나는 무시무시한 위협을 상징하고 또 하나는 단순하고 순진하고 아기와 같은 이미지를 풍기니까요. 당신은 이 두 인형을 인상적을 본 것은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문제를 극명하게 상징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p 59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 마리가 끼어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p 61

내가 아는 한,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이를 것이냐 하는 겁니다. 문제는 만유(萬有)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 (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체계의 화신 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신화학에는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유파가 있습니다.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후자의 경우 한 인간은 한 자연인이 아니고 특수한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유럽의 신화학 역사를 보면 이 두 신화학 체계의 상호 작용이 눈에 띕니다. 대개의 경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체계입니다. 대신 자연 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것인 경우가 보통이지요.

 

63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은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 알지, 이 시대의 삶,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65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나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66

(미국 1달러 지폐) 그건 그 아래에 있는 문장, 노부스 오르도 세클로룸(Novus Ordo Seclorum)’이 설명하고 있겠군요?

그래요. ‘세계의 새 질서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세계의 새 질서이기는 했습니다. 바로 그 위에는 안누이트 코엡티스(Annuit Coeptis)’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룬 바에 대해 미소를 보내었다. 혹은 그는 우리의 활동에 미소를 보내었다. …… 신적인 힘을 지난 존재가 우리가 한 일에 대해 미소를 보내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는 하느님이 하신 태초의 창조 사업가 같은 문맥에서 태동합니다. 하느님이 하신 태초의 창조 사업의 재판이다. 그런데 이런 사업이 이성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67

피라미드의 뒤를 보면 사막이 보입니다. 그러나 앞에는 풀이 자라고 있습니다. 사막은 전쟁, 전쟁, 또 전쟁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 상태의 유럽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런 유럽에서 떼어내어, 권력의 이름이 아닌 이성의 이름으로 한 나라를 세운다, 유럽에서 떠나 있는 만큼 이 나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꽃필 것이다. 이런 뜻을 지닙니다.

 

71

워싱턴은 독립을 얻음으로써 우리는 유럽의 혼돈과 결별하게 되었다고 했지요. 즉 외국과 손잡는 짓 같은 것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이 약속을 지킨 셈입니다. 그러나 그 뒤로 우리는 독립선언서를 포기하고 지구를 정복하려는 영국과 손을 잡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측면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의 자리에서 둘의 자리로 내려온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우리는 서로 입씨름을 벌이는 두 패거리 중 한 패거리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점에 있는 눈의 원리를 상징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정치나 경제에 쏠려 있지, 더 이상 이성의 소리에는 쏠리지 않습니다.

인류는 기원전 5백 년경에 큰 전기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 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천체 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길이 달라지는 군요.

인도가 열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하게 합니다. 우리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지 않고 측면에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p 73

이성이라는 말과 생각이라는 말부터 구분해 볼 필요가 있겠어요.

이성은 생각의 하나 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이성이 아니지요. 새앙쥐가 코를 내밀어 밖을 내다보고는, , 여기라면 나가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국부들이 이성으로서 하느님의 눈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분들은 사회로서의 우리 존재, 문화로서의 우리 존재, 국민으로서의 우리 존재의 바탕이 우주의 근본적인 바탕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던 것인가요? 국장이 제정될 당시에는 피라미드에 그런 생각이 반영되어 있었지요. 이것은 세계의 피라미드, 우리 사회의 피라미드 입니다. 여기에는 동일한 질서가 작용해요. 이것은 하느님이 만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이다. 하는 질서의식이 존재하는 겁니다.

 

74-76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둘째,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 커녕 질문도 미처 다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하고 반문합니다.

셋째, 사회적 기능. ….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넷째, 교육적 기능 주어진 이 삶의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의 네 가지 기능

신비주의,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 사회적 기능, 교육적 기능

신화를 꼭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초등학교 책 읽어주는 엄마로서 이 순간 나는 아이들에게 신화를 읽어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초등 용 신화 읽어 주기 커리큘럼 만들기!!!

 

76

성서에 바탕을 둔 우리 서구의 이야기는 선사 시대에 우주관 위에 서 있어요.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든지, 우주에 관한 오늘날의 개념과는 맞지 않아요. 이건 그 시대 사람들의 것이지 더 이상 우리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하면, 만유신론이라고 매도합니다. 하지만 이 만유신론이라는 말은 사람을 오도하는 말입니다. 만유신론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로지 인신만 이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이라는 관점은 그게 아닙니다. 이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신학적입니다. 이것은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

 

86

나는 신화와 같이 삽니다. 신화는 나에게 늘 그런 소식을 전해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되는 것 같은 순간에 은유적으로 이해가 되는 그런 문제이기도 하지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지 않아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음과 재생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시바 신과 동일시해도 좋겠지요. 나는 시바신이다. 이것은 히말라야 요가 행자들이 수행하는 명상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기도 하답니다.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 우파니샤드(바라문교의 철학사상을 나타내는 성전)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에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원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바람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87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세상 잡사의 근원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91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 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101-102

하느님은 결국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는 존재인 것이지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궁극적인 떠남, 최고의 떠남은, 하느님을 위한 하느님으로부터의 떠남, 모든 관념을 초월하는 경험을 위해 하느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102

왜 우리가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합니까?

달리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우리 시대 현실의 본질이 그렇습니까?

현실 체험의 본질이지요

 

시인 브레이크는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고 했지요.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기본적인 신화적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인도에서는 내 안에 있는 신을 육체에 사는 자라고 한답니다. 이 신을 우리의 영원불멸하는 측면과 동일시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그 신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106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107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과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 (정신적 상흔) 경험의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서의 생리적인 것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입니다. 생리적 원인은 생물학적 원리에 비하면 2차적인 것입니다.

 

109

내 생각으로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요.

 

113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내가 시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는 행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접하면 우리 자신이 우주적인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114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 중에서 자주 인용되는 시가 있는데, 이게 중국의 도덕경에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118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의 의식, 혹은 그리스도의 의식의 현현입니다. 단지 그걸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부처 라는 말은 깬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기독교 사고방식에서 보면 독신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노시스파 기독교나 토마의 복음에 따르면 기독교의 정수이기도 합니다.

 

119

재림 혹은 환생이라는 관념은 무엇을 암시하는지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는 이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관념에는 우리의 존재 및 우리의 깨달음과 의식의 잠재력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우리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19-120

삶을 하나의 시련으로 보는 관념, 이 시련을 겪어야 세속적 의미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관념은 고등 종교의 관념입니다. 나는 원시 신화에서 이런 관념을 접한 적이 없어요.

 

120

창조적인 글을 써 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글을 쓰면서 이런 경지를 경험한 적은 아직 없지만, 삶에서 아주 가끔 이런 경험을 하기도 한다. 마음을 열고, 내 삶에 복종하는 순간, 암담하기만 했던 내 삶에 창조적인 실마리가 보이면서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 속에 어떤 시련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나는 두려움이 없다.

 

124

사제와 샤먼의 차이는, 사제는 기능적이지만 샤먼은 경험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의 종교 전통에 따르면 이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수도사입니다. 사제는 사회를 섬기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이고요.

내 친구 중 하나가 방콕에서 로마 가톨릭 명상회가 연 국제모임에 참석했어요. 내 친구는 카톨릭 수도사와 불교의 스님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 두 종교의 사무직 성직자들은 서로 도저히 꼴을 못 보더라면서 웃더군요.

신비 체험을 한 사람은 상징적인 드러냄이 말짱 헛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상징이라는 것은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127

우리가 말하려는 존재, 생각하려는 그 존재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

무엇이든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느냐 없느냐는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133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선악의 관념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관념이었는데, 이것이 유태교와 기독교로 흘러 들어 왔어요. 다른 종교의 전승에 따르면 선악의 우리의 입장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의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슬픈 것이다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세속성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135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137

키르티무카 (배가 고프기에 자기 자신을 먹고 얼굴만 남은 아귀)– 영광의 얼굴. 시바 신전이나 불교 사원에 가보면 시바나 부처의 대좌에서 이 가면 같은 것, 즉 영광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시바 신은 이 영광의 얼굴을 향하여 누구든 너를 예배하지 않는 자는 나에게 올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138-139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 직관에서 끊임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188

자연 위에서, 자연에 군림하는 것으로서의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관념은 정말 몹쓸 것입니다. 중세에, 이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린 것이 바로 이러한 관념입니다.

 

189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우도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됩니다.

 

변경연의 연구원 제도를 잘 따라가보면 초월적인 접신 경험이 되는 것인가?

 

209

쇼펜하우어는 그의 명편 에세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심 없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고뇌와 고통에 인류가 참가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는 자연의 제일 가는 이법과 자기 보존을 기하는 일이 어떻게 함께 가능할 수 있는가?

 

209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 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 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 사람들은 자기를 잊은 채로 서로에게 무엇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213

아벨라르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에다 삶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멀어버린 인간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가 된다는 겁니다.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 없이 미래를 맞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현재는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 상실, 죽음, 탄생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가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삶의 신비의 상징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222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23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227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22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233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243

과학기술상으로 약진을 이루는 일이든, 이웃의 도움 없이 혼자서 꾸려나가야 하는 삶의 문제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런 모험을 할 때는 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위험은 우리가 너무 열광한 나머지 과학기술적인 측면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면 언제든지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지요. 이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추락합니다. ‘위험한 길’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디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255

인간의 내면 탐색에 관한 신화로 되돌아가, 깨달음의 단계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어떤 시련을 경험하게 되는지, 어른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읽어보세요. 이야기는, 우리 곁에 없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있어요. 종교에 있어요.

 

259

신화는 시예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종교는 시를 산문으로 바꾸지요. 하느님은 글자 그대로 저기에 있다. 이거야말로 글자 그대로 하느님 말씀이다. 저 위에 계신 하느님께 가까워지려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식이지요.

 

263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화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263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이 두 사람은 기초적인 신화 테마를, 현대 젊은이들의 경험하는 개인적인 문제, 어려움, 깨달음, 관심의 해석에다 응용하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소설가의 작품에서 신화 모티프를 선택해서 길잡이로 삼는 것도 좋겠지요.

 

266

벤 케노피는, “포스란, 살아있는 만물이 지어내는 에너지 장()을 말한다. 포스는 우리를 감싸고 있고, 포스는 우리를 관류한다. 이 우주를 하나로 묶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포스이다”

 

271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자신 있게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272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는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272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 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273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라도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부서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275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선생님 소리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276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울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 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277

서구인들은 ‘나’ 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78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278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서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286

사람들 중에는 대기만성형이 있어서 아주 늦게야 빛을 보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296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296

부처는 보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297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또한 그만큼 큽니다.

 

잊지말자! 아모르 파티! 나는 결혼 반지를 빼고, 그 손가락에 아모르 파티라고 새겨넣은 반지를 끼고 다닌다. 잊지 않기 위해!

 

301

진정한 예술가는, 조이스의 이른바 만물의 광휘를 그 자체가 가진 진리의 드러냄으로 인식하고 해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302

내가 추천하고 싶은 두 방법이 종교와 예술을 통해 이르는 방법입니다. 삼엄한 철학으로는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학문이라는 것은 개념이 정교하게 얽힌 숲과 같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타인에게 자비의 문을 열고 온 가슴으로 사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요.

 

303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316

오늘날의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전 인류 사회를 향하여 그런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320

우리 가슴 가까이 있는 중심을 깨닫고 자비를 실천할 때, 곧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 바로 이 중심에서 인간성이 비롯됩니다. 종교적인 명상도 바로 이 중심에서 이루어집니다.

 

320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 ‘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보았던가요? 우리가 언제 동물의 근성을 죽이고 자비로운 인간으로 화신해본 적이 있던가요?

 

328

 

우리 삶과 우리 생각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즉 과거의 죽음과 미래를 향한 부활, 곧 수성의 죽음과 영혼으로서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죽음과 재생의 상징을 보면 이 점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지요.

 

334

이 사회에서 어떤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는 우리의 기대는 우리 인간의 정신에 어떤 변화가 와야, 이로써 사회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사회, 그 사회의 어떤 무리와 동일시하는가?”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속한 특정 무리와만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 하는 질문입니다.

 

337

우리는 이런 데서 살고 있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사람은,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용한 존재인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야야 합니다.

 

341

아시겠지만 에로스의 체험은 일종의 사로잡히기에요.

 

343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그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할 수밖에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획일적인 체계는 기계적인 체계입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다른 기계와 똑 같은 기능밖에는 발휘하지 모하지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344

리비도는 삶의 충동입니다. 가슴에서 나온 것이지요.

 

345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347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349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350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

 

350

그럼요. 그게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57

황무지의 거죽은 실제성을 표상하지 못합니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들어봤을 겁니다.

 

358

자연이 성배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369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겁니다.

 

368

미래는 우리에게, 미래의 모습은 이럴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준다는 거지요. 시간의 신비, 시간의 초월성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겁니다. 어쨌든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굉장히 심오한 신비와 만나게 되지요.

 

379

아시다시피 우리의 영혼은 서로 다른 중심, 혹은 서로 다른 원형적인 경험의 단계를 지나 상승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아와 탐욕 같은 기본적인 동물적 경험단계에서 시작하여 성욕의 단계를 지나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이행합니다. 이런 단계가 바로 경험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부여하는 단계인 겁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을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 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이 처녀 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략,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 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83

원수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뽑아내려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럴 수 있으면 원수가 사는 삶의 방법을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386

“아버지의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

 

387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 하나의 삶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는 질문을 자주 던지지요. 사람의 현상을 놓고 자꾸만 그러한 현상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 하느님이 만드신 거야”, 이러고 말겠지요.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이 삶의 본원입니다.

 

392

우리는 이 만달라를 만들어 우리에게 적용시켜볼 수도 있어요. 우선 원을 그리고, 우리 삶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충동 체계와 가치 체계를 명상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이 두 체계의 자리를 정하고 다음에는 자기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검토해봅니다. 만달라를 그려본다는 것은 우리 삶의 흐트러진 여러 측면을 하 자리에 모으는 훈련 방법이 될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중심을 찾아 여러 측면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결국 우리 자신의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 관계를 맺게 하는 작업입니다.

 

394

 

우리 삶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보세요.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보세요. 이 한 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괴테는 신성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395

중요한 것은 이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398

절정 경험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느 한 순간에 하는 경험입니다. 존재의 조화와 나 자신의 관계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399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조이스의 말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액자에 넣어 두게 하고,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이 작품임을 느끼게 하고, 다음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 다음에는 부분과 전체, 그 다음에는 전체와 각 부분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작품이 지녀야 하는 미학적 요인(관계의 조화 정연한 리듬)입니다.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입니다. 이순간을 종교 술어로 설명하자면,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지요.

 

403

산스크리트어로는 이것을 비베카라고 합니다. 분별이라는 뜻이지요. 머리 위로 불칼을 높이 치켜든 부처 이미지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 이게 어디에 쓰이는 칼일까요? 이게 바로 분별의 칼입니다.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것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째깍, 째깍, 째깍 흐르는 시간이 영원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그러 시간의 장에 삽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의 장에 비치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영원의 원리입니다.

 

405

흔히들 천국과 지옥을 영원하다고 하지요. 천국은 끝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은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 가고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불교에는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이 세상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 이 개념은, 시간이 있는 데엔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 모습입니다.

 

409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때의 깨달음을 나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이 깨달음은, 이 세상에서의 영생불사 체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410

‘되기’라는 것은 단편적입니다만 ‘존재하기’는 전체적인 겁니다.

 

412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 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411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413
에덴은 있었던 게 아니고 있는 것이군요.
.....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415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데 있는 것이지요.

3. 내가 저자라면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자꾸 구본형 선생님 생각이 났다. 신화의 힘 곳곳에 구본형이 있다. 신화의 힘은 어렵다. 1장 신화와 현대 세계만 세 번 읽었다. 내 눈엔 조셉 캠벨과 구본형은 같은 사람 같다. 신화의 힘은 내게 어려웠지만, 구본형 선생님의 저서는 어렵지 않았다. ‘신화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실타래를 건네 주신 구본형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목차

  1. 신화와 현대 세계

  2. 내면으로의 여행

  3. 태초의 이야기꾼들

  4. 희생과 천복

  5. 영웅과 모험

  6. 조화 여신의 은혜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8. 영원의 가면

     

    개인의 삶은 영웅 신화의 구조를 띤다. 누구나 제 삶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태어나 성장하고 사랑하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다시 죽어가는 모든 인간들의 이야기가 신화이다.

     

    캠벨은 인간의 인생을 영웅의 여정에 비유했다. 비록 사람마다 짧고, 길고의 차이는 있지만, 그 하나하나는 태어남과 부름과 모험과 역경과 귀환과 노년으로 이루어지는 영웅의 여정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크게 성공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애석하게도 실패하고 은거해 버린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희열을 따라,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선한 것 뿐만 아니라 악하고 더러운 것까지도 포용하면서 후회 없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과학문명에 의존하여 더욱 큰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내면의 영혼은 메말라 가고 있다. 조셉 캠벨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시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책을 통해 해 왔고, ‘신화를 통해 현대인들이 자신의 아름다운 내면과 마주쳐야 함을 전파하고 있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희열이 내 천복인지, 이 순간에도 아이들이 떠오른다. 신화는 다음의 네 가지 기능이 있다.

     

    첫째,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이다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한다.

     

    둘째,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이다.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준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 커녕 질문도 미처 다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하고 반문한다.

     

    셋째, 사회적 기능이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한다. 신화가 곳에 따라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이다.

     

    넷째, 교육적 기능이다.

    주어진 이 삶의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이다.

     

    초등학교 책 읽어주는 엄마로서 이 순간 나는 아이들에게 신화를 읽어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아이들에게 신화 읽어주기더불어 나도 신화 읽기! 조셉 캠벨의 어려운 신화의 힘이 아니라 재미있고 쉬운 신화읽기이다. ‘책 읽어주기새로운 커리큘럼 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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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21:45:55 *.160.136.54

본인의 이야기대로 <신화의 힘>은 어려운 책입니다. 세번째 읽는 나자신이 이제사 겨우 이해가 될정도이니.

그럼에도 본인의 첫번째 과제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건 사실 입니다.

 

1. 저자에 대하여

2월 4주간의 레이스동안 하였던 저자에 대해 조사하는 방법을 잊었나요. 무엇을 발췌하여 인용 하였는지.

조셉 캠벨에 대한 진정성 있는 리서치를 하였는지.

2. 내가 저자라면

이 부분은 목차와 내용을 함축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책 전반에 대한 자신만의 통찰적 시각이 요구되어 집니다.

영웅의 전반에 대한 내용을 다룬것도 있지만,  <신화의 힘>은 일반 자기 계발서가 따라올수 없는 깊고 방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 민족, 종교, 역사, 문화 그에따른 사색적 깊이까지.

 

일주일 정말 고민하며 읽고 정리 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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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22:32:00 *.65.153.149
맞습니다 이해 못하고 넘긴 부분이 많습니다... 다시 읽어보고 다시 정리해봐야겠습니다... 핵심을 알려주시는 조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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