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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5일 14시 03분 등록

신화의 힘                                                             구달  김종호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대담집, 이윤기 옮김                              2014.4.14.

 

 

I. 저자에 대해서

 

조셉 캠벨은 1904년 뉴욕주 화이트틀레인스에서 태어났다. 캠벨은 어려서부터 로마가톨릭 집안에서 교육받으며 자랐다.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서 있었던 켐벨의 영결식장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뉴욕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인디언의 토템 기둥, 가면에 반한다. 소년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10살 때부터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한다. 바로 이 공부가 그를 이 방면에 있어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화끈한 스승으로 만든 것이다

 

192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2년 동안 파리대학과 뮌헨대학에서 공부했다. 파리대학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 음유시인들의 시를 공부했다. 그리고 현대예술의 거장인 제임스 조이스, 피카소, 몬드리안 등을 발견했다. 독일 뮌헨에서는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면서 힌두교에 관심을 가졌고, 이때 융을 만났다.

 

1929년 미국으로 돌아온 캠벨은 영문학 대신 인도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했지만 컬럼비아 대학 측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박사학위 취득을 포기하고 학교를 떠났다.

 

학교를 떠났을 때,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불황을 맞이하게 된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5년 동안 뉴욕 주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서 칩거하며 독서와 사색에만 몰두한다.  캠벨은 이곳에서 그저 읽고 또 읽으면서 노트필기를 했다.

 

그는 칩거의 5년 동안 8개월 정도 미국을 여행하면서 방랑생활을 하였다. 캠벨은 그때의 방랑에 대해 “주위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니는 기회, 또한 여기라면 정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에 대한 느낌을 얻는 기회”였다고 한다. 그 시절 러시아어를 배우기도 했다. 당시 28살이었던 캠벨은 캘리포니아에 일 년쯤 머물면서 소설가 ‘존 스타인벡’을 만났고 함께 ‘존 듀이를 공부했다.

 

1934년 미국의 명문여자대학인 Sarah Lawrence College에 문학담당교수로 초대받아, 가 보았더니 너무 이쁜 여학생들이 많았다. 거기서 자신의 인생을 펼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그는 1972년 퇴직할 때까지 무려 38년 동안 그 곳에서 재직했다.

 

1938Sarah Lawrence College에서 제자였던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했다. 캠벨은 아내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계속 강의를 들었고,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마침내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냈고, 그야말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나는 한참 뒤에야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아주 은근한 표시를 했다. 곧 졸업할 그녀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한 것이었다. 바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의미심장한 것이기도 했다.

 

캠벨은 어려서부터의 관심사였던 인류학과 민속학을 바탕으로 비교종교학과 분석심리학 등의 이론을 이용하여 신화와 종교 연구를 계속하여 명성을 얻게 된다. 그는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최고의 스승으로 추앙받게 된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이라고 한다.

 

저서로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4부작 <신의 가면>,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신화의 이미지>, 5부작인 <세계신화지도>등이 있다.

 

캠벨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되었다. <신화의 힘>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정리한 책이다.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를 주제로 하여 대담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신화의 힘>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캠벨은 대담을 하면서 “여기 있는 나는 여든을 헤아립니다. 그런데도 나는 몇 권은 족히 될 책을 쓰고 있어요. 이 일을 마칠 때까지 살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내게는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거예요.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이 없다면 죽는 거야 언제 죽어도 좋아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캠벨은 그로부터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1987 10 30 83세의 일기로.

 

그의 사후에 아내 ‘진 에드먼’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조셉캠벨 재단’을 설립했다. 캠벨의 유고와 대담집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하여 출간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조셉캠벨의 인생에 관해 알고 싶다면 <신화와 인생>을 권하고 싶다.

 

 

II. 내 마음을 움직인 글들

 

10. 왜 하필이면 신화 같은 게 필요할까?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인류학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 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12

조셉캠벨은 박사과정을 밟아 박사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책의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 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

 

=> 금주에 내가 읽고 곱씹어 소화할 책으로 조셉캠벨의 ‘신화의 힘’이 선택 된 것은 행운이다. 그의 인생이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생은 모험이라고 확신 한다”는 그는 인생에 임하는 태도와 그 인생관대로 살아간 그의 삶, 그 진정성에 나는 반했다.

 

15-16. 세계의 신화 주제의 공통요소

그는 자기의 작업을 관류하는 중심사상이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임을 인정 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 한다.

 

그는 세계의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신들이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을, 이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창세 처녀수태 성육신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최후의 심판 이야기가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음표 한다. 라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신의 이름과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 한다.

 

곡물의 씨앗이란 것이 영원한 주기를 표상하는 고귀한 상징이 된다. 곡물은 죽고 땅에 묻힌 다 그러면 그 씨앗이 그 곡물을 재생 시킨다. 캠벨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모두 이 곡물의 씨앗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써 영원한 진리, 죽음에서 새 삶 이 생긴다는 진리를 드러내는데 매료 당하고 만다.

 

18. 이야기꾼 캠벨

나는 캠벨만큼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원시 사회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 하늘이라고 하는 거대한 지붕 밑에서 펼쳐진 광막한 들판으로 나가거나, 수목에 묻혀 있는 숲속의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을 맛보고는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신들의 이야기가 왜 바람 속에서, 천둥 속에서 울려 나올 수 있는지, 어째서 산자락의 시내라는 시내는 다 하나님의 육성을 내는지, 어째서 세상이 다 성소 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 신화의 신비감이 우리가 간직해야 할 소중한 보물인데, “우리 현대인들은 이 땅으로부터 신비라는 신비는 모조리 벗겨 버렸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인디아나존스 같은 영화를 즐겨 보게 된다. 자연을 잃어버린 우리 아이들의 장래도 걱정이다. 컴퓨터와 게임기, 시멘트 건물과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나 어디서 신의 음성을 들을 기회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영혼이 잠잠할 때, 신은 세밀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21. 캠벨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이끌었을까?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 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인 그는 마치 그 세계를 다녀온 것 같았다.

 

그렇다 지혜이다.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박식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전인미답의 광대한 우리의 파노라마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야기는 그에 걸맞은 표현 방법이 있다. 그는 수천 가지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캠벨은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

 

25-30. 신화의 가치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점의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저 먹고 살기와 사소한 일상의 일에 매몰되어 살아갑니다. 우리는 나날의 삶에 대한 관심이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인 삶에 관심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의 문학, 즉 정신적 지주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 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의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살아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죠.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 우리는 오래된 이야기, 즉 신화에 대한 향수가 있다. 이는 본향을 향한 귀소본능과 같은 게 아닐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본래부터 주어진 것인데 잡다한 인생을 사노라고 이를 다 잊고 사는 게 아닐까? 그래서 삶의 황홀을 맛보지 못한 채 살아가면서도 전혀 억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닐까?

 

38-39.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줘

로마카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의 매달리고 부활 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일년 내내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핵 같은 것을 어린아이 마음속에다가 새겨 넣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라나는 어린아이에게 죄악이란 것은 그러한 조화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행위이지요.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수녀 선생님에게서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브가 있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뒤 나는 힌두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읽게 되었는데, 아 거기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더군요.

 

테마가 시공을 초월해 있습니다 문화는 이런 이야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요. 테마의 대응 구조를 모르고 읽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다른 게 아니에요.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 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47-48. 신화의 영적인 차원

나는 뉴욕의 5번가를 지나 성패트릭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지구에서 경제문제에 대한 관심이 가장 첨예한 도시를 지나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이때부터 내 주위 모든 것은 영적인 신비의 차원에서 나에게 말을 겁니다. 십자가의 신비... 바로 이겁니다. 성당은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내 의식 역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옵니다.

 

나는 조금 전과는 아예 다른 고대에 섭니다. 그러다가 나는 밖으로 나가 거리의 군중과 합류합니다. 이 경우 내가 성당 안에서 가지고 있던 의식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을까요? 안됩니다.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 내리락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 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 이 말은 기도나 명상이 우리가 예배처소에서 예배 후에도 고양된 우리의 영적 상태를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항상 깨어있으라” 하는 말이 이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우리의 영적 상태를 항상 주시 하는 것 말이다. 이것이 기도가 아닐까?

 

54-56. 컴퓨터와 신화

루카스라는 이 영화장이가 스타워즈 영화를 만들면서 캠벨의 저서에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캠벨을 초대해서 스타워즈 3부작을 틀어 준 이래로, 둘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니까 루카스는 넓은 스크린에서 고대 신화의 주제와 모티브를 막강한 현대적 이미지로 펼쳐 보였던 셈이다. 캠벨은 루카스가 영웅에 대한 옛 이야기를 최신의 막강한 이미지로 형상화 하는데 성공 했다면서 루카스를 추켜 세웠다.

 

제 막내아들이 스타워즈 20번 아니면 30번쯤 본 것을 알고는," , 그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냐"고 물었습니다. 녀석 대답이,"이유는 아빠가 평생 구약성서를 읽는 것과 같지, " 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막내 아들은 새로운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겁니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시대가 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나는 얼마 전에 놀라운 기계를 한 대 샀어요. 컴퓨터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신들을 섬기듯 섬기고 있어요. 신들과 동일시 하는 것이지요. 이 기계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금기만 잔뜩 요구 할 뿐, 자비로운 구석이라고는 도무지 한 군데도 없는 구약성서의 신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젠하워가 컴퓨터가 가득 차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이 기계에다 "신이 있느냐?"는 질문을 입력 시켰다지요? 그랬더니 기계들이 불을 번쩍거리며 돌아가다가 한참 뒤에 "이제는 있지요." 하더라잖아요?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손톱 만한 판금이 온통 천사들의 자리입니다. 가느다란 튜브 그것은 기적이고요. 나는 내 컴퓨터에서 신화에 대한 하나의 계시를 받은 적이 있어요소프트웨어를 하나 사면 거기에는 우리가 겨냥하는 바에 따라 컴퓨터를 부려 먹을 수 있는 명령 신호가 있습니다. 다른 소프트웨어 체계의 명령 신호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해봐야 컴퓨터는 말을 들어 먹지 않아요.

 

신화학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비의의 메타포가 아버지를 의미하는 신화가 있고, 어머니를 의미하는 신화가 있을 때 각각에 맞는 다른 명령 신호를 입력 시키지 않으면 접근이 안됩니다. 예수는 "누구든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이를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 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종교에 진정으로 몸을 담고 진정으로 그 종교를 통하여 삶을 지어나가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 그렇다 기계가 신이 된 시대, 현대야 말로 손바닥 위의 컴퓨터 스마트폰이 신이 된 시대이다. 지하철을 한번 타 보라. 열에 아홉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손으로 쓰다듬고 애지중지하고 있다. 마치 영화 아바타에서 거대한 푸른 나무에 대고 절하듯이 모두가 스마트폰에 절하고 있다.

 

58. 종교들의 쟁투

나는 현대의 진정한 공포의 도가니를 베이루트에서 봅니다. 서양의 3대 종교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 박고 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 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들은 자기네들을 둘러싸고 있는 고리를 열어 본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그 고리는 폐쇄회로인 것이지요. 각기 "우리야말로 선택된 백성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각기 새로운 신화가 필요하지요. 원수를 사랑하라, 열어라, 남을 비판하지 말라, 이것은 모두 불교에 있는 겁니다. 신화에 있는 겁니다. 옛날부터 있어왔어요.

 

=> 메타포, 즉 부르는 이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참 진리를 망각하고 서로 싸우는 형국이 지금 세상의 모습이다.

 

59. 피그미족의 전설

한 소년이 숲속에서 아름다운 새 소리를 듣고는 그 새를 사로 잡아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소년은 새에게 먹이를 주자고 아버지를 조르지요. 아버지는 새 따위에게 먹이를 줄 수 없다면서 새를 죽여 버리지요. 그 사내는 새를 죽이고새를 죽임으로써 새의 노래를 죽이고, 노래를 죽임으로써 제 자신을 죽인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로써 그 사내는 죽는 것이지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죽는 것이지요.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를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 마리가 끼어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 고요.

 

64-66. 미합중국 국장의 메타포

미합중국이 좋은 예 입니다. 애초에 미합중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13개의 조그만 식민지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은 무시하고 오로지 상호 이익을 위하여 행동을 함께할 것을 결의하면서 태동합니다.

 

 때의 결의를 그대로 반영 시킨 것이 바로 국장입니다. 이 국장은 미합중국을 성립시킨 이상주의를 그대로 증언합니다.

 

, 1달러짜리 지폐를 보세요. 여기에는 미합중국의 국장이 있습니다. 먼저 왼쪽의 피라미드를 보세요. 피라미드는 네 개의 측면이 있습니다. 4개의 측면은 4개의 꼭지점 구성합니다. 이 꼭지점에는 누가 있고, 저 꼭지점에는 누가 있고, 다른 꼭지점엔 다른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에는 너와 내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면 4개의 꼭지점은 하나가 되어 만나고, 이 만남의 자리에는 활짝 열린 하느님의 눈이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문장인 노부스 오르도 세클로룸(Novus Ordo Seclorum) - "세계의 새 질서"는 말과, 안누이트 코엡티스(Annuit Coeptis) - "신은 우리의 활동에 미소를 보낸다"는 글이 미합중국의 이상을 잘 나타내어 줍니다.

 

92.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이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 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 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106. 금단의 과실 모티브

인류가 놀랍게도 공통의 신화를 유산으로 물려 받고 있다는 점, 금단의 과실 모티브죠.

하나의 금제 라고 하는 민담 식 표준 모티브입니다. 푸른수염은 아내에게 저 벽장문은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어디 이게 지켜집니까?

 

하나님은 아담 이라는 친구가 필경 그 금단의 과실을 먹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 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를 깨뜨리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다.

 

107. 인간의 마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 같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109. 기도

우리가 기도할 때 두 손바닥을 붙이잖아요? 손바닥을 서로 붙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 안에 있는 신을 알아 본다는 뜻입니다 인도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손님 신으로 대접 받는 답니다

 

=> 나마스테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가 서로를 성령이 깃든 신적인 존재로 인식할 때 우리는 서로를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113.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과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죠.

 

=> 캠벨은 신화가 시와 예술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시적 영감의 원천이 신화라고 하니 신화를 공부해야 함은 당연한 알이다.

 

116-117.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은 은유적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 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알파와 오메가인 우리의 바탕 자리로 되돌아 옴, 육신의 껍질을 버리고 육신자체의 역동적인 바탕자리로 되돌아 옴을 뜻하는 은유인 것입니다.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

 

=> 은유 란 소리 말하는 운문의 독법인데 시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 같은 것이니 성경도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20-121. 영감

어떤 음성을 구체적으로가 아니라 은유적으로 듣는 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프로이트와 융은 둘 다, 신화가 무의식에서 솟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그래서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구성원들은 서로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아니,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해 낼 수 없어서 못하던 내 이야기가 아니냐?” 이렇게 되자면 샤먼이나 선견자와 그 사회의 구성원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상호작용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133.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것이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137-138. 아귀 이야기 삶의 긍정

그렇게 배가 고프거든 너 자신을 먹어라.

그래서 아귀는 발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차례로 먹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남의 생명을 먹고사는 생명의 이미지입니다. 결국 아귀가 있던 자리에는 얼굴 하나만 덩그랗게 남게 되지요. 시바 신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지요.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터이다. 내 너를 카르무티카라고 이름하리라.”

카르무티카는 영광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시바 신전이나 불교사원에 가면 시바나 부처의 대좌에서 이 가면 같은 것, 영광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시바 신은 이 영광의 얼굴을 향하여, “누구든 너를 예배하지 않는 자는 나에게 올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삶의 기적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선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138-139. 깨달음의 순간이 영원

만물을 긍정한다고 하면 우리가 누구를 비판한다는 말인가, 하는 확신이 생깁니다. 예수의 위대한 가르침도 이것이 아니었던가 싶네요. 뉘우쳐 깨달을 경우 이 순간이 곧 영원이란 확신이 듭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142-143.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삶에 관한 나의 사고방식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삶에 관한 관념 자체를 바꾼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고 활동하는 삶을, 이 신비를 즐기고 감사하고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꾼 것이지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155. 그대

존경 받는 들소를 100년 전에 백인들이 몰려와 살육한 것은 신성을 더럽힌 것이지요. 반세기 동안 연발총으로 무장한 개척자들이 들소를 무더기로 죽이고는 가죽만 벗기고 살은 그대로 썩혔어요. 이건 대학살입니다.

그대이던 들소가 졸지에 ....
-...
그것이 대고 말하지요
인디언들은 존중 하는 뜻에서 들소를 그대라고 불렀다지요?
인디언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불렀어요.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그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걸 실감할 수 있지요.

 

178. 신의존재
큰 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고 한 사람이 키케로 였지요. 아마? 성림은 도처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자주 숲을 드나 들었는데, 그때 나는 "와 살아도 많이 살았겠고 알아도 많이 알겠다."는 생각에서 숭배하는 느낌이 들어 나무를 바라봤던 기억이 납니다. 창조의 실제에 대한 느낌이야 말로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란 게 내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고 다듬은 돌과 바위뿐입니다. 조그만 땅 다람쥐와 커다란 올빼미가 사는 숲 속에서 자란다는 것은 아예 다른 세계에서 자라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생명의 힘과 권능과 마술적인 가능성을 표상하는 존재로서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이 생명의 힘과 권능과 가능성은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들이 삶의 일부분이 되면 우리에게도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가 늘 우리 안에 메아리 친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리 자신이 곧 자연 이니까,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179. 여백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 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 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처음에는 이 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179-180. 성소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 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181. 야곱의 꿈
야곱의 꿈 이야기를 기억하지요야곱이 꿈에서 깨어나서부터 그 자리는 베델, 곧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 곳에다 영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연고권을 주장한 셈입니다. 이로써 그곳은 하나님이 에너지를 쏟아 부은 곳이 됩니다.

 

185. 사르트르 대성당 종소리
관리인이 손잡이를 밀자 관리인 쪽의 발판이 내려가면서 내 쪽이 올라가더군요. 내 쪽이 내려가면 관리인 쪽이 올라 오고, 내 쪽이 올라가면 관리인 쪽이 내려오고.... 성당의 종탑 위였으니까 당연하겠지만 찬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립니다. 댕 댕 댕 댕... 종 소리가 우리 발 밑에서 사방으로 울려 퍼져요. 내 평생 그렇게 가슴 설레는 경험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185. 관리인의 방
그는 성가대 석 한가운데 달려있는 조금만 문을 열고 나를 그 안으로 안내하더군요. 그 안에 조그만 침대가 있고,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는 등이 있습디다. 조그만 문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았더니 '검은 마돈나'가 그려진 채색창이 보이는 거예요. 그 양반은 그런 데서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곳에서 끊임 없이 명상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었던 거지요. 관리과의 만남은 정말 감동적이고 아름다웠어요. 나는 그 때부터 자주 사르트르 대성당에 갔습니다.

 

185. 영적인 원리가 성당을 중심으로
사르트르 대성당에 가면 성당의 영적인 원리가 사회의 삶을 버티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솔트레이크시티에 가보면 이 모든 양상을 한 눈으로 볼 수 있어요. 처음 이 도시의 중심에는 교회가 세워졌어요. 이게 제대로 된 도시 구조 아닙니까? 성당이라는 것은 영적인 중심이고 바로 이 중심에서 모든 것이 사방으로 방사되어 나가야 하니까요.

 

186.
사르트르 대성당은 걸어다니면서, 앉아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면서 명상하는 곳입니다.

 

187. 영적인 원리+침묵
옛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항상 영적인 원리를 의식하고 사는 삶이었어요. 모든 궁극적인 영적인 암시는 침묵에 담겨 있지요. 이 침묵은 소리 너머에 있어요. 육이 된 말씀은 최초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 너머에 있는 것이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 불가지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침묵 혹은 공, 혹은 초월적인 절대자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190. 독서법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의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 합니다. 맘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이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서도 안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 한 저자를 겨냥하여 몰아읽기 독서법은 세상을 보는 눈 하나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독서법의 혁명이라 할 만하다. 다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문제인데 어떻게 두루마리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일 듯.

 

193.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부계적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모계적입니다.

 

194. 여성의 마력
여성에게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 마력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의 마력이 대지의 마력을 버티어 주게 된 거지요. 고대의 전승에 따르면 최초의 경작은 여성의 손에서 이루어집니다. 좀더 고급한 문화 체계에서 쟁기가 발명된 것은 훗날의 일입니다. 쟁기가 만들어지면서 남성이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지요. 이렇게 되자, 쟁기가 대지를 가는, 말하자면 남녀의 성적 결합 시물레이션도 신화 이미지가 됩니다.

 

194. 
사냥꾼의 의식은 늘 외계의 동물에게로 쏠립니다. 그의 삶은 동물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 됩니다. 그래서 사냥꾼의 신화는 외계 지향적입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씨가 죽고 여기에서 새 식물이 움트는, 말하자면 식물의 경작과 깊은 관계가 있는 농경 신화는 내계 지향적입니다.

 

195. 동물 vs 식물
우리가 동물을 죽이면 이 동물은 영영 죽고 맙니다. 이 동물에게는 그것이 곧 끝입니다. 그러나 식물의 세계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식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대궁을 자르면 다른 순이 나옵니다. 가지치기는 식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줍니다.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숲과 농경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여기에서는 개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의 한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는 이 이미지를 이용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하고 말합니다. 이 포도나무 이미지는 동물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농경문화는 먹이가 될 식물을 끊임없이 추켜 세웁니다.

 

197. 옥수수
인디언의 대부분은 수렵민이기도 합니다만 이들은 동시에 옥수수를 재배하기도 하지요. 인디언 소년은 머리에 초록색 깃털을 꽂은 한 젊은이를 만나는데 그와의 씨름에서 이깁니다. 젊은이는 다시 하자고 합니다만 이번에도 소년이 이깁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이번에도 지면 자기를 죽여 땅에 묻고 그 무덤을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합니다. 소년이 젊은이가 시킨 대로 다음 판에 또 자기가 이기자 이 잘생긴 젊은이를 죽여 땅에 묻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머리에 깃털을 꽂고 다니던 그 젊은이가 묻힌 (심어진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곳에서 옥수수가 올라와 자라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건 소년이 환상 속에서 본 광경입니다. 그래서 소년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사냥하러 나가시지 않아도 됩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 부족에게는 바로 이 순간이 엄청난 깨달음의 순간이었을 테지요.

 

198. 복사판 이야기
뱀장어는 다음에 내가 나타나거든 반드시 나를 죽이고 머리를 잘라 묻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처녀가 시키는 대로 하자 그 자리에서 야자나무가 움터 오릅니다. 야자를 자세히 보면 그 크기가 꼭 사람 머리 통 만 하지요. 어떻게 보면 눈 같은 것도 있어요. 대부분의 아메리카 문화 인류학자들이 하는 말을 믿는다면 태평양 문화권과 우리 농경 신화의 발상지 중앙아메리카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까 문화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는데도 같은 이야기가 퍼져 있을 수도 있는 것이군요. 이런 사실이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신화를 읽다 보면 가장 놀라운 게 바로 그 점이지요. 난 평생 이 짓을 해 왔습니다만 한 문화권의 이야기가 다른 문화권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데는 여전히 놀라곤 합니다. 같은 이야기 복사판이 퍼져 있으니 놀라울 수 밖에요. 차이가 있다면 옥수수와 야자의 차이 정도 라니까요.

 

201. 죽음과 새 생명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해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선생님의 글이 생각나는군요 "땅에 떨어진 고목과 떨어진 잎에서 새싹이 나온다. 이것은 죽음에서 생명이 솟고 죽음으로부터 새 삶이 비롯됨을 깨닫게 한다. 어설프게 결론을 내려 보자면 생명이 늘어나려면 죽음이 늘어나야 한다. 이 지구의 적도대 문화의 특징은 희생 제물(식물, 동물, 인간)을 바치기에 광분해 있다는데 있다."

 

202. 뉴기니아 남성 비밀 결사의 의례
이는 농경 사회의 죽음과 재생과 식인의 신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요. 이 의례는 성별 된 마당에서 베풀어지는데 참가자들은 북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다가는 뚝 그치고는 합니다. 이들은 이 짓을 4 ~5일 동안이나 줄기차게 계속합니다. 참가자들은 지쳐 쓰러지곤 하는데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하여 참가자들은 일상에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경험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절정의 순간이 옵니다.

 

때가 되면 신의 모습으로 치장한 젊은 여성이 끌려 나옵니다. 어른들은 이 여자를 거대한 통나무집 천장 아래 눕힙니다. 그러면 대여섯 명의 소년들이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들어와, 차례로 이 여성을 범함으로써 처음으로 여성을 경험합니다. 이윽고 마지막 소년이 들어와 이 여성을 범하는 순간 어른들이 기둥을 뽑아버립니다. 그러면 지붕이 내려 앉으면서 둘은 죽음을 당합니다. 이것은 남녀의 성이 분리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남녀 상태로의 통합을 상징합니다. 생성과 죽음의 통합을 상징합니다. 이제 이 둘은 둘이 아닙니다.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세요? 동아리가 우우 모여 이 불쌍한 한 쌍을 끌어내서는, 바로 그날 밤에 구워 먹는 답니다. 이 의례는 신을 죽이는 원초적인 행위의 반복입니다. 이렇게 신을 죽이면 바로 이 신, 바로 이 구세주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는 것이지요.

 

미사의 성찬식에서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곧 구세주의 피요 살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은 내면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살과 피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어 역사하는 것이지요.

 

203. 십자가 나무
그리스도는 '성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지요. 이 성 십자가는 나무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그 나무의 열매가 되는 셈이지요.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의 열매입니다. 나무는 에덴동산의 있던 두 번째 금단의 나무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는 첫 번째 나무의 과실을 따먹자 하나님은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 버리지요. 에덴동산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곳입니다. 남녀와 선악과 신인(神人)이라는 이원적인 구별이 없는 곳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여기에서 이원성의 과실을 먹고는 쫓겨납니다. 이렇게 쫓겨난 인간을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게 하는 나무는 영생의 나무입니다. 이 영생의 나무 아래 이르러야 우리는 나와 아버지가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204. 공포와 욕망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삶이 모든 사람에게 환희의 연속인 때도 있지요. 일상의 삶과 이 환희의 순간이 다른 점은 전자는 낙원 밖에서 사는 삶이고 후자는 낙원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206. 희생
희생에 대한 옛 관념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확연하게 달라요. 마야 인디언은 의례의 마당에서 농구경기 비슷한 시합을 합니다. 승패가 결정 되겠지요. 그러면 이긴 팀의 주장은 진 팀의 주장에 의해 그 자리에서 제물로 희생됩니다. 목을 잘리는 것이지요. 삶에서 승리한 자 만이 제물이 될 수 있다. 이게 바로 희생과 관련된 옛날의 관념입니다. 마야 인디언의 이 의례에서 시합의 승자에게 내려지는 상은 거룩하게 희생될 수 있는 자격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정말 목숨을 버리는 자가 새 삶을 얻는다고 믿으십니까
그리스도의 말씀 아닙니까?
선생님께서 이것을 믿으시는지 안 믿으시는지 궁금 한 겁니다
믿어요. 무엇인가를 위하여 버린다면 말입니다.

 

209. 죽음
우리는 죽음을, 원래 그런 대로 굉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어요. 죽음은 축복해요 할 일 아닌가요?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211. 깨달음
깨달음 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 됩니다.

 

215. 전쟁, 살아있음의 경험
베트남전 당시의 일이 기억나는군요. 집에서 TV를 보고 있자니, 화면에, 헬리곱터 안에 있다가 전우를 구하러 가는 젊은이의 모습이 비치더군요. 글자 그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말이지요. 그 전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반드시 나가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나는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타인을 위한 자발적 행위와 똑같은 것을 보았어요.

 

사람들은 살아있음의 경험이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 그러나 나는 살아있다..... .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이 젊은이는, 전우를 위하여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217.  미로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단테의 신곡이 다루고 있는 문제도 결국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한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 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 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곳에서 길을 잃었다.’ 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3마리를 만납니다. 그런데 시적 통찰력의 화신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지옥의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가게 해 줍니다. 이 지옥의 미궁은 자만, 욕망,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으로 들어가지 못 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지복의 직관을 경험하지요.

 

222. 천복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해 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그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 하지 못합니다.

 

223. 혼인서약 - 굴대
중세의 필사본에, 여러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바퀴는 굴대가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성할 때나 아플 때나,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 나, 올라 갈 때나 내려올 때나... 나는 그대를 중심으로 맞아 들이고 그대를 천복으로 좇는다.

 

223-224. 부모가 자식에게 할일(하림이를 생각하면서)
부모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 줄 수 있습니까?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도와줄 수 있지요.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가르칠 때 나는 학생들과 적어도 2주에 한번씩 정도는 약 반시간 식 개인 면담을 하고는 했어요. 가령 학생들과 독서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노라면 학생이 보이는 반응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지요.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낮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나는 이런 가능성을 붙잡고 이 학생은 여기에 매달리게 해주어야겠구나. 이런 결심을 하고는 합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내방에서 자기 갈 길을 찾은 학생이 많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지식이란 아는 것을 누군가를 위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 때 참 지식이 된다. 교육의 정수를 말하라면 자식에게 천복을 찾아주는 일일 게다.

 

225.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든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225-226. 켐벨의 천복시절
나는 그 당시에 프로베니우스를 발견 했어요. 뉴욕 서적상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그 서적상은 내가 받은 책을 모조리 보내면서 일자리를 얻거든 갚으라는 거예요. 자그마치 4년 뒤에나 갚았지만요.
우드스톡에 아주 멋진 노인이 있었어요. 이 양반에게는 방이 아주 많은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는 이 방을 예술 공부하는 가난뱅이 학생들에게 일년에 $20 정도의 임대료로 빌려주었어요. 그런데 이 집에는 수도가 없었어요. 수도를 설비해 두면 이 집이 수도가 있는 집에 살던 학생들의 관심을 끈다는 거예요. 나는 이 집에서 기본 독서와 공부는 거의 다 했어요. 정말 멋진 시절이었죠. 나는 내 천복을 좇고 있었던 겁니다.

 

=> 이런 시절 그대는 있었던가? 아아, 그리운 천복의 시절..

 

227.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30. 죽음과 재생의 경험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 나는 이미 장례식을 통하여 중음과 재생의 경험을 하였으니 이제 다시 살아난 새로운 몸이 되었다. 영웅의 여로에 돛을 올려라!

 

231. 출산
전장에서 전사한 병사와 출산 때 죽은 어머니는 똑같이 최고 천()을 배정 받지요. 말하자면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니까요.

 

233. 
영웅의 시련, 시험, 난관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굳이 말하자면 이 사람이 정말 영웅인지 아닌지, 이 사람이 과연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여부, 정말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지 여부, 용기, 지식,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누군가가 예비해 놓은 어떤 관문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235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에게 불을 훔쳐다 주었어요. 결국 문명을 가져다 준 거지요. 그런데 불을 훔쳐오는, 말하자면 불 도둑은 대단히 보편적인 신화 테마랍니다.

 

241
우리 문화권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알면, 현대인 노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가족을 부양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은 대단히 고단합니다. 이건 정말 끝없는 소모전이죠.

 

우리 좌식 생활권 사람들에게는 지적인 흥분이 다소 있거나 있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몸은 그렇지 못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루에 얼마, 일주일에 얼마 하는 식으로 의도적으로 기계적인 운동을 하지요. 나 자신은 별로 즐기지 않지만, 하여튼 이런 현상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젠가 육체가 우리에게, "이봐, 나란 존재는 아예 잊어버리고 있군, 그래", 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고인 물이 되고 말았어, 썩겠지" 하고 말입니다.

 

242
사람들은 다시달로스 이야기보다는 이카로스 이야기를 더 많이 합니다. 문제는 이카로스가 아니라 이 우주인을 바다에 추락시킨 날개 속에 들어있는 태도인데도요. 산업이나 과학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엾은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지만,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았던 다이달로스는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 해변에 착륙하지 않았습니까?

 

246
신화적인 의미에서 그는 개혁자였어요. 비틀즈는 우리 사회가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는 음악을 만들었어요. 하여튼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완벽히 들어맞았지요. 만일 이들이 그보다 30년 전에 나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 알맞았을 겁니다. 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비틀즈는 대중 음악에다 정신적인 깊이를 더했습니다. 이것을 분위기라고 해도 좋을까요, 하여튼 명상적이고 동양 음악적인 분위기를 더한 거지요. 동양 음악은 수십 년 전에 이미 미국으로 건너와 있었습니다만, 그저 호기심의 대상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비틀즈 이후에 와서야 우리 젊은이들은 그게 뭔지 냄샌들 맡았던 거죠. 지금에 와서는 심심찮게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결국 이제는 이런 음악이 명상의 보조 수단이라는 그 원래의 의도에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비틀즈가 얻은 명성은 여기에서 출발 합니다.

 

247. 오디세우스의 모험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간단하게 말해 버리기에는 좀 복잡한 데가 있어요. 하지만 약간 설명을 해야 되겠군요. 배가 파선된 곳은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입니다. 태양의 섬 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섬, 광명이 섬입니다. 만일 배가 파선되지 않았다면 오디세우스는 그 섬에 눌러 앉아 요가 행자와 비슷한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로써 깨달음을 얻고 천복을 누리면서 그곳에서 살았지, 인간 세상으로는 돌아 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것은 드러내 삶에 유용하게 한다는 그리스인들의 정신은 결국 오디세우스를 돌아 오게 합니다. 태양신의 섬에는 금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태양신 헬리오스의 황소를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하도 굶주린 참이라 태양신 황소를 한 마리 잡아 구워 먹어 버립니다. 이래서 배가 파선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영적인 빛의 신이 사는 이 섬에도 인간의 비천한 의식은 그런 식으로 기능 했던 겁니다. 광명이라는 존재 앞에서 , 쇠고기  샌드위치 나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고방식, 이게 얼마나 참람한 겁니까? 그 광명을 내적으로 체험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그것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나, 읽을 능력이 없었던 겁니다. 이 이야기는 지상의 영웅이 최상의 광명을 획득하기 직전에 좌절한 채 지상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의 전형과 같은 겁니다.

 

248. 목숨에서 새 생명이 비롯된다
광명에 아들이 아닌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하랴! 인간은 꿈 같이 덧없는 존재. 그러나 하늘의 선물인 태양이 비치면, 광명한 일광이 머무르면, 아 아름다워라!

 

많은 영웅이 목숨을 내어놓지요. 그러나 신화는 내어놓는 목숨에서 새 생명이 비롯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영웅의 목숨이 아니라, 새 생명, 새로운 존재, 혹은 육화(肉化)의 길일 겁니다.

 

모세는 영웅의 이미지 입니다. 모세는 산으로 올라가 꼭대기에서 야훼를 만나고는,  사회를 모양 짓는데 필요한 법을 가지고 내려 옵니다. 출발 성취 귀환...., 이것이 영웅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적이지요.

 

253.
십자가 이야기는 물론 영원성이 시공의 마당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시공의 마당에서 영생의 마당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유한한 지상적 육신을 십자가에 달아 갈갈이 찢기게 하고, 이 찢김을 통하여 지상의 고통을 초월해 있는 영적인 곳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십자가 중에는 승리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십자가도 있어요. 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예수, 피를 흘리고 있는 예수가 아니라, 흡사 자진해서 십자가까지 온 사람 모양으로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뜨고 있는 예수랍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는 신부를 맞으러 가는 신랑처럼 십자가로 걸어갔다고 어디에선가 쓰고 있어요.

 

255.  인간 내면의 탐색
우리의 본 모습은 우리 내면의 있는데, 이 내면에 대한 탐색이 바로 내가 40년 전에 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담으려고 했던 주제 입니다. 내가 그 책을 쓴 40년 전에 견주면 지금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적인 삶의 양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따라서 잠깐만이라도 이 세상의 기원 신화는 접어두고, 인간의 내면 탐색에 관한 신화로 되돌아가 깨달음의 단계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어떤 시련을 경험하게 되는지, 어른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읽어보세요. 이야기는 우리 곁에 없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있어요. 종교에 있어요.

 

257-258. 켐벨이 살아야 하는 이유
여기 있는 나는 80을 헤아립니다. 그런데도 나는 몇 권은 족히 될 책을 쓰고 있어요. 이 일을 마칠 때까지 살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런 아이가 부러워요. 내게는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거에요.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이 없다면 죽는 거야 언제 죽어도 좋아요.

 

260-261. 플라톤의 영혼의 원
플라톤은 어느 책에선가 영혼은 원 같다고 했어요. 나는 이 플라톤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칠판에다가 원을 하나 그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원에다가 가로선을 하나 긋지요. 그러면 이 선의 위는 의식 아래는 무의식이 됩니다. 담에는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나오는 곳을 표시 합니다. 즉 가로선 밑에 점을 하나 찍는데 이점은 조금 전에 그린 원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아기에게는 그 조그만 몸에서 나오지 않는 의도라고는 없어요. 말하자면 아기의 몸은 제 모든 의도를 뿜어내죠. 그래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기의 삶은 생명의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런데 아기가 자라남에 따라 마음이 모양을 갖추어 나갑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이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가? 이런 식으로 마음이 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원 속의 가로선 위에는 자아가 있어요. 나는 이 자아를 조그마한 사각형으로 표시하지요. 이 자아는 우리가 중심과 동일시하는 의식의 한 측면이에요. 하지만 보세요. 자아가 우리 중심은 아니잖아요. 자아를 나타내는 사각형 원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나타내는 점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지 않아요.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주도권을 행사는 줄) 알지만 아니에요.

 

그럼 무엇이 이 쇼를 연출합니까
무엇이 쇼를 연출하는가 하는 것은 바로 선 아래에서, 즉 무엇이 솟아오르느냐에 달려 있어요. 나를 이렇게 충동질하는 이게 대체 무엇일까?

 

=> 나의 중심, 그 광막한 나의 무의식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이것이 문제로다.

 

263. 좋은 스승 실마리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 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 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이런 말을 들려줄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어울리는 바퀴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265.

스타워즈를 보면 마지막의 싸움이 벌어지는 절정에서 스카이워커의 귀에, “컴퓨터를 끄고, 기계를 끄고 너의 느낌에 따라 너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라는 벤 케노비의 음성이 들리지요? 스카이워커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결국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266. 생명의 에너지

스타워즈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어요. 젊은이 사이에서 통하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겁니다. 이건 중요해요. 너는 가슴으로 사는 사람, 인간성을 섬기는 사람이겠느냐, 아니면 음험한 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이겠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물론 가슴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하지요. 생명이 있는 곳은 가슴이니까요. 벤 케노비가 포스가 너와 함께 할 지어다라고 말할 때 그가 말하는 포스는 프로그램된 정치적 힘이 아니라, 우리 생명의 힘, 생명의 에너지입니다.

 

269. 요나 이야기

소화 작용이 일어나는 곳, 즉 새로운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뱃속은 어두운 곳이에요. 고개 뱃속에 들어가는 요나 이야기는 세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신화 테마의 본 같은 겁니다. 물고기가 삼키는 바람에 영웅이 물고기의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들어갈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말해서 변한 모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세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어요.

왜 영웅은 이런 걸 경험해야 합니까?

어둠(저승)으로 내려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고래는 우리의 무의식에 갇혀있는 생명의 힘을 상징합니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물은 무의식이고, 수생동물은 생명, 혹은 무의식의 에너지입니다. 고개가 나타났다는 상황은 이 무의식이 의식을 압도하고 힘을 얻은 상태를 만들지요. , 이때부터는 무의식이 의식을 극복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요나 이야기 같은 유형의 모티프에서 고래는 영웅을 삼키지만, 영웅은 고래의 뱃속이라는 심연에서 되살아 나옵니다. , 죽음과 부활의 테마가 변형된 것이라 볼 수 있지요. 바로 여기서 의식적인 인격은 통제 불가능한 무의식적인 에너지의 충전을 받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영웅은 시련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련을 겪으면서 무서운 밤바다를 여행해야 합니다. 이 무서운 밤바다 여행에서 이 어둠의 에너지를 극복할 방법을 깨닫게 되면 마침내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지요.

 

270. 존재의 중심이 무의식에 있다

우리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요. 사고를 하기는 하되 가게를 운영하는 것처럼 사고를 해요. 하지만 의식은 우리 인간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니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드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 의식이란 우리 존재의 빙산의 일각이다. 플라톤의 원을 보더라도 존재의 중심이 무의식에 있지 않던가? 우리는 무의식의 중심에 머무는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존재의 중심에서 나오는 생명에너지로 충만한 무한한 무의식 세계의 도움을 받아 멋진 인간으로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다스 베이드 같은 인간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273. 우리 안의 용 = 자아

여행을 떠나고, 우리 심층으로 내려가고, 용을 죽이는 이 일…, 반드시 혼자 해야 합니까?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라도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 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 뿐인데도,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제물, 권력, 사상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메지요?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가르쳐 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죠. 선생님 소리 듣는 사람들이 해야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279.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286-287. 행복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됩니다. 내 식으로 말하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292.

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좋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러면, 자기 나름의 모험에서 공급되는 삶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생명은 곧 말라버려요.

 

296.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 것인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299. 우리 안의 정점(靜點)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운동 경기를 보면서 내가 조금 깨달은 게 있습니다. 정점(頂點)에 이르러 있는 선수는 내부에 정점(靜點)을 하나 지니고 있어요. 그의 움직임은 바로 이 정점(靜點)에서 생겨납니다. 움직임의 장에서 뛰고 있는 한, 선수는 제대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어요. 내 아내는 춤 꾼인데요. 내가 물어보니까 춤의 세계에도 그런 게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 안에 정점(靜點)이 있다는 건 거의 확인이 된 셈입니다. 우리는 이 정점(靜點)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300. 니르바나

니르바나는 인생이라는 소용돌이 그 안에 있는 것이지 그 밖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니르바나 상태는, 욕망이나 공포나 사회적인 인연에 쫓기면서 살지 않게 될 때, 자기 안에서 내적인 평화의 중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에서 나온 자발적인 행위, 이것이 바로 보살의 길, 말하자면 이 세상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삶인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어떤 것에 붙잡힌 상태를 벗어 납니다. 욕망, 공포, 의무 같은, 우리를 붙잡는 것에서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을 풀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301. 깨달음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의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 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303. 살아있음의 모험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서 으뜸이란 뜻이지요.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모험이라면? 살아있음의 모험이지요.

 

307. 텔레마코스가 아버지 오디세이아를 찾아서 떠남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란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것이지요.

 

311. 링감과 요니

인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궁극의 상징은, 인도 사람들이 링간이라 부르는 팔루스(男根) 상징이, 인도 사람들이 요니라고 부르는 여신의 질() 속을 뚫고 들어가 신을 생성시키는 형상입니다. 이 상징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만물이 생성되는 순간을 명상할 수 있게 됩니다.

 

337.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345.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 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347. 트리스탄과 이졸데

죽음이라니…, 이 사랑의 고통이 죽음이라면 그것도 팔자소관이지요. 죽음이라니…… , 이 사랑이 발각되었을 때 내가 받을 벌이 죽음이라면 나는 달게 받겠소. 그대가 말하는 죽음이 화염지옥에서 받게 될 영원한 벌이라고 해도 이 역시 나는 받겠소.” 어마어마한 뱃심 아닙니까?

 

트리스탄은 자신의 사랑은 죽음보다, 고통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귀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삶의 고통을 대단히 대승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지요.

 

348-349.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단테는 바로 거기에서 당대 이탈리아에서 유명했던 연애사건의 주인공이었던 파울로와 프란체스카도 만납니다. 프란체스카는 시동생인 파울로와 정분ㅇ르 맺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것이겠지요. 그런데 단테는 무슨 사회학자처럼 프란체스카에게, “ 아가, 어째서 그렇게 되었느냐? 보아라, 이 꼴이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카가 그 내력을 잠깐 이야기 하는데, 이 대목은 단테의 신곡 중에서도 명구로 꼽힙니다.

 

저와 파울로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기사 렌설럿과 귀네비어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두 주인공이 첫 입맞춤을 하는 대목을 읽다말고 저와 파울로는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러고 나서는 그 책을 한 줄도 더 이상 읽지 못했습니다.” 이 둘의 타락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지요. 죄악으로 지탄을 받아야 마땅한 이 행위가 음유시인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지탄을 받아서는 안 되는 아름다운 경험인 거지요.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간은 인생에서 고귀한 순간인 것이지요.

 

바그너는 자가 오페라 <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하나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352-353. 중세의 사랑놀음

사랑 놀음의 주도권을 쥐고 규칙을 만들고 허무는 권리가 여성에게 있었어요. 남성은 여성의 요구에 따라 놀아나는 정도의 역할 밖에는 하지 못했습니다.

만일에 한 남성이 한 여성을 바랄 경우 여성은 바로 기선을 잡아 버립니다. 여성이 자기 몸을 기꺼이 내어 놓는 걸 메르시merci(慈悲)라고 하지요. 여자가 남자에게 메르시를 베푸는 겁니다. 만일에 여자가 남자에게 메르시를 베풀어 한 주일에 한 번 꼴로 목 뒤에다 입 맞추는 걸 허용하면 그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어요. 신사적이야 한다는 것, 사랑을 수용할만한 다정한 가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욕망은 적대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이 사랑놀음을 벌인 여성의 대부분은 귀부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수용할만한 다정한 가슴은 자비를 수용할 만한 마음인 것이지요. 함께 고통 받는다는 의미지요. Passion은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하는 것이 곧 자비compassion인 것이죠. 그러니까 여성은 이 남자가 자기와 사랑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테스트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중세의 사랑놀음은 욕정의 놀음이 아닌 겁니다.

 

354-355.

오히려 음유시인들은 사랑의 경험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인간을 정제(精製)하는 힘으로, 인간을 더 높은 존재로 승화시키는 힘이라고 대놓고 찬양했다. 그들은 그 힘이 사랑을 통하여, 개인의 고뇌와 기쁨을 통하여 마음을 인간 존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가락으로 여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삶의 경험의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어요.

바로 눈과 눈의 만남인 거지요. 그래서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은 가슴을 얻는 거지요.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이 가슴을 얻는 것은, 눈이 늘 가슴을 염탐하기 때문인 거지요.

 

359.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 지는 화합의 관계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365-366. 결혼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반쪽이 다시 재회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연애하고는 아주 다르다. 연애는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 버리지만 결혼은 두 사람이 서로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고 분리된 생활을 접고 하나로써 사는 것이다. 결혼은 결국 자기와 자기의 만남이다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무엇보다 소중한 관계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진정으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부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결혼은 시련이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진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다. 바로 이 관계 속에서 남녀는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결혼에 이렇게 심오한 뜻이 있었군요. 영혼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 바로 결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자아를 죽이고 서로 맞추어 가는 수련의 과정이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다. 결혼이란 관계라는 신 앞에 드리는 자아라는 제물이란 표현이 참으로 적절하다.

 

373.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란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375.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깨닫고 있는 겁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경험들을 하지요. 즉 인간의 차원보다 훨씬 위대한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376-377.

내게는 삶의 경이에 대한 경험이 있어요. 내게는 사랑에 대한 경험이 있어요. 내게는 증오에 대한 경험도 있고, 남의 턱주가리를 부셔놓고 싶다는 악의의 경험도 있어요. 상징의 이미지화와 관련된 관점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내 마음 속에서 기능하는 서로 다른 힘들입니다. 천사나 마귀란, 나를 이끌고 인도하는 충동을 의인화한 것을 알았습니다.

 

377.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디에서 옵니까?

우주의 생명인 궁극적인 에너지에서 오지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면, “그런 에너지를 생성시키는 어떤 존재가 있기는 있구나”, 이렇게 응수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나는 왜 궁극적인 신비가 비인격적인 자연이 되면 안 되느냐고 반문하게 될 테지요.

 

380.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 궁극적인 존재를 경험하는 단계가 되면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이 허깨비로 보이게 됩니다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 하나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되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나된 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도 없고 나도 없어요. 모든 개념을 완전히 초극해 버린 나의 마음은 사라져 존재의 바탕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신의 은유적인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이 곧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라는 궁극적 신비는 세계라는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381. 
그리스도는 자기와 자기가 아버지라 부르는 이와 사실은 하나임을 깨달은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 임을 아는 삶을 살았어요우리는 자아나 욕망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자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383. 
우리가 아는 종류의 기독교인은 아닐 것이다. 명상을 통하여 고도의 영적인 신비와 만나는 은수사나 수녀들이 있는데, 예수도 아마 그런 기독교인이 될 겁니다.

 

386.

아버지의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늘려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

 

389. 
원은 전체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원은 공간적 측면뿐 아니라 시간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어딘가로 갔다가 되돌아오고는 합니다. 그렇듯 원도 항상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 옵니다. 신은 알파요 오메가요, 본원이자 종국입니다. 따라서 원은 시공의 장에서 완결된 완전성을 상징합니다.

 

394.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 보셔요. 그 한 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395.
우리 학교 마당을 내려다 보고 있으면 젊은 친구들이 두어 주일에 한 번식 잔디 깎는 기계를 몰고 나와 잔디를 깎습니다. 풀은 아마, "이런 젠장 무슨 소용이 있다고 이렇게 깎아내는 건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당연하지요. 아무리 깎아봐도 그런 풀은 줄기차게 자라니까요. 중심의 에너지가 이 풀과 같습니다. 성배 이미지. 무궁무진한 샘. 무궁무진한 근원의 이미지가 바로 이겁니다. 근원은 어떤 일이 생기든 전혀 관심 두지 않고 존재 할 것들을 생성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396.
비교종교학은 신앙체계에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 분명해 진 겁니다. , 우리는 신화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시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397.
신화와 우리 유태-기독교의 차이는, 전자의 이미저리는 약간 유머러스하다면, 후자의 이미저리는 지나치게 삼엄한 데가 있다는 것이지요. 신화의 이미지는 상징적인 겁니다. 우리는 이런 이미지와 상당한 거리를 유지해도 좋아요. 그러나 우리 종교를 보세요. 모든 것이 살풍경하고 심각해요. 가령, 야훼를 두고 농담을 할 수 있던가요?

 

398-399. 절정경험
절정경험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느 한 순간에 하는 경험입니다. 나는 절정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이게 어떤 경험인지 알았습니다. 달리기 경기 때인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기게 되어있다"는 확신을 가졌어요. ? 계주인데 내 앞을 뛰는 선수가 나에게 바통을 넘겨 주었을 때 상대편 선수는 나보다 30 야드쯤 앞서 있었어요. 그런데도 나는 이긴다고 확신 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걸 미리 알고 있었어요. 이게 나의 절정경험입니다. 그 날은 어떤 선수도 나를 이길 수 없었어요. 나와 나의 존재가 완벽하게 만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어요. 내 평생 그 날의 경기만큼 내가 완벽하게 해낸 것은 없습니다. 온몸으로 온전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경주를 끝낸 그 경험을 나는 잊을 수가 없어요.

 

399.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조이스의 말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액자에 넣어두게 하고, 처음에는 그저 바라 보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이 작품임을 느끼게 하고, 다음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 다음에는 부분과 전체, 그 담에는 전체와 각 부분과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작품이 지녀야 하는 필수적인 미학적 요인(관계의 조화 정연한 리듬)입니다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 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 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 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입니다. 이 순간을 종교 술어로 설명하자면,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지요.

 

403. 
예수는 세상에 칼을 가지고 온다고 합니다만 저는 그가 우리를 치기 위해 칼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의 칼을 자아를 절개하는 칼로 이해하는데요. 그러니까 예수는  “너 자신에게 묶여있는 자아를 잘라 자유롭게 하려고 칼을 가지고 왔다이런 뜻으로 말한 것 같은데요. 산스크리스트어로 이것을 비베카라고 합니다. 분별이라는 뜻이죠. 머리 위로 불칼을 높이 치켜든 부처 이미지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 이게 어디에 쓰이는 칼일까요? 이게 바로 분별의 칼입니다.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것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째깍, 째깍, 째깍 흐르는 시간이 영원을 가로 막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간의 장에 삽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의 장에 비치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영원의 원리입니다.

 

406.
불꽃의 고리에 둘러싸인 시바 신의 이미지가 있는데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그건 이 신이 추는 춤의 광희를 상징합니다. 시바 신의 춤, 이것이 곧 우주입니다. 시바 신의 머리에는 해골과 초승달 있습니다. 해골과 초승달은 죽음과 부활을 상징 하지요. 그는 한 손에는 째각거리는 조그만 북을 들고 있어요. 이게 바로 시간의 북입니다. 이 시간의 북이 영원으로 가는 앎을 가로 막지요. 우리는 시간에 갇힌 존재랍니다. 그러나 시바신의 다른 한 손에는 시간의 너울을 태우고 우리 마음을 영원으로 열어주는 불꽃의 있습니다.

 

409.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 질만큼 소중 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이때의 깨달음을 나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깨달음은, 이 세상에서의 영생 불사 체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410.
아름다움은 살아있음의 환희의 드러남이라 할 수 있겠지요. 순간 순간의 삶이 그런 체험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411.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를 통해야 드러납니다.

 

413.
우리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중심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궤도를 이탈 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 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413.
세상 도처에 왕국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 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414.
시는 언외의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요 괴테는 만물은 메타포라고 말했습니다. 무상한 것은 모두 은유적인 해석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고요.

 

415.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데 있는 것이지요.

 

III.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무엇보다도 조셉캠벨이란 저자의 인생이 가장 큰 매력포인트로 어필했다. 특히인생은 모험이라고 확신한다는 그는 인생에 임하는 태도와 그 인생관대로 살아간 그의 삶, 그 진정성에 나는 반했다. 열 살 소년시절에 신화를 만난 후 75년이란 생애 전부를 이 한가지 주제의 공부에 투입한 사람. 박사학위도 교수직도 다 뿌리치고 오직 자신의 천복을 좇아 우드스톡에 칩거하며 깊은 독서와 사색으로 5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오직 하고 싶은 공부에만 헌신할 수 있었던 사람. 이런 사람이 쓴 책이라면 고전이 아니 될 수 있겠는가? 삶에서 우러난 학문과 책, 이건 진짜였다!

 

삶의 요체로 바로 뛰어들기 위해서 선택한 메타포가 신화라는 것 또한 시의적절했다. 인간이라면 가장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가 자기 내면의 참 존재에 대한 것일 것이다. 영적 차원에서 진정한 자기를 찾기를 모두 목말라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욕구에 대응하여 이 책은 신화를 통해 적절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신화라는 존재의 원형, 혹은 집단무의식, 그 신비로운 이야기를 풀어서 우리 존재의 근원을 탐색한다는 시도 자체가 대단히 흥미롭고도 중요한 주제였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의 하나는 TV 대담이 책이 된 경우라 하겠다. 이건 어떤 경륜이 있는 작가도 섣불리 행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그러나 이 책은 조셉캠벨과의 교유가 8년이 넘는 빌모이어스란 저명한 저널리스트가 대담자로 나섰고, 책의 대담 내용도 조셉캠벨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그의 사후에 방영된 것이니만큼 조셉캠벨 사상의 핵심을 찌른 책으로 보인다. 다만 주고받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둔 책이라 정리가 좀 안 되어 다소 산만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어떤 대목은 그가 언급한 책들도 참고하며 스스로 정리하고 곱씹어보며 읽어야 제대로 된 독서가 되겠다.

 

빌모이어스의 장장 14페이지에 걸친 서문은 참으로 강력한 유혹이다. 그가 말한 대로 조셉캠벨이란 인간이 지닌 보물을 만인에게 잘 풀어 놓았다. 오랜 세월 저자와 함께한 삶의 중요한 순간 순간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는 자원해서 캠벨의 추종자가 되었고 스승이 평생에 걸쳐 발견한 비의, 그 진리를 저널리스트답게 노련한 인터뷰 기술로 훌륭하게 도출해 내었다. 서문이 감동적인 것은 이 두 사람 간의 인간적 교류의 체취가 진하게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전체 대담을 8개의 큰 단원으로 묶어내고, 각 단원의 첫머리에 그 단원에서 다룰 내용을 대표하는 짧은 실마리 글을 실은 점은 돋보인다. 반면에 큰 단원 아래 작은 단원으로 분류하여 소제목을 달아 주었더라면 독자들의 책 읽기에 보다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저자는 삶의 혜안이 돋보이는 주옥같은 잠언을 군데군데 많이 보여주고 있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매력이라 하겠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1.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12.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이어야 합니다.

 

21.

그렇다, 캠벨은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

 

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222. 천복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해 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그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 하지 못합니다.

 

366.

결혼은 시련이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진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다. 바로 이 관계 속에서 남녀는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살아있음의 경험이라든가, 우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라이것이 천복을 좇는 길이다. “자아를 죽이고 관계에 헌신하는 것이 바로 결혼이다와 같은 정문일침(頂門一鍼)의 일갈(一喝)들은 저자의 일생의 삶에서 우러난 가르침이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저자는 그렇게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추듯 살다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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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0 18:49:40 *.160.136.70

성서 말씀중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그렇습니다. 캠벨은 춤을 추었습니다. 신화라는 화두에 삶을 걸고 그 가락에 어울리는 가장 멋진 춤사위를 그는 보여주고 갔습니다.

모험에 인생을 걸고 그 기간과 공간에 전존재를 투입하여 살아간 인물.

그렇기에 그 진정성에 반하고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를 염원하는 것이겠지요.

 

연구원. 또다른 모험의 여정. 그 레이스를 오롯이 자신 두다리의 힘으로 페달을 밟아 나아가는 기간.

끝에 다달았을때 어떤 세계를 맛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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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4 10:40:20 *.196.54.42

서원샘, 감사합니다.

이 레이스 정말 자전거 타기랑 너무 닮았어요, 오로지 자신의 두다리 힘 만으로 가야하니까요 ㅎㅎ

목적지 보다는 과정이 문제겠죠, 달리면서 얼마나 즐길 수 있는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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